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법문교재/테라와다 불교의범과 신행생활

「붓다의날」의 의미와 재가불자들이 특별하게 하는 일_빤냐와로 스님법문_담마스쿨_130524-1

담마마-마까 2024. 12. 12. 18:41

https://youtu.be/Ixe_4aHVOVc?si=Q75w-ibaBGp4RebI

 

* 「붓다의날」의 의미와 재가불자들이 특별하게 하는 일_빤냐와로 스님법문_담마스쿨_130524-1

 

올해 불기가 몇 년이죠? (수행자: 2557년으로 알고 있습니다.)

예? 257년입니다. 진짜예요? 56년 아니에요?

우리나라에서는 57년이고, 남방불교국가에서는 스리랑카 한 종파를 제외하곤, 전부 56년으로 하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 우리는 태어나면 한 살입니다. 그렇죠? 외국은 1년이 지나야 한 살이라.

그리고 또 중요한 거는 우리는 서기를 기준으로 하는데 불교국에서는 서기를 기준으로 하지 않습니다. 안거가 끝나는 날로부터 한 해가 시작이 됩니다.

그리고 민속적으로 봐서는 4월 아니면 5월달 정도 돼서 우리나라 정월과 같은 것이 시작이 됩니다.

 

그래서 물 축제도 하고 우리같이 정월 행사들을 그때 시작을 합니다. 그때가 사실은 정월이 되는 겁니다. 부처님 오신 날은 보통 우리 5월달 정도 되죠? 음력으로는 4월인데. 거기서는 그러니까 정월 다음 해(달)에 해당이 됩니다. 우리로 치면 음력 2월달이, 2월 보름날이 부처님 오신 날이 되게끔 됩니다.

그런데 이걸 잘못 알아 놔놓으면, 예를 들어 봅시다. 인도에서 두 번째 달 보름에 부처님이 열반하셨다, 만약에 이렇게 경전에 기록이 돼 있다. 그러면 인제 이 인도력을 모르는 사람들은 두 번째 달이니까 음력 2월달 2월 보름날이 부처님 열반일이 돼 버리는 거라.

실제로는 그게 아니죠. 거기서는 정월이 우리로 치면 음력 3월이 되는데,

그러니까 거기서는 두 번째 달이 되니까, 우리로 치면 음력 4월이 되는데.

이렇게 착각을 할 수가 있어요.

 

옛날 중국에서 번역을 하는 사람들이 잘못 번역해가지고 그래서 부처님 열반일이 2월 8일로 돼버렸어. 그러니까 8일이냐 10일이냐? 하는 거는 큰 의미를 가지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경전에서는 보름날이라고 돼 있지만은 어떤 경전에는 8일로 돼 있는 것도 있습니다. 그래서 뭐 길일을 따지다 보니까 인제 그렇게 된 건데, 근데 이제 2월하고 4월하곤 차이가 많이 나게 됩니다. 그러다가 이게 나중에 교정이 조금씩 되면서 부처님 오신 날하고 부처님 열반일 하고가 자꾸 이제 분리가 되어버리게 되는 거죠. 한국에서는. 지금도 한국에서는 부처님 오신 날하고 부처님 성도일하고 틀리죠? 그런 이유들이 조금 있습니다.

 

그런데 작년이 무슨 날(해)인지 알아요.

작년이 부처님 성도하신 지 2600년 된 해입니다. 불기는 부처님 열반일을 기준으로 하죠. 근데 왜 부처님 오신 날, 그러니까 알기 쉽게 여러분들이 알기 쉽게 부처님 오신날입니다이. 그러니까 음력 4월 8일부터 4월 보름까지라고 칩시다. 보통 그때 행사들을 합니다.

그래서 시작은 8일에 시작했다가 무슨 행사 무슨 행사 뭐 심포지엄도 하고 세미나도 하고 무슨 축제도 하고 이렇게 해가지고 4월 보름날, 조금 전에 여러분들이 했던 그 의식문을 낭송하고 저녁에 탑돌이를 하고 끝내게 됩니다. 그러니까 8일부터 보름날까지를 이제 "붓다의 날이다" 그렇게 얘기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알기 쉽게 "부처님 오신날"이라고 해둡시다.

