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음의 오염원(upakkilesa) 세탁 (20170407)
마음을 맑고 깨끗하게 하는 것
「마음의 오염원을 제거한다.」라는 것은 불교의 큰 주제입니다. 불교는 복잡한 수행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어떻게 맑고 깨끗하게 하는가가 불교의 큰 주제가 되어 있습니다.
테라와다 불교에서는 부처님의 기본적인 가르침은 무엇인가에 대해 제대로 정의한 경전이 있습니다. 이것은 모든 경전을 주석할 때의 중심이 되어서 「청정도론(Visuddhi magga)」이라고 명명되어 있습니다. 「청정도론」은 남인도에서 스리랑카로 건너 온 붓다고사 장로가 쓴 책입니다.
당시 스리랑카에는 주석서가 많이 있었지만, 당시의 싱하라말로 쓰여져 있었으므로 누구도 쉽게 참조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붓다고사 장로가 누구라도 읽을 수 있도록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마음으로 이 많은 주석서를 빨리어로 기록하려고 생각했습니다.
스리랑카의 장로들은 먼저 붓다고사 장로에게 그 능력이 있을지 어떨지를 조사하기 위해서 어느 과제를 냈습니다. 경전 안에 있는 게송을 주석하도록 했습니다.
그 게송이란,
「생명은 내면적으로 얽힌다. 외면적으로도 얽히고 있다. 생명은 얽힘에 얽히고 있다. 석가모니 부처님에게 묻습니다. 누가 이 무수한 얽힌 것을 풀어 자유롭게 되는 것일까요?」
붓다고사 장로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습니다.
「도덕적인 계를 지키고, 마음과 지혜를 길러 확실히 정진하는 비구가 이 얽힘을 풉니다.」
이 게의 주석이 시작이 되어 「청정도론」이 완성되고, 이것이 테라와다 불교의 기본적인 주석서가 되어 있습니다. 큰 책입니다.
그리고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이라는 게송이 있습니다.
Sabba pāpassa akaranaṁ - Kusalassa Upasampadā
Sacitta pariyodapanaṁ - Etaṁ buddhānu sāsanaṁ.
「악한 일을 그만두고, 선하게 살아가라. 자신의 마음을 맑고 깨끗하게 하는 것, 이것이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이와 같이 불교에서는 명확하게 「자신의 마음을 맑고 깨끗하게 하는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미신에 감염되지 말자
부처님의 가르침은 마음을 맑고 깨끗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해탈에 이르는 것입니다. 이 목적으로부터 벗어날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마음을 맑고 깨끗하게 하려는 의욕이 적고, 또한 해탈을 목표로 하고 있는 것은 더욱 적습니다. 현세 이익만을 목표로 하는 사람들이 훨씬 많습니다.
많은 사람들의 요구에 부응해 불교도 현세 이익을 추구하는 편이 좋은 것이 아닌지 생각하는 것도 가능합니다.
사람들의 기분이나 기대에 맞추어서 좋은 기분으로 만들어 주든지, 혹은 인간으로서 살아가야 할 길을 가르치든지, 2개의 선택에서 고민합니다.
부처님은 ❬사람들의 기분을 치켜세우는 것보다는 사람들의 마음을 바르게 증장시키는 것이 생명을 모두 사랑하는 종교가의 의무이다❭라는 입장을 취했습니다.
그래서 현세 이익을 목적으로 한 의식, 의례나 기도 등은 불교의 관할이 아닙니다. 이것들은 모두 미신입니다.
의식, 의례나 기도 등을 행하여 금전적인 이익을 얻고, 그 수입으로 생활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만약 종교가가 이러한 일로 생계를 유지해 간다면, 그것은 축생적인 삶의 방법이다”라고 부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마음을 맑고 깨끗하게 하는 것, 인격을 향상시키는 것, 지혜를 개발하는 것, 해탈에 이르는 것이 불교의 목적입니다. 거기에는 어떤 이견도 내세울 수 없습니다.
가끔 다른 종교의 관례나 미신을 불교에 도입하거나, 불필요한 가르침을 불교에 혼합하려고 하는 사람도 나타납니다. 그것은 불교 특유의 목적을 이해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불교도 다른 종교도 같지 않겠는가!’ 라고 제멋대로 망상합니다. 이와 같이 미신 등을 불교에 거두어들이려고 하면, 부처님의 가르침을 개악하지 않고 소중하게 지키고 있는 장로들의 비판을 받습니다.
의식, 의례, 주문·기도, 밀교식 호마 공양 등을 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원래의 불교의 흐름으로부터 멀어지게 됩니다.
「불교」에 기생한 미신
부처님의 가르침에 반하는 것을 행한 사람들도 「불교」라는 간판은 내리고 싶어 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해탈을 목표로 하는 사람들만으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한다면, 불교를 실천하는 불자는 극히 소수가 될 우려가 있다!’ 그래서 속세의 소망에 부응해서 그에 맞게 불교를 가르치고, 사찰을 운영하면 그 우려가 없어질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들은 자신들 마음대로 소수가 해탈을 목표로 실천하는 불교를 「소승」이라고 부르고, 대중이 현실적으로 실천하는 불교를 「대승」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부처님의 시대에 불교는 금방 사회에 퍼졌습니다. 왕족들, 지식인, 부유한 상인, 성실한 수행자들 사이로 불교는 인기가 대단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삼보에 귀의하는 불교도인 것은 사회적인 성공지수의 상징이기도 했다고 생각됩니다. 그래서 가르침의 내용에 관계없이 모두 불교도라고 자칭하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다양한 신앙, 의식, 의례, 주문·기도 등을 행하는 조직이 모두 불교라고 하는 커튼을 걸치게 되었습니다.
이 흐름 안에 큰 문제가 보입니다. 불교는 사람을 이끄는 것입니다. 사람에게 이끌리는 것은 아닙니다. 학교의 선생님은 학생들을 지도하는 것이지, 학생이 선생님을 지도하는 것은 아닙니다. 일반인의 취향에 맞추어 부처님의 가르침에 미신 등을 받아들이는 것은 뒤바뀐 행위가 됩니다.
그럼 부처님의 가르침에 순수하게 따르면 불교는 그저 몇 안 되는 사람들만을 상대로 하는 가르침이 되어 사회로부터 사라지는 것일까요?
