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법문교재/법문 교재(프린트물)

악은 선을 가장하고서라도 사람을 덮친다. (20150815. 서울)

담마마-마까 2022. 2. 1. 09:10

* 악은 선을 가장하고서라도 사람을 덮친다. (20150815. 서울)

 

즐거운 행위의 위험성에 대해 생각해봅시다.

우리가 선천적으로 또는 본능적으로 행하면 즐거워지는 행위는 한정되어 있는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맛있는 것을 먹거나, 예쁜 옷을 입거나, 놀거나 하면 모두 즐거움을 느낍니다. 그러한 행위는 몇 번이라도, 몰래 하더라도, 하고 싶어지는 것들입니다.

 

또 인간은 경쟁을 하거나, 싸우거나, 상대에게 이기거나 하여 자극을 받는 것을 좋아합니다. 경쟁하는 것, 싸우는 것은 결코 즐거운 사건은 아닌데도 말입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에 의해 마음이 자극되면, 살아있다는 실감이 일어납니다. 사는 실감이 없으면 매일 시시하고 지루하여 견딜 수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노는 것, 싸우는 것이 인간의 사는 충동이 되어 있습니다. 지나치지 않도록 노는 것과 싸우는 것에 대해 여러 가지 규칙을 만들지만, 인간은 그 규칙을 기꺼이 지키지 않습니다. 굳이 하려면 담배, 술은 20세가 되고 나서 하라고 해도, 그것보다 먼저 시험해 버립니다.

 

쾌락과 경쟁만이 아니라, 인간이 좋아하는 것이 또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입니다. 누워 뒹굴거나 게으름 피우거나 하는 것입니다.

 

이 3가지의 충동을 가까이 두지 말라고 누군가가 말했다면 그 사람은 미움을 받습니다. 세상은 욕구, 성냄, 무지라고 하는 3가지의 감정을 찬탄하는 이야기에 쉽게 끌립니다.

 

사람에게 미움받는 것은 감안하고 불교는 욕구, 성냄, 무지를 대체하여 불탐, 불진, 불치를 기르도록 가르칩니다. 「인간 본래의 감정에 왜 트집 잡는가, 그만둘 수 없는 것이지 않는가, 차라리 탐·진·치에 적당하게 영양을 주는 것이 편하지 않는가,」라고 하는 마음이 누구에게나 떠오른 것이 당연합니다.

불교의 입장은 탐·진·치가 사람을 행복하게 하지 않고, 자기 파괴로 이끄는 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마약 등은 일순간 사람에게 쾌락을 줍니다. 그것을 목표로 해서 이용해 버리면, 의존하게 되어 자기 파괴가 됩니다. 술의 경우도 마셔 취한 순간에는 쾌락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천천히 내장은 망가져 갑니다.

 

다른 사람의 잘못에 대해서 고함치는 것은 기분 좋은 것이겠지만, 그러고 나면 천천히 시간을 들여 오랫동안 괴로워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됩니다.

무지하게 게으름 피우는 일도 처음은 즐겁게 느끼지만, 후에 엄청난 지루함으로 고민하게 됩니다.

 

순간의 즐거움을 위해서 오래도록 괴로워하는 것은 맞지 않기 때문에 불교는 탐·진·치를 경고하는 것입니다.

 

또한 또 하나 탐·진·치에는 위험성이 있습니다.

본래 생명이 가지고 있는 탐·진·치의 감정에 아무리 자극을 주어도, 정신적으로는 전혀 성장하지 않습니다. 사람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마음에 쾌락과 자극을 주는 것만으로는 정신적으로 아무런 성장도 없이 죽어버립니다. 탐·진·치를 삼가는 것, 관리하는 것, 넘는 것으로 정신적인 성장을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행복과 평온함을 목표로 하는 사람은 마음이 싫어하는 것을 알더라도, 탐·진·치를 극복하는 것에 힘써야 합니다.

 

또 쾌락, 경쟁, 게으름은 모든 악의 근원입니다. 즐거우면 사람은 뭐든지 합니다. 분노가 일어나면 살인까지 합니다.

