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일상수행법문 녹취/2014~2015 일상수행법문

마음의 필수영양소_네 가지 특징은 갖추자. (20150618)

담마마-마까 2021. 12. 10. 09:00

https://youtu.be/kEyhY85Rn7o

* 마음의 필수영양소_네 가지 특징은 갖추자. (20150618)

 

오늘은 「네 가지의 특징은 갖추자」 하는 것으로 얘기를 하겠습니다.

사리뿟따 존자가 깨달음에 이르고 나서 탁발을 나가면 항상 탁발이 안 돼. 다른 사람들은 가면 탁발을 다 해주는데 사리뿟따 존자만 앞으로 오면 탁발할 공양물이 똑 떨어지든지 그렇지 않으면 사람들이 탁발을 안 하고 그냥 가만히 있어버리면은 지나가야 되는 거라. 사리뿟따 존자는.

 

그래서 사리뿟따 존자가 이상하게 생각을 해서 곰곰이 생각을 해봅니다. 왜 나는 이렇게 탁발을 하는데 탁발이 잘 안될까? 곰곰이 생각해보니까 깨달음에 이르기 전에 자신이 저지른 잘못들에 대해서, 쉽게 말하면 내가 누구에게 나쁜 일을 했다든지 악한 감정을 가졌단 말이라. 그럼 그 사람이 죽고 나서 사리뿟따 존자가 깨달음을 이루었든 안 이루었든 관계없이 사리뿟따 존자에게 악감정을 가지고 있는 거라. 그래서 다음생에 몸을 받고 나서 요즘 말로 할 거 같으면 귀신 비슷하게 그런 존재가 됐겠지. 그래서 사리뿟따 존자가 탁발만 나가면 다른 사람들이 사리뿟따의 바리때를 보면 항상 바리때가 꽉 차있는 것처럼 보이도록 하는 거라.

 

그 사실을 알고 사리뿟따 존자가 '아, 내가 옛날에 이런 것들은 참 잘못했구나' 하는 마음을 내고, 그러고 나서 그 귀신, 쉽게 말하면 그 귀신한테 '마음에서 일어나는 악한 감정들이 없기를, 그것으로 인해서 괴로워하지 않기를' 하는 마음을 간절하게 가집니다.

그러고 나서는 그다음에 탁발을 나가도 인제는 탁발이 되는 거라. 그전에는 사람들이 사리뿟따 존자가 가면 바리때가 항상 차있으니까 탁발을 하지 못하는 거지. 그러니까 가만히 있는 거라.

 

깨달은 분들이나 수행을 잘하는 분들은 뭔 문제가 발생했을 때는 '아, 이게 문제가 뭔가' 해서 자기 자신에게서 그 문제를 찾습니다. 그런데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밖에서 문제를 찾습니다. 왜 내 바리때에 음식물을 넣지 않느냐?

 

빨리어 경전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환자는 다른 사람에게 약을 먹인다" 하고. 자기가 아프면 자기가 약을 먹어야 되는데, 자기가 약을 안 먹고 자기가 아픈 환자인데도 다른 사람한테 약을 먹인다는 거라. 그 병이 낫겠어? 안 낫지. 자기가 약을 먹어야 병이 낫는 거지 다른 사람한테 먹여가지고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자신한테 뭔가 불행한 일이 닥친다든지 자신에게 뭔가 안 좋은 일들이 일어났을 때는 아, 이게 나에게 무슨 문제가 있는가 해서 자기에게 먼저 살펴봐야 되는데 자꾸 다른 사람한테 약을 먹일려는 거라. 무지해서 그런 거지. 어리석은 자.

 

자기 자신을 곰곰하게 관찰을 해보지 않으면은 무지는 깨지지를 않습니다.

수행을 하더라도 수행에 대해서는 자기 자신이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현상들을, 그걸 자기 자신이 관찰해야만이 무지가 깨집니다. 그런데 일상생활에서는 문제가 일어나면은 밖에 것을 자꾸 약을 먹일려고 한다는 거라. 그래가지고는 자기 자신이 낫지 않는다는 생각을 항상 해야 됩니다.

 

여러분들은 물론 사회에 살아가면서 좀 부유해지고 또는 칭찬받기를 바라고, 또 명예가 높아지고 행복해지고 이러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그게 그렇게 잘 안되죠.

부처님도 그걸 보고 얘기합니다. "그거는 기대해선 안 될 것들이다."