반드시 그렇게 된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마음을 맑고 깨끗하게 하는 길은 다르게 말하면 심리학이기 때문입니다.
불교는 인류의 가르침
모든 인간에게는 마음이 있습니다. 마음에 병이 들고, 다양한 악을 범해서, 인생을 엉망으로 만드는 것은 결코 있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마음을 기르는 방법, 맑고 깨끗하게 하는 방법은 인간에게 꼭 필요합니다. 행복한 것은 마음이 느끼는 것이며, 가족·재산·권력 등의 안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현세 이익을 얻어 행복하게 된다는 것은 모순된 이야기입니다. 부유한 사람이 확실히 행복하게 된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마음이 맑고 깨끗한 사람은 확실히 행복을 느낍니다. 행복하게 되고 싶다고 하는 소망은 인류 공통의 바램입니다. 따라서 부처님의 가르침은 소수를 위한 것도 아니고, 모든 인류에게 필요 불가결한 것입니다. 부처님의 본래의 목적으로부터 이탈해서도, 불교라는 간판을 내걸고 있던 사람들로 인해 불교가 세계 종교의 입장으로부터 멀어져 버렸습니다.
지식이 발전하고 사람들의 이해 능력이 높아지고 과학이 발전하면 의식·의례·기도 등의 미신은 무의미하다고 간단하게 압니다. 혼합된 불교는 지식인이나 과학자들 사이에 웃음거리가 됩니다. 부처님의 본래의 가르침을 순수하게 지켜 실천한다면 온 세상 사람들이 불교의 영향으로 평화롭고, 풍부하고, 최대의 행복을 느끼며 살 수 있습니다.
마음을 맑고 깨끗하게 하는 것, 부처님의 길인 것입니다.
왜 마음을 맑고 깨끗하게 해야 하는 것인가?
불교는 「마음을 맑고 깨끗하게 한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어째서 마음을 맑고 깨끗하게 하지 않으면 안 됩니까?」라고 묻습니다. 「마음이 더러워져 있기 때문」이라고 말하면 「정말 더러워져 있어요?」라고 묻습니다.
그래서 우선 「마음이 더러워져 있다」라는 것을 가르쳐 주지 않으면 안 됩니다. 만약 여러분이 「자신의 마음은 더러워지지 않았다」라는 생각이라면 이야기는 거기서 끝입니다. 그 이상 이야기를 듣지 않을 것입니다. 반대로 「확실히 오염원이 있습니다. 역시 마음은 더러워져 있네요.」 등으로 인정할 수가 있다면 계속해서 이야기를 듣는 편이 좋을 것입니다.
왜 마음을 맑고 깨끗하게 해야 하는 것인지 우선 그것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대답은 「마음이 오염되어 있으면 사는 것이 괴로우니까」입니다.
우리는 누구라도 행복을 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대단한 행복을 구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농작물이 풍작이 되었으면 한다든가, 대학을 졸업하면 좋아하는 일을 하며 살고 싶다든가, 일의 능숙하게 처리하는 능력을 몸에 익히고 싶다든가, 부부관계, 가족관계가 원만하고 싶다든가, 일 년 중 몇 차례 정도는 여행을 하고 싶다든가, 트러블을 일으키고 싶지 않다든가, 생활하는데 충분한 수입을 갖고 싶다든가, 아이의 교육이나 자신의 노후를 위해서 저금을 하고 싶은 등 우리가 희망하고 있는 것은 그 정도의 행복입니다. 세계를 제패하고 싶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정말 작은 희망 밖에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이룰 수 없을 것 같은 희망은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좋은 일을 하고 싶고, 능숙하게 일 처리하는 것이 몸에 익혀지면 좋겠다라 하는 것은 당연한 희망이지만, 문제는 그러한 희망마저도 좀처럼 실현되지 않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건강하고 싶다는 것은 누구라도 있는 상식적인 희망이지만, 현실적으로는 그것이 실현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것이 문제입니다.
자가용 비행기를 갖고 싶다든가, 호화 여객선을 갖고 싶다든가 하는 자신의 상태와 현격한 차이가 나는 희망을 갖고 있다가 실현되지 않아도 관계없지만, 취직이 안 되어 놀고 있는 아들에게 「좋은 직장을 찾았으면 좋겠다.」라는 어머니의 희망은 무엇이 나쁜 것일까요? 실현되기를 바라는 당연한 희망인 것입니다.
여러분도 매일 여행하고 싶다고는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일 년에 2, 3회 정도 어디 경치 좋은 곳에 가서 며칠간 놀고 돌아가고 싶다는 그 정도입니다. 매우 보편적이고 상식적이고 당연한 희망뿐입니다. 그러나 그것마저도 실현되지 않습니다.
희망을 실현되지 못하도록 하는 것
왜 상식적인 희망도 실현되지 않는 것인지 거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의 삶의 방법은 모두 마음이 결정한다고 하는 것입니다. 마음이 지배자인 것입니다. 내가 어떻게 되는가 하는 것은 나의 마음이 마음대로 결정합니다. 마음이 마음대로 결정했다면 이제 어떻게도 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희망이라고 하는 것은 상식적인 희망입니다. 상식을 넘은 희망은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이 상식적인 희망을 만든 것은 마음입니다.
희망을 만들고 나서 그것이 이루어질 수 없다는 뒤바뀐 마음이 존재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이 희망을 만들고 있으면서도 그 희망이 실현되지 않게 실망하는 마음이 마음대로 일어나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을 괴롭히고 있는 것입니다
마음이 희망을 만들고, 그리고 희망을 실현되지 않을 방향으로 일합니다. 이것이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믿을 수 없는 모순입니다. 이것은 개개인에게 있어서의 마음의 문제인 것입니다.
