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테라와다 불교의 제사의례_빤냐와로 스님법문_담마스쿨_130607-1
오늘 할 게 테라와다 불교의 제사의례 부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저번에 얘기를 했죠. 붓다·담마·상가 구나 부분은 자료가 우리 홈페이지에 있습니다. 그걸 할 시간적인 여유가 없어요. 그래서 그거는 여러분들이 참고로 해서 공부들을 해야 됩니다. 그 부분이 중요하기 때문에. 지금은 두 달밖에 안 남았기 때문에, 나머지 테라와다 불교의례에 대한 것들은 기본적으로는 익혀야 되기 때문에 그냥 넘어가겠습니다.
이번 시간에는 「제사 의례」 부분입니다. 한국에는 보통 누가 돌아가시면 어떻게 합니까?
삼오제 지내죠. 첫째, 둘째 날, 셋째 날, 삼오제(삼우제) 지내고, 그러고 나서 반혼제라 해서 3일째든지 5일째든지 뭐 혼백을 갖다가 불러 청하는 의식이죠? 절에 위패를 모실 경우에 청하고 그 반혼제 하고, 그러고 나서 초재 7일재부터 초재, 그다음에 2재 3재 해가지고 7·7 49재 49일 그렇게 합니다. 요즘은 이제 시간적인 여유도 없고 경제적인 여유가 안 되는 분들은 초재 지내고 한 3재나 4재 한 번 지내고 마지막 7재 지내고 이렇게 하는 경우도 있고 그럽니다. 그렇지 않고 이제 조금 공부했다는 사람들은 이제 49재 안 지냅니다. 안 지내고, 3일 지나고 나서 그냥 끝내버리는 경우도 있고 그렇습니다. 조금씩 사회가 변하면서 이렇게 바뀌어져 오고 있죠.
우리나라에도 옛날에는 사십구재를 지낼 때 이렇게 칠칠재를 지내지는 않았어요. 처음에 스님이 출가했을 때만 해도 그렇게 7·7재를 안 지냈어요. 초재 2재 3재 이런 개념이 없었어요. 1일부터 해가지고 1 2 3 4 5 6 7 이렇게 7일간 지내기도 하고, 그렇지 않으면 49일째 될 때 49일째만 이렇게 지내고 했거든. 그러다가 이제 경제적인 거하고 자꾸 연관이 되니까 1재 2재 이렇게 지내는 습관들을 들이게 됐습니다.
이렇게 똑같은 대승불교인데 중국은 49재를 그렇게 지낼까? 중국 사람들은 안 지냅니다. 중국 사람들은 오재, 우리로 치면 5재입니다. 35일째에 제사를 지냅니다. 그게 우리의 49재의 형태를 띕니다. 물론 돌아가신 지 하루 이틀 삼일간은 행사를 치릅니다. 그거는 뭐 집에서 다 하든 절에서 하든 어쨌든 화장하기 전까지는 그렇게 다들 치르는 거고.
일본 같은 경우에는 4재 30일을 기준으로 합니다. 일본 같은 경우에는 30일째 되는 때를 갖다가 기준으로 해서 우리의 49재와 마찬가지로 합니다.
쉽게 말하면 영혼이 49일간 머무른다는 것은 우리나라에서의 얘기고, 중국이나 일본 같은 경우는 35일 아니면 30일이라는 그런 개념을 쓰고 있습니다. 각각 틀리죠 대승불교라고 하더라도.
근데 여기서 생각을 해봐야 될 게 돌아가신 분 영혼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만약에 영혼이 상주불멸하는 것이라고 할 것 같으면 언제 처음 내 몸속으로 들어오는 거라? 엄마 아빠가 엄마가 임신을 딱 했을 때 그러면 이 영혼이 툭 들어오는 거라? 아니면 의식이 생기는 한 3달 정도 지나고 나서 영혼이 들어오는 거라? 아니면 엄마 아빠가 처음 그 성적인 행위를 하고 그래서 그러고 나서 바로 들어오는 거라? 그렇지 않으면 내 부모가 누가 될지를 어떻게 알고 여기 찾아 들어오는 거라? 답을 할 사람이 있어요?
아니면 영혼이 죽고 나서 49일간 머무른다, 그러면 그 영혼이 그 몸에서 빠져나갈 때는 언제라? 숨이 끊어질 때라? 아니면 심장이 정지할 때라? 아니면 피부까지도 전부 다 죽은 상태일 때라? 어느 때라? 답을 할 수 없죠? 근데 왜 영혼이 있다고 믿어?
경전에도 그런 게 있습니다. 영혼을 찾기 위해서 부단하게 노력하는 게 있어요. 사람의 살갗을 갖다가 하나씩 하나씩 벗겨내면서 영혼이 언제 빠져나가는가 조사를 해보는 것도 있고, 아무것도 다치지 않게끔 해서 탁 죽였을 때 몸무게를 재보니까, 어쨌든 영혼이 빠져나갔으면 몸무게가 조금이라도 작아져야 되는데 그래가지고 몸무게를 재보는 경우도 있고, 갖가지 방법을 이 왕자가 동원해서 해봤는데 그걸 증명할 수 있는 방법이 없거든.
그런데도 왜 그걸 믿는 거라? 왜 믿어가지고 49재를 지내야 된다고 생각들을 하느냐는 거라. 그러면 그것이 조사 확인되지 않은 것일 것 같으면 그것으로 인해서 49재를 지내야 된다는 것도 타당성이 사실은 없는 거라. 그리고 지내는 방법에서도 영혼을 증명할 수 있는 방법이 없을 것 같으면 내가 영혼에게 무언가를 갖다가 얘기를 했을 경우에는, 그걸 그 영혼이 들었다고 판단할 수 있는 근거가 어디 있느냐는 거라. 아무것도 없잖아.
그럴 것 같으면 돌아가신 분을 위해서 제사를 지낼 때 읊는 경전들을 돌아가신 분을 위해서 읊어야 될 이유가 어디 있어요? 들었는지 안 들었는지도 모르고, 그것으로 인해서 천도가 됐는지 안 됐는지도 그 경전으로 인해서 모른다고 할 것 같으면 왜 그걸 하고 있느냐는 거라.
불교는 어떤 경우든지 증명되지 않고 그것이 확인되지 않은 것은 받아들이지 않는 겁니다. 근데 관습적으로 해왔다? 그것만으로는 통용될 수 있는 부분은 아니라는 거라. 그럴 것 같으면 테라와다 불교는 그러면 제사를 지낼까? 안 지낼까? 지내요? 봤어요? 여기 쓰써져 있어요? 지낸다고 써놓진 않았는데.
테라와다 불교는 제사를 지냅니다.
첫째 날, 둘째 날, 셋째 날, 아니면 5일째, 6일째, 7일째, 그다음에 30일째, 그다음에 1년 되는 기제사 때, 이렇게들 지냅니다.
그럼 왜 그 기간 동안에 그걸 지낼까? 보통 어느 나라든지 사람이 돌아가시고 나면 한 3일 정도 지나고 나면 매장을 하든지 화장을 하든지 수장을 하든 뭘 하든지 그렇게 하게끔 돼 있습니다. 그 3일간은 그 유족들이 가장 슬퍼하는 때고, 유족들에게 출가한 스님들이 사실은 필요할 때입니다. 그래서 어느 나라를 가든지 이 3일간 대부분은 어떤 형태로든 의식들은 있게끔 돼 있습니다.
