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법문교재/법문 교재(프린트물)

깜맛사까따- 냐-나(kammassakatā ñāṇa)-2. (20151113)

담마마-마까 2022. 1. 25. 09:00

* 깜맛사까따- 냐-나(kammassakatā ñāṇa)-2. (20151113)

 

냐나는 쉽게 말해 빤냐(지혜)입니다. 깜맛사까따 냐나(중생들은 자신만의 업을 갖고 있다는 지혜)는 업과 그 결과에 대한 이해입니다. 가장 기초적인 수준에서 그것은 일상에서의 인과를 나타냅니다. 중생은 조건(paccaya)으로 인하여, 심지어 다른 영역(bhumi)에서 조차도, 태어날 때부터 다릅니다. 그렇게 될 만한 조건이 있음에 틀림없으므로 중생이 다 다르다는 것은 자명합니다. 업 때문에 동물과 사람은 다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깜맛사까따 냐나라는 용어를 사용함에 있어서 냐나가 빤냐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언제 업과 업의 결과가 존재하는 것일까요?

 

이론적으로 우리는 유익함(kusala)와 유익하지 않음(akusala)으로 이루어진 업이 속행심(javana citta)의 과정동안 일어나고, 그 결과(vipāka) 재생 연결식(paṭisandhi citta, 다시 태어남에 대한 의식)과 그 다음 생명 연속성(bhavaṅga)이 일어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 후에 자나꼬빳탐바까 깜마(janakopatthambhaka kamma, 과보를 낳도록 지지하는 업)로서의 업은 보는 의식(cakkhu viññāṇa), 듣는 의식(sota viññāṇa)등이 일어나게 하는 결과를 여전히 생산합니다. 자나꼬빳탐바까 깜마는 다시 태어남의 원인이 될 뿐만 아니라 보거나 듣거나 등을 하게 함으로서 삶을 유지시킴을 뜻합니다. 우리의 일생동안 지금과 같은 이름, 가족, 생활방식, 환경에서 태어나지 않았을 경우의 결과를 초래하는 다른 업 또한 있습니다. 우리는 늘 건강한 것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다시 태어남(paṭisandhi)을 일으키는 업과 구별되는 업도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을 이해하는 것이 듣고 숙고하는 수준의 빤냐(지혜)입니다.

 

더 높은 수준의 빤냐가 일어날 때 그것은 분명하게 드러나게 되어, 업이나 그 결과로서의 본질의 특징을 깊이 이해하게 됩니다. 예를 들면 보는 의식(cakkhu viññāṇa)인 마음의 특징을 새겨두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아무도 보는 요소(dhatu)의 특징이나 보는 의식의 특징을 조절하거나 만들어내지 않는다는 것이 명백해질 것입니다. 사람은 어떤 선처나 악처에 태어나는 것(gati sampati, gati vipati. 좋거나 나쁜 세계에서 태어남)에 대해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모든 것은 마음의 한 순간에 일어나도록 되어 있습니다. 결과(vipāka)로서의 어떤 마음은 조건(paccaya)으로서의 업(kamma) 때문에 틀림없이 일어납니다. 그러므로 보거나 듣는 동안에 지혜가 있다면 요소(dhatu)들 사이에서 차이를 알게 될 것입니다. 보고 듣는 순간은 그것들이 일어나게 하는 조건이 있기 때문에 일어납니다. 그리고 보고 들은 후에 뒤따르는 마음이 유익

함인지 유익하지 않음인지 압니다.

 

이것은 그것들이 일어나는 순간에 본질을 아는 것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그것을 숙고하여 업, 업의 결과, 업이 자신의 주인임을 앎, 업은 자신의 것이라는 지혜(kamma, vipāka, kammasakatā ñāṇa, kammasakatā paññā)를 알겠다고 단순히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실재하는 성품을 보게 되어 본질에 이르기 때문입니다. 많은 중생들이 존재하는 거대한 세계를 인식하는 것은 실제로는 가장 짧은 순간 동안 일어나는 마음의 한순간인 것입니다.

 

만약 태어남의 순간을 예로 들어 본다면, 태어남의 순간의 마음은 업의 결과입니다. 그 순간에는 어둡습니다. 눈도 귀도 없다면 세상이 보일까요? 소리도 색도 나타나지 않고 아무 냄새도 나타나지 않습니다. 업의 결과의 마음(vipāka citta)이 재생 연결식(paṭisandhi citta)을 만드는 기능을 수행하도록 하는 것이 깜마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이 세상의 어느 대상(ārammaṇa)도 알지 못합니다. 다만 다시 태어나는 의식의 기능을 수행하고 사라질 뿐입니다. 그 후에 깜마는 삶의 연속성 의식(bhavaṅga citta)이 끊임없이 일어나게 합니다. 깊은 잠에 빠졌을 때처럼 아직도 중생은 그 순간 이 세계의 어느 것도 모릅니다. 어둠보다 더 어둡습니다. 우리가 보는 감각물질(cakkhu pasāda)을 가진 눈이 있는데 그 눈을 감는다면 어둡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어둠은 삶의 연속성 의식(bhavaṅga citta)만큼 어둡지는 않습니다.

