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네 부류의 성인들 3. 일래과와 불환과_수행에서 칠각지와 팔정도의 체험 (20061013)
저번 목요일날 법회 잘했습니까? 스님이 그날 다른 일이 있어가지고 대구 좀 갔다가 내려왔어요. 그런 얘기를 합디다. “우리 절에 일주일에 법회가 그래도 한 세 번 있습니다.” 하니까 뭐 하러 그렇게 많이 하느냐 법회를. 법회를 뭐 하러 많이 하느냐, 몇 명이나 오느냐 해서, 한 열 명씩 모입니다, 때려치워라. 때려치워라 하는 거라.
거기에 대놓고 구구절절이 이거는 해야 되고 이거는 꼭 필요한 것들이다 하고 얘기를 해도 마 소귀에 경 읽기라. 그래서 얼른 점심 공양만 하고 내려와 버렸는데. 빨리 좀 스님들이 각성을 해야 되는데 너무 안일해가지고, 여러분들도 좀 각성을 해야 됩니다. 그렇죠? (예)
오늘은 교재를 한번 봅시다. 저번 시간까지는 일래과 부분을 쭉 설명을 지금 하고 있는 겁니다이. 일래과하고 불환과는 더불어 가지고 같이 설명을 해나가는 부분들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집중을 계발하고 수행을 잘 해나갈 것인가 하는 부분에 대한 얘기를 저번 시간에 해나갔습니다.
그래서 저번 시간에 집중하는 방법에 네 가지 길이 있다 하는 얘기를 했죠.
찬다(chanda), 위리야(vīriya), 사띠(sati), 위망사(vīmaṁsa) 그런 얘기했죠? 그 길들을 따라서 하다 보면 수행은 수월해집니다.
간단하게 얘기해서 찬다(chanda) 라고 하는 것은 번역으로는 '바램'이라고 해놓았지만, 친근한 걸 얘기합니다. 친근한 걸! 나에게도 나에게 맞는 도반들이 있단 말이라. 그 사람들 하고 친하고 그 사람하고 쫑알쫑알 얘기하는 것을 좋아하지, 다른 사람하고 얘기하는 걸 그렇게 썩 좋아하진 않는다는 말이라. 그런 친근한 걸 얘기합니다.
수행하기 친한 조건을 만들어준다 하는 그런 뜻입니다. '일어남' '사라짐' 배를 관찰하는데 거부감을 가지지 않고 '아, 이 수행을 해봐야 되겠다' 하고 관심을 가지는 것, 그런 것들을 의미합니다. 여러분들도 도반들과 서로 뜻이 맞고 좋아야 말이라도 하나 할 수 있듯이 수행도 마찬가집니다. 이런 친근함을 가지고 거부감이 없이 부담이 없어야 만이 수행을 자유롭게 해나갈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위빳사나 수행할 때 자연적인 호흡을 하라 그렇게 얘기하죠! 그러죠? 복식호흡이나 단전호흡이나 이런 걸 하지 말고. 일단은 그것을 하면 몸에 역반응들이 나타나고 하기 때문에 일단 몸에서도 거부반응을 가지게 됩니다. 마음으로도 또 인위적으로 해야 되는 것이고. 일단 수행은 가장 편안한 상태에서 하기 위해선 자연적인 호흡들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 하는 것이 가장 수월한 방법들을 택할려고,
(수행자 질문)
예. 하다 보면 수행이 예리해지고 하면 점점 더 엷어지고 가늘어지고 그리고 호흡이 점점 더 없어져 가집니다. 그것도 내 지금 현재의 상태에서는 자연적인 겁니다.
(수행자 질문)
누가 그렇게 얘기합니까? 나는 그렇게 가르쳐준 적이 없었는데.
그래서 초심자들에게 처음에 "수행에서 자기 포인트를 정확하게 알아라" 해가지고, 1분 동안 호흡을 얼마나 하는가를 갖다가 나무 성냥 가지고 요렇게 해놓았다가, 들이쉬고 내쉬고 하는 것을 하나라고 했을 때, 들이쉬고 내쉬고 하면 하나를 툭 떨어뜨리고, 또 들이쉬고 내쉬고 하면 또 하나를 툭 떨어뜨리고, 이렇게 해가지고 "1분 동안에 몇 번 호흡하는가를 먼저 체크를 하라" 그럽니다. 그래서 보통 열일곱 번 열여섯 번 하거든요.
수를 세면 인위적으로 돼버립니다. 일어남 사라짐 하고 나서 '하나', 또 일어남 사라짐 하고 나서 '둘' 하다 보면 그걸 까먹기도 할 뿐아니라 인위적으로 호흡을 해나갈 수가 있으니까, 자연적으로 성냥을 하나씩 하나씩 떨어뜨리면서 이렇게 하라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래가지고 "가장 편안한 상태에서 호흡을 하는 것들을 체크를 하라" 그럽니다. 그러면 보통 어떤 경우는 열여섯 번, 열일곱 번, 열여덟 번 이렇게 돼나갑니다. 그런데 인위적으로 돼나가면 돼나갈수록 호흡이 더 느려집니다. 그걸 먼저 체크를 해가지고 자기의 호흡 상태를 먼저 파악을 하라는 얘깁니다. 그렇게 했을 때 보통 3점 몇 초에 한 번씩 왔다 갔다 합니다.
그렇게 체크를 하고 나면 그다음에 평상적으로 호흡을 할 때 일단 좌선 상태에 들어갔을 때 '일어남' '사라짐'하는 포인트를 자기가 찾을 수가 있습니다. 찾기가 쉽게 됩니다. 그러고 경행을 하다가도 경행을 하다가 멈춰 섰을 때, 생각이 일어났을 때의 호흡의 상태가 있고, 또 경행을 하고 나서 마음이 편안한 상태에서의 호흡의 상태가 있습니다. 그 상태를 자기가 먼저 파악을 해낼 수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연적인 호흡을 먼저 체크를 하라"고 그럽니다. 그러고 나서 호흡의 '일어남' '사라짐'하고 자기 포인트를 찾으라고 이렇게 합니다.
그걸 누가 처음부터 인위적으로 하라고 그랬습니까?
(수행자 질문)
쓸데없는 소리들 하지 말라고 그래요. 그거는 그렇게 되는 법이 없습니다.
