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악한 마음보다는 선한 마음으로 (20150627. 토요수행법회)
··· 그게 지금 현재 지구상에서 가장 큰 불상을 제작하고 있거든. 그전에 가장 큰 불상이 뭐였느냐면 밤얀 불상 혹시 알아요? 아프가니스탄에 탈레반인가 누구인가 회교도들이 그 불상을 파괴했잖아. 몰라요? 전 세계에서 가장 큰 불상이었어요. 그게 아마 한 200미터 정도의 높이였으니까. 입불이었거든. 서 있는 부처님. 바미얀 불상이라고, 너는 바미얀 불상 아나? 모르나? (수행자 대답 : 예) 바보들만 모아놓고 지금, 바미얀 불상을 어떻게 모르냐? 그게 가장 큰 불상이었어요.
그런데 아프가니스탄 탈레반하고 미국하고 전쟁하고 이렇게 하면서 탈레반 애들이 그 불상이 있는 쪽에서 근거지를 가지고 있었는데, "우상이다" 해가지고 그 불상을 파괴를 해버렸어요. 벌써 한 10년 너머 됐죠? 완전히 다이너마이트로 해서 불상을 파괴해버렸어요. 전 세계에서 그걸 보고 굉장히 분노를 했거든, 불교도들이.
그 영향이 세계적으로 참 많습니다. 나쁜 것은 제외하고, 나쁜 것은 버마에서도 그런 적이 있었요. 회교도들 몰아내야 된다 해가지고 이민 온 사람이고 뭐고 죽이기도 하고 파괴하기도 하고 내몰고 했는데, 그래도 그런 얘기보다는 좋은 얘기를 해줘야지.
스리랑카에 보면 조금 전에 얘기한 꾸루네갈라 라고 하는 데도 꼭 마찬가지였어요. 그 바미얀 불상이 파괴됐다는 소식을 듣고 이 꾸루네갈라에 있는 사람들이 스님한테 찾아가가지고 스리랑카에도 회교도들이 있으니까 "회교도들을 다 쫒아냅시다. 그 불상을 파괴했으니까, 다 쫒아냅시다. 그리교 회교사원을 우리도 파괴합시다." 하고 얘기를 하게 되니까, 그 꾸루네갈라에 있던 지금 현재는 '라만냐니까야' 라고 하는 종파가 있는데 그 종파에 지금 현재 종정스님이라. 그 종정스님이 그 마을 주민들한테 뭐라고 말하느냐면 "파괴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우리가 불상 하나를 더 만드는 게 더 안 났겠나?" 하고 얘기합니다.
파괴하려면 어떤 마음이 들어야 돼요? 악한 마음이 들어야 파괴를 합니다. 남을 해치고자 하는 마음들, 이런 마음들이 있어야 만이 파괴를 하게 됩니다. 그러니까 스님 입장에서는 불교도들이 나쁜 마음을 가지는 것을 도저히 볼 수가 없는 거라. 그래서 그 마음을 일으키는 것보다 차라리 더 좋은 마음 선한 마음을 일으키는 것이 안 낫겠나 싶어서 이 마을 최고 높은 산에 보면 큰 바위가 하나 있는데 "그 바위에다 차라리 우리가 불상을 하나 만드는 게 안 낫겠나" 그냥 지나가는 소리로, 그것을 막 부수자고 얘기하는 사람들을 진정시키기 위해서 그렇게 얘기했어요.
그래가지고 스님이 그렇게 얘기하니까 그 마을 사람들이 그 마을 주위에 있는 회교도들을 몰아내고 부수고 하지는 못하겠고, 그래가지고 다시 마을로 돌아갔어요. 그런데 가만히 자기들도 생각해보니까 그것도 참 괜찮을 거 같다 싶은 거라. 그래가지고 마을 사람들끼리 "우리가 저 바위산에다가 불상을 하나 만들자. 하나 조각을 하자" 하고 마음을 먹었다고 그럽니다.