삶의 연속성 의식은 의문 인식 과정의 마음(mano dvāra vīthi citta)과 다릅니다. 삶의 연속성 의식은 대상(ārammaṇa)에 대해선 전혀 모릅니다. 생각조차 못합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각각의 세계, 각각의 태어남에 있어서 재생연결식으로부터 바방가를 지나 의식의 최초의 과정(vāra)까지 모든 마음의 특징에 대해서 확연히 깨달아 아셨습니다. 그것은 존재의 즉시 태어남에 관여하는 의문 인식 과정(mano dvāra vīthi)이 틀림없다고 자각하셨습니다.

 

우리의 탐욕(lobha, 로바)이 얼마나 크고 강한지 생각해 보십시오. 잠자리에 들기 전 내일은 무엇을 할까 하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미 로바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눈을 뜨는 순간 우리는 무엇을 얻고 무엇을 하고 싶은지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 바로 다음 세상, 다음 생까지 로바는 언제나 있는 것입니다. 의문전향의 마음(mano dvāra vajjana citta)이 일어난 후에 최초의 과정은 어떤 영역에 속해 있든 태어남에 대한, 존재에 대한 집착(탐욕)입니다.

아직도 눈 귀 코 혀는 없지만, 몸의 의식은 이미 지닌 채, 그 순간에 의식의 문(mano-dvāra, 意門)은 다섯 가지 감각기관의 문(pañca-dvāra)을 통해서 대상을 알 때와 똑같이 차례로 일어납니다. 같은 방식으로, 보는 것이 사라진 후에 바방가가 끼어들고 의문 인식 과정(mano dvāra vīthi)은 동일한 대상을 지속적으로 알게 됩니다. 이생으로부터 다음 세상까지 그 삶의 죽음(cuti)전까지 대상은 계속되고 그리고 나서 최초의 마음의 과정은 의식이 일어나는 것에 대해 생각할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태어남에 대한 집착이 일어나게 됩니다.

본질의 이 뒤엉킨 성질은 탄생에서부터 죽음까지 이어집니다. 감각의 문이 나타나는 순서는 고려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듣는 것이 있을 때 세상은 빛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순간에 소리의 자각을 제외한 눈과 관련하여 어떤 자각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소리는 있습니다. 비록 그것이 소리에 지나지 않을지라도, 여전히 잡아내서 즐기려고 하는 집착하는 어떤 익숙한 소리는 있습니다.

 

그러고 나서 비록 귀의 인식 과정(sota dvāra vīthi)을 통해서는 아닐지라도, 차례대로 일어나는 소리를 자각하고 있는 의문 인식 과정(mano dvāra vīthi)은 다섯 가지 감각기관의 문(pañca-dvāra)을 통했을 때와 정확히 같은 소리를 압니다. 누구도 당장 둘을 구별해 낼 수 없습니다. 우리가 소리를 듣는 것은 귀의 인식 과정의 마음(sota dvāra vīthi citta)이 일어났다 사라지고 바방가가 끼어들고, 그다음엔 의식의 문(mano dvāra)은 내 차례구나 하고 자각하는 것입니다.

다섯 가지 감각기관의 문(pañca-dvāra)의 귀의 문(sota dvāra)은 일어났다 사라지고, 바방가는 끼어들고 의식의 문(mano dvāra)은 매우 신속하게 무엇이 나타나는지 압니다. 부처님이 묘사하신 그대로입니다. 의문 인식 과정(mano dvāra vīthi)은 눈 귀 코 혀 그리고 몸의 감각기관으로부터 연속적으로 모든 대상을 아는 것입니다.

