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수행법문 녹취/네 부류의 성인들 : 담마스쿨

모든 고통은 느낌일 뿐이다. (고통의 진리) (20061110)

담마마-마까 2020. 1. 31. 22:02

모든 고통은 느낌일 뿐이다. (고통의 진리) (20061110)

https://youtu.be/MPU4tADyzgY

 

자, 오늘 할 거 한번 봅시다.

appamattā na mīyanti ye pamattā yathā matā

압빠맛따 나 미얀띠 예 빠맛따 야타 마따.

"알아차림을 가진 자는 죽지 않지만, 알아차림을 가지지 못한 자는 죽은 자와 마찬가지다." 하는 그런 뜻입니다.

 

여러분은 산 자입니까 죽은 자입니까?

(수행자 대답 : 죽은 자입니다.)

당당하게 얘기하네. 그래도 산 자인가.

(수행자 대답) 그래서 살려고 여기 왔을 거 아니라.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의식하든 알아차리든 알아차리지 못하든 숨은 쉬고 있습니다. 숨은 쉬고 있으니까 살아있는 자 같이 보이지만 실제적으로는 알아차리지 못하면 죽은 자와 마찬가지가 됩니다.

부처님도 그랬거든. 가장 나쁜 것이 뭔가 하고 얘기를 하니까, 부처님은 단호하게 "다시 태어나는 것이 가장 나쁘다!" 하는 거라. 가장 나쁜 것이다. 당연히 알아차리지 못하면 다시 태어나야 되는 것은 정한 이치다 하고. 그렇죠?

 

어제 저녁에 동아대에 가서 법문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 사람들 주제가 뭐냐 하면 모든 고통은 마음이 일으킨다를 가지고 주제를 잡아서 해주라 하고 그렇게 하루 전날 전화가 왔습니다.

 

모든 고통은 마음이 일으킵니까? 확실합니까? 큰일 났네 다들.

모든 고통, 육체적인 고통도 마음이 일으킨다고 얘기를 할 수는 없겠죠.

(수행자 질문)

일으키는 것은 고통스런 느낌을 일으키는 것이고.

 

고통에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간단하게 얘기해 봅시다.

육체적인 고통, 그다음에 정신적인 고통, 그다음 또 뭐가 있습니까? 그 고통을 멈출려고 하는 욕망으로써 오는 고통, 그다음에 뭡니까?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해서 윤회하는 데서 오는 고통 이런 것들이 통칭해서 다 고통에 포함됩니다.

 

그래서 마음의 문제만은 아니죠. 마음으로 다 일으킨다고 할 거 같으면, 그 논리대로 할 거 같으면, 마음만 '아이고, 뭐 그렇거니' 해버리면 모든 고통은 다 사라져버린다는 얘기와 마찬가지가 돼버립니다.

(수행자 질문)

그거는 그렇지는 않고 근원이라고 하더라도, 누가 돌멩이를 탁 던져가지고 여기에 탁 찢어졌다. 그럼 이건 육체적인 고통이 먼저 와 진 거죠? 그 육체적인 고통을 마음으로써 알아차리는 것뿐인 것이죠.

그래서 근원이 꼭 마음으로부터 왔다고 얘기를 못하는 거죠!

 

자! 그러면은 스님은 그렇게 얘기하겠습니다.

모든 고통은 느낌이다. 라고 얘기를 해주고 싶습니다.

그래서 이 학생들 같이 '마음으로 모든 걸 일으켜서 마음 한번 잘 돌이키면 둑카(dukkha)라고 하는 것을 해결하는 것처럼 착각하지는 말자' 라고 얘기를 하고 싶습니다.

 

한번 물어봅시다. 고통을 언제 경험합니까?

(수행자 대답)

그런데 고통을 체험한다고 하는 것이 만약에 변하지 않는 것이라고 할 거 같으면 체험하겠습니까? 안 하겠습니까? 변하지 않으면 체험을 할 수가 없습니다. 아팠다가 덜 아팠다가 이렇게 오르내림이 있어야 만이 '아, 이게 아프다' 하고 느낍니다. 변하는 데서 苦(고)는 항상 체험을 하게끔 돼있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옛날에 아주 힘든 과정들이 있었던 것을 지금 회상을 해보면 옛날엔 그게 참 고통스러웠는데 지금 생각하면 그렇게 고통스럽게 느껴지진 않거든요. 옛날에 그 고통스런 느낌만큼 지금 느껴지지는 않는다고. 어떤 면에서는 얘기를 하면서도 그걸 즐기기까지 한단 말이라. 그럴 거 같으면 과거에 있었던 고통은 지금 내가 느끼는 고통 하고는 차원이 다르다는 얘기라. 그게 크든 작든 간에. 그럼 과거의 문제는 심리적인 측면에서 고통인 것뿐인 것이지 실제적으로 내가 지금 체험하는 것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보통 '고통이다'라고 느끼는 것은 또 뭘까?

