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법문교재/테라와다 불교의범과 신행생활

수다원에 이르는 길, 삼보에 대한 확신이 들려면_빤냐와로 스님법문_담마스쿨_130531-1

담마마-마까 2024. 12. 14. 19:14

https://youtu.be/9-ismHyMsvI?si=SBq5DX_3sZdxGkvb

 

* 수다원에 이르는 길, 삼보에 대한 확신이 들려면_빤냐와로 스님법문_담마스쿨_130531-1

 

자, 이제 5월달이 다 갑니다. 2년 과정에 1학기가 이제 2달 남았죠? 6월달 7월달 두 달 남았습니다. 가끔씩 다른 스님들이 내보고 물어보는 게 있어요. “스님, 매번 어디 다닐 때 이 상가띠를 왜 가지고 다니십니까?” 이렇게 물어봅니다. 제가 오늘 서울 올라왔다가 오늘 내려가기 때문에 오늘 밤을 지내는 게 아니면 상가띠는 안 가져와도 됩니다. 하루를 이상 떨어져 있을 때는 상가띠를 항상 가지고 다녀야 되는데, 오늘 내려갈 게 거의 100프로 중에 거의 100프로잖아요. 기차표를 끊어 왔으니까.

 

근데 만약에 무슨 일이 생기면 못 갈 수가 있습니다. 그걸 이제 대비하는 것이고. 그것보다도 더 중요한 것이 뭐냐 하면 사람은 언제 죽을지 모릅니다. 언제 죽을지 알아요? (수행자: 모릅니다.) 스님이라고 예외가 될 수가 없습니다. 죽는다는 사실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그것도 스님이라고 예외가 될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언제 죽을지 모르는 것들 때문에 대비를 하는 겁니다. 내가 만약 지금 죽으면 '스님이 삼의를 갖추지도 못하고 죽었다' 그러면 뭐라 하겠어요.

 

태국의 유명한 스님이 한 분 계셨는데 대부분 스님들은 자기 죽을 날짜를 대부분 압니다. 우리 스승님도 그랬고 대부분 스님들이 그러는데, 이 스님은 굉장히 유명했는데 자기 죽을 날짜를 몰랐어요. 그래서 병원으로 가다가 그때서야 인제 정신이 반짝 들었던 거라. ‘아 내가 죽을 시간이 얼마 안 남았구나’ 싶어가지고 병원으로 가다가 병원에 안 가고 “안 되겠다. 차를 다시 돌려라. 절로 가자.” 해가지고 절로 오다가 절에 다 도착하기 전에 돌아가신 거죠. 그렇게 존경하고 다 따르던 사람들이 그 죽음의 순간을 딱 보고 사람들은 “아니다. 이때까지 우리가 잘못 판단했다” 하면서 한순간에 명성이 와르르르 무너지는 걸 본 적이 있어요.

 

사실은 스님들도 죽을 때 병원에서 죽어야 되는 게 아니고 죽을 날짜를 얘기하고, 그리고 죽을 장소도 편안하고, 또 사람들이 운집하기도 좋고, 또 자기가 살고 있던 절 이런 데서 죽어야 사실은 좋습니다.

근데 이 스님은 그렇게 못 했기 때문에 결국은 그 선원이 거의 풍비박산이 되다시피 됐거든. 여러분이라고 지금 이 법회를 마치고 나가다가 죽지 말라는 법이 있어요? (수행자: 없습니다.)

그렇게 만약에 죽는다고 치자. 여러분들이 죽고 나서 어디로 태어납니까? (수행자: 모릅니다.) 모릅니까? 그러면 죽을 때 어떤 마음으로 죽을까? 그것도 (수행자: ...) 그런 바램인 거지, 바램으로 얘기는 하지 말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항상 살 것처럼 생활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일도 기다리는 거고, 그걸 대비하기 위해서 무언가를 하고, 그리고 항상 살 것처럼 생각하기 때문에 뭔가를 재산도 모으고 뭐도 하고 계획도 세우고 이렇게들 합니다.

근데 불교도들은 물론 그렇게 살고 있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항상 그런 마음을 가집니다. ‘나도 언젠가는 죽는다.’ 그 죽음을 피할 방법은 없다는 사실을 압니다.

 

스님도 그 사실을 알기 때문에 이 상가띠를 가져다니고 지금이라도 내가 꼴라당 죽어도 별로 뭐 밑지는 장사 아니다 하고 생각이 들 정도가 돼야 된다는 거라. 출가한 스님으로서 위의를 갖추는 것뿐 아니라 내가 지금 죽어도 적어도 4가지 악처에 떨어지지 않는다는 확신은 들어야 될 거 아니라. 불교를 믿고 있으면서.

여러분이 지옥으로 태어날지 아니면 짐승으로 태어날지 어떻게 알아? 그런데 적어도 그 확신 정도는 들어야만이 공부를 할 보람이 있을 거 아니라. 아무리 내가 천상에 태어나고 싶다고 바라고 천상에 태어나기 위해서 공덕들을 많이 쌓는다 해가지고 천상에 태어나집니까? 그건 아니잖아. 물론 그럴 가능성은 커지겠지만, 확정적으로 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라.

 

그러면 여러분들이 재가 불교도로서 스님들하고는 살아가는 방법이 틀립니다. 그렇지만은 살아가야 될 방법은 분명히 틀림없이 있을 거란 말이라. 그래서 이때까지 쭉 그런 부분을 배워왔죠.

삼보에 대해서 예배드리고, 존경하는 마음을 가지고, 그리고 삼귀의 삼창을 하고 삼귀의를 하고 그러니까 귀의 대상으로 하고, 그리고 항상 5계를 지키고, 또 특별한 날에는 팔계도 지키고, 이런 것까지는 지금 배워왔단 말이라. 그렇죠? 지금 스님이 담당하고 있는 이 과목에서.

적어도 이것까지만 해도 참 좋은데 그걸 그대로만 지킬 수가 있으면 여러분들은 틀림없이 다음 세상에서는 사악처에 떨어지질 않습니다. 또한 틀림없이 여러분들은 지금 현재 아라한이 되어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1차적으로 목표하는 것은 아, 아라한이 아니고 수다원입니다. 제가 말을 잘못했습니다. 너무 쉽다 했어? (수행자: 이상하다 생각했어요.) 수다원입니다.

 

1차적으로 목표로 해야 되는 것은 수다원을 목표로 해야 됩니다.

적어도 수다원이 되면 적어도 그래도 그 흐름에서 바뀌지는 않게 됩니다. 떨어지진 않게 됩니다. 수다원이 되기 전엔 아무리 내가 삼매를 경험했고 어쩌고 하더라도 그보다 더 낮은 마음의 상태로 떨어져 버리게 됩니다. 근데 수다원의 상태에만 이르게 되더라도 삼매를 경험하고 안 했고를 떠나 가지고 일단 그 밑으로 떨어지는 일은 없습니다.

