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좋아함과 사랑의 뒤에는 괴로움과 공포가 있다. (20161021)
「좋아」라는 말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좋아」라고 말할 때는 사람의 기분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보통 사람은 누군가를 좋아하게 됩니다. 또 어떤 물건을 좋아하게 됩니다. 더불어 타인의 사고, 생각도 좋아하게 됩니다. 자신의 사고, 망상, 관념 등은 당연히 좋아합니다.
그래서 좋아하게 되는 대상에는 3개가 있습니다.
(1) 사람이나 생명체
(2) 물건
(3) 사고
그런데 불교에서는 「좋아」라고 하는 감정은 사람의 자유를 속박하고 괴로움을 낳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좋아」가 문제인 것은 불교만이 아닙니다. 다른 종교·철학에서도 「좋아」의 위험성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일반상식에서도 익히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세상의 견해와 부처님의 견해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세상에서는 사람이 「좋아」하는 대상을 문제 삼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담배를 많이 피워 병이 들면 담배회사를 고소합니다. 또는 마약의 밀수, 판매, 소지 등을 단속해서 사람들이 미약에 의존하는 것을 멈추려고 합니다. 이와 같이 사람이 좋아하게 되는 「대상」을 원수로 하는 것이 세상의 방식입니다.
부처님의 접근법은 다릅니다.
무엇인가를 좋아하게 된다고 하는 것은 그 사람의 마음의 문제입니다. 그 사람 개인의 주관적인 감정의 문제입니다.
만약 대상이 원인이라고 한다면 모든 생명의 마음에 같은 결과가 나타날 것입니다. 마약을 본 것만으로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복용하려고는 하지 않습니다. 어떤 여인이 아름답다고 해서 모든 남자들이 욕망을 품는 것은 아닙니다. 「좋아」는 분명하게 주관적인 문제입니다. 고쳐야 할 것은 개인의 마음이지 세계가 아닙니다.
불교는 일관되게 마음을 향상시키는 것, 맑고 깨끗하게 하는 것을 권장합니다. 무엇인가를 「좋아」한다고 하는 것은 그 무언가에 의존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음이 약하고, 더러워져 있다고 하는 증거인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2단계로 나누어 해결 방법을 말씀하셨습니다.
우선 좋아하는 대상으로부터 손을 뗀다. 그다음에 의존하지 않아도 행복해질 수 있도록 마음을 기른다는 것입니다.
법률로 나쁜 것을 금지해도 사람은 고쳐지지 않습니다. 손을 떼는 것도 못합니다. 그래서 스스로 「좋아」하는 대상으로부터 손을 떼어야 합니다. 표면적으로는 세상의 방식과 닮아있는 것 같지만 실제는 다릅니다.
「좋아」는 주관적인 감정입니다.
좋아하게 되는 사람이나 물건에 의해서 「좋아」라고 하는 감정도 바뀝니다.
어떤 사람이 이와 같이 말한다고 합시다. 「나는 어머니가 너무 좋아」 「나의 아내가 너무 좋아」 「나의 아이가 너무 좋아」 「나는 우리 집의 강아지가 너무 좋아」 「나는 내 차가 너무 좋아」 이 경우 「좋아」라고 하는 감정은 결코 동일한 대상이 아닙니다.
이렇게 「좋아」에도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인가를 좋아하게 되어 그 사람이 불행하게 되어도 그것은 결코 그 대상의 탓이 아닙니다.
기독교에서는 「사랑」이라고 하는 한마디로 부부 사이의 감정, 가족에 대한 감정, 이웃에 대한 감정, 신에 대한 경외감 등의 모든 것을 설명하려 하지만, 불교는 언어가 허락하는 한 각각의 감정마다 다른 단어를 사용합니다.
예를 들어 불행을 부르는 애욕(rāga)이라고 하는 감정이 있고, 자애(mettā)라고 하는 행복을 가져오는 감정이 있습니다. 「좋아」의 경우도 몇 개의 단어로 나누어 부처님께서 설명하셨습니다.
「좋아」는 빨리어로 piya(삐야)입니다.