스리랑카에는 참 좋은 게 뭐냐면 매주 일요일이 되면 학교 학생들이 전부 다 절로 가야 돼요. 담마스쿨이라 해가지고 일주일에 한번씩은 꼭 가야 되는데, 그게 수업이라는 거라. 수업일수에 들어가게 돼있어요. 교과목에 다 들어가 있거든. 그래서 매주 일요일에 가서 조금 전에 여러분들이 했듯이 "붓당 사라낭 갓차미" 해쌌고 이러고 있어야 돼. 그거 하고 나서 조그만 꼬맹이들이 무슨 명상을 할 거라? 명상이고 뭐고 할 거 없이 그냥 저들끼리 뛰놀고 놀다가 시간 땡 하면 쫒아나가서 집에 가고, 나가서 놀기도 바쁜데, 그리해도 매주 한번은 꼭 집에서 가까운 절에 가서 담마스쿨을 해야 됩니다.
어느날 이 꼬맹이들이 그 주지스님한테 가가지고 보시를 합니다. 몇명이 대표로 와가지고 그때 돈으로 아마 천루피인가? 그때 신문에 났던게 천루피가 아마 조금 넘었던 거 같애. 천루피가 우리 돈으로 얼마냐 하면 한 2만원 정도 될까? 애들이 코묻은 돈을 다 모아가지고 천이백루피인가 하여튼 천육백루피는 좀 넘었던 걸로 기억해. 그걸 주지스님 손에 쥐어주면서 "스님, 이것 가지고 불상 만드세요" 이렇게 하는 거라.
그 천루피 가지고 저 큰 산에 불상을 어떻게 만들거야? 그런데 그게 시작이 되는 거라. 불상 만드는데. 꾸루네갈라에 지금 앉아서 선정에 든 부처님인데 높이가 175m로 굉장히 큰 부처님입니다. 그래서 그 부처님은 그 꾸루네갈라 지방에서는 다 보여. 그래서 지금 현재 스리랑카에 새로운 관광명소가 되다시피 했는데, 그 천이백루피인가 되는 것이 사실은 시작이 됩니다.
그전에 그 주지스님이 얘기한 것은 그냥 마을 사람들 악한 마음을 잠재워주기 위해서 차라리 그거 부수지 말고 불상을 하나 만드는 게 안 낫겠나 하고 얘기한 것이고, 그러고 나서 그 주지스님도 잊어버렸던 거고. 그런데 애들은 어른들이 하는 소리를 듣고 마음을 낸 거라. "아, 우리 불상 만들자." 해가지고 그 돈을 모아서 갖다 줍니다.
그러다 보니까 점점 사람들이 불상을 만들어야 되겠다 하는 선한 마음들이 더 일어나가지고 결국은 지금은 거의 완성이 다 됐습니다.
그래서 전 세계에서 바미얀 불상이 부서지고 나서 사실은 각각의 나라에서 분한 마음들은 많이 냈는데, 실제로 이루어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 불상을 다시 복원한다고 계획만 거창하게 했는데 복원 아무것도 못했고 어떤 식으로도 실행이 안 됐는데 딱 하나 실행이 된 게 지금 그 꾸루네갈라에 있는 불상입니다. 그래서 지금은 바미얀 불상보다도 오히려 훨씬 더 훌륭한 선정삼매에 든 부처님 모습을 거기 가서 볼 수 있게 됐는데,
왜 이 얘기를 꺼냈느냐 하면 악한 마음을 품는 것보다는 선한 마음을 가지는 것이 훨씬 더 뛰어나다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여러분들 경전에 보면 '향기 도둑'이라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 얘기를 아마 많이 들어보았을 거라.
어느 스님이 꽃이 피어있으니까 꽃향기가 좋으니까 가서 냄새를 맡고 '음, 냄새좋다' 하고 이러고 있거든. 그때 천신이 여신이었는데 여신이 그 스님한테 이럽니다. "이 도둑놈아!" 그럽니다. 그 스님한테 "왜 향기를 도둑질 하느냐?" 실제로 꽃을 꺽지도 않았고 아무것도 도둑질한 것이 없는데 그 여신은 그 스님한테 도둑놈이라고 그러는 거라.
세속적으로 봤을 때는 전혀 문제가 될 것이 없습니다. 그 냄새가 있는 거니까 냄새를 맡는 건데, 불교적으로는 그게 도둑질에 해당이 되는 거라. 왜 그럴까?
향기 맡을 때 좋은 거 맡을려는 마음이 일어난다는 거라. 또는 싫은 마음들이 일어난다는 거라. 좋고 싫은 마음들이 일어났을 경우에는 그거는 악한 마음이라는 거라. 악한 마음이 일어나버려가지고 그 향기를 맡아서 내가 거기 취해있을 거 같으면 그건 도둑질이 돼버리는 거라.