그래서 이거는 거의 공통적이고, 그 나머지 한 3일 정도 지나고 나면 여러분들도 아마 가족 돌아가신 분들, 지난 시간을 한번 돌아보십시오. 49일까지 그렇게 안 갑니다. 대부분 그 슬픔이, 한 3일 정도 지나고 나면 어느 정도 제정신이 돌아오고, 그러고 나서 한 일주일 정도까지 조금 슬펐는데 슬픔의 강도는 점점 작아지죠.
그래서 그 뒤의 시간은 사실은 언제 지내고 하는 것은 그다지 그렇게 중요한 부분은 아닙니다. 49일을 채워야 되느냐, 말아야 되느냐? 이것도 중요한 부분은 아닙니다. 그래서 각각의 나라마다 틀리게 돼 있는 거고.
그런데 영혼을 인정하지 않는 테라와다에서는 왜 이런 제사를 지낼까?
영혼을 달래기 위해서? 영혼을 천도시키기 위해서? 천만의 말씀입니다. 안에 내용은 확연하게 틀립니다.
그런 날짜를 한다고 하더라도 그 안에 내용은 돌아가신 분을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고, 살아있는 분들이 공덕을 쌓게끔 하고, 살아있는 분들이 니도 언젠가는 저와 같이 죽는다는 사실을 갖다 일깨워주는 것이고. 그리고 마지막에는 그 돌아가신 분이 혹시라도 아귀계, 아귀계 전체가 아닙니다. 아귀계 중에 일부에 태어났을 경우에는 그 아귀계에 있는 분들은 먹이로 삼는 것이 살아있는 분들이 일으키는 선한 마음을 먹이로 삼기 때문에 그 아귀계를 위해서 공덕 회향을 해주는 그것밖에는 없습니다.
실질적인 내용에서는 한국에서 하고 있는 제사의식과 테라와다에서 하고 있는 제사의식은 확연하게 틀립니다.
돌아가신 분을 대상으로 하느냐? 아니면 살아있는 분을 대상으로 하느냐? 그건 극히 차이가 나버리게 됩니다.
그러면 이제 하나씩 한번 알아봅시다. 테라와다 불교에서 제사가 있게 된 것은, 테라와다 불교는 보통 세 가지 방법으로 제사를 지냅니다.
그게 뭐냐면 빔비사라 왕이 맨 처음 부처님한테 공양을 올렸어요. 근데 공양을 올린 그날 밤에 하여튼 정신이 사나울 정도로 아귀들이 나타나서 괴롭힌 거라. 그래서 그다음 날 부처님한테 가서 왜 이렇습니까? 하고 얘기를 하니까 부처님 뭐라고 하느냐면, 니가 어제 내한테 공양 올리고 나서 그 공덕을 회향했느냐? 하고 물어봅니다. 회향 안 했습니다. 그러면은 반드시 그렇게 “스님들에게 공양을 올리고 나서는 돌아가신 분을 위해서 회향하라” 하고 얘기를 합니다.
그러고 나서 그날 또 부처님한테 실컷 공양을 올리고 나서 집에 돌아갔는데 또 꿈을 꿨는데 인자는 빨가벗은 아귀들이 나타나서 춥다고 막 이러거든. 그래서 다시 와서 부처님한테 얘기를 합니다. 그때 인제 부처님이 “상가 스님들에게 가사를 올려라. 가사를 올리고 나서 그 올린 공덕들을 아귀계에 회향하라.” 딱 그게 끝남과 동시에 그 뒤부터는 일절 죽음에 이를 때까지 그런 현상들이 없는 거라. 딱 두 번 했는데. 공양 한 번 올리고, 가사 한 번 올리고 두 번 했어요.
테라와다 불교의 제사의식은 여기에서 출발합니다.
어떤 테라와다의 불교 의식이라고 하더라도 가장 기본이 되는 게,
스님들에게 공양 올리는 제사 의식. 그럴려고 할 것 같으면 오전에 스님들을 초청해야 되겠죠? 안 그러면 오전에 절로 와서 공양을 올리든지.
그다음에 시간에 관계 없이 가사를 올리는 제사 의식.
그런데 가사 이런 삼의를 갖추는 가사를 올릴 수 있는 기간은 1년 중에 딱 한 날밖에 없죠? 나머지 때는 우짤거라? 나머지는 이 가사를 못 올리잖아. 그래서 뭘 올리냐면 우의 · 목욕의라고 그럽니다. 스님들은 목욕할 때도 발가벗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대중탕에 가면 안 됩니다. 스님들은. 지 혼자서 앉아서 뭘 하든지 간에 지 혼자서 해야 돼. 혼자서 한다고 하더라도 이 옷으로 몸을 가리게끔 돼 있습니다. 밑에를 그걸 갖다 목욕의라고 그럽니다.
쉽게 말하면 여기는 조의가 있죠. 조각이 있는데, 그 목욕의는 조각이 없습니다. 이 하의가, 조각이 없이 그냥 팽팽한 안따라, 이 밑에 아래 가사 형태를 취하고 있습니다. 그걸 갖다 목욕의라고 합니다. 그래서 그거는 언제든지 스님들한테 올려도 되거든. 그래서 그 목욕의를 갖다가 올리게 됩니다. 그래서 옷을 올릴 수 있을 때는 이런 가사를 올리고, 올릴 수 없을 때는 목욕의를 올리고 해서, 그 가사를 올리면서 하는 제사의식이 있고.
또 하나는 뭐냐면 중이 앉아서 염불한다고, 중이 앉아서 법문하는 거. 중은 앉아서 염불해야 되는 게 아니고 자기가 배우고 체득한 것들을 갖다가 남들에게 전해줘야 될 의무가 있습니다. 이 법을 전하는 거죠. 그러니까 스님을 이왕 초청했으니까 법문 듣는 거.
요렇게 세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어떠한 경우도 이 세 가지 방법 외에는 없습니다. 테라와다의 제사 의식은.
그 대신에 이 세 가지를 올리는데 이 올리는 목적을,
이것은 "돌아가신 분을 위해서 공양올린다"고 올리는 형태를 취합니다. 스님한테 공양 잡수십시오 하면서 공양 올리면서도 자기가 말하기를 "스님에게 올리는 공양은 돌아가신 분을 위해서 공덕을 회향하기 위해서 이 공양을 올립니다."
가사를 올릴 때도 "돌아가신 분을 위해서 합니다."
법문을 들을 때도 꼭 마찬가지 형태를 취합니다.
그러면은 스님들이 일반 재가인들에게 공양을 받든 가사를 받든 법문을 하든 그럼 하는 중심적인 내용들이 있어야 됩니다. 그게 한국의 불교의 제사의식과 많이 틀립니다. 돌아가신 분을 위해서 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아무것도 없습니다. 단 1%도 없어. 몰라. 이제 공덕 회향하는 것들이 돌아가신 분을 위해서 하는 것이라 할 것 같으면 그거나 될까, 없습니다.
법문하는 내용도 그리고 공양을 받을 때 스님들이 돌아가신 분을 위해서 한다고 하더라도 내가 마음먹는 것들도, 그리고 가사를 취하면서 읊는 게송도 돌아가신 분을 위한 것이 아무것도 없어. 살아있는 사람을 대상으로 합니다. 안 돌아가실 것 같애요?
불교도인가 아닌가를 판단하는 기준을 보통 뭐로 잡느냐면,
‘나도 죽는다’ 하고 생각을 할 수 있는 사람이면 불교도라고 그렇게 얘기를 합니다.