 

부처님 오신 날, 부처님 성도 일을 작년에 아주 대대적으로 했습니다. 부처님 성도 2600주년 기념으로. 왜 그랬을까? 성도일은 우리로 치면 음력 2월 보름이야, 2월 8일이야? 한국에 성도일이? (수행자: 2월 8일로 돼 있어요.)
2월 8일로 돼 있어요? 그럼 2월 8일로 안 하고 왜 4월달에 할까?

한국만 성도일하고 부처님 탄신일이 다르지, 다른 나라는 다 똑같이 하고 있다는 얘기죠?

 

그래서 전 세계적으로 작년에 부처님 성도 2600주년을 아주 거창하게 했습니다.

WFB 세계 불교도 회의에 거의 대부분의 나라들이 가입이 돼 있습니다. 거기 가입돼 있는 나라들은 그날 각각의 자국에서 이 행사들을 다 했습니다. 오로지 한국에서만 내몰라라 합니다. 작년에 그렇게 했는데.

올해도 마찬가지고 해마다 보면 부처님 오신 날의 의미를 되새길 때 부처님이 태어난 날보다는 부처님 성도한 날을 더 의미를 많이 둡니다. 스님들이 법문을 할 때든 아니면 여러 가지 행사를 할 때든 성도한 날을 더 많이 비중을 둡니다.

부처님 태어난 것은 물론 나름대로 큰 의미를 가지려면 의미를 가질 수 있지만, 아직 부처님이 되기 전이니까 우리하고는 별 관계 없습니다. 솔직히 얘기해가지고, 그분이 아직 우리한테 법을 설해 준 것도 아니고 그 법을 깨달은 것도 아니기 때문에. 실제적으로는 부처님이 깨달음을 이루고 나서부터 우리하고 의미 있는 날들이 되게끔 됩니다.

 

경전에 바야-사-라고 하는 음식물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알기 쉽게 어떤 음식물이냐 하면, 부처님이 깨달음을 이루시기 전날에 수자따가 부처님한테 유미죽 공양을 올렸죠. 그 경전은 아시죠? 그 유미죽을 어떻게 만드는지 알아요?

주석서에는 물론 500마리 송아지에서 젖을 짜가지고 250마리에게 먹이고 다시 또 100마리 에게 먹이고 이렇게 해가지고 마지막 최종적으로 1마리한테 젖을 짜가지고 그 젖을 가지고 쌀 그 우리로 하면 쌀이 그냥 일반 쌀이 아니고 이렇게 납작쌀이라고 그럽니까? 납작쌀에다가 그 우유만을 타 가지고 죽을 만들어가지고 그렇게 올렸다고, 주석서에는 그렇게 나와 있습니다. 바야사는 우유를 섞어서 밥을 지었을 때를 바야사라고 그럽니다.

 

한국에 사시 되면 마지 올리죠? 사시마지, 사시공양, 부처님한테. 이게 사실은 부처님한테 올리는 공양은 바야사로 지어야 된다고 그럽니다. 그래서 물을 섞지 않고 우유만을 가지고 밥을 지어가지고 부처님한테 올리는 겁니다. 근데 한국에서는 맨날 부처님 잡숫지도 않는데 날이면 날마다 사시 되면 부처님한테 공양을 올립니다. 원래 사시 때 부처님이 공양을 잡수시니까.

 

테라와다 불교권에서는 밥을 부처님한테 공양 올린 적이 없습니다. 한번도 본 적 없죠?

근데 딱 1번 올리는 때가 있습니다. 그날이 언제라고? 그래 오늘 했잖아. 붓다의 날.

부처님이 태어나시고 성도 하시고 열반하신 붓다의 날 이날을, 두 번째 달을 위사카라고 그럽니다. 인도 말로, 그러니까 위사카 달의 보름날에 부처님한테 그것도 사시 그러니까 점심시간 전에 부처님한테 공양을 올립니다. 딱 1년에 한 차례.

