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수행법문 녹취/네 부류의 성인들 : 담마스쿨

네 부류의 성인들 5. 아라한 (20061103)

담마마-마까 2020. 1. 29. 22:02

네 부류의 성인들 5. 아라한 (20061103)

https://youtu.be/-ZT3CphNWBs

 

오늘은 아라한 부분에 대한 것들을 하겠습니다.

부처님이 사왓디의 아나따삔디까 동산에 있을 때, 거기에 께시라고 하는 말 조련사가 있었습니다.

말은 어떻게 조련하는지 아십니까? 부드럽게 다루기도 하고, 또 엄하게 다루기도 하고, 어떨 때는 부드럽고 엄하게 하는 걸 같이 겸해서 합니다. 그리해도 안 될 때는 어찌합니까? 그리해도 말이 조련이 안 되면.

말을 조련한다는 것은 말이 명마가 되기 위해서 조련하는 겁니다. 명마가 될 자격이 안 되겠다 싶으면 어떻게 합니까? 풀어버립니다. 지금은 죽여버린다는 겁니다.

이 께시가 부처님한테 물어봅니다.

 

“부처님은 부처님 제자들을 다룰 때 어떻게 합니까?”

“이런 거 좋은 일을 하면 좋은 결과가 있다 하면서 부드럽게 가르치고, 이런 나쁜 일을 하면 나쁜 결과가 있다 하면서 엄하게 가르치고, 또 좋은 것은 좋은 결과로써, 나쁜 것은 나쁜 결과로써 이렇게 나타난다 하면서 다 같이 함께 가르치기도 한다” 하고 얘기합니다.

그렇다고 누구든지 다 아라한이 된 것은 아니죠? 아라한은커녕 그냥 콧방귀도 안 뀌는 사람들이 많죠? 그럴 때는 부처님은 어떻게 했겠습니까? 마찬가집니다. 죽여버리는 거하고 마찬가집니다. 버려버립니다.

 

왜 스님이 이 얘기했는지 아십니까? 음! 농땡이 치지 말고 어떨 때는 엄하게 하기도 하고, 어떨 때는 좀 자세하게 설명해주고, 할 때가 있을 겁니다. 그럴 때가 좋은 겁니다이. 그러니까 그거조차도 다 놓아버릴 때가 되면 그때는 여러분들이 그럴 조건들이 안 된다고 스님이 판단을 했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이.

 

자! 아라한 한번 들어가 봅시다.

불환과까지 이르르게 됐을 때, 불환과까지 갔으면 삼법인의 진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렇죠? 삼법인의 진리는 알고 있다고, 통찰을 했다고, 무상․고․무아에 대한 것들을 통찰해서 알고는 있습니다.

 

그런데 근본적인 차이가 아라한 하고 뭐가 있을까?

뭐 오하분결 오상분결 이런 거 다 빼고 딱 하나 차이점이 있다고 할 거 같으면 어떤 차이점이 있을까? 다른 것이 없습니다.

'마음의 뒤바뀜'이라고 보통 얘길 하는데, 생각이 뒤바뀌고, 마음이 뒤바꼈다 하고 그렇게 얘기를 하는데, '좋다'하는 것 '행복하고 좋다'하는 생각이 남아있어서 그것으로 인해서 다음생을 받게 되는 그것만 차이가 나는 겁니다.

아라한은 그것조차도 없어져 버린다는 겁니다. 불환과와 아라한과의 차이를 단편적으로 얘기하라면 그것을 얘기합니다.

 

보통 산냐 위빨라사(saññā vipallāsa), 찟따 위빨라사(diṭṭh vipallāsai), 빨리어 용어로는 그렇게 얘기들을 하기도 합니다. 여러분들도 그런 생각이나 마음의 뒤바뀜이 남아있으면 안 됩니다.

