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쓸모없이 늙은 자(moghajin.n.o)와 덕 높은 장로(Thero) (20150425. 서울)
부처님 당시에 30여명의 비구들이 숲속에서 수행하고 있었습니다.
부처님께 한 번 더 가르침을 받고, 수행의 도움을 받아 도달하지 못한 곳에 도달하고 싶다고 생각한 비구들은 부처님을 만나러 갔습니다. 사위성의 기원정사에 계신 부처님을 뵈었습니다. 그때 부처님께서 「이쪽으로 오는 도중에 장로 한 분을 만나지 않았느냐?」고 물었습니다. 비구들은 「아니오, 만나지 않았습니다. 신체가 매우 작은 출가자 한 사람을 만났지만, 그 사람은 장로가 아니라 사미였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이 30명의 비구들은 수행의 진전이 있어 이제 슬슬 깨달음을 이룰 시기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깨달음을 이룰 수 있도록 강한 충격으로 진리를 말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고 계셨기에, 「여러분, 장로 한 분을 만나지 않았습니까?」라고 물었던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그 비구들에게 「여러분이 만난 비구가 대장로이다. 연하의 사미가 아니다. 사람을 외형으로 판단해선 안 된다.」라고 설법을 시작했습니다. 그분은 Lakuntaka Bhaddiya(라꾼따까 밧디야)라는 대아라한입니다. 이 장로의 신체는 성장하지 않았습니다. 과거 하나의 악업의 결과로 성장 장애를 앓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덕을 많이 쌓은 분이었으므로, 보는 사람에게는 그 장로가 사랑스러운 아이로 보였습니다. 그러나 깨달음을 이루지 못한 일반 출가자들에게 조롱당한 적도 있었습니다. 또한 재가자도 존경을 나타내지 않고 아이 취급하는 일도 종종 있었습니다. 그러나 Lakuntaka Bhaddiya(라꾼따까 밧디야) 장로는 대아라한입니다. 성자인 것입니다. 모두 존경하여야 하고 설법을 듣거나 조언을 받아야 할 큰 스승인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아이의 얼굴을 하고 있던 이 장로에게서 설법을 들을 마음이 생기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성자가 된 분들을 조롱하는 것은 큰 죄가 됩니다. 아이라고 착각하고 있었다고 해도 성자를 조롱한 죄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만약 명상 수행하는 사람이 성자를 조롱하거나 경시한 적이 있었다면 그 성자에게 사과하고 참회하지 않는 한 명상 수행은 향상되지 않습니다. 이 장로의 일로 부처님도 걱정하고 계셨습니다.
그것은 결코 Lakuntaka Bhaddiya(라꾼따까 밧디야) 장로가 불쌍하다고 하는 마음은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이 부주의로 이 장로를 조롱하면 큰 죄를 범하므로 그것을 걱정하고 있었습니다. 무지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숲으로부터 온 비구들에게 Lakuntaka Bhaddiya(라꾼따까 밧디야) 장로를 소재로 설법을 하셨습니다. 포인트는 신체를 보고, 장로를 아이라고 착각한 것입니다. 비구들은 겉모습으로 판단했습니다. 표면적인 모습으로 가치 판단하는 것은 일반인인 것입니다. 내면적인 자질로 판단하는 것이 불교인 것입니다. 세계는 사물을 표면적으로 판단하므로, 내용이 있는 진짜를 만나는 것은 좀처럼 어렵습니다.
인간도 다른 생명도, 마음과 신체라고 하는 2가지로 되어 있습니다. 마음은 변함없는 실체가 아니라, 순간순간 끊임없이 변해가는 하나의 흐름입니다. 신체는 어떻습니까? 신체도 그와 같이 순간순간 끊임없이 변해가는 흐름입니다. 이 세상에 태어날 때는 3킬로 정도의 새로운 아이입니다. 그러나 죽을 때는 낡아빠진 노인입니다. 인간의 세포는 대체로 3개월마다 바뀝니다. 반년 정도 지나면 완전히 다른 신체로 바뀐다고 이해하는 것이 좋습니다. 신체도 변화하는 흐름이듯이, 마음도 변화하는 흐름인 것입니다. 사람이 죽으면 육체는 이 세상에 놓아둡니다. 신체의 흐름이 죽음과 동시에 멈춥니다. 그러나 마음은 계속 흘러갑니다. 사후도 흐르는데, 마음의 변화는 신체의 변화보다 빠릅니다. 손가락을 튕기는 정도의 시간이면, 마음은 무수하게 일어나고 사라집니다.
「흐름」이라고 하는 말을 잘 이해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폭포, 강 등도 흐름입니다. 폭포가 있다고 생각해도 그것은 세속적인 언어일 뿐, 실제 폭포는 순간순간 바뀌는 것입니다. 2번 똑같은 폭포를 볼 수 없지만, 우리는 같은 폭포를 보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같은 폭포를 보고 있다는 생각이 착각인 것은 간단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마음의 무상의 속도를 이해하기 위해서, 빛은 좋은 예입니다. 광속은 1초간에 30만km를 갑니다. 똑같은 형광등의 빛이라고 생각해도, 1초간에 30만km의 속도로 빛이 흐르고 있는 것입니다. 결코 같은 빛을 볼 수 없습니다. 같은 빛을 보고 있다는 생각은 뇌의 착각에 지나지 않습니다.
마음은 빛의 속도보다 빠릅니다. 인간이 「내가 있다, 영혼이 있다」라고 오해하는 것은 마음의 속도를 실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마음도 폭포와 같은 하나의 흐름인 것입니다. 신체가 망가져도 마음은 같은 스피드로 흘러갑니다. 윤회하는 주체는 전혀 있을 수 없다고 단언하면서, 불교에서 윤회가 있다고 하는 것은 이 마음의 흐름입니다.