여러분들은 나도 언젠가는 죽는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까? 생각만 하는 게 아니고 생각을 한다는 것은 그것을 이해하고 있다는 얘기입니다. 그거 이해하고 있을 것 같으면 일부러 죽음이 다가오면 살려고 발버둥 치지도 않는 거고, 누가 또 돌아가셨다고 하더라도 조금 슬프기야 하겠지. 근데 그 슬픔을 갖다 오래도록 진행을 시키고 지나치게 슬퍼하고 그러지도 않는 거고, 그리고 내가 살아있을 동안에 뭔가 부귀영화를 누리려고 뭔가 움켜잡고 천년만년 살 것처럼 이렇게 살지도 않는 거라.
그걸 갖다가 죽음에 대해서 이해를 했기 때문에 나도 죽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였다고 그럽니다. 그럴 때 보통 불교도가 됐다 하고 얘기를 합니다. 고뜨라부(Gotrabhū)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러니까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종족이 됐다는, 부처님의 성을 쓸 수 있는 부처님의 가문의 가족이 됐다는 그런 의미로 이걸 고뜨라부라고 그렇게 얘기를 합니다.
과연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몇 프로나 될까? 죽음은 이해하고 있어도 당장 내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할 것 같으면 아이고야 하고 막 난리를 칩니다. 한 사람은 눈 팅팅 붓도록 울고 그러고 나서 스님이라도 가면 스님 우리 엄마 좀 살려주세요. 뭐 어쩌고 저쩌고. 뭐 돌아가신 분을 뭔 살려낼 그게 있다고 살려내라고 그래? 그럽니다. 실제로 못 살리는 줄 알면서도 그런 마음들을 가지는 거라.
그런데 진짜 불교를 바르기 이해한 사람들은 똑같이 초청하는데도 스님한테 그냥 법문 듣고 아니면 공양 올리고 아니면 가사 이렇게 올리면서 “스님, 그 공덕을 나는 돌아가신 분께 회향하겠습니다.” 하면, 그러면 스님이 “그래 잘했어요.” 하면서 법문 해주고 “사두 사두 사두” 해주고 이렇게 옵니다.
그게 이제 쉽게 말하면 테라와다 불교도라고 그렇게 얘기를 하는 겁니다.
자, 그러면은 대충 얘기를 했는데 한번 정리를 해 봅시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테라와다 불교도가 되었다. 제사를 지내기는 지내야 되겠죠? 왜 그럴까?
부처님의 가르침은 일반적인 관습과 배타적으로 가지를 않습니다. 그것이 설혹 틀렸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바꿔가지고 맞는 방법으로 해나가는 것이지, 그거 틀렸다 해가지고 이렇게 부정하고 그러지는 않습니다. 부정하는 경우는 이런 경우들은 그 습관들을 부정합니다.
사회 차별을 두는 것들을 인정하게 될 때, 그거는 그 습관들을 아예 부정을 해버립니다. 어떤 경우든지 평등하다는 관계들을 취합니다.
그다음 두 번째는 사람들을 착취하게 될 때,
쉽게 말하면 돈 없는데 49재 비용 300만 원입니다. 하면서 딱 못박아 가지고 300만 원 아니면 안 지내주고, 그럼 그 사람은 300만 원이 없는데 어떡할 거라. 넘의 돈 빌려가지고 49재 지내야 됩니다. 그거는 어떤 면에서는 착취입니다. 돈으로 천상 세계에 갈 수 있을 것 같으면 얼마나 좋겠어요. 근데 그런 게 아닌데도 그렇게 한다는 거라. 착취하는 것들은 부정을 하게 됩니다.
그다음에 그 사람을 위협하게 될 때, 이거 안 지내면 조상이 당신에게 뭔가 나쁜 짓을 한다든지, 뭐뭐 어쩌고 저쩌고 위협하는 경우, 그것 자체는 부정을 하게 됩니다.
그다음에 그 살아있는 생명 살아있는 사람들에게 해를 줄 수 있는 것들,
그다음에 이성을 잃게끔 하는 것들,
그다음에 미신을 조장하는 것들,
그다음에 경제적인 데미지 충격 경제적인 손해를 손실을 주는 경우들,
그다음에 화합을 깨는 것들,
그다음에 그 사람이 죄를 범하게 하는 것들,
그런 경우에만 그 관습들을 부정하는 것이지.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그 관습들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화합을 유지하게끔 하고, 평등관을 심어주고, 선한 마음을 더욱더 증장시키고 길러주게끔 하고, 이성적인 것들을 일으키게끔 하고, 그리고 정신적인 침착성을 길러주게끔 합니다. 그것으로 인해가지고. 그래서 바른 방법으로 그 관습들을 이용할 것 같으면 그런 좋은 효과들을 가질 수 있다는 거라. 그래서 지금 현재 만약에 여러분들이 태국에 가있고 버마에 가있으면 그 관습대로 하면 됩니다.
근데 한국에 있을 때는 그럼 어떻게 하면 좋을까?
누가 돌아가셨다, 그럼 관습을 부정할 수도 없고 우짜면 좋을까? 실제 여러분들에게 누가 탁 돌아가셨다. 대부분 한국에서는 장례를 1일부터 3일까지는 보통 그 병원 영안실이라고 그러죠? 영안실에서 이렇게 합니다. 그럼 영안실에 한 번은 그래도 스님을 초청해야 될 거 아니라? 나머지 때는 독경을 경전을 갖다가 틀어놓든 뭘 하든 간에,
적어도 한 번은 스님을 초청하라. 이것은 정해진 게 아닙니다.
스님이 생각할 때 적어도 한국에서 어차피 테라와다가 정착하려면 요런 것 정도는 해야 될 필요성이 있다 해서 생각을 해서 얘기를 하는 거라. 대부분 보면 한국에는 둘째 날 입관을 하고 상복을 입는다고 그러죠? 상복을 입습니다. 그래서 둘째 날에는, 적어도 둘째 날 오후에는 스님들을 초청하는 것이 좋겠다. 하고 생각을 합니다.
그 대신에 초청하더라도 둘째 날에 할 수 있는 것들이 뭐냐면, 한국에서 가사를 올리는 것, 돌아가신 영정사진이 있고 뒤에 꽃으로 장식했고 실제로는 돌아가신 분은 여기 없죠? 저기 냉동실에 들어가 있지. 그냥 냉동실 앞이 돼도 좋고 아니면 이 사진이 있는 사진 위패가 있는 여기도 좋고, 그 앞에다가 가사를 이렇게 놓아두어요. 가사를 놓아두어 가지고 스님을 초청해서, 경제적인 여유가 될 것 같으면 다섯 분의 스님을 초청하는 것이 좋고, 경제적인 능력이 안 될 것 같으면 한 분을 초청해도 관계가 없습니다.
다섯 분을 초청한다 해가지고 내가 다섯 벌의 가사를 놓는 게 아닙니다. 어떠한 경우든 딱 한 벌을 놓습니다. 한 벌. 그러니까 그 5명의 스님 중에서 한 스님이 나가 가지고 그것을 취하게끔 돼 있습니다. 그래서 스님에게 가사를 올리는 장례의식은 둘째 날 오후에는 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하고 생각을 합니다.