계를 지키는 것도 마찬가지고, 그다음에 여러 가지 확신이 안 드는 부분이 다시 또 의심이 든다든지 이런 부분도 없어지는 거고, 그래서 그 밑으로 떨어지는 일은 적어도 없어진다는 거라. 생을 몇 번을 돌아가지고 완전히 깨달음을 이루고 안 이루고 하는 건 그거는 차후의 문제고. 그러면 재가 불교도 들어서 1차적으로 해야 되는 목표를 잡아야 되는 것은 틀림없이 수다원일 겁니다.


수다원에 이르는 길은 몇 가지가 있을까? 몇 가지가 있을 것 같아요?

우리 테라와다 홈페이지에 그걸 내가 한번 언제 올린 적이 있나? 없어요?

수행을 열심히 해서 도달하는 길이 있고, 또 법을 열심히 잘 들어서 거기에 대해서 이해하고 확신을 가지는 것으로 인해서 도달하는 길이 있고, 그렇게 됩니다. 수행하기 싫은 사람은 그 길을 가도 됩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스님들이 수행을 가르치는 스승들이, 수행을 가르치기 전에 맨 먼저 하는 것이 뭐냐면 삼귀의와 오계부터 먼저 가르쳐 줍니다. 삼귀의 오계가 기본이 돼 있지 않을 것 같으면 그다음 단계로 올라간다고 하더라도 떨어지기가 쉽고, 또 그다음 단계에서 다음 단계로 넘어갈 때 굉장히 힘이 들기 때문에 그럽니다.

그래서 그걸 먼저 가르치고, 그다음에 마음을 넓게 펼치는 마음들 그런 것들을 가르치고, 그러고 나서 본격적인 사마타 수행이면 사마타 수행, 위빳사나 수행이면 위빳사나수행 이런 식으로 가르치는 것이 기본적인 그 패턴들입니다. 바로 수행하러 왔다 해가지고 뭐 위빳사나 수행 테크닉부터 가르쳐주고 이래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재가자들에게는 기본적으로 반드시 따르고 숙지해야 될 부분은 틀림없이 있게끔 된다는 겁니다.

마하나마하고 고다하고 두 사람이 토론이 붙었어요.

고다는 수다원에 이르려고 할 것 같으면 붓다·담마·상가에 대한 믿음만 있으면 된다라고 얘기를 하고,

마하나마는 붓다·담마·상가에 대한 믿음뿐 아니라 계를 지키는 것 오계를 지키는 것, 이것까지 있어야 된다.” 그래서 4가지를 얘기를 합니다.

 

그런데 두 사람 다 수다원에 이르렀기 때문에 토론해가지고는 결론 날 수 있는 부분이 아닙니다. 그래서 부처님한테 가서 여쭤보자 해서 부처님한테 왔을 때 마하나마가 부처님한테 그런 얘기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모든 사람들이 이것은 A다 하고 얘기를 하는데 오직 부처님 혼자 이것은 B다고 얘기를 한다 그럴 것 같으면 나는 부처님 말을 믿습니다. 모든 사람뿐 아니라 출가한 스님들까지도 전부 다 A다 하고 얘기하는데 부처님은 B다 하더라도 나는 B라고 믿습니다.” 이렇게 얘길 합니다.

물론 경전에는 그보다 조금 깁니다. 그렇게 얘기를 하니까 부처님이 그 말씀을 가만히 듣고 있다가 고다한테 얘길 합니다. “고다 니는 내한테 뭐 할 얘기 없냐?” 하고 물어보니까 고다가 “부처님, 마하나마가 한 말이 맞습니다. 훌륭합니다.” 훌륭하다고 이렇게 얘기를 하는거라. 경은 거기서 끝나버립니다.

 

3가지가 수다원에 이르는 조건이냐, 4가지가 수다원에 이르는 조건이냐?

단지 고다는 3가지를 갖다가 확실하게 할 것 같으면 자연스럽게 계를 지키는 것은 따르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이걸 얘기를 안 하는 것뿐인 것이고.

그런데 마하나마는 이것은 반드시 필수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그렇지 않을 것 같으면 삼보에 대한 믿음만을 가지고 계를 지키지 않을 것 같으면 이것은 점점 더 더디게 간다. 물론 삼보에 대한 확신이 들었을 경우에는 자연스럽게 네 번째 계를 지키는 것은 몸과 말과 마음으로 하는 행위이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청정하게 되기 때문에 지켜지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라도. 처음에 닦아 나갈 때는 삼보에 대한 믿음도 닦아나가야 되고, 계를 지켜나가고 하는 것도 닦아나가야 될 부분이기 때문에 4가지를 얘기하는 거라.

 

경전에는 거기서 그냥 끝났지만은, 사실은 4가지가 수다원에 이르기 위한 조건으로써 정립이 되게 됩니다.

왜 그러냐면 마나마가 부처님의 말씀에 대해서 어떤 것이든 부처님이 하는 것에 대해서 믿음을 가진다는 얘기를 했을 때, 그것에 나중에 고다가 동의를 했기 때문에, 부처님은 그것을 침묵으로써 지내게 됩니다.

 

또 다른 경전 같은 경우에는 또 다른 방법으로 얘기를 합니다. 쉽게 말하면 재가자가 목표로 하고 있는 수다원에 이르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닦아나가야 되는 것은 이 4가지는 기본이라는 뜻이라. 부처님에 대한 믿음, 담마에 대한 믿음, 상가에 대한 믿음, 계를 청정하게 굳건하게 지키는 것, 이것은 기본적으로 어쨌든 해야 된다는 얘기라는 거라.

여러분들은 과연 그렇게 하고들 있는가? 얼마만큼 닦았어? 그러니까 부처님에 대한 믿음이 확실해질 때까지 어제보다는 오늘이 조금 더 조금 더 강해졌어요? 조금 더 증장됐어요? 아니면 1달 뒤가 되면 조금 더 강해질 것 같아요? 그럴 거 같애요? 얼마나 하면 될까? 한 10년 하면 될까? 확신이 들어서 더 이상 변함이 없게 되는 상태가 될 때, 한 10년 하면 될 것 같지? 그렇죠?
(수행자: 시간하곤 관계없을 것 같습니다.) 당연히 시간하곤 관계없는데, 평균적으로 보편적으로 봤을 때, 한참 닦아야 될 것 같죠?

 

오늘 점심을 누가 대접을 한다고 해가지고 부산에서 일부러 일찍 왔어요. 일찍 밥 먹으러 갔는데 식당에 가서 밥을 먹는데, 그 사람들은 신심이 나가지고 물론 그렇게 하는데, 스님들 한 둘이 요쪽으로 앉고 자기들이 이 앞에 앉아가지고 같이 밥을 먹어요. 근데 사실은 그건 스님들이 계율에 어긋나거든. 일반 재가자들하고 한 상에서 밥을 먹는 건.