기대한다 해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거라. 설혹 이루어졌다 하더라도 언젠가는 또 반대적인 것들이 다시 나타난다는 거라. 그걸 기대해야 되는 것이 아니고, 다른 것들을 기대할 수 있는 것이다 하고 얘기합니다.

 

사리뿟따 존자도 자신에게 뭔가 문제가 생겼을 때 자기 자신을 관찰했듯이 그렇게 하고 나면 문제 해결점이 보입니다.

그런데 밖에만 자꾸 보는 경우에는 문제를 해결하는 해결점이 보이지를 않는다는 거라. 다른 사람들을 비판하는 사람들? 그걸 비판해가지고 그 문제를 해결할지 몰라도 또 다른 문제가 생겨나는 거고, 또 자기 자신은 어떤 문제도 해결하지 못하게 된다는 거라.

그래서 "다른 사람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악감정이 항상 팽배해있다" 하고 얘기합니다. 자신의 마음에 자꾸 악한 감정들이 팽배해있는데 그래가 수행해가지고 무슨 성취를 얻을 수 있겠어?

 

불교에서는 항상 일정한 진행과정을 가지게 됩니다.

예류과에 이른 사람들은 여러 가지 특징들이 있습니다. 그걸 보통 "일곱 가지 특징이다" 하고 얘기를 합니다.

대표적인 게 삼보에 대한 확신들, 그리고 부끄러워할 줄 알게 되는 것, 그리고 남을 해칠려고 하는 마음이 없게 되는 것, 그런 일곱 가지 특징들이 있습니다.

[※ 성자들의 일곱 가지 특징-- 믿음, 지계, 히리, 옷땁빠, 수행에 대해서 자연스러워지고 익숙해지는 것, 짜가(cāga), 지혜가 일어나는 것들]

 

그거 말고 예류과에 이른 사람들이 가지는 특징 중에 하나가 뭐냐면, 법을 들으면 기뻐할 줄 아는 것. 좋은 법을 들으면 너무 기쁜 거라.

세상의 희노애락에 대해서 기뻐하고 슬퍼하는 것은 '악한 마음'이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선하지 못한 마음. 자신에게 일어나는 좋고 싫음에 따라서 일으키는 마음들은 전부 '불선심소'에 해당이 됩니다. 여러분들이 뭐 좋다고 깔깔거려 쌌는 것 그거 전부 불선심소인 거고, 또 싫어하고 안 좋은 마음들이 일어나는 거 그것도 전부 다 불선심소라는 거라. 남을 비판하는 것도 마찬가지고.

 

그런데 법을 들어서 기쁨을 일으키는 것들은 '선심소'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법에 따라서 살겠다는 마음이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법은 어떤 경우든지 선한 쪽으로 일으켜줍니다. 그래서 예류과에 이른 사람들의 가장 큰 특징 중에 하나가 뭐냐면 예류과에 들지 못한 사람이든 아니면 일반적인 조그만 꼬맹이가 얘기하는 말이라고 하더라도 법을 얘기하는 것이면 되게 기뻐하는 거라.

 

태국에 있을 때 그렇게 합니다. 스님들이 일정하게 돌아가면서 법문을 합니다. 태국 뿐아니라 테라와다 불교권은 법문하는 게 굉장히 많습니다. 언제냐면 거기는 우뽀삿타라 해가지고 포살일을 항상 지킵니다. 일주일에 한번씩.

그러니까 포살일 전날 저녁에 한번 하거든. 저녁에 사람들이 모였을 때 법문을 한다고. 그다음에 포살일날 그날 자기 전에 사람들이 탑돌이를 하고 잠에 들게끔 하는데 탑돌이를 하기 전에 또 법문을 한번 하고, 그러고 나서 포살일 당일 돼서 탁발하고 와서 오전에 법문을 한번 합니다. 그리고 오후에 사람들 가기 전에 법문을 또 하고, 이렇게 기본적으로 법문이 네 번이라. 일주일에.

 

그러니까 한 스님이 일주일에 네 번 다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돌아가면서 법문을 합니다. 물론 법문할 조건들을 갖춘 스님들이 법문을 하는데, 어떤 경우에는 한 5년 6년 지난 스님들이 법문할 때도 있습니다. 내용도 없고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경전을 줄줄 읽는다고 하더라도 이 장로 스님들은 진짜 기뻐하는 마음들을 냅니다. 탁 끝나고 나면 잘했다고 "싸~~~두" 합니다. 마음속에서.

