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비판만 하는 사람의 마음은 악한 사고로 가득하다. (20170324)
부처님의 시대 사위성에서는 아나타삔디까 거사나 위사카 부인 등이 매일같이 5백 명
의 대아라한들과 다른 비구들에게 탁발을 올리고 있었습니다.
탁발보시를 받는 사람들 속에 띳사라는 스님이 있었습니다. 이 띳사는 매일의 보시에 무엇이든 트집을 잡아서 불평하는 것이 버릇이었습니다. 받은 음식이 만약 식었으면 「차가운 것을 주면 어떻게 하느냐?」라고, 따뜻한 것을 받았으면 「뜨거운 것을 주면 어떻게 하느냐?」라고 불평합니다. 받은 것이 적다면 「에게! 이것뿐이냐?」라고, 많이 받으면 「이 사람들이 보관해두지 못하니까 비구들에게 수북하게 주어서 많은 음식을 결국 버려야 하게 생겼군!」이라고 트집 잡았습니다. 마음을 담아 보시를 하는 사람들을 헐뜯는 것은 좋지 않은 것입니다. 가령 얼마 안 되는 것이라도 보시하는 사람은 마음을 다해서 하는 것입니다. 출가자는 그것을 겸손하게 받아서, 무집착의 마음으로 먹고, 수행에 힘쓰지 않으면 안 됩니다.
띳사의 만행은 이것에 그치지 않습니다. 그는 「나의 가족은 큰 부자로 항상 사방 상가를 위해서 문을 열어두어 마치 휴식도 취하면서 식사를 할 수 있는 고급 식당과 같다」라고 자신의 혈통을 자랑하며 말이 허용하는 미사여구를 동원하여 가족 자랑을 했습니다. 그런 띳사의 성격에 몹시 어려움을 겪은 다른 비구들은 그의 자랑거리의 진위를 확인하기 위해서 「당신의 태생은 무엇이고 집은 어딘가?」라고 물어, 그 장소에 몇 명의 젊은 승려들을 파견했습니다. 그들은 그 마을에서 신자들로부터 정중히 접대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대부호의 아들 띳사에 대해 물어보니 아무도 모를 뿐만 아니라, 「이 마을에서 출가한 대부호가의 아들은 없습니다. 가출한 문지기의 아들이 출가했다는 소문은 있지만……」이라는 말만 들었습니다. 실제 그의 친인척 자랑은 단순한 허풍이었습니다. 대부호는커녕 띳사는 그 마을의 문지기의 아들로 지방을 돌며 건축 일을 하는 목수들과 같이 사위성에 왔다가 「출가」했다는 것이 진정한 이야기였던 것입니다.
「띳사는 허풍을 치고 있었다!」라는 이야기는 사위성 비구들의 사이에 널리 퍼져 버렸습니다. 그가 정말로 부자 아들이었다면 「성격이 나쁜, 제멋대로의 도련님이었구나!」라고 생각하면 어느 정도 참을 수 있었을 것이지만,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고 생각하니 이 젊은 출가자를 꾸짖고 질책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비구들은 생각했습니다. 이 이야기가 부처님께 보고되었습니다.
인도 문화에서는 「물병 Katāha」은 「허풍을 분다」라는 의미로도 쓰입니다. 물병을 타악기로서도 사용하므로 「하늘의 물병은 소리가 크다」라는 속담도 있습니다. 그 말은 「내용이 없는 사람의 소리는 크다」, 또는 「소리가 큰 사람의 내용은 텅 비었다」라는 뜻입니다. 말의 위험 가운데 미사여구에 인간은 약하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허풍을 부는 성격의 사람도 가끔 있습니다. 말이 능숙하면 모두 속습니다. 자신에게 자랑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하는 컴플렉스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혹은 타인의 성공을 보면서 그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기분에 빠져 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어쨌든 근거가 없는 과장된 말로 얼버무립니다.