앞으로 다가올 미래 '아, 이렇게 살아가지고 집 한 칸 장만하기 힘든데' 하는 불안감들, '아, 내가 이렇게 살았다가는 앞으로 어떻게 될까' 하는 그런 막연한 어떤 불안감에서 오는 그런 고통들도 있습니다. 그것도 어차피 회상을 해서 미래에 대해서 생각을 하면서 떠올려지는 것이지 실제 현실 세계에서 있는 것은 아니다 하는 겁니다. 생각하나 바꿔버리면 확 달라져버립니다. 이런 것들은 마음으로써 일으키는 고통들입니다.

보통 우리가 현재를 안 살아가기 때문에 미래나 과거를 예를 들 거 같으면 모든 고통은 마음으로써 일으키는 것들이 돼버립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어차피 지금 여기서 살고있는 분들이라는 거라. 그러면 과거도 그다지 필요 없고 미래도 그다지 필요한 부분은 아니라는 뜻이거든. 그럼 과거와 미래를 탁 제외해버리고 나면 뭐가 그럼 고통이라는 거라? '고통은 느낌일 뿐이다' 하는 거라.

느낌은 고통을 체험하는 것이 변하는 것으로 인해서 체험되듯이, 느낌도 이렇게 변해나갈 수밖에 없는 속성을 지니고 있다 하는 겁니다.

 

일반 범부 중생들도 고통이 있고, 아라한도 고통이 있습니다. 맞습니까?

어떤 차이가 납니까?

(수행자 대답) 네. 정확하게 얘기했습니다.

아까 얘기했지만 범부 중생은 네 가지 고통을 당한다고 했습니다.

육체적인 고통 또 정신적인 고통! 그런 육체적인 고통이든 정신적인 고통을 몰아낼려고 하는 데서 오는 욕망, 사라지기를 바라는 갈애로 인해서 오는 고통! 그게 금방 사라지지 않으니까. 그다음에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해서 어리석음으로 인해서 받는 고통! 이렇게 네 가지가 있다고 그랬습니다.

 

그런데 부처님 같은 경우에는 육체적인 고통은 분명하게 있었죠. 육체적인 고통이 있더라도 그 고통 자체가 느낌이란 사실을 알기 때문에, 느낌은 무상한 것이라고 알기 때문에, 일어났다가 사라진다는 사실을 알아차리면서 느낌에서 끝나버리게 됩니다. 그러니까 이차적인 정신적인 고통이나 갈애·갈망들이나 어리석음이나 하는 것들은 더 이상 받지 않고 끝나버리는 경우가 되는 거죠.

 

범부들과 도와 과에 든 분들의 차이점이 사실은 여기서 갈려집니다.

느낌과 갈망·갈애의 중간지점에서 사실은 갈려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느낌을 느낌으로만 받아들여버리고, 느낌이 일어났다 사라진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알아차리면 갈애를 받지를 않는다는 거라. 윤회의 고리가 끊어진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보통 고통이라고 하는 둑카(dukkha)는 용어상으로 이렇게 표현할 때 보통 뭐라고 하느냐면 '내가 이렇게 하고 싶은데,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것' '바라는 대로, 내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는 것' 그것을 갖다가 통상적으로 둑카라고 얘기합니다. 둑카 원어 자체의 뜻이! 그런 둑카는 항상 불안한 상태라는 거라.

그래서 '불안한 상태' 자체를 얘기할 때도 둑카라는 얘기를 합니다.

 

보통 한국에서 둑카를 한국어로 표현하고 옮겨놓은 것 중에 '불만족'이란 용어 있죠? 아마 '苦(고)' 하고 '불만족'이란 용어를 많이 쓸 겁니다. 그 '불만족'이라는 용어가 여기에 해당이 된다고 보면 됩니다. 안정되어 있지 않다는 거라. 그런 '불안한 상태'를 갖다가 둑카라고 얘기한다 하는 뜻입니다.