「공부가 좋아, 라면이 좋아, 돈이 좋아」라고 하듯이 마음에 드는 무엇이라도 piya라고 하는 단어가 사용됩니다. 그러나 좋아하게 되는 대상에 의해 「좋아」라고 하는 감정도 바뀝니다.
부처님 당시 사위성에 한사람의 남성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에게는 사랑스러운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 아들이 갑자기 죽었습니다. 그 사람에게 있어서 이 이별의 슬픔은 참기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매일 아들의 화장터에 가서 쓰러져 울었습니다. 그것이 이 사람의 일과가 되어버렸습니다. 매일 화장터에 가서 정말 좋아했던 아들을 생각했기 때문에 그의 슬픔은 증가하기만 하지 줄어들지는 않았습니다.
이 괴로움으로 참기 어려운 상황이 된 그 사람을 위해 부처님께서는 그의 집을 방문하셨습니다. 부처님께서 「그대는 정신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괴로워하고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이냐?」라고 물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죽은 아들을 얼마나 좋아했는지에 대해 부처님께 설명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태어난 자는 누구라도 죽는다. 죽음은 어느 집이나 겪는 일이라고 당신도 알고 있다. 혹시 우리 아이만은 죽을리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냐? 지금도 이 세상에는 무수한 아이들이 죽어간다. 그러나 그대는 그들에 대해서는 조금도 슬퍼하지 않는다.
오직 자신의 아이가 죽은 것으로 인해 당신은 정신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큰 충격을 받고 있다. 그 이유를 아느냐?
당신의 마음에 「좋아」라고 하는 감정이 있기 때문이다. 그 감정이 당신을 침식하고 있다. 괴로움에 빠뜨리고 있다. 그 아이는 자신의 운명에 의해 죽었을 뿐인데도, 당신의 마음에 있는 「좋아」라고 하는 감정이 당신을 끝없이 괴롭히고 있다. 그 감정을 없애면 당신은 다시 마음의 평온함을 느낄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며 진리를 설했습니다.
또, 사위성에 있던 부처님의 여자 재가 여성 신자 가운데 제일로 여겨지는 Visākhā(위사-카-) 부인의 Sudattā(수닷따-)라고 하는 손녀가 갑자기 죽었습니다. 손녀였지만 너무 사랑스러워서 한시도 떨어지기 어려워 자신이 기르고 있었습니다. 이 사별의 슬픔은 불교를 이해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참기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손녀가 얼마나 사랑스러웠는가 하고 물었습니다. 그녀는 필사적으로 사랑스러움을 설명했습니다.
「그렇게 사랑스러운 아이가 만약 두 명이라면 좀 더 기뻐했겠구나!」라고 부처님께서 물으시자, 위사카 부인은 그렇다고 대답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인원수를 세 명, 네 명으로 늘려가면서 그녀에게 물었습니다. 그녀의 기쁨도 동시에 증가했습니다. 마지막에 이 마을의 전체 인구만큼 손녀가 있으면 당신은 얼마나 기뻐하는지 질문받았을 때, 무량하게 즐거울 것이라고 그녀가 대답을 합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는 이 마을에서 매일 사람이 죽어 있다. 한사람, 어떤 때는 두 사람, 가끔은 20명, 30명씩 죽는다. 백 명이나 죽을 때도 있다. 죽은 한 사람의 손녀에 대한 애정으로 괴로워하는 당신은 그렇게 되면 무량한 즐거움이 아니라, 무량한 괴로움을 받는 지경이 되는 것은 아니냐고 질문받았을 때 그녀는 문득 깨닫습니다.
자신의 고뇌와 괴로움의 원인은 손녀에 대한 애착이었고, 그 애착은 사람의 마음의 평안을 침식하는 것이라고 압니다.