거짓말로 치장한 것이 굳어져서 자신의 사회적인 위치를 쌓아 올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한 사람들은 허풍을 불지 않으면 초조합니다. 이 일화에서 밝혀지듯이, 「수치를 모르면 사실을 왜곡한다.」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띳사를 둘러싼 사건으로부터 출가 비구들의 사이에 일어날 수 있는 다른 문제를 눈치채셨습니다. 그것은 「세간은 출가 사회 속의 상황을 모른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불교의 사회에서는 재가 신자가 출가자를 존경하고 보시하며 돕습니다. 누구에게 보시를 할 것인지, 어떤 정도로 보시를 할 것인지는 재가자 각각의 자유입니다. 여기서 자주 일어나는 현상은 재가자가 자신의 마음에 든 출가자에게 보시를 하거나 존경하거나 하는 것입니다. 그 출가자가 상가 안에서 인정받는 입장에 있는지에 관계없이 자신의 친척, 동향의 학연이나 지역에 따라 보시를 하는 경우를 자주 볼 수 있습니다. 수행력이나 불교 공부의 내용과 관계없이 표면적으로 아름답게 보이는 출가자를 존경할지도 모릅니다. 아니면 연상의 장로들에게 보시를 하고 싶어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누가 연상의 장로인지, 누가 정신적으로 우수한지, 누가 법을 잘 알고 있는지는 재가자들이 잘 모른다는 것입니다. 불교의 사회에서는 상가의 구성원인 출가자에 대해 재가 신자가 잘 모르는 상태로 되어 있습니다. 출가자에게는 자신을 선전하는 것, 자신을 어떠한 수단으로도 어필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습니다. 재가자가 상가 집단을 평등하게 존경하는 것이 좋다고 하는 것이 기본입니다. 그런 마음으로 하는 보시가 「상가에 대한 보시」가 되므로, 공덕은 무량하게 됩니다. 개인에게 드리는 보시의 공덕과 무수한 상가에 평등하게 드리는 보시의 공덕은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차이가 큽니다. 그래서 재가자에게는 변변찮은 것이라도 보시를 하면 무량의 공덕을 얻을 찬스가 항상 있습니다.
출가자는 침묵한 채로 탁발을 나옵니다. 보시하라고 말하거나 보시받기 위해 경을 독송하거나 자신이 탁발 나온다고 미리 알려서도 안 됩니다. 그러한 이유로 좋은 것을 받을지, 검소한 것을 받을지는 그 비구의 과거의 업에 따르게 됩니다. 그러므로 신자들로부터 항상 거친 것만 탁발하는 결과가 되는 일도 있을 수 있습니다. 훌륭한 장로인데 재가자로부터 그다지 존경받지 못하는 분들도 나타납니다. 현실적으로는 불공평하다고 생각되는 것이 많이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있는 곳에는 넘치도록 있지만, 없는 곳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것은 일반 사회의 상황이기도 합니다. 이 차이는 과거의 업에 의하기 때문에 이제 와서 어떻게 할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일부러 괴로워하고 있는 사람, 궁핍한 사람을 돕는 것이 공덕이 됩니다.
어느 때, 사리뿟따 존자로부터 지도를 받고 있던 비구가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출가한 그 날부터 어떤 보시도 받을 수 없었습니다. 재가자들이 많이 모여 비구들 모두에게 보시를 할 때조차도 이 비구가 그곳에 가면 신자들에게는 그 비구의 발우가 가득 차 있는 것처럼 보였다고 합니다. 그 정도로 과거의 업에 의한 괴로움은 심했습니다. 그 비구는 탁발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당연히 쓰러져 다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사리뿟따 존자는 이 비구가 아라한이 될 자격이 있는 것을 알고 스스로 탁발에 나왔습니다. 존자 대덕으로서 탁발을 하여 이 비구가 있는 곳으로 가서 발우를 내밀며 「부디 손을 뻗어 먹으세요.」라고 부탁했습니다. 겨우 만족할만한 양을 먹을 수가 있던 그 비구는 건강을 되찾아 금새 명상에 들어가 깨달음을 이루었습니다. 여기서 이해해주었으면 하는 것은 출가 사회에서도 업의 기능은 아무런 장애물 없이 기능하고 있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젊은 띳사 스님의 소행을 알고 부처님이 신경 쓴 것은 이 「업의 기능」인 것입니다. 보시를 많이 받는 승려에 대해서 가난한 승려는 질투할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보시물을 많이 받을 수 없는 자신에 대해서 싫은 기분이 일어날 가능성도 있습니다. 재가자들에 대해서 비판적으로 되어 버리는 일도 있을 수 있습니다. 재가자가 자신의 마음에 든 승려에게 맛있는 음식을 대접해 주었을 때 근처의 비구가 그것을 트집 잡아 버릴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재가자들의 공덕에도 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그 비판적인 비구가 불선한 망상으로 평생 고민하는 경우가 될 수도 있습니다. 질투, 성냄, 미움의 망상은 악업입니다. 출가해서 악업만 쌓게 되기에 깨달을 가망은 완전하게 없어져버립니다. 깨닫기 위해서 출가했으면서 출가의 의미까지 없어져 버립니다. 부처님은 이것을 위험시하셨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설법하셨습니다.
