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법문교재/법문 교재(프린트물)

의지를 관리하면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다. (20151218)

담마마-마까 2022. 1. 29. 10:00

* 의지를 관리하면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다. (20151218)

 

¤ 사는 것은 행위이다 ¤

 

「살아 있다」라는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호흡을 하는 것, 밥을 먹는 것, 청소나 세탁 등을 하는 것, 공부를 하는 것, 일을 하는 것, 노는 것, 사람들과 대화 하는 것, 생각하는 것, 쉬는 것, 자는 것, 등의 행위를 하는 것을 두고 살아있다고 말합니다. 살아있는 사람이 하고 있는 행위는 무수히 많으므로 모든 것을 나열하는 것은 무리입니다. 멋을 부리고, 논의하고, 경쟁하고, 낙담하고, 흥분하고, 무서워하는 것 등도 행위입니다. 산다는 것은 어떤 행위를 계속하는 것이라고 우선 이해합시다.

 

¤ 행위를 일으키는 것은 의지다 ¤

 

요리를 만드는 것, 공부하는 것, 일하는 것, 경쟁하는 것, 노는 것 등의 행위는 의지에 의해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은 분명하게 아는 것입니다. 그러나 호흡하는 것, 심장이 활동하는 것, 졸려지는 것, 소화하는 것 등의 행위는 의지에 의해 관리되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세상에서는 무의식이라는 말까지 만들고 있습니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무의식이라고 하는 개념은 없습니다. 호흡하는 일도, 심장의 활동도, 의지의 명령으로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무의식을 인정하는 세계의 지식과 무의식의 개념이 없는 불교의 지식 중 어느 쪽이 올바른 것일까요?

 

「나는 책을 읽는다.」등의 행위의 경우는 「나」라고 하는 주어가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심장을 움직여 활동 시키고 있다」라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의식과 무의식이라고 하는 2개의 개념이 필요하게 됩니다. 그 말은 무의식을 인정하기 위해서는 개체로서의 「자아」가 전제로서 필요합니다. 그렇기에 자아가 없다고 역설하는 불교에서는 「무의식」이라고 하는 개념이 없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면 호흡, 심장의 활동, 소화하는 일 등의 행위는 의지의 지령으로 일어나고 있는 것일까요?

 

만일 이 「나」 라고 말해지고 있는 자아에게, 호흡을 일시적으로 멈추는 것을 부탁합시다. 이해하기 어려운 문장이 되었지만, 그 의미는 「일단 호흡을 멈추어 봅시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실험해 보면, 참기 어려운 괴로움이 일어나서 결국에는 호흡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상태에 놓여져 있는 것을 발견합니다. 동시에 살고 싶다, 죽고 싶지 않다, 고 하는 기본적인 갈애가 강렬하게 수면 아래에서 기능하고 있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 말은 사람이 알아차리지 못한 것뿐이지만, 호흡, 심장의 활동, 소화하는 것, 등의 행위는 강렬한 의지인 「생존욕구」에 의해 일어나게 됩니다.

 

무의식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의지의 힘이 지나치게 강렬하게 있는 상태입니다. 책을 읽는 일 등의 경우의 의지는 약합니다. 책을 읽는다고 결정했는데도 멈추기로 결정하는 일도 간단합니다. 배가 고파 밥을 먹는다고 결정해서 먹고 있는 도중에도 보다 중요한 일이 일어나면 밥을 먹는 것을 멈춥니다. 의식적, 의도적이라고 하는 행위의 의지는 약한 것입니다. 언제라도 바꿀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호흡하는 것은 무슨 일이 일어나도 멈추지 않습니다. 무의식적이라고 말하는 의지는 실제로는 강렬한 의지인 것입니다.

 

그래서 2종류의 의지가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 호흡하는 것, 심장이 활동하는 것 등의 「사람의 의지」로 관리할 수 없는 자연법칙으로서 반드시 일어나는 의지.

 

· 자유자재로 바꿀 수 있는 것, 유혹에 약한 것, 공부하는 것, 일을 하는 것, 등의 행위를 일으키는 의지.

 

간단하게 관리할 수 있는 의지와 관리 불가능한 의지라는 2종류가 되지만, 결국은 의지이므로 산다고 하는 행위는 의지에 의해 일어나는 것이라고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 자아는 사실을 속인다. ¤

 

요리를 만들고, 공부를 하고, 일을 하는 등의 행위는 「나의 의지로 행하고 있다」라고 간단하게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말로서는 「나는 요리를 만든다.」 등의 표현도 가능합니다. 가끔 「나는 호흡하고 있다」라고도 말할 수 있지만, 자고 있는 동안에서도 호흡하고 있기 때문에 그 문장은 정확하지 않습니다. 「나는 심장을 활동하게 하고 있다」라고 하는 문장은 성립도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세계는 모든 지식을 「나」라고 하는 주어로 통일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실제로 나·자아·생명·영혼 등의 무엇인가 영원불멸하는 것이 존재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자아의 존재는 증거에 의해서도 입증되지 않고, 노력하여 입증할 수 없는 개념이므로 미신 이외의 아무것도 아닙니다.