그리고 특별한 때 또 올리는 게 있습니다. 이 바야사를. 언제 올리느냐 하면 오늘 사실은 바야사를 올려야 되는 날입니다. 오늘 뭐 했어요? 여기 앞에 부처님 새로 모셨죠. 부처님을 새로 모실 때 이 바야사를 올립니다. 한국에서는 저걸 뭐라고 해요? 점안식이라고 이렇게 하죠. 근데 점안식을 한국에서 하는 방식하고는 조금 틀립니다.

 

점안식 의미 자체가 뭐냐면 공덕을 쌓을 수 있는 기회란 뜻을 가집니다. 그래서 저 부처님을 조성해서 올리는 것은 내가 공덕을 쌓을 수 있는 기회를 만들기 위해서 부처님을 조성해야 한다는 거라. 그래서 그 부처님 모습을 보고 붓다눗사띠를 하든지 아니면 수행을 하든지 아니면 부처님에 대한 신심을 일으키든지 해서 선한 마음을 일으키고 더욱더 공덕을 더 많이 쌓기 위해서 불상을 조성하는 겁니다.

그래서 불상을 조성하는 귀한 공양이라는 의미가 우리말로 풀이를 하면 공덕을 쌓을 수 있는 때라는 그런 뜻입니다. 그래서 이럴 때 바야사 공양을 올립니다. 그러니까 얼마나 어려운 공양이라.

 

왜 매일 같이 부처님한테 마지 공양을 지어 올리지 않고 이런 특별한 때에만 올릴까?

이건 기념하기 위한 것이죠. 부처님이 잡술 거라고 생각하고 이 공양을 올리는 것은 아닐 거라. 그렇죠? 그럴 거 같으면 1년 364일은 굶고 하루만 배불리 먹을까? 부처님이. 그건 아닐 거잖아. 부처님에 대한 걸 회상하고 그걸 기념하기 위했을 때만 이걸 올리고 나머지들은 올리지 않는다는 거라.

 

쉽게 말하면 먹을 수 있는 음식은 돌아가신 부처님이 잡숫지 못한다는 걸 분명하게 알고 있다는 거라. 잡숫지 못하는 걸 왜 올리겠느냐는 거라. 그러니까 안 올려요, 부처님 전에. 사시가 돼도 마지를 올리는 게 아니고 안 올립니다.

그 대신에 뭘 올리겠어요? 뭘 많이 올리던가요? 부처님한테. 꽃, 조금 전에 꽃 올렸고 , 그다음에 , 그다음에 등불이라고 칩시다. 초도 들어가고 램프도 들어가고 하니까 그거 등불에 들어가고, 또 뭐 올릴까? 차, 청정수. 겨우 그 정도죠.

이거는 먹을 수 있는 거는 아니죠. 이거는 다 없어져 버리고 타버리는 것들입니다.

그래서 그걸 올리면서 그걸 새기는 의미들을 분명하게 하면서 올립니다. 꽃은 어떤 겁니까? 이 꽃을 보고 참 아름답다 예쁘다 하는 마음을 일으키기 위해서 꽃을 올리는 게 아니고, 이 꽃은 피었으면 지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나도 언젠가는 저렇게 죽을 수밖에 없다. 그 사실을 갖다가 명심하기 위해서 이 꽃을 올리는 거라.

 

오늘은 그 게송을 안 했습니다. 어디든지 그런 특별한 날에 읊는 게송에 그렇게 나와 있단 말이라. 향도 마찬가지고 초도 마찬가지고. 그래서 그걸 올리면서 그 의미를 갖다가 되새기기 위해서 하는 것이지, 부처님한테 그걸 갖다 바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실제적으로 부처님한테 올리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거라. 과일을 올리지도 않죠. 과일도 먹는 거니깐 누구한테 올려야 돼요? 마지와 마찬가지로 스님한테, 살아있는 스님한테 올리도록 돼있습니다. 그게 이제 우리나라하고 좀 차이점입니다.

 

부처님 오신 날에는 또 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조금 전에 여러분들 테라와다 방식으로 부처님 오신 날이라 해서 꽃을 올렸습니다.

 

또 어떤 일을 하게 될까? 테라와도 불교권에서 혹시 웨삭 풍경을 본 분들 있어요.

오늘 스님이 여러분들한테 뭘 나눠줬어요? 보리수 잎 나눠줬죠.

