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끊임없이 더러움이 일어나므로 수행에 휴식은 없다. (20150523. 서울)
주의 깊게 신경 써야 할 것은 마음입니다.
사람들은 육체가 가치 있는 소중한 것이라고 잘못 알아, 육체를 위해서라면 어떤 노력도 아끼지 않습니다. 뭐든지 합니다. 건강하게 되기 위해, 다이어트를 위해, 아름다워지기 위해서라면 독이라도 먹어 버립니다. 곤란을 당한 사람에게 만원 주는 일은 아깝지만 추악한 육체를 장식하기 위해서라면 몇 백만 원의 옷이나 장식품을 삽니다. 돈이 없으면 빌리고서라도 삽니다. 할부해서라도 삽니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인간은 상당히 바쁩니다. 여유가 없습니다. 그렇게 바쁘게 무엇을 하는지 보면, 대부분 육체의 유지, 관리, 처리를 위한 일로 바쁩니다. 인간에게 있어서 이것이 사는 목적이 되어 있습니다. 이 세상의 기술, 예술, 경제활동, 정치, 지식 등도 육체를 위해서 필요한 것이 되었습니다. 인간에게는 육체 이외에 가치 있는 것을 찾아낼 수 없습니다. 인간에게 있어서 절대적인 신은 다름 아닌 육체인 것입니다. 특정의 믿음이 있든 없든, 인간은 거의 육체님의 신도인 것입니다.
자신의 전 재산을 쏟아붓고, 모든 정신적인 에너지를 소비해서 육체의 유지 관리를 해도, 필사적으로 육체를 지키려고 해도, 확실히 육체님이 배신합니다. 육체는 늙어 무너지고 망가져 버립니다. 육체는 죽습니다. 일생의 노력, 허비한 재산, 모든 것이 쓸데없게 됩니다. 쓸데없는 일을 하고 있다고 알면서도 쓸데없는 일에 손을 댑니다. 그러면서 「모두 죽는다!」라는 사실을 무시합니다. 「내가 죽을 리 없다」라는 전제로 육체님에 대한 신앙을 계속합니다. 만약 죽을 리가 없다면 육체를 위해서 고생해도 납득이 갑니다. 경제발전, 과학기술의 발전, 싸움, 전쟁 등은 잘 납득하고 나서 행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신체를 위해서 살아야 하는 것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의심도 하지 않고, 납득하여 살아갑니다. 이 납득의 배경에 있는 것은 「내가 죽을 리가 없다」입니다.
그러나 「내가 죽을 리가 없다」라고 어느 누구도 말하지 않습니다.
부처님께서 「죽음」이라는 사실을 철저하게 관찰하도록 말씀하신 것은 인간의 쓸데없는 어리석은 무의미한 삶의 방법을 가치 있는 삶의 방법으로 바꾸기 위해서입니다.
「나는 죽는다라고 아는 사람은 분쟁, 투쟁 등은 하지 않는다」(Dh.6)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당연한 사실을 부정하며 진리에 이를 수는 없습니다. 사실을 부정하고, 존재하지도 않는 망상적 관념에서는 행복하게 될 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겉으로는 무슨 말을 해도, 인간의 본심은 사실을 부정합니다. 행복에 도달하는 길로서 죽음의 진리를 관찰하라고 말하면 싫어합니다. 의심합니다. 위험하지 않을까라고 반문합니다. 「영원의 천국ㆍ극락」 등의 관념을 세일즈 포인트로 한다면, 아무 주저함이 없이 따르는 기분이 일어납니다. 이것이 인간의 본심인 것입니다. 이 본심은 마지막이 없는 무지입니다. 이러한 무지를 붓다께서 폭로하셨습니다.
눈을 뜨고 자신의 신체를 봐 보십시오. 단순한 물체입니다. 더구나 자연의 물체보다는 부정하고, 무르고, 간단하게 망가집니다. 부정하여 악취로 가득 찬 육체를 생활 쓰레기 취급할 수 없는 것은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사고, 감정 등이 있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마음이라고 해도 그것도 또한 성스러운 것, 고귀한 것이 아닙니다. 움직이고, 호흡하고, 먹고, 생각하고, 감각이 있고, 인식하고 등 이 구체적인 기능이 마음입니다. 고귀하다는 것보다 모든 생명에 공통되는 기능인 것입니다. 그러나 「산다고 하는 기능」이 육체보다는 훌륭합니다. 마음이 육체를 유지 관리합니다. 마음의 입장으로부터 보면 육체라는 것은 마음에 자극을 주는 도구에 지나지 않습니다. 기계인 것입니다. 육체라는 기계는 기능할 수 없게 된 시점에서 마음에서 버려집니다. 그래서 주의 깊게 신경 써야 할 것은 마음입니다.
