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와 과에 이르기 위한 다섯 가지 (20150704)
실제로 있었던 일입니다. 부처님 당시 때 일은 아니고, 스리랑카에 보면 붓다왕사라고 하는 스리랑카 역사를 써놓은 게 있습니다.
붓다왕사는 거의 대부분이 불교역사입니다. 그 역사서를 쭉 읽다보면 '아, 이 스리랑카라는 나라가 불교를 위해서 얼마나 많은 일을 했나 하는 것, 그리고 그걸 지키기 위해서 참 부단히도 노력했구나' 하는 그런 생각을 많이 합니다.
그중에 있는 일화를 먼저 얘기를 하겠습니다.
스님 두 분이 탁발을 나갔거든. 요즘은 스리랑카가 탁발이 잘 안됩니다. 전쟁한다고 하도 타밀족하고 싱할라족하고 싸움박질한다고 저들 먹고 살기 힘드니까 스님들이 탁발을 하러 나가도 줄 게 없어. 탁발해올 게 없어. 그러니까 탁발이 참 안됐거든. 내전이 거의 이십년 넘게 했으니까.
그러다 보니까 자연스럽게 스님들이 탁발을 안 나가게 됐어요.
요즘은 그게 굳어져가지고 일부 아란냐와씨 라고 해서 아란냐에 수행하는 스님들이 일부만 탁발 나갈까, 일반적인 사원에 있는 스님들은 탁발을 나가는 게 아니고, 신도들이 절로 들어옵니다.
음식물을 가지고 절로 들어와가지고 스님들이 쭉 행렬을 지어가지고 절 경내를 한바퀴 돌 동안에 주고 그대로 스님들이 공양하는 곳으로 들어가거든.
그래서 공양하는 모습들 다 보고 나서는 법문 듣고 그렇게 집으로 돌아가고, 이런 형태들을 띠고 있는데, 그래도 요근래 이전에는 전부 다 탁발을 했었거든.
나이든 팔십 다 된 노스님 한 분하고, 조그마한 인제 갓 출가한 스님, 그 경엔 2년 지난 스님이라고 그래요. 비구계를 받은지 2년 된 스님 하나 하고 둘이서 탁발을 나갔거든.
대부분은 부처님 당시 때부터 해가지고 탁발을 하고 나면 가지고 와서 항상 자신이 먹는 장소가 있습니다. 나무 아래면 나무 아래에 가서 항상 그자리에 가서 놔놨다가 때가 되면 먹고, 그렇지 않으면 자기가 머물고 있는 거주처에 와가지고 놔놨다가 다른 스님들하고 같이 먹든지 아니면 혼자 먹든지 그렇게 해가지고 공양을 합니다.
그러니까 공양을 먹을 때는 항상 일정한 장소가 있는데 이날은 이 노스님이 너무 배가 고팠던 모양이라. 탁발을 받자마자 돌아서가지고 골목에 쪼그리고 앉아가지고 그 밥을 먹고 있거든. 그러니까 2년 된 젊은 스님 입장에서 보니까 참 기가 찬거야. 걸신 들린 것도 아니고, 그걸 좀 못 참고 거기서 쪼그려 앉아갖고 먹고 있다는 걸 보니까. 그래서 그 노스님한테 뭐라고 합니다.
스님, 꼴사납게 거기서 왜 잡숫고 있습니까? 어른스럽지 못하게 체통있지 못하게 왜 거기서 잡숫습니까? 그러면서 노스님을 좀 책망을 했던 모양이라.
책망을 하든 말든 간에 노스님은 공양을 다 잡숫고 나서 빈 바리때를 들고 다시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갑니다. 가면서도 이 젊은 스님은 투덜투덜 투덜댔던 모양이라.
그렇게 가다가 이 스님이 걸음을 탁 멈춥니다. 그러면서 이 젊은 스님한테 물어봅니다. “너 수행 얼마나 했노?”하고 물어봅니다. 그러니까 이 젊은 스님은 나는 삼매도 들 줄 알고, 어느 정도 도와 과에 이르지는 못해도 지혜는 어느 정도 개발이 되고 일어나고 사라지고 하는 현상도 알고 그래서 적어도 나는 쭐라소따빤나, 수다원 바로 입구에는 이르렀다. 하고 얘기를 합니다.