그렇다고 거기서 계율을 들먹일 수도 없는 거고,

 

그래서 “그릇 하나만 갖다주라 하시오.” 이렇게 해가지고 인제 그릇을 하나 주라 했어. 그래서 밥을 먹기 전에 있는 반찬을 하나 하나 요렇게 덜어갖고 요만큼 인제 종지에다 담아갖고 내 앞에다 딱 놔놨어. 그래가지고 인제 그걸 가지고 나는 밥을 먹은 거라.

그러니까 처음에는 사람들이 몰랐대. 그거 그냥 젓가락으로 여기 걸 같이 먹으면 될 건데 어찌 매일 요렇게 담아갖고 이렇게 (하느냐고), 먹고 이게 다 먹어도 작게 담아가지고 이게 다 먹어도 밥이 남았어. 그러니까 “스님, 반찬 드세요.” 이러는 거라.

그래서 “어 괜찮아 나는 좀 싱겁게 먹으니까 그냥 괜찮아.”하면서 거기다가 물을 조금 말아 갖고 이렇게 마셨거든.

나중에 와서 차를 먹으면서 인제 그런 얘기를 했어요. 그러니까 그때서야 “아, 스님 그걸 몰랐습니다.” 이렇게 얘기해요. 테라와다를 한다는 사람들도 그렇다는 거라. 자기들은 스님에 대한 공경하는 마음을 가지고 하는데도, 그걸 잘 모르는 거라.

 

예를 들어볼까요? 삼보의 마지막은 상가에 대해서 확신을 가지는 겁니다.

가장 유명한 분이 사리불 존자죠. 사리불 존자는 삼보의 대상일까? 아닐까?

어떤 게 맞아요? 부처님도 라훌라가 출가를 할 때 부처님이 직접 지도를 하지 않고 사리불 존자에게 보내가지고 지도를 받게끔 합니다. 그러니까 스승으로서 그리고 완전한 깨달음에 이른 아라한이기 때문에 스승으로서 이렇게 가르치는데 또 자상하고 하니까 거기다 보내가지고 합니다. 그래서 라훌라 같은 경우에는 사리뿟따 존자를 스승으로 해가지고 출가하게 되죠. 스승은 틀림없죠? 여러분들에게도 스승은 틀림없습니다.

근데 사리불 존자가 삼보의 대상일까? 아닐까? 아니라? 기라? 긴가 민가 그래요?

 

스승으로서 인간으로서의 대상이 될 때는 스승은 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삼보의 대상이 될 것 같으면 사리불 존자는 아라한과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니까 성인의 경지에 도달한 거죠.

성인의 경지에 도달한 자로서 아라한으로 봤을 때는 삼보의 대상이 됩니다.

근데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스승으로서 존경을 해야 됩니다.

 

여러분들에게도 수행을 각각 배우고 그다음에 담마를 배우고 하는 스승들이 있을 겁니다. 테라와다 스님이든 아니든 간에. 그런데 그분들은 스승으로서 존경하고 따르고 합니다.

그런데 그분이 삼보의 대상으로서의 존경하고 확신을 가지게 될려고 할 것 같으면 그 스승은 틀림없이 전제조건을 가져야 됩니다.

수다원 이상의 경지에 도달해야만이 삼보의 대상이 됩니다.

 

나를 가르치는 스승이 그러한 상태에 있다고 판단될 경우에는 삼보의 대상으로서 존경을 또 해야 되는 거라. 스승으로서도 해야 되겠지만.

근데 이걸 자꾸 잊어버리는 거라. 삼보의 대상을 그냥 스승과 동일하게 놔 버리면, 나를 가르치는 스승이 그 스님이 뭐 조금만 잘못해도 삼보의 대상에 대한 걸 갖다가, 깡그리 그냥 실망을 해버리게 되는 거라. 거기다가 불교 자체를 갖다가 막 비난하고 부정하는 형태를 취하고. 참 잘못하고 있는 거죠 그런 것들은.

 

자, 붓다·담마·상가.

부처님은 완전하게 깨달음을 이루신 분이고, 그 부처님이 여러분이 나아갈 방향을 인도해주는 인도자로서의 역할을 분명하게 하고 있는가?

나도 저분과 같이 살아가야 된다고 생각했을 때라야 삼보의 대상이 될 거 아니라. 그냥 부처님을 존경하는 대상으로서만 보고 있다고 할 것 같으면, 그분이 가신 길을 따라가지 않을 것 같으면은 그건 삼보의 대상이 아니고, 그냥 스승으로서의 대상이 될 뿐이라. 붓다에 대해서 확신이 들고 믿음을 가지려고 왔다면 그렇게 돼야 된다는 거라.

 

그러면 여러분들은 부처님이 가신 길을 다는 처음부터는 못 따라가도, 오늘은 요만큼 따라가고 내일은 조금 더 따라가고 그다음에 조금 더 따라가고 점차적으로 늘어나서 그것들이 딱 확립이 돼야 될 거 아니라. ‘아, 이게 진짜 맞는 길이구나. 진짜 내가 가야 될 길이구나.’

부처님은 욕심을 안 가지고 중생들을 위해서 여러 가지 일들을 했다. 자애의 마음을 가지고 법도 설하고 했다. 그럼 나도 그렇게 따라가야 될 거 아니라. 적어도 그렇게 따라가야 되는데 처음부터는 안 되니까, 그래도 성내는 걸 조금 덜 낼려고 하고, 화내는 것도 조금 더 덜 내려고 하고, 욕심부리지 않고 자꾸 좀 나누려고 하고, 이런 것들로써 자꾸 보충해나가야 될 거 아니라.

담마도 마찬가지고, 상가도 마찬가지라는 거라.

 

붓다 담마 상가에 대해서 확신이 들려고 할 것 같으면,

그래서 얼마나 힘들까? 스님이 봤을 때는 적어도 10년을 잡아야 됩니다. 10년이 되지 않고 그게 출가한 스님이든 재가자이든 “나는 불교에 대해서 내가 갈 길이라고 확신한다, 아니면 나는 불교에 대해서 안다.” 전부 거짓말이라.

여러분은 테라와다 불교를 배우고 안 지 10년이 됐습니까? (수행자: 아직 안됐습니다.) 안됐습니까? 그럼 아직 다들 수다원은 못 됐겠네. 물론 기간을 기다리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점진적으로 이거는 쌓여져가는 부분이라는 생각을 가져야 됩니다. 그래서 불교는 불교 8가지 특색 중에 맨 첫 번째가 그렇습니다. 점진적으로 나아가는 것.

여러분들은 지금부터라도 삼보에 대한 확신이 들려고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그 길을 따라가 보고 그 가르침대로 행해 보니까 ‘아 정말로 좋다. 그래서 내가 기쁘고 행복하다’ 그런 마음이 자꾸 들도록 만들어야 됩니다. 쉽게 말하면 종교적으로 믿음을 가지게 되는 때가 됩니다.

