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법문교재/법문 교재(프린트물)

청정에 이르는 길은 험하지 않다. (20161106) (불기 2559년 경주 까티나축제)

담마마-마까 2022. 5. 10. 09:10

* 청정에 이르는 길은 험하지 않다. (20161106) (불기 2559년 경주 까티나축제)

 

테라와다 불교를 실천하는 사람들에게 공통되는 특색이 있습니다. 그것은 「불도의 실천은 매우 어렵다」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해탈에 이르는 것은 현세에서는 「하늘의 별따기」를 기대하는 것과 같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선 할 수 있는 범위에서 선행을 하고, 수행에 힘쓰고, 덕을 쌓아, 장래 해탈에 이르는 것을 목표로 하는 서원을 합니다. 이 생각은 「테라와다 불교문화」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정착하고 있습니다. 오랫동안 끌어온 사고이므로 서원의 내용을 보면 그러한 계획을 세우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불교도는 비구 상가에 보시를 하고, 절을 건립하고, 포살의 날에 수행에 힘쓰는 등의 선행을 자주 실천합니다. 매일 삼보에 예배하는 등의 선행도 빠뜨리지 않습니다. 이런 선행이나 수행이 끝난 후에 대체적으로 아래와 같은 서원을 합니다.

 

「이 공덕에 의해 우리는 사후 천상에 태어나기를! 지옥, 축생, 아귀, 아수라라고 하는 악취의 경지에 결코 빠지지 않기를! 만약 인간으로 윤회하는 경우는 부족함 없이 풍요롭기를! 그러나 풍족한 그 재물에 집착이 일어나지 않기를! 그 재물로 상가와 궁핍한 사람들에게 한없이 시주하는 마음이 되기를! 이와 같이 공덕을 쌓아, 바라밀을 완성하고, 탐-진-치를 근절하여, 모든 부처님이 최고의 행복이라고 말씀하신 해탈에 이르러 윤회의 괴로움을 넘을 수 있기를!」

 

재가 불교도의 지도는 출가 비구들의 일입니다. 그래서 재가자에게 올바른 서원의 방법을 가르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가르쳐 주어도 정확하게 서원할 수 있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그 경우는 비구들이 대리로 서원합니다. 많은 서원의 게송이 빨리어로 만들어져 있습니다. 그러나 일반인은 비록 경전을 암기하고 있어도 빨리어는 잘 모릅니다. 그래서 서원의 게송을 각국의 말로 독송하기도 합니다. 테라와다 사원의 법요에 참가한 적 있는 분들이라면 비구 상가에 식사를 보시한 후, 비구들이 게송을 독송하는 것을 들었던 적이 있을 것입니다. 당연히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는 이해할 수 없었겠지요. 그것은 빨리어로 만들어진 서원의 게송인 것입니다. 이 서원의 게송은 긴 것도 짧은 것도 있습니다. 각 사원에 의해 바뀌는 경우도 있습니다. 최근 사미들의 학교에서 암기시키는 표준적인 서원도 만들어져 있습니다. 비구들이 스스로 만드는 것도 있습니다.

 

이러한 서원은 일견 욕심쟁이의 감정은 아닐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현세에 해탈에 이르는 목적으로 수행했는데, 수행을 완료할 수 없으면 어떻게 하지요? 업이라는 것은 실행하는 사람의 의지에 의해 좌우되는 것입니다. 현세에 해탈을 목표로 수행해서 결과가 나오지 않아도 그 수행은 선행을 한 것이 됩니다. 그러나 그 선행의 목적은 현세에 해탈에 이르는 것이니까, 사후는 어떻게 되는 것인지 불교도들은 걱정하고 있습니다. 실은 해탈을 목적으로 수행한다면 그 선행은 해탈에 이를 때까지 축적되므로 걱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일반인은 그처럼 생각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해탈에 이를 때까지의 장래를 계획해 버렸습니다.

 

속세에서도 모든 것을 계획 세워 실행하는 경우는 우유부단이 없어집니다. 목적을 목표로 해서 힘쓸 수가 있습니다. 계획을 실행하는데 있어서 반드시 일어나는 장애를 넘을 수 있습니다. 계획적으로 사는 것은 매우 좋은 일입니다. 정신적으로 혼란하고, 어찌할 바를 몰라하는 것은 없어집니다. 계획적으로 사는 것은 이성적으로 사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 각도로부터 보면 테라와다 불교도의 계획은 너무 스케일이 큽니다. 길고 긴 윤회를 하게 되어도 결코 실패하지 않도록 하는 계획을 세우고 있으니까요.