그러니까 그 노스님이 “그래 니 참 잘했다. 2년 됐는데 그래도 그만큼 했으면 참 잘했네.” 그러고 나서 뒤에 하는 얘기가 뭐라 하느냐면 “야, 니 수행 그만해도 된다.” 그렇게 얘기하는 거라.
아직 수다원에도 이르지 못했는데, 아직 아라한까지는 한참 남았는데, 왜 그만해도 된다 했을까? 젊은 스님이 왜요? 아직 도와 과에 이르지도 못했는데, 열반을 체험하지도 못했는데 왜 그만해도 된다고 합니까?
“너는 인제 더 이상 쎄가빠지게 해봐야 더 이상 성과가 없다” 하고 얘기하는 거라.
그때 이 젊은 스님이 더럭 겁이 납니다. 어? 저 스님이 왜 저렇게 얘길 할까?
왜 그랬을까? 왜 수행해도 진척이 없다고 했을까?
(수행자 대답 : 죄와 형식에 너무 얽매이는 거 아닙니까?)
(수행자 대답 : 스님을 원망하는 마음이 계속 커가지고...)
원망하는 것이 아니고, 스님을 비난한 것! 직접적으로 스님을 비난한 것.
그 스님이 아라한이었는데 아라한을 비난한 것이지.
자신은 아라한인 줄은 몰랐다고 하더라도 비난한 것은 사실이라는 거라. 알든 모르든 간에 아라한을 비난한 것은 사실이라는 거라.
그거 비난했으면 어떻게 해요? 그 과보를 받아야 되기 때문에, 그 과보를 받든지 아니면 자기가 참회를 하든지 이런 형식이 이루어져야만이 그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는데, 이 젊은 스님은 그걸 몰랐던 거라. 그러니까 이 스님이 그걸 깨우쳐주게 됩니다.
수행을 하기 전에 항상 여러분들도 명심해야 되는 것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잘한 일이 있든 잘못한 일이 있든 간에 항상 수행할 때 자리를 딱 먼저 잡으면 "아, 내가 잘못한 것들이 있으면 붓다·담마·상가에 참회를 합니다. 그 참회로 해서 다시는 그런 잘못을 저지르지 않겠습니다." 하는 그런 마음들을 딱 가져야 되는 거라.
만약에 예를 들어서 여러분들이 그런 성인들을 자신도 모르게 비난했다고 할 것 같으면 여러분들도 앞으로 수행 안 해도 되는 거라. 더 이상 올라갈 수가 없으니까.
수행을 시작해야 되는 사람들이 항상 명심해야 되는 것이 있습니다.
경에서는 그걸 뭐라고 하느냐면,
「도와 과에 이르기 위해서 필요한 다섯 가지」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 그중에 첫 번째가 자신의 계행에 대해서 돌아보고 잘못한 것이 있으면 그것들을 반드시 참회하도록 하는 거라.
계행 다 지키고 사는 사람들은 참 드물다는 거라. 특히 오계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오계의 영역에 속하는 것들, 그냥 멋모르고 남한테 나쁜말 하고 하는 것들은 틀림없이 있게 된다는 거라. 그래서 그런 것들은 항상 수행 전에 딱 앉으면 마음을 고요하고 깨끗하게 하고 나서는 항상 참회하는 마음을 가지라.
그다음에 두 번째가, 뭐냐하면 담마빠다에 보면 그런 게 있습니다.
깨달음을 이뤄가지고 다시는 그 이하의 상태로 떨어지지 않기 위해서 필요한 것들.
예를 들어서 내가 일어나고 사라지고 하는 현상을 분명하게 봤다 그러면 그 이하로는 떨어지지 않게끔, 또는 모든 현상들에 대해서 항상 고요한 마음들을 지니는 지혜를 얻었다, 그러면 다시는 그 이하로는 떨어지지 않게끔 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들이 있다 하고 얘기합니다.
첫 번째가 "담마에 대한 이해" 정확하게 명칭을 "담마라모(Dhammārāmo)" 그렇게 얘기합니다.
아라마(ārāma) 라고 알죠? 아라마! 사원을 얘기할 때 아라마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위하라, 아라마 그렇게 얘기합니다.
'위하라(vihāra)'라는 용어는 상당히 큰 사원들, 많은 스님들이 존재할 때는 '위하라(vihāra)'라는 용어를 쓰고, 혼자 지내는 곳이거나 아니면 작은 사원일 때는 '아라마(ārāma)'라는 용어를 씁니다.
