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수행법문 녹취/네 부류의 성인들 : 담마스쿨

네 부류의 성인들 2. 예류과와 일래과 (20060930)

담마마-마까 2020. 1. 28. 12:22

네 부류의 성인들 2. 예류과와 일래과 (20060930)

https://youtu.be/qRBu1VzDM7c 

 

오늘은 일래과까지 하도록 그렇게 하겠습니다.

한번 예류과부터 일래과 까지 쭉 다 설명을 할테니까, 그리고 예류과에 이르기 전의 과정들도 설명을 할테니까 잘 듣고 내가 이런 경험이 있었던가, 또 내가 어느 정도의 위치에 이르렀는가 하는 것들을 판단해서 수행하는데 더욱더 분발을 하시기 바랍니다.

 

도와 과에 이르기 위해서 필요한 조건들이 있다고 했습니다.

 

아무래도 선한 이들이 주변에 있어야 되겠죠. 선한 이들이 있어야 될 것이고,

또한 내가 수행하는데 채찍질해주고 인도해줄 만한 그런 스승, 스승이 또 있어야 될 겁니다. 그래서 잘못된 길로 빠져들어 갈 때는 나를 바른게 인도해주고, 또 잘된 길로 갈 때는 더욱 북돋아 줄 수 있는 그런 분이 있어야 될 겁니다. 그런 분들로 인해서 부처님 법을 자꾸 들을 수 있는 그런 계기가 되어야 할 겁니다. 이 두 가지는 여러분들 갖추어졌습니까? 그러면 일단 도와 과에 필요한 조건들 두 가지는 갖춰진 거죠!

 

그다음에 세 번째로 필요한 것이 뭐냐면 적당하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너무 과하지도 않고 적당하게 내가 닙바나를 이루겠다 하는 결심, 그런 결심들을 가지고 있어야 됩니다. 또한 내가 이런 행동을 하면 남에게 손가락질을 받고 내 자신이 과보를 받는다는 생각을 가지고 자제하는 것이 있어야 됩니다. 그런 것이 바로 적당하게 생각한다 하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적당하게 대충 마무리를 짓는다는 것이 아니라, 그런 마음가짐을 가지고 행동들이나 말들이나 생각들을 자제해나갈 때, 모양새를 갖추어 나간다는 그런 뜻입니다. 그랬을 때 도와 과에 이를 조건들이 된다 하고 얘기합니다.

 

그다음에 필요한 것이 뭐냐면 닙바나를 얻기 위해서 적당한 수행을 해야 된다.

앞에 부분들이 아무리 갖추어졌다 하더라도 수행하지 않을 거 같으면 수다원 이상응 성취를 하지 못합니다. 반짝 닙바나를 체험했다 해서 그다음에 나아가야 될 길을 모른다고 할 거 같으면 마찬가집니다.

 

예를 한번 들어봅시다.

예류과에 이르고 나면 그다음에는 어떻게 수행해야 된다 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좋은 도반들에게 얘기도 듣고, 또 지도할만한 스님들에게 법문도 듣고 또 가르침도 받아서 요렇게 요렇게 가라. 그리고 내가 이런 마음을 꼭 가져서 내가 바른길로 꼭 걸어가야겠다 하는 그런 자제심도 가지고, 또한 바른길로 꼭 걸어가려고 노력을 하고, 또한 내가 이것으로 인해서 완전하게 닙바나에 들겠다 하는 마음을, 결심을 가지고 이렇게 해야 만이 그 길을 계속해나갈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고 그냥 수다원을 듣기만 해서 아니면 법을 지극정성으로 알기만 해가지고 수다원에 들었다고 하더라도 그다음 단계를 넘어가지 못합니다. 물론 열반은 일시적으로 체험은 했습니다.

이 열반을 체험한 거를 어떻게 체험했는지를 모른다는 거라.

그리고 그다음 넘어가는 단계를 모른다는 거라.

일어나고 사라지는 지혜부터 다시 시작을 해야 되는 건지, 아니면 사라짐의 지혜부터 시작을 해야 되는 건지, 아니면 놓아버리는 지혜부터 시작을 해야 되는 건지, 아니면 그걸 다 놓아버리고 다른 부분부터, 삼매에 빠지는 것부터 시작을 해야 되는 건지 전혀 모른다는 거라. 똑같은 상태로 다시 돌아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됩니다.

맨 처음 도에 이르는 분들은 많이 있습니다. 순간적으로든, 아니면 진짜 그 길에 들어서 변함이 없게 됐든. 근데 그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걸 헛되이 시간을 보내는 경우들이 태반이라는 얘깁니다. 여러분들은 적어도 그랬을 때는 '아, 내가 이런 상태구나' 하는 걸 갖다가 잘 판단을 해야 됩니다.

 

수행을 해나가면서 어떤 징후들이 있고 어떤 경험들을 많이 했을 겁니다.