예를 들어 음악가가 좋은 음악을 만들기 위해서 필요한 능력은 집중력입니다. 마음을 온화하게 해서 침착한 편이 좋은 음악을 만들기 쉬울 것입니다. 그런데 하루 종일 장난치고 혼란스런 일만 하고 있는 사람이 많습니다. 술을 마시고, 심할 때는 마약 등을 사용해 뇌세포를 부숩니다. 허세를 부리고, 고집을 부리고, 타락한 생활을 합니다. 그 상태로 음악을 만들려고 하지만, 당연히 음악을 만들 수 없을 것입니다. 그 사람에게는 음악의 능력이 있고, 음악가로서 성공하고 싶다는 희망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자신이 스스로 이런 생활을 하면서 음악적 능력을 모두 파괴하는 삶의 방법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이러한 삶의 방법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마음」이라고 하는 독재자의 뜻대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마음 이외에 아무것도 없습니다. 육체는 마음이 사용하고 있는 도구에 지나지 않습니다.
「마음」이라고 하는 독재자, 황제가 있습니다. 이 독재자가 모든 것을 진지하게 객관적으로 보려고 하지 않습니다.
행복하게 되기 위해서는 마음을 고칠 수밖에 방법이 없습니다. 그래서 마음을 맑고 깨끗하게 하는 것은 행복을 얻는데 절대적인 조건입니다. 우리가 인간으로서 본래 해야 할 일은 그뿐 인 것입니다.
장사가 잘되기를 기도하지 않아도 좋습니다. 마음을 맑고 깨끗하게 하면 장사는 번성합니다. 장사가 잘되는 것을 방해하는 것은 더러운 마음인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여러 가지 희망이 있습니다. 건강하게 되고 싶으면, 행복하게 되고 싶으면, 어떤 희망이라도 마음을 맑고 깨끗하게 하면 뭐든지 잘되는 것입니다. 이것저것에 의지할 것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을 맑고 깨끗하게 하면, 충분하지 않아도 행복하게는 됩니다.
다음으로 「마음의 오염원이란 무엇인가?」라는 것을 공부할 필요가 있습니다.
마음의 오염원에는 어떠한 것이 있는가요? 오염원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지금부터 말하는 것은 그 일부입니다.
① 탐욕·지나친 욕구(Abhijjhā)
Abhijjhā visamalobho cittassa upakkileso
탐욕은 지나친 욕구로 마음의 오염원입니다.
Abhijjhā(아빗자-, 지나친 욕구)는 불교의 전문 용어입니다. 부처님은 그것을 visamalobho 라고 정의하셨습니다. Visama란 보통이 아닌·지나친, 이라는 의미입니다. Lobho는 욕구입니다. 그러니까 abhijjhā란 지나친 욕구라는 것이 됩니다.
욕구라는 것은 마음의 오염원이며 번뇌입니다. 욕구에는 상식적인 욕구와 지나친 욕구의 2가지가 있지만, 마음의 장애로 다루어지는 것은 지나친 욕구 쪽입니다. 이것은 심상치 않은 욕구, 비상식적인 욕구입니다.
우선 상식적인 욕구를 이해합시다.
예를 들어 배가 고팠을 때 「밥을 먹고 싶다」라는 욕심이 일어납니다. 이것은 누구라도 있는 매우 상식적인 욕구입니다. 모처럼 외식하며 먹는데 맛있는 것을 먹고 싶다고 생각하겠지요. 이것도 이상하지 않은 상식적인 욕구입니다. 맛있고 즐겁게 먹자라는 것까지는 상식의 범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먹을 것에 대해 이상하게 조건을 가지거나, 감정적이 되거나, 자신의 수입에 맞지 않는 사치를 하거나 하면 그것은 「지나친 욕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맛있게 먹고 싶다"고 하는 마음은 상식적인 욕구이며, "이러한 음식이 아니면 안 됨"이라고 구하게 되면 지나친 욕구가 됩니다.
식사에 돈이 많이 드는 것만으로는 지나친 욕구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고수입의 사람이 고가의 식사를 해도 그것은 그 사람에게 있어서는 상식적인 범위입니다. 수입도 없는데 맛있는 것을 먹고 싶어서 참지 못하고 고가의 식사를 한다면 그것은 지나친 욕구입니다.
욕구의 감정을 현실적인 사고로 관리해 제어하는 경우는 상식적인 욕구입니다. 상식의 범위에서 컨트롤 할 수 없게 되었을 경우는 지나친 욕구가 됩니다. 지나친 욕구는 일종의 정신적인 병입니다. 정신병은 결코 좋은 결과는 내지 않을 것입니다.
식욕만이 욕구가 아닙니다. 사람은 여러 가지 것에 대해 욕구를 가집니다. 다양한 욕구 중에서도 그 두목은 성욕입니다. 성욕은 보통이라도 격렬한 감정입니다. 간단하게 탈선해 버리는 지나친 욕구가 됩니다. 그만큼 제어가 효과적으로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욕에 관해서는 세상의 상식·세상의 규칙·도덕 등을 존중하며 지키도록 항상 관리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맛있는 것을 먹고 싶고, 여행하고 싶고, 멋을 부리고 싶고, 음악·영화 등을 감상하고 싶은 욕구도 있지만, 이러한 욕구를 상식의 범위에서 억제하는 것은 그만큼 어렵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욕구의 감정이 강해져 상식을 벗어나 버리면 지나친 욕구가 됩니다. 지나친 욕구는 정신병이므로 무엇을 하고 있는지 본인조차도 모르게 됩니다. 이때는 세상의 규칙도, 도덕도 무시해버리고 제멋대로 행동합니다. 그것은 본인에게 있어서도, 주위에게 있어서도 몹시 힘든 일입니다. 불행에 빠집니다. 정신병에 걸릴 수도 있는 욕구가 "지나친 욕구"인 것입니다.
그러나 상식의 범위라면 욕구는 가져도 괜찮다고 오해받아서는 곤란합니다. 마음에 욕구가 있는 경우는 해탈에 이르는 일도, 집착을 버리는 일도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비록 상식의 범위라도 욕구는 마음의 오염원이 됩니다. 상식적인 욕구를 없애기 위해서는 수행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한편 지나친 욕구 쪽은 그것이 생기지 않게, 날마다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지나친 욕구에 관해서는 「그동안 수행에 힘써서 욕구를 없애겠다!」라고 하는 태평한 태도는 위험합니다. 즉시 없애야 하는 것입니다.
② 지나친 분노·해치려는 마음·분노(Byāpāda)
Byāpādo cittassa upakkileso
지나친 분노는 마음의 오염원입니다.
Byāpāda(브야-빠-다)는 「지나친 분노」입니다.
