아짠 빤냐와로 스님 일상수행법문 녹취/2014~2015 일상수행법문

오가(ogha)_번뇌의 폭류 (20150611)

담마마-마까 2021. 12. 9. 09:00

https://youtu.be/BVCog13__T4

* 오가(ogha)_번뇌의 폭류 (20150611)

 

오늘은 오가(ogha)라고 하는 빨리어 단어를 가지고서 설명을 하겠습니다.

'홍수'라는 그런 뜻의 오가입니다.

인도 쪽에는 거의 강에 의지하고 살았거든. 옛날에는 강이 흐르는 그 주변에 사람들이 살고 그래서 강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강이 범람을 하면 그 주변에 살고 있는 사람들은 다 그냥 휩쓸려가 버리게 되고, 그래서 오가라고 하는 것은 '물의 흐름, 강의 흐름이 지나쳐가지고 홍수가 져버리는 것', '폭류 같이 휩쓸려 나가는 것'들을 얘기할 때 '오가'라는 단어를 씁니다.

 

그런데 실질적으로 그런 강의 홍수를 얘기하는 것이 아니고,

"마음에서 나오는 번뇌들을 걷잡을 수 없게 됐을 때" 그걸 빨리어 용어로 '오가(ogha)'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번뇌를 낄레사(kilesa), 아사와(āsava) 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 의미들을 보면 마음에서 유출된다, 흘러나온다고 하는 그런 Emt입니다. 마음에서 뭔가가 더러운 것이 흘러나오는 것! 꼭 문잡이, 손잡이 같은데 녹이 슬면은 그게 비를 맞으면 녹이 흘러나오는 것처럼, 그렇게 녹이 흘러나오는 것들을 얘기할 때 그걸 '번뇌'다 하고 얘기합니다. 그것이 마음속에서 흘러나오는 것들이 걷잡을 수가 없을 때 그럴 때 이 '오가'라는 용어를 쓰게 되는 겁니다.

 

요즘 인터넷에서 한참 떠들고 있는 메르스인가? 그 메르스라고 하는 것, 그것도 어찌 보면 이런 오가의 일종입니다. 마음에 공포감이 일어나서 그 공포감이 걷잡을 수 없게 됐을 때는 어떤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어떤 사람은 경기도에 있다가 부산이 아직 메르스에 안 걸렸으니까 부산으로 피난 온 사람들도 있어요. 그런데 부산도 또 걸렸거든. 그래서 야, 이거 어디로 가야 되나 하고 하는 걸 들을 적이 있는데.

 

부처님 당시 때도 그런 것이 있었어요. 전염병이 돌면은 전염병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은 다른 길이 없습니다. 경전에서는 "집 울타리로부터 벗어나라. 그러면은 산다" 하는 것이 있습니다. 집에 전염병이 들었으면 그 집으로부터 벗어나가지고 있어야만이 그 전염병으로부터 벗어나서 살 수가 있다 하는 그런 뜻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경기도에서 문제가 발생했으니까 그곳으로부터 벗어나면 되겠지만, 실제로는 자기 집에서 그 문제가 생긴 것은 아닌데 공포감이 그 지역을 벗어나게끔 한 거죠.

 

빨리어 경전에, 문제가 전염병이 돌았을 때 그 사람은 그 집을 벗어나가지고 숲에서 오래도록 있다가 돌아오게 됩니다. 물론 그 사람은 살았습니다. 집에 있는 다른 가족들은 다 그 전염병으로 인해서 죽게 되고, 그런데 이 사람은 가진 게 아무것도 없거든. 그러니까 어떻게 해야 돼요? 그냥 열심히 사는 수밖에 없습니다. 요즘 말로 할 거 같으면 막노동판에 가서 막일을 하고, 그리고 어디로 가서 음식들을 좀 얻어오고 이렇게 해가지고 하루하루 힘겹게 살아가게 됩니다.

그런데 그렇게 힘겹게 살아갈 동안에는 어쨌든 살아가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그렇게 살아가는데, 문제가 뭐냐면 원래 자기가 살던 집에 아버지가 그 밑에 땅에 금궤를 묻어 놨는데 그 금궤를 묻어 놓은 것을 알게 됩니다.