육체의 관리자인 마음은 신체보다 훌륭하지만, 성격이 나쁘고, 야무지지 못하고, 무지하고, 자기 관리마저도 할 수 없고, 일정하지 않고, 도움이 안 되고, 신뢰할 수 없고, 이기적인, 우리의 지배자요 관리자인 마음은 이런 것입니다. 그리고 육체 지상주의자로 살려고 하는 것은 마음의 결정인 것입니다. 당연히 잘못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삶의 방법은 한계가 없는 고민과 괴로움에 흘러넘치고 있습니다. 행복하고 보다 즐거워질 목적으로 사람들은 여러 가지를 궁리합니다. 다양한 기술을 발전시킵니다. 정치 제도를 개선해 나갑니다. 보다 편리한 삶의 방법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노력해도 옛날이나 지금이나 사는 것은 큰일입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인간끼리 싸우고 있습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강자가 약자를 착취하며 삽니다. 강자도 괴로워하고 있고, 약자도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인간의 노력은 이런 모순을 가지고 있습니다. 지식인이라면, 사실을 알고 있다면, 이해 능력이 있다면, 모순과 관련된 세계를 쌓아 올리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순은 엄연히 존재합니다. 예를 들어 경제가 좋아지면 풍족하게 되어 빈곤이 사라진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경제발전을 하지만, 결과적으로 일부는 풍족하게 되고, 일부는 빈곤하게 됩니다. 경제발전과 함께 자연도 파괴되어 자원이 없어집니다. 새로운 문제가 일어나 괴로워하게 됩니다. 그래서 말할 수 있는 것은 옛날보다 상황과 환경이 변하였지만, 괴로움만은 변함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요? 인간의 사고입니다. 사고는 마음의 기능입니다. 마음이 무지합니다. 있는 그대로의 진리를 모릅니다. 있는 것을 없다고 하고, 없는 것을 있다고 생각합니다. 전도된 것입니다. 마음이라고 하는 관리자의 마지막이 없는 무지를 고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무지 대신에 지혜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주의 깊게 신경 써야 할 것은 마음입니다.
마음은 끊임없이 생각합니다. 끊임없이 모든 것을 인식합니다. 그것에 따라 자극을 받습니다. 자극이 다음의 생각을 낳습니다. 그래서 또 자극이 나타납니다. 이와 같이 마음은 무한하게 회전합니다. 마음의 기능에 의해 나타나는 근심도 끝없이 회전합니다. 마음이라는 것는 논스톱(무정지)의 기능이므로 육체가 망가졌다고 해도 인식기능이 멈추지 않습니다.
마음이 「사고한다」라고 해도 있는 그대로의 진리를 모르기 때문에 이 사고는 사실에 바탕을 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인간이 무엇을 생각해도 어떠한 문제에 대해서 최종적인 결론은 나오지 않습니다. 결론을 내도 그 대답에 모순이 생깁니다. 그러므로 마음이 사고한다고 하는 것보다는 「망상한다」라고 하는 것이 올바릅니다. 무지, 성냄, 욕구라고 하는 감정에 의해 망상이 나타나서, 그 망상이 다시 마음에 무지, 성냄, 욕구의 감정을 되돌림(피드백)합니다. 이 감정에 대해 불교에서는 āsava(번뇌, 오염)입니다. 「더러움」이라고 이해하면 간단합니다. 마음은 더러워져 있습니다. 따라서 마음은 정상적으로 기능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기대한 결과는 얻을 수 없습니다. 결과는 올바르지 않습니다. 행복하게 되려고 노력해도 행복하게 안됩니다. 그런 차례로 진행됩니다.
그럼 어떻게 하면 될까요? 대답은 명확합니다. 마음의 더러움을 뺍시다. 망상을 멈춥시다.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발견합시다. 이것을 할 수 있으면 흐름은 바뀝니다. 마음이 올바르게 기능합니다. 따라서 기대한 결과를 얻을 수 있습니다. 생명은 행복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따서 자연스럽게 행복하게 됩니다. 그런 차례로 진행됩니다. 어떤 하나의 망상이 떠오르면, 그 결과의 감정이 되돌아오므로, 다음의 망상이 일어납니다. 망상→감정→망상→감정의 흐름입니다. 요컨대 망상⇔감정입니다. 간단하게 말하면 더러움(āsava)이 끊임없이 솟아 나오는 것입니다. āsava는 솟아 흘러나온다는 의미입니다. 이 흐름을 어떻게 해서라도 끊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근심의 문제(망상의 결과)는 생명이 먼저 관심을 가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철학자, 종교가, 지식인뿐만 아니라, 과학자도, 이 문제에 접근하고 있지만 완결은 없습니다. 일시적인 해결책을 만들지만 결과적으로 새로운 문제(근심)가 나타납니다. 부처님께서는 이 문제에 대해 최종적인 결론을 제시하셨습니다. 해탈, 열반, 깨달음 등의 말로 나타내고 있는 것이 최종적인 답인 것입니다. 이것은 모든 해야 할 것을 끝낸 상태입니다.