보리수나무에게 물 주는 습관이 있습니다. 부처님이 깨달음을 이루도록 도움을 준 나무입니다. 그 고마움을 갖다가 되새기고, 보리수 나무라는 것은 깨달음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나도 저와 같이 깨달음에 이르겠다는 다짐을 하기 위한 것이고, 그리고 그 나무를 갖다가 그날 이식을 합니다. 그래서 거기에다 물을 이렇게 부어요. 쉽게 말하면 자기의 지정수로 만드는 것들이라.

 

그래서 내가 공덕을 쌓을 때마다 인제는 그 보리수나무한테 가서 물 쪼르르 따릅니다. 내 오늘 장한 일 많이 했습니다. 하고 인제 지 자랑하고 물을 부어주는 거라. 그리고 그 5월달 정도면 굉장히 좀 마르고 더운 때입니다. 그러니까 당연히 나무에다 이제 물을 붓는 습관들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보리수나무에 물을 부어주는 의식들을 그날 행하게 됩니다.

 

여러분들도 오늘 붓다의 날입니다. 적어도 자기가 지정하는 나무들을 하나씩 만들어 보십시오. 그래서 그 나무를 돌보면서 내가 조금이라도 공덕을 쌓으면 거기에다가 물 쪼르르 한번 따라봐 봐요. 이렇게 쌓인 공덕들이 나중에 내가 어려운 일이 닥쳤을 때 내가 그것을 헤쳐나갈 힘을 주고 내가 바르게 깨달음으로 나아가는데 장애가 없게끔 만들어주기를 바라면서 거기다 물을 한번 따라보십시요.

부처님도 그랬잖아. 항마촉지인이라고 해서 마라가 깨달음을 이루려고 하는 부처님을 방해하니까 땅을 이렇게 가리키면서 이 지신이 나를 증명할 것이다. 내가 옛날에 공덕을 쌓을 때마다 나무에다가 이렇게 물을 따르면서 그 쌓인 공덕들이 엄청나기 때문에 마라 니가 나를 어떻게 하지 못한다. 지신이 그것을 증명해 줄 것이다 하면서 땅을 가리킨 겁니다. 그러면서 그 마라를 물리쳤다는 거라.

꼭 그렇다기보다는, 공덕을 쌓을 수 있는 방편들을 하나씩 마련해서 그래서 공덕을 더욱더 쌓는 일들 많이 하도록 해야 됩니다. 그게 붓다의 날에 또 하나 여러분들이 해야 될 것들입니다.

 

또 하나 붓다의 날에 여러분들이 해야 될 게 있습니다.

우리 나라에서는 애기부처님 해갖고 관욕시켜주죠. 저쪽 테라보다 불교권에서 부처님한테 관욕시켜 주는 거 본 적이 없습니다.

누구한테 시켜줄까요 관욕을? 스님들에게 해줍니다. 그렇다고 스님한테 물을 찌익 얹어주면서 목욕할 수는 없잖아. 그럼 어디다 해주어야 되겠어요? 손이나 발. 그걸 세족 의식이라고 그럽니다.

그날 당일은 스님들 쭉 앉으시라 해가지고 의자에 앉아있으면, 밑에 양재기 하나씩 놔놓고 발 딱 담그고 있으면 신도들이 쭉 돌아가면서 거기다 물을 따라줍니다.

청정하고 깨끗하게 되어서 그래서 깨달음에 이르러서 우리한테 법을 설해달라는 거라. 부처님을 목욕시키는 게 아니고 스님들에게 그렇게 세족 의식을 해줍니다. 그래서 손이나 발에다가 물을 따라주는 것입니다.

 

그걸 보면서 스님도 환희심이 참 많이 났던 게 그런 의식들입니다. 그걸 하면서도 처음에는 부끄럽는 거라. 맨날 공부 안 하고 엉뚱한 짓 하고 있는데, 신도들이 돌아가면서 게송을 이렇게 외우거든. 외우면서 “스님 청정하고 맑은 마음을 가지셔서 깨달음을 이루셔서 법을 설해 주세요.” 하고 가고, 그리고 또 하고 가고 나중에는 이렇게 손을 대고 발을 대고 있는데 아 이걸 좀 빼고 싶어. 그런 마음이 들어요. 그마만큼 스님들이 분발심을 일으키게 만들고, 또 출가한 스님들이 해야 될 의무가 뭔가 하는 것을 분명하게 가르쳐주는 것들입니다.