자신은 이미 그것을 알고 있고, 그것보다도 더 훌륭하게 법을 설할 수 있지만 법을 설하는 것에 대해서 너무나 기쁜 거라. 법을 설하는 것에 대해서.

그거는 바뀌지 않는 거거든. 그거는 내가 어떤 상태에 있든지 간에 누군가가 법을 설한다고 할 거 같으면 그것에 대해서 기쁜 마음을 일으키는 것은 언제든지 일어난다는 거라.

부처님은 그렇게 얘기하는 거라. 앞에 그런 것들 자꾸 얻을려고 하지 말고 이런 것들을 자꾸 얻을려고 해라. 이거는 바뀌지 않는 것들이기 때문에.

 

그와 마찬가지로 여러분은 꼭 얻어야 되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것을 "마음의 필수 영양소다" 하고 얘기합니다.

마음에 적어도 이런 것만 있어도 설혹 내가 잠깐 방심하고 벗어나는 일이 있고, 그리하더라도 빨리 돌아오게 되는 거고, 그리고 문제를 자기 자신에게 찾고 해결점을 찾아나가는 거라.

 

아까 마음의 프로세스에 대한 얘기를 했는데, 마음의 진행과정, 불교에서 공부를 해나가다 보면 진행과정이 반드시 있습니다.

 

처음에는 여러분들이 법을 들으면 법에 대해서 기뻐하고 좋아하는 마음들이 일어나야 된다는 거라. 그것이 확고하게 되지는 않는다고 하더라도 그런 것들에 대해서 환희심을 일으킬 줄 모를 것 같으면 그다음으로 진행하기가 힘들어집니다.

 

테라와다 불교권의 장로스님과 같이 다른 스님들이 하잘것없는 법문을 하더라도 그게 틀린 것이 아니면 진정으로 기뻐할 줄은 알아야 되는데 그렇게는 못한다고 하더라도 어떤 경우든지 그 법에 대해서 싫어하는 마음들, '아이고, 나 저거 다 알고 있는데' 이래버릴 것 같으면 그거는 법에 대한 환희심을 일으키는 마음이 아닙니다. 좋고 싫어하는 것들에 따라서 마음을 일으키는 것입니다. 좋고 싫어하는 것들은 불선심소라. 그렇게 마음이 좋아하고 싫어하는 마음들은. 법을 들었으면서 왜 불선심소를 일으키느냐는 거라.

 

그래서 법에 대해서 자꾸 기뻐하는 마음들을, 그게 어떤 법이든 부처님이 설한 법을 설혹 그냥 이렇게 대놔놓고 글을 읽는다고 하더라도, 오후에 지금 심소부분 하고 있어요, 뭐하고 있어요? 아비담마 부분, 연기부분 하고 있어요? 그거 읽어도 그것으로 인해서 기쁨이 일어나야 되는 거라.

 

그게 돼야만이 그다음에 드는 것이 확신들이 듭니다.

, 붓다·담마·상가라는 것이 이렇게 소중한 것이구나.

그래서 붓다·담마·상가를 따라가겠다는 마음들이 자꾸 일으켜야 되는 거라.

 

그런 확신들이 들어야만이 그다음에 내가 생활자체를 바꾸게 됩니다.

아, 이것은 내가 해야 되는 것이고, 하지 말아야 되는 것이고. 그리고 이것은 지금 필요한 것이고, 이것은 지금 그렇게 필요하지 않는다는 것을 압니다. 이것은 나쁜 행위이고 이것은 나쁘지 않는 행위이다 하는 것들을 분명하게 구분해서 그거 따라갈려고 합니다.

 

그러다 보면은 그다음에는 점점 더 베풀려는 마음들이 일어나게 됩니다.

내가 법을 아는 만큼 다른 사람들에게 그 법을 자꾸 알려줄려고 하고 내가 가진 것들에 대해서 그렇게 집착하는 것이 아니고 필요한 경우에는 나눠줄려고 하고,

 

그렇게 쭉 진행하다보면 마음은 점점 맑고 깨끗하게 돼나갑니다.

그래서 그 맑고 깨끗한 마음으로 인해서 지혜가 일어나게 됩니다.

 

법에 대해서 기쁨을 누리는 것도 변하지 않는 것들입니다.

삼보에 대한 확신이 들어가지는 것도 변하지 않는 것들입니다.