그래서 '담마 아라마(Dhamma ārāma)'를 합성해가지고 '담마라마(Dhammārāma)' 그렇게 얘기를 합니다.
"법이 거주하는 상태! 법이 자신의 마음에 거주하는 상태가 되도록 하라" 그렇게 얘기합니다.
수행은 사마타 수행과 위빳사나 수행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수행할려고 하는 마음들을 항상 가지고 있는 사람들, 그게 사마타 수행이든 위빳사나 수행이든. 그래서 어떤 것이든 대상을 알아차리려고 그러고, 아니면 고요하게 머물려고 하고, 이런 마음들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그 사람에게는 법이 거주하고 있는 겁니다. 법이 거주하고 있는 상태라. 그걸 '담마라마'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항상 알아차릴려고 합니까?
어쨌든 수다원에 이르렀든 아니면 상카루빽카 냐나에 이르렀든 그 이하로 떨어지지 않을려고 할 것 같으면 적어도, 항상 사마타 수행을 하든 위빳사나 수행을 하든 그것을 잊어버려서는 안 된다는 거라.
항상 사띠를 해라는 것이 아니고, 그마만큼 좋은 거는 없겠지만, 사띠가 안 된다고 하더라도 그걸 잊어버리지 않을려고 거기에 거주할려고 자꾸 해야 되는 것이지 집 밖으로 자꾸 나와가지고 엉뚱한데 자꾸 돌아다닐려고 할 거 같으면 안 된다는 거라.
거기에 머물르려고 하라는 거라
그다음 두 번째가 "담마 라또(Dhammarato)" 라고 그럽니다.
라따(rata)라고 하는 것은 좋아한다는 그런 뜻입니다. 나쁘게 표현하면 사랑하고 좋아하고 그런 것들도 라따라고 그렇게 얘기하는데, 여기서 담마라따라고 얘기할 때는
"담마를 좋아하는 것, 법을 좋아하는 것"
법문 듣고 하는 걸 좋아하고, 그리고 그런 법에 머물러있는 사람들을, 수행하고 있는 사람들을 좋아하고 그 사람들을 가까이하게 되는 것 그런 형태들을 띠게 됩니다.
그러니까 법이 아닌 것들은 되도록이면 멀리 할려고 하고 안 할려고 해야 되는 거고, 또 법이 아닌 길을 갈려고 하는 사람들은 자꾸 멀리 할려고 합니다.
그래서 인제는 법에 머무는 것도 머물러야 되는 거지만, 자기 자신의 주변적인 것들도 어느 정도 법에 맞게끔 정리를 자꾸 해나가야 됩니다.
그다음에 세 번째가 뭐냐면, "담마 아누위찐따양(Ddhammaṁ anuvicintayaṁ)" 그렇게 얘기합니다.
담마를, 아누: 거듭거듭해서, 찐따야: 배우고 이해한다.
매주 토요일은 그래도 여러분들은 스님 법문은 듣잖아. 또는 인터넷에 올려진 것들을 듣고 또 그렇게 한다는 거라. 수행만 계속해나가면 참 좋겠지.
그런데 대부분 사람들은 수행을 할 거 같으면 자신의 방식으로 하게 됩니다.
한번 예를 들어볼까? 둘이 인제 애인이니까 수한이가 뒤를 돌아봐봐. 그래가지고 팔을 한번 잡아당겨 봐봐. 쭉 잡아당겨 봐봐. 그렇지. 놓고. 이제 됐다. (ㅎㅎㅎ)
너는 어떤 마음이 들었어? 수한이가 팔을 잡아당길 때?
팔을 잡아당기는 건 알았어? (수행자 대답 : 예)
팔을 잡아당겼다고 아는 거야? 너를 잡아당겼다고 아는 거야?
(수행자 대답 : 저를 잡아당겼다고)
이게 문제인 거라. 사람들은 누구든지 그렇게 안다는 거라.
왜 잡아당겨? 나를 왜 잡아당겨 하지, 팔을 잡아당겼다고 알지를 못한다는 거라.
그래서 어떠한 경우든지 자꾸 배워야 되는 거라.