그냥 횡격막이 벌려지고 닫혀지고 하는 그 상태 그대로, 우리가 그냥 고요하게 있을 때 일어나는 호흡들, 우리가 의식하지 않아도 호흡은 일상적으로 해나갑니다. 그 호흡 그 자체를 하라는 거라. 그러는 거지 그걸 인위적으로 할 거 같으면 반드시 문제가 생겨나버립니다. 그래서 호흡은 그렇게 하는 게 아닙니다.
(수행자 질문)
가장 자연스러운 호흡! 그렇게 호흡을 하고 그러고 나서는 호흡이 들이쉬고 내쉬고 하는 것에 친근하게 되고 나면, 가장 자연스러운 호흡이 그런 상태에서 친근하게 되고 나면 집중하기가 쉬워집니다.
(수행자 질문)
그거는 나는 모르겠고, 그거는 내가 알 필요도 없는 거고.
(수행자 질문)
이때까지 여기서는 그렇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수행자 질문)
가장 자연스러운 호흡이 맞습니다. 가장 자연스럽게.
그렇게 호흡을 하고 나서는 호흡이 들이쉬고 내쉬고 하는 것이 가장 자연스러운 상태에서 친근하게 되고 나면 집중하기가 쉬워집니다.
(수행자 질문)
단전호흡을 하더라도 항상 일상생활에서 단전호흡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죠? 수행한다고 앉아있으면서 단전호흡을 하고 있는 거죠? (예) 그러면 평상시 의식하지 않을 때의 호흡으로 그대로 하면 됩니다.
(수행자 질문)
그럼요. 바꿔야죠. 당연히. 우리 원장님만 몰랐지 다른 사람은 다 알았거든요. 여기 프린트물 초보자들한테 나눠주는 거 있죠? 여기 원장님한테 하나 줘야 되겠다.
그렇게 해서 호흡에 집중을 하고 하는 것들입니다이. 그걸 보통 위리야(vīriya) 노력이다 하고 얘기합니다.
그렇게 하고 나면 자연적인 호흡을 알아차리고 그 호흡에 집중하고 나면 이게 뭘까 하고 알아차릴려고 하는 것이 자꾸 생겨나게 됩니다. 그리고 호흡이 변해나가는 것도 알게 되고, 그걸 사띠(sati)라고 그럽니다.
그렇게 호흡을 알아차리고 하면 꾸준하게 연결이 돼나가기 때문에, 연결해나가는 거기에서 내가 식별하는 능력들이 생겨나갑니다. 몸이 안 좋을 때 또 생각이 많을 때 호흡의 상태는 이렇고, 또 마음이 고요하고 또 몸이 정상적일 때 호흡은 이렇구나 하는 걸 내가 분별을 하고 판단을 해나가게 됩니다. 그것을 위망사(vīmaṁsa) 라고 그럽니다.
그것이 "네 가지 길이다" 하고 얘기합니다. 일단은 한 대상, 수행의 대상에 집중해 나가는 데는 이 네 가지가 필수적으로 필요한 부분이다 하는 그 얘기까지를 저번 시간에 했었습니다. 맞습니까?
오근(pañca indriya, 五根)
자! 그렇게 집중을 어느 정도 계발하고 나면 나도 모르게 힘이 생겨납니다. 재미가 나거든. 재미가 나면 맨 처음 생기는 것이 뭡니까? 요거 계속해보겠다 하는 생각이 먼저 일어나집니다. 그걸 다른 말로 표현하면 삿다(saddhā)입니다.
삿다라는 단어를 너무 어렵게만 생각하지 마십시오. 지금 수행으로 다 연결해서 설명하는 부분입니다. 아, 요걸 계속해나가니까 내 몸과 마음도 고요해지고 평화로워지고 또 집중하는데 큰 효과를 가져오는구나 하고 알게 되므로 인해서 일어나는 힘이 맨 처음에 그런 삿다 부분입니다.
그건 어떻게 합니까? 어떻게 된 겁니까? 스스로의 노력으로 온 겁니다. 내가 숨 쉬는 것이고 내가 알아차리는 것이지 남이 해주는 것이 아닙니다. 삿다라고 하는 개념 자체가 그런 것입니다. 외부적으로 이것이 맞다 하고, 이것이 바른 것이다 하고 가르쳐주는 것이 아니라 내 스스로 확인해가지고 아, 이것이구나 하고 알게 되는 것이지.
그런 것으로 해서 맨 처음 생겨나는 것이 이 삿다(saddhā indriya) 부분입니다. '아, 이 길로 가야 되겠구나' 하는 마음을 정하게 되고, 그런 것을 보통 그걸 우리 한문권에서는 신근(信根)이다 그렇게 얘기합니다.
(수행자 질문)
그렇게는 얘길 안 하고, 재미를 붙인다는 그런 상태입니다.
재미를 붙이고 완전하게 이 길을 벗어나지 않겠다 하는 그런 마음들을 굳힌다는 것이지, 안 벗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또 이 수행을 계속 해나가고자 하는 마음은 있는 것이지, 항상 평상적으로 계속해나가는 상태는 아닙니다.
(수행자 질문)
예. 삿다도 마찬가집니다. 법에 대한 확신들이 생겼을 때 보통 용어들을 쓰기를 처음에는 '삿다'라고 하는 거고, 쓰는 용어에 따라서 그렇게 구분해 놓은 것뿐인 것이지.
그럼 예를 들어봅시다. 위목카(vimokkha) 하고 위뭇띠(vimutti) 하고의 차이는 뭡니까? 별 차이를 못 느끼겠죠? 나중에는 엄격하게 구분이 됩니다. 위목카 하고 위뭇띠 하고는 차이가 나는데, 일상적으로 얘기할 때는 보통 '해탈'이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와 마찬가집니다.
어쨌든 그렇게 됐을 때 이런 신근들이 일어나지고, 인제는 누가 강요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내가 이걸 계속해나가게 되고 또 그런 길을 쭉 따라가게 돼있는 거고, 그래서 화가 일어난다든지 아니면 일상생활에서 번잡하다든지 할 거 같으면 내 스스로 '아이고, 앉아서 수행해야지' 하는 마음을 내서 수행을 조금씩 하게 되고, 또 그런 호흡을 스스로 또 찾게 되고, 그렇게 됩니다.