그때부터는 열심히 살려고 하는 마음이 딱 사라져버립니다. 그때부터는 그걸 가지고 뭔가 이용을 할려고 하고, 결국에는 그 금궤조차도 전부 뺏기게 되는 그런 결과를 낳게 됩니다.

마음에 어떤 홍수가 졌기에 이 사람은 그렇게 하나씩 마음에서 그런 흐름들을 걷잡을 수 없게 됐을까? 돈이 생기니까 어떻게 해요? 흥청망청 쓸려고 그럽니다.

 

그걸 '까마 오가(kāma ogha)'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감각적인 것에 대해서 통제할 수 없이, 그냥 감각적인 것을 따라서 쭉 가버리는 것.

일반 사람들은 그럴 수 있다고 칩시다. 그런데 수행하는 사람들은 어떠한 경우든지 감각기관들을 잘 제어를 해야 됩니다. 그걸 제어하지 못하면 공짜로 생긴 거라고 생각하면 그냥 그걸 쓰게 되는 거라. 그걸 사용을 하게 되는 거고.

보고 듣고 냄새맡고 하는 감각기관에 대한 제어하는 것이 없으면 안됩니다.

 

다른 경전에 보면 「해탈에 이르기 위한 세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첫 번째가, 감각기관에 대한 제어.

두 번째가, 먹는 음식물에 대한 조절.

세 번째가, 앉아있거나 걸어가거나 항상 그것들을 알아차리는 것.

잠잘 때를 제외하고는 어떠한 경우든지 앉아있으면 앉아있는 것, 걸어가고 있으면 걸어가는 것, 옷 입으면 옷 입는 것 모든 것들을 알아차려야 됩니다.

이 세 가지가 해탈에 이르기 위한 조건이다 하고 얘기를 합니다.

 

그마만큼 감각기관에 대한 제어는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런데 수행을 하는 사람들은 어느 정도는 감각기관에 대한 제어들은 해나갑니다. 그래서 공짜로 생긴 재산을 흥청망청 쓰는 그런 경우는 없듯이 감각기관을 있는 그대로 그냥 누리는 경우는 드뭅니다.

그런데 딱 하나 안되는 것이 뭐냐하면, 일어나는 현상들에 대해서 그것에 대한 제어들이 안 됩니다. 선정에 들었다, 그럼 그 선정의 즐거움만 자꾸 찾을려고 합니다. 수행이 어느 정도 잘된다, 그 즐거움을 자꾸 찾을려고 합니다. 또는 거기서 어떤 신통력들이 생겨났다, 그것들을 계속 쫒아가는 거라.

 

수행이 안 될 때는 열심히 노력하면 됩니다. 그런데 수행이 잘 될 때가 문제인 거라.

감각기관에 대해서 제어하지 못하듯이, 수행에서 일어나는 현상들에 대한 제어를 조절하지 못하는 거라. 물론 선정을 얻는 거 좋습니다. 그리고 신통력을 얻는 것도 좋습니다. 대상을 잘 알아차리는 것이 있다는 거라. 그런데 선정은 얻었든, 수행이 잘됐든, 신통력을 얻었든 그것이 해탈하고 관계있는 것은 아닙니다. 해탈로 가는 길일 뿐입니다.

 

그러면 선정도 제어를 하고 잘 조절을 해야 되는 거고, 신통력도 잘 제어를 하고 조절을 해야 만이 그것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피해는 없다는 거라. 잘못 조절하면 선정 자체를 해탈로 착각을 해버리는 거고, 잘못 조절하면 신통력으로 인해서 몸과 마음을 망치는 결과들을 낳습니다.