 

내년에 한번 해볼래요? 아직은 한국은 조금 어색하게 생각하는데, 스님들께 그건 참 좋은 의식들입니다. 그래서 그런 것들이 한국하고는 좀 차이 나는 거고.

 

또 하나 차이나는 게 뭐냐면 한국 같은 경우에는 연등을 달죠. 저기도 연등을 답니다. 연등을 다는데 우리하곤 정반대입니다.

일반 재가자들이 자기들의 등을 만들어서 갖가지 등을 만들어서 길거리에다가 달고 절에다가 달고 그렇게 합니다.

그러면은 스님들은 앉아있으면서 신도들 오는 사람들을 갖다가 흰 실을 준다든지, 조금 전에 같이 보리수잎 이렇게 만들어가지고 하나씩 선물한다든지, 그렇게 합니다. 그게 답니다.

이거 우리하고는 정반대죠. 우리나라는 가만히 있으면서 그냥 부처님 오신 날 그냥 절에 가면 됩니다. 절에서 다 달아주니까. 사실 이건 거꾸로 된 거죠. 근데 어쨌든 간에 거꾸로 됐든 바로 됐든 간에,

 

연등을 왜, 그 등을 왜 달까? 왜 그럴거 같애요?

부처님이 깨달음을 이루기 전에 너는 앞으로 부처가 될 것이다 하고 수기한 분이 누굽니까? 연등불이죠. 디빵가라 부처님입니다. 연등불에게 수기를 받고, 깨달음을 상징하는 게 불교에서는 연꽃입니다. 그 깨달음을 상징하는 도구로써 쓰여지는 게 연꽃입니다.

그래서 일반인들은 꽃을 바칠 때 최고 좋아하는 게 연꽃을 부처님한테 올리는 것. 마찬가지로 여러분들도 등을 만들면 가장 만들고 싶어하는 게 연등이라. 그래서 연등을 만들어서 내 집에다 걸고, 아니면 거리에다 걸고 또 절에다가도 걸고 이렇게 합니다. “나 앞으로 깨달음을 이룰 거다” 하고 스스로 다짐하는 그런 형태들을 띠게 됩니다. 그게 등불 공양의 의미입니다.

 

깨달음 이룰 수 있겠어요? 마음의 연등들을 하나씩 만들어 켜보십시요. 그래서 나도 언젠가는 깨달음에 이르겠다. 하는 다짐들을 자꾸 하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내가 무엇이 될 것이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장래는 결정됩니다. 내가 완전한 깨달음 이루겠다. 내가 아라한이 되겠다. 아니면 내가 부처와 같은 위대한 성자가 되겠다. 아니면 나는 부처님의 가장 아끼는 제자가 되겠다. 자기가 서원하는 것에 따라서 다음 생이 그렇게 바뀌어져 나간다는 겁니다. 여러분들도 연등을 켜면서 그런 원들을 발원하도록 해야 됩니다. 공부 잘 하게 해 주십시오. 남편 애 안 먹이게 해주십시오. 이런 것 말고 더 큰 뜻을 가지고 그렇게 등을 켜주시기 바랍니다.

 

그게 인제 테라와다 불교권에서 보통 붓다의 날에 하는 일들입니다.

그거 말고 여러분들이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것처럼 거의 비슷합니다. 컨퍼런스를 한다든지 세미나를 한다든지, 그런 부처님과 관계된 여러 가지 일들을 합니다.

 

자, 부처님이 처음 태어나실 때 뭐라고 했을까?

“천상천하 유아독존” 여러분들이 잘 알고 있는 거죠. 그것만 얘기했어요? 해피스님 뭐라고 얘기했어요?

(해피스님: 이것이 나의 마지막 태어남이다. 이렇게 얘기하셨습니다.)