 

남방 불교의 나라들의 사람들이 경제적으로 풍부하지 않아도 마음 편하고 밝게 생활하고 있는 것은 현지를 여행하는 사람으로부터도 자주 지적됩니다. 그러나 이 밝음의 비밀은 잘 모르는 것 같습니다. 불교 사상의 영향을 받아 어릴 적부터 견실한 계획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이 계획의 목표는 현세에 부자가 되는 것도, 장수하는 것도, 권력자가 되는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장사가 실패해도, 기대대로 일이 진척되지 않아도, 홍수나 지진 등의 재해를 당해도, 고민하는 것은 우선 없습니다. 재난을 당하면 당연히 누구라도 곤란합니다. 그러나 불교도는 일주일이나 2주간의 사이에 그 고민을 깨끗이 잊어버립니다. 생명을 현세에 한정하고 사후는 없다고 하는 현대인의 이치로 산다면 모처럼 세운 집이 홍수로 떠내려가거나 가족의 누군가가 불치의 병에 걸리면, 그 불행의 휩쓸림에 더하여 더욱 더 격렬한 정신병에 걸려 버립니다. 그러나 불교도와 같이 해탈에 이를 때까지의 계획을 세워 두면 그때 그때 일어나는 불행한 사건이나 재해를 밝게 넘는 것이나 주위의 사람들을 돕는 것이 확실히 계획대로의 삶의 방법이 됩니다. 고민에 줄 틈이 없습니다. 무엇이 일어나도 선행을 하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에 테라와다 불교도의 밝음의 비밀은 이것입니다.

 

테라와다 불교도의 습관을 소개한 것은 「불교에 흥미를 가지는 사람들도 그것을 실천하기를 원해서」가 아닙니다.

 

이야기하는 말을 조심하고, 마음을 제어하고, 신체로 악행을 하지 않는다는 이 3가지의 행위를 완성한 사람은 선인들의 길에 이릅니다. 이것은 부처님의 말씀입니다. 간략히 말하면 신-구-의의 행위를 제어하는 것은 해탈에 이르는 길이 됩니다. 부처님은 해탈은 현세에 달할 수가 있는 경지로서 명언하고 있습니다.

 

붓다의 가르침의 특색의 한 가지는 sandhitthika입니다. 실증할 수 있고, 언제라도 누구라도 체험할 수 있는 가르침이라고 하는 의미입니다.

「이 종교을 믿으면 사후 영원한 천국에 갈 수 있다」라고 하는 생각에 부처님이 반론합니다. 반론의 취지는 간단합니다.

「만약 영원한 천국이 없다면 어떻게 합니까?」라고 하는 것입니다.

영원한 천국이 존재한다고 해도 그 천국에 가는 방법이 그 종교가 아니라 다른 종교를 믿는 것이라면 어떻게 합니까?

결국은 믿는 종교가 올바른가 아닌가는 죽을 때까지 실증할 수 없습니다. 죽고 나서 잘못되어 있다고 알아도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격입니다. 그래서 종교가 올바른가 아닌가는 곧 실증할 수 없으면 안 됩니다.

올바르지 않다고 알았다면 믿음을 바꾸는 것이 가능하게 됩니다. 따라서 붓다의 가르침이 진리인 것은 곧바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느 때 Saṅgārava 바라문이 「부처님이 달한 능력에까지 도달하고 있는 비구가 한 사람이라도 있습니까?」라고 물었을 때, 부처님은 「한 사람 두 사람으로 끝나지 않는다. 100명, 200명, 300명 단위로 세어야 한다. 500명보다 훨씬 더 많이 있다.」라고 대답했습니다.(증지부3 바라문품)

 

중부 경전의 유명한 「사문과경」의 논점은 「불도를 실천하는 것의 결과는 지금 이 세상에서 얻을 수 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자신을 「Sohaṁ braḥmana sambuddho sallakatto anuttaro. 바라문이여! 나는 정각자이며, 위대한 의사이다.」(중부경전 92 세라경)라고 자칭하셨습니다. 의사는 사람의 병을 곧바로 고치지 않으면 안됩니다. 「나의 약을 복용하면 20년 후 당신은 낫는다.」라고 하는 의사에게는 아무도 가지 않을 것입니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대로 실천하면 사는 괴로움이라고 하는 병은 곧 낫습니다. 사후까지 기다릴 필요도 없습니다. 중부 경전의 「대념처경」에는 「사띠를 실천한다면 7일 이내에 깨달음에 이르든지 불환과에 이르든지, 어느 쪽의 결과가 나온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불교라면 「가르침을 실천하면 현실적으로 결과가 나타난다.」라고 하는 것이 불가결합니다. 본래의 부처님의 가르침과 테라와다 불교도들의 「언젠가 해탈에 이르겠다.」라고 하는 생각은 일치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부처님에게 반항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부처님이 말씀하셨지만, 어쩌면 실천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라고 하는 우리들의 약점을 인정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런데도 단념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업의 이론에 따라 긴 계획을 세웁니다.