누구라도 일이나 가정, 인간관계 등이 잘되지 않을 때는 기분이 나빠지거나 종종걸음치듯이 화내거나 싫은 기분이 되는 것은 언제나 일어납니다. 아이가 자신이 말하는 것을 듣지 않으면 엄마는 화냅니다. 그러나 병적으로 화내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이 상식의 범위를 넘은 분노가 「지나친 분노」가 됩니다. 그때는 아무 주저도 없이 범죄를 저지릅니다. 사람에게 해를 줍니다.
심약해서 다른 사람에게 해를 줄 수가 없게 되었을 경우에는 그 파괴력이 자기 자신에게 되돌아옵니다. 자신을 해칩니다.
③ 강한 분노(Kodha)
Kodho cittassa upakkileso
강한 분노는 마음의 오염원입니다.
Kodha(꼬-다)란 강한 분노입니다.
「화냈어!」라는 가벼운 분노가 아닙니다.
분노가 자신의 행동을 지배하고 있는 경우의 분노입니다. 이성을 잃는 분노입니다.
이성을 잃는 것이 버릇이 되어버리면, 자주 이성을 잃는 상태가 된다면, 그것은 위험한 마음의 오염원입니다. 그래서 행복하게 되는 것은 결코 자신의 몫이 아닙니다.
④ 원한(Upanāha)
Upanāho cittassa upakkileso
원한은 마음의 오염원입니다.
시간이 지나면 분노는 upanāha(우빠나-하)「원한」이 됩니다.
원한이란 원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먼저 화를 냅니다. 갑자기 욱하게 됩니다. 이것은 갑자기 일어나기 때문에 빨리 침착하게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순간에 폭발했지만 서서히 가라앉아 갈 것입니다. 그렇지만 분노가 가라앉지 않고 계속 사라지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것이 「원망함」으로 변질됩니다.
조금 화내는 것과 달리 원망하는 것은 대단히 무서운 병입니다. 분노가 계속 마음에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원망이 있으면 그 사람은 반드시 불행하게 됩니다. 생각해 보면 처음에 약간의 일로 화냈지만, 일 년, 2년, 5년, 10년, 20년이 지나도, 원망이 사라지지 않고 쭉 마음에 있다면 어떻게 합니까! 가끔 상대가 죽었어도 계속 원망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것은 정말로 무서운 병인 것입니다.
⑤ 위선·악을 숨김(Makkha)
Makkho cittassa upakkileso
위선은 마음의 오염원입니다.
다섯 번째 마음의 오염원은 막카(Makkha)입니다.
Makkha는 「악을 예쁘게 포장해서 숨기는 것」입니다. 더러운 행위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사람에게 발각되지 않게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예쁘게 숨깁니다.
우리는 가끔 실패하지만 항상 그것에 대해 변명을 하고, 선인 인체 하며 있습니다. 변명을 하는 사람에게 성장은 없습니다.
자신의 악행을 숨기는 사람에게는 하나 더 나쁜 성격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작은 죄, 현미경으로 밖에 안 보일 정도의 작은 나쁜 행위에도, 크게 만들어 다른 사람에게 퍼뜨리는 것입니다. 조그만 일이라도 다른 사람의 잘못이나 부정행위를 철저하게 추궁해 비판하고, 욕하고, 퍼뜨리는 것을 자주 봅니다. 그러한 태도를 취하면 말하는 당사자가 인간으로서 살 권리도 없을 정도의 악행을 하고 있게 됩니다.
다른 사람의 욕을 하는 것은 자신의 악을 숨기기 위해서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다른 사람을 비방하는 편이 자신의 입장을 지킬 수 있다고 하는 속세의 방식입니다. 다른 사람을 비판하면 주위의 사람들이 자신을 정직한 사람이라고 봐 줄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악을 숨기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덕행을 대수롭지 않게 폄하합니다. 반대로 다른 사람의 약간의 부정행위라도 직성이 풀릴 때까지 퍼뜨리는 일도 합니다.
⑥ 다른 사람의 덕행을 경시한다(Paḷāsa)
Paḷāso cittassa upakkileso.
다른 사람의 덕행을 경시하는 것은 마음의 오염원입니다.
Paḷāsa(빨라사)는 다른 사람이 아무리 좋은 일을 해도 「그런 것은 별 것 아니다」라고 무엇인가 트집을 잡는 것입니다. 이것도 마음의 오염원입니다.
다른 사람의 좋은 행위를 경시하고 트집 잡거나, 훌륭한 사람을 바보 취급하거나 해서는 자신이 성장할 것이 없습니다. 다른 사람의 덕행을 경시하는 것은 다른 사람의 결점을 찾는 나쁜 성격(makkha)보다 좀 더 위험합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으로부터 배우고 성장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으로부터 배우기 위해서는 그 사람의 덕행을 발견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다른 사람의 능력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것을 경시하는 것 같은 정신상태에 빠졌다면 그것은 자기 자신의 무덤을 파는 것과 같은 행위입니다. 그 사람에게 성장은 없습니다.
「인생이 잘되지 않는다. 아무도 협조해 주지 않는다. 무시되고 있다」등으로 고민을 말하는 사람이 있지만, 어쩌면 그 사람의 마음은 paḷāsa의 균에 감염되어 있을지도 모릅니다.
인생이 순조롭게 나아가면 좋겠다고 생각한다면 마음에 잠복하고 있는 paḷāsa를 퇴치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Paḷāsa에는 다른 하나의 측면이 있습니다.
그것은 훌륭한 사람과 자신을 동격으로 생각해버리는 것입니다. 「저것 정도라면 나라도 할 수 있다」라는 느낌입니다.
자기보다도 뛰어난 능력을 가진 사람을 자신과 동격이라고 착각하면 자신이 성장할 찬스를 놓쳐버립니다.
⑦ 질투(Issā)
Issā cittassa upakkileso.
질투는 마음의 오염원 입니다.
질투(Issā, 잇사)라는 것은 다른 사람의 행복이나 성공, 좋은 점을 싫어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행복은 그 사람이 아니라, 자신이 그랬으면 좋겠다고 하는 감정입니다.
