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법문교재/법문 교재(프린트물)

죽음을 속이면 불행하게 된다. (20151120)

담마마-마까 2022. 1. 26. 09:10

* 죽음을 속이면 불행하게 된다. (20151120)

 

사위성에 정육점 주인이 있었습니다. 소를 도축해서 고기를 팔아 생계를 유지하는 것이 그의 일평생 직업이었습니다. 이 사람도 고기 먹는 것을 좋아해서 매일 식사 때에 고기 요리는 빠뜨릴 수 없었습니다.

 

어느 날 고기가 거의 동이 난 상태가 되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먹는 양을 놓아두고, 나머지 고기가 완전히 매진이 되고 나서 목욕하러 갔습니다. 그 사이에 손님이 찾아와 먹을 양만 남겨둔 고기라도 팔라고 재촉했습니다.

 

고기를 팔지 않자 그 손님은 집안에 들어가 정육점 주인이 자신을 위해서 남겨둔 고기를 가지고 돌아가 버렸습니다. 그래서 부인은 어쩔 수 없이 고기를 뺀 요리를 했습니다. 돌아온 남편은 격노했습니다. 「나는 고기가 없으면 절대 밥을 먹지 않는다. 너는 알고 있을 것 아니냐!」라고 말하고, 부엌칼을 가지고 뒷마당으로 갔습니다. 다음날 고기가 될 소가 거기에 있었습니다. 그 소의 입을 열고 혀를 억지로 당겨 잘라냈습니다. 소의 혀를 요리해서 먹으려고 했습니다. 침착함 없이 분노에 이성을 잃고, 더구나 격렬한 공복감으로 괴로워하고 있던 그가 고기를 먹으려고 한 순간 큰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그가 깨물어 씹어 먹은 것은 산 채로 잘라낸 우설이 아니라, 자신의 혀였던 것입니다. 자신의 혀가 조각조각 흩어져 떨어졌습니다. 이 고통은 이만저만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머리가 미칠 것 같은 고통스런 느낌으로 울부짖으며 땅에 드러누웠습니다. 아무 주저함 없이 자신이 행한 일이 살아있는 소에게 준 괴로움은 얼마나의 큰 것인지 몸으로 직접 아는 지경이 되었습니다.

 

이 사건을 그의 아들도 보고 있었습니다. 부인은 매우 무서워졌습니다. 자신의 아들에게 말했습니다. 「아들아! 이 무서운 상황을 보아라. 이대로 가면 너도 아버지의 직업을 이어받아야 한다. 너는 이러한 불행에 놓이지 않아야 한다. 즉시 여기를 떠나라. 내 걱정은 말아라!」

 

아들도 집이 너무 무서워서 도망쳤습니다. 도살자인 아버지는 괴로워하며 죽어서 아비지옥에 떨어졌습니다.

 

아들은 학교에 들어가 금세공 일을 배웠습니다. 이윽고 결혼해서 아이도 태어나 행복하게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아이들은 할아버지의 일은 아무것도 몰랐습니다.

 

아이들도 어른이 되어 결혼했지만 장사는 잘 되지 않았습니다. 풍요로운 사위성에 가고 싶어 했지만 부친이 찬성하지 않습니다. 결국 아이들은 사위성으로 옮겨 가서 장사하여 번성해서 풍부하게 되었습니다.

 

늙은 부친도 어쩔 수 없이 아이들에게 왔습니다. 이 부친에게 있어서 사위성은 자신이 태어나 자란 마을이었습니다. 그러나 가업을 이으려 하지 않습니다. 힌두 문화에서는 아들이 부모의 직업을 잇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러나 그는 아버지의 비참한 죽음을 목격했으므로 정신적인 쇼크를 받고 있습니다.