옳고 그름에 대해서 행위하는 것들에 대해서 분명하게 구분할 줄 아는 것도 변하지 않는 것들입니다.

베풀어줄 줄 아는 마음들도 변하지 않는 것들입니다.

마음이 맑고 깨끗해지는 것도 변하지 않는 것들입니다.

지혜를 얻는 것들도 변하지 않는 것들입니다.

 

거기에 한번 올라서면 그 밑으로는 떨어지지 않고 더 올라가게 된다는 거라.

그게 마음의 진행과정들입니다. (마음의 프로세스)

 

그런 과정을 밟기 위해서 여러분들이 반드시 갖추어야 될 마음의 필수 영양소라고 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첫 번째, 자애! 마음의 필수 영양소는 항상 첫 번째가 자애입니다.

다른 것 아무것도 없더라도 마음에 자애가 있을 거 같으면 자기 자신과 충돌하지 않고 다른 사람과 충돌하지 않습니다.

 

그다음에 두 번째 갖추어야 될 필수 영양소가 부정관!

자기 자신은 완전하지 않다. 자신의 견해는 바른 것은 아니다. 그리고 이 몸이라고 하는 것들은 그렇게 소중한 것이 아니다.

 

며칠 전에 영도에 해동병원에 한 이틀 다녀온 적이 있어요. 태종사 큰스님이 아파가지고 입원해계시거든. 병원에 들어가는데, 요즘 삼엄하잖아 병원들이. 갈 때 손 소독도 다 하고, 그다음에 마스크 주니까 마스크도 써야 되고, 기록하는 거 전부다 기록하고, 그렇게 해서 병실 앞에 갔는데 들어가질 못하게 해. 병실을. 병실에 들어갈 때 이렇게 뿌려주는 거 뿌려가지고 그러고 나서 병실로 들어가야 되는 거라. 그것도 한 사람이 들어가고 나면 그다음 사람이 들어가지를 못해. 두 사람이 오면 한 사람은 기다려야 돼. 요즘은 그렇게 삼엄하더라고. 그래서 한 이틀, 어제 갔으면 오늘 또 한번 가고 해서 조금 상태가 나아지고 그뒤부터는 안가고 있는데, 맥박이 잘 안 잡히고 이렇게 해가지고 지금 입원해 계시는데 지금 좀 나아졌어요. 그래서 걱정할 정도는 아니고.

 

그렇게 해가지고 들어갔거든, 갔다가 나오면서 생각을 해봅니다. 저렇게 청결하게 하는데 메르스에 걸리는 사람은 왜 그럴까? 메르스 걸리는 사람들은 걸리고 있거든 지금도. 뭐 정부발표가 잘못됐든, 아니면 바이러스에 직접적으로 노출됐든 어쨌든 간에 걸리고 있거든.

이 몸이 깨끗하다고 할 것 같으면 바이러스에는 걸리지 않겠지. 깨끗한데 바이러스에 걸릴 순 없습니다. 그런데 깨끗하지 않기 때문에 아무리 밖에 몸을 깨끗하게 한다고 하더라도 바이러스는 들어오게 돼있다는 거라.

 

여러분 몸은 결코 그렇게 깨끗한 것이 아닙니다. 필요한 경우에는 밖에 부분들을 소독하고 깨끗히 해야 됩니다. 그렇다고 해가지고 여러분들 몸이 깨끗한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언제든지 바이러스가 내 몸에 들어올 수 있고, 내가 병에 걸릴 수 있고, 그리고 나는 언제든지 그것으로 인해서 고통받을 수가 있다는 거라. 그런데도 본인은 깨끗하다고 생각을 하는 거라. 내 잘못이 없는데 바이러스가 나에게 들어왔다고 하는 거라.

 

기본적으로는 여러분들은 그 생각을 항상 해야 됩니다.

이 몸은 항상 깨끗한 것은 아니다.

그리고 나의 견해라고 하는 것은 완전한 것은 아니다.

그런 마음을 가져야만이 마음에 갖춰야 될 것들을 갖추게 됩니다.

 

그다음에 세 번째가 죽음에 대한 생각들.