그걸 갖다가 위리야 인드리야(viriya indriya), '위리인드리야' 그렇게 얘기합니다. 노력의 힘이 생겨난다 하는 그런 뜻입니다. 노력의 힘은 내가 이 길로 가야 되겠다 하는 확신들이 섰을 때 그런 노력들을 계속해나가게 됩니다. 안 그러면 중간에 그 노력을 포기를 해버린다는 거라. 그런 것들을 한국말로 해서 정진근(精進根) 정진하는 근이다 해서 그렇게 얘기합니다. 누가 강요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꾸준하게 해나가는 그런 힘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거기서부터 어떤 일을 하든 어떤 행동을 하든 어떤 말을 하든 알아차리는 것이 점점 더 넓어집니다. 앉아서 호흡할 땐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관찰하는 것들도 시간이 늘어나지고, 일상생활할 때도 일상생활하는 것에서 뭘 하고 있는가를 명확하게 알게 되고, 말을 하더라도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어떤 말을 조리 있게 하는가 하는 것들을 알게 되고, 그런 알아차림이 더욱더 넓어지고 깊어지게 돼 있다 하는 겁니다. 그걸 갖다가 보통 염근(念根)이라 그렇게 얘기합니다. 사띠 인드리야(sati indriya)
그런 힘들이 조금씩 조금씩 더 배가가 돼나갑니다. 이 얘기는 점진적으로 수행을 해나갔을 때 생기는 힘들입니다. 하다가 요만큼 해버리고 그만해버리면 그런 힘들은 생겨나지 않습니다.
그렇게 하다 보면 여러분들이 어떤 일을 하든지 그 대상에 집중하게 되고 그런 집중이 확고해지게 되는 거라. 그걸 보통 사마디 인드리야(samādhi indriya) 그럽니다. '사마다 인드리야' 해서 정근(定根)이라고 얘기합니다. 대상에 집중하게 되는 힘들이 강해진다 하는 겁니다. 그럴 때가 되면 어떤 대상에 집중을 하게 되면 외부적인 조건에 영향을 거의 잘 안 받게 됩니다. 누가 부를 때도 잘 못 알아듣고, 또 어떤 일을 해나가고 있을 때 주변을 거의 돌아보지 않는 상태가 돼나가고.
그래서 집중이 확고하게 되고 그거로 인해서 옳고 그르고 하는 식별하는 힘이 결과적으로 나타나지게 됩니다. 그걸 보통 빤닌드리야, 빤냐인드리야(paññā indriya) 해서 혜근(慧根)이다 그렇게 얘기합니다.
어쨌든 대상에 대해서 수행하기 위한 네 가지 길을 쭉 따라가서 그 집중의 길만 따라가더라도 이런 오력, 다섯 가지 힘(pañca balāni, 五力)들이 갖추어져 나가고, 해나가게 됩니다.
그런데 이 정도가 돼나가면 아, 내가 어떻게 수행할 것인가 하는 것이 스스로 정립이 돼나가야 됩니다.
자, 조금 전에 오근에 대한 것들을 얘기했습니다. 노력을 예로 들어봅시다. 위리야(vīriya) 내가 노력하고 싶을 때 바로 노력을 배가시키고 게으름 부리지 않는 사람 있습니까? 또 집중하고 싶을 때 집중을 주변에 있는 사람하고 관계없이 바로 집중해나가는 사람이 있습니까? 사람 마다 조금씩 다르겠죠? 경우가 조금씩 달라집니다. 쉽게 얘기합시다.
다섯 가지 힘이 강한 사람이 있고 약한 사람이 있게 돼있습니다. 거기에 따라서 수행하는 방법이 여기서부터 조금씩 차이가 납니다.
그런 힘이 좀 강한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되겠어요? 수행할 때 부드럽게 해야 됩니다. 부드럽게 해라 하는 거는 뭐냐면 좌선하고 경행하고 그다음에 일상생활에서 알아차리고 하는 것들을 좀 스무스하게 빨리빨리 바꿔도 큰 문제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런 다섯 가지 힘이 조금 약하다 싶은 사람들은 강하게 해줘야 됩니다. 좌선할 때도 보통 두 시간씩 이렇게 하고, 되도록이면 한번 앉고 나면 경행을 한다든지 일상생활한다든지 이런 것들은 거들떠도 안 보고 해나가야 되는 거라. 무딘 만큼 강하게 해나가야 됩니다.
또 빠른 사람은 빠른 만큼 스무스하게 대상들을 옮겨주는 것이 수행하는 데는 좀 빨리 결과물을 낚아챌 수 있는 그런 방법들입니다.
그런데 이랬을 때 선정체험을 하는 사람이 있고, 안 하는 사람들이 있게 돼있습니다. 그렇게 하다 보면 어떤 때에는 삼매에 툭 빠지는 경우도 있고, 또 그렇게 하지않고 그런 것도 없이 고요하고 평온한 상태로 쭉 알아차림만 지속해나가는 사람들이 있고 그렇게 되는 겁니다.
하나의 예를 들어봅시다.
사리뿟따 존자하고 목갈라나 존자는, 사리불 존자는 보통 뭐라 그럽니까? 지혜제일 이라 그렇게 얘기합니다. 목갈라나 존자는 신통제일, 신통제일은 다른 말로 하면 선정이죠? 지혜하고 선정은 다른 말로 하면 어떻게 됩니까? 사마타하고 위빳사나라고 그럽니다. 그러면 사라뿟따는 위빳사나 수행을 해가지고 깨달음에 이르렀고, 목갈라나는 사마타를 해서 깨달음에 이르렀는가? 그건 아니죠? 어떻게 해서 깨달음에 이르렀습니까? (수행자 대답)
경전에 재밌는 게, 사리불 존자는 사선정을 경험하고 상수멸정까지 경험을 하고 깨달음에 이르릅니다. 근데 목갈라나 존자는 그거 없이 사선정 없이, 사선정이 없다 것은, 사선정은 삼매에 빠진다는 겁니다. 그거 없이 바로 깨달음에 이르른 거고, 그래서 목갈라나 존자는 칠 일 만에 깨달음에 이르르죠!