원하는데, 내가 뜻하는 대로 되지 않기 때문에, 그러니까 어떻게 돼? 불안하게 되고, 그것으로 인해서 괴롭힘을 당하게 되고, 그래서 "압박당하고 괴롭힘을 당하는 상태를 둑카 라고 얘기한다" 하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런데 둑카의 정의를 그렇게 잡고 나면, '내 것'이라고 하는 것이, '나'라는 것이 없는 상태가 돼버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거 자체가 싸그리 다 없어져 버립니다. 그렇게 되죠?

그래서 고집멸도(苦集滅道) 해서 멸과 도의 상태에 들게 되면 마지막 아라한의 상태에는 무아를 체험하게 돼서 「나」라고 하는 것에 집착하지 않는 상태가 돼버리는 것이 되는 거죠.

꼭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일반적으로 고통을 받는 것 자체는 변하는 상태에서 고통을 받는다는 사실만 알 거 같으면, 무상의 진리만 내가 확실하게 체험을 하고 알아차린다고 하더라도 고통은 당연히 덜 받게 됩니다. 완전하게 안 받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덜 받게 된다는 거라.

(수행자 질문)

누가 그러던가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고를 체험하고 나면 무상을 체험하게 되고, 무상을 체험하게 되면 무아를 자연적으로 체험하게 됩니다. 그게 무슨 무 짜르듯이 탁탁 떨어져서 나는 무아만 체험한다 해서 무아만 체험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거는 책에서 교리적으로는 가능할지 몰라도 실제적으로는 그렇게 될 수가 없습니다. 항상 연결고리 역할들을 하게 돼있습니다.

(수행자 질문)

그것을 가지고 그게 중점적이 돼가지고 깨달음을 이루었다는 얘기는 됩니다. 그렇지마는 다른 것들을 체험을 안 하고 할 수는 없습니다. 나머지 두 특성들이 안 드러나지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거는 저번에도 얘기했지만 목갈라나 하고 사리불 존자가 혜(慧)가 뛰어나냐, 정(定)이 뛰어나냐 하는 문제와 꼭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에는 속지 마십시오.

그래서 변화하는 것들에 대한 확인들이나, 변화하는 것들에 대한 불안감으로 인해서 고통의 원인이 될 수가 있다 하는 겁니다.

 

하나 예를 들어봅시다.

누구든지 병 없이 살고 싶어 합니다. 또 누구든지 젊게 있고 싶어 한단 말이라. 그런데 그렇게 될 수가 없죠? 변하는 속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그런데 안 아프다가도 내가 아프게 되고, 또 젊었다가 늙어지게 되고 이런 변하는 모습을 보고 우리는 어떻게 느낍니까? 그렇게 되지 않길 바라기 때문에 그걸 苦(고)라고 느끼게 되는 거라. 변화하는 상태를 직접 눈으로 확인하거나, 아니면 '지금은 변하지 않더라도 앞으로는 이렇게 될 것이다' 하는 그런 불안감들로 인해서! 그래서 고통의 원인은 이런 것들이다 하는 거라. 변화!

 

그런데 그러한 것들이라 하더라도 거기에 집착을 하지 않을 거 같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정신적인 것들에 대한 집착들이나, 육체적인 것에 대한 집착들, 이런 것들을 하지 않으면 자신에게 오는 고통은 자신과 무관하게 되는 거라.

어차피 늙어가는 것인데 늙어가는 사실만 알 거 같으면, 지금 현재의 상황 만 알 거 같으면 고통은 내 것이 되지 않는다는 거라. 꼭 마찬가지 현상들이 되어 나가버립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이러한 고통들을 제거할 것인가 하는 것이 수행의 기본이 됩니다.

 

대승불교에서는 고통을 제거하는 방법과 실천의 문제를 보살행으로써 잡아놨습니다. 모든 중생들이 고통 속에 있기 때문에 그 중생을 제도하기 전에는 내가 열반에 들지 않겠다. 모든 중생이 고통에 빠져있는 것이 그렇게 불쌍하고 측은할 수가 없어서 그것을 끄잡아 내줄려고 하는 자비사상으로써 보살들이 태동들을 하게 됐습니다. 고통의 종식에 이르는 실천적인 방법을 대승불교에서는 꼭 하나를 꼽아라고 할 거 같으면 자비 정신입니다. 그래서 어떻게들 합니까? 실천적인 면에서 누구 병들어 있는 사람들에게 가서 자비행을 실천합니다. 누구 못 먹고 있는 사람들에게 가서 국 한 그릇 밥 한 그릇 떠먹여 줍니다. 대부분 이렇게 하고 있는 형태들을 자세히 한번 살펴보십시오. 거의 대부분이 그러한 형태들을 띠고 있습니다. 북한을 돕는 문제라든지 그런 것들.