수행만 해가지고 쭉 다해나가면 참 좋은데, 수행을 한다고 하더라도 자기 방식대로 자꾸 생각을 해버리기 때문에 '팔을 당겼다'고 알아차리는 것이 아니고 '나를 당겼다'고 알아차린다는 거라.
수행하면서도 자신을 자꾸 개입을 시키고, 또 자신의 감정들을 거기다가 집어넣게 되는 거라. 자신만의 방식으로 하다 보면 엉뚱한 방향으로 자꾸 하는 거라. 그래서 법을 배운다고 하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부분입니다. 그게 인제 세 번째 부분입니다.
바르게 수행하기 위해서, 또는 해탈에 이르기 위해서는 바른 이해들이 되어야 됩니다. 그것들을 하지 않으면 엉뚱한 방향으로 간다는 거라.
그게 인제 지금 내가 성취한 것들로부터 떨어지지 않기 위해서 세 번째다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다음에 네 번째가 뭐냐면, "담마 아눗사랑(Dhammaṁ anussaraṁ)" 그렇게 얘기합니다.
담마를, 아누: 거듭거듭, 사라: 관찰하는 것.
여러분들이 신·수·심·법이라고 하는 것, 그걸 지속적으로 관찰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거라.
수행대상은 신·수·심·법 입니다. 엉뚱한 것을 대상으로 삼지 말아라라는 얘기라. 저 놈이 화를 일으켰다 해가지고 저 놈을 대상으로 삼아서는 안되는 거라.
일어난 화라고 하는 그게 대상이 되어야 되는 것이지, 자신의 신·수·심·법이지, 밖의 것들을 대상으로 삼지 말아라는 거라. 대상이 바르게 됐을 때 그것들은 반드시 거듭거듭 관찰하라. 그래서 낮이고 밤이고 자꾸 관찰하도록 하라는 거라.
스님들이 해야 되는 "다사 담마"라고 하는 열 가지 담마 부분이 있습니다.
그리고 스님들이 또 갖추어야 되는 게 "테라 담마" 해가지고 장로가 되기 위해서 알아야 되는 담마 열 가지 해가지고 돼있는 것이 있습니다.
앞에 거 열 가지 하고 뒤에 거 열 가지 하고 공통적인 것이 뭐냐면
앞에 거에 공통적인 게, 법에 대해서 익숙해지는 것.
그러니까 법을 자주자주 들어야만이 법에 대해서 익숙해지는 거라.
그러니까 법에 대해서 익숙해져있는가 하는 걸 출가한 스님들은 열 가지 관찰해야 되는 것 중에 자꾸 돌아봐야 되는 거라. 내가 지금 무엇에 대해서 얘기를 할 때 그것에 대해서 익숙해져가지고 내가 지금 잘 얘기를 할 수 있는가? 아니면 그것에 대해서 완전하게 이해하고 있는가?
또는 그것에 대해서 익숙해져 있을 거 같으면 그것에 대해서는 전혀 의문이 없어야 됩니다. 그래서 의문을 품고 있는 것이 없는가? 자꾸 자신을 돌아봐야 됩니다. 그래서 내가 요정도 됐다, 그다음에는 또 요마만큼 올라갔다 하면 자기 스스로 보게 되는 거라.
그게 매일매일 스님들이 관찰해야 되는 열 가지 중에 하나에 속하기도 하고,
장로가 되기 위해서 갖추어야 되는 열 가지 중 하나에도 포함이 됩니다.
그다음에 두 번째 부분이 뭐냐면 조금 전에 얘기한 게 이겁니다.
'담마 아눗사랑' 신·수·심·법이라고 하는 수행대상, 수행대상을 분명하게 알고 있느냐는 거라.
그래서 수행대상을 지금 거듭거듭 해서 관찰하고 있느냐는 거라. 그리고 갖추어야 되는 것도 그 관찰하는 것이 거듭거듭 관찰했을 때 자연스럽게 지금 이루어져서 자연스럽게 알고 있느냐는 거라.
그게 꼭 스님만 해당이 되는 게 아닙니다. 여러분도 꼭 마찬가집니다.
여러분도 꼭 마찬가지로 그렇게 관찰대상은 분명하게 해야 됩니다.
수행의 대상이 되지 않는 것들은 관심조차도 둘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내가 수행할 대상이 아니라. 그건 나둬버리라는 거라.