그런데 인간은 마음의 성장에는 흥미가 없습니다. 육체는 자신을 잊을 만큼 열중합니다. 사는 힘의 모든 것을 동원하여 육체를 돌봅니다. 그러나 죽음의 순간에는 육체를 버리지 않으면 안 됩니다.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육체를 위해서 획득하는 재산, 명예, 가족 등의 모든 것을 죽음에 의해 버리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러나 마음에게 도움이 되는 것을 얻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은 적습니다. 만약 마음을 성장시켰다면, 마음을 맑고 깨끗하게 하였다면, 지혜를 개발하는 노력을 했다면, 그 영향은 마음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마음은 하나의 흐름이므로 죽음에 의해 단절되지 않습니다. 이것을 알기 쉽게 말하면, 사후에 가지고 갈 수 있는 것은 마음의 재산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러한 이유로, 사람의 가치는 외형으로 판단하는 것은 아닙니다. 마음의 성장의 정도, 인격 등으로 평가해야 합니다.
마음의 덕으로 생명의 가치가 성립되는 것이라고 하는 것을 세상에 설득하기 위해서, 불교는 치열하게 노력을 했습니다. 카스트 제도의 신분 차별로 병들고 있던 인도 사회에 부처님께서는 정면으로 공격을 했습니다. 비록 바라문이든, 도둑이든, 불가촉천민이든,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고귀한 인간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차별을 없애는 것은 아직껏 되지 않고 있습니다. 말로만 「평등」을 말하고, 실제의 사회에서는 전혀 실행되고 있지 않습니다. 인간은 민족의 이름으로, 나라의 이름으로, 피부의 색으로, 말하는 언어로, 차별합니다. 신체의 형태에서도 사람을 차별합니다. 사람에게 덕이 있는지 없는지는 생각하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이 현상은 인간의 「무지의 벽」이 얼마나 두꺼운가하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거대한 운석이 빠르게 떨어져도 깨지지 않을 정도로 이 「무지의 벽」이 두꺼울지도 모릅니다.
수행의 조언을 받기 위해서 숲에서 나와 부처님을 찾아온 30명의 비구들에게 우리가 가치를 가져야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부처님께서는 Lakuntaka Bhaddiya(라꾼따까 밧디야) 대 아라한을 예로 들어 말씀하셨습니다. 「Lakuntaka Bhaddiya(라꾼따까 밧디야)는 사미가 아니다. 장로다. 사람의 나이를 먹어 백발이 되었다고 해서 장로가 되지는 않는다. 단순한 늙은이이다.」라고 설하셨습니다. 이것이 중요한 포인트입니다. 우리는 노인을 존경해야 한다고 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이 말은 단언적이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나이를 먹는 것과 동시에 후배로부터 존경을 받게 되는 인간이 되지 않으면 안됩니다.
불교에서는 나이가 위인 사람과 덕이 위인 사람을 2종류의 「연장자」라고 합니다. 일반 사회에서는 나이가 위인 사람을 존경합니다. 그러나 덕이 위의 사람은 단언적으로 「연장자」로 간주합니다. 나이가 위인 사람이라도, 덕이 위인 연장자를 존경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어쨌든 덕도 몸에 익히는 일 없이, 지혜를 얻는 노력도 하는 일 없이, 나이만 먹고 있는 사람에 대해서 부처님께서는 「moghajin.n.o (모-가진나, 속이 빈 늙은이」라고 말합니다.
불교의 입장에서 장로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모든 생명보다 덕이 높은 분을 말합니다. 깨달음에 이른 성자는 모든 생명보다 뛰어납니다. 장로인 것입니다. 모든 생명에 존경을 받을 자격을 얻은 것입니다. 그래서 장로라고 불리기 위해서, 우선 마음으로 「진리」를 이해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세상의 지식을 가득 모아 지식인이 되어도 세상의 지식은 일시적인 것입니다. 사후에는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또 세상의 지식에 의해 마음은 욕구, 성냄, 아만, 자아 등의 번뇌에 더러워집니다. 그렇게 해서는 장로가 될 수 없습니다.
붓다가 말씀하신 진리를 이해하면 마음이 맑고 깨끗하게 됩니다. 마음은 성장하게 됩니다. 장로가 되는 길을 걷고 있는 것입니다. 불도를 실천해서, 진리를 스스로 발견하고, 번뇌를 끊어서, 해탈에 이르렀다면, 진짜 장로인 것입니다. 장로의 마음은 생명에 대한 자애로 흘러넘치게 됩니다. 마음은 평안합니다. 번뇌를 소멸했기 때문에 타락하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들도 세속적인 보물이 아니라, 마음의 보물을 획득하는 노력을 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세속적인 보물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은 이 지구의 흙일뿐입니다. 돈이 많다. 대저택이 있다. 요트를 가지고 있다고 자랑하지만, 실은 많은 흙을 자신의 것이라고 착각해서, 속이 빈 것을 자랑하고 있을 뿐입니다. 제트기를 가지고 있는 사람보다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고 하는 하나의 도덕을 지키는 분이 뛰어납니다. 연장자인 것입니다. 세상의 지식을 모두 머리로 기억하고 있는 사람보다는 모든 사물은 무상이라고 알고 있는 사람이 비록 세속적인 지식은 없어도 지혜가 있는 사람입니다. 사람의 가치는 외형이 아닙니다. 사람의 가치는 마음에 있는 덕에 의해 정해지는 것입니다.
● 이번 포인트
• 외형으로 사람을 판단해서는 안됩니다.
• 외모를 기준으로 하면 차별이 일어납니다.
• 세속의 재산은 죽음으로 끝납니다.
• 마음의 재산은 사후에도 계속됩니다.
• 생명의 가치는 마음에 있는 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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