「할머니가 손녀를 너무 좋아해.」 「아버지가 아들을 좋아해.」
이 2가지 「좋아」는 미묘하게 다릅니다. 일화에서는 할머니와 손녀의 애정으로써 쓰여 있지만, 보편적으로 어머니와 자식 사이의 애정으로 보는 편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자식을 사랑하는 마음은 아버지와 어머니가 동일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어머니의 사랑과 어버지의 사랑인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아버지의 사랑에 piya(좋아) 라고 하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아이에 대한 어머니의 사랑에는 pema(사랑)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마음의 감정을 없애기 위해서도 2종류의 수단을 사용하셨습니다. 두 명의 마음에 이성을 되찾게 해주었지만, 그 방법에는 「남성 버전과 여성 버전」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남성에게는 「태어난 자들은 누구라도 죽는다. 아침에 해가 떠오르면 저녁에는 해가 지는 것과 같이 당연한 현상이다. 놀랄 필요도 슬퍼할 필요도 없다. 이 세상 사람은 태어나기 전에 자궁 안에서도 죽는다. 아기 때도, 아이 때도, 청소면 때도, 어른이 되었을 때도 사람은 죽는다. 중년이 되어 죽는 사람도 있고, 어떻게든 죽음을 면한 사람은 노쇠해서 죽는다.
그러나 우리 아이라고 하는 경우는 이 당연한 사실을 인정하기 어려워진다. 타인이 죽었을 때는 냉정히 있을 수 있지만, 우리 아이의 죽음의 경우는 냉정함이 없어진다. 그 이유는 무엇이냐? 마음에 있는 「좋아」라고 하는 감정이다.」고 하셨습니다.
여성의 경우 아이에 대한 사랑에는 점액질이 있습니다. 손녀가 두 명 있으면 이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그녀는 한 사람의 손녀로부터 얻은 기쁨을 두 배로 해서 이미지를 만들었습니다. 부처님은 더욱더 이 즐거운 이미지를 부풀렸습니다. 그녀는 무수한 손녀가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것을 이미지 해서 기쁨이 흘러넘쳤습니다. 지금까지 있었던 죽음의 슬픔을 잊었습니다. 그 순간에 부처님께서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봐야 하는 것」이라고 하는 폭탄을 장치해서 그녀의 감정적인 망상 세계를 부수었습니다. 이성을 되찾은 그녀는 애착하는 것으로부터 얻는 즐거움보다는 그로부터 받는 슬픔이 훨씬 많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사람을 위로하는 방법의 여성 버전은 「정」으로부터 시작했습니다. 남성은 어긋남이 없는 자기 도리로 살려고 하지만, 정이 들어가면 무지하게 되어버립니다. 여성은 정을 소중히 해서 즐겁게 살려고 하지만, 정으로부터 일어나는 괴로움을 견디지 못하게 되면 이성에 눈을 뜹니다. 정과 도리에 얽혀 있는 속세의 삶의 방법은 괴로움밖에 낳지 않습니다. 여성이나 남성도 이러한 속세의 길로부터 이성이라고 하는 위치에 이르지 않으면 안 됩니다.
「좋아」 (piya)도, 「사랑」 (pema)도 세상에서는 즐거운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좋아하는 것, 사랑하는 것은 반드시 자신으로부터 멀어져갑니다. 그것으로 인해 얻은 즐거움과 비교도 안 될 만큼 많은 괴로움을 낳습니다. 좋아하는 것이 눈앞에 있을 때는 즐겁습니다. 좋아하는 것이 없어지면 마음에 있는 「좋아」라고 하는 감정이 끝없이 사람을 괴롭힙니다. 좋아하는 것이 없어지지 않아도 없어질 염려로 공포감을 낳습니다.
사람에게 좋아하는 것, 사랑하는 것이 나타났을 때부터 즐거움과 동시에 공포라고 하는 감정도 만들어집니다. 어머니가 아이를 낳았을 때로부터 일평생 걱정하는 것이 떠날 날이 없습니다. 아이가 귀가하는 시간이 30분만 늦어도 어머니는 걱정으로 두려워합니다. 휴일에 아이를 데리고 공원에 놀러 가도 어머니의 마음은 걱정의 불길로 항상 불타고 있습니다. 「위험하다, 안된다, 조심해라.」는 어머니의 애착의 올가미 소리인 것입니다.
● 이번 포인트
• 「좋아」라고 하는 말은 복수의 감정을 나타냅니다.
• 좋아하는 것, 사랑하는 것이 고민과 괴로움을 만듭니다.
• 좋아하는 것을 바꾸거나 심판해도 마음의 괴로움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 세상을 바꿀 것이 아니라 의존하지 않는 마음을 길러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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