도를 내가 얻었을 때 어떤 징후들이 있습니까? 예를 한번 들어봅시다.

 

닙바나(nibbāna), 닙바나 그렇게 얘기합니다. 닙바나가 뭡니까? 어떤 상태입니까?

한마디로 딱 집어서 얘기하면 닙바나의 상태라는 것은 스님이 가장 많이 쓰는 용어입니다. 산띠(santi)! 산띠 아십니까? 평화로움!

예. 산띠! 산띠끼리, 산띠아소 그런 얘기들을 많이 합니다.

닙바나를 얻었을 때의 징후들은 그런 몸과 마음으로부터의 평화로운 상태를 경험하게 돼있습니다. 그런 특성들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할 거 같으면 그것은 내가 닙바나를 체험하지 못했다고 보시면 됩니다.

 

또 하나는 뭐냐면 반드시 정신적인 소멸과 육체적인 소멸을 경험합니다.

아무리 내가 알아차릴려고 하더라도 이 몸을 볼 수가 없습니다. 완전하게 소멸됐다는 사실만 아는 것뿐이라. 수행을 하다 보면 가끔씩 그런 경우들을 경험을 하죠?

호흡을 일어남 사라짐 관찰하려 해도 그러한 관찰하는 마음조차도 없어져 버리고 관찰하는 몸조차도 사라져버리는 상태. 그런 거 가끔씩 경험합니까? 그럼 공부를 좀 더 하십시오. 그러한 상태들이 보통 일반적으로 아, 이것이 닙바나구나 하고 얘기를 합니다.

가끔씩 사람들이 착각을 합니다. 닙바나가 열반이잖습니까?

 

열반은 보통 유여열반과 무여열반으로 나눕니다.

여러분들은 어떻게 알고 있습니까? (수행자 대답)

유여열반이라고 하는 것은 열반의 상태이지만 즐거운 느낌과 괴로운 느낌을 아는 상태입니다. 오온이란 것이 있기 때문에.

근데 무여열반이라는 것은 아무리 경험할려고 해도 경험하지 못하는 상태.

오온은 있습니다. 이 몸은 살아있는 상태입니다. 죽음 이후의 얘기를 하는 것이 아니고, 열반을 죽음 이후로 얘기할 것 같으면 부처님이 무여열반 유여열반으로 나눠놓을 이유가 하나도 없습니다.

 

무여열반이라는 개념자체를 여러분들이 정리할 필요가 있습니다.

실제적으로 열반을 경험할 때는 유여열반을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무여열반을 경험합니다. 니로다사마빠띠(nirodha-samāpatti) 해가지고 멸진정(滅盡定)에 든 상태. 멸진정 든 거 혹시 아십니까?

(수행자 대답) 그렇게들 보통 얘기를 합니다.

아비담마만 공부하는 사람들의 병폐가 뭐냐하면 바로 그런 부분입니다. 멸진정이라고 하는 것은 그런 뜻으로 쓰여지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아비담마에는 불환과 이상에 이르고 아라한일 때 경험하는 상태라고 그럽니다.

 

그럼 멸진정하고 무여열반의 차이점이 뭡니까? (수행자 대답)

내가 수행을 하다가 호흡조차도 끊어져버리고, 육체적인 현상도 소멸해버리고, 그걸 관찰하는 마음조차도 정신적인 현상도 소멸해버린 상태, 그 상태가 멸진정의 상태입니다. 그런 상태가 곧 무여열반의 상태입니다. 이해하겠습니까?

(수행자 질문) 아닙니다. 도과에 이르렀을 때.

그래서 닙바나를 체험한 상태를 수다원이라고 얘기를 합니다. 적어도 수다원에 이르른 자들에게 나타나는 것이 이 무여열반입니다. 불환과 이상을 이르른 자만이 도달하는 경지가 멸진정이 아니라, 예류과 이상에 이르러도 멸진정은 경험을 합니다.

 

하나 더 예를 들면 아비담마의 해석대로 할 거 같으면 구차제정(九次第定) 이라 해서 아홉 가지를 해놔 놓고 마지막에 멸진정이라는 부분을 애기해놓았습니다.

그런데 순수 위빳사나를 하는 분들은 앞에 네 부분만 합니다. 뒤에 네 부분 무색계 부분은 경험을 안 하는 것이 거의 대부분입니다. 그리고 멸진정 자체도 경험 안 하는 분들이 대부분입니다.

부처님이 얘기한 아라한이라는 분들을 쭉 살펴보면 거의 오백 명 정도를 아라한에 들었다 하고 부처님이 얘기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수행자 질문)

아, 개개인으로 얘기할 때, 그러니까 몇 분이 아라한에 들었다, 오백 명이 아라한에 들었다 이런 거 말고, 개개인이 누구는 아라한에 들었다 라는 걸 얘기를 했을 때의 얘기를 하는 겁니다. 보통 통상적으로 한 오백 명 정도 잡습니다.

