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일은 너무 늦다. (20170210)
어느 상인들의 무리가 배로 장사하러 가는 도중에 조난을 당했습니다. 그중의 한 상인인 바히야만 살아남아 널판지에 의지하여 표류하다가 숩빠라까라는 섬에 도착했습니다. 표류하다가 의복을 잃어버렸기에 섬에 도착했을 때에는 알몸이었으므로 나무껍질을 벗겨 허리에 둘렀습니다. 누군가가 도와줄 것이라고 기다리고 있는데 그곳 사람들이 그의 모습을 보고 선인이 나타났다고 착각했습니다.
무슨 특별하게 다른 행동이나 삶의 방법을 하는 사람을 수행자다, 선인이다, 신비적인 능력을 지닌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당시의 인도 문화에서는 매우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현대에도 보통 사람이 하지 않는 일을 하는 사람을 훌륭한 사람이라고 우러러 보는 일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공양을 가져온다, 보시를 한다, 경배를 한다면서 갑자기 성자가 나타났다고 판단하여 마을은 온통 소란스럽게 되었습니다.
바히야는 어떻게 할 수 없었습니다. 주위에서 마음대로 이미지를 만들어 버렸기에 그는 모두의 마음을 배반하지 않게 힘껏 성자의 역을 연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사람을 속이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자기 나름대로 정직하게 성자에 어울리는 맑고 깨끗한 생활을 계속했습니다. 시간이 지나자, 그는 자신이 정말로 아라한 성자 중의 한 명이라고 굳게 믿게 되었습니다. (사람은 누구라도 자신에 대한 잘못된 믿음을 품는 것으로 파멸의 길로 이어집니다)
그의 오래된 친구가 정직한 바히야를 걱정해서 그를 찾았는데 거짓 아라한이 되어 있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런 일로 친구인 바히야의 생이 파멸해 버릴 것을 걱정한 친구는 그를 만났습니다. (원전에 의하면 그 친구와 그는 과거 생에 함께 수행해서 범천으로 다시 태어났다고 합니다. 그 후 바히야는 범천의 수명을 끝마치고 인간으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친구인 범천이 바히야를 구하기 위해서 어느 날 밤에 나타났다고 쓰여져 있습니다.)
「바히야! 너는 성자도 아니고, 성자가 어떤 사람인지조차도 모르지 않느냐! 그리고 지금 네가 하는 행위가 아라한으로 가는 길도 아니지 않느냐!」라고 친구는 말했습니다.
정직한 사람인 바히야는 그 말에 전혀 화나지 않았습니다. 반대로 매우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제발 나에게 성자가 되는 길(깨달음의 길)을 가르쳐 주시오」라고 친구에게 간절히 원했습니다. 그러자 친구는 말했습니다. 「나는 그 길을 모른다.
지금 이 세상에는 부처님이 출현하셨다. 그분이 전도하면서 많은 사람들을 깨달음으로 이끌고 있다. 지금 그분은 사위성에 계신다네. 그 부처님을 만나서 지도를 받아라.」
바히야는 그 이야기를 듣자마자 모든 것을 버리고 일어섰습니다. 북쪽으로 먼 길을 걸어서 부처님이 계시는 곳으로 향했습니다.
바히야가 사위성의 기원정사에 도착했을 때 부처님께서는 탁발 나가고 안 계셨습니다. 부처님께서 돌아오실 때까지 기다리라고 해도 그는 일각이라도 빨리 부처님을 만나고 싶었기 때문에 마을로 달려갔습니다. 마침내 탁발하고 계신 부처님을 노상에서 만났습니다.
「스승이시여! 나에게 깨달음의 길을 가르쳐 주십시오」
부처님께서는 「지금은 설법하는 시간이 아니다. 식사를 마친 후에 가르친다.」라고 말했지만, 바히야는 「나는 멀리서 해탈을 얻기 위해서 왔습니다. 일순간도 기다릴 수 없습니다. 지금 가르쳐 주십시오」라고 호소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식사를 마친 후에 가르치기 때문에 기다리세요!」라고 3번이나 말씀하셨지만 바히야는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사람은 살아있다면 언제라도 먹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인간은 언제 죽을까 모릅니다. 그 전에 맑고 깨끗한 마음을 만드는 것이 최우선의 목적이 아닙니까?」
이 말에 부처님께서도 뭐라고 할 말이 없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선 채로 설법을 시작했습니다.