 

아이들이 어떤 장난감을 사달라고 엄마한테 조르는 걸 보면, 열심히 조르고 떼쓰고 울고불고해도 엄마가 안 사주면 그래도 그 아이는 포기를 안 합니다. 그런데 언제 포기를 하느냐면 "너 이거 사면 놀이터 안 데려가" 하고 얘기를 할 거 같으면 이 장난감에 대한 포기를 합니다. 이 장난감 가지는 것보다 지금 놀이터 가서 노는 것이 더 좋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자기가 이룬 성과보다도 더 큰 결과물이 있다는 생각을 해버리면, 그보다 더 좋은 행복이 있다는 생각을 해버릴 거 같으면, 지금 얻은 것들 그거 조절한다는 거라, 그거 별거 아니라고 딱 놓아버린다는 거라. 그것도 감각적인 것들에 대한 홍수로 인해서 일어나는 것들입니다.

자신의 수행에서 과연 내가 지금 뭔가에 만족하고 지금 잊고 있는 것은 아닌가? 또는 공부를 하면서 그냥 법문 듣고 그냥 수행 좀 하고 이러는 것에 지금 만족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뭔가 내가 지금 빼먹고 있는 것은 아닌가?

 

육근을 통해서 흐르는, 감각기관을 통해서 흐르는 집착들만 홍수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들은 반드시 그것들을 자꾸 체크를 할 줄 알아야 됩니다.

내가 여기에 만족하고 거기에 휩쓸려 들어있을 경우에는 모릅니다, 본인이! 그냥 그게 좋은 줄 알고 있는 것이지. 그런데 그것은 그 속에 휩싸여 들어가 놓으면 자신은 모를지 몰라도 자신은 죽음에 이르게 된다는 거라. 거기서 끝나버린다는 거라.

 

그다음에 두 번째 홍수가 '바와 오가(bhava ogha)'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살고자 하는 것들'입니다.

그것은 감각기관을 가지고 있고, 그것을 인식하고 있으면 누구든지 살고자 합니다. 그것은 첫 번째 까마 오가에서 오는 것들입니다. 까마 오가가 없을 거 같으면 살고자 하는 홍수에 휩싸여 들어갈 이유도 없습니다. 보고 듣고 해서 그것들에 대해서 홍수가 지나치면 '아, 내가 살고 싶다' 하는 생각 때문에 경기도로부터 벗어나서 부산으로 올려고 하는 거라. 그거는 어쩔 수 없는 거라.

 

누구든지 살아가고 싶다 하는 마음들을 가지게 되어있습니다. 그런데 경전에는 이 "살고자 하는 마음까지도 거역하라" 그렇게 얘기합니다. 홍수이기 때문에 휩싸여 들어가지 말아라. 살아있지 말아라는 것이 아니고, '살고자 하는 마음'.

수행자의 경우에는 앉아서 '내가 선정을 얻기를' 그렇지 않으면 '해탈하기를' 하는 마음을 가지고 수행을 하면 100퍼센트 실패합니다. 얻고 싶은 것이 있다고 해도 얻고자 하는 마음이 있어서 그것은 얻는 것은 아닙니다.

 

대부분 사람들한테 물어봅니다. 왜 수행할려고 그럽니까?

그럼 뭐 때문에, 뭐 때문에, 이럽니다. 그런데 대부분 보면 살고자 하는 바와 오가로 인해서 일어나는 경우가 거의 대부분입니다. 한번 여러분들 가만히 한번 보십시오. 왜 수행하는가?

그런데 자신은 모르는 거라. 그게 바와 오가에 속하는지! 살고자 하는 홍수에 휩싸여 들어가 있는지 아닌지를 모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면 수행이 100퍼센트 실패인데 어떻게 하느냐는 거라. 그러면 다른 것으로서 성취했다는 마음을 가지고 떠나버리게 됩니다.

 

감각기관을 가지고 있으면 어차피 인식하게 돼있고, 또 그것으로 인해서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면 그것은 여러분들이 신경을 써야 될 부분은 아닙니다. 단지 살아있으면 살아있도록 만들어주면 됩니다. 마음이 지금 현재의 대상에서 떠나버리면 언제든지 내가 살고자 하는 홍수에 휩싸여 들어가 버립니다.