 

이 사람은 두려워서 도살은 하지 않지만, 선행을 하는 습관도 없었습니다. 금세공 일만으로 늙어 버렸습니다. 그러나 그의 아들들은 경건한 불교도들이었습니다. 자주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있었습니다. 불교에서는 부모님이라고 하는 존재는 아이에 대해서 고귀한 존재인 것입니다. 부처님에 대한 존경의 마음과 같은 기분으로 부모를 존경하고 효도도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아이들은 효도를 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부모의 노후를 돌보는 것만으로는 효성스럽게 되지 않습니다. 사후의 행복까지 보살펴 주지 않으면 안 됩니다. 부모가 죽기 전에 제사를 실행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부모의 사후 7일째, 49제 등 제사를 행하는 것이 보통이지만, 불교에 대한 이해가 있는 경건한 사람들은 부모가 죽기 전에 생전 공양합니다. 그쪽이 부모에게 확실하게 덕을 줄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아들은 부처님과 비구들을 자신의 집에 초청해서 공양 올리며 보시를 행했습니다. 식사가 끝나고 나서 부처님에게 얘기했습니다. 「스승님! 이 보시는 늙은 부친을 위해서 행한 것입니다. 이 공덕에 의해서 부친이 사후에도 행복하기를!」

 

그렇게 말하면 비구들은 공덕을 회향하며 늙은 부친을 축복하는 것이 불교의 상식입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다른 것을 하셨습니다.

 

사실 보시를 한 아들들은 성격도 좋고, 믿음이 깊어, 도덕을 존중하는 훌륭한 사람들이었지만, 부친의 성격은 정반대로 도덕이나 선악에 대해서 흥미가 없었습니다. 선행을 한 적도 없고, 하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이것은 자신의 부친의 예의범절 탓입니다. 할아버지가 소를 죽여 해체해서 고가로 고기를 팔며 생계를 유지한 사실을 아들에게 비밀로 했지만, 살생을 직업으로 하는 사람들의 성격은 결코 온화한 것이 아닙니다. 난폭하고 잔혹합니다. 그런 도살자의 아들은 정신적인 충격으로 살생을 그만두었지만 도덕과는 친숙해질 수 없었습니다.

 

그의 아들들이 부처님에게 보시하고 설법을 듣고 선행을 하는 것에 대해 무관심하고 「나는 관계없다」라는 태도로 보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정신 상태에서는 본인의 눈앞에서 공덕을 회향해도, 공덕은 전해지지 않습니다. 만약 싫다고 반발했다면 공덕을 쌓는 것이 아니라, 부처님을 모욕한다고 하는 최고로 큰 죄를 범하게도 됩니다. 이런 마음의 상황을 다 아신 부처님께서는 아들들의 모처럼의 선행의 공덕을 부친에게 회향하는 것을 그만두고서, 부친을 꾸짖었습니다.

 

「당신의 인생은 곧 떨어져 버리는 시든 잎과 같은 것이다. 죽음의 사자들은 당신을 둘러싸고 있다. 당신은 윤회라고 하는 마지막이 없는 여행을 떠나려 하고 있다. 그런데 아무런 여행 준비도 하고 있지 않다. 여비는 전혀 가지고 있지 않다.」

 

다른 사람의 집에서 밥을 먹고, 집 주인에게 이러한 말을 하는 것은 대단한 실례라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신체가 쭈굴쭈굴 해지고 노쇠해져서 죽음을 맞이하려 하고 있는 사람을 향해 「너는 오래지 않아 곧 죽는다.」라고 말하는 것은 잔혹하다고 생각하겠지요.

 

여러분이라면 죽음의 문턱에 있는 사람에게 어떤 말을 합니까? 아마 「건강하도록 하십시오!」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것이 친절한 말입니까? 건강하게 있을 수가 있으면 부탁하지 않아도 본인이 그렇게 하고 있겠지만, 다 죽어가고 있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에게 「노력하십시오!」라고 말하면 「노력하면 빨리 죽을 수 있다」라고 하는 의미입니까?