음 그렇지. 이것이 나의 마지막 태어남이다. 그건 마지막에 한 얘기고, 태어나는 순간에 여러 가지 게송 중에서 맨 고르방디 마지막에 한 거, 나는 이 세상에서 뭐 어떻다 나는 이 세상에서 뭐 어떻다 하는 3가지 으뜸가는 사람이다.

나는 이 세상에서 선두에 있다. 이 세상에 가장 으뜸가는 사람이다. 이런 걸 얘기를 했습니다. 그래서 빨리어 게송에 뭐라고 돼있냐면

 

“aggohamasmi lokassa, jeṭṭhohamasmi lokassa, seṭṭhohamasmi lokassa, ayamantimā jāti, natthidāni punabbhavo, ti” [Mahapadanasutta,大本經_DN]

 

악고항 아스미 로깟사. aggohamasmi lokassa. 나는 이 세상에서 선두에 있다.

왜 이 세상에서 가장 선두에 있다고 했을까? 무엇에서 선두일까?

부처님이 깨달음을 이루기 위해서는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어요? 열 가지 선근공덕을 완전하게 성취를 하고 이 세상에 나셨습니다. 선근공덕에서는 부처님보다 앞선 사람이 없어요. 그 어느 누구도 부처님보다도 더 많이 선근 공덕을 쌓은 사람은 없는 거라. 당연히 탁 이 세상에 태어나서 보니까 내가 공덕 쌓는 데서는 가장 선두에 있는 거라. 내보다도 더 공덕 쌓는데 선두에 있는 사람이 없는 거라. 여러분들은 돈이 많으면 내보다도 돈 많은 사람은 없다고 이렇게 자랑할지 모르지만 부처님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선근공덕을 쌓은 게 얼마만큼 많이 쌓았냐, 그래서 가장 선두에 있다. 그래서 맨 처음 얘기한 게 내가 공덕 쌓는 것에서 가장 선두에 있다.

여러분들도 그래서 언제 될지는 몰라도 깨달음을 이룰 때까지는 선근공덕을 자꾸 쌓으려고 노력을 해야 됩니다.

 

두 번째, 셋토항 아스미 로깟사. seṭṭhohamasmi lokassa.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우수하다.

라고 그럽니다. 선근공덕을 많이 쌓았을 뿐 아니라 이 세상에서 가장 지혜롭다는 거라. 과거생에서 지내온 동안에 지혜롭지 않게끔 살아온 것들이 얼마만큼 될까?

 

사실은 우리나라에서 참 잘못된 게 부처님의 일생을 배울 때 가장 먼저 배워야 되는 것이, 부처님의 과거 전생 이야기부터 먼저 배워야 됩니다.

그래서 10가지를 추려가지고 그것을 부처님 과거전생에다 빗대가지고 이렇게 과거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걸 책으로서 이렇게 만들어진 게 인제 본생경이라 해가지고 자까까라고 하는 것들입니다. 사실은 부처님 일대기를 할 거 같으면 그걸 먼저 하고 그다음에 부처님의 탄생을 배우고 이렇게들 합니다. 그마만큼 부처님이 이 세상에 태어날 때는 그마만한 공덕을 쌓았고 그마만큼 지혜로운 일들을 많이 하고 태어났다는 거라.

 

여러분들은 얼마나 지혜로운 일들을 많이 할까? (수행자: 무지한 일을 많이 하죠.) 무지한 일을 많이 합니까? 대부분 그럴 겁니다. 무지한 일을 많이 하지, 지혜로운 일들보다는.

이것 하나만 명심을 하면 됩니다.

여러분들의 지혜로운 일들을 할려고 할 것 같으면 항상 머릿속에 염두에 두는 것이 무상 고 무아라고 하는 것. 이 3가지만 딱 염두에 두고 그것에 어긋나지 않게끔만 행하면 지혜롭게 행하게 됩니다.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대부분 사람들은 지혜롭지 않게끔 행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 지혜롭게 행한 것에서는 가장 우수하다, 부처님이. 공덕에서도 가장 선두에 있고, 지혜 부분에서도 가장 우수하다는 거라. 그래서 부처님은 이미 깨달음을 이루기 전에 이 2가지 다리를 구비한 상태라. 부처님의 두 가지는 이미 구비될 대로 구비된 상태거든. 그러고 나서 깨달음을 탁 이루게 됩니다.

