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법문교재/법문 교재(프린트물)

맑고 깨끗한 마음이 최강의 부적이다. (20151002)

담마마-마까 2022. 1. 10. 09:10

* 맑고 깨끗한 마음이 최강의 부적이다. (20151002)

 

삼보에 귀의한 사람은 주문과 같이 항상「붓다에게 귀의합니다. Namo Buddhāya(나

모- 붓다-야)」, 「담마에게 귀의합니다. Namo Dhammāya(나모- 담마-야)」, 「상가

에게 귀의합니다. Namo Saṅghāya(나모- 상가-야)」라고 하는 3가지를 독송합니다.

또, 「살아 있는 모든 생명들이 행복하기를!」이라고 독송하기도 합니다.

또, 붓다가 말씀하신 수행을 항상 실천합니다.

 

그러한 사람들은 어떤 재난과도 만나지 않는다고 합니다. 겨우 어떤 고민이나 괴로움

과 만나는 것은 병에 걸리는 것이나, 늙는 것이나, 친한 사람들과 이별하는 것 정도

라고 합니다.

 

불교도들은 신도 믿지 않고, 신을 향한 의식 공양 등도 하지 않고, 몸을 지키기 위한

주문을 행하거나 부적 등을 지니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과 달리 매우 평

안하게 살아갑니다. 재난, 재해 등도 모면합니다.

 

이 현상은 당시의 인도인들에게 이상하게 생각되었던 것 같습니다.

 

주문·점 등을 믿는 미신에 붙잡혀 있는 사람들에게는 「우리는 가장 뛰어난 최강의 부

적을 지니고 있다」라고 말하면 이야기는 간단하게 끝납니다. 어떤 이들은 「부럽다」라

고 생각할 것이고, 어떤 이들은 「그런 것은 있을 수 없다」라고 의문스럽게 생각할

것입니다.

 

경전의 주석서에 이런 일에 대해 설명해 놓았습니다.

 

왕사성에서 불교도 가족의 한 아이와 다른 신자 가족의 한 아이가 사이좋게 돌치기하

며 놀고 있었습니다. 불교도의 아이는 습관적으로 「붓다에 귀의합니다」라는 게송을 독송하며 돌을 굴리는데 항상 정확하게 맞아 이깁니다. 다른 아이는 자신이 신앙하고

있는 종교의 성자들을 부르며 돌을 굴리지만 빗나갔습니다. 진 아이는 상대의 게송을

가르쳐 달라고 합니다. 그리고 자신도 「붓다에 귀의합니다」라는 게송을 독송했습니다. 그래서 겨우 승패 없이 대등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아이는 「붓다에 귀의합니다」

라는 게송을 항상 흥얼거리게 되어 버렸습니다.

 

어느 날 다른 신자의 부모와 자식 세 명은 수레를 타고 자신이 믿는 신에게 예배하기

위해 마을을 나왔습니다. 수레를 몰던 소에게 풀을 뜯게하기 위해 소를 풀어 준 부모

님은 신에게 기도하러 가고, 아이는 수레 곁에서 놀고 있었습니다. 시간이 지나 부모

님이 돌아와 보니 소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소들은 풀을 먹으면서 왕사성 한가운데로

들어와 버렸습니다. 그래서 부모님도 소를 찾아 왕사성으로 들어갔습니다. 소는 발견

했지만 수레가 있는 곳까지 돌아가려고 하니 저녁이 지났기에 성문이 닫히고 말았습니다. 아이는 숲에서 외로이 밤을 지새우는 지경이 되었습니다. 왕사성은 다른 마을과

달리 항상 악령이 북적거리고 있는 곳으로 더구나 수레가 멈춘 곳은 묘지에 가까운 곳이었습니다. 어두워지자 아이는 부모를 기다리다 녹초가 되어 자 버렸습니다.

 

두 명의 신령이 밤에 음식을 찾으러 나갔습니다. 한사람의 신령은 불교도이고, 또 한

사람은 사교도의 신령이었습니다.

 

사교도의 신령이 자고 있는 아이를 보고 「이 아이를 지키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먹

이로 합시다.」라고 말했는데, 불교도의 신령은 「멈추는 것이 좋겠다」고 말했습니다. 그것을 듣지 않고 사교도의 신령이 아이 다리를 잡아당겼습니다. 아이는 말버릇이 되

어 있었으므로 무심코 잠꼬대로 「붓다에 귀의합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신령은 무서워

해 떨리기 시작했습니다. 흔들림이 멈추지 않습니다. 불교도의 신령이 이와 같이 말했

습니다. 「우리는 실수를 범했다. 어떤 보상을 하지 않으면 이 무서움과 흔들림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무엇으로 보상할까 둘이서 생각하다가, 아이가 아무것도 먹지 않

고 배가 고픈 상태에서 자고 있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밥을 주기로 결정한 두 명의 신령은 왕사성에 들어와 국왕이 밥을 드시는 금으로 만든 접시에 왕궁의 요리를

담아서 아이의 부모님의 모습으로 변신해 먹여 주었습니다. 더구나 국왕 밖에 안 보이게끔 그러한 사건을 접시에 새겨서 아이의 곁에 두었습니다. 그리고 아침까지 부모님의 모습으로 아이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아침이 되자 왕궁에서는 왕의 황금 접시가 없어진 것을 알고 도둑이 들었다고 큰 소

란이 일었습니다. 온 마을 안밖을 조사하니 황금 접시를 아이가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아내곤 왕에게 데리고 갔습니다. 접시를 본 왕은 접시에 기록된 문자를 읽고 무엇

이 일어났는지 알았습니다. 아이는 아침까지 엄마 아빠와 함께 있으며 밥을 먹고 잤

다고 이야기했지만, 그 이야기를 들은 부모님은 왕의 궁전에 달려가, 「우리는 성문이 닫히어 아침까지 성안에 있었습니다.」라고 고했습니다. 다행히 왕사성의 왕은 불교도였기 때문에 문제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왕은 이 세 명과 함께 부처님을 만났습니다.