 

이것은 모두 담마인 실제 생활입니다. 우리는 실제를 통해서 진실을 알 수 있습니다. 우선 나마 담마(nama dhamma)와 루빠 담마(rupa dhamma)의 특징을 확실히 경험함으로서 다음엔 깜맛사까따 냐나에 대한 사실적 자각이 있을 것이고 이것이 계속 발전해 나갈 것입니다. 그리고 빤냐가 증가함으로 인하여, 있는 그대로의 본질을 이해하는 빤냐는 꾸살라(유익함)와 아꾸살라(유익하지 않음)를 구별할 것입니다. 이것은 사물을 있는 그대로 자각하는 능력인 깜맛사까따 냐나의 의미입니다. 왜냐하면 본질은 경험되어지기 위해서, 이해되기 위해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우리가 어떤 나병환자가 마음의 특징을 잘 모르면서 이것이 업이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은 그런 이론만이 아닙니다.

 

사실 매순간 찟따(마음)뿐 입니다. 매순간 대상은 극히 짧은 순간 나타났다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빛이 얼마나 짧게 나타났다 사라지고 마음이 그 뒤를 뒤따르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고 대상은 눈을 통해서 일어나며 마치 항상 빛이 있었던 것처럼 계속됩니다. 그러나 다른 대상이 교대로 일어나면 우리는 색이 언제나 보이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즉시 알 수 있습니다. 소리가 나타나면 색은 없습니다. 단지 한 순간의 마음이 일어나고 암기하고 기억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양이나 형체는 없지만 눈과 연관된 일이 있을 때, 문(dvāra)이라는 곳에 정신적 요소가 일어납니다.

다시 말해 루빠(물질적 현상)가 일어나게 하는 업이 있을 때 그 물질은 보는 감각물질(cakkhu pasāda)이 일어나는 것을 보는 마음을 위한 길이 됩니다. 듣는 감각물질(sota pasāda)이 일어나게 하는 업이 있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듣는 감각은 마음이 듣는 길입니다. 그러나 모든 것은 사라집니다. 그것은 나타나자마자 사라집니다. 그러므로 소리가 나타나는 듣는 감각물질(sota pasāda)이든 색이 나타나는 보는 감각물질(cakkhu pasāda)이든 어느 것도 영원하지 않습니다. 소리가 나타나는 듣는 감각물질이 사라지게 되면 흔적 하나 없이 영원히 사라지게 됩니다.

 

이렇게 우리는 자각하는 본질의 특징과 자각하는 요소의 특징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짧은 순간 눈에서 연속으로 자각합니다. 그리고 마음을 통하여 생각과 구별하는 성품으로서 그것을 모읍니다. 귀로부터도 마찬가지로 계속하여 그것들 역시 수집합니다. 그러므로 눈 귀 코 혀 몸과 마음으로부터 감각기관들의 연속성의 신속함은 나라는 지각(atta saññā)로서의 탐욕을 일어나게 합니다. 앗따 산냐는 자아가 있고 눈 귀 코 혀 신체적 감각과 마음을 통한 경험이 있고 이 모든 것들을 모으고 기억하는 것입니다. 사실 모든 것은 매순간 하나의 현상에서 다른 현상으로 연속적으로 일어나는 다만 마음의 한순간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만일 그것이 사실 그대로인 본질의 특징을 자각하는 지혜라면, 그것이 본질의 일어남과 사라짐을 경험하는 수준(udhayabbaya ñāṇa)에 도달하기 전에, 지혜가 알고 있는 모든 담마는 동등해야 합니다. 꾸살라도 아꾸살라도 아니고, 꾸살라가 이런 저런 방법으로 일어나게 하고 싶어 하는 이기심도 아닙니다. 꾸살라는 -아꾸살라도 마찬가지지만- 찰라 일 뿐이라는 사실을 따르는 인식이 있어야만 합니다. 눈 귀 코 혀 몸의 감각기관과 마음을 통해서 일어나는 모든 것이 찰라 이고 영원하지 않습니다.

 

일어나고 그리고 매우 짧은 시간 동안 나타나는 본질로부터 자신을 떼어놓는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이것은 듣는 단계에서 뿐이기에 아직 성스러운 진리로서의 담마(ariyasacca dhamma)를 깨달은 단계는 아닙니다. 왜냐하면 지혜는 각각의 수준에 따라 정말로 완전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먼저 정신적 물질적 현상의 과정을 있는 그대로 보아 아는 지혜(nāmarūpapariccheda ñāṇa)로 시작한 후에도 우리는 여전히 일어남과 사라짐을 완전하게 이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본질들이 정신적 요소(nama dhatu)와 물질적 요소(rupa dhatu)라는 실제의 인식이 있고 나면, 정신적 요소와 물질적 요소의 특징에 관하여 더 이상 불확실성은 없게 됩니다. 그리고 나면 대단히 많은 양의 정신적 요소와 물질적 요소를 경험하게 됩니다.