너그 엄마, 너그 아부지 뭐 행동하는 거 고치라는 거 안 고쳐지지? 안 고쳐져. 그거는. 남의 걸 왜 고칠라고 해싸? 놔둬버리지. 자기 것만 하면 되지.
수행대상은 어떤 경우든지 자기 자신의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신·수·심·법입니다.
그래서 이것들에 대해서 거듭거듭 관찰하고 알아차리는 것들에 대해서 잊어버려서는 안됩니다.
이 네 가지를 했을 때 보통 자신이 이루는 상태, 그리고 그런 경지로부터 떨어지지는 않는다 하는 얘기를 합니다.
여러분들도 그렇게 떨어지지 않도록은 해야 됩니다.
설혹 도와 과에 이르지는 못한다고 하더라도 수행이 잘 이루어지게 도움을 받는 것, 또 그런 상태에 이르도록 만들어 주는 것들, 두 번째가 뭐냐면 법에 대해서 자주자주 듣는 것.
• 두 번째가 뭐냐면 법에 대해서 자주자주 듣는 것. 그것을 잊어버려서는 안됩니다.
어떨 때는 스님들도 좀 그런 게 있어요. 같은 스님인데도 저 스님 법문하면 아, 진짜 재미없어. 그리고 들을 내용도 하나도 없어. 그럼 어떨 때는 보면 공부가 안됐을 때는 그 시간이 아까운 거야. 아이고, 내가 저 한시간 동안 수행을 했으면 얼마나 많이 하고 책을 봤으면 몇자를 더 봤을텐데, 스님들은 의무적으로 다 가야됩니다, 법문이 있으면. 괜히 거기 앉아 갖고 괜히 헛시간 보내는 것같이 느껴지는 거라.
그런데 그거는 잘못 알았을 때고, 아직 초기일 때, 출가한지 얼마 안 됐을 때고.
그런데 큰 스님들은 갈 때도 싱글벙글하고 들을 때도 기분 좋게 듣고, 끝나고 나서도 싱글벙글 하고 나오거든.
왜 그럴까? "수따(suta)"의 기능은 그것을 듣고 익히는 것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수따라고 하는 것은 말입니다. 말은 알아차릴 대상이 돼버립니다.
자신의 귀를 통해서 들어오는 것이기 때문에 자신의 귀를 통해서 들어오는 그 소리만 듣고 있을 거 같으면, 마음이 고요하고 깨끗하게 돼있으면, 인자 출가한지 얼마 안 된 스님이 뭔 소리를 하든 간에 그 내용은 전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나한테 도움을 줄 수 있는 얘기냐 이것도 중요한 부분이 아닙니다.
수행 잘하는 거라. 그 법문 할 동안에. 그러니까 수행할 때도 싱글벙글하고 나올 때도 싱글벙글하게 된다는 거라.
그래서 법은 듣고 기억만 할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그런 사람들의 공통점이 뭐냐면 보시할 줄 모르고, 그리고 마음은 인색해져 있고, 그리고 수행은 또 안 하려고 그럽니다.
수따를 듣는 것은 뭐 때문에 듣는데? 그거 듣고 기억하고 이해할려고 듣는 거라? 그거 해가지고 뭐하게? 남한테 자랑하려고? 그거 필요 없는 것들이라. 실천되지 않는 것이면 아무 의미가 없는 것들이라는 거라.
다른 방향으로 막 오해를 합니다. 밥톨 하나 버렸다. 일반적으로 스님들은 그 밥톨의 소중함을 알기 때문에 그 밥톨을 주워가지고 씻어가지고 먹는데, 아까 같은 그런 사람들은 뭐라고 하느냐면, 그 밥톨 그냥 놔둬. 그냥 누가 새가 와서 먹을 거 아니냐? 그럼 너 보시하는 것이 된다 하고 이렇게 얘기합니다.
맞아. 맞는 얘긴데 그러한 보시가 얼마만한 이익을 낳겠어?
그런데 사실은 그렇게 얘기하는 그 사람은 실제적으로 자신은 보시할 줄도 몰라. 그것이 틀렸다는 것이 아니고, 낮은 이익을 가져오는 것들이라는 거라.
그래서 여러분들도 법이라고 하는 것은 들은 데에서 많은 이익들이 일어날 수 있도록 돼야되는 것이지, 그냥 듣고 기억하고 그럴 것 같으면 그냥 여기 오지마. 그냥 저기 저 뒤에 가면 책들 많아. 훨씬 더 훌륭한 얘기들이 많으니까 그거 그냥 들으면 돼.