탐·진·치에게 자극되어 있지 않은 악행은 하나도 없습니다. 탐·진·치는 순간의 자극이라고 하는 「달콤한 속임수」에 감춰진 「맹독」입니다. 처음은 즐겁게 느끼지만, 그리고 천천히 사람을 괴로움의 불로 굽습니다.

 

탐·진·치는 가끔 사람에게 착각까지 일으켜서 괴롭힙니다. 그것은 수행의 세계에서 볼 수 있는 현상입니다. 수행의 세계에서는 탐·진·치를 제어하는 것을 권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수행이라고 하면 일반적으로는 「하고 싶지 않은 것」이 됩니다. 어려운 것, 괴로운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상한 것은 인간의 마음 안에 「수행=고행」이라고 하는 믿음이 스며들어 붙어 있습니다. 불교에서는 이러한 믿음도 하나의 번뇌라고 말합니다. 그 말은 어느 특별한 사람들의 믿음이라기보다는 모든 생명이 가지고 있는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수행은 고행이며 당연하다고 생각하여 진지하고 수행에 힘쓰는 사람들은 사실상은 분노의 감정에 한없이 자극을 주는 처지가 됩니다. 그러한 분들은 괴로운 일을 기꺼이 경험하면서, 마음에 보통 사람과 다른 괴로운 자극을 주고 있는 것입니다.

 

분노의 자극에 지는 보통 사람들은 범죄 행위에 이르지만, 수행자들은 다른 사람에게 폐를 끼치는 범죄 행위는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고행의 수행은 스스로에게 분노의 자극을 주고 있을 뿐이기에 정신적으로는 아무런 성장도 없습니다. 초전법륜경에 부처님께서는 「극단적인 고행 주의는 다만 괴로울 뿐으로, 성스러운 길에 있지 않다 'anariyo'」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고행에 끌려서 무의미한 삶의 방법을 취해버리는 것은 성실하고 진지한 사람들이 빠지기 쉬운 함정입니다. 부처님 곁에는 깨달음을 목표로 해서 수행하는 출가자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Devadatta(데와닷따)는 그 비구들을 지배하는 권한을 부처님에게 요청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거절당한 시점에 그는 고행에 이끌리는 사람들의 약한 부분을 공략하였습니다.

 

즉, 1. 출가자는 죽을 때까지 숲에서 살아야 한다. 2. 시종일관 탁발로만 살아야 한다. 3. 분소의만을 입어야 한다. 4. 나무 아래 이외에서 자서는 안 된다. 5. 죽을 때까지 고기와 생선을 먹어서는 안 된다.

 

이렇게 일견 진실해 보이는 조건을 부처님에게 제시했습니다.

불교에 있어서의 수행의 포인트는 표면적인 형태가 아니라, 마음이 맑고 깨끗하게 될 수 있는가 없는가 라는 것입니다. 또 모두가 실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면 안 됩니다. 「좋아하는 사람이 지키면 좋은 것이 아니냐!」라고 부처님은 이 조건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것을 이유로 Devadatta(데와닷따)는 아직 깨달음에 이르지 못하고 고행을 동경하는 비구들과 함께 상가를 분열시켰습니다. 상가의 분열은 오역죄의 하나입니다. 죄 중에서 제일 무거운 죄입니다.

 

탐·진·치는 너무 교활해서 선함의 가면을 쓰고, 「수행」이라고 치장해서라도 사람을 악으로 이끕니다. 악은 이 세상에서 제일 간단하여 실행하고 싶어서 견딜 수 없는 것입니다.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 선행은 실천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 이번 포인트

 

• 즐거운 것에는 함정이 있습니다.

• 순간의 기쁨은 장기간에 걸쳐서 사람을 괴롭힙니다.

• 성실한 사람이라도 탐·진·치에 속습니다.

• 악은 선을 가장하고서라도 사람을 덮칩니다.

• 수행은 성스럽고(ariyo) 이익을 갖춘 것(attha saṁhito)이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