 

실생활에서 드러나지는 것을 구별해서 완전하게 아는 것(ñāta pariññā)은 정신적 물질적 현상의 과정을 있는 그대로 보아 아는 지혜(nāmarūpapariccheda ñāṇa) 다음에 일어납니다. 만일 나마와 루빠를 구분하는 위빳사나의 처음 단계 지혜가 일어나지 않으면 냐따 빠린냐는 있을 수 없습니다. 냐따 빠린냐는 각각 있는 그대로의 본질의 특징을 이해하는 지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신적 물질적 현상의 과정을 있는 그대로 보아 아는 지혜(nāmarūpapariccheda ñāṇa)가 있으면 있는 그대로의 본질의 특징을 이해합니다. 만일 꾸살라나 아꾸살라에 대한 집착을 떼어버릴 충분한 지혜를 갖고 있지 않다면, 그는 여전히 탐욕이나 욕심이 있기 때문에 다른 냐나(지혜의 수준)가 일어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일단 본질의 특성에 대한 수행으로 조건(paccaya)에 의해서 야기된 존재로서의 본질이 일어남에 대한 이해를 증가시키게 됩니다. 그러면 조건(paccaya)지어져서 이미 일어난 본질의 진실은 너무 빨리 일어났다 사라져서 자아를 가질 여유도 없어 누구도 어떻게 할 수 없다는 것을 압니다.

 

이것은 로바 즉 알고자 하는 욕심을, 본질의 일어남과 사라짐의 이해에 도달하기 위한 강력한 위빳사나(balava vipassanā)로서의 나마 담마와 루빠 담마의 완전한 이해가 있을 때까지 점차적으로 끊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단계에 이르지 못한 사람은 사실에 입각하여 끊음도 버림도 아직 없고 본질의 일어남과 사라짐을 완전하게 깨닫지도 못했다는 것을 자각하게 될 것입니다. 그 사람은 이것은 아직도 갈망과 자아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알고 있는 대상(요소)만을 상상해 보십시오. 우리는 친척이나 친구, 혹은 다른 것들이 있는 상태에서 이 세상을 계속 살아갑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과 격리되고 끊어져버리면 얼마나 외로울까요? 그러나 본질은 극히 짧게 나타났다 사라진다는 깨달음의 단계에서는 남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얼마나 외로울까요? 심지어 그것이 정말로 깨닫는 지혜일지라도 끊음이 있습니다. 만약 끊음이 없다면 지혜의 다음 단계는 일어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처음부터 번뇌(kilesa)의 근절까지 모두 지혜를 완전하게 발전시키는 문제입니다. 위빳사나 냐나는 한단계 한단계 성스러운 진리로서의 담마(ariyasacca dhamma)가 깨달음까지 일어날 겁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념처(cattaro satipaṭṭhāna)로 시작해서 깨달음의 필수적인 요소로서의 담마(bodhipakkhiya dhamma, 普提分法)를 통해 계속되는 지혜의 축적된 힘을 보아야 합니다. 그것은 기능(indriya)과 힘(bala)의 본질 사이에서도 그 차이를 알게 될 겁니다.

확신(saddha), 노력(viriya), 알아차림(sati), 집중(samādhi), 지혜(paññā)는 사띠가 본질을 알자마자 동시에 함께 일어납니다. 그러나 아직도 무언가에 대한 욕심이 있고 이것 아니면 저것이 일어날 것이라는 기대가 있기 때문에 지속시킬 만한 힘(bala)은 아직 없습니다.

그 사람은 자신이 계발시킨 지혜를 통해 각각(paccattaṁ)의 실제를 알게 될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번뇌를 끊을 만큼 용감하지도 강하지도 끈기 있지도 준비되어 있지도 않은 사람이라면 번뇌 끊음은 있을 수 없습니다. 심지어 현실은 괴로움이나 더위 그밖에 것들이 여전히 우리에게 있기에, 자아에 대한 지각(atta saññā)이 여전히 바로 여기에서 내 팔이 덥다는 것을 기억하기 때문입니다. 명료하게 나타나지 않고 더위의 특징만 나타난다고 해도 자아에 대한 지각(atta saññā)을 통한 기억은 여전히 존재합니다. 더 이상 앗따 산냐가 없을 때에만 우리는 앗따 산냐의 의미와 지혜를 통한 끊음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다음 우리는 표상이나 세세한 것들(nimita anubyañjana)에 대한 집착없이 보는 것의 의미를 이해합니다. 그것은 보이지 않는 것 혹은 보지 않는 것에 의해 제어(saṁvara)되는 것이 아니라, 그 순간은 ‘나’가 아니다 라는 것을 우리에게 알게 하는 본질의 특성을 통해서 제어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