질투는 동료들에게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의 대통령보다 자신이 대통령이 되는 편이 좋다고는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대통령에 대해 질투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대통령의 주위에 있는 사람들은 어쩌면 질투하고 있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질투라고 하는 것은 동료 중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동료가 아닌 사람의 일은 질투하지 않습니다. 영화에 나오는 아름다운 여배우를 보고 「예쁘다」고 생각할지 모르고, 스포츠 선수나 능력이 있는 사람을 보고 「대단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질투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올림픽에 출전한 한국 대표 선수는 다른 나라의 대표 선수에 대해 질투할지는 모릅니다. 같은 무대에서 경기하는 동료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TV를 보고 있는 우리가 선수에 대해 질투하지는 않습니다. 「같은 한국 선수가 이기면 좋겠다.」라는 그 정도에서 그칩니다. 질투까지 일어나지는 않습니다. 질투는 같은 레벨끼리의 사이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질투라는 것은 다른 사람의 능력이 자신의 것이 되면 좋겠다고 부러워하는 것입니다. 「어째서 당신에게만 있는가! 그것은 나에게 있어야 하는 것이지!」라는 질투로 인생은 불행에 빠집니다.
그럼 어떻게 하면 이 질투의 병을 치료할 수 있을까요?
상대의 행복이나 성공을 기뻐하는 것입니다. 「사두! 사두! 좋았어! 좋았어!」라고 진심으로 느끼도록 합니다. 이것으로 질투의 병은 낫습니다.
상대에게 있는 것이 자신에게는 없다고 해서 마음에 둘 것은 없습니다. 그 사람이 행복해하니까 얼마나 좋은가! 자신의 친구이고 그것은 자신에게 있어서도 자랑이 되는 것은 아닌가요?
그처럼 상대의 성공이나 행복을 진심으로 기뻐하면 자신도 행복하게 됩니다.
⑧ 인색함(Macchariya)
Macchariyaṁ cittassa upakkileso.
인색함은 마음의 오염원 입니다.
Macchariya(맛차리야)는 앞의 질투와 세트가 되는 것입니다.
질투의 경우의 대상은 친한 동료이지만, 인색함의 경우의 대상은 자기 자신입니다. 같은 악감정이지만 그것을 상대에게 향하면 질투가 되고, 자신에게 향하면 인색함이 됩니다. 자신의 행복을 다른 사람과 분담하는 것을 싫어하는 것,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이나 능력을 다른 사람과 공유하고 싶지 않다는 감정이 인색함입니다. 이른바 구두쇠인 성격입니다.
인색한 성격의 사람은 고독하고, 마음대로 생활하게 됩니다. 지식·능력·재산 등은 다른 사람에게 인정되었을 때 가치가 있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지식·능력 등은 다른 사람과 공유하는 것으로 증가하는 것입니다. 비록 지식이 있어도 세상이 그렇다고 인정하지 않는 경우는 자신의 지식은 어떤 도움도 되지 않을 것입니다. 나누는 성격은 생존하기 위해서 빠뜨릴 수 없는 조건인 것입니다.
인색함이라고 하는 것은 생존의 반대의 에너지입니다. 행복하게 살 수가 없게 됩니다. 모두에게 미움받고, 상대에게도 무시당합니다. 그래서 인생이 어두워집니다. 능력이 쇠약해집니다. 비참한 인간이 됩니다.
나누는 것의 좋은 점을 생각해 봅시다. 가수라는 직업의 사람이 모두에게 미움받고 있다면 그 직업으로 생계를 유지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먼저 모두에게 사랑받는 것을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어느 장소에서 노래 한 곡 불러주면 좋겠다는 부탁받아 그만큼의 돈을 받았다고 합시다. 그렇지만 노래 한 곡하고 나서 무대를 내려가지 않고 다른 참가자가 노래하면 상대를 격려해 주거나 한다고 합시다. 이러한 일을 하면 모두가 좋게 생각할 것이고, 그 기쁨을 보고 자기 자신도 행복이 배가될 것입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능력은 공유하는 것입니다. 물건도 재산도 공유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삶의 방법을 하는 것으로 행복을 얻을 수 있습니다.
⑨ 사기·속임·기만(Māyā)
Māyā cittassa upakkileso.
속임은 마음의 오염원 입니다.
9번째의 오염원은 다른 사람을 속여서 이익을 얻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때마다 매번 통할지도 모릅니다. 속였다고 할지 모르지만, 마음의 성장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속이는 것밖에 생각하지 않는 경우는 계속 더러워진 마음으로 살게 됩니다.
능력이 있다면 속일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사기 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속이는 사람은 절대 자신의 능력이 향상하지 않습니다.
사기를 한 번이라도 해본 사람은 그것이 자신의 능력을 성장시키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예를 들어 다른 사람의 논문이나 성적표를 자신의 이름으로 바꾸어서 대학에 제출했다고 합시다. 그것을 본 학교는 이 사람은 우수한 사람이라고 생각해 「당신은 합격입니다. 이 대학에서 연구해 주세요.」라고 했다고 합시다. 그 사람은 지금부터 자신의 능력 이상의 대학에서 연구해야 하게 됩니다.
그렇지만 그 후는 어떻게 합니까? 그 사람은 몹시 비참하고 괴로워하는 처지가 됩니다. 자신의 능력보다 높기 때문에 그 후는 사는 것이 몹시 괴로워집니다.
우리는 자신의 상태를 알려고 하지 않고, 자신을 크게 보이게 하려고 합니다.
한편 자신을 객관적으로 보고 생활하는 사람은 자신에 대한 평가를 드러내려 하지 않습니다. 그것을 할 수 없는 사람은 자신에게 적당하지 않은 것을 하려고 합니다. 그렇지만 그 능력은 없습니다. 그래서 사기나 기만하여 다른 사람을 속입니다.
이성이 있는 사람이라면 자신에게 적당한 삶의 방법을 하게 되고, 자신의 능력을 향상시키는 쪽으로도 노력합니다.
사기나 속임수를 쓰게 되면 그 사람의 능력은 향상하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은 자연스럽게 쇠퇴해서 파괴로 향하는 것입니다.
⑩ 아첨, 교활함(Sātheyya)
Sātheyya cittassa upakkileso.
아첨은 마음의 오염원입니다.
아첨과 교활함으로 인생을 성공하려고 하는 것은 정정당당히 경쟁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간사한 일만 생각하게 되며, 마음의 능력을 향상시키는 것에는 흥미가 없습니다.