죽음이 항상 내 곁에 다가오고 있다는 생각을 해야 됩니다. 죽음이 가까이 다가오는데 지금 게으름 부릴 시간이 어딨어? 하루라도 빨리 찾고 하루라도 빨리 수행을 하고 하루라도 빨리 내가 해나갈 일들을 해나가야 됩니다. 죽음에 대해서 가까이 있다고 생각을 해야만이 그 죽음을 설혹 맞는다고 하더라도 그것으로 인해서 발버둥치지를 않는다는 거라. 그래서 죽음을 가까이 있다고 생각하고 나는 언제든지 죽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해야만이 지금 내가 밝고 맑게 그리고 열심히 살 수가 있게 됩니다.

 

이런 것들이 "마음에서 갖추어야 될 필수적인 영양소다" 그렇게 얘기합니다.

 

경전에는 나와있지 않지만 이거 외에 스님이 갖추어야 될 것들을 조금 더 간추려보겠습니다.

첫 번째 모든 현상들에 대해서는 무상··무아의 성품으로 이해하도록 하라.

지금 현재 일어나는 일들이든 아니면 생각하는 것이든, 아니면 뭔가를 해가지고 행하는 것이든, 세상의 모든 것들은 자기 자신을 포함한 모든 것들은 무상·고·무아의 성품이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것에서도 무상·고·무아의 성품에서 벗어나는 일들을 해서는 안됩니다. 내가 화를 내는 것, 뭔가에 대해서 욕심을 부리는 것은, 무상한 성품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그리고 그렇게 할 거 같으면 괴로움이 따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 것들은 '나'라고 하는 것들이 있다고 여기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물을 보든 뭔가를 대할 때는 항상 무상·고·무아의 성품으로 보도록 그렇게 행동하도록 자꾸 해야 됩니다.

 

그다음에 하나가 '위숫디(visuddhi)' 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마음의 청정'.

어떠한 경우든지 마음은 청정해지도록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마음이 물들어버리면 안됩니다. 마음이 오염돼버리면 수행도 어긋나게 되는 거고, 일상적인 생활에서 행하는 것들도 어긋나버리게 됩니다. 그래서 마음은 항상 청정하게 돼있도록 해야 됩니다. 고요하고 맑고 깨끗하고 청정한 상태를 유지할려고 해야 됩니다.

 

그다음에 또 갖추어야 되는 것이 여기도 이름이 산띠라고 있죠? '산띠(santi)'! '고요함, 적정' 그렇게 보통 풀이를 합니다.

쉽게 말하면 동요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어떤 것들을 만나더라도 동요하지 않고 고요한 상태를 유지하는 것. 마음이 청정만 해가 있어가지고는 안됩니다. 그 청정한 상태는 뭐 때문에 하는 거라? 도와 과에 이르기 위한 것들입니다. 그래서 대상을 만나더라도 어떠한 경우든지 마음이 동요함이 없도록 만들어야 됩니다.

 

인도에 가면 산티니게탄 이라는 대학교가 있습니다.

숲에 지어진 학교인데 옛날에 스님 태국에 있을 때 인도의 학술적인 부분이나 아니면 강론 조사하기 위해 인도에 자주 갑니다. 갈 때마다 꼭 들르는 데가 어디냐면 그 산티니게탄이라고 하는 대학교였어요. 거기 가면은 그렇게 고요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아, 이래서 이 학교 이름이 산티니게탄이구나 하고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렇게 고요하고 평화로운 곳인데 그 안에서 사는 사람들, 학생들을 보면 거기도 싸움박질하고 그럽니다. 마음이 동요해버리니까.

 

마음이 아무리 청정해져 있다고 하더라도 깨끗해져 있다고 하더라도 마음이 자주 동요해버린다고 할 것 같으면 대상을 만나면 바로 그냥 대상에 져버리게 됩니다. 그래서 마음의 동요를 일으켜서는 안됩니다. 마음은 고요해져 있어야 됩니다. 항상 마음은 동요됨이 없이 고요한 상태를 유지를 해주어야 됩니다.

 

그래서 산띠를 다른 말로 닙부따(nibbuta)라고 빨리어에서는 얘기합니다. 닙바나(nibbhāna), 적멸(寂滅)이라고 하는 닙바나의 동사형 과거분사가 닙부따라고 합니다. 적멸해있다는 것, 마음이 어떤 경우에도 동요하지 않게 돼있다는 뜻입니다.

 

수행에서 하나씩 하나씩 진보해나가지 않으면 안됩니다. 먹는 것에 대해서 어떠한 경우든지 동요하지 않고, 좋고 싫은 것에 관계하지 않고 먹을 수 있는 상태가 되어있고, 뭔가 소리들리는 것에 대해서 그것에 대해서 싫고 좋아하는 마음들이 일어나지 않고, 동요되지 않고 딱 평정심을 유지하게 되는 것.