부처님의 시대에 뿐나(Punnā)라는 궁핍한 여성이 있었습니다. 부잣집에서 하인으로 있던 그녀는 주인에게 많은 쌀이 필요해서 밤늦게까지 도정작업을 하고 있었습니다. 한밤중도 지났습니다. 그녀가 일을 하고 있던 주위에 비구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답바(Dabba) 장로가 비구들을 각각의 방에서 호출해 설법을 듣기 위해서 데리고 가는 것을 뿐나가 보았습니다. 「뭐지? 이 시간까지 수행자들이 자지 않고 있었단 말인가? 아직 일이 끝나지 않은 나는 가난하기 때문에 밤에 잘 틈이 없지만, 수행자들은 잘 수 있는데, 무슨 일이 있는 모양이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또 어느 날 아침 조금 쉴 수 있어서 쌀가루를 구워 한 장의 빵을 만들어 강가로 먹으려고 나갔습니다. 그 자리에 부처님이 계셨습니다. 「나는 부처님을 뵙는 일이 있어도 가난하여 보시하는 일이 없었다. 음식이 있을 때는 부처님을 뵐 수 없었다. 지금은 한 장의 빵도 있고 부처님도 뵈었다. 내가 먹는 것보다 보시하는 편이 좋겠다! 그렇지만 부처님께서 이런 맛없고 질긴 빵은 드시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것을 생각해도 의미가 없으니 어쨌든 보시하자!」라고 생각한 그녀가 한 장의 빵을 부처님의 발우 속에 넣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그녀의 마음의 갈등을 읽어 내셨습니다. 조속히 아난다 존자를 불러, 앉기 위한 돗자리를 깔라고 하고선, 앉으셨습니다. 그녀 앞에서 그 빵 한 장을 드셨습니다.
뿐나는 감동했습니다. 자신을 왕들이나 억만장자들과 아무 구별 없이, 평등하게 연민히 여기고 있는 것을 이해했습니다. 그녀는 부처님께 예경올리고 앉았습니다. 부처님께서는 그녀의 머릿속에 있던 생각을 물어보신 후 설법하셨습니다.
「너는 재산을 타고나지 않았기 때문에 하인으로 고생하고 있다. 지쳐도 밤에 잘 수 없다. 그래서 너는 밤에 잠도 자지 않고 노력하고 있다. 무슨 이익이 있는가? 다만 너의 신체를 유지하기 위해서이다.
나의 제자들은 대부분 밤잠을 자지 않고 일을 하고 있다. 잘 틈이 없다. 출가자의 일은 수행하는 것이다. 한가롭게 수행하면 되겠는가? 그렇게 할 수 없다.
순간순간 수명은 줄어들어 간다. 언제 죽을지 모른다. 빈둥거리면 깨달음을 이루기 전에 마음이 더러워진 채로 죽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모처럼 출가했는데 그 목적에 이를 수가 없게 된다. 그래서 밤늦게까지 자지 않는다.」
사람이 불행하고 괴로워하는 것은 재산이 없기 때문이 아닙니다. 뿐나는 자신이 가난하기 때문에 철야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결국은 부유한 사람들도 그처럼 잘 틈이 없습니다. 왕조차도 일이 너무 많아 잘 틈이 없습니다. 풍족하든 가난하든 인생은 괴로운 것입니다. 재산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마음이 더러워져 있기 때문에 사는 것은 고통스럽습니다. 마음을 맑고 깨끗하게 하면 행복하게 됩니다. 모두가 평등하게 재산을 타고나지는 않지만, 마음을 맑고 깨끗하게 할 기회만은 빈부를 가리지 않고 평등합니다. 최고의 행복을 누구라도 얻을 수 있습니다.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끊임없이 더러움이 솟아 나오는 것입니다. 빈둥거리고 있을 때도, 자거나 쉬고 있을 때도, 마음은 더러워지고 있을 뿐입니다. 더러워진 마음은 괴로움의 결과를 만듭니다. 따라서 부처님 제자들에게는 낮도 밤도 없습니다. 낮이든 밤이든 방치하면 마음은 계속하여 더러워지므로 수행에는 휴식이 없습니다. 수행이라는 것은 순간순간의 마음을 관찰해서, 더러움이 솟아올라 나오지 않도록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더러움을 끊어 반드시 열반을 체험하겠다고 목적을 정해 노력합니다. 순간순간의 마음을 관찰하면 실재하지 않는 망상은 할 수 없게 됩니다.
망상을 할 수 없게 되면, 안ㆍ이ㆍ비ㆍ설ㆍ신ㆍ의에 접촉하는 색ㆍ성ㆍ향ㆍ미ㆍ촉ㆍ법이라는 데이터를 왜곡하는 일 없이, 그대로 인식합니다. 객관적으로 모든 것을 관찰할 수가 있으면 모든 현상은 무상하고, 괴롭고, 실체가 없는 것임을 발견합니다. 이것이 지혜라는 것입니다.
지혜가 나타나면 「집착하는 것에 적합한 현상은 무엇 하나도 없다」라고 압니다. 이런 이해에 의해 진심으로 집착하고 싶어 하는 마음과 더러움이라고 하는 감정이 떨어집니다. 두 번 다시 나타나지 않습니다. 이것이 열반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 이번 포인트
• 신체는 마음의 도구입니다.
• 마음이 더러워져 있으면 사는 것이 고통스럽습니다.
• 마음의 더러움은 방치하면 끊임없이 솟아 나오는 것입니다.
• 수행에 휴식은 없습니다.
• 궁극의 행복을 얻을 기회는 누구에게나 공평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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