(수행자 질문)
예. 사마타,
(수행자 질문)
순수 위빳사나라고 그럽니다. 그걸 자꾸 사람들이 '마른 위빳사나'라고 그러는데, 마른 거는 하지 말고 순수, 그냥 '순수한 위빳사나'라고 하십시오. 근이라고 해서 근해탈자,
(수행자 질문)
용어들도 너무, 어쨌든 간에 그렇게 순순하게 위빳사나만 해가지고 깨달음에 이르르게 됩니다.
(수행자 질문)
거꾸로 생각했죠? 근데 경전에는 분명하게 그렇게 나와 있거든.
처음에 스님도 경을 공부하면서 ‘아, 이거 뭐 잘못 쓴 게 아닌가’ 해가지고 그렇게 생각했는데, 그런 잡아함경 말고도 여러 주석서에 똑같이 그렇게 써져있었습니다. 그래서 이상하다 하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그런데 그거는 그 하는 방법에 따라서 조금 차이가 나기 때문에 그렇다고 그럽니다.
목갈라나 존자 같은 경우에는 오력을 조절하는 능력이 좀 탁월했습니다. 탁월했기 때문에 쉽게 말하면 빨리빨리 대상을 옮겨주는 수행을 할 수가 있었고, 사리불 존자 같은 경우에는 그것이 목갈라나 존자보다는 떨어졌기 때문에 강한 집중을 많이 키워줬던 상태입니다. 그랬기 때문에 그런 수행을 했다 하고 그렇게 통상적으로 얘기합니다. 그런데
(수행자 질문)
예. 그렇죠.
그러는데 그 사람들의 습성 자체가 그런 형태의 습성들이 강하기 때문에 그런 부분이 많았다는 것뿐인 것이지, 얼마 전에도 한국에서 순수 위빳사나로 가지고 깨달음에 이를 수 있느냐 아니면 사마타 수행을 병행을 해가지고 깨달음에 이르게 되느냐 논쟁이 많았다고 알고 있는데, 결론은 안 난 것으로 되어 있는데, 이런 것들로 보든지 아니면 여러 가지 주변에 지금 어느 정도 현재 수행을 하는 사람들을 보더라도 기본적인 것은 다 갖춥니다.
순수 위빳사나를 한다고 하더라도 일단은 선정은 체험들을 합니다. 그래서 아예 선정 없이 순수 위빳사나만으로써 깨달음에 이르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봐야 됩니다.
(수행자 질문)
그렇게도 깨달음에 이를 수는 있겠죠 경전에 근거하면.
그런데 실제적으로 보면 물론 상수멸정까지 안 가는 경우들은 많이 있습니다. 사선정까지 경험하면, 기초적인 색계선정 부분을 얘기합니다. 무색계 부분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고, 색계선정까지는 경험들을 거의 대부분 경험해봅니다.
(수행자 질문)
예. 그게 맞습니다.
예. 일선정까지 가는 경우들도 있고, 그런데 일선정까지 간 사람들은 보통 보면 사선정까지 다 경험들을 합니다 일반적으로는.
지금 그걸 경전상이나 아비담마적으로 얘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통상적으로 스님이 경험을 해보고 주변에 스님들을 보더라도 거의 대부분이 아니고 빠짐없이 그렇게 돼나가고 있더라 하는 그런 뜻입니다.
(수행자 질문)
내가 그 이야기를 꺼내는 이유는 뭐냐 하면 혹시라도 그런 걸 가지고 시시비비를 가리지 마라 하는 그런 뜻입니다. 그거는 딱 부러지게 얘기할 수 있는 부분은 아닙니다. 그게 어떤 형태들이든 간에 여러분들에게는 사실 무용지물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생각가지지 말고 그냥 마음속으로 이런 결론을 내리면 됩니다.
'순수 위빳사나를 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선정체험은 일단은 한 번씩은 해봐야 된다!' 해봐야 만이 나중에 융합을 해나갈 수가 있습니다.
다섯 가지 번뇌-오하분결 중에서 감각적인 욕망(kāma-chanda)이 있고, 그다음에 오상분결 중에서 라가(rāga) 부분, 욕망이 있습니다. 욕계에 대한 욕망(kāma-rāga), 무색계에 대한 욕망! 그러니까 욕계나 무색계에 대한 욕망들은 위빳사나로써 전환을 시켜서 떨어뜨릴 수 있는 것이고, 감각적인 욕망은 사마타로도 제압을 해나가는 그런 단계입니다.
물론 위빳사나로도 제압을 합니다. 제압을 하긴 하는데 용이하기는 사마타로써 제압하기가 더 용이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부분을 자기가 얼마만큼 잘 융합을 해나가느냐에 따라서 수행력이 점점 더 높아지고 빨라집니다.
그래서 잠정적으로는 그렇게 생각하시면 됩니다. '아, 어느 것 하나도 배척을 할 만한 것은 아니다'하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선정이 계발돼나가면 그 선정도 계발할 필요성은 있습니다. 그리고 또 선정 계발이 안 되어나가고 수행을 열심히 해서 사물의 특성들이 드러난다 해서 그것만을 가지고 안 된다고 하는 것도 아닙니다. 수행을 해나가다 보면 여러분들은 틀림없이 그 두 가지 경우들을 만나집니다.
두 가지 경우를 만났을 때는 그것 자체를 '아, 이것은 위빳사나가 아니다 해서 배척할 필요도 없고, 또 하다 보면 이것이 집중하는데 큰 효과가 있다 해서 그것만 가지고 붙잡을 필요도 없다' 하는 그런 뜻입니다. 두 가지를 다 융합해서 할 수 있도록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스님이 조금 전에 사리불과 목련 존자를 비유를 들어서 얘기한 겁니다.
그분들도 한 분은 신통제일이고 한 분은 지혜제일이라 하더라도 깨달음의 단계에서는 반대의 성향들이 나타났었고, 또 그 깨달음 이후에는 다른 성향으로 바뀌어 나가고 그렇게 해나갑니다. 여러분들은 그걸 명심을 하고
(수행자 질문)
맞습니다. 처음에는 아주 지혜가 출중했던 분입니다.
하나의 예를 들어보면 사리불이 먼저 앗사지 존자의 말을 듣고 이 법에 대한 확신들을 가지게 됐거든. 근데 직접들은 사람하고 그 말을 다시 전해 들은 사람하고 똑같은 경지에 이르렀다고 할 거 같으면 어느 쪽이 낫겠습니까? 당연히 그렇다는 거라. 목련 존자는 그 전해 들은 소리만 듣고도 빨리 그 과정에 이르렀기 때문에 오히려 지혜가 출중했던 분입니다. 그마만큼 상황에 대한 인식판단들은 훨씬 사리불 존자보다 뛰어났습니다.