 

근데 확신이 들려고 할 것 같으면 어떻게 돼요? 딱 그것과 일치가 돼야 돼. 일치가 돼서 변함이 없는 상태, 어떤 거로도 나의 마음을 그보다 더 행복하게 만들 수 있는 방법이 없다. 그보다도 더 충만되게 만들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걸 분명하게 알고 흔들림이 없게 되고.

얘기를 스님들하고도 하다 보면 법에 대해서 이렇게 조금 하다가도 금방 옆길로 샙니다. 옆길로 새 갖고 뭐, 그냥 쉽게 말하면 이번 초파일 때 사람이 많이 왔니, 등값이 얼마 들어왔니, 누구는 보니까 차를 뭘 뺐니, 세속적인 얘기 하고 있는 거라. 그런데 조금 전에 법에 대해서 한참 토론하고 얘기할 때는 막 그냥 얼굴이 시퍼럭 쭈구럭 했다가도 저 얘기할 것 같으면 얼굴이 이만큼 펴져 있는 거라. 뭐가 잘못돼도 한참 잘못됐죠.

스님이 행복을 누리게 되고 또 만족감을 느끼게 되는 것들로부터 그것을 얻지 못하고 다른 것으로 인해서 행복감을 누리고 있으면 그게 뭔 의미라? 이미 출가한 스님이 가야 될 길로부터 벗어나게 돼있는 거라.

 

재가자는 잘 안 그럴 것 같아요? 재가자들도 꼭 마찬가지입니다. 재가자가 해야 될 일을 해야 되는데 재가자가 해야 될 일을 하지 않고 출가자의 할 일을 할려고 그럽니다.

남에게 내가 법을 갖다가 드러내려고 하고, 내가 조금 더 대접받으려고 하고, 그래서 남들이 나를 내 자리보다도 훨씬 높게끔 봐주기 바라고, ‘아, 저 사람은 재가자인데 아라한이다.’ 이런 소리를 듣고 싶어 하고, 한참 바뀌어져 있는 거라. 아만심만 점점 높아지게 되는 거라. 재가자가 아만심이 높아져 가지고 어디다 쓸 거라? 버려버려야 될 것들인데.

 

재가자는 재가자의 일을 해야 되고 출가자는 출가자의 일을 해야 됩니다. 그렇지만 재가자가 깨달음에 이르지 못하는 게 아니고, 출가자가 깨달음에 이르지 못하는 게 아닙니다. 자기 일을 한다고 해가지고. 자기 일로서도 충분히 그걸 할 수 있는데, 엉뚱한 거 하면서 시간을 다 보내버리는 거라.

여러분들은 그러지 말아야 된다는 거라. 여러분들은 삼보에 확신이 드는 것이 우선이다 할 것 같으면 그걸 하라는 거라. 왜 딴 걸 할려고 그러냐는 거라.

 

그래서 일반 재가자가 가장 먼저 해야 되는 것이 그러한 대상에 대해서,

그러한 대상의 은혜와 공덕에 대해서 분명하게 가슴속에 자꾸 품을려고 노력을 해야 됩니다.

맨 처음에 적어놨죠.

 

붓다라는 부처님의 덕과 은혜를 잊지 말라.

담마라는 부처님의 가르침과 가르침의 덕과 은혜를 잊지 말아라.

상가라는 부처님의 가르침의 덕과 은혜를 잊지 말아라.

네 번째 부모님,

다섯 번째 스승,

 

부모는 왜 그럴까? 스승은 아까 스님이 설명했으니까 이해를 하겠죠.

확신이 드는 존재하고, 그리고 존경하고 하는 것은 틀립니다.

앞에 세 개는 존경하고 공경할 뿐 아니라 확신이 들도록 만들어야 되는 것이고.

왜 그러냐면 그것은 내가 가야 될 길이기 때문에, 내가 도달해야 될 길이기 때문에.

네 번째, 다섯 번째는 존경하고 공경할 해야 될 대상, 그리고 그 은혜에 대해서 항상 상기해야 될 대상이고.

 

적어도 이런 소리라도 들을 수 있는 지금 여러분 모양으로 태어나게 해준 것은 부모님이잖아. 이 좋은 부처님 법을 갖다가 들을 수 있게끔 해준 것만 해도 고맙다 해야 되는 거지. 언제 부모님 아니면 어떻게 이 몸 받아 태어나가지고 이런 얘기를 들을 거라? 다른 거 다 제쳐놓고 잘해주고 못해주고를 떠나가지고 부모님이 나를 이 세상에 태어나게끔 그리고 내가 이 좋은 것들을 갖다가 수행하고 들을 수 있게끔 해준 것만 해도 나는 고맙다 해야 되는 거라. 나를 죽일 정도로 나쁜 부모라고 하더라도 그건 둘째고, 지금 현재 상태에서는 고맙다고 해야 된다는 거라.

 

부모님에 대해서 반드시 그 부모님의 공덕 그리고 그 은혜에 대해서 잊지 말아라.

설혹 여러분들이 여러분들을 가리킨 스승보다도 더 많이 알고 더 높은 경지에 이르렀다고 하더라도 그 덕과 은혜는 잊지 말아야 됩니다.

 

가끔씩 사람들이 그런 얘기를 합니다. 한 몇 년 만에 이렇게 와가지고 자기 인생에서 여러 일들이 참 많았는데 항상 마음에 상기가 되고 하는 것이, 맨 처음 스님을 만나서 스님 법문을 들었을 때 그 느낌하고 그 말씀들이 지금은 뭔 얘기했는지조차 기억이 안 나지만 가슴에 딱 와 닿아있다고 그래요. 그런 얘기를 가끔씩 들어요. 스승은 그런 존재입니다. 설혹 여러분들이 더 뛰어난 존재가 된다 하더라도 스승은 그로서의 값어치를 한 겁니다. 그럼 당연히 여러분들은 그 스승에 대해서 존경하고 공경하는 마음을 가져야 되는 거라.

 

사리불이 앗사지보다도 훨씬 더 뛰어난 사람이 됐지만은 앗사지 존자를 향해서 아침 저녁으로 있든 없든 간에 삼배 드리는 거라. 수행력이 모자라서 아니면 가르치는 능력이 모자라서 앗사지 스님한테 그렇게 삼배를 드리겠어요? 스승이었기 때문에, 법으로 인도해 준 스승이었기 때문에 그런다는 거라.

 

재가자들은 이 5가지를 맨 먼저 해야 됩니다.

5가지의 한량없는 덕과 은혜를 잊지 말고 그것을 자꾸 따라갈려고 훈련을 해야 됩니다.