현대 사회는 경쟁 사회입니다. 그러나 정정당당히 경쟁하는 사람들은 적습니다.
예를 들어 국제 무역의 경우는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 뒷거래를 하는 일이 꽤 있습니다. 페어플레이하지 않는다고 비판하지만, 비판하는 측도 같은 일을 합니다. 페어플레이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첨·교활함으로 일하고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같은 물건을 팔고 있는 가게가 길가에 줄지어 있다고 합시다.
하나의 가게에서는 아름다운 여성들을 고용하고, 또 하나의 가게에서는 아이들의 놀이터를 만들어줍니다. 물건의 좋음과 좋지 않음은 뒷전이고, 일부의 손님은 미인에게 매료되어 그 가게에 갑니다. 어린이를 동반한 부모는 아이가 놀 수 있는 가게에 갑니다. 이것을 페어플레이가 아니라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자신의 장사가 잘되게 하기 위해서 물건과 관계가 없는 것을 하고 있습니다.
실제 사회에서는 좀 더 무서운 짓도 합니다. 법률이나 도덕에 반하는 것까지 아무렇지도 않게 하고 있습니다.
공부한 것만으로는, 좋은 물건을 개발한 것만으로는, 잘되지 않는다고 누구나 알고 있습니다. 어떠한 형태로든 뒤로 거래를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러나 이것을 계속하게 되면 괴롭고 교활해집니다. 성격도 나빠집니다.
불교로부터 보면 경쟁 사회가 나쁘다고 한마디로 말할 수는 없습니다. 사회의 모두가 규칙을 지키고, 투명하게 페어플레이를 한다면 아무런 문제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정당성은 사라지고, 규칙을 지키지 않고, 투명성이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뭔가 간사한 일을 하고 있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 따라 걸어가는 사람은 인류에게 보편적으로 있는 이 오염원에 마음이 물들지 않게 조심해야 합니다. 정정당당과 「정직」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러한 사람은 마음이 맑고 깨끗하게 되어, 능력이 향상되어 갑니다.
⑪ 완고함(Thambho)
Thambho cittassa upakkileso.
완고함은 마음의 오염원입니다.
성격이 완고해서 사람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려고 하지 않는 사람은 거기서 마음의 성장이 멈춥니다. 고정되어있기에.
불교에서 완고하다는 것은 「긴 철봉을 삼키고 있는 것과 같은 것」이라고 비유하고 있습니다. 긴 철봉을 삼키고 있기에 몸이 구부러지지 않습니다. 그런 느낌으로 다른 사람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환경변화에 유연하게 대처하지 못하고, 마음이 부드럽지 않은 성격이 됩니다. 그래서 끝납니다. 마음이 성장하지 못하고 멈추어 버립니다.
인간이란 배우며 성장하는 생물입니다.
선천적인 것만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지구상의 다른 생명체와 같습니다. 그렇지만 인간은 배우는 것에 의해 성장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마음이 유연한 것, 서서히 자신을 향상시키는 것, 진화하는 것은 빠뜨릴 수 없습니다.
완고한 성격은 이 모든 것을 안 되게 합니다.
⑫ 겨루는 것, 다툼(Sārambho)
Sārambho cittassa upakkileso.
다툼은 마음의 오염원입니다.
Sārambho(사-람보-)는 다른 사람과 겨루는 성격, 싸움을 거는 성격입니다.
다른 사람이 말하는 것에 대해 싸움을 걸만한 꼬투리를 잡을 것만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것도 배울 수 없습니다. 무얼 조금 말하면 이유도 없는데 갑자기 「뭐야?」라고 시비하는 태도로 나오기 때문에 입을 다물어버립니다.
그러한 성격을 가진 사람에게 주위의 사람들은 이제 아무것도 말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의 성공도, 성장도, 행복도 망가져 버립니다.
시비 걸고 다투는 성격의 사람은 매우 어둡고, 불행에 빠집니다. 다른 사람으로부터 아무것도 배울 수 없습니다.
그리고 착실한 사람은 일부러 그 사람과 교제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지도자로부터도 버림받고 돌아보지 않게 됩니다. 겨루는 성격의 사람은 동료의 성장을 부숩니다.
이것도 인간에게 있는 보편적인 성격의 하나입니다.
우리는 화합 하는 방법, 조화를 이루는 방법, 사이좋게 지내는 방법 등을 배우지 않으면 안 됩니다. 상대가 다른 점만 찾아내서 다투려는 것이 아니라, 합의할 수 있는 것을 찾아내지 않으면 안 됩니다.
⑬ 자만(māna)
māna cittassa upakkileso.
자만은 마음의 오염원입니다.
māna(마-나)는 자신 중심적으로 측정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누구라도 있는 마음의 오염원입니다.
「자신」이나 「나」라고 하는 자아의식이 강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른바 자신만 생각하는 성격입니다. 자신만 생각하고 있으면 마음의 성장에 방해가 되어 족쇄가 됩니다.
누구라도 자신의 일은 신경 쓰고 있지만 너무 신경 쓰면 자만이라고 하는 병이 듭니다. 확실히 마음의 장해가 됩니다.
아만의 오염원이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누구든지 「자신」이라고 하는 실감이 있습니다. 이 실감이 「자아」로 변신합니다. 「자아」란 착각입니다.
이 착각의 정도가 상식을 넘으면 다양한 문제가 일어납니다. 이 māna는 언제나 탐욕(lobha, 貪)과 함께 일어납니다. 다른 사람과 자꾸 비교하게 되고 자신이 뛰어나다는 오만함이 있기에 건방져지고 허영심을 드러내게 됩니다. 자아를 강조하면 인생은 죄다 실패합니다.
⑭ 거만, 자부심(atimāna)
Atimāna cittassa upakkileso.
거만은 마음의 오염원입니다.
atimāna(아띠마-나)는 넘치도록 일어나는 교만함, 거만함입니다.
아만(māna)은 자기의 마음이나 신체를 바라봐, 이것은「나」, 이것은「나에 속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서, 자신은 다른 사람보다 뛰어나다고 우쭐대고 흥분되는 마음입니다. 이 마음은 성자나 덕이 있는 사람을 존경하지 않고, 행동이나 말을 거만하게 하는 기능이 있습니다. 이 마음은 다음의 7종류로 분류됩니다.
