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법문교재/법문 교재(프린트물)

사람이 가지고 태어나는 능력 (20151106)

담마마-마까 2022. 1. 21. 09:10

* 사람이 가지고 태어나는 능력 (20151106)

 

■ 살아남는 힘

 

생명은 살아남기 위해서 선천적으로 어떤 능력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먹을 것을 찾는 것, 적으로부터 몸을 지키는 것, 안전한 거주처를 찾아내는 것이 필요합니다. 자손을 남기는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구상에 있는 다양한 생명을 관찰해보면 이것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혼자서 사냥감을 쫓아가서 잡는 치타의 다리는 매우 빠릅니다. 그러나 달리는 능력이 없는 사자는 무리가 함께 행동하는 것으로 사냥감을 취합니다. 상어는 예민한 후각으로 미세한 피 냄새도 감지합니다. 코브라의 송곳니에는 독극물의 자루가 붙어 있습니다. 부엉이나 박쥐는 초음파를 내거나 수신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카멜레온의 혀는 귀신같은 솜씨로 곤충을 잡아먹습니다.

 

인간도 같은 생명이지만 선천적으로 이러한 능력이 갖추어져 있다고 생각되지 않습니다. 독도 없고, 뿔도 없고, 빨리 달릴 수 있는 다리도 없고, 날카로운 송곳니도 없고, 위장할 수 있는 피부도 없습니다. 육체의 능력으로만 보자면 제일 약한 생물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인간은 생명체 먹이사슬의 정점에 서 있습니다. 그 말은 다른 생명에 비해서 제일 강하다고 하는 것이 됩니다. 그런 인간의 능력은 머리(뇌)입니다. 두뇌의 사용법은 다른 생명과 다릅니다. 인간은 생각하는 것을 무기로 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하고 있는 모든 행동의 근본은 사고인 것입니다. 사고 능력을 빼앗아버리면 인간은 이 지구상으로부터 순식간에 사라져 버립니다.

 

■ 능력이 도를 넘으면

 

살아남기 위해서 필요한 능력이 도를 넘어 버리면 자기 파괴가 됩니다. 코브라가 이유가 있든 없든 관계없이 주위의 생명을 물게 된다면 매우 위험할 것입니다. 모두 코브라를 멸종시키려고 노력하게 될 것입니다. 동물들은 자신이 가지는 힘을 함부로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그렇지 않습니다. 인간은 사고 능력을 정도를 넘어 사용하고 있습니다. 덕분에 지구위에 사는 모든 생명의 목숨이 위험한 상태가 되어 있습니다. 또한 인간 서로 간에도 신뢰할 수가 없게 되고 말았습니다. 모두 다른 사람을 의심의 눈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전쟁도 일으키고, 아이도 살해당합니다. 인간계는 불합리한 일과 잔혹한 일로 흘러넘치고 있습니다.

 

문제는 다른 사람을 파괴하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대변을 내던지려고 하는 사람은 먼저 자신이 대변 투성이가 됩니다. 다른 사람에 대해서 화내는 경우는 먼저 자신이 분노에 불탑니다. 다른 사람을 파괴하기 전에 자신이 먼저 파괴적인 사고를 증식 시키지 않으면 안 됩니다. 다른 사람을 원망하면 다른 사람보다 먼저 자신이 불행에 빠집니다. 독사가 자신의 독으로 자신이 죽는 것은 결코 있을 수 없지만, 인간만은 살아남기 위해서 자신이 가지고 있는 사고 능력으로 자기를 파괴합니다. 그래서 독사의 독과 달리, 인간의 사고 능력은 취급이 매우 어려운 우라늄과 같은 것인 것입니다.

 

■ 사고 능력은 기르는 것

 

인간에게는 또 하나 문제가 있습니다. 인간은 사고 능력을 가지고 태어나지 않습니다. 가능성만 가지고 태어납니다. 사고 능력은 태어나고 나서 배우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인간은 배우는 것이 싫습니다. 사고 능력은 배운 결과로 몸에 익히므로 인간 사이에 차이가 생기게 됩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을 차별하는 일도 일어납니다. 높은 아만심, 비하하는 아만도 일어납니다. 여러 가지 콤플렉스로 병드는 지경에도 이릅니다. 잘못된 방식으로 사고하면 사고 능력 그 자체도 잃어버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교육은 인류의 운명을 쥐고 있는 열쇠입니다. 그런데 아무도 신경 쓰지 않습니다. 다른 생명과 같이 다만 살아남기 위한 목적으로 배웁니다. 더 많이 수입을 얻는 것으로, 적이나 경쟁자를 넘어뜨리는 것으로 교육의 목적이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정도를 넘고 있기 때문에 모든 균형이 무너지고 있습니다.