 

두 번째, 업이라고 적어놨죠? 깜마, 업을 믿는 것. 선인선과 악인악과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업의 법칙은 굉장히 복잡합니다. 하나의 원인을 지었다고 해서 하나의 결과가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여러 가지 원인으로 인해서 하나의 결과가 일어나는 것이 태반이고, 또 하나의 원인을 지었다 하더라도 또 그것이 또 조건들이 되어가지고 여러 가지의 결과들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내가 우리 운영위원장님한테 나쁜 말을 했다. 그럼 운영위원장님이 에이 그 스님 나쁘다 하고 말하는 결과, 다른 사람들도 듣고 있었으니까 자기한테 얘기하는 것이 아니라도, 또 누구는 에이 그 스님 나쁘다. 또 누구는 어느 스님 나쁘다, 여러 가지 결과를 낳을 수도 있는 거고. 내가 한번 얘기하는 게 아니고 한 10번 정도 얘기하니까 운영위원장님이 에이, 그 스님 나쁘다 하는 마음이 들 수도 있는 거고, 다 틀리죠.

 

업은 그렇게 단순하게 일대일의 논리로서 결론지을 수 있는 부분은 아닙니다. 단, 지가 지은 것은 지 것이지 남의 것이 아니다. 자기가 그것을 소유하는 것이지 어느 누구도 소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는 거라.

내가 지은 만큼 내가 받게 돼 있는 거라. 좋은 걸 지었으면 좋게 받게 되어 있는 거고, 나쁘게 지었으면 나쁘게 받게 돼있는 거고. 여러 번 받든 한번을 받든 뭘 하든 간에 자기 것은 자기가 그대로 가져간다는 생각을 잊어버리면 안 돼.

그럴 것 같으면 이왕이면 좋은 거 받는 게 좋잖아. 좋은 거 받도록 자꾸 노력을 하라는 거라.

 

업을 이해할려고 하지 말고, 업의 법칙을 이해할려고 할 것 같으면 머리가 깨져버립니다. 내가 더 나은 방향으로 짓도록만 하면 됩니다. 받는 거는 여러분들이 걱정할 부분이 아닙니다. 짓는 것만 잘 지으면 됩니다.

그래서 가장 중요한 것이 천한 일들을 할려고 하면 안 됩니다. 남들이 비천하다고 하는 것, 남들이 손가락질하고 남들이 나쁘고 악하고 나쁘다고 하는 것들은 할려고 하면 안됩니다. 그거 뭐하러 할려고 그래 그걸.

 

두 번째, 자기 자신의 마음에서 싫은 방향으로 움직이는 것들을 할려고 하면 안 됩니다.

 

그다음 세 번째 업을 이해를 할 때, 왜 또 세 번째가 생각이 안 나나. 조금 이따가 한번 생각해 봅시다 그래서 업은 어쨌든 자기 것이라는 생각을 가져야 됩니다. 자기 것이기 때문에 좋은 방향으로 자꾸 짓도록 노력을 해야 된다.

근데 사람들이 착각하는 것이 뭐냐면 즐거움을 누리고 지금 현재 행복한 것들을 갖다가 좋은 일을 한다고 짓는다고 자꾸 착각을 합니다.

그게 세 번째입니다. 즐거움을 쫓는 일, 그것이 세속적인 오욕락과 관계된 것일 것 같으면 쫓아가지 말아라.

 

오늘도 밥을 먹으면서 그런 얘기들 하는데 스님은 머리가 아파 죽겠어. 빨리 밥 먹고 도망쳐야 되겠다는 생각밖에 안 드는 거라. 근데 자기들은 그게 좋은 거라 그 얘길 하는 게. 즐겁다고 얘기를 하는 거라.

그런데 그것은 오히려 욕구를 더욱 더 증대시켜 주는 일들을 하고 있는 데도 자기들은 즐겁다고 생각을 하는 거라. 그거는 아닙니다. 오욕락과 관계된 것은 어떠한 경우든 그것은 나쁜 업을 쌓고 있는 겁니다. 나쁜 걸 쌓고 있으면서 왜 선하다고 자꾸 착각을 하느냐라는 거라.

 

오욕락을 떠난 것들, 떠난 것들에서 행복을 주고 기쁨을 주는 것들 많잖아.

삼매에 대한 것도 있고, 공부를 해서 얻어지는 것도 있고, 그리고 수행을 해서 얻어지는 거, 위빳사나 수행을 해서 얻어지는 거, 얼마든지 더 크고 좋은 것들이 많은데 왜 오욕락을 쫓아서 거기서 얻어지는 기쁨을 행복들을 갖다가 좋은 거라고 착각을 하느냐는 거라.

그래서 업의 법칙에 세 번째 하는 것은 오욕락을 쫓아서 일어나는 행복이나 즐거움은 버려버리라.

 

그다음에 네 번째, 게을러지는 거. 가장 큰 문제가 뭐냐면 가끔씩 사람들이 이렇게 보면 수행을 열심히 잘하다가, 근데 딱 보면 표가 납니다. 그래서 가끔씩 스님이 가서 머리를 이렇게 톡 쳐요. 그러면 깜짝 놀래. 그래서 “아이, 스님 왜 그래요?” 그러는 거라.

“왜요? 진짜 좋았는데, 열심히 수행 잘해가지고 고요한 상태에 있었는데, 왜 그래요?” 그래. 지가 망상한 걸 생각 안 하고. 게으름에 빠지면 망상이 일어나는데 게으름이 지나쳐 버리면 자기가 망상하고 있다는 조차도 잊어버립니다. 대상이 없기 때문에 그렇게 고요하고 편안할 수가 없는 거라 지는. 그걸 지가 잘하고 있다고 하고 있는 거라. 게으름에 빠졌다는 생각을 못하고. 어디다 쓸 거라? 그걸 갖다가. 죽어있는 시간과 꼭 마찬가지입니다.

 

삼매에 빠졌을 때도 분명하게 깨어 있습니다. 그리고 스님이 머리를 톡 건드리면, 삼매에 빠진 사람은 그것이 자극이 돼서 깨어날 때도 분명하게 깨어나면서 나쁜 마음들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선한 마음들이 일어나면서 천천히 그것들이 깨어나지게 됩니다. “에이, 왜 그래요?” 이럴 거 같애?

절대 그런 거 없습니다. 그래서 게으름에 빠지는 것들도 나쁜 일들에 해당이 된다하는 거라. 게으름에 빠지지 않도록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할 일들이 얼마나 많아? 지금 언제 죽을지 모르는데, 지금 왜 할 일들이 없어? 여러분들이 어떤 순간에 어떻게 죽을지도 모르는 판에, 안 아까워? 시간들이? 그렇게 보낼 시간들이 어딨어?

 

그다음에 몸과 말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행위들 이런 행위들은 선한 쪽으로 하도록 하라.

그래서 5계를 지키는 것보다 8계를 지키는 게 좋고 8계를 지키는 것보다 10계를 지키는 것이 좋고, 지금 여기 적은 것은 10계의 계목 항목이 아닙니다.