 

세 번째, 젯토항 아스미 로깟사. jeṭṭhohamasmi lokassa.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연장자다.

이 지혜와 공덕을 갖추고 깨달음을 탁 이루고 난 것은 내가 처음이다 라는 거라.

불교에서는 스님들도 제가 해피스님보다 나이는 어립니다. 그런데도 형님 대접 받거든. 먼저 출가했기 때문에. 먼저 출가한 사람이 연장자입니다. 여러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먼저 불교에 귀의한 사람이 연장자입니다. 그러니까 부처님도 2가지를 갖추고 깨달음을 탁 이루고 보니까 최고 연장자가 된 거라. 내 앞에 깨달음을 이룬 사람이 없거든. 그래서 내가 최고의 연장자라는 거라. 내 뒤로는 전부 다 후배가 되는 거라. 지극히 당연한 얘기를 한 겁니다.

공덕이 가장 앞섰고, 지혜가 가장 우수했고, 그래서 깨달음을 이루었으니까 당연히 최고 연장자가 되는 건 당연한 거라. 지극히 당연한 겁니다. 근데 이게 왜 건방진 소리가 될 수가 있어요? 어디를 봐도 건방지는 소리가 아니고, 오히려 당당한 겁니다. 사실을 그대로 드러내는 거라.

 

그래서 이걸 보통 '아스빙 와짜랑' 그렇게 얘기합니다. "위대한 선언이다. 위대한 말씀이다." 자신이 말할 수 있는 걸 당당하게 얘기하는 부분이다 하는 겁니다.

그러고 나서 마지막에 인제 끝에서 인제 그렇게 얘기합니다.

 

아양 안띠마 자띠 낫티 다니 뿌나바오. ayamantimā jāti, natthidāni punabbhavo.

이것이 나의 마지막 탄생이다. 이후로는 다시는 이 세상에 태어나지 않는다.

그렇게 얘기합니다. 이생이 마지막 탄생이라는 거라. 그게 인제 부처님 처음 이 세상에 왔을 때 하신 말씀입니다. 그런데 참 재미있는 게 부처님이 태어날 때도 이와 같이 당당하게 얘기했듯이 부처님이 깨달음을 이루고 나서도 참 당당하게 선언을 했어요.

그래서 가끔씩 그 부처님 탄생게 그다음에 뭐 성도게 열반게 게송들을 이렇게 보면 다 모아서 이렇게 들으면 참 진짜 남자같이 당당한 부분을 갖다가 보게 됩니다. 부처님이 깨달음을 이루었을 때도 그럽니다. 내가 최고다. 쉽게 말하면 내가 최고다는 거라.

 

여러분들은 수행할 때 그런 경험해 본 분이 있습니까? 수행을 해서 어느 정도 체험을 탁 했는데 더 이상 내보다도 이렇게 쭉 돌아보니까 더 뛰어난 사람이 없다. 내가 최고다 하는 마음을 먹은 적 혹시 있은 사람 있어요? 가끔씩은 있을 겁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나서 보면 대부분 보면 ‘아, 그것도 별거 아니었네’ 하고 이제 치부를 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자기자신도 마찬가지고. 그리고 돌아보니까 참 자기 아만심으로 인해서 일어난 것이구나 하는 생각을 가질 때도 있습니다.

 

근데 부처님은 한결같은 거라. 태어날 때도 그랬고, 45년간 법을 설할 때도 마찬가지고, 성도 할 때도 마찬가지고, 열반할 때도 마찬가지고, 당당한 거라.

이거 이상 가는 것은 어디에도 없다. 이거 이상 이것보다 빠르게 깨달음을 이룰 수 있는 길은 어디에도 없다. 이것만이 바르게 빨리 갈 수 있는 방법이다.

선어의 내용들을 보면 그런 당당함이 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이 말씀하신 것은 그 부처님의 가르침의 특색은

따타따 안야타따 아위타따 이다빳짜야따. tathatā avitathatā anññathatā idapaccayatā.