① 자만(māna)……집안·재능·재산 등에 관계해서, 자기보다도 뒤떨어진 사람에 대해서 자신은 그보다 뛰어나다고 생각하는 마음. 혹은 자기보다 뛰어난 것에 대해서 자신은 그와 동일하다고 생각하는 마음.
② 거만(atimāna)……집안·재능·재산 등에 관계해서, 자신과 동일한 사람에 대해서 자신은 다른 점으로써 그보다 뛰어나다고 생각하는 마음. 혹은 자기보다 뛰어난 사람에 대해서 자신은 다른 점으로써 그와 동일하다고 생각하는 마음.
③ 넘치는 거만(mānatimāna)……집안·재능·재산 등에 관계해서, 자기보다 뛰어난 사람에 대해서 자신은 같은 점으로써 그보다 뛰어나다고 생각하는 마음.
④ 아만(asmimāna)……자기의 마음이나 신체에는 「나」 혹은 「나에 속하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데 그것들이 존재한다고 생각해 그것들에 집착하는 것으로 발생하는 마음의 우쭐함.
⑤ 자존감, 증상만(abhimāna)……뛰어난 수행력이나 도를 얻지 않았는데 자신은 그것을 벌써 얻었다고 생각하는 마음.
⑥ 비하감, 비하만(ānamāna)……집안·재능·재산 등에 관계해서, 자기보다 아득하게 뛰어난 사람에 대해서 자신은 조금도 뒤떨어지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마음.
⑦ 삿된 자만(mithyāmāna)……덕이 없는데도, 자신에게는 덕이 있다고 생각하는 마음.
⑮ 나태, 현혹(mada)
Mado cittassa upakkileso.
나태는 마음의 오염원입니다.
Mada(마다)라는 것은 「나태해져서 소홀히 하는 것」입니다. 또한 본궤도에 올라 흥분하고 있는 상태, 취한 상태입니다.
술을 마셔 취한 사람이 만취 상태는 아니라도 취기가 오르면 어떻게 될까요?
좋은 기분이 되어 본궤도에 오르려고 할 것입니다.
mada라는 것은 그러한 상태입니다. 사람은 언제든 취한 상태로 있으면 타락합니다. 사고력이 저하되고 사물을 올바르게 보거나 생각하거나 할 수가 없습니다. 주위의 상황도 모르게 되어 소홀히 여겨 버립니다.
mada란 술 등에 취하는 것만이 아닙니다.
사람은 자신의 감정에 취해 있습니다. 안이비설신에 정보가 접하면 그 자극에 취해 버립니다.
그리고 자신의 사고나 개념 등에도 취해 버립니다. 그래서 객관성을 잃어 소홀히 해 버립니다.
⑯ 부주의, 나태, 게으름(pamāda)
Pamādo cittassa upakkileso.
현재를 알아차리지 않음은 마음의 오염원입니다.
pamāda(빠마-다)는 마음이 취해 있는 상태, 즉 마음이 흔들리는 상태를 말합니다.
생활 속에 pamāda가 있으면 나쁜 방향으로 이끌려 버립니다. 우리들 마음에는 방일·나태·부주의라는 특징이 원래 있습니다. 그러므로 pamāda 라는 벽을 부수고 찢는 힘이 있으면 인생은 좋은 방향으로 향합니다.
pamāda로 인해 마음이 파도를 일으키지 않게, 현재 일어난 것을 알아차려서, 마음의 게으름이라는 오염원이 일어나지 않게 해야 합니다. 고통이 증가하고 번뇌가 증가하는 삶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순간순간 알아차림을 유지하여 마음이 오염원에 물들지 않게 해야 합니다.
그래서 현재 일어난 몸과 마음의 대상을 항상 주의 깊게 알아차려야 합니다.
자신의 마음을 잘 지키고, 자신이 집착하고 있는 욕구, 견해, 형식, 나, 나의 것으로부터 빠져나오기 위해서는 지금 무엇에 주의를 기울여 알아차려야 하는지 분명하게 알아야 하고, 그러기 위해 게을러서는 안 됩니다.
「더러워진 옷감이 아름다운 색으로 물들지 않듯이, 마음에 오염원이 있을 때 마음을 성장시킬 수 없다」
옷감을 아름다운 색으로 물들이고 싶으면 원래의 옷감이 더러워짐이 없는 깨끗한 옷감이 아니면 안 됩니다.
이와 같이 마음을 성장시키려면 진심으로 오염원을 없애지 않으면 안 됩니다.
우리는 다양한 악감정을 가진 채로 일상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악감정이 서서히 강하게 되어 갑니다.
마음에 분노가 일어난다고 하는 것은 분노의 세계에 들어간 것이고, 인색함이 일어나면 인색함의 세계에 들어간 것입니다.
성냄에 발을 들여놓은 채로 일상생활을 해선 안 되는 것입니다.
성냄의 세계에 들어갔으면 즉시 분노의 세계에서 나와 일상의 생활로 돌아오는 것이 좋습니다.
맑고 깨끗한 마음을 만드는 방법은 의외로 간단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매우 중요한 것은 우선 「오염원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발견만 하면 대부분 끝났다고 생각해도 좋을 정도로 90%는 해결됩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자신을 속이고 아부하는 māyā와 sāṭheyya라는 오염원이 일어납니다. 마치 자신을 선한 인간인 것처럼 보게 됩니다.
그때「마음이 더러워지지 않게 조심하겠다.」라는 의욕을 가지는 것입니다.
"조심하겠다"라는 의욕이 있으면 마음이 청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 왜 세상 사람들은 그렇게 되지 않을까요? 그것은 부처님이 말씀하신 마음의 오염원 목록을 가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은 이 목록을 알기에 탐욕이라는 오염원이 일어나면 탐욕이라고 알고, 질투라는 오염원이 일어나면 질투라고 알아야 합니다. 이렇게 마음의 오염원을 발견하고 오염원에 물들지 않게 노력을 계속하면 오랫동안 청정함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하루 이틀, 일주일, 한 달간, 일 년, 이렇게 노력하면 마음은 청정함에 익숙해집니다.
이것이 마음을 맑고 깨끗하게 하는 방법입니다.