10선업계 입니다.

다사 꾸살라 깜마빠타(Dasa kusala kamma patha)입니다.

보통 이걸 십계라고 그렇게 얘기하기도 합니다. 근데 테라와다에서 지금 그 청정녀들에게 주는 10계하고는 계율이 틀립니다. 청정녀들은 마지막 10계의 항목에, 5계의 항목을 갖다가 늘려 놓은 게 9계고, 마지막 10계 열 번째는 항상 어느 때 어느 누구에게라도 자애의 마음을 가지라는 계목이 마지막 10계의 계목 항목에 들어갑니다.

 

그래서 「십선업계」를 자꾸 실천하려고 하라.

몸에서 짓는 행위 1번 2번 3번이죠.

죽이지 마라. 쉽게 말하면 안 죽일려면 어떻게 해야 돼요?

생명을 사랑할려고 자꾸 노력하라는 거라. 모든 생명들을 자꾸 사랑할려고 하고.

 

그다음에 불투도. 남의 것을 빼앗으려고 하지 않으려고 할 거 같으면 남의 재산을 지켜주려고 하면 됩니다. 내 꺼 아니지만은 남의 거 그거 그냥 지켜줄려고 생각을 하면 됩니다. 그리고 지켜줄 뿐 아니라 나도 정당한 방법으로 얻은 것만 취할려고 자꾸 해야 됩니다. 정당한 방법이 아닌 것들은 안 해야 됩니다. 쉽게 말하면 돈 벌려고 남을 속여가지고 돈을 번다든지 아니면 뭐 복권 사가지고 일확천금을 바란다든지 아니면 재산 증식하기 위해서 집 사가지고 팔고 이런 것들은 하지 말아라는 얘기라. 왜 그걸 해? 경제적인 방법으로 자꾸 생각을 하면 안 됩니다. 경제적인 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그걸 취할려고 하다 보면 여러분들의 마음은 점점 더 더러워져 버립니다. 들어오는 이익보다도 더 나쁜 것들이 더 많이 들어오는데 왜 그 일을 하느냐는 거라. 그래서 두 번째가 불투도입니다.

 

세 번째가 불사음. 오욕락에 빠지지 말아야 합니다. 오욕락에 빠지더라도 그걸 즐기더라도 적당함은 분명하게 알아야 된다는 거라. 그래서 부부간에만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만 이렇게 적당한 것들을 분명히 알도록 하라는 거라. 그리고 이 얘기는 뭐냐면 상대방의 인격을 지켜주려고 하는 마음들을 가지라는 거라. 나만 소중한 것이 아니고 상대방도 소중하다는 거라. 동등한 입장으로 생각을 해야 되는 것이고, 그것들 그 인격들을 지켜주고 존중할려고 하는 마음들을 가지라는 거라. 그리고 그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자기자신의 마음을 조심하라는 거라. 마음에서 일어나는 욕망들 오욕락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것들은 분명하게 경계를 하고 그것들을 차단할려고 하라.

 

네 번째 불망어. 무사(musā), 거짓말 안 하려면 다른 방법 없습니다. 진실되게 말하고 사실만 말하면 됩니다. 한번 그래 보십시오. 처음에는 힘들지는 몰라도 그것들로 인해서 일어나는 기쁨들은 한없습니다. 차라리 그 진실을 말해가지고 불편하게 된다고 할 것 같으면 말 하지마. 침묵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럴지언정 거짓말로서 바꾸려고 하지는 말아라.

특히 임종에 가까웠을 때의 거짓말하는 경우들이 많이 있습니다. 임종에 가까이 온 사람 그 사람에게는 그것이 이익이 될지 몰라도 거짓말을 하는 나는 일단 거짓말을 했는데 그거는 내가 또 책임을 져야 됩니다. 그것은 올바른 방법이 아닙니다. 어떤 경우든지 나에게도 이익이 있고 다른 사람에게도 이익이 있는 것이 올바른 방법에 해당되는 것이지. 나에게는 지금 현재 거짓말을 해놓은 것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결과는 내가 받아야 되는 것인데, 나에게는 좋은 이익되는 결과들이 있질 않는 건데 왜 그게 옳은 것들이라?

 

그다음에 다섯 번째 불기어. 여러분 가장 많이 하는 것, 삐수나(pisuṇa) 잡담, 도움이 되는 것들을 자꾸 얘기하십시오. 그리고 그것이 수행에 도움이 되고 가치가 있는 것, 그리고 담마 따라가는데 도움이 되고 가치있는 것들을 자꾸 얘기할려고 하고, 그리고 듣는 사람들에게 공부하는데 도움을 주고, 그리고 그걸 부처님 법을 이해하는데 이익을 줄 수 있는 이런 것들을 얘기해야 되는 것이지, 그냥 허망하게 그냥 떠드는 것들은 되도록이면 안 하는 게 좋습니다.

가끔씩 전화를 하는 사람 중에 그런 사람이 있어요. ‘스님은 혼자 저리 있으면 가만히 있으면 말도 안 하고 안 심심할까’ 이 생각을 했던 모양이라. 그래갖고 하루는 선원으로 영화가 이렇게 배달이 돼왔어요. 그러니까 CD로 이렇게 나오는 거 있잖아요. 그거 보라는 거지. 심심할까 봐가지고. 나는 전혀 안 심심한데 그거 보라는 거라. 자기들 딴에는 참 좋은 마음 냈는데, 근데 스님이 봤을 때는 참 모른다는 거라. 모른다는 거라. 스님들에게는 이게 쓸데없는 일이라. 진짜 쓸데없는 일이거든. 대부분의 영화들이 보면 욕망을 자극하는 것들입니다. 그리고 파괴하는 것이고, 남을 속이는 것들이고.

그거 왜 보고 있으라고 하느냐는 거라. 재가자만 해도 8계만 돼도 그걸 못 보게 하는데, 출가한 스님이 227계를 지키면서 그걸 보라고 그걸 떡 보내주고 있는 거라.

 

여러분들도 혹시 그런 생각가지지 마. 스님들 전혀 안 심심하거든. 전혀 안 심심하니까 그런 거 할라고 하지 마. 쉽게 말하면 여러분 수준으로 생각해가지고, 그걸 뭐라 그럴까, 즐거움을 일으키는 것이면 스님들도 즐거움을 일으킬 것이 아닌가? 아닙니다.

여러분들의 반대 방향으로 생각하면 됩니다. 출가의 길과 그리고 깨달음의 길은 여러분들의 길과 반대의 방향으로 갑니다. 쉽게 말하면 영화 보고 싶다, 영화 안 보면 그게 바른길입니다. 남들하고 떠들고 놀고 싶다, 안 떠들고 놀고 안 떠들고 침묵하고 있는 것이 그게 바른 길이라. 여러분들이 가고 있는 것과 반대 방향으로 생각하면 그게 거의 비슷하게 맞다는 생각을 하면 됩니다. 알겠죠?