자! 한번 봅시다. 경전 앙굿따라 니까야를 하나 인용을 해보겠습니다.
"비구들이여, 사마타 수행을 하면 어떤 이익을 얻습니까? 마음이 계발됩니다.
마음이 계발되면 어떤 이익을 얻습니까? 탐욕이 제거됩니다.
비구들이여, 위빳사나 수행을 하면 어떤 이익을 얻습니까? 지혜가 계발됩니다.
지혜가 계발되면 어떤 이익을 얻습니까? 무지가 제거됩니다.
비구들이여, 탐욕에 의해 오염된 마음은 자유롭지 못하고, 무지에 의해 오염된 지혜는 계발되지 않느니라.
탐욕에서 벗어나고, 무지에서 벗어나 해탈을 이루어라."
하는 부분이 앙굿따라 니까야에 보면 있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수행의 사마타하고 위빳사나를 가장 극명하게 잘 대조해놓은 그런 경전입니다. 이 경전 자체가.
'집중을 통해서 탐욕에서 벗어나고, 지혜를 통해서 무지로부터 벗어나라' 하는 얘기가!
결국은 우리가 제거해야 되는 것은 탐욕과 무지들입니다. 그래서 얼마만큼 잘 조화롭게 하는 것인가에 따라서 깨달음에 나아가는 방향들이 많이 좌우가 된다 하는 그런 뜻입니다.
이렇게 하다 보면 열 가지 속박-상요자나(saṃyojana)가 제거되어 나갑니다. 프린트물에 있습니다.
오람바기야 상요자나(Orambhāgiya-saṃyojana) 해서 오하분결(五下分結)이 있습니다.
삿까야딧티, 위찌낏차 라고 하는 부분이 있죠?
유신견(有身見, sakkāyadiṭṭhi), 의심- 회의적 의심(疑, vicikicchā), 그다음에 계율이나 의식에 대한 집착(戒禁取見, sīlabbataparāmāsa), 감각적인 욕망(kāma-rāga), 성냄(paṭigha) 부분이 있습니다.
세 가지가 예류과에서 사라지고 두 가지가 일래과에서는 엷어집니다. 그것이 완전히 떨어져나가는 것은 아닙니다. 감각적인 욕망(貪)하고 성냄(瞋) 부분은 약해지는 것이지 떨어져 나가는 것은 아닙니다.
이것은 불환과에 이르게 됐을 때 완전하게 떨어져나갑니다.
(수행자 질문)
탐(貪), 진(瞋)이 아니고 탐(貪)하고 치(癡)부분을 얘기했습니다. 무지(癡)를 얘기했습니다.
(수행자 질문)
그러니까 탐하고 치 부분은 예류과 부분에서는 떨어져 나가버립니다. 탐이 완전히 떨어져 나가는 것은 아닌데, 지금 탐하고 (지/치) 부분을 얘기한 부분은 뭐냐면, 탐하고 (지/치)만 떨어져 나가도 치 부분은 자꾸 엷어지면서 자동적으로 떨어져 나간다는 그런 뜻입니다.
보통 탐·진·치 그렇게 얘기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보통 일상적으로 얘기할 때의 감각적인 욕망들이나 그다음에 어리석은 부분들이나 그다음에 성냄 부분들이나 그런 것들인데, 감각적인 욕망(貪)이 떨어져 나가버리면 성냄(瞋) 부분은 떨어져 나가버립니다. 그래서 보통 탐(貪)하고 진(瞋) 부분은 거의 한 묶음으로 묶어서 얘기하는 경우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아까 탐(貪)하고 치(癡)부분입니다. 진(瞋)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고.
(수행자 질문 : 그러면 아까 감각적인 욕망을 얘기할 때 탐하고 진을 같이 묶어서 얘기하는 겁니까?)
예.
그래서 예류과에서 일래과로 넘어가면서 뒤에 부분, 감각적인 욕망- 까야라가(kāma-rāga) 라고 그러죠. 감각적인 욕망이 점점 더 엷어져 나갑니다. 그 얘기는 뭐냐 하면 집착할 만한 부분들이 없다는 얘깁니다.
그다음에 악의, 성내는 것, 브야빠다(byāpāda)라고 그럽니다. 그 부분이 엷어져 나갑니다. 그렇다고 해가지고 욕망이 없고 성내지 않는다는 얘기는 아닙니다. 그런 부분이 있다고 하더라도 즉각 그것을 알아차려서 제자리로 다시 돌아오게 되고 그것이 점점 더 엷어져 나간다는 그런 뜻입니다.
그러다가 불환과에 들면 감각적인 욕망과 성냄이 완전하게 제거되어 나갑니다.
그로 인해서 오하분결이 사라져버리는 상태가 됩니다. 오하분결이 사라진다 해가지고 완전히 다 끝난 건 아니죠?
오상분결(五上分結, Uddhabhāgiya saṁyojana)이라고 하는 것이 남아있는데, 그 다섯 가지는 아라한이 됐을 때 사라져가는 그런 부분입니다.
(수행자 질문)
예. 아만(慢 māna), 여기서 아만이라고 하는 것은 뭐냐 하면 「나」라고 하는 개념은 있다는 것이지, 예를 들어가지고 내가 수행을 강하게 많이 했을 때, 내가 만약에 죽음에 이르렀다. 죽음에 이르고 나면 ‘아, 내가 죽고 나서 완전하게 깨달음에 이르지 않았을 때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그런 마음들은 생겨나게 돼있습니다.
불환과에 이르게 됐을 때는 거기서 깨달음에 이르게 되지만 그런 상태라고 하더라도 그런 마음은 들게 된다는 얘깁니다.
(수행자 질문)
웃닷짜(uddhacca)는 들뜸 부분이고, 그거는 내가 일상적으로 수행해나갈 때 들뜸들이 일어났을 때 그걸 얘기하는 것이고, 그거 말고 「나」라고 하는 개념들, 「나」라고 하는 것은 미세하게 남아있는 상태가 됩니다.