세상 사람들은 그게 전혀 문제가 안됩니다. 그런데 그 스님 옆에 누군가가 일반 재가자들이 들어가서 향기도 나고 꽃도 예쁘고 하니까 꽃을 딱딱 꺽거든. 꺽어가지고 가져 갈라고.
그러니까 이 스님 입장에서는 저 꽃을 맘대로 꺽는 사람은 이 여신이야. 도둑놈이라고 소리 안 하고 나는 겨우 향기 맡는데 왜 나한테 도둑놈이라고 그러느냐는 그렇게 얘기합니다. 왜 그랬을까? 여러분들도 아마 그럴 거라. 밖에 어디 놀러 나가가지고 좋은 꽃이 있으면 그냥 꺽어와가지고 자기 혼자 맡을려고 집에 와서 화병에 꽂아두기도 할 거라.
경전에는 뭐라고 비유를 해놓느냐면 밖에 진흙탕에서 뛰놀던 아이를 엄마가 치맛자락으로 닦아주고 보듬어가지고 그 흙을 털어내고 나면 그 치마에는 진흙이 잔뜩 묻어있습니다.
번뇌에 물들어 가지고 스스로 악한 마음이 수시로 자꾸 일어나는 사람한테, "그거 나쁜 거다" 하고 얘기해도 그게 나쁜 건 줄을 모르는 거라.
여러분들의 마음이 만약에 악한 마음이 계속 많이 일어났다고 할 것 같으면, 그 향기 하나 훔치는 거라 하더라도, "그거 나쁜 거야" 하더라도 '그게 왜 나빠?' 이렇게 생각해버린다는 거라.
그런데 마음이 깨끗해 있고 또 그래도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를려고 하는 출가자들이라든지 아니면 여러분들 같이 수행하는 사람들이라고 할 것 같으면 향기를 맡음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나쁜 마음들, 악한 마음들, '아, 이거 경계해야 된다'는 생각은 일으킬 수가 있다는 거라.
그런데 번뇌에 물들어져 있으면 그거 아무리 여신이 가서 "그거 도둑질이야" 하더라도, 그걸 도둑질이라고 생각해가지고 '아, 다시는 내가 이걸 하지 말아야지' 하는 마음을 일으키지 않고, "왜 그래? 내가 꺽는데 네가 왜 그래?" 하면서 자기는 계속 꺽어가지고 간다는 거라.
자신의 마음을 지키는 구명복과 같은 히리(hiri), 악한 일을 했을 때 부끄러워하는 마음들을 일으키지 못하는 거라. 여러분은 적어도 그런 히리는 있지? 나쁜 일을 했을 때 '아, 내가 나쁜일 했다' 하는 마음은 가져야 되는 거라. 그런 마음도 없으면 진흙 잔뜩 묻은 치마 입은 아낙네와 마찬가지라는 거라. 그거 그냥 하기 바쁜 거라. 번뇌에 물들든 말든.
수행을 해야 되는 여러분들 입장에서는 항상 경계해야 되는 것들입니다.
내 마음이 악에 물들어 있는가? 그렇지 않고 선한 마음을 일으키고 있는가?
악에 물들어 있어 갖고 그게 수행이 되겠어? 악에 물들어버리면 대상을 알아차릴 때도 움켜쥘려고 하고, 그거 그냥 안 하고 밀쳐낼려고 하게 되는 거라. 어떤 경우에든지 대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야 되는 것이지, 움켜쥐고 밀쳐내고 해가지고는 그 대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릴 수가 없습니다. 마음이 악한 마음이 아니라 선한 마음이 일어났을 때 그 선한 마음들이 대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게 해줍니다.
수행하기 위해서는 그래서 뭐가 먼저 우선이 돼야 해요?
조금 전에 여러분들이 했던 오계. 오계는 지킬려고 해야 됩니다.
부처님이 계를 정한 것은 아무리 나쁜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 나쁜 것으로 인해서 마음이 더러워지지 않으면 계로써 정하지 않습니다. 사소한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으로 인해서 마음이 더러워지고 나쁜 일들이 일어났을 경우에는 계율로써 딱 정합니다. 계율로 정해진 것이 원래 그렇습니다.