그다음에 이왕 가사를 올리는 의식을 했을 것 같으면, 거기에다 더해서 스님 법문까지 청하라. 그래서 스님이 살아있는 분들을 위해서 뭔가 법을 설할 수 있게끔 하고,
그러니까 가사와 법을 청하는 것, 이 두 가지를 합해서 하는 것이 좋겠다 하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고 나서 3일 장례를 치르고 나서, 보통 사람들이 어느 정도 마음의 안정을 찾을 때가 될 것 같으면 5일 아니면 일주일째, 그러니까 5, 6, 7일 중에 하루 날을 잡아가지고 공양청을 하라. 그게 자기 집으로 해도 좋고, 아니면 절에 와서 해도 좋고, 아니면 식당을 빌려가지고 해도 좋고, 어떠한 방식이든 간에 오전 중에 공양청을 하도록 하라.
마찬가지로 공양청을 하더라도 그냥 공양만 잡숫게 하지 말고 법을 청해 들으라.
그래서 공양청과 법을 듣는 것을 하나로 합하고, 앞에서는 가사를 올리고 법을 청해 듣는 걸 하나로 합치고, 그러니까 법은 어떤 경우든지 청해 듣도록 하라.
이렇게 할 것 같으면 적어도 두 개의 의식은 형성될 수가 있습니다.
적어도 이것만 하면 되지 않을까?
그리고 기일이 다가온다, 기일이 다가올 것 같으면 기일날은 어떠한 방식으로 해도 됩니다. 이걸 분리해도 되고, 세 개를 합해서 해도 되고, 아니면 두 개를 합해도 되고, 이미 1년이 지나고 이렇게 했기 때문에, 그 기일날은 어떠한 방식을 취하더라도 기일날은 되도록이면 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그럴 것 같으면 지금 한국의 관습을 부정하지 않으면서 또 부처님 말씀에 어긋나지도 않고 그러면서 여법하게 장례의식들을 갖다가 행할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을 합니다.
만약에 그렇게 되지 못할 경우에는 그나마도 시간적인 여유가 없다. 그럴 경우에는 이제 한국에서 잘하는 건 뭐냐면, 책 같은 걸 찍어내는 거. 그러니까 영가 돌아가신 누구누구, 근데 사실 그거 참 부끄러운 얘기입니다.
영혼을 부정하면서 그 영가라고 적어놓기를 왜 적어 놔? 그러니까 책을 찍어내는 건 좋은데 그걸 왜 쓰느냐 하는 거라. 그러니까 돌아가신 분에게 이 공덕을 회향하기 위해서 이러한 선한 공덕들 법을 전하는 거니까 법을 펼치는 이 공덕들을 돌아가신 누구누구에게 회향합니다. 이 공덕으로 돌아가신 누구누구가 평안하기를 행복하기를 이런 구절을 쓴다 할 것 같으면 그거는 충분히 이해가 돼.
근데 돌아가신 누구누구 영가를 위해서 이 책을 출판합니다? 이런 구절은 사실은 그거는 테라와다라고 한다고 하면서도 그건 대승적으로 가고 있다는 거라. 그거는 그렇게는 하지 말고.
그리고 책을 출판하는 건 마지막 최후의 수단으로 하라는 거라. 최후의 수단으로. 그것은 실제적으로 테라와다 불교권 어디에 가더라도 돌아가신 분을 위해서 책을 그렇게 출판하는 경우는 없습니다. 내가 이때까지 그렇게 지내봐도 그런 경우는 없습니다.
그거는 마지막 최후의 수단으로 진짜 시간이 없을 때.
대부분 사람들은 책을 그렇게 출판하는 게 아니고 그 돈을 상가를 위해서 쓸 수 있게끔 보시를 합니다. 그리고 만약에 그 상가에 어디 필요한 것들이 있으면 그걸 구입을 해주든지, 아니면 상가에 뭐 부서진 것이 있으면 아니면 뭘 하나 지어야 될 경우는 그걸 또 하는 거고, 이런 방식을 취하지 거의 책을 출판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우리나라는 희한하게 이렇게 바뀌어져 있어요. 그래서 그거는 최후의 수단으로 하도록 하고. 왜 그런 행위들을 하느냐 하면,
테라와다에서는 공덕을 쌓는 것들은 어떤 경우든지 상가 우선입니다. 재가자의 역할을 분명하게 압니다.
그게 돌아가신 분을 위한 것이든 나를 위한 것이든 간에 내가 재가자라고 할 것 같으면, 재가자의 역할은 상가의 유지, 상가에게 도움을 주는 조력자의 역할로서 딱 한정돼 있습니다. 이걸 잊어버리지는 않습니다. 그게 우선인 것이지.
법을 펼친다? 아니면 내가 수행 이마만한 경지에 올라와서 다른 사람들에게 이렇게 뭔가 보여준다? 이건 뒷전입니다. 그래서 가장 뛰어나고 뛰어난 재가자 중에 특출난 몇 사람만 법을 설하고 펼치고 하지, 우리나라 같이 어디서 포교사 하나 받았다 해가지고 어디 가서 뭘 하고 뭘 하고 이런 것은 안 합니다.
그 왜 그러냐면 자신들의 역할을 딱 한정해 놓고 있다는 거라. 상카루뻭카냐나, 그리고 테라 담마 열까지 조건을 구비한 상태에서 내가 원력을 세워서 법을 펼치겠다는 마음을 낼 것 같으면 그때 큰 스님들이 그걸 인가를 해줬을 때, 너는 그래도 좋다 하고 인가해 줬을 때는 그 사람은 그 길을 갑니다. 쉽게 말하면 보살의 길을 갑니다.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안 갑니다. 그게 정확한 겁니다. 그런 조건을 충족하지 않았으면서 법을 설할 수는 없다는 거라.
그래서 책을 찍어내는 것은 법을 펼치는 거와 마찬가지로 보기 때문에 돌아가신 분을 위해서 책을 찍어내는 경우는 거의 없다는 거라. 차라리 그 돈 갖고 쉽게 말하면 상가 스님들 보니까 쪼래기가 좀 필요하겠다. 그럼 쪼래기 하나씩 사가지고 상가 스님들한테 나눠주고, 안 그러면 절에 에어컨이 필요하겠다. 그럼 에어컨 사다 놓고, 그러나 거기다가 뭐 글귀 새기고 하는 것도 없습니다. 단지 그걸 하면서 게송을 합니다. "이 공덕들은 돌아가신 분께 회향합니다. 돌아가신 분이 이 공덕으로 회향하기를" 이런 게송을 분명하게 합니다. 그것만 하면 됩니다. 그것만 하면 이름 새겨 넣지 않더라도 그 공덕들은 틀림없이 회향을 하게 됩니다.
자, 그러면 이제 기본적인 것들을 얘기를 했으니까, 안에 내용을 들어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수행자 질문: 스님, 돈만 보시하면서 상가 스님들에게 보시합니다 하면, 음식과 가사 보시하는 것까지는 안 되고, 꼭 가사 따로 음식 따로 해야 되나요? 돈을 보시하면 상가에 보시합니다 하면 음식과 가사 보시한 것이 포함이 안 되나요?)
스님: 그 돈의 출처를 분명하게 밝혀줘야 됩니다.