하나씩 하나씩 동요하지 않는 것들을 만들어나가야 됩니다.

 

그다음에 마지막으로 갖추어야 되는 것이 까루나(karuṇā)입니다.

아까 멧따(mettā)는 경전에서는 갖추어야 된다는 얘기를 했습니다. 멧따만 갖추었다고 해서 다 되는 것은 아닙니다. 까루나라고 하는 것은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 연민히 여기는 마음들이 있어야 됩니다.

안 불쌍해? 해야 될 거 하지 못하고, 지금 자기가 하고 있는 것들이 옳은 거라고 저렇게 발버둥치는 거 보면 안 불쌍해? 자기 마음이 물드는 줄은 모르고, 막 남에 대해서 싫은 소리들 하고 있는 거 안 불쌍하냐고? 마음은 항상 그런 까루나의 마음들을 가지고 있어야 됩니다. 그래야만이 해결점을 찾아나갑니다.

멧따가 자기자신을 방호하는 것이라고 할 거 같으면 까루나는 다른 사람들을 보호해주는 것들입니다.

 

이런 것들이 그래도 여러분들이 마음속에서 갖추어야 될 그런 필수적인 것들입니다.

 

그런 것들을 갖추어서 여러분들도 깨달음에 이를 수 있도록, 그래서 깨달음에 이른 사람들은 이런 조건들을 반드시 가지게 됩니다. 그렇게 노력을 하시기 바랍니다.

자! 오늘은 여기까지 하도록 하겠습니다.

 

< 질의응답 >

수행자 질문 : 스님 법문에 대해서 한 가지 질문이 있습니다.

보면은 곳곳에 많은 법문들이 지금 인터넷 상으로도 들을 수가 있는데, 간혹 보면 법대로 설하지 않고 자기 견해에 치우쳐져 있는 경우도 있고, 어떨 때는 법을 잘못 해석해서 예를 들면 태생, 난생, 습생, 화생 할 때 화생은 꽃으로 태어난 것이에요 이렇게 한다든가, 이럴 때 계속 법문을 듣고 있어야 됩니까? 그렇지 않으면,

스님 답변 : 아까 얘기했습니다. 법을 설하는 것, 부처님의 가르침을 설하는 것을 얘기하는 것이지 자신의 견해를 내세우는 것을 들어라는 것은 아닙니다. 그리고 잘못 됐으면 잘못됐다고 알면 됩니다. 그렇다고 해가지고 그것가지고 시비걸지 마. 냅둬.

그거 시비건다고 해가지고 바뀌지를 안해. 그냥 저분은 저런 성품을 가지고 있구나 하고만 알고 말아버려야 되는 것이지.

그리고 만약에 그런 분하고 토론의 시간이 있다고 할 거 같으면 한 시간 이내에서 그 부분에 대해서 지적을 할 수는 있지만, 지금 내가 그분하고 직접 얘기하지도 않는데 그걸 비방하듯이 얘길하고 하는 것은 그것은 옳은 방법은 되지 못합니다.

 

수행자 질문 : 법문 장소에서 어떤 얘기가 슬며시 나온다든가

스님 답변 : 그거는 얘기해야 되는 거지. 그거는 얘기를 해가지고 그부분에 대한 생각이 안바뀌면 그냥 냅둬.

 

수행자 질문 : 계속 들어야 되느냐, 안 그러면 그 장소를 떠나야 됩니까?

스님 답변 : 그냥 듣기만 해도 됩니다. 그것이 설혹 부처님 가르침이 아니라 개인적인 법을 설한다고 하더라도 내가 이 자리에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있는 이상에서는 그냥 듣기만 해도 됩니다. 그냥 듣는다고만 해서 '소리들림' 하고 알아차리고만 있어도 그거는 훌륭한 시간이 됩니다. 그 법문하고 관계없이.

그럴 수 있는 건데 그것이 '틀렸다 좋다' 하고 견해를 내세우게 되면 이미 그것은 비판적인 사고로 물들어버리는 거라. 그럴 필요는 없다는 거라. 차라리 거기 안 갔으면 몰라도 가놓고 '저거 틀렸다' 하면서 나와버리면 그것은 바른 행동은 되지 못하는 거라. 됐습니까?

수행자 : 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