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합을 만들기 때문에 번뇌는 무섭다. (20151211)
「숲을 베어내라. 그러나 나무를 베어내지 마라.(Vanaṁ chindatha mā rukkhaṁ)」
이것은 부처님의 말씀입니다. 만약 누군가가 그냥 한 말이라면 무시할 수 있지만, 이 말은 엄연한 부처님의 말입니다. 알기 쉽고 명확하게 말하는 것도, 특별하게 말하는 것도 부처님 특유의 능력입니다. 그러나 이 게송의 의미는 일반인에게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말인 듯합니다. 그러나 테라와다 불교에서는 「화두」와 같은 것은 눈에 띄지 않습니다. 그래서 모르겠다고 편하게 처리하는 일도 할 수 없습니다.
나무를 베어내지 않고서는 숲을 벌목할 수 없습니다. 숲의 벌목은 나무를 베어내는 일입니다. 그래서 문제는 「왜 숲을 벌목하는가?」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수수께끼를 푸는 힌트가 다음의 게송에 있습니다.
「위험은 숲으로부터 생긴다. (vanato jāyate bhayaṁ)」 여기서 왜 숲을 벌목해야 하는 것인가 라고 하는 이유를 얻을 수 있습니다. 숲은 위험하지만, 나무는 위험하지 않습니다.
요즘은 숲이 위험하다고 하는 것을 실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숲에서 마음과 몸을 치유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옛날은 달랐습니다. 숲 안에는 여러 가지 짐승들과 독사, 도둑 등이 숨어 있습니다. 어디에서 습격당할지 모릅니다. 지금과 달리 인가는 멀고 숲은 상당히 컸습니다. 근처의 마을로 가려한다면 위험한 숲을 통과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반드시 통과해야 합니다. 옛날 사람들은 나무 하나 하나는 아무런 위험도 없지만, 숲 그 자체는 위험하지 짝이 없는 영역이라고 절실히 느끼고 있었습니다. 더구나 옛날 생활방식은 숲이 없으면 성립되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위험하다고 해도, 살해당할 염려가 있다고 알고 있어도, 살기 위해서는 숲에 들어가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살기 위해서 숲에 들어가는데, 그 숲이 그 사람의 생명을 빼앗습니다.
이것이 인생입니다. 시대와 함께 숲은 사라져 갔지만, 숲과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관계를 가지고 있던 옛날 사람들의 인생과 지금의 인간의 인생은 변함이 없습니다. 죽을 염려가 있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옛날은 살기 위해서 숲에 들어갔습니다. 지금 우리는 살기 위해서 오히려 트러블만 만들고 있습니다. 자연 파괴가 좋은 예입니다. 공기와 물을 더럽히고 자연을 파괴합니다. 살기 위해서 그렇게 합니다. 똑같이 최근에는 경제 위기라는 말이 자주 사용되고 있습니다. 해결책으로서 소비를 확대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소비를 확대하기 위해서는 많은 물건을 만들어 판매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합니다. 세일 등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소비자를 흥분시켜서 사지 않을 수 없게 유혹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산화탄소 감소 등을 생각하고 있을 때가 아니라고 합니다. 그래서 「이러한 삶의 방법은 환경파괴가 되므로 다시 제고하는 것이 좋겠습니다.」라고 말하면 비난을 받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살기 위해서 숲을 파괴하는 것과 같이 분명한 모순입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돈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기 때문에, 죽어도 좋으니 돈만 열심히 벌어라」라는 것과 같습니다. 「숲을 벌목하라. 그러나 나무를 베지 말라.」라고 하는 말로 부처님은 사는 것의 모순을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난제입니다.
이제는 「숲은 위험하다」고 하는 말을 이해합시다.
하나하나의 나무는 위험하지 않는데, 왜 숲은 위험한 것일까요? 그 대답은 현대의 삶의 방법을 봐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우리는 산소를 태우고 이산화탄소를 내보내며 살아왔습니다. 대기 중의 이산화탄소의 비율은 약 0. 04%로 변함없었습니다. 우리는 살기 위해서 숲을 없앱니다. 공장이나 자동차 회사를 만들어 끝없이 화석연료를 태웁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이산화탄소의 농도가 올라갑니다. 비율상으로는 미약하지만 대기로 생각하면 상당한 양입니다. 그것은 지구에 온실효과를 가져오는 것으로, 환경이 바뀌고 있다는 것을 누구나 몸으로 느낄 수 있을 만큼 변해갑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필요 없는 것은 바다에 흘렸습니다. 바다는 지구의 표면의 70%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흘려보내는 오폐수는 미미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어떻습니까?
아프리카나 아마존의 분지에는 군대 개미가 있습니다.