(수행자 질문: 그러니까 그 보시 봉투에 고인을 위해 누구누구를 위해 상가에 보시합니다라고 썼을 때)
스님: 아닙니다. 그거는 그렇게 안 됩니다. 상가를 위해서 보시합니다 그렇게 했지만은 그 돈이 어디로 쓰여질지를 어떻게 알 거라? 그 돈이 쉽게 말하면 스님들 공양 올리고 가사를 올리는 데 쓰여지는 건지 아니면 다른 용도로 쓰여지는 건지 모릅니다. 그러면 그 돈의 출처에 대해서 분명하게 밝혀줘야 됩니다. 그리고 그것이 중요할 뿐 아니라,
또 하나 중요한 거는 뭐냐면, 내가 그러한 스님들이 공양하는 자리 그리고 그 가사를 올리는 자리에 참석하지 않은 상태에서 공덕 회향을 어떤 식으로 할 거라? 지 혼자서 마음속에서 ‘이 공덕을 어디다 회향합니다’ 그럴 겁니까? 어떻게 할 거라. 공덕회향을?
(수행자 질문: 보시 봉투를 넣으면서 공덕 회향을 하는 건 안 되나요?)
그거는 가사나 공양이나 이런 것들 용도가 아니고 그냥 그 보시금을 하는 겁니다. 그것은 상가에게 보시를 하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상가에게 보시하는 공덕으로 어느 누구에게 이 공덕이 회향되길 바랍니다 하는 그것들이 되는 것이지, 가사공덕이라든지 공양공덕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그 낸 금액에 대한 공덕 회향만 하게끔 됩니다.
근데 문제가 뭐냐면 그렇게 했을 경우에는, 예를 들어서 공양을 올렸을 경우에는 공양한 스님이 만약 열 분이다. 그럼 10분에 대한 공덕 회향은 됩니다. 근데 그걸 하면서 "상가에 이 공양을 올립니다." 할 경우에는 열 분 말고 모든 상가의 공덕을 회향하게 됩니다. 직접 거기서.
근데 그렇게 되지 않고 내가 봉투를 보시해가지고 상가에 공양 올립니다 하고 이렇게 냈을 경우에는, 그 봉투의 돈이 뭔가 용도로 쓰여질 때 그것이 공덕의 회향이 됩니다. 언제 쓰여질 줄 알아서? 그리고 어떻게 바뀔 줄 아느냐는 거라. 그걸 증명할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공덕이 안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근데 공덕을 정확하게 할려고 할 것 같으면 그런 방법은 좋은 방법은 아니라는 거라. 틀렸다는 것은 아니고. 그래서 그 용도를 분명하게 지정을 하고, 그 지정한 것에 따라서, 그 자리에 참석해서 그대로 공양공덕 회향게송을 하는 것이 좋다는 그런 뜻입니다. 이해하겠습니까? 이해 안 됩니까?
(수행자 질문: 이해는 되는데 그럼 --- 계신 분한테 저희는 한국 스님들한테 가사 올리기가 좀 어렵고요, 테라와다 스님한테는 우의를 어디서 사야 될지, 쉬운 일 같지가 않아서)
스님: 가사는, 그래서 빨리 그러니까 배워가지고 한국에도 가사를 만들 수 있도록 해야 돼요. 지금은 스님이 안 입고 있는데, 스님도 이 얇게 된 옷이, 가사가 있습니다. 그건 어디서 만드냐면 한국에서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직접 태종사에 있을 때 우리는 가사를 만들었었어요.
그때 그 사람들은 가사 만드는 법을 배웠어요. 그래서 자기들이 만들어요. 그거는 가사 할 데가 없다고 할 것 같으면 아니 내가 빨리 가사를 만들 수 있도록 해야 되는 것이지, 정 안되면 서울에 뭐 파는 데도 있대. 테라와다 가사 파는데, 거기 가서 사 와서라도 해. 안 되면 외국에 가서 사가지고 오든지 그래야 되는 거지, 가사 팔 데가 없다는 것을 가지고 그걸 못 올린다는 건 있을 수가 없는 거라. 그렇지 않을까?
왜 그러냐 하면 공양을 올리고 가사를 올리는 것은 쉽게 말하면 상가를 위해서 하는 것들입니다. 근데 되도록이면 스님들한테 재정적인 것들을 주면서 그것을 공덕회향으로 자꾸 생각하지 말라는 거는 뭐냐면, 스님들한테 그렇게 하면요 스님들이 변질됩니다. 엉뚱한 짓 자꾸 해요.
그래서 청정한 상가를 원한다 할 것 같으면 청정한 상가가 될 수 있게끔 여러분들이 만들어야 됩니다. 물론 스님도 부산에서 왔다 갔다 하려면 돈이 필요합니다. 기차표가 있어야 될 거 아니라. 어느 정도의 금액은 필요하지만 그렇다고 해가지고 그거 없다 해가지고 못 다니는 건 아니라. 다 방법이 생겨. 그래도 어려움 없이 다니거든. 그렇기 때문에 너무 쉽게만 생각하고 경제적으로 봉투만 생각해가지고 그걸 줄라고는 생각을 하지 마라.
마음을 한번 생각해 보세요. 가사를 어렵게 구해가지고 가사를 스님한테 올렸다, 거기서 일어나는 기쁨들이 크겠어? 아니면 봉투에 얼마 집어넣어 갖고 스님한테 드리는데 그때 일어나는 기쁨이 크겠어?
(수행자 질문: 스님, 근데 두 가지 다 할 수 있습니까?) 다 해 그러면. 다해.
왜 그러냐면 보시라고 하는 것은, 보시에서 중요한 부분은 뭐냐면,
보시를 올리고자 하는 사람의 의도가 올리기 전이나 올릴 때나 올리고 나서나 항상 그런 기쁨들이 일어나도록 해야 됩니다. 의도가, 보시를 올리는 사람의 마음이 그렇게 중요한 것이고,
그다음에 보시를 올릴 때 그 올리는 대상이 중요합니다.
한 분의 스님에게 할 것인지, 아니면 상가 전체 할 것인지, 아니면 깨달음을 이룬 성자에게 할 것인지, 무엇에 따라서도 이 무게는 틀려질 수밖에 없다는 거라. 그렇게 될 것 같으면 되도록이면 몇 스님을 초청하더라도 한 스님을 초청하더라도 상가에 올리도록 하라는 거라. 그럼 미래세에 출가할 스님들도 모두 해당되기 때문에 그거는 그마만큼 크다는 거라. 그래서 그 받을 사람이 또 중요한 것이고.
그다음에 세 번째 중요한 게 뭐냐면 그 보시 올릴 물건입니다.
돈? 공양 내가 짓는 거? 어떤 것이 공덕을 크게 낳을 수 있을까? 그 물건은 틀림없이 내가 직접 노력해가지고 뭔가를 했을 경우에는 그거는 그 기쁨들은 더 크고 그 공덕들은 더 클 수밖에 없다는 거라.
이게 이 3가지 조건들을 올리는 사람 입장에서는 맞춰야 되는 것들이라.
(수행자 질문: 스님, 거기에서 보시하고자 하는 사람이 보시를 올리려 하는데 가사를 지어서 올리는 것도 좋은 말씀이지만 보시 올리는 데 대해서 너무 어렵게 하거나 구하기 힘든 걸 억지로 구해서 하는 것도 별로 안 좋고, 또 두 번째로는 가사가 이 스님들은 삼의, 옷을 삼의라고 그러잖아요. 세 벌, 그러면 이 가사 여벌이 충분히 있는데 자꾸 올려가지고 여벌이 자꾸 남는 건 물론 승가에 돌려쓰면 되겠지만은 그 필요한 거에 한해서 올리는 건데, 이게 필요 이상이 올려지면 그거 자체도)
착각하지 마십시오. 그걸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살 수 있을 경우는 사가지고 올려도 괜찮습니다. 꼭 그걸 갖다가 지어가 올리라는 것이 아니고. 근데 왜 가사를 올리느냐 하면 저 테라와다 불교권에 가도 가사들 스님들이 남아돕니다. 천지에 널려 다닙니다. 그런데도 왜 그 사람들은 뭐 봉투에 담아서 할 줄 몰라서 그러고 있겠어요? 그거 아닙니다.