 

그러면 동남아시아에서는 고통의 종식을 위한 실천적인 방법은 뭘 쓸까? 한번 생각해본 적 있습니까?

(수행자 대답) 네. 거의 대부분이 그렇습니다.

그래서 내가 고통스럽든 아니면 남이 고통스러우면 대부분 사람들이 "위빳사나 수행해라" 그렇게 얘기합니다. 내 자신도 물론 하는 것이고, 다른 사람이 이렇게 할 거 같으면 그 사람에게 가서 부처님의 진리를 한마디라도 전해줍니다. "이것은 느낌일 뿐이다. 그 느낌을 관찰하라" 하고 얘길 하지 그 사람에게 가서 십 원짜리 하나 주는 것은 없다는 거라. 그게 꼭 같이 못살아서 그런 것은 아닙니다.

 

물론 그런 대승불교에서 하는 자비행들을 동남아시아에서 더 많이 합니다. 모든 사회적인 문제들을 승단 기부들 하고 연관을 지어가지고 해결해나가고, 또 큰일들이 있고 하면 부유한 가족들에서 다 도네이션(donation) 합니다. 그리고 이런 불교를 발전시키고 하는 문제들은 다 도네이션 해가지고 그렇게 합니다. 어떤 면에서는 더 대승적인 면들을 많이 실천합니다.

그런데 기본적인 구조는 일단은 스스로를 바꾸어야 만이 가능하다고 얘기를 합니다. 남들도 바뀌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모든 고통은 마음으로써 일으킨다고 생각하지 않고, '모든 고통은 무상한 느낌이기 때문에 그 느낌들을 무상하다고 알아차려라' 하는 데서 첫 시발점이 되고 있다는 겁니다.

그게 인제 대승 불교권 하고 남방 상좌부 불교권 하고 차이점입니다.

 

여러분들도 알겠지만 고(苦)는 어떻습니까?

오래 지속됩니까? 오래 지속되지 않습니까? 고통을 누가 관찰해본 사람? 얼마나 짧게 지속됩니까? 아주 순간입니다.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것이 아주 순간입니다.

그러면 그러한 고통은 항상 있는 겁니까? 가끔씩 일어나는 겁니까? 항상 있는 겁니다.

느낌이 없습니까? 여러분들은? 느낌은 언제든지 일어나집니다. 항상 일어나지는 겁니다. 단지 내가 그걸 알아차리지 못했던 것뿐인 것이지 끊임없이 일어났다가 다 사라집니다.

느낌이 있는 곳은 다 고통입니다. 그럼 고통은 항상 일어나고 사라지고 일어나고 사라지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느낌을 관찰한다 할 거 같으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그 느낌을 따라가야 됩니까? 따라가선 안 되겠죠! 그러면 그거만 하다가 한 생을 다 보내버립니다. 그래서 수행을 할 때 절대 느낌을 따라가지 말아라 그럽니다.

 

느낌은 항상(恒常)하는 법이 없이 일어났다가 사라진다는 사실을 알고, 또한 그러한 느낌이 연속적으로 동일하게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두 개의 느낌이 동시에 존재할 수 있습니까? 안 되죠! 그러면 반드시 하나의 느낌이 일어났다가 사라지고 나서, 다른 느낌들이 일어났다가 사라지게 돼있다는 거라.

그래서 반드시 두 개의 느낌은 동시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먼저 알아야 됩니다. 그리고 그러한 느낌들은 얼마만큼 빨리 일어났다가 사라지는가 하는 것들을 내가 하루빨리 알아차려야 된다 하는 겁니다.

 

()가 일어나고 사라지고 하는 것을 즉시 알아차리면 정신적인 괴로움이 없습니다. 맞습니까? 정신적인 괴로움이 일어날 겨를이 없습니다. 그럼 정신적인 괴로움이 일어나지 않으면, 그것에 끄달려서 일어나는 슬픔이나 비탄들이나 번뇌나 하는 것들도 일어날 수가 없습니다.