그중에서 멸진정을 경험해 본 분은 한 육십몇 명밖에 없습니다. 나머지는 그 상태 없이 바로 아라한이 된 상태들입니다.

 

그러면 아비담마의 논리대로 할 거 같으면 멸진정을 경험해 보지 않았을 거 같으면 예류과에 들지도 못했고 일래과에 들지도 못하고 바로 불환과에 들어야 된다는 얘깁니다. 아비담마의 논리대로 할 거 같으면 부처님 재세시의 그 제자들은 상당한 모순들을 가지고 있게 된다는 겁니다.

사실은 그런 상태가 아니고 사마타 수행을 경험한 사람들은 멸진정을 경험합니다.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그 경험 없이 바로 넘어가지게 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착각을 하는 경우들이 뭐냐면 열반의 경험에서 유여열반과 무여열반의 개념들이라 하는 겁니다.

무여열반이라는 것은 죽음 이후에 일어나는 완전한 열반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있는 동안에 모든 느낌들, 모든 정신적인 현상들, 모든 육체적인 현상들 이런 것들이 전부 소멸된 상태, 이런 상태를 무여열반의 상태다 하고 얘기합니다.

 

그래서 무여열반에 드는 자들은 예류과에 들고나면 동남아시아에서는 그다음에 지도하는 방식은 어떻게 하느냐면 "서원을 세워라" 그럽니다.

아딧타나(adhiṭṭhāna)를 하라 그럽니다. 어떻게 세우느냐 하면 "내가 이 이후에 십 분 동안 단 십 분 동안이라도 완전한 열반의 상태로 있겠다 하는 걸 마음속으로 다짐하라" 그럽니다.

물론 그렇다 해가지고 꼭 그렇게 되는 경우는 없습니다. 그런데 그런 서원들로 인해가지고 마음이 다시 잡아진다는 겁니다. 그렇지 않을 거 같으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떻게 하느냐면 처음부터 '일어남' '사라짐' '일어남' '사라짐' 합니다.

열반을 체험해서 예류과에 들어서 세 가지 족쇄가 떨어져 나갔다고 하더라도, 감각적인 욕망과 화내고 하는 것들이 남아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처음부터 다시 시작을 한다는 거라. 그래서 예전에 겪었던 경험들을 다시 고스란히 밟고 올라가는 경우들도 있고, 또 중간에서 포기를 해버리는 경우들도 있고, 그래서 "반드시 수다원에 이르르게 될 거 같으면 서원을 세워라" 하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수행자 질문)

아라한을 얘기합니다. 완전한 열반을 얘기하는 겁니다. 완전한 열반에 들 때까지 내가 끊임없이 노력을 하겠다 하는 그런 마음을 가지고 '내가 십 분 동안 아니면 십오 분 동안 몸과 마음의 현상이 소멸된 상태로 있겠다' 하는 걸 서원을 세우라 그럽니다.

(수행자 질문)

예, 열반을 경험했지만 다시 열반의 상태로 계속 있는 것은 아닙니다.

(수행자 질문)

예, 예류도는 그거는 확신만 가지고 있어도 되는 것이고, 그렇게 법에 대한 확신만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예류도가 됩니다.

쉽게 예를 들면 여러분들이 수행할 때 '일어남' '사라짐' 하면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에 대해서 명확하게 알아차리고만 있다고 하더라도 그 상태가 벗어나지 않고 외부적인 조건들이 소리가 들리든 아니면 눈에 보이든 그리 하더라도 거기에 마음이 쏠리는 것이 아니고 일어남 사라짐의 상태만 계속 유지를 시켜나간다고 할 것 같으면 그건 예류도 입니다. 분명히! 그렇기 때문에 그거는 닙바나 하고는 관계가 없는 상태이고.

 

일단 예류과부터 얘기합니다. 예류과는 열반을 체험한 상태이기 때문에 그런 상태에서는 반드시 그런 서원을 세워서 '몸의 현상이나 마음의 현상이 소멸된 상태 열반 닙바나의 상태를 십 분 동안 내가 경험하겠다 하는 서원을 세워라' 합니다. 그러고 나면 십 분 동안 열반의 상태를 체험하고 다시 또 그다음에는 십오 분, 이십 분, 이십오 분, 한 시간, 두 시간 이렇게 자꾸 늘려나갑니다.

 

그렇게 늘려나가다가 그게 조금 자유롭게 진행이 될 거 같으면 내가 의식을 되찾는 시간, 의식을 되찾는 시간을 아딧타나(adhiṭṭhāna) 하라 그렇게 얘기합니다.