쉬운 거는 오히려 그 스님에게 도움이 되는 거는 봉투를 주는 게 가장 좋습니다. 그런데도 왜 그걸 극히 반대하느냐는 거라. 출가한 스님들은 그걸 못 하게끔 돼 있기 때문에 그러는 거라. 되도록이면 하지 못하라는 거라.
왜 불교에서 자꾸 이 종파가 생겨나고 그다음에 결집이 생겨나고 했어요? 출가한 스님들이 부처님이 말한 것 이상을 자꾸 가지려고 했기 때문에 문제가 돼서 자꾸 그렇게 된 거잖아. 그럴 것 같으면 출가한 스님들은 되도록이면 가지는 것이 없도록 만들어줘야 됩니다. 여러분들이.
딱 필요한 부분만 만들어주고, 그 이상은 경제적인 부분도 관여하지마라 해서 절 운영하고 하는 것들을 하지 마라고 하는 판에, 왜 자꾸 하기 쉽다 해가지고 그리고 그 스님에게 도움이 될 것이다 해가지고 그걸 봉투로 자꾸 대처할려고 하느냐는 거라. 그건 아니라는 거라.
필요한 경우도 있습니다. 태국에도 탁발 나가면 먹는 음식 사이사이에 뭐 10루삐, 10밧, 20밧 해가지고 이렇게 봉투가 들어옵니다. 그럼 그 돈 모아가지고 내가 책 사보고, 그리고 학교 다니는 차비하고, 그리고 그러고 나서 돈이 남으면 뭐 하는지 알아요? 스님들이 저장해 두는 것이 아니고 통장을 가지는 게 아니고, 그 돈을 갖다가 스님들이 절에 기부를 보시를 합니다. 전기값으로 써라 하면서. 그리고 무슨 까티나 행사있다 그러면 그 스님들도 그 돈 가지고 그걸 내는 거라.
그렇게까지 하면서 스님들은 청정하게 이 몸을 유지할려고 한다는 거라. 근데 왜 재가자들은 자꾸 그걸 갖다 반대 방향으로 가려고 하느냐는 거라. 쉽게만 생각하지 말아라는 거라.
상가가 유지돼야만이 테라와다 불교는 존속을 합니다. 여러분들이 있게 되는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그걸, 스님 말은 충분히 일리는 있습니다. 지금도 스님 가사 많습니다. 근데 내 소유는 딱 세 벌밖에 없습니다. 나머지는 전부 상가 공동소유로 합니다. 누가 필요할 경우는 그 상가 공동소유를 갖다 줘야 돼. 실제로 내가 이렇게 많이 가지고 있지만은 소유를 안 만드는 거라. 그게 상가의 스님들이 사는 방식이라. 그 방식들을 되도록이면 해주라는 거라. 이해하겠습니까? (예)
돈을 갖다 주고 하는 것들은 되도록이면 개인 스님에게는 하지 말아라. 개인 스님에게 하지 말고, 차라리 상가 유지를 위해서 상가에게 드려라.
그래서 스님들에게 보통 일반 재가자들이 와서 저 테라와다 불교권에서는 스님들이 사원을 경영하지 않는데도 신도들은 와서 스님한테 뭔가를 줄라고 그럽니다. 그 사무실에 주려고 하는 게 아니고. 그러면 돈을 봉투를 가져오면 스님들이 물어봅니다. “이게 무슨 용도냐?” 하고 물어봅니다.
스님 개인적으로 쓰십시오, 할 것 같으면 스님이 인마이포켓 할 것이고, 그렇지 않고 이거 스님 절에 뭐 하는데 좀 쓰십시요, 할 것 같으면 거기다 기록을 합니다. 탑 보수용, 안 그러면 그냥 절에 있는 거에 다 할 것 같으면 그냥 사원용 해가지고 쓰고, 그럼 사원용 해 놓으면 뭐 절을 보수할 때 쓰든 만행을 갈 때 쓰든 뭘 하든 그건 관계없고, 그리고 사원탑 보수용 할 때는 그것도 마찬가지고, 그런 돈은 전부 다시 그 스님이 사무실로 갖다 줍니다. 개인적으로 가져야 될 돈과 사원에게 줄 돈을 분명하게 구분을 합니다. 그냥 그걸 갖다 자기가 임의 대로 마음대로 쓰는 것이 아니고. 그러는 판이기 때문에 여러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재정적인 것, 돈이라고 하는 것들은 되도록이면 스님들한테 주지 마십시오. 주지 말고 그 돈은 상가가 있어야만이 스님들이 존재를 합니다. 그건 틀림없습니다. 상가가 없으면 스님들은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이왕 테라와다 상가라고 만들어놨으면 테라와다 상가에 기증하라는 거라. 그럼 테라와다 상가가 뿌리를 내리게 되면 거기서 출가한 스님들도 만들고 뭐도 만들고 교육도 하고 해가지고 개개인의 스님들이 길러져서 여러분들에게 더 이익이 돌아가지는 거라.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고 자꾸 개인스님한테 뭘 갖다 줄라고 그러는 거라. 홀라당 다 닦아 써버리는데. 그럼 뭐하러 그러고 있느냐는 거라.
상가가 뿌리 내리지도 못하고, 그리고 그 스님은 그 스님대로 청정한 것들을 갖다 자꾸 거부하고 엉뚱한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는데, 한국 불교가 지금 망해가는 이유가 그것 때문입니다. 테라와다는 절대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그 방식을 따라서는 안 된다는 거라. 되도록이면 스님들은 재정적인 부분하고는 멀리 떨어지게끔 만들어주라는 거라. 이해하겠습니까? (예)
그럼 이제 돈 한푼 안 주겠다 인제.
(수행자 질문: 그런데 스님 테라와라 식으로는 깝삐야를 통해서 보시를 드리고, 깝삐야에게 돈을 주는 그런 형태로)
명목상은 그렇습니다. 명목상은 그런데 깝삐야 돈이 다 스님 돈입니다. 실제로 보면. 그래서 되도록이면 그 방식도 스님은 찬성하지를 않습니다. 깝삐야의 의미를 악용하면 안 됩니다. 지가 실제로 다 쓰면서 깝삐야가 관리를 다 한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라 그래. 그건 아닙니다. 그거는 다음에 깝삐야에 대해서 정의를 내가 다시 한번 내려드릴게요. 내려드리는데 그것도 똑같은 방식입니다.
가장 좋은 방식은 주지마. 주지 말고 스님들에게 딱 필요한 부분만 해주면 됩니다. 지금 스님이 부산에서 여기 오는데 특실 타고 다닙니다. 스님이 옆에 여자가 앉으면 안 되니까, 만날 4호차 3A 딱 지정돼 있어. 특실이거든. 3A는 한 칸짜리라. 한 칸만 돼 있는 거라. 내가 끊는 게 아니고 누군가가 끊어줘. 그러니까 항상 올 때 “스님 변동 없습니까?”