그 개미 한 마리에 물리면 그 개미를 붙잡아 버려버리면 됩니다. 조금 따끔거릴지 모르지만 아무 위험도 없습니다. 그러나 군대 개미의 집단에게 걸리면 목숨이 위험해집니다. 만약 저항할 기력마저 없다면 남는 것은 뼈뿐입니다.
군대 개미 한 마리에 물리면 따끔거리지만 어떻게든 됩니다. 그러나 수많은 군대 개미에게 물리면 생명마저 위험해집니다.
이러한 예에서 말하고 싶은 요점은 한 개뿐이라면 문제가 없지만, 많이 갖추어지면 매우 큰 문제라고 하는 것입니다. 숫자는 힘입니다. 이 세상에서 좋은 것이라고 하는 것이든, 나쁜 것이라고 하는 것이든, 그 수가 증가하면 위험한 것이 됩니다. 비가 내리는 것은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너무 내리면 위험합니다. 설탕은 신체에 불가결한 것입니다. 그러나 너무 섭취하면 병으로 요절합니다. 한사람의 젊은이가 살인을 범해도 단순한 범죄로 큰 문제는 없습니다. 그러나 여기저기에서 젊은이가 사람을 죽이게 되면 매우 큰 문제입니다. 범죄의 단속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습니다.
동류의 것이 그룹을 만들면 위험한 것과 같습니다.
혼자서는 아무 힘도 없습니다. 숲의 나무는 하나하나라면 아무 위험도 없지만, 나무들이 모여 그룹을 만들면 위험한 숲으로 변신합니다. 부처님께서는 이 그룹화 하는 것의 위험한 기능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것도 알기 쉽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옛날 사람들은 숲의 위험성을 새삼스럽게 말할 필요도 없이 일상 경험으로서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당연히 벌목해야 할 것은 숲이 됩니다.
그런데도 이 부처님 말씀의 의미를 아직 이해하기에는 이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숲(vana)이란 불교 용어로 번뇌·마음의 더러움을 의미합니다. 특히 애욕, 갈애를 나타내기 위해서 사용하는 말입니다. 만약 사람이 우연히 무엇인가 갖고 싶었다, 우연히 무언가에 대해 화내 버렸다, 등이 있다고 합시다. 그것은 큰 문제는 아닙니다. 얼마 되지 않아서 그 기분은 사라져 버립니다. 그러나 욕구·분노·무지 등의 감정이, 마음의 더러움이, 군집을 만들면 대단히 위험한 것이 됩니다.
우리는 우연히 화내는 것이 아닙니다. 화내고 있을 뿐인 것입니다. 우연히 욕구가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욕구로 살아있습니다.
무지는 일순간이라도 마음에서 떨어지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우연히 판단 착오로 어리석은 일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평소의 일입니다.
이렇게 설명하면 부처님 말씀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좋은 것이라도 군집을 만들면 위험한데, 우리가 군집을 만드는 것은 나쁜 것투성이입니다. 살아가면서 마음의 더러움이라는 거대한 끝이 없는 숲을 만듭니다.
마음의 번뇌를 끊어서 해탈에 이르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인 것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하나의 욕구에, 하나하나의 분노에, 하나하나의 질투에, 일일이 대응하려고 하면 무한하여 끝날 것 같지도 않은 일이 됩니다.
여러 가지 것을 보거나 듣거나 냄새 맡거나 맛보거나 느끼거나 생각하거나 하는 것이 사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대상이 신체의 육근에 접하고 있습니다.
그때 욕구가 일어나는지, 분노가 일어나는지, 무지가 일어나는지, 그 외의 번뇌가 일어나는지 모릅니다. 어떤 소리를 듣고 화냈다고 해도 「나는 그 소리를 들으면 반드시 화낸다.」라고 하는 공식은 성립되지 않습니다. 그때마다 번뇌를 끊는다고 하는 것은 무리입니다. 불가능합니다. 실천적이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세상은 그때 그때 조심하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속세의 생각입니다. 그때 그때 조심하는 것은 관념적으로는 좋을지도 모르지만, 실천적으로는 무리한 이야기입니다.
하나하나의 욕구나 분노 등은 나쁜 것이 당연하지만, 처리할 수 없을 정도로 큰 문제는 아닙니다. 악영향을 주지 않게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번뇌가 무리를 만드는 것만은 완전하게 끊는 편이 좋습니다.
무리를 만든다는 것은 「서로 무엇인가 비슷한 곳이 있어 연결될 수가 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자석은 자석에도 연결되고, 철에도 연결됩니다. 알루미늄, 플라스틱 등에는 연결되지 않습니다. 알루미늄인데 자석이 연결되면 어떻게 말합니까? 그 알루미늄은 순수 알루미늄이 아니라, 철의 분자가 섞여 있는 것이 됩니다.