「바히야여! 보이는 것은 보기만 하고, 들리는 것은 듣기만 하고, 느끼는 것은 느끼기만 하고, 생각하는 것은 생각하기만 하여 머물러라. 그러면 그대는 밖에는 없다(대상에 잡히지 않는다고 하는 의미). 그러면 안에도 좋게 머물기에(마음속에서 집착·번뇌가 일어나지 않는다고 하는 의미), 안·밖으로도 좋게 머물게 되어, 그대는 어느 쪽으로도 좋게 머물게 된다(해탈 상태). 그것이 모든 괴로움의 소멸이다」
우리들이 이해하기 어렵지만, 이 말을 들은 것만으로 바히야는 완전하게 깨달음을 이루어 아라한이 되었습니다. 순간의 사건이었습니다. 그리고 출가를 하기 위해서 분소의(사람이 버린 옷감)를 찾고 있던 도중에 날뛰던 소에 들이받혀 죽었습니다. 친척이 없는 그의 시체는 노상에 버려졌습니다.
식사를 마친 부처님께서는 비구들과 함께 돌아가다가 바히야의 시체를 보고 사원으로 모시고 가서 성자에 어울린 장례식을 행하게 했습니다. 탑을 만들어 사리(유골)를 안치하게도 했습니다.
그런데 바히야를 아무도 몰랐습니다. 부처님을 그가 만난 것도, 법을 들은 것도, 하물며 깨달음에 이른 것도 몰랐습니다.
「그는 불교 사상 최단 시간에 깨달음을 이룬 분이다」라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출가는 할 수 없었지만, 나중에 부처님께서는 그를 80명 대제자 중의 하나로 인정했습니다.
비구들은 바히야의 에피소드에 놀랐습니다. 지금까지 외도의 길을 걸으면서 나무껍질을 몸에 휘감은 채로 죽은 그가 짧은 시간 동안 부처님의 말씀을 들었을 뿐인데, 부처님에게 제자로서 대아라한으로서 인정받았습니다. 놀라는 비구들에게 부처님께서는 「의미 없이 문학적으로만 아름다운 시를 천 번 이상 듣는 것보다도, 마음을 맑고 깨끗하게 하는 게송을 하나 듣는 편이 더 가치 있다」라고 하셨습니다.
인간은 아름다운 말이나 수필, 시 등에 약합니다. 말마저 영향을 주면 마음이 곧 감정에 이끌립니다. 말이 가지는 실질적인 의미에는 관심이 없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비록 마음을 움직이는 말이라도 그것이 정말로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 말인지 그렇지 않은 말인지를 구별하고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읽거나 듣거나 하는 말 중에서 우리의 인생에 대해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는 말, 또 자신의 약함을 치료해주는 말, 괴로움을 넘고 행복의 길로 이끌어 주는 말이 있다면 그것은 매우 소중한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필사적으로 읽는 서적의 대부분은 다만 읽는 즐거움만으로 끝나 버립니다. 독서의 즐거움도 불교의 시점에서 보면 하나의 오락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인생의 대부분은 독서나 말에 많이 빼앗기고 있습니다.
일상에서 쓰레기의 산으로부터 다이아몬드를 찾을 생각으로 깨달음으로 이끌어 주는 진리의 말만을 찾으면 좋지 않을까요?
의미 없고, 시시한 것에 우리의 하루는 덮여 있습니다. 그래서 바빠서 시간이 없다고 푸념만 하지만 우리가 날마다 바쁘게 하고 있는 수많은 일은 정말로 필요한 일일까요? 정말로 인생에 도움이 되는지, 마음을 맑고 깨끗하게 하는 것으로 연결되는지, 사회의 도움이 되고 있는지를 자기 자신에게 물어보았던 적이 있습니까? 인간에게 있어서 위대하고 정말로 노력해야 할 목적은 괴로움을 넘어 해탈에 이르는 길을 걷는 것이라고 이 이야기는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번 포인트
• 마음을 맑고 깨끗하게 하는 것에 「뒤로 미루는, 내일」은 없습니다.
'아짠 빤냐와로 스님 법문교재 > 법문 교재(프린트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인간에게 필요한 네 가지 요소 (20170317) (0) | 2022.05.15 |
---|---|
적을 만들지 않는 삶 (20170217) (0) | 2022.05.13 |
윤회(saṁsāra) (20161202) (0) | 2022.05.11 |
청정에 이르는 길은 험하지 않다. (20161106) (불기 2559년 경주 까티나축제) (0) | 2022.05.10 |
해탈에 이르는 여덟 가지 성스러운 길(八支聖道)의 순서 (20160319. 서울) (0) | 2022.05.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