 

「나는 공부하고 있다, 나는 생각하고 있다, 나는 신의 존재를 믿는다, 나는 지구가 둥글다고 생각하고 있다」 등의 말로 「나」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어떤 중요한 점을 잊고 있습니다.

 

우선 살아있다고 하는 행위가 있습니다. 살아있기 때문에 나는 공부하고 있다 등으로 말할 수 있습니다. 말로는 「나는 살아있다」라고 말할 수 있지만, 사람은 의도적으로 살아가는 것은 아닙니다. 의도가 있든 없든 살아있습니다. 살아있다는 것은 행위의 연속인 것입니다.

 

「나」라고 하는 자아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내가 있다」라고 하는 착각을 일으킨 기초 행위를 조사하지 않습니다. 살아있다고 하는 기초 행위로부터 일어나는 이차적인 행위인 공부하는 것, 생각하는 것 등의 행위만 신경 쓰기 때문에 「나」라고 하는 자아가 착각인 것을 알지 못합니다. 이 이차적인 행위는 진리를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속입니다.

 

유일한 절대의 신이 존재하는지 질문받았던 적이 있습니다. 나는 「절대 있을 수 없다. 그것은 원시인의 미신 이외에 어떤 것도 아니다」라고 대답해서 많이 반감을 사고 말았습니다. 결국은 「나는 살아있다」라고 하는 실감이 있은 다음에, 이차적으로 일어나는 사고입니다. 「나는 살아있다」란 무엇인지 조사하려고도 하지 않고, 사람은 자꾸 이차적인 망상 개념에 얽매이고 있는 것입니다. 「나」라고 하는 개념, 또는 자아라고 하는 착각이 진리를 분명히 하는 것이 아니라, 속여서 잘못된 결론으로 이끕니다.

 

¤ 인식할 수 있는 의지 ¤

 

의지는 2종류로 나눌 수 있다고 이전에 설명했습니다. 그래서 책을 읽는 것, 일을 하는 것 등의 행위를 일으키는 의지는 인식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산다고 하는 기초 행위를 맡는 의지는 이대로의 능력으로는 인식할 수가 없습니다. 인식할 수 없는 의지는 강렬합니다. 보통은 그것을 관리할 수 없습니다. 힘겨운 일입니다. 마음대로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것이 일반인에게 이해 가능한 범위의 생각이지만, 불교는 그것을 「괴로움, 갈애, 무명」 등의 개념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지혜가 나타나면 관리 불가능한 의지의 관리도 할 수 있습니다.

 

¤ 의지는 약하다 ¤

 

지금부터 관리할 수 있는 의지에 대해 생각해봅시다. 이 의지는 기본적으로 약합니다. 사람은 가끔 강한 의지로 행동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의지는 아무리 강하다고 말해도 바꿀 수가 있습니다. 사람은 약한 의지를 강하게 하기 위해서 매우 고심하고 있습니다. 선한 일을 하려고 하는 의지라면 강화하는 것이 좋지만, 나쁜 일을 하는 목적의 의지는 강화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은 가끔 우리에게 나쁜 일을 하라고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학생들끼리는 동료에게 도둑질을 시키기도 하고, 어른들은 장부를 속이거나 경비를 부풀리거나 하는 일이 있습니다. 그러한 일을 하라고 말하면 초보자는 주저합니다. 할 용기가 나오지 않습니다. 의지가 약한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한 사람을 세상은 「겁쟁이」라고 부릅니다. 선한 일에 의지를 강하게 가지면, 예를 들면 일을 성실하게 하도록 전념하면, 세상은 칭찬해 주지 않습니다. 바보라고 하거나, 우직하다고 하거나, 재미없는 인간이라고 말해질지도 모릅니다.