(수행자 질문)
그렇죠. 탐·진·치가 완전히 떨어져 나간 상태는 아닌데, 다섯 가지 큰 거친 번뇌들은 이미 떨어져 나가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감각적인 욕망이 일어난다든지 성냄이나 이런 것들이 일어난다든지 그런 부분들 하고는 틀리고, 나라고 하는 개념들, 나라고 하는 것들은 아직까지 미세하게 남아있다는 상태가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죽음에 이를려고 할 것 같으면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경우들도 일어나는 거고.
(수행자 질문)
그건 아니죠. 그건 안 일어나죠. 그래서 예를 들면 사선정에 들고자 하는 마음들도 일어나지고, 또 사선정 이상의 멸진정에 들고자 하는 그런 마음들도 일어나지고 그런 마음들도 일어납니다. 그 얘기는 뭐냐 하면 '나'라고 하는 개념들이 미세하게 남아있기 때문에 원하는 바가 자꾸 생겨난다는 겁니다.
(수행자 질문)
예. 그거는 원해서 그런 것이 아니고 부처님 자신이 수행에 들면서 자동적으로 거쳐나가게 되는 겁니다. 자동적으로 거쳐나가고 거쳐나가고, 그러니까 원래 깨달음을 이룬 아라한은 선정 상태에서 열반에 듭니다. 예. 자동적으로 되어나가다가, 호흡이 그러면서 일순간 자연적으로 스톱을 하는 상태가 됩니다.
(수행자 질문)
아라한이 일선정에서 열반에 들었으면 어떻고, 이선정에서 열반에 들었으면 어떻겠어요? 그건 전혀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거든. 그런데 선정 상태에서 들다가 보니까 자연스럽게 그런 순간에 끊어졌다 하는 겁니다. 그걸 일반적인 사람들은 모르는 것이고 알고 있는 아라한만이 "아, 부처님이 이 상태에서 열반에 들었다"하고 얘기를 하는 것뿐입니다. 그렇습니다. 됐습니까?
우리가 이렇게 주변적인 상황들은 어떤 형태들이나 소리들이나 아니면 냄새들이나 아니면 맛들이나 이런 것들에 항상 접촉을 하게끔 돼있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살아가는데 그게 핵심입니다. 핵심인데 그걸 얼마만큼 내 것으로 잘 소화하느냐 하는 것이 관건이다 하는 그런 뜻입니다.
그런 걸 하기 위해서 여러분들은 반드시 필요한 것이 이런 집중을 계발을 해야 됩니다. 수행을 통해서 어떻게 내가 다스려나가고, 또 이걸 어떻게 조화롭게 내 것으로 만들 것인가 하는 것들입니다.
보통 여러분들 「깨달음에 이르기 위해서 필요한 일곱 가지 요소」 그렇게 얘기합니다. 「칠각지」 라고 얘기하죠. 삼보장가(sambojjhaṅgā)라 해서 그것도 큰 맥락에서 보면 거의 이런 일상적인 수행과 별반 다른 것은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한번 경험을 해보시기 바랍니다. (48:07)
자, 고요하게 앉아서 눈을 감고 호흡을 한번 해보시기 바랍니다.
편안한 자세로써 '일어남' '사라짐' '일어남' '사라짐' 하면서 가장 자연스러운 호흡을 해보시기 바랍니다.
들이쉬고 내쉬고 하는 호흡을 알아차려 나갈 때 '아, 이것이 호흡이구나' 하는 걸 내가 알고,
들이쉬고 내쉬고 할 때 '배가 팽창되고 수축되고 하는 그런 느낌'들을 알고,
들이쉬고 내쉬고 하는 것을 '알아차리는 마음'을 알고,
들이쉬고 내쉬고 하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을 한 번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쭉 알아차릴려고 하는 그런 '마음의 요소들'을 알고,
그것이 바로 사띠 삼보장가(sati-sambojjhaṅgā)입니다.
알아차림의 요소가 먼저 깨달음의 요소로써 먼저 자리를 하게 돼있다는 겁니다. 누누하게 사띠를 강조를 하는 것이 이런 이유들 때문입니다.
알아차림하고 기민함이 확고하게 유지돼서 그런 것이 유지돼나가기를 내가 또 결심을 해야 되는 것이고, 어떤 것이 일어나더라도 일어난 것은 내가 알아차리겠다, 사라지면 사라지는 것을 알아차리겠다 하는 마음을 가지고, 그런 의도를 가지고, 그런 결심을 해서, 집중을 해보시면 여러 가지 산만한 장애들이 일어나더라도 물리쳐나갈 수가 있습니다. 그런 산만한 장애들을 물리쳐나가는 것은 사띠가 있어서 가능한 겁니다.
이것이 깨달음의 요소로써 맨 첫 번째 요소 사띠 삼보장가 입니다.
그러고 나서는 내 지금 호흡의 상태를 관찰을 합니다.
호흡이 팽창되면서 퍼져나가는 양태들을 알고,
그 호흡은 해로운 것들은 내 몸을 안정되지 못하게 해서 버릴 줄도 알게 되고,
고요하고 자연적인 호흡은 나에게 이로운 호흡이라서 그 호흡을 계속할려고 하고 육성을 할려고 하고,
그래서 현재 내 호흡의 상태를 스스로 분석해서 알게 됩니다.
그래서 가장 편안한 호흡, 가장 자연적인 호흡을 들이쉬고 내쉬고 하는 것을 끊임없이 할려고 하게 되는 것,
그것을 담마위짜야 삼보장가(dhammavicaya-sambojjhaṅgā) 라고 그럽니다.
현재 내 상태, 내 자질을 분석해서 깨달음의 상태로 나아갈려고 하는 것들입니다.
일단 호흡이 그렇게 하므로 해서 깨끗하고 맑게 되는 상태들을 내가 알게 됩니다. 몸도 편안해지고 그로 인해서 마음도 편안해집니다. 이와 같이 몸이 정화돼나가면 말도 정화돼나가고, 생각도 정화돼나가는 것이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됩니다. 지금 경험하고 있는 것은 편안함과 즐거움들입니다. 그것이 호흡이 거칠든 미묘하든 이 호흡을 잘 보살펴보는 상태, 이것을 담마위짜야 삼보장가라고 그렇게 합니다.
현재의 자질 상태를 명확하게 분석해서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것.