일반적으로 열반의 상태에 있다, 아라한이 되기 전의 얘기입니다. 혹시 여러분들이 잘못 이해할까 봐서. 아라한의 상태는 이미 오온을 그대로 가지고 있으면서 즐겁고 괴로운 느낌들을 아는 상태입니다. 그거는 일상적으로 깨어있는 상태입니다. 그 상태를 얘기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수행에서 멸진정에 들어있는 상태, 조금 전에 얘기했던 무여열반과 거의 흡사한 상태를 얘기합니다.

 

그런 상태에 들은 상태에서 내가 깨어날 시간과 어떨 때 깨어나야 된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있느냐는 거라. 없거든. 그래서 서원을 먼저 세워라 그럽니다.

깨어날 시간을, 그리고 깨어날 때를 명시를 하라.

나중에는 일주일을 가는 경우들도 있고 그렇기 때문에, '부처님이 나를 부른다든지, 아니면 내가 포살을 할 때가 된다든지 이럴 때는 내가 반드시 일어나야겠다 하는 걸 명시를 해라.' 그렇지 않으면 그 상태가 지속적으로 오래 될 수가 있다 하는 거라.

 

도를 얻었을 때의 특징들은 이런 특징들이 점차적으로 일어나집니다.

지금 예류과에서 일래과로 가는 과정들을 얘기하는 겁니다. 그래서 예류과까지는 수행이 없더라도 충분히 가능한데, 예류과 이상은 이렇게 수행이 없으면 법을 듣는 것만으로, 어떤 확신을 가지는 것만으로는 더 이상 발전을 못한다 하는 그런 얘깁니다.

 

그다음에 또 하나의 현상들 증후들이 뭐냐 하면 일어나고 사라지는 마음의 과정들이 너무나 빨리 일어나집니다. 거의 화살 지나가듯이 찰나적으로 일어났다 사라져버립니다. 그렇게 합니다. 그렇게 하는데 그걸 아는 상태는 여러분들 같은 경우에는 만약에 빛이 번쩍번쩍 할 거 같으면 굉장히 마음이 산란하고 그럴 겁니다. 그런데도 그걸 그대로 관찰하고 있는데도 마음이 아주 차분하고 엄숙하다 하는 상태로 관찰하고 있다는 것을 내가 아는 거라.

진행되는 현상들에 대해서 아주 빠르게 일어나지만 그것을 그대로 관찰하고 있는 상태에서, 마음이 이렇게 차분하게 진행이 된다고 할 거 같으면 아, 내가 이 정도의 경지에는 이르렀구나 하고 스스로 판단을 해도 됩니다.

도를 얻었을 때 일어나는 기능들이 바로 그런 것들이 일어나지게 돼있다 하는 겁니다.

 

그다음에 하나는 뭐냐면 몸의 현상 그리고 움직임들, 생각의 움직임, 이런 것들이 전부 사라져 버립니다. 호흡을 관찰하는 것조차도 이미 끊어진 상태에서 몸을 아무리 관찰을 해도 몸이 없습니다. 이미 사라져버린 상태가 됩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공중에 붕붕붕붕 떠 있다든지 이런 상태는 아닙니다.

이런 때가 되었을 때는 아, 내가 도에 대해서 적어도 닙바나를 한 번 정도는 체험했구나 하고 확신을 가져도 됩니다. 이해하겠습니까?

 

적어도 그 상태까지 올라가야 만이 그다음 단계로 넘어가기가 수월합니다. 여러분들이 만약에 그러한 상태를 경험하지 못했다. 또 그러한 상태가 되지 못했다 할 거 같으면 다시 열심히들 노력들을 해야 됩니다.

이러한 상태에 이르렀을 때는 조금 전에 얘기한 아딧타나를 세워라 하고 얘기합니다.

 

그 서원을 세우는 효과들은 어떤 것이냐 하면,

예류과에 이르렀다 해서 욕망이 없는 상태는 아니다 라는 거라. 그리고 계속 수행해나가는 것은 아닙니다. 그냥 헐레벌떡 살아갈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다음 수행할 때 경우가 확실하게 달라집니다.

그다음 수행해나갈 때는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을 알아차리는 지혜부터 들어가지는 것이 아니라, 생멸의 지혜부터 바로 들어가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호흡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이 끊임없이 일어났다 사라지는 것이 아주 빠르게 일어났다가 사라진다는 사실,

(수행자 질문) 예. 과정입니다. 아직은 아닙니다.

그러한 생멸의 지혜 그걸 보통 우다얍바야냐나(udayabbayañāṇa) 라고 합니다. 우다얍바야냐나 부터 시작을 할 수 있게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소멸의 지혜, 그다음엔 두려움의 지혜 이런 식으로 쭉쭉 넘어가져서 평등이나 적응의 지혜를 거쳐서 일래과-사다함으로 이르르게 됩니다.