 

문병하러 오는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하는 말이 있습니다. 「뭐 갖고 싶은 것은 있니?먹고 싶은 것은 있니?」 라고 말합니다. 그런 것이 있어도 지금은 아무 의미도 없습니다. 일부러 생각나게 해서 욕구를 부추기면, 본인은 분한 기분과 슬픈 기분, 이제는 할 수 없다는 기분만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정말로 잔혹한 말은 부처님이 그 노인을 꾸짖은 말이 아닙니다. 우리가 할 수도 없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다 죽어가고 있는 것을 알고 있는데, 그것을 속입니다. 낫지 않는 것을 알고 있는데, 빨리 고쳐 주세요라고 말하는 것으로 거짓말을 말합니다. 또 갖고 싶은 것까지 생각해 떠오르게 해서 욕구를 부추깁니다. 「낫지 않는 것이다. 죽는다.」라고 본인은 알고 있는데, 친척이나 친한 사람들은 자신을 둘러싸고 죽는 것을 속이고 서투른 연극을 하면, 괴로워하고 있는 본인은 고마워할 수가 없게 됩니다. 그래서 죽는 괴로움에, 친한 사람들이 새로운 괴로움을 더해 준 것이 됩니다. 이것은 친절한 행위라고는 말하기 어렵습니다.

 

부처님은 본인에게 사실 그 자체를 정면으로 말했습니다. 거짓말해서 사실을 비틀고, 정보를 숨겨, 오해를 하도록 하는 것이 행복하게 된다고는 불교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속세의 생각입니다. 사실, 진리를 아는 것으로 행복하게 되는 것이라고 하는 것은 불교의 생각입니다. 과학지식이 발전하기 이전, 모든 미신으로 인종차별로 사람들은 매우 괴로워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과학자들이 자연계의 진리를 발견하는 것과 동시에 사람들은 행복한 사회를 쌓아 올려 왔습니다. 그런데 지금도 사는 것에 대해 사실을 말하지 말고, 거짓말로 얼버무리는 것이 미덕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진실을 말하면 들어서 놀라고, 공포감을 느끼고, 위기감이 생기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사람들을 속여서 암흑의 세계에 빠뜨려야 합니까? 진정한 위기감을 느끼고 그 위기로부터 탈출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여기서 이야기를 되돌리겠습니다. 부처님께서 그 노인을 사실에 눈뜨게 했습니다.

 

먹고 늙어 죽는 것은 훌륭한 인생이 아닙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것으로 만족합니다. 좋은 일을 하고 있다, 수입이 안정되어 있다, 아이들이 이젠 사회의 일원

이 되었다라고 자랑하고 만족합니다. 이것은 먹고, 늙어, 죽는 길, 그것인 것입니다. 그 노인의 「나는 만족한다.」라고 하는 환각을 부처님께서 찢었습니다. 지금도 계속해서 죽어가는 당신은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고 있다고 말하면, 확실히 공포감을 느낍니다.

 

부처님께서는 사실을 말해 사람들에게 강렬한 공포감, 불안감을 줍니다. 우리가 일상다반사로 느끼고 있는 공포감, 불안감은 아무런 의미도 가지지 않는 무지한 감정인 것입니다. 병이 드는 것이 무서운, 수입이 없어지는 것이 무서운, 이런 것이 불안한 공포감과 불안감입니다. 「죽는 것 따위는 절대 있을 수 없다」라고 하는 전제로 살기 때문에 일어나는 무지한 감정인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사람이 반드시 느껴야 할 이성에 근거한 공포감을 줍니다. 그것은 사실을 발견하는 것으로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사람에게 사실에 근거한 구체적인 공포감을 주고 나서 무관심하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진정한 공포로부터 탈출해서, 확실한 행복을 실현하는 방법도 가르쳐 줍니다. 굳이 말하자면, 행복하게 만들고 싶기 때문에 더욱 더 지금까지 숨기고 속이고 있던 무서운 사실을 분명히 밝혀 줍니다.