그래서 계율은 부처님 생애 동안에 자꾸 변해가고 또 증가되고 그렇게 해나갑니다. 왜? 그것을 범했을 경우에는 나쁜 과보를 받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여러분들이 재가자들은 평상시에 오계를 지켜라. 그런데 오계를 지키지 않으면 나쁜 결과들을 받게 된다는 거라. 그래서 계를 지켜라 하고 얘기하는 겁니다.
안 지켜도 돼. 나쁜 결과 받고 수행해도 수행 그렇게 진척이 없을려고 할 것 같으면 안 지켜도 돼. 그런데 이 길이 좋다는 마음을 일으킬 줄 알고, '아, 그래도 이 길을 따라가니까 나에게 참 좋은 도움이 되고 좋은 효과가 있다!' 하고 이해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계를 지키려고 해야 됩니다. 그래야 계의 위험성을 알고 나쁜일을 행했을 때 오는 부끄러움 '히리(hiri)'라는 것을 이해를 하게 되고, 그래서 마음에는 항상 히리, '나쁜 거 안 해야지!' 나쁜 거 저지르고 나서 '아, 내가 참 잘못했다!' 하는 걸 얘기하는 것이 아니고, '나쁜 걸 저지르지 말아야지!' 하는 그 마음을 일으킬 수가 있다는 거라.
그래서 그렇게 하다 보면 그다음에 생기는 것이 '삿다(saddhā)'라고 하는 것들입니다. '어, 내가 이렇게 하니까 맞구나!' '이 길을 계속 가야 되겠다!' 수행을 해보니까 새로운 기쁨들이 일어나고, 출세간적인 기쁨들이 일어나고, 그리고 내 마음도 많이 바뀌고, 행동하는 것들도 서서히 바뀌어나가는구나 하는 것들을 이해하게 되면 확신이 딱 들게 됩니다. 그래서 '아, 이게 맞구나' 해서 더더욱 나아갈려고 하게 됩니다.
이와 같이 히리의 마음들이 일어나서 삿다의 마음들이 일어나고, 삿다의 마음들이 일어나서 그다음에는 더욱더 여러분들이 대상을 알아차릴려고 하는 사띠(sati)의 마음들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수행할 때는 그냥 수행한다고 사띠한다고 하지만, 평상시 때는 사띠는 다 놓쳐버리는 거라. 평상시 때 다 놓쳐가지고 뭐 할려고 하는 거라.
오늘은 어쨌든 첫 시간이니까 여러분들이 수행을 먼저 하려고 하지 말고, 나쁜 일들을 저지르지 않을려고 하는 마음들을 가지려고 해야 됩니다.
그래서 마음이 항상 선한 마음을 일으킬 수 있도록.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자애의 마음을 가져야 되는 거고,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도 연민히 여길 줄 아는 마음들을 가져야 되는 것이고, 평상시 그런 마음들을 더 가지라는 거라. 그래서 마음이 항상 선한 마음을 끊임없이 일으킬 수 있도록 그렇게 하라는 거라.
특히 여기 온 분들은 병원하고 관계있는 분들입니다. 아픈 사람을 보면 그거 돈으로 보이지는 않을 거 아니라. 그런 악한 마음들이 일어나지는 않을 거 아니라. 아픈 사람들을 보면 저사람들 병을 빨리 낫게 해줄려는 마음들이 일어날 거 아니라. 병을 낫게 해줄려고 하는 그런 연민심이 일어나야만이 그 사람에게 한 번이라도 더 가서 보게 되는 거라. 그 사람의 차도를 분명하게 알고 그다음에 해야 될 일들이 결정이 되고 알게 되는 것이지, 그런 연민심이 없을 거 같으면 그냥 자기 할 일만 하게 된다는 거라. 마음을 항상 그렇게 선한 마음이 일어나도록 자꾸 만들어야 됩니다.
그러고 나면 자꾸 내가 일으키는 마음이 이렇게 좋은 결과들을 가져오는구나 하는 것들을 이해를 하게 됩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이 가는 길에 대해서 의사로서 '아, 내가 참 잘 선택했다' 하는 그런 마음들이 확신들이 일어난다는 거라. 그래서 그 길을 갔을 때 설혹 내가 또 잘못하는 것이 있어도 돌아올 수가 있는 거라.
바른 마음을 지녔을 때 그 마음이 수행으로 이끌어주게 됩니다.
자! 오늘은 여기까지만 간단하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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