 

그래서 반드시 내가 그런 경험들을 한 사람들은 일차적으로 서원들을 세워야 됩니다. 그러한 열반을 체험한 것은 언제든지 다시 올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마음속으로 내가 이러한 상태에서 반드시 '이십 분 동안은, 이십오 분 동안은 반드시 열반의 상태를 경험하겠다' 하는 서원들을 반드시 세우고 시작을 해야 됩니다.

 

여러분들한테 처음에 수행할 때 어떤 서원들을 세우라고 그럽니까?

"이 몸이 부서진다고 하더라도, 이 살과 피가 다 마르는 한이 있더라도 이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고 수행을 하겠다 하는 마음을 가지라"고 그렇게 얘길 하죠. 그 얘기는 "오롯이 수행할 때는 수행만 해나가겠다는 마음을 먼저 가지라"는 얘깁니다. 그런 마음으로 인해서 수행에 진척이 있어진다는 거라.

예류과에 들어서 일래과로 갈 때도 반드시 이런 서원들을 가져야 된다는 거라.

 

그리고 또 하나 서원을 세워야 되는 것이 뭐냐면, "이 전에 경험했던 것들은 전부 다 버려버린다" 하는 마음을 서원을 가져야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느냐면 깨달음에 대한 것에 딱 걸려버리고, 이 수행에 대한 것으로 딱 걸려서 넘어가지지를 않습니다. 꼭 여러분들이 지금 위빳사나가 최고다 하는 생각에 딱 걸려가지고 다른 것이 귀에 안 들어오게 되는 경우 하고 꼭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그렇죠? 안 그렇습니까?

그런 생각조차도 안 들면 공부조차도 아예 안 했다는 얘기지. 나중에는 들게 돼있습니다. 가끔씩 여러분도 경험을 한번 보십시오. 불교 신도 중에서 절에서 삼십 년 사십 년 다녔다 하는 사람들이 가지는 마음들, 좀 이해가 됩니까?

 

거기에 딱 걸려버린다는 거라. 걸려버리면 어떤 것도 그다음 단계로 넘어가지지를 못합니다. 물론 가끔씩 넘어가집니다. 그런데 아주 진척이 늦게 돼있고, 다시 처음부터 하는 결과들을 가져오게 됩니다. 여러분들도 가끔씩 앉아서 수행할 때는 너무 수행하겠다는 마음을 강하게 낼 거 같으면 집중력이 흩어져버립니다. 그래서 너무 강하게 내는 것도 사실은 수행에 방해가 되는 경우들이 많이 있습니다.

어쨌든 아직은 배우는 상태입니다. 특히 여러분들은 더 배울 것이 많은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방해가 되는 부분들은 반드시 피해야 됩니다.

 

수행을 할 때 어떤 것이 방해됩니까?

수행을 하는데 어떤 것이 방해가 됩니까? (수행자 대답)

사마타를 하든 위빳사나를 하든 어쨌든 수행을 하고 있단 말입니다.

그런 것보다 여러분들이 먼저 알아야 되는 것은 뭐냐면 일하기 좋아하는 것! 수행에 가장 큰 장애입니다. 뭐 음식 만드는 것 좋아하고, 어떤 사람은 바느질하는 거 좋아하고 뭐 이런 것들을 얘기합니다. 이런 것들은 수행에 가장 큰 장애중에 하나입니다. 그런데 그걸 안 할 수가 없죠? 안 할 수가 없는데 그것은 방해요인이라는 사실은 분명하게 자신이 알아야 됩니다. 그래야 거기에 맞게끔 상황을 퇴치해나갈 수가 있다는 거라.

(수행자 질문)

예. 즐겨한다는 것, 즐겨찾는다는 것, 그래서 가만히 있어도 되는데도 뭔가를 만들어야 되는 거라. 이렇게 보면 남이 옷이 떨어졌다 하면 자기가 그냥 기워 입으면 되는 건데 그걸 보고 “아! 내가 기워줘야 된다” 하면서 일하기 좋아하는것. 일단 그러한 마음들을 먼저 버려버려야 됩니다.

 

그다음에 두 번째가 뭐냐 하면 말하기 좋아하는 것! 말하는 것. 말하는 걸 좋아하는 것도 반드시 경계를 해야 됩니다. 잡담 뿐아니라 법에 대한 얘기도 그런 걸 쭉 하는 것들도 얘기하는 겁니다.

 

그다음에 하나는 뭐냐면 잠자기 좋아하는 것!

그것만 피해버리면 수행하는 데는 아주 적당한 조건들을 갖추게 됩니다.

 

한번 보십시오. 여러분들 주변에 그 세 가지 빼고 나면 뭐가 있는가?