보통 고(苦)라고 생각하는 것들이 뭡니까? 이런 범주들입니다.

그러면 충분히 육체적인 고통 하나만 가지고도 윤회의 사슬을 끊어버릴 수가 있다는 뜻입니다. 또는 마음으로써 일으키는 고통들 이런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윤회의 사슬을 끊을 수가 있다는 겁니다. 얼마만큼 내가 알아차림이 강하고 정신집중이 강하느냐에 따라서 알아차리고 못 알아차리고 하는 차이일 뿐입니다.

 

아! 그런데 그거 하나는 짚고 넘어갑시다.

보통 보면 고통스런 느낌이 있으면 '고통' '고통' '고통' '고통' 어떤 경우는 수행하다가 한 5분 그놈의 고통만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런 경우들 있죠? 그것은 아닙니다!

'일어남' '사라짐' '고통'이란 '고'자만 알아차린다고 하더라도 그 고통이 빨리 사라져버리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다가 더 지나서 고통이 일어나는 순간 알아차려버려야 되는 것이지, 그렇게 돼야 되는 것이지,

이미 고통은 일어나서 지 혼자서 한참 열이 붙어있는 상태인데 그걸 '고통' '고통' 하고 알아차리니까 그 고통이 사라집니까? 오히려 그 고통은 더 배가되고 떠나지 않는 거라. 그렇게 정신적인 고통을 받고 이걸 사라지게 해야 한다는 고통까지 자기가 스스로 갈애를 만들어서 더 크게 만들어 있는 상태라.

그런데 어떻게 그걸 관찰해서 없앨 거라? 안된다는 거라.

그마만큼 내가 알아차림의 힘이 떨어졌다는 사실을 알고, 빨리 주대상으로 돌아와 버려야 되는 거라. 그것을 관찰하겠다고 한참 해봐야 그것은 소용이 없다는 거라.

 

그래서 되도록 일어나는 순간 자체에 알아차리는 힘들이 길러졌을 때 크게 일어나는 고통들은 알아차리고, 알아차리면 반드시 일어나면 그 자리에서 사라진다는 사실을 갖다가 알게 됩니다. 그래서 일어났다가 머물고 사라지고 하는 것이 순간 같이 그렇게 바뀌어져 나간다는 사실을 알면 우리는 괴로움으로 인해서 고통받지는 않는다 하는 겁니다.

그것이 고통의 진리입니다.

 

(수행자 질문) 그거는 뭘 잘못 알아들은 것 같습니다.

'고통이 열반으로 이끈다' 하는 얘기가 있습니다. 고통이 열반으로 이끈다 하는 것은 뭐냐면, 아픈 상태가 온다고 하더라도 그 자체에서 바꾸지 마라라는 겁니다.

자세를 바꾸지 말고, 그다음에 알아차림을 갖다가 바꾸지 말아라는 그런 뜻이지, 그것을 안 되는 상태에서 계속 관찰하고 있으라는 뜻은 아닙니다. 그것을 안 하더라도 얼마든지 내가 호흡으로써 관찰을 해나간다 할 거 같으면 호흡으로 돌아와라 라는 뜻입니다.

대신에 일절 내 몸의 상태나 이런 것에서 자세를 바꿀려고 하지 말아라 하는 뜻입니다. 그게 고통이 열반으로 인도한다 하는 그런 뜻이기 때문에 그러한 고통스러운 것들이 오더라도 참고 견뎌나가라 하는 뜻입니다.

 

(수행자 질문)

그렇죠. 대상을 바꿔서 주대상으로 돌아가면 주대상을 명확하게 알아만 차리면 그 고통은 사라져버립니다. 그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느낌들이 아주 강하게 일어날 때는 또 안됩니다. 호흡으로 돌아가더라도 안됩니다. 그럴 때 아주 강할 때는 내 마음 집중도 아주 강하게 그 대상을 알아차려줘야 됩니다.

그런데 그렇게 해도 만약에 이 고통스러운 느낌들이 사라지지 않는다고 할 거 같으면 이차 삼차적으로 화살을 받지 말고 그거는 포기해라는 거라. 포기를 해버리고 주대상으로 돌아가 버리라는 거라. 그렇지 않으면 자세를 아예 바꿔서 경행을 하든지 이렇게 해버려야지 그걸 가지고 시간을 뭐 십 분이고 얼마고 이렇게 허비를 하지 말아라는 거라. 자! 됐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