지금 현재에 딱 머물러서 그것을 분명하게 알아차리고 있을 때 그때만이 살고자 하는 홍수로부터 벗어날 수가 있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본인은 집착을 하게 됩니다. 살고자 하는 것들에 대해서!

그래서 살고자 하는 것들로 인해가지고 본인도 모르게 '나'라고 하는 것들을 더욱더 강하게 만들어주게 됩니다. 집착하고 '나'라고 하는 것들을 끊을 수 있는 방법은 지금 현재를 분명하게 알아차리는 것밖에 없습니다. 그게 '살아있다'고 하는 겁니다.

여러분들은 살고자 하는 홍수에 빠지지 않도록 해야 됩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부처님 당시 때 그 젊은이가 흥청망청 물건을 쓰지 않았으면은 다른 사람에게 본인이 그렇게 흥청망청 쓰고 있는 저 돈이 어디서 생겼을까 하는 의문들을 가지지 않게 됩니다. 그러면은 그 돈을 다른 사람들에게 뺏기는 일도 일어나지를 않게 됩니다. 그래서 도둑으로 몰려서 죽음의 위기에 들어서 삶을 버려야 되는 위기에까지 오지는 않는다는 거라.

 

지금 현재 일어난 것들을 분명하게 알아차릴려면, 감각기관에서 일어나는 것들을 분명하게 알아차리는 수밖에 없습니다.

감각기관을 통해서 일어나는 것들을, 들리면 들린다고 분명하게 알아차리고, 맛보면 맛본다고 분명하게 알아차리고, 그것을 앉아있을 때든 걸어갈 때든 언제든지 그렇게 알아차려나가야 됩니다.

 

그게 바로 해탈에 이르는 세 가지 전제 조건이라고 하는 것들입니다.

감각기관에 대해서 조절하게 되는 거고, 그리고 먹는 것에 대해서 분명하게 조절해야 되는 거고, 그리고 앉고 걷고 하는 것에 모든 것을 알아차려야 되는 것이고, 그 모든 것들은 감각기관과 관계있습니다.

"감각기관에 대해서 반드시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라." 그래서 그것들에 대해서 좋아하고 싫어함이 없이 집착하고 밀쳐냄이 없이 그냥 있는 그대로 자꾸 알아차릴려고 해야 됩니다.

 

그다음에 세 번째 '딧티 오가(diṭṭhi ogha)'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견해에 대한 홍수.

살아있으면 인식을 하게 돼있습니다. 그런데 그 인식하는 것은 자신의 견해인 것이지 다른 것들의 견해가 아닙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꾸 자신의 견해가 다른 사람의 견해와 동일하다고 자꾸 생각을 합니다. '내가 이렇게 생각을 했으면 다른 사람도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생각합니다.

그거는 어떤 경우든지 그렇게 될 수가 없습니다. 각각의 상황에 따라서 인식하는 것은 다 다릅니다. 꽃냄새를 맡아도 내가 꽃냄새를 아는 것과 다른 사람이 아는 것과는 다르고, 또 다른 동물들이 꽃냄새를 맡는 것이 다 다릅니다. 맛보는 것도 마찬가지고 다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꾸 동일하게 생각을 할려고 그럽니다.

그렇게 동일하다고 생각을 할 거 같으면 그것은 잘못 판단하게 됩니다.

그래서 "세상의 모든 견해는 각각 다 다르다" 하고 생각을 하고, 그것들을 인정을 할려고 해야만이 이 견해의 홍수에 빠지지 않습니다.

 

그다음에 수행하는 사람들과 불교를 믿는 사람들은 사악한 견해에 빠지지 않는 것이 견해에 대한 홍수에 빠지지 않는 겁니다.

실제 수행과 관계없는 것들에 붙잡히는 것, 그것이 사악한 견해들입니다.

지금 내가 논쟁하고 있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 지금 내가 알려고 하는 것들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느냐 하는 겁니다. 사악한 견해라는 것은 그런 것입니다. "해탈에 이르게 하지 못하는 견해는 사악한 견해"라고 생각을 하면 됩니다. 그래서 그 홍수에 빠져서는 안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바른 것들을 찾아가지고 만날 견해를 내세우다가 시간을 다 보내버리게 됩니다.