(수행자 질문) 아니죠. 그걸 하더라도 알아차림을 견지하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 수행을 할 때 알아차림의 대상을 뭐 어떤 걸 잡습니까? 특별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는 것들을 알아차림의 대상으로 잡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걸을 때는 어차피 걸을려면 다리가 왔다 갔다 해야 됩니다. 그러면 그거를 하는 거고, 앉아있으니까 지가 알아차리든 안 알아차리든 호흡이 왔다갔다 하니까, 잡다하게 생각하지 않는 것, 특별하게 뭔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을 알아차림의 대상으로 잡아라 하는 거라.

걷고 서고 앉고 눕고 하는 이런 것들, 그게 여러분들 일상생활입니다. 일상생활이라도 맨 처음 시작할 때는 알아차림의 대상을 그런 것으로 잡아라는 거라. 잡다한 생각이 필요 없는 것즐, 특별하지 않은 것들.

 

그게 전부인데 사람들은 그 전부를 가지고 자꾸 만들어내려고 하거든. 일 할려고 하고, 아니면 말 할려고 하고, 안 그러면 게을러지려고 하고 그 부분을 방어하라는 뜻입니다. 그 부분을 방어할 거 같으면 수행하기에는 가장 적당한 조건들을 먼저 갖추게 됩니다. 이것이 여러분들 일상생활입니다. 그래서 '아, 이것은 수행을 하는데 방해가 된다' 하는 사실을 먼저 여러분들이 알아차려야 됩니다.

 

「마힐리경」이라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 스님이 경을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부처님이시여, 무엇이 더 높고 더 훌륭한 법들이며, 이것들을 깨닫기 위한 원인으로 수행자들은 부처님에게서 어떤 종교적인 삶을 삽니까?”

“마힐리여, 여기 한 수행자가 세 가지 상요자나(saṃyojana) - 세 가지 속박들을 제거함으로 인해 결코 악처에 떨어지지 않으며 최상의 깨달음을 얻도록 확정되어진 예류과이다.

마힐리여, 실로 이것이 더 높고 더 훌륭한 법들이며, 이것을 깨닫기 위한 원인으로 수행자들은 나에게서 종교적인 삶을 살아가느니라.

마힐리여, 여기 한 수행자가 세 가지 속박들을 제거함으로써 탐·진·치를 줄임으로써 일래과에 이르느니라.

마힐리여, 실로 한 번 더 이 세상을 돌아온 후에 고통의 끝을 만드느니라.

더 나아가 마힐리여, 한 수행자가 다섯 가지 낮은 속박들-오하분결을 제거함으로써 이 세상으로부터 다시 돌아오지 않는 화생자에 이르느니라. 화생자는 불환과를 얘기합니다.

더 나아가서 마힐리여, 한 수행자가 번뇌들을 제거함으로써 번뇌 없는 마음의 해탈과 지혜해탈을 지금 이순간 특별한 지혜로 스스로 깨달아 성취하여 머무르느니라. 이러한 자는 아라한이니라.”

 

하고 얘기합니다. 그래서 이 마힐리가 부처님한테 물어봅니다.

“부처님, 이러한 법들을 깨닫기 위한 방법과 길은 무엇입니까?” 라고 얘기합니다. 부처님이 뭐라고 얘기했겠습니까?

 

자! 여기서 여러분들이 알아야 되는 것은 뭐냐 하면 '특별한 경험'을 얻을려고 노력 하지 말아라 하는 겁니다.

여기도 나왔지만 오하분결, 그다음에 열 가지 상요자나-열 가지 족쇄를 의미합니다. 내가 과연 몇 개가 떨어져 나갔는가? 그걸 판단기준으로 삼아야 됩니다.

 

특별한 경험을 수행의 잣대로 잡으면 대부분 수행하는 사람들은 그걸 쫓아가버립니다. 거의 100에 99명은 그걸 쫓아가 버립니다. 간혹 한두 사람만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지, 그렇지 않으면 그 자리로 다 쫓아가버립니다.

(수행자 질문) 사마타 쪽이 강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건 민족적인 기질들이 차이가 나기 때문에 그럽니다. 그렇다고 밖에서도 그런 것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삼매에 들면 얼마 전 태국에서도 그랬죠. 물 위에 붕붕붕붕 떠 있으니까 사람들이 난리들을 쳤습니다. 우리나라에 우담바라 폈다고 그러면 난리가 나죠. 사람만 특별한 경험을 쫓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일상사들도 특별한 것들을 쫓는다는 거라. 그건 아니죠! 그 절이 좋은 절인가 안 좋은 절인가 하는 것은 건물이 잘 지어져 있다고 해서 그렇게 판단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 사람이 좋은 사람인가 안 좋은 사람인가 하는 것은 이 사람보다 신통력이 있다고 그렇게 얘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얼마만큼 바른 마음을 내고 바른말을 하고, 바른 행동을 하는가 이걸 보고 아, 저 사람 좋은 사람이다 판단들을 합니다. 내가 족쇄가 몇 개가 떨어졌나에 따라서 그렇게 나아가지게끔 됩니다.