이야기를 번뇌에 되돌립시다. 번뇌는 세밀하게 쪼개서 나누면 150010가지가 있다고 말해지고 있습니다. 번뇌의 내용을 보면 많이 다르기에 조합을 만들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질투가 있다면. 질투가 있는 마음에 욕구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비슷할 것 같으면서 비슷하지 않습니다.
욕구가 있으면 밝고, 질투가 있으면 어둡습니다. 후회라고 하는 번뇌가 있습니다. 후회가 있는 마음에도 욕구는 동거하지 않습니다. 닮은 번뇌라면 군집을 만듭니다. 그것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일반적으로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무언가에 대해 미움을 안고 있는 사람이 있다고 합시다. 그 사람이 세월이 지나도 미움이 계속된다면, 타인을 파괴하든지, 자신을 파괴하는 것으로 진행됩니다. 누군가를 일방적으로 좋아한다면 스토커가 되어 버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이처럼 정신적으로 극한으로 가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의 번뇌에 집중해서 사로잡히지는 않습니다. 서로 성질이 다른 번뇌를 회전시키고 있으므로 자폭에 이르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속세에서는 그래서 안심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화내지만 격렬하게 화내지 않는다, 욕구는 있지만 탐욕에 빠지지 않는다,……등등의 자기 통제를 하는 것 같습니다. 속세에서는 「절제할 줄 안다」고 평가합니다. 그렇게 되면 해탈은 필요 없게 됩니다. 그러나 안이한 생각입니다. 번뇌가 있기 때문에 언제든지 군집을 이룰 위험성은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모든 번뇌는 서로 닮지 않은 것처럼 보여도, 쉽게 모여 밀림을 만들고 있는 것을 발견하셨습니다.
감정이 일어나서 어떤 문제가 생겨도 그것은 이 세상에서 어떻게든 처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번뇌가 밀림을 만들고 있기 때문에 윤회로 끊임없이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어찌할 도리가 없습니다. 처리도 불가능하게 되어 있습니다.
붓다 이외에 어느 누구도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습니다.
서로 닮지 않은 번뇌가 왜 모이는 것일까요? 이 중개역은 누가 하고 있는 것일까요? 이 번뇌의 군집의 두목, 의장은 누구입니까?
그것은 무지입니다. 무명이라고도 말합니다. 무지라고 말하면 탐·진·치의 어리석음으로, 역할은 정해져 있습니다. 같은 무지가 모든 번뇌를 정리하는 중개역, 또는 의장 역을 실행하고 있는 경우는 무명이라고 말합니다. 욕구와 분노는 알기 쉽지만, 무지는 투명해서 발견할 수 없습니다. 방사능과 닮아있습니다. 모기 무리가 와서 공격하면 쉽게 발견할 수 있어서 퇴치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방사선이 새어도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합니다.
그래서 투명한 번뇌가 가장 위험합니다. 투명하기 때문에 일체의 번뇌와 조합을 만들 수가 있습니다.
결국은 무명이 있기 때문에, 무지하기 때문에, 다른 번뇌가 일어납니다. 무명을 끊는 것으로, 번뇌의 조합이 흔적도 없이 망가져 버립니다. 이것이 나무를 베어내지 않고 숲을 벌목하는 방법인 것입니다.
또 숲을 봅시다. 큰 나무로 숲(vana)이 무성하여 위험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나무 밑에는 잡초도 자라고, 키가 크지 않아도 밀도 높은 숲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것을 빨리어로 vanatha(와나타) 라고 말합니다. 그것도 안심할 수 없습니다.
마음의 상황으로 설명하면, 범죄, 죄를 범할 정도의 탐·진·치는 vana(와나, 숲)입니다. 그런데 어떤 죄도 저지르지 않고 보통으로 생활하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도 탐·진·치가 있으므로 숲을 만들고 있습니다. 그것이 나무 밑의 잡초인 vanatha(와나타) 입니다. 안전을 확보하고 싶은 사람은 숲과 나무 밑 그늘에서 자라는 잡초 양쪽 모두를 베어내야 합니다. Vana가 없는 곳은 빨리어로 nibbana (닙바나)가 됩니다. 번뇌가 없는 상태가 nibbana(닙바나) 입니다.
그다지 위험을 느끼지 않는 작은 욕구라도, 방치하면 몇 번이나 일어나기 때문에 군집을 만들어 버립니다. 군집을 만드는 것으로 번뇌는 위험하게 됩니다.
그래서 불교도는 작고 미세한 번뇌에 대해서도 위험시해야 합니다.
● 이번 포인트
• 악업도 하나라면 힘이 약합니다.
• 악한 마음이 무리를 만들면 끝없이 위험하게 됩니다.
• 선한 마음은 무리를 만들면 해탈을 이루게 됩니다.
• 무리를 만들기 때문에 미세한 번뇌도 조심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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