 

그다음에 여섯 번째가 불악구. 조악한 악한 말. 상냥하게 말할려고 하면 됩니다. 마음을 온화하게 해서 평온하게 해서 말을 할려고 자꾸 노력을 해 보십시오. 언성이 높아졌다가 낮아졌다가, 크게 됐다가 작게 됐다가, 이런 것들을 되도록이면 줄이고 그 폭을 자꾸 줄여라는 거라. 그래서 마음이 항상 온화한 상태에서 자꾸 얘기할려고, 마음에서 자애의 마음을 가지고, 그리고 말을 이렇게 자꾸 할 거 같으면 처음에는 남들이 듣기에 거북스러울 수도 있습니다. 마 고만고만고만 하니까. 근데 나중에 자꾸 듣다 보면 그 얘기는 듣고 듣고 계속 들어도 질리질 않습니다. 왜? 온화한 마음에서 일어나는 말들이기 때문에. 그래서... (호흡)들을 갖다가 되도록이면 줄이도록 한번 노력을 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다음에 양설. 쉽게 말하면 이간질 하는 겁니다. 이간질하는 것, 남을 비난하는 것 절대 하면 안 됩니다. 이 지구는 평화롭게 살아야 되고 우리들은 조화롭게 살아야 될 필요성이 있고 의무가 있습니다. 그걸 해치는 일들은 절대 하면 안 됩니다.

오늘도 만나가지고 그런 얘기를 했어요. 나는 무엇 때문에 만나는지를 이미 듣고 알고 있어요. 그런데도 말을 안 하고 있으니까 그 옆에 분이 답답한 거라. “스님 그거 왜 얘기를 안 합니까? 알고 계시죠?” “응, 알고 있어” “그럼 왜 얘기를 안 하십니까?” 그래요.

 

그건 내가 남을 통해서 들은 얘기지 직접 너한테 들은 얘기가 아니지 않느냐? 남을 통해서 들은 것은 내가 조사 확인하기 전에는 그 사람 말이 아니라. 지금 나는 그 사람한테 말을 들어야만이 어 그렇다 하고 확신을 가지고 이해를 하게끔 되는 거라. 근데 아무리 남을 통해서 듣고 하더라도 그것은 그냥 소리일 뿐이라. 기억하고 저장하는 것뿐인 것이지, 그것으로 인해서 이걸 판단할 근거는 되질 못 해.

근데 대부분 사람들이 이걸 갖다가 생각을 못 하는 거라. 이해하고 내가 그걸 다 확인을 한 것들만이 수행에서는 정당한 겁니다. 소리도 말도 마찬가지라.

근데 이 단계들을 안 거칠려고 그러는 거라.

 

누가 다른 말을 해도 사실로 듣고 또 옮겨버리면 이 사람은 실제로는 그게 아닌데, 그러면 이간질하는 말이 돼 버립니다. 니 누구한테 들었노? 누구한테 들었다. 그런 방법들은 좋은 방법이 아닙니다. 반드시 그것들에 대해서 이해해서 확인이 된 상태에서 그것들에 대한 말들을 갖다가 정립을 하도록 자꾸 해야 됩니다. 하물며 말은 그런 것인데 거짓말까지 해가면서 들은 걸 갖다가 딴 방향으로 얘기를 한다? 그건 더더구나 있을 수 없는 것들이라. 그건 최소한의 기본적인 예의도 갖추지 못하는 상태라. 이것들을 되도록 하지마.

 

그러니까 지금 대부분 보면 말에 대한 거죠? 4가지 입니다. 말이 얼마나 그리 중요한 거라? 신체에 대한 거 3가지, 말에 대한 것 4가지, 말만 조심하면 그래도 잘 산다는 소리를 들어요.

스님이 가끔 얘기하죠. 말은 뭐하고 같다고? 핵연료와 같다! 핵이 폭발한다든지 아니면 새어 가지고 연료가 빠져나오는 것 같습니다. 그건 굉장히 위험한 겁니다. 굉장히 위험한 거기 때문에 그걸 조심해서 다뤄야 돼요. 조심해서 다루기 때문에 그걸 갖다가 땅속 저장고에다가 조심스럽게 나눠놓고 그것도 몇백 년이 가도 언제 또 바뀔지 모르니까 그대로 유지할려고 하는 거라. 핵연료입니다.

 

그걸 여러분들은 가지고 있으면서 말을 하는 거라. 그러니 조심 안 할 수가 없는 거라. 차라리 안 할 것 같으면 침묵해. 침묵이 얼마나 좋은데, 말 안 하고 있어 봐요. 나는 세상에 최고로 좋은 게 법문도 안 하고 누가 와서 내한테 말도 걸지도 않고, 가만히 놔줘서 내 수행하도록만 해주면 좋겠어. 그럼 얼마나 좋아. 그 내 속에서 일어나는 행복들이나 기쁨들은 엄청난데 말을 하면서 뺏기는 것들 이런 것들은 너무 아깝거든. 말 안 하는 것이 나쁜 것이 아니고, 그렇게 좋다는 생각을 가지고 자꾸 침묵할려고 하는 거라.

그래서 법에 대한 것들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면 침묵할려고 자꾸 노력을 해보십시요.

 

그다음에 마음에 대한 것 3가지,

아는 부정형이죠. 아빗자(abhijjha)라고 하는 것은 그냥 욕심부리는 게 아니고 과도한 욕심. 내 돈 10원밖에 없는데 10원을 더 빌려가지고 집을 산다, 또는 내가 5원 밖에 없는데 5원을 통통 털어가지고 신발을 샀다, 그럼 내 다른 건 뭘 우짜라고. 다른 건 뭐 사는 것도 못하는데. 이 이상한 욕구들 이런 것들을 얘기하는 겁니다.

 

내가 100원 있는 데서 10원 꺼내 가지고 집을 샀다 할 것 같으면 그건 이상한 욕구에 들어가지 않아. 필요한 것, 지금 현재 이것이 나에게 필요한가? 필요하다고 할 것 같으면 구입을 해야 되는 것들이라. 그리고 이것을 내가 함으로 인해가지고 내 마음이 더러워지는가? 더러워지는 것이 아니다고 할 거 같으면 필요한 것들이라. 필요한 것과 필요하지 않은 것들은 분명하게 구분할 줄 알아야 됩니다.

그래서 스님들에게는 필요한 것은 4가지라고 분명하게 얘기를 합니다. 그럼 그 외에는 불필요한 거니까, 불필요한 것이라도 때로는 필요한 것들이 될 경우에는 필요로 인해서 쓰면 돼. 그것에 대해서 집착해 버릴 것 같으면 그건 불필요가 되어 버리는 거라.