「악령도 소중하게 생각할 정도의 강력한 주문이란, 「붓다에 귀의한다」라는 독송뿐입니까?」라고 질문하였고, 부처님은 이에 답을 했습니다. 담마에 귀의하는, 상가에 귀의하는, 자애를 실천하는, 신체의 움직임과 감각을 알아차리는, 그 외의 명상에 힘쓰고 있는, 등도 똑같이 강력한 부적이 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일화에서는 어떠한 이유로 강력한 부적이 되는가 하는 것은 설명하지 않습니다.

다만 인도인의 미신을 뒤따라 합쳐지고 있을 뿐입니다. Namo(나모) Buddhāya(붓다

야) 만이 강력한 부적의 게송이라고 하면, 불교도 일신교와 다를 것이 없게 됩니다. 부적이 되는 게송은 몇 가지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생각해봅시다. 불교의 실천은 현세 이익을 위해서 실천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이는 어른과 달리 음험한 목적이 없습니다. 「장사가 번성하고 싶으면 일찍 일어나서, 게으름 피우지 않고 땀 흘려 일에 힘쓰라」고 하는 것이 붓다의 훈계인 것입니다. 불교도는 그것을 알고 있습니다. 현세 이익을 목표로 해서 붓다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것은 위대한 정자각자와 그 가르침에 대한 모독이 되는 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럼 왜

현세 이익을 목표로 하지 않았는데도 모든 재난을 면할 수가 있는 것일까요?

 

인생의 실패란 마음이 더러워져 있는 증거입니다.

 

더러워진 마음으로, 더러워진 사고로, 더러워진 판단으로, 사는 일에 도전해도, 실패하게 되어 있습니다. 욕구에 눈이 멀어, 분노로 머리가 미치면, 뭐든지 좋다고 생각해

서 다양한 일에 도전하므로 재난을 면할 수 없습니다. 사기꾼에게 속거나 재산을 도둑맞거나 합니다. 세금 등을 올바르게 납입하지 않기 때문에 왕에게 전 재산을 몰수당하는 일도, 벌을 받는 일도 있을 수 있습니다. 삼보에 귀의하는, 삼보에 예를 하는, 등의 게송을 독송하면, 스스로 불선한 사고가 없어집니다. 나쁜 것은 할 수 없게 됩니다. 그 기분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선인선과의 법칙에 의해 항상 선과를 얻습니다. 여기에는 무슨 불가사의도 없습니다.

또한 kāyagata sati(까-야가따 사띠) 신수념이란 신체에 대해서 알아차림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잘 알고 있는 걷는 수행도, 서 있는 수행도, 신수념인 것입니다. 일상을 생중계하듯이 알아차리는 일도 신수념입니다. 맑고 깨끗한 마음으로 살기 때문에 맑고 깨끗하고 행복한 결과가 되는 것은 자연법칙(인과 법칙)인 것입니다. 삼보에 귀의하는 것보다 우수한 부적이 없다고 하는 것은 미신의 범주에 들어가지 않습니다.

 

그리고 방해업이라고 하는 업이 있습니다. 순조롭게 살고 있다가도, 돌연 상태가 어려

워져 불행하게 되는 것은 드물지 않습니다. 업으로부터 도망치는 것은 극히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삼귀의를 독송하거나 알아차림을 실천하거나 하는 생활을 실천한다면, 방해업이 끼어들어 와도 맑고 깨끗한 마음에 영향을 줄 수 없게 됩니다. 오늘 결과를

내야 할 업이, 오늘 기능할 수가 없었으면, 그 업에 다음의 찬스는 없습니다. 기유업

(결과를 낼 수 없었던 업)이 됩니다. 비록 업이라도, 인과 법칙인 것입니다. 특권은 없

습니다. 모든 방해업을 피할 수는 없겠지만, 마음을 맑고 깨끗하게 해 두면, 많은 방

해업을 피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알아차림을 실천하는 사람은 그러한 기능은 모릅

니다. 다만 인생이 순조롭다고 알고 있을 뿐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불교는 신비적인 힘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불교는 현세

이익을 목표로 하는 실천도 아닙니다.

 

궁극의 행복을 목표로 하는 길입니다. 붓다가 말하신 길 그 자체는 완전무결하므로 깨달음에 이를 때까지의 삶의 방법은 스스로 행복한 삶의 방법이 될 뿐입니다.

 

불수념, 법수념, 승수념 등의 명상 실천을 밤낮 실천하면, 무명을 벗어나 서서히 그리

고 편하게 해탈에 이릅니다. 삼보에 귀의하면, 신령도 보디가드가 되어 주는 것이라는

이야기는 신비를 좋아하는 현대인들의 흥미를 불러일으켜 의지를 일으킬 마음이 생길지도 모릅니다. 흥미에 찬물을 끼얹는 것 같겠지만, 이 게에서 말하고 있는 것은 당연한 이성에 근거한 불교의 진리입니다. 요컨대 맑고 깨끗한 마음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에는 예외가 없습니다.

 

● 이번 포인트

 

• 불교도에게는 미신·점 등은 필요 없습니다.

• 불도의 실천은 최강의 부적입니다.

• 불교도의 인생은 순조롭습니다.

• 불교의 실천에 익숙한 인생은 해탈로 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