 

「바로 해탈에 이르러라」라고 부처님이 말씀하셨어도 실제로 해탈에 이르는 사람은 적은 것도 사실입니다. 그것은 사람들의 이해 능력의 문제입니다. 사람들은 사는 것은 괴로움이라는 진리를 인정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무슨 말을 해도 사는 것으로 여러 가지 즐거움이 있는 것은 아닐까하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는 것에 집착합니다. 집착을 버리는 것이 해탈입니다. 「집착을 버리고 싶지는 않지만, 붓다의 가르침은 고맙고 실천하고 싶다」라고 말해도 모순이 있습니다. 붓다가 말한 「사는 것은 괴로움이다」라고 하는 진리를 부정하고 있습니다. 그 진리를 부정하면 「해탈은 최고의 행복이다」라고 하는 진리도 부정하게 됩니다.

 

명상을 해도 사마디에 이르지 않고, 사띠를 실천해도 해탈에 이르지 않는 경우가 부처님 시대에도 있었습니다. 부처님이 그 이유를 해명하셨습니다. 사마디에 이르기 위해서는 오욕을 버리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해탈에 이르기 위해서는 모든 사물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러나 사는 것(오온)으로 즐거움이 있다고 생각하면 버려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수행자는 오온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이점은 무엇인지, 오온에 의해 생기는 결점은 무엇인지를 있는 그대로 관찰해서 발견할 필요가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는 것으로 보는 즐거움이나 맛보는 즐거움 등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 정보에 접해서 일어나는 감각은 편하다고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그 감각도 정보도 무상으로 일시적입니다. 감각에 집착하면 한계가 없는 괴로움이 따라옵니다. 이러한 이해가 있고나서 명상 실천하면 얼마되지 않는 동안에 해탈에 이릅니다.

 

불도의 실천은 어렵지는 않습니다. 고행도 단식도 없습니다. 특정의 식사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는 것도 없습니다. 의식 의례도 없습니다. 종교적인 액세서리, 복장 등도 없습니다. 수행을 위해서 자신의 시간을 비울 필요도 없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에서는 이런 것이 하나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좋은 일투성이인데 실천에 힘쓰는 마음이 되지 않는 것도 이상합니다.

 

우리는 망상하거나 생각하거나 하는 것을 제어해야 합니다. 무엇인가를 생각한다면 도움이 되는 것, 마음이 밝아지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사고에 의해 성냄, 욕구, 미움, 심적 저하 등이 일어난다면 그 사고를 멈춥니다. 마음이 언제라도 냉정하게 유지될 수 있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무엇을 말하는 경우는 다만 감정으로 말하기 시작하면 안 됩니다. 무엇을 말해야 할 것인지, 어떻게 말해야 할 것인지, 이것을 말하면 어떤 도움이 되는지, 라고 고찰하고 이야기해야 합니다. 그리고 주절주절 몇 시간동안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짧게 포인트를 좁혀 말해야 하는지를 궁리합니다. 거짓말, 잡담, 욕설, 조화를 부수는 이야기는 그만둡니다. 사람이 듣고 싶어지는 자애로운 말, 들어서 도움이 되는 말을 이야기합니다.

 

살생, 도둑질, 사음이라고 하는 신체로 실행하는 악행을 그만둡니다. 사람은 걷거나 앉거나 일을 하거나 여러 가지 행위를 합니다. 그 행위가 악행이 되지 않게 조심합니다. 악행은 자신에게 있어서 나쁜 결과가 되는 것, 타인에게 있어서 나쁜 결과가 되는 것입니다.

 

이 3가지의 스텝을 실천하면 선인의 길을 완성하게 되는 것이라고 부처님이 가르치셨습니다. 「선인의 길을 완성한다.」란 「해탈에 이른다.」는 일인 것입니다. 사고와 말의 제어에 특별히 시간이 걸릴까요? 일에 방해가 될까요? 신체로 악행을 그만두는 것으로 어떤 안 좋은 일이라도 일어날까요? 아무것도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불도를 실천하기 시작한 그 순간부터 사람은 행복하게 도달하는 길을 걷게 되어 있습니다. 붓다가 말씀하신 가르침이 진리인 것을 실천을 시작하는 것과 동시에 경험합니다. 「조금 실천해보니 사는 것이 편해진다, 더욱 더 실천하면 완전한 행복에 도달하지 않을까?」라고 자신을 가지고 힘쓰는 것이 불교도의 삶의 방법입니다.

 

● 이번 포인트

 

• 불교도는 계획을 세워 생활합니다.

• 불교를 실천하는 사람은 해탈 할 수 없어도 행복하게 됩니다.

• 모든 종교의 수행보다 불교의 수행은 간편합니다.

• 불도는 곧바로 결과가 나타나는 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