 

「지금 즉시 노력하라. 자기의 안전한 경지인, 자신의 섬을 만들어라. 이성적인 인간이 되어라. 마음의 더러움을 모두 버려라. 성자들의 안전한 경지에 들어가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자신의 섬」이라고 하는 것은 자신의 장래의 안전한 경지를, 자기 자신의 마음으로 만드는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자신의 의지처가 되는 것은 자신인 것입니다. 사람은 자신의 마음 때문에 불행하게 됩니다. 더러워진 마음으로, 더러워진 사고로, 더러워진 감정으로 살아있어, 더러워진 경지에, 불행한 경지에 떨어집니다. 자업자득이라고 하는 것은 이런 의미입니다. 자신의 행불행은 자기 자신의 행위의 결과다고 이해하는 것, 또 우리는 반드시 죽어가는 짧은 생명인 것, 이 세상은 잠시 머무는 곳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고 사는 것은 이성적인 삶의 방법인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위협한 다음에, 그 노인에게 행복하게 되는 방법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공포감을 이기는 방법을 가르쳤습니다.

 

즉, 「당신은 다 죽어가고 있다. 뒤로 물릴 수가 없다. 확실히 노력하라」라고 하는 의미이지만, 불교의 「노력하라」는 단지 무의미한 표현이 아닙니다. 매우 구체적인 표현인 것입니다. 이와 같이 노력하라고 그 방법을 말합니다.

 

노쇠해질 때까지 완고하게 살아 온 이 노인은 부처님의 한 번의 조언을 성실하게 들었는지 아닌지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아들들도 완고한 아버지가 한번 말한 것만으로 솔직하게 받아들였다고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또 어느 날 부처님을 집에 초대해서 보시를 올리고 생전 공양을 실시했습니다. 그때도 이 보시의 공덕은 부친의 사후의 행복을 위해서라고 말했습니다.

 

그때도 부처님께서는 같은 말로 설법했습니다. 「당신의 수명은 다하고 있다. 지금 죽음이 마중 나오고 있다. 이제 죽음을 멈출 수 없다. 그러나 당신은 여행 준비를 하지 않고 있다.」

 

「지금 즉시 노력하라. 자기의 안전한 경지인, 자신의 섬을 만들어라. 이성적인 인간이 되어라. 마음의 더러움을 모두 버려라. 두 번 다시 생로병사의 세계에 윤회해서는 안 된다. 해탈하라」라고 말했습니다.

 

아마 부처님이 마음을 맑고 깨끗하게 해서 사물에 대한 집착을 끊는 방법을 계속 가르쳤겠지요. 그래서 그는 예류과의 경지에 이르렀습니다. 아들들의 노력도 열매가 맺었습니다. 효도할 수 있었습니다. 노인은 윤회의 괴로움으로부터 탈출했습니다.

 

이 일화는 임종 때 불교는 무엇을 말해 주어야하는지 이해하기 위한 예입니다. 일반 상식과는 완전히 다릅니다. 세상은 깨닫지 않고, 지혜도 없습니다. 세상은 무지에 빠져 있습니다. 그래서 세상의 상식에 따를 필요는 없습니다. 세상의 상식이 올바르면 이야기는 다르겠지만, 올바르지 않은 경우는 진리를 말하는 용기를 가지지 않으면 이 세상은 좋아지지 않습니다. 용기를 가지고 진리를 말한 사람들이 있었던 덕분에 우리는 지금 그만한 행복을 맛보며 살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거짓말로 구제된 사람은 한사람도 없습니다. 임종 때 자비의 명상이든지, 신체의 무너짐, 괴로움을 보고 관찰하여, 무집착의 마음을 만들면, 죽음을 맞는 사람 입장에서 그 이상의 행복은 없습니다. 그것이 지켜보고 있는 사람들이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을 준 것이 됩니다.

 

● 이번 포인트

 

• 다만 살아가는 것만으로는 천상에 갈 수 없습니다.

• 사람은 노·병·사의 3가지 괴로움의 규칙을 피할 수 없습니다.

• 거짓말로 사람을 위로해서는 안 됩니다.

• 싫어도 사실을 아는 것으로 행복하게 될 수 있습니다.

• 집착함 없이 알아차림만 있으면 임종 때라도 길이 열립니다.

• 죽음을 맞이했을 때는 무집착의 마음, 자유로운 마음을 만들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