 

차가 10년 돼도 문제 없으면 그거 타면 돼. 근데 남들 보니까 그랜저 타고 다니거든. 나도 그랜저를 뽑는 거라. 불필요한 거라. 남들 보니까 새 차거든. 나도 새 차로 바꾸는 거라. 불필요한 거라. 다니는 데 불편이 없게끔 만들고 그것으로 인해가지고 그마만한 효용들을 가진다 할 것 같으면 그거는 이용을 해도 돼. 그것에 집착하지 않으면. 그건 필요에 인해서 하는 거니까, 무조건 안 되는 것이 아니고. 그런데 이것은 불필요한 것들을 자꾸 가지려고 한다는 거라. 더 얻으려고 한다는 거라. 그걸 자꾸 구분할 줄 알아야 되는 거라.

 

(수행자: 스님 질문하고 싶은 게 있는데요) 오늘은 내 꺼도 못 했다. 음?

(수행자 질문: 자신의 마음에서 싫은 방향으로 되는 것을 하면 안 된다고 하시는 부분에 있어서요, 그게 성격 비슷한 거를 잘 모르고 계율을 모를 때 왜 오욕락을 쫓아가는 것으로 되는데 자신이 그게 오욕락인지 모를 때가 많은데 어떻게 해야 되는 거에요?)

자신의 뭐라구요? 오욕락을 모른다고?

(수행자: 예 저희는 아까 스님께서 얘기하셨는데 스님께 공양청을 했지만, 계율을 몰라서 합상하는...)

그럼 공부해야지. 배워야 되는 거지.

그래서 수다원에 이르기 위해서 필요한 것들이 또 다른 경에는 뭐라고 돼 있냐면 배우는 것이 필요합니다.

 

또 그 다른 상윳따니까야에 소따빳띠 부분에 보면, 마하나마 숫따에는 보면 필요한 게 뭐냐면 믿음, 두 번째가 계 계율, 세 번째가 배움, 네 번째가 버림, 짜가(cāga)라고 해서 봉사활동하고 하고 하는 것 봉사활동, 다섯 번째가 지혜. 이런 것들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모를 경우에는 배워야 됩니다 당연히. 재가신자가 해야 되는 것들이 그런 것들입니다. 배움이 없을 거 같으면, 이해 능력이 자꾸 깊어지지 않으면은 모르면서 행하게 됩니다. 그런 거는 배워야 됩니다.

 

자, 오늘은 간단하게 합시다. 이걸 다 못했는데 그건 여러분들이 알아서들 좀 해요. 하고, 이것들은 반드시 여러분들이 점진적으로 자꾸 지킬려고 해야 되는 것이고, 뒤에 부분 1분만 더 할게요.

 

개인적인 부분과 단체의 부분은 분명하게 틀립니다.

마지막 장에 보면 단체의 경우에는 자주 담마를 들을 수 있는 기회를 가져라. 여러분들은 몇 명만이라도 모이면 자꾸 담마를 듣도록 기회를 가져야 됩니다. 스스로들 하든지 안 되면 스님을 청해가지고 하든지 뭘 하든 간에 자꾸 모이면 담마를 들을 기회를 가져라는 거라.

 

두 번째가 결정된 부분, 그 단체나 모임에서 결정된 부분은 찬성했든 반대했든 간에 화합하여서 그 결론대로 따라야 된다. 실천해야 되는 것이지 그것들을 거역할려고 하면 안 돼.

 

그다음에 옛부터 정해진 규칙을 새롭게 정하지 말아라. 정해진 것은 반드시 지키도록 하라.

이미 부처님이 다 정해놨어. 여러분들이 따로 정할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그걸 지키도록 노력하는 것이 더 중요한 부분이다.

 

그다음에 경험이 풍부한 손윗 사람이나 스님들을 존경하여 그들의 의견에 귀를 기울여 듣도록 하여 도움을 받아라. 잘못하는 게 뭐냐면 재가자들끼리 너희들끼리 운영해 봐라 하면 자기네들끼리 잘하는 것 같이 보이지만 스님이 봤을 때는 참 엉뚱한 짓들을 하고 있거든. 그런데도 물어보지도 않아요. 자꾸 도움을 받아야 됩니다.

법에 대한 것들 왜 도움을 안 받으려고 하느냐는 거라. 자기들은 잘 한다고 하지만 그 위에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봤을 때는 참 잘못하는 부분들이 보인다는 거라. 그렇다고 그걸 갖다가 그 위에 있는 사람들이 조정하는 것도 아닌데, 한두마디 도움만 받으면 탁 방향을 틀 수가 있는데도 안 한다는 거라.

재가 운영위원들이 명심해야 될 부분들입니다.

 

그다음에 여성의 권리를 평등하게 동등하게 보장해 주도록 하라. 남자 여자는 똑같습니다.

그다음에 테라와다의 전통과 관련된 의례 의식 축전 등을 실천하도록 자꾸 노력하라.

그다음에 진리를 깨달은 성자와 법답게 살아가는 이들을 보살펴주라. 그 단체가 경제적으로 풍부하기만을 바라지 말고, 정신적인 풍부함을 위해 언제라도 스님들과 법을 구하는 이들이 올 수 있도록 하여 그들이 편안하게 머물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굉장히 중요한 부분입니다. <칠불퇴법-모임이 쇠퇴하지 않는 법>

적어도 모임이 부처님 법에 맞게끔 따라가고 살아가기 위해서 필요한 부분입니다.

이 부분은 설명을 못 했는데 언제 시간 되면 하도록 하겠습니다.

 

이것은 이때까지 배운 것들을 어느 정도는 정리하는 프린트물입니다.

그래서 다음 시간에는 계율 부분까지는 다 끝났다고 보고 다른 부분으로 넘어갑니다.

물론 삼보에 대한 아눗사띠 부분은 지금 우리 테라와다 홈페이지에 있습니다. 그걸 참조하십시오. 그거는 빼고 합니다. 원래는 이것 다음에는 삼보에 대한 아눗사띠를 해야 되는데 그 부분은 홈페이지에 있기 때문에 그 부분을 생략하고, 그다음 단계로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 더불어서 아래의 법문을 들어보십시요.

수다원에 이르는 길의 두 가지 부분에 대해서, 수행을 열심히 해서 도달하는 길과,

법을 열심히 잘 들어서 이해하고 확신을 가지는 것으로 인해서 도달하는 길이 있다는 부분에 대해서,

확실하게 구분해서 설명해주시는 부분이 포함되어져 있습니다._()_

https://alfl6843.tistory.com/1202

 

네 부류의 성인들 2. 예류과와 일래과 (20060930)

♠ 네 부류의 성인들 2. 예류과와 일래과 (20060930)https://youtu.be/qRBu1VzDM7c  오늘은 일래과까지 하도록 그렇게 하겠습니다.한번 예류과부터 일래과 까지 쭉 다 설명을 할테니까, 그리고 예류과에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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