그래서 이때부터 몸과 마음의 관계를 이해를 하게 되고 더 꾸준히 수행을 하다 보면 호흡을 잊어버리거나 포기하지를 않을려고 합니다. 그 상태가 그마만큼 고요하고 평온하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호흡에 내가 달라붙는 느낌이 듭니다. 또 호흡이 내 알아차림에 탁 달라붙어 있는 느낌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더욱더 알아차림이 강해집니다.
그것이 바로 위리야 삼보장가(viriya-sambojjhaṅgā) 입니다.
꾸준하게 노력하는 요소들이 계발되어나가는 겁니다.
처음엔 마음을 강하게 먹어도 마음이나 몸이 흐트러져버립니다. 그런데 그런 마음이 해이하도록 놔두질 않고, 마음의 상태를 잘 주시하고 호흡에 주의를 해나가는 것, 어려움이 몸에서 생기든 마음에서 싫증이 나더라도 그것을 더 키우지는 않습니다. 장애가 나타나더라도 내가 비록 목숨을 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꾸준하게 호흡을 관찰해보겠다 하는 그런 마음들이 점점 더 강해지는 것이 위리야 삼보장가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이렇게 해서 마음이 고요하고 호흡이 신선해지게 되면 삐띠 삼보장가가 일어나집니다. 몸에서는 하얀 깃털 같이 고요하게 떠는 느낌들도 들고, 오점 하나 없이 그렇게 부드럽구나 하는 상태들을 알게 되고, 그래서 그런 들뜸 들로부터 내가 해방됐구나 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는 것을 삐띠 삼보장가(pīti-sambojjhaṅgā)라고 그럽니다.
이럴 때는 마음이 편안함과 동시에 충만감으로 꽉 차 있다 하는 느낌을 받습니다. 만족감과 기쁨이 오면서 점점 일어나게 되는 겁니다. 이때는 호흡이라고 하는 것이 내가 알아차리는 것의 지휘 아래 있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일어남'하는 알아차리는 것이 짧으면 호흡도 그마만큼 짧아지고, '사라짐'하는 것이 알아차리는 것이 길면 호흡도 긴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내가 인제 내 마음이 알아차리는 마음이 육체적인 호흡을 조절하는 듯이 느껴집니다.
그래서 길게 들이쉴 때 길게 알아차리는 것이 아니라, 길게 알아차리는 것으로 인해서 호흡이 길게 되는 상태들을 경험하게 되니까, 내 마음으로 인해서 육체적인 호흡을 조절하는구나 하는 마음으로 '마음이 앞선다' 하는 사실을 알게 되는 상태가 됩니다. 실제적으로는 호흡이 길어진다든지 짧아진다 하는 것은 아닌 상태입니다. 그래도 그렇게 느껴지는 상태라. 그런 기쁨들이 일어나는 상태를 삐띠 삼보장가라고 그럽니다.
그러다 호흡이 평화롭고 온몸을 통해 고르게 되는 느낌이 일어나지게 될 때 마음도 평화로워집니다. 성가시게 하는 것들도 느껴지지 않고 또 스스로 일으키지도 않는 상태가 되는 것, 이걸 빳삿디 삼보장가(passaddhi-sambojjhaṅgā) 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마음이 대상에 밀착되어 있어서 소리가 귀에 들리기도 하고, 냄새가 맡아지기도 하지만 그런 것에 그런 주위의 산만함에 마음이 쫓아가질 않습니다. 마음의 장악력이 강해졌기 때문에 그런 외부적인 자극에 동요되거나 또 마음이 느슨해지지 않는 상태가 됩니다. '알아차리는 것은 단지 알아차리는 것뿐이구나' 하는 상태를 알아서 몸도 마음도 평온을 유지하게 됩니다. 그걸 빳삿디 삼보장가 라고 그럽니다.
그러다가 호흡이 점점 더 확고해지고 흔들리지 않는 상태, 마음은 하나로 몰입하게 되는 태도를 취하게 됩니다. 그것이 사마디 삼보장가(samādhi-sambojjhaṅgā) 입니다. 하나의 대상에 몰입해 들어가는 것, 알아차리는 것이 확실하고, 그런 알아차리는 것에 대해서 앎이 일어나게 되고, 또 내가 어떤 것을 보더라도 너무나 명확하게 보고 알게 되기 때문에, 자신의 상태를 분명하게 파악을 합니다.
일어나는 것과 그리고 일어난 것이 사라지는 것이 어디로 사라지는 것인가 하는 것을 명확하게 알게 됩니다. 이것이 조금 더 지나치면 원인·결과를 알아서 자신의 업의 상태를 알아차리게 됩니다. 그것이 사마디 삼보장가 입니다.
조금 더 넘어가면 다른 사람의 지금 현재의 호흡 상태나 그 원인·결과를 인지하게 까지 됩니다.
이렇게 들이쉬고 내쉬고 하는 상태 속에서 호흡이 아늑하게 돼나갈 때 마음이 이러한 호흡의 상태에 머물르게 될 때는 마음은 어떤 것도 새로 만들지를 않습니다.
주위적인 환경조건에 의해서 동요되는 것은 이미 없어져 버렸고, 단지 몸과 마음에서 일어남 사라짐만 있다는 사실만 알게 되고, 마음이 어떤 것도 형성할려고 하지 않는 것, 옳거나 그르다는 그런 것들을 쫓아지지도 않게 되고 그대로 그냥 놓아버리는 상태, 이것이 맞다 틀리다 하는 것조차도 놓아버리는 상태, 이런 상태를 우뻭카 삼보장가(upekkhā-sambojjhaṅgā) 라고 합니다.
평온, 균형을 갖춘 그런 깨달음의 요소가 계발되었다 하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어떤 것도 붙잡을려고 하지 않고, 어떠한 다른 꺼리들도 만들지 않는 상태, 몸과 마음은 이미 이완감으로 인해서 고요해지게 돼있는 상태입니다.
이렇게 집중의 힘이 점점 더 강해지고 알아차림이 명확해졌을 때는 원인·결과와 그 원인을 해소하는 방법들을 스스로 명확하게 볼 수 있게 됩니다.
자, 눈을 떠보십시오.
그게 칠각지입니다. 칠각지가 어려운 거 아니죠?