 

■ 살아남으면 괴로움도 늘어난다.

 

불교의 입장에서 이 문제를 설명해 봅시다. 「사는 것은 괴로움이다」란 부처님이 말씀하신 진리입니다. 이것은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살아남는 능력이 커지면 괴로움도 커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물은 인연 법칙에 의해 성립되고 있는 것이라고 하는 것도 부처님이 말씀하신 진리입니다. 모든 것이 흔적도 없이 완전하게 사라진다고 하는 것은 인과법칙에 따르면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생명은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윤회합니다. 사는 것, 살아남는 것, 윤회하는 것이 더 이상 없이 고마운 일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것은 단지 괴로움이 일어나고, 괴로움이 되풀이될 뿐입니다.

 

■ 사고의 정리

 

그래서 인간이 목표로 해야 할 목적은 「어떻게 살까」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괴로움의 되풀이로부터 탈출할 수 있는 것인가」라고 하게 됩니다. 아무런 제어도 없이 함부로 사고하는 것은 분명하게 위험한 결과가 되므로 멈추어야 합니다. 생각해야 할 것, 생각해선 안 되는 것을 구별해야 합니다. 생각해선 안 되는 것을 생각하지 않는 능력, 생각해야 할 것을 생각하는 능력을 몸에 지니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리고 살아가는데 문제없고,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끼치는 일 없이 살 수 있는 정도의 사고 능력으로 충분합니다.

 

그래서 인간의 사고 능력은 「살아남는다」라고 하는 저차원적인 목적만을 위해 발전시켜서는 안 됩니다. 그런 저차원적인 사고 능력만을 발전시켜 버렸기에 지구상에 존재하는 제일 무서운 생명체가 되어 버렸습니다. 다른 존재보다 보다 강력하고 보다 무섭게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인격 향상하는 것을 목적으로 사고 능력을 발전시켜야 하는 것이라고 불교는 말합니다. 약자를 잡기 위해서가 아니라, 생명을 사랑하고, 자연의 균형을 유지하는 목적으로 사고를 발전시켜야 합니다.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라고 발견하기 위해서 사고를 사용해야 합니다.

 

■ 사고는 가만히 두면 삐뚤어지는 본질을 가지고 있다.

 

사고 능력은 성장하는 것이지만 바른 방향으로는 성장하지 않습니다. 반드시 잘못된 방향으로 성장하게 되어 있습니다. 살아남기 위해서 붙은 능력이므로 사고는 자신만 살아남을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자신의 형편만을 생각하도록 구부러지게 됩니다.

예를 들면 사람이 강에서 물고기를 낚시하고 있다고 합시다.

가능한 한 큰 물고기를 낚시해서 소금 쳐서 구워 먹고 싶어 합니다. 낚시한 물고기가 얼마나 큰지 자랑하고 싶어 합니다. 쉽게 물고기가 잡히도록 여러 가지로 궁리합니다. 그것은 물고기를 낚시하고 있는 사람의 형편입니다. 물고기는 누구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고 강 에서 느긋하게 살아가는 아름다운 생물이라고 하는 마음은 절대로 떠오르지 않습니다. 물고기에게도 살 권리가 있다고 하는 것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이와 같이 어떤 사고이든 다만 자신의 형편에 맞추어 성장할 뿐입니다. 진리·사실을 알 목적으로 성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감정의 문제입니다. 살아남고 싶다고 하는 마음은 사고가 아닙니다. 감정입니다. 사는 것은 대단한 일입니다. 조그마한 실패에도 기죽어 버립니다. 그래서 강렬한 공포감이 있습니다. 그것도 사고가 아니라 감정입니다. 요컨대 taṇhā(갈애)입니다. 알기 쉽게 요약한다면 존재욕구와 공포감입니다. 사고 능력이 없는 생명에도 이 감정이 있습니다. 사고 능력이 있는 인간에게도 이 감정이 있습니다. 인간은 사고하면 할수록 존재욕구와 공포감이 자극을 받아 증폭됩니다. 감정은 다른 말로 번뇌라고 합니다. 번뇌가 사고를 낳습니다. 사고는 번뇌를 증폭시켜 강화합니다. 그래서 한층 더 강렬한 사고가 일어납니다. 그것이 또 번뇌에 영향을 줍니다. 악순환이라고 치부하기에는 부족한 악마의 순환인 것입니다.