 

여러분들도 탐·진·치의 소멸로 이끄는 수행을 해야 되는 것이지, 특별한 것을 쫓도록 그렇게 하면 안됩니다.

반드시 경전을 봐라 하는 것이 그런 이유 들입니다. 경전을 본다는 것은 내가 얼마만큼 수행의 진전이 있었는가를 확인하라는 그런 의미입니다. 그걸 문자식으로만 받아들여서는 안된다 하는 겁니다.

 

자! 그러면 왜 우리는 이렇게 알아차림이라고 하는 공부를 해야 되는가?

왜 해야 됩니까?

(수행자 대답) 예, 맞습니다. 깨어있는 상태를 지속하기 위해서.

딱 한마디로 얘기하면 알아차림은 불교의 핵심입니다. 그거 이상 없습니다. 아무리 구구절절이 뭔 얘기를 한다 하더라도 그거 이상 없습니다.

내가 불자라고 할 거 같으면 불교의 핵심은 알아야 되는 거고, 그것을 깨쳐나가야 되는 것은 당연한 겁니다. 그거 빼놔놓고 뭘 하겠다는 거라? 그렇죠!

 

보완적으로 얘기하면 알아차림이 있을 거 같으면 계를 범하는 것이 적어집니다. 나쁜 마음이 일어나더라도 나쁜 마음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알면 다시 돌아오게 돼있다는 거라. '아, 내가 이러면 안 되지' 자기 자신이 스스로를 비판해서 제자리로 돌아오게끔 만들어준다는 거라. 외부적으로 해서 돌아오게 만드는 거하고 자기 스스로 돌아오는 거하고는 큰 차이가 납니다. 스스로를 돌이킬 수 있는 방법은 알아차림 밖에 없습니다.

 

그다음에 두 번째가 뭐냐면 이 알아차림이라고 하는 것은 열기를 식혀주는 역할을 합니다. 들끓어있는 격정들과 정반대의 입장으로 나아간다는 겁니다. 욕망이나 미움 같은 것들이 일어난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제어해주는 제어력을 갖는다는 그런 의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반드시 알아차림을 공부를 해야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불교의 핵심을 알기 위한 선행조건입니다. 필수적인 조건입니다. 그거 없이는 아무것도 못합니다. 안됩니다. 불교도라고 할 거 같으면 누구든지 계정혜를 배워라 하는 것은 누구든지 알고 있습니다. 근데 사띠 없이 됩니까? 안됩니다. 어떤 것도 안됩니다.

 

이런 알아차림을 견지를 해나가면 많은 이익들이 일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어떤 겁니까? 가장 먼저 일어나는 게 통찰력입니다. 알아차리면.

'아, 이건 이렇구나, 저건 저렇구나, 이건 이래서 안 되는구나, 저건 저래서 안 되는구나' 내 스스로 통찰력을 가지게 된다는 겁니다.

그다음에 '딧티 깜미까따' 라 해서 이 세상에서 바로 누릴 수 있는 이익, 행복입니다. 행복함 만큼 좋은 것은 없습니다. 그것도 이 세상에서! 수행을 통해서 알아차림이 증진해나가면 이런 이익들이 있습니다. 이 생애서 행복하고 또한 통찰력이 있어져서 다른 길로 벗어나지 않게끔 만들어주는 것! 사실은 살아가면서 이것 이상 가는 게 없습니다. 그거 이상 뭘 더 바랄 거라.

 

자! 그러면 이런 「알아차림 수행을 하기 위해서 전제되는 조건들」이 있습니다.

그걸 보통 「집중하는 네 가지 길」이다 하고 얘기합니다.

맨 처음에 필요한 것이 찬다(chanda)라고 그럽니다.

찬다가 뭡니까? (수행자 대답) 음, 열망하고는 조금 다르죠.

'바램, 바라는 것' 이런 것들이 찬다입니다. 원하는 거하고는 좀 다르죠. 욕망이 들어가져서, 갈망하고는 다릅니다. 저번에 스님이 심소 부분 할 때 얘기를 조금 했습니다. 순수하게 바라는 것입니다.

쉽게 예를 들어봅시다. 수행하기 위해서 배에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관찰하라고 얘기를 합니다. 그런데 여기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지 않으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이 안 됩니다. 쉽게 말하면 일차적으로 여기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도록 만드는 겁니다. 누구든지 나를 볼려고 할 거 같으면 저 멀리에 있는 사람이 나를 볼 수 있게끔 관심을 가지게끔 만들어나가야 될겁니다. 그것이 바로 찬다 라는 그런 뜻입니다.

(수행자 질문) 네. 열의라고도 합니다. 그런데 보통 열의보다는 '바램'이라는 용어를 많이 씁니다.