• 그다음에 세 번째 "사-깟차(sākacchā)" 그렇게 얘기합니다. 수행을 했으면 반드시 상담을 하라.
집단상담이든 아니면 개별상담이든 상담을 하라는 거라. 실제로 와서 상담해보면 별로 수행에 큰 도움이 되지는 안 해. 그런데 왜 상담을 하라고 그럴까? 큰 이익들은 없는데도 상담을 하라고 그럴까?
그걸 경에서는 뭐라고 얘기하냐면 "잡초를 제거하는 것과 같다" 그렇게 얘기합니다.
씨를 뿌려가지고 곡물이 잘 자라고 있기는 한데, 곡물 자기 스스로는 옆에 누가 잡초가 자라더라도 그 잡초를 뽑을 수가 없습니다. 그 잡초는 누군가가 뽑아줘야 됩니다. 그래야만이 그 식물이 잘 자라게 되는 거라.
스승의 역할은 그거라. 이 곡물을 자라게 만들어주는 것이 아니고, 자라는데 불필요한 것들을 제거시켜주는 역할들을 하는 거라. 그걸 뽑아주어야만이 요놈이 영양분을 다 가져가가지고 쭉 자라게 된다는 거라.
대부분 사람들은 그게 별 도움이 안 되고 하니까 문답을 안 할려고 그럽니다. 자기 혼자 해나갈려고 그럽니다. 자기 혼자 자기 스스로는 옆에 잡초를 제거를 하지도 못합니다.
그건 틀림없는 사실이라. 자기 스스로는 어떠한 경우든지 뿌리가 내려가지고 잡초를 제거할 거야, 뭐 할 거야? 나중에 자기가 잘 커가지고 그것이 하늘을 덮을 정도가 되면은 밑에 있는 잡초가 다 죽어버리겠지. 그런데 그러기 전인데도 자신은 이 잡초를 제거할 생각을 안 하는 거라.
잡초는 다른 방식으로 제거되는 것이 아니고 문답으로!
도움이 안 돼도 관계가 없어. 그냥 가서 쓸데없는 얘기한다고 스님한테 꾸지람 듣고 하더라도 그거 하라는 거라.
그렇게 함으로 인해서 자신이 잘 나아가고 있는 것이 드러나지게 됩니다.
• 자! 그다음에 사마타가 네 번째고, 다섯 번째가 위빳사나 입니다.
수행은 어떠한 경우든지 한쪽으로만 자꾸 치우쳐서는 안됩니다.
집중해야 될 때는 집중하는 법들을 자꾸 배울려고 하고 또 통찰할 때는 통찰하는 것들을 자꾸 할려고 하고, 그래서 이게 균형을 유지해나갈 때 수행은 향상됨이 있게 됩니다. 그 부분을 잊지 말고 수행에서 조금 더 향상됨이 있도록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첫 번째 수행할 때 마음을 고요하고 맑고 깨끗하게 하라는 것은 저번 시간에 얘기를 했습니다.
그렇게 하고 나면 그다음에 해야 되는 것이, 내가 뭐 잘못한 것이 있는가 없는가 하는 것들을 참회하는 것!
그다음에 해야 되는 것이, 내가 이 수행으로 깨달음에 이르겠다 하는 결정심을 내는 것!
그러고 나서 아까 사마타와 위빳사나를 겸해라고 했기 때문에,
네 가지 예비수행들 멧따바와나, 붓다눗사띠, 아수바바와나, 마라나눗사띠 라고 하는 네 가지 예비수행들 중에 하나를 택해가지고, 마음을 대상에 갖다 붙일 수 있도록 훈련들을 해야 됩니다.
예비수행들을 보통 5분 정도 하고 나서, 위빳사나 수행으로 일어나고 사라지고 하는 것으로 그렇게 하는 것이 일반적인 방법입니다.
그리 안 하겠다 할 것 같으면 그리 안 해도 됩니다.
그런데 틀림없이 차이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냥 수행한다 할 것 같으면 무조건 앉아가지고 앉자마자, 그냥 '일어남' '사라짐' 요거 할려고 하지 말고, 반드시 그 순서들을 정해서 할 수 있도록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자!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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