“음, 그대로 하면 돼” 하면 만날 그 4호차 3A. 이제 다 외우고 있어 아예. 그걸 항상 끊어주는 거라. 그러니까 나는 돈 안 들이고, 내 메시지로 휴대폰으로 그게 날아와요. 몇시 차 번호가 이렇게. 그럼 나는 그것 보고 그냥 타면 돼. 이렇게 되도록 만들어줘 보라는 거라. 만약에 여러분들이 스님들한테 보시하고 싶으면 그런 방식으로 쓰면 돼. 얼마나 좋아.
싸두 한번 하자. 사두! 사두! 사두!
한국 스님들은 아닙니다이. 그냥 편하게 받고 그 대신에 그걸 바르게 이용을 하시면 됩니다.
이왕 뭐 경제적인 거 하고 있는데, 그렇다고 그것까지 하지 마라 그럴 것 같으면 내보고 죽일 놈이라고 할 거고.
얘기하다가 시간이 또 많이 가버렸습니다. 111페이지 펴보시기 바랍니다.
아까 얘기했지만, 돌아가신 분께 회향하는 것이 공덕이 회향되는 곳이 있고 안 되는 곳이 있다고 얘기를 했습니다. 어떤 곳이 회향이 되는 곳이고 어떤 곳이 회향이 안 되는 곳입니까?
(수행자 대답: 회향되는 곳이 아수라라고 들었습니다.)
아니죠. 내가 언제 아수라고 그랬어? (수행자 대답: 아, 아귀)
아귀계죠. 아귀계 중에서도 빠라다뚜 빠지위까 뻬따(Paradatu-Pajivika Peta)라고 하는 그 아귀의 종류들. 지옥은 뭘 먹이로 해서 살아갑니까? 인간은 밥을 그걸 영양분으로 해서 살아갑니다. 그리고 인간은 그것 말고 영양분이 많죠? 마음도 영양분이고 업도 영양분이고 이런 것들이 영양분이지만, 지옥은 뭘 영양분으로 해서 살아갑니까? 고통.
쉽게 말하면 뭔가 원하는 게 많은데 그걸 내가 가질 수가 없어. 그러면 가질 수 없으면 괴롭잖아. 그런 사람들은 고통스러운 지옥에 태어나. 그럼 그 사람들은 그 원하는 것, 그리고 또 어떤 사람들은 악한 마음을 가지는 것, 그리고 남을 원망하는 것, 분노하는 것, 이런 것들은 다 고통스러운 것들입니다. 그걸 먹이로 삼아서 살아가는 곳이 지옥이라는 곳입니다.
여러분도 지옥 많이 경험하고 있죠? 스님도 가끔 경험합니다. 스님이라고 경험 안 하는 게 아닙니다. 단지 그 경험들이 오래가지 않는다는 것 뿐인 것이지. 부처님도 뭐 고통스러울 때는 고통을 경험했는데, 육체적인 고통은 어쩔 수가 없습니다. 그리 해도 뭐 그냥 고통스럽다 하고만 하고 그냥 또 넘겨버립니다. 그런 것뿐입니다.
지옥은 그런 그 고통스러운 것들을 먹이로 살아가면, 아귀는 뭘 먹이로 살아가겠어요?
원하는 것, 바라는 것! 물을 먹고 싶은데 우리 경전에 아귀가 어떻게 생겼다고 그래요? 배는 이따만한데 입은 이만해가지고 뭘 먹고 싶어도 먹질 못해. 입이 그렇게 생긴 거라. 물을 먹을 수도 없고 음식을 먹을 수도 없고. 그런 걸 보통 아귀계라고 그럽니다.
근데 사실은 아귀의 용어는 그런 의미를 가지질 않습니다. 인간의 상태라도 비천한 인간의 상태! 처음에 이 용어를 쓰기 시작한 게 아리안 종족들이 인도에 들어와 가지고 인도의 토착민들 그리고 하층민들을 부를 때 뻬따(peta)라고 불렀었습니다. 쉽게 말하면 비열한 종족 그리고 더럽고 불결한 종족이라는 뜻으로, 요즘 말할 것 같으면 거지 같은 경우 노숙자 같은 경우 이런 경우들이 해당이 되겠죠.
그분들은 어떻게 살아갈까? 지가 그걸 만들 능력이 안 됩니다. 그럼 남한테 구걸 해가지고 뭔가를 마련해야 됩니다. 그 방법밖에는 딴 도리가 없어. 지가 밥을 마련할 방법이 없는데 어떡할 거라. 그러면 어떡해? 남들이 주는 거 밥 먹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거라. 그러면 그 사람들은 뭐 거지들은 뭐 무차별적으로 아무한테나 가서 이렇게 구걸을 해 먹지만, 아귀계는 그게 아닙니다. 아무한테나 가서 할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어디 가서 구걸을 해 먹어야 되겠어요? 과거에 자기의 친지들밖에 없습니다. 인연 닿은 게. 그럼 친지가 ‘옛다. 먹어라’ 하고 던져주는 게 아니면 먹을 방법이 없어. 그럼 여러분들이 뭐 음식 차려놓으면 그거 와서 먹을 수 있어요? 못 먹죠. 그거 본 거 한 번도 없죠. 그럼 뭘 먹을 수 있어요?
내가 일으키는 마음! ‘아이고 당신이 옷 잘 입고 풍부하게 먹을 거 잘 먹고 그리고 행복하게 살기를’ 하는 그 마음으로 인해서 나는 먹을 수가 있고 옷을 입을 수가 있는 거라. 그게 아귀계라는 거라. 아귀의 먹이는 그거라.
나머지 세상은 해당 사항 없어. 지옥도 내가 던져주는 거 먹을 수 있는 방법이 없고, 아수라도 마찬가지고, 천상세계도 마찬가지고, 어떤 경우든지 다른 세계는 내가 주는 무언가를 마음을 가지고 먹고 살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그렇죠.
인간은 죽고 나서 다음 다른 인간으로 태어났다, 싸그리 내가 과거에 뭔지 잊어버리고 모릅니다. 그럼 내가 그 사람한테 ‘아이고 내 아들아’ 한다고 해가지고 압니까? 있을 수가 없습니다. 왜 그러냐면 이미 그 조건을 넘어서 버렸다는 거라. 먹이가 다르기 때문에 그렇다는 거라. 인간은 밥을 먹어야 되는데, ‘아이고 내 아들아 하는데’ 마음을 먹을 수는 있는 방법이 없다는 거라.
천상세계는 안 그럴 것 같아요? 천신들도 꼭 마찬가지입니다. 먹을 수 있는 건 자기들이 즐거움을 누리고 하는 그 느낌밖에 없습니다. 그걸 먹이로 사는 것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다 각각의 부류들은 먹이가 다 틀립니다.
그중에 아귀계는 먹을 수 있는 방법은 밥으로 먹을 수 있는 거는 과거 전생에 그리고 먼 친척이라고 하더라도 먼 조상들이 나하고 관계있는 사람들이 일으키는 마음! 그것밖에 없다는 거라. 그래서 제사를 지내는 겁니다. 쉽게 말하면 그 부류들을 위해서.
근데 내하고 관계된 부류 아귀계에 태어난 사람이 얼마나 될까? 육도 윤회 중에서 아까 얘기했지만, 그것도 아귀계의 일부인데 거기에 태어나는 친척들이 얼마나 될까?
보통 요즘은 3대까지 제사를 지냅니다. 그렇죠? 요즘은 이제 세월이 지나면 그것도 안 할지도 몰라. 이제 할머니 할아버지 2대까지만 지낼지도 몰라. 그전에는 3대가 아니라 뭐 7대까지도 지내고 했어. 어쨌든 그게 가족의 범주라고 치자. 그 범주에는 얼마 없을지 모릅니다.