 

이것이 현실이기에 보통의 인간은 대담한 노력으로 강한 의지를 가져서 악행을 합니다. 그 이외는 약한 의지로 살아갑니다. 선한 행위를 하는 의지는 강화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선한 행위는 비난을 받지 않고, 위험한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간단하게 유혹됩니다. 재미없는 인간이다, 지루한 인간이다, 어리석다 등으로 말하면, 선한 행위를 하려는 의지가 사라지고, 대중들 입맛에 맞는 악행을 하려는 의지를 일으킵니다. 악행을 하고 싶다고 생각해도, 비판받을 것이 무섭고 처벌받을 두려움이 있기 때문에, 의지를 강화하지 않으면 행위를 실행할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의지가 약하다고 하는 현상은 좀처럼 변함없습니다.

 

¤ 강한 의지를 가진다는 것 ¤

 

무비판적으로 「강한 의지를 가져야한다」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인간은 탐·진·치의 충동으로 행위를 일으켜 살아있습니다. 그래서 사람의 의지는 기본적으로 악행을 일으킵니다. 사람은 악행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가벼운 기분으로 죄를 범할 수는 없습니다. 악행을 하며 사는 인간을 대담한 범죄 행위로 유혹하는 것은 그래서 어렵지 않습니다. 그래도 보통 사람은 죄를 범할 때는 강한 의지를 가지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러한 일반적인 의지의 강화는 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선한 일을 하고 싶어지는 의지를 굳이 강화하는 편이 좋습니다. 선한 일을 하는 경우는 주변 사람들이 응원해주지 않고, 의지를 강화해 주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선한 일을 하는 사는 사람은 동료가 적고 고독감을 느끼는 일이 있을 수 있습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선한 행위를 일으키는 의지를 강화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불교의 업의 가르침을 잘 이해하는 것으로, 반복해서 선한 행위를 하는 것으로, 의지는 강해집니다. 선한 일을 하고 있는 자신을 칭찬해 주는 일도 좋습니다. 누구의 비판도 받아야 할 행위를 하지 않으면, 자신의 인생에서 위험한 일이 없고 숨겨야 할 일이 아무것도 없으면, 자신에 대해서 자신을 가지는 것으로 의지가 강해집니다. 좋은 인간으로서 사는 것은 세상과의 싸움이 아니라, 자기 자신과의 싸움입니다. 적이나 경쟁자는 결국 자기 자신임을 이해해서 선한 행위를 하면, 의지는 흔들리지 않습니다.

 

¤ 인생은 선한 행위로부터 시작한다. ¤

 

선행을 해야 한다고 어느 정도 이해한 사람은 어디서부터 시작하면 좋을까요?

 

살아가는 것은 행위를 하는 것입니다. 행위는 의지가 일으킵니다. 수행에 의해 마음을 향상시키지 않은 사람에게는 인식할 수 없는 의지의 관리는 불가능합니다. 인식할 수 있는 의지를 관리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여기서 부처님의 좋은 조언이 필요합니다. 무엇인가의 행위를 하는 경우, 그것이 악행이라면 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세상은 행위를 하지 않는 사람을 게으름뱅이라고 말합니다. 도움이 되지 않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그처럼 말해도 상관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하려고 하는 행위, 또는 다른 사람이 자신에게 하라고 말하고 있는 행위가 악행이라면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는 편이 좋습니다. 왜냐하면 나중에 불행하게 되거나 후회하는 상황이 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양심을 아프게 하는 행위라면 멈추는 것입니다.

 

자신의 양심을 아프게 하지 않는 행위라면 즉시 하는 것이 좋습니다. 사람은 행위를 활발하고 밝게 살아야 한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맹목적으로 무엇을 해도 좋다는 것은 아닙니다. 선한 행위라면 기꺼이 실천하면 좋습니다. 나쁜 행위의 경우는 소극적이거나 게으름피워도 괜찮습니다. 나중에 후회하지 않는 행위는 선행이라고 쉽게 이해하면 잘 되어갑니다.

 

이 부처님의 조언은 매우 간단합니다. 나쁜 것이라면 멈춘다. 선한 것이라면 한다. 그뿐입니다. 그러한 길을 걷는 의지를 다양한 방법으로 강화해서, 「견고」해 지는 것이 좋습니다. 그것이 좋은 인간으로 살기 위한 것이고, 실패하지 않는 방법인 것입니다. 이 방식으로 선행을 하려는 의지를 강화하면, 악행을 하려는 의지가 일어나지 않게 억제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서서히 지혜가 나타나므로, 인식 불가능한 의지의 관리도 할 수 있게 됩니다. 그것은 해탈에 이르는 길이 됩니다.

 

● 이번 포인트

 

• 산다는 것은 행위를 하는 것입니다.

• 의지가 행위를 일으킵니다.

• 의지가 더러워지면 인생은 악의 길이 됩니다.

• 맑고 깨끗한 의지를 일으켜서 인생을 걸어야 합니다.

• 의지의 관리는 중요한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