그래서 어떤 대상을 알아차릴려고 할 거 같으면 맨 먼저 필요한 것이 이 찬다입니다. 친근해야 되는 것이지 하기 싫은 대상이 돼버려서는 안 된다 하는 겁니다. 뭔가 내가 하고자 하는 마음들이 일어나게끔 만들어주는 것들이라는 그런 뜻입니다.

 

어차피 여러분들은 알아차리든 알아차리지 않든 호흡은 죽을 때까지 하게 돼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또 어차피 나는 죽을 때까지 행동을 해야 됩니다. 또 죽을 때까지 말로 해야 되는 거고, 뭔가를 봐야 되는 것이고, 들어야 되는 것이입니다. 끊임없이 이것은 해야 되는 겁니다. 어쨌든 이런 것에 대해서 아, 이런 것이 있구나 하는 사실에 대해서 알아야 됩니다. 관심을 가져야 됩니다. 그런 관심을 가지는 걸 뭐라 그러느냐면 '찬다'라고 그럽니다.

이것이 바로 수행대상이다 하는 생각을 먼저 가져야 만이 거기에 대해서 싫어하는 마음을 일으키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다음에 뭐냐 하면 위리야(viriya) 라고 그럽니다. 노력이죠! 정진, 노력입니다.

호흡을 예를 들면 호흡을 들이쉬고 내쉬는 것에 대해서 집중할려고 하는 것, 이것을 위리야라고 그럽니다. 아까 관심을 가진 것에 대해서 그것을 이게 뭔가 하고 집중할려고 하는 것 이것이 위리야다 하는 겁니다.

수행대상은 각각 널려있습니다. 온천지가 수행대상입니다. 그런 수행대상이 과연 이게 뭔가 하고 관심을 가지는 것에 대해서 그 하나의 대상, 하나의 대상을 집중하는 것! 뭐 여러 가지를 같이 쭉 다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대상 대상별로 집중하는 것들!

 

조금 전에 찬다 부분에서 관심을 가진다는 것은 뭐냐면 이런 대상들에 대해서 친근함을 가지는 것인데 그것은 불특정입니다.

근데 위리야라고 하는 것은 그런 불특정에서 특정한 대상으로 옮겨가는 현상들이라고 생각을 하면 됩니다. 그래서 그 특정한 대상에 대해서 뭔가 하고 집중하는 그런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 하는 겁니다.

 

그다음에 필요한 것이 뭐냐면 여러분들이 가장 많이 알고 있는 사띠(sati) 부분, 사띠, 알아차림! 그 대상에 대해서 명확하게 집중을 해야 만이 이게 뭔가 하는 걸 압니다. 대상에 대해서 집중을 하고 있지만 흐리멍텅 해버리면 그 대상을 식별을 못합니다. 그래서 사띠가 다른 것보다도 더 중요하다고 얘기하는 겁니다. 그 대상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지 않든 아니면 관심을 가지든, 아니면 그 대상에 대해서 집중을 하든 집중을 하지 않든, 마음에서 좋고 싫은 감정들이 일어나지를 않습니다.

 

근데 사띠를 알아차림으로 해서 그다음 일어나는 것들이 뭡니까? 명확하게 인식을 하고 나면 그다음에는 사람들은 반드시 좋고 싫은 것들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사실은 여기에서부터 수행은 시작이 됩니다.

그것을 어떻게 끌어내느냐 하는 것이 수행의 포인트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래서 알아차리고 나면 그것을 완전하게 '아, 이것은 컵이고 이것은 모니터고' 하는 것을 식별하는 것을 보통 뭐라 그러느냐면 '위망사(vīmaṁsa)'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수행해서 집중하기 위한 길은, 이 네 가지가 통틀어져서 어울려져야 만이 집중을 할 수가 있습니다.

찬다(chanda), 위리야(vīriya), 사띠(sati), 위망사(vīmaṁsa) 이렇게 얘기합니다.

 

시간이 많이 됐는데, 오늘은 여기까지 하도록 하겠습니다.

집중이 계발되고 나면 여러분들이 얘기하는 오력이라는 것이 생겨납니다. 오력이 생겨나고 나면 집중이 계발되어 나가지면서 칠각지 부분이 계발되어 나갑니다. 칠각지 부분이 계발되어 나가고 나면 팔정도의 길이 드러나집니다. 그로 인해서 수다원 예류과에 들어가지고 합니다.

다음 시간에는 오력 부분에 대한 얘기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조금 전에 스님이 얘기한 부분은 여러분들이 잘 새겨들어야 됩니다. 자꾸 사람들이 착각하는 수가 있습니다. 오력 칠각지 팔정도 사정근 이런 것들을 따로따로 자꾸 분리를 합니다. 그런데 절대 그런 것은 아닙니다이.

여러분들도 그런 부분을 잘 알아서 공부를 조금씩 더 하시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