근데 나란 놈이 윤회를 얼마나 많이 했겠어? 무수한 세월 동안 윤회하면서 나하고 관계된 친척 친지들은 항하수 만큼 아마 많을 거라. 그중에 일부가 아귀계에 간다 하더라도 아귀계는 진짜 엄청난 수, 내하고 관계된 사람들이 거기 있을 수밖에 없다는 거라. 그렇지 않겠어요? 그럴 것 같으면 내가 지금 실제로 돌아가신 분은 내 어머니인데 ‘어머니에게 공덕을 회향합니다’ 하는 마음을 낸 것들이 그 어머니에게만 해당이 되는 게 아니고, 그 아귀계에 있는 나와 관계된 사람들은 다 해당이 될 수 있다는 거라.
그러니까 어떤 경우든지 그 공덕 회향은 된다고 보면 된다는 거라. 회향이 안 될 수는 없다는 거라. 그래서 반드시 테라와다 의식을 할 때는 돌아가신 분께 공덕 회향 게송을 반드시 합니다.
(수행자 질문: 그거를 빨리어로 해야만 효과가 있나요? 지난번에 스님께서 이런 말씀을 해주셔 갖고 저도 그다음부터는 새벽 정진 후에 그 세세생생 윤회를 거듭하는 동안 인연되어진 모든 분 부모님께 회향합니다. 이걸 하거든요.)
전혀 관계없습니다. 빨리어로 하든 한글로 하든 영어로 하든 그거는 각자가 하면 됩니다. 중요한 것은 거기서 일으키는 마음입니다. 그 마음이 그 사람들에게 전달되는 것이지, 빨리어가 전달되는 법은 없습니다.
염송하는 게송을 읊는 일은 2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의미를 모르고 하는 거와 의미를 알고 하는 것.
테라와다의 방식은 어떠한 방식이든 의미를 알고 하는 방식을 취합니다.
그걸 빨리어로 하든 뭘 하든 간에 의미 없이 하는 것은 내가 결정할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그것은 재주, 쉽게 말하면 요령 잡고 있는 사람이 지가 알아서 선택해야 되는 것이지. 내가 쉽게 말하면 유족이면 유족이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그러면 내가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이 없는 것은 그것은 보통 뭐라고 불교에서 얘기하냐 하면 '주술적인 방법'이다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럴 것 같으면 되도록이면 의미 없이 하는 것보다는 의미를 알고 하도록 하는 것이 좋다는 거라.
그래서 독송할 때 저번에 몇 가지 방법에 대한 얘기를 한 겁니다.
자, 장례의식 간추려 보면 112페이지 보면,
스님에게 반드시 삼귀의와 오계를 받아라.
왜 받아야 될까요? 계를 지키는 공덕들은 생겨난다. 그리고 계를 지킴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선한 마음들 이런 것들을 지속적으로 일으킬 수 있기 때문에 나도 이익이고 이걸 만약에 회향하면 돌아가신 영가에게도 이익이고 그래서 삼귀의와 오계는 반드시 받아라.
그다음에 공양 올리는 게송, 돌아가신 이를 위해서 공덕 회향하는 게송입니다.
이 공양은 이 가사는 돌아가신 분을 위해서 내가 회향하기 위해서 공양 올립니다. 하는 그 게송을 반드시 하라는 거라.
그다음에 스님에게 가사 일상용품 음식 공양 등의 보시를 행하라.
그다음에 네 번째, 되도록이면 설법을 듣도록 하라.
이 설법은 테라와다 스님이면 반드시 해야 되는 것이 죽음에 관한 것. 그래서 마라나눗사띠에 대해서 얘기를 하든지, 죽음이란 이런 것이다 하고 얘기를 하는 것이든, 죽음은 확실한 것이다. 너도 반드시 죽게 돼 있다. 그래서 하루빨리 공부해라. 하루빨리 공덕 쌓아라. 하는 그런 내용들을 하든, 이런 내용들을 하게끔 되어 있다는 거라.
가장 좋은 것은 이런 것들이 없는 게 가장 좋습니다.
가장 좋은 것은 여러분들이 제사의식에는 들어가 있지 않은데, 누가 돌아가시려고 할 때는 스님들을 초청하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그래서 스님들이 그 죽음의 임종 순간을 맞이해주면서 마지막에 선한 마음을 일으키도록 해주는 것이 최고의 제사입니다. 최고의 제사입니다.
욕계에 태어나고 색계에 태어나고 무색계에 태어나고 윤회를 한다고 하더라도, 그리고 선처에 태어나고 악처에 태어나는 것은 스스로가 만드는 겁니다. 스스로가 그다음 세상을 결정하게 돼 있습니다.
그러면 스스로 일으키는 마음들을 좋은 방향으로 유도해 줄 수 있는 것은, 스님들이든 아니면 유족들이든 가족들, 가족들이 자꾸 선한 마음을 일으키게끔 만들어주고, 아니면 마음을 집중할 수 있는 방편들을 자꾸 마련해 주고. “숨 쉬어봐. 들이쉬고 내쉬고 같이 해보자. 들이쉼 내쉼 들이쉼 내쉼” 하다가 만약에 탁 죽었다. 얼마나 좋겠어? 그렇지 않으면 “석가모니불 한번 해보자. 석가모니불” 그러면서 죽었다, 그것도 얼마나 좋겠어?
또 스님들이 와가지고 “어차피 다 죽게 돼 있으니까 집착하지 마시오.” 하고, 그래 내가 이제 뭐 하는 마음을 가지고 집착하는 마음들 가족에 대한 근심걱정도 다 놓아버리고 편안하게 숨을 거두고, 그 얼마나 좋겠느냐는 거라.
그것으로 인해서 욕계 색계 무색계 선처 악처가 결정돼 버리는 거라. 그만한 제사가 어디 있어? 그건 뭐 뒤에 나중에 3일이고 뭐고 안 해도 된다는 거라.
그래서 여러분들이 돌아가시고 나서 3일째 아니면 뭐 7일째 스님들을 초청하는 것들도 중요하지만, 그것보다 더 좋은 것은 돌아가실려고 할 때 초청을 하라.
그다음에 다섯 번째, 무상게 게송 염불의 형태는 반드시 살아있는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게송이어야 된다. 이해하겠습니까?
공덕 회향 게송 밑에 있죠? 614페이지 그것들, 113페이지 가장 짧게 하는 것, "돌아가신 가족 친지들이 잘 살아가기를" "돌아가신 가족 친지들이 행복하기를' 하는 것 요런 걸 해도 되고, 다른 게송들을 해도 됩니다. 대부분은 이 게송들을 합니다.
아니면 "이당 메 다낭 뿐냐 바강 삽베 삿따" 이렇게 해도 되고, "이러한 공덕 지은 것들을 돌아가신 분께 회항합니다." 이런 식으로 해도 되고.
어쨌든 공덕 회향 게송들은 반드시 하라. 그렇지 않으면 빔비사라 같이 아귀가 나타나서 여러분들을 괴롭힐 것이다. 됐죠?
테라와다 제사의식 이제는 대충 여러분들이 알았을 겁니다. 그래서 앞으로는 거기에 맞게끔 해서 스님들을 초청해서 바르게 제사를 지낼 수 있도록 그렇게 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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