 

■ 위험을 수반하는 사고

 

윤회로부터 벗어나 해탈에 이르고 싶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앞을 가로막는 거대한 장해는 사고·망상입니다. 선천적인 능력이므로 관리하는 일도 멈추는 일도 매우 어렵습니다. 욕구·질투·분노·미움·원한·증상만·비하만·허영·우울·우쭐·불신감·불안감·우월감·열등감 등등의 감정(번뇌)이 마음속에서 소용돌이치고 있으면 편하게 살 수 없습니다. 인생은 무거워져 움직일 수 없게 됩니다. 유연성이 사라져 버리고 밝음·즐거움도 사라져 버립니다.

감정과 사고는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감정이라고 하는 흉폭한 상어가 바다 가운데서 헤엄치고 있는데, 사고라고 하는 아름다운 등지느러미만이 보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사고가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높게 평가합니다. 사고는 상어의 등지느러미와 같은 것입니다. 등지느러미 자체는 아무 위험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그 사랑스러운 등지느러미는 무서운 상어에 붙어있는 것입니다. 사고와 번뇌의 연결은 이러한 것입니다.

 

■ 정사유로 바꿔놓는다.

 

사람은 무슨 일이 있어도 사고하므로 부처님께서는 팔정도의 가르침에서 sammāsaṅkappa(정사유)를 추천하셨습니다. 욕구·분노·미움·원한이라고 하는 감정과 연결된 사고는 삿된 사유입니다. 베품·자애·배려·연민과 연결된 사고는 정사유입니다. 올바른 사고를 하면 번뇌는 증폭하지 않습니다. 번뇌의 위험성이 서서히 저하되어 갑니다. 그 수행과 함께 팔정도의 나머지 항목도 실천해 보면 1500가지의 번뇌 대신에 지혜라고 하는 능력이 일어납니다. 지혜가 나타나면, 진리를 발견합니다. 진리를 알면, 번뇌가 사라지는 것뿐만 아니라, 사고하는 필요성도 없어집니다. 번뇌가 사라진다는 것을 다른 말을 바꾸면 「해탈에 이른다」는 것입니다.

 

비유를 들어봅시다. 사람의 머리 위에 얼마든지 커지는 가방이 있다고 합시다. 그 사람은 손에 들어오는 것은 뭐든지 그 가방에 넣습니다. 본인은 행복하게 될 생각입니다. 그러나 닥치는 대로 뭐든지 집어넣었기에 가방에 우연히 도움이 되는 것이 있었다고 해도 대부분은 어떤 도움도 주지 못하는 쓰레기일 뿐입니다.

행복하게 되는 것보다는 조금씩 머리가 무거워지고 무거워져 움직일 수 없게 되는 것만은 확실합니다. 그런데도 가방에 무엇을 넣는 습관을 계속하면 자기 자신이 무너져 버립니다.

우리의 사고의 회전도 이러한 것입니다. 잘 되라고 생각해서 사고하고 망상합니다. 그 중에 보기 드물게 도움이 되는 사고도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고는 인생에 폐만 끼칠 뿐입니다. 이윽고 사고·망상에 억제 당해서 인생 그 자체가 무너져 파괴됩니다. 사후에도 불행하게 됩니다. 그래서 사람은 사고·망상과 놀아서는 안 됩니다. 사고·망상은 우라늄처럼 취급해야 하는 것입니다.

 

■ 사고를 버리는 길

 

부처님은 비구들에게 「비구들이여! 이 배의 물을 퍼내어라. 퍼내면 가벼워진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배란 인생이며, 마음입니다. 마음속에 사고라고 하는 물이 밀려들어와 배가 침수하고 있습니다. 그대로는 위험합니다. 그대로두면 침몰합니다. 빨리 사고라고 하는 물을 퍼내기 시작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사고라고 하는 물을 퍼내기 시작하면 퍼낸 만큼 마음은 편해집니다.

 

그럼 배가 침수하고 있는 경우에도 물을 퍼내기 시작하는 것이 정답일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긴급히 물을 퍼내기 시작해야합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끝이 없습니다. 배의 구멍을 수리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마음속에 사고가 침수해서, 침몰의 위기를 강요하고 있습니다. 사고는 존재욕구(rāga)와 공포감(dosa)이라고 하는 2개의 구멍으로부터 침입합니다. 그 2개의 구멍을 막는 것이 안온(열반)에 이르는 유일한 방법인 것입니다.

 

● 이번 포인트

 

• 사고는 살기 위한 무기입니다.

• 도를 넘은 사고는 위험합니다.

• 악사고는 정사유로 옮겨놓아야 합니다.

• 사고·망상에 고민하지 않는 마음은 가볍습니다.

• 번뇌가 사라지면 사고·망상의 문제도 사라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