이렇게 「16가지 마음의 오염원의 종류」를 기억해 두고 그때마다 마음에 나타나는 오염원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확인하면 그 순간 오염원은 사라집니다.
오염원이 일어날 때마다 확인해서 지우기 때문에 마음은 맑고 깨끗한 상태로 있게 됩니다. 시간을 들여 실천하는 것은 이런 것입니다.
한 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계속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렇게 하면 마음은 맑고 깨끗함에 익숙해져 갑니다.
익숙해질 때까지 노력해야 합니다.
익숙해지면 이제는 질투는 일어나지 않고, 분노나 해치려는 마음, 인색함, 남을 속임도 일어나지 않게 됩니다.
마음은 확실히 고요하고 차분해서 밝아지게 됩니다.
이러한 마음의 오염원을 제거하기 위해 오랫동안 실천해서, 마음이 맑고 깨끗하게 되는 것에 익숙해지면, 삼보에 대해 「확신(saddha)」이 생깁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방법을 가르친 것은 부처님뿐이기 때문에 마음을 맑고 깨끗하게 하는 길은 불교 이외 세상 어디에도 없습니다.
믿음을 강요하지 않고 이성에 근거해 실천하도록 하는 법은 부처님 이외는 가르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런 방법을 실천해나가면 「부처님의 가르침은 확실하고 훌륭하다」라고 경험으로써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가르친 것들은 실천하는 편이 확실히 더욱 좋다. 이 가르침은 실수가 없다. 완전하고 올바르다」라는 신뢰나 확신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동료들에 대해서도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사람들이야말로 내가 존경해야 할 도반이 아닌가!」
「모범으로 삼고 뒤따라가야 할 선배들이다」라고 삼보에 대할 확신이 일어납니다.
불교에서는 이와 같이 스스로 실천해서 증명된 결과 일어나는 확신에 대해서「삿다(saddha, 확신, 믿음)」라고 말합니다.
일단 삼보에 대한 확신을 얻은 자라면,
어떤 갈등이나 망설임도 없이 진리를 실천해서 이해할 수가 있게 됩니다.
자신이 바로, 맑고 깨끗한 성자(ariya)의 한 무리가 되어가는 것입니다.
진리를 알면 즐거움이 생깁니다(pāmojja).
즐거움으로부터 기쁨이 생깁니다(pīti).
신체도 가벼워지고 편안해집니다. 거기로부터 마음이 통일됩니다(samādhi).
그런 사람은 사치스럽고 맛있는 음식을 먹어도 마음이 요동하지 않습니다.
유혹에 대해서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고 동서남북 상하 어느 곳을 향해서도 제한 없이 흘러넘쳐 펼쳐지는 자비희사를 실천합니다(Catu-Appamaññā).
자아·에고가 없는 마음이 된 것처럼 보이지만 아직 생존욕구가 남아있음을 발견합니다. 그래서 더욱 노력하여 해탈에 이르고자 합니다.
어떤 종교에서는 「인간의 힘으로는 죄가 사라지지 않기에 신의 허락이 필요하다」라고 말합니다. 목욕으로 죄를 맑고 깨끗하게 한다고 하는 믿음은 옛날 인도 바라문교에도 있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마음의 세탁 프로그램을 'bhikkhu sināto antarena sinānenā'ti라고 이름 붙여 두었습니다(마음의 내적관찰(목욕)을 하는 것을 목욕한 비구라고 한다는 의미입니다).
어느 바라문이 부처님도 강에 목욕하러 가십니까? 라고 묻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어리석은 자는 늘 악업을 씻기 위해 강에 뛰어들지만, 지은 악업은 맑고 깨끗하게 되지 않는다.
남에게 원한을 낳고, 악업을 지은 것이 목욕으로 없어지지는 않는다.
모든 생명에 대해 마음으로 목욕하는 연민심을 지니고, 거짓말하지 않고, 살생하지 않고, 훔치지 않고, 믿음을 가벼이 하지 않는 일에 힘쓰세요.
「지금, 여기」에서 시작한다면, 마음의 세탁에 순례나 성지가 필요하지 않다. 지금, 여기에서 시작하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맑고 깨끗한 사람에게는 매일이 마음을 맑고 깨끗하게 하는 성스러운 날입니다.
매일이 수행입니다.
의식·축례·축제 등과 관계없이, 마음의 세탁은 간단하게 시작할 수 있습니다.
마음을 세탁하는 여러 가지 방법은 많이 알려져 있습니다.
누구라도 할 수 있는 것은 도덕을 지키는 것입니다.
사고를 관리하는 일도 하나의 방법입니다. 악사고를 억지로라도 멈추고, 선사고로 옮겨놓습니다.
감정이 아니라 이성을 존중하는 일도 좋은 방법입니다.
자신과 타인의 행복을 목표로 해서 살아간다고 결정하는 것도 사람의 삶을 더러워지지 않는 방향으로 바꿉니다.
무엇이 일어나도 마음의 밝음을 유지해보는 것도 그 사람을 성장시킵니다.
육근을 잘 관리하여 마음에 욕구·분노의 오염원이 생기지 않도록 조심하는 일도 훌륭한 수행입니다.
무상관, 부정관, 고수념, 호흡관도 인식의 결함을 고치는 수행으로 실천할 수 있습니다.
자비의 실천도 우수한 방법입니다.
자신에게 자주 일어나는 불선심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서 그것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될 때까지 노력하는 일도 유효합니다.
이런 방법을 가지고 방일함 없이 열심히 사띠를 실천하면 최종적으로 마음이 맑고 깨끗하게 됩니다.
행복은 스스로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행복·성공을 간절히 바라지만 마음을 세탁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축복은 스스로 만드는 것입니다.
나날이 행복한 인생을 자신의 손으로, 자신의 힘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타인이 자신을 행복하게 해주었던 적은 없습니다.
스스로 노력하면 자신의 내면의 목욕으로 청정에 이를 수가 있습니다.
수다원은 ⑤~⑩이 제거되고, 불환과는 ②~④와 ⑯까지도 제거되며, 아라한은 남아있던 ①과 ⑪~⑮ 모두가 완전히 제거됩니다.
'아짠 빤냐와로 스님 법문교재 > 법문 교재(프린트물)'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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