◇ 세상의 거센 파도에도 요동하지 않는 평온한 마음을 가져라 ◇
사람들은 자신의 믿음에 근거해서 보시를 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신뢰하고 있는, 존경하고 있는 사람에게 보시를 합니다. (누구에게, 어떻게, 어느 정도로 보시하는가 하는 것은 보시하는 자의 자유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보시하는 음식, 음료 등의 일로 낙담하거나 싫은 기분이 되면 그 사람에게는 낮이나 밤이나 마음의 평온함은 없습니다. 낮이든 밤이든 마음에 침착성이 없이 산란한 사람에게는 마음의 통일(사마디)은 있을 수 없습니다. (주…사마디를 이룰 수 없어도 위빳사나는 할 수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그것은 다릅니다. 마음에 침착성이 없어지면 수행 그 자체를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여기서 말하는 사마디는 수행 그 자체인 것입니다.)
사람들의 보시에 대해서 어떠한 악한 감정도 가지는 일 없이, 좋은 것과 나쁜 것이라는 구별도 하지 않고, 집착함 없이, 무상, 부정 등을 관찰하면서 받는 것입니다. 타인이 받는 보시에 대해서도 완전하게 무관심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런 비구는 낮이든, 밤이든 언제라도 마음의 통일이 있습니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마음의 평온함을 소중히 하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하는 것이 부처님의 훈계입니다.
사람들은 세상일을 신경 씁니다. 불행, 불공평한 일, 불합리한 일로 인해 괴로워합니다. 사회에서 일어나는 범죄, 부정행위 등의 일로 곤혹스러워 하거나 비판하기도 합니다. 만약 누군가가 그러한 사회 문제에 무관심하다면 그 사람까지 비판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은 세상에서 끊어지지 않습니다. 과거도 현재도 상황은 같습니다. 장래는 좋아진다고 할 전망도 없습니다.
현실적으로 개혁할 수 있는 문제라면 부정을 바로잡기 위해서 도전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자신의 정신적인 고민, 성냄, 우울함은 어떻게 할까요? 결국 그것은 자신의 악업이 됩니다. 그러므로 무슨 일이 있어도 침착하고 온화한 마음을 유지하는 것이 불교적입니다. 그것이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올바른 삶입니다.
세상의 불행·불공평에 대해서 혼란스러워 하는 사람에게는 해결책도 보이지 않습니다. 내어놓는 해법도 빗나가고 불난 집에 부채질하게 됩니다. 비판하는 것, 비난하는 것만으로는 아무것도 되지 않습니다. 비판하는 일도, 반성하는 일도 필요한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이성적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답과 해결 방법, 어떤 제안」을 가지고 있는지, 비판은 해결책으로 이끄는지 하는 것이 중요한 포인트입니다. 이것이 이성이라는 것입니다. 해답이 있어도, 실행할 수 없는 해답이라면 단순한 관념입니다. 그것도 가치 없는 사고라고 버리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불행·불공평을 봐도 마음을 어지럽혀서는 안 됩니다. 세상의 불행·불공평·불합리한 사건 등은 자기 자신의 훈계로 해야 하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평온함은 세상의 거센 파도로 망가지는 것이 아닙니다.
● 이번 포인트
• 허풍쟁이는 흐트러진 성격의 결과입니다.
• 허풍쟁이는 「나는 신뢰할 수 없다」라고 스스로 말하는 꼴입니다.
• 업의 기능이 불합리하다고 느껴도 업의 결과로는 도망칠 수 없습니다.
• 세상의 거센 파도로 마음을 어지럽히지 않아야 합니다.
• 출가자는 결코 목적으로부터 이탈해서는 안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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