그렇게 얘기합니다. [paccayasuttaṁ 조건경, SN12-20]

부처님의 가르침은 그 자체가 진리다. 그래서 결코 잘못 나아가지지도 않고, 또 변함이 없는 것이고, 그래서 어떤 다른 결과를 내는 것도 아니다. 그 길을 가는 사람이면 그 길을 가는 사람은 똑같은 결과를 냅니다.

이 사람은 이런 결과를 내고 저 사람은 저런 결과를 내서 서로 못 알아듣는 그런 법은 없다는 거라. 똑같은 결과를 냅니다. 그리고 그 길을 갔으면 변함이 없다는 거라. 거기서 일어날 수 있는 것은 반드시 일어나게 되는 거고, 또 이마만큼 갔으면 거기서 일어날 수 있는 것은 반드시 거기서 일어나게 되는 거라. 그것을 벗어날 수 있는 게 없다는 거라. 10년 전이나 아니면 부처님 당시 때나 아니면 앞으로 100년 후나 동일하다는 거라. 변함이 없이 똑같이.

 

부처님의 가르침이라는 것은 그와 같습니다. 그러니 부처님이 깨달음을 이루고 나서도 당당하게 내가 깨달았다 하고 얘기를 하는 거라. 내가 최고다. 내가 최상의 진리를 깨달은 자기 때문에 내 이상의 스승은 없다. 하고.

그 어디에 있느냐는 거라. 가끔씩 이제 스님들도 그런 농담을 합니다. 나에게 부처님보다도 더 뛰어난 스승이 있다. 아니면 그것보다도 더 훨씬 매력적인 어떤 다른 것이 있다. 그럴거 같으면 나는 그거 따르겠다는 거라. 근데 없다는 거라. 그렇게 마음을 끌게끔 하고 그렇게 나를 갖다가 바로 세워줄 수 있는 것이 어디에 있느냐는 거라.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스님만 그런 마음을 가지는 게 아니고, 누구든지 부처님 오신 날에 뭐라고 하느냐면 부처님이 이 세상에 태어나신 것은 태어나신 그 자체만으로도 행복이구나. 부처님의 탄생 자체가 우리에게는 행복이다.” 하고 얘기를 합니다. 여러분들도 부처님이 태어나신 것에 대해서 행복을 자꾸 누리도록 해야 됩니다.

 

수코 붓다낭 우빤노 그럽니다.

부처님이 이 세상에 출현한 것, 이 세상에 태어나시고 그리고 깨달음을 이루시고 그리고 그 법을 설하신 것. 그래서 부처님이 이 세상에 출현한 것으로 우리는 행복한 겁니다. 여러분들은 충분히 그 행복을 누릴 자격들을 가지고 있다는 거라. 조금 더 행복해 보도록 노력하시기 바랍니다.

 

부처님 오신 날은 이와 같이 합니다.

이와 같이 부처님에 대한 것들을 좀 되새기고 그리고 다시 마음을 다잡는 그런 계기들이 되도록 해야 됩니다. 행사 내용은 크게 차이는 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실질적인 그 내용 자체를 갖다가 여러분들이 자꾸 음미하면서 내가 나아갈 방향들로써 지표를 자꾸 삼도록 그렇게 노력하시기 바랍니다.

자, 오늘 부처님 오신 날을 맞아서 스님들이 여러분들에게 축복의 게송을 독송하면서 여러분들에게 항상 길상이 있고 선한 일들이 일어나기를 바라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오늘 점심 공양 올려주신 분께도 같이 하도록 하겠습니다.

 

[축복 게송]

자얀또- 보-디야- 물-레-, 사끄야-낭 난디왓다노-,

에-와 따노- 위자야 호-, 위자야 수짜야 망갈레-.

아빠라-지따빨랑께-, 시-세- 빠타위뽁카레-,

아비세-께- 삽바붓다-낭, 악갑빳또- 빠모-다띠.

 

수낙캇땅 수망갈랑, 수-띠-따

수카노- 수무훗또- 빠수잇탕 브라흐마짜-리수.

빠닥키낭 까-야깜망, 와-짜-깜망 빠닥키낭,

빠닥키나 마노-깜망, 빠니디- 떼-

 

사두 사두 사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