'젊었을 때 열심히 일해가지고 나중에 공부해야지' 나중에 돼서는 공부할 힘이 없습니다. 그거와 꼭 마찬가집니다. 그래서 세상적인 견해에도 홍수가 지지 않도록 해야 되듯이, 불교적인 견해에도 사악한 견해를 지니지 않도록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그다음에 네 번째 '아윗자 오가(avijjā ogha)' 무명(無明)의 홍수, 그렇게 얘기합니다.

이것은 여러분들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몸을 받아 태어났으면 어리석음을 지니고 있습니다. 사실을 있는 그대로 알지 못하게 될 때 어리석음에 빠지게 됩니다. 감각적인 것들에 대해서 얽매여버리고 집착하게 될 때 어리석어져 버립니다. 지금 현재를 알아차리지 못하고 살아갈 때 어리석음에 빠지게 됩니다. 이것이 해탈에 이르는 것인지 아닌지도 모르고 그것들에 대한 견해를 내세우게 될 때 어리석음에 빠지게 됩니다.

이런 앞에 세 가지들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지 못할 때 어리석음에 빠지게 됩니다. 그래서 그 "어리석음의 홍수를 반드시 탈출해라" 그렇게 얘기합니다.

 

이게 네 가지 오가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이 네 가지 오가가 윤회의 고리를 만들어주는 거고, 계속적으로 윤회하게끔 만들어주는 것들입니다. 본인이 지금 어느 고리에 빠져서, 어느 홍수에 빠져있는지는 본인이 자꾸 알아야 됩니다.

아, 내가 성향이 감각적인 것이 자꾸 빠져있다. 아, 내가 지금 여기 홍수에 빠져있구나 하고 생각하고 그 홍수로부터 빨리 벗어날려고 해야 됩니다.

 

그것으로부터 벗어났을 때를 '-가 소-'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 홍수로부터 벗어나서 '소-따(sotā)' '깨달음의 흐름에 들어버리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감각적인 것에 대한 홍수로부터 벗어나도 '오-가 소-따'에 드는 거고, 견해에 대한 것들에서 벗어나도 마찬가지고, 네 가지로부터 어느 것 하나로부터라도 벗어나게 될 때 '오-가 소-따'가 되는 것입니다. 깨달음의 흐름에 들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본인이 빠져있는 것들을 분명하게 알아차려서 그것들을 인식해서,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도록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이게 네 가지 오가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가끔 그런 생각들을 합니다. 우리도 선원의 자리를 구한다고 열심히 노력들을 합니다. 그런데 그때마다 스님이 조금 의문을 가지는 게 뭐냐면, 저거 저런다고 하다가 저기에 그냥 폭 빠져버릴 게 아닌가? 쉽게 말하면 누군가가 집을 하나 장만하면 그 장만한 집을 가지고 꾸미기에 바쁩니다. 뭐도 사들여 놓아야 되고, 뭐도 해야 되고, 그러다 보면 한세월 가버리는 거라. 장만하는 것은 좋았는데 장만하고 나서 거기에 빠져버리는 거라. 그래서 그게 조금 염려되는 부분입니다.

 

여러분들도 수행뿐 아니라 일상생활에서도 거기에 홍수가 져버리면 안됩니다.

지나치게 그것들에 대해서 탐닉을 하게 될 때, 거기에 집착을 하게 될 때는 거기에 빠져버리게 됩니다. 홍수에 휩쓸려버리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선원을 마련하고 수행을 하는 곳들을 생각을 할 때도, 이것으로 인해서 내가 여기에 빠져버리는 부분은 아닌가 하는 것들을 잘 판단을 해서 그렇게 할 수 있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네 가지 홍수 그걸 보통 「격류」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격류는 빠져버리면 그 속에서 벗어나기가 참으로 힘들어져 버립니다. 그래서 빠지기 전에 그것들을 분명하게 알아차릴려고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자!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