괜히 삐띠 삼보장가, 우뻭카 삼보장가, 열심히 그 뜻을 외워도 그건 별 소용이 없습니다. 내가 수행에서 이런 상태를 경험하면서 아, 이것이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요소구나 하는 걸 알게 됩니다.
그런 삼보장가가 계발되고 나가면, 그다음에 열려지는 부분들이 뭐냐 하면
「팔정도(八正道, Ariya aṭṭaṅgika magga)의 길」들이 쭉 열려져 나오게 됩니다.
어떻게 하면 내가 보는 관점들 하고 호흡의 관점을 일치시켜나가는가 하는 것들 삼마딧티(sammā diṭṭhi)라고 보통 얘기하죠. 바른 견해(正見) 이렇게 얘기합니다.
그 바른 견해를 뭐 사성제의 진리를 알고 삼법인의 진리를 알고 이렇게 구구하게 알 필요도 없이, 어떤 것이 원인이고 원인을 해소하는 방법이 무엇이고, 또 결과는 어떻게 돼나가고 있는가 하는 것들을 호흡을 통해서 알아차려나가면 그것이 바로 바른 견해가 돼버립니다. 견해라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거기서 내가 방법들을 찾아버리게 됐을 때 그것이 바른 견해입니다.
그렇게 하다 보면 호흡이 불편할 때도 있고 편안할 때도 있고 할 겁니다. 그래서 아, 이것은 이렇게 호흡하면 내 몸과 마음에 불편함을 가져오는 거고, 이렇게 하면 편한 상태를 가져오는구나 하는 걸 갖다가 알게 되게 되고 그런 것을 정사유(正思惟, sammā saṅkappa 삼마-상깝빠) 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래서 호흡의 상태들을 내가 적절하게 배분을 하게 되고, 또 적절하게 평가해서 옳고 그름을 알게 되고 또 생각하고 이렇게 수행을 한다 하는 사실을 끊임없이 연결해나가게 되는 것을 수행에서 올바른 말(正語, sammā vācā 삼마-와-짜-) 이라고 그렇게 합니다. 정신적인 요소로써의 말입니다.
가장 편안한 호흡에 도달하게 될 때 길게 들이쉬는 숨이나 짧게 내쉬는 숨이나 이런 것들에 대해서 길게 들이쉴 때는 길게 들이쉬는 걸 알고 짧게 들이쉴 때는 짧게 들이쉬는 걸 알고, 이런 것들이 바로 바른 행위(正業, sammā kammanta 삼마-깜만따)들이 됩니다.
그러한 행위들을 내가 알게 되는 상태, 이것이 스트레스다 하면 스트레스인 것을 명확하게 알게 될 때 그것은 바른 행위입니다. 내가 하고 있는 행위들이 몸과 마음에 일치돼서 명확하게 알아차리고, 그에 따라서 이것을 분명하게 판단해냈기 때문에 바른 행위들입니다. 그래서 몸이 정화돼나가고 말이 정화돼나가고 또 마음까지도 정화돼나가는 상태가 돼나가게 됩니다.
이런 호흡으로 인해서 바른 행위들이 있고 나면, 어떻게 내가 할 것인가 하는 걸 갖다가 판단을 하게 됩니다. 내 몸에 병이 있다 할 거 같으면 그 병을 다스리기 위해서 어떻게 호흡을 할 것인가 하는 것도 스스로 판단하게 됩니다.
바이러스가 들어오면 바이러스가 들어온다는 사실을 알고 내가 호흡을 어떻게 해서 이걸 몰아낼 것인가 하는 것을 이해를 하게 됩니다. 잘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그걸 갖다가 바른 삶, 정명(正命, sammā ājīva 삼마-아-지-와) 이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렇게 스스로 자꾸 편안해지게 하고 스스로 자꾸 노력하는 것, 이것을 정정진(正精進, sammā vāyāma 삼마-와-야-마) 이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이런 것들은 어떤 것이든 알아차림으로 인해서 가능한 것이다 하는 사실을 알고 알아차림을 끝까지 놓치지 않을려고 자꾸 노력을 하게 되고, 그러한 것들이 끊임없이 이어지게 될 때, 그런 주의 깊음이 끊임없이 일어나서 들어오고 나가는 호흡을 계속 추적해서 알아차려 나가고, 모든 일들에 대해서 번뇌가 일어나면 번뇌가 일어나는 원인·결과를 분명하게 알아서 그걸 해결해나가는 방법들을 알게 되어나가는 것, 그걸 정념(正念, sammā sati 삼마- 사띠) 이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이렇게 될 때 다른 대상에 휩쓸리지 않습니다. 호흡을 할 때도 다른 대상에 휩쓸리지 않고, 어떤 일을 할 때도 다른 대상에 휩쓸리지 않고 바르게 집중을 해나가게 돼나가고 하는 것이 정정(正定, sammā samādhi 삼마- 사마-디) 이라고 얘기합니다.
그것이 바로 팔정도 입니다. 수행에서의 팔정도!
이런 팔정도들이 점점 더 수행 하나에 호흡 하나에 계발되어나가게 되면 일상생활에서도 아, 이게 부처님이 말한 법이구나 하는 것들을 내가 스스로 자꾸 체험해나가게 됩니다.
그렇게 되도록 여러분들이 만들어야 되는 것이 이런 「네 가지 성인의 경지」에서 여러분들이 해나가야 될 부분들입니다.
오늘은 초심자가 많아가지고 어려운 부분은 되도록이면 삭제를 해버리고 했습니다. 지금 아라한과 까지는 프린트물 다 내줬습니다. 불환과까지는 다음 시간에 마치도록 해봅시다.
호흡을 통해서 깨달음에 이르게 되고, 호흡을 통해서 내 몸과 말과 마음을 정화한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인식을 해야 됩니다. 그것을 놓쳐버리고 나면, 그걸 알아차리지 못하면 더 이상의 진보는 없어집니다. 그리고 수다원이고 예류과고 불환과고 하는 것들이 그렇게 높은 단계는 아니다, 내가 도달하지 못할 그런 것은 아니다 하는 사실을 명확하게 알아야 합니다.
나도 이렇게 해나가면 반드시 이 세상에서 살아가면서 성인이 될 수 있구나 하는 사실을 인식을 하고 그대로 자꾸 할려고 그렇게 노력하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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