열 가지 오상분결 오하분결 그런 부분들은 버려라 하는 얘깁니다. 나중에 열 가지 오상분결 오하분결 부분을 얘기하면서 간단하게 설명을 하겠습니다. 내가 지금 어떤 수행의 상태에 있든, 어떤 과위에 있든 그것은 차지에 치고라도 이런 부분들은 반드시 버려버려야 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것이 뭐냐 하면 오상분결 오하분결이라고 이름을 붙이는 것뿐입니다.

 

자! 거기 한번 보십시요. 아라한은 보통 뭐라고 얘기합니까?

격렬하게 끓어오르는 욕망이라고 그럽니까? 그런 것들은 삭혀버렸다고 그러죠! 식어버렸다고 그렇게 합니다. 그리고 그게 밖에서 오는 것이든 아니면 내부에서 일어나는 불이든 이런 것들은 이미 다 꺼져버린 상태입니다. 그리고 정신적인 것이나 육체적인 것이나 이런 것에서 오는 편안함이라든지 이런 것들도 다 이미 가지고 있지 않은 상태들입니다. 그럼 뭐로 가지고 아라한은 살아갈 거라? 쉽게 말하면 그런 열정들이 없어져 버린 상태인데. 음?

 

알라위의 상사파 숲에서 했던 그 대화 내용을 여러분들이 잘 알겁니다.

부처님이 가부좌를 틀고 한겨울에 그 상사파 숲에서 좌선을 하고 지내는데, 핫다까 라고 하는 왕자가 지나가다가 그 모습을 봅니다.

“부처님 밤새 춥지 않았습니까? 들짐승들도 온데 돌아다니고 낙엽이 져갔고 온데 나뭇잎들이 뒹굴고 바람도 불어쌌고 이 한갓지고 추위 많은 곳에서 어떻게 그것도 다리를 가부좌를 틀고 앉아가지고 거기서 밤을 지새웠습니까? 안 추웠습니까?”

전혀 춥지 않았고 오히려 편안했다고 그럽니다.

 

그걸 비유로 드는 것이 뭐냐 하면, 편안한 집에 모든 것이 다 갖춰진 곳에서, 편안한 소파나 이런 것들이 다 갖춰져 있는 데서, 아무 근심 걱정 없이 애들 다 잘 자라고 속 안 썩이고, 남편이나 아내도 자기 역할 다 하면서 서로 위해주고 이러는 상태에서는, 또 윗집에서 탕탕거리지 않고, 그런 집에서는 근심 걱정 할 게 없으니까 자면 편안하게 잔단 말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라는 거라. 그런데 그렇게 편안한 상태라 하더라도 누가 속썩이는 것만 있을 거 같으면 뭐가 뒤틀어지죠. 아까 얘기했듯이 위층의 문제라든지 아니면 뭐 가족 중의 문제라든지, 아니면 내 스스로 병을 가지고 있든지 이럴 거 같으면 아무리 환경조건이 좋을 상태라고 하더라도 편히 못 자는 거라. 밤에 깨는 거라.

 

(수행자 질문)

그 얘기는 뭐냐면 육체적인 편안함에 대한 집착들도 이미 여읜 상태에 대한 것들을 얘기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런 번뇌의 욕망들도 다 꺼져버리고 한 상태에서 아라한은, 그렇지만 이 세속적인 열정 같은 것이 없어도 편안하게 잘 살 수 있다고 하는 것을 육체적인 것뿐만 아니라 마음으로도 이미 편안함을 다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리고 특별하게 내가 고민하고 고심해야 되고 이런 부분들이 없기 때문에 편안하게 살 수 있다 하는 그런 상태입니다.

혹시라도 거 무슨 재미로 그렇게 아라한이 돼서 살아가느냐 하는 의문을 품을까 봐서 그런 얘기를 합니다.

 

갈망을 억눌러버리고 나면 마음이 편해집니다. 이럴까 저럴까 뭐 어쩌고 하는 갈망들을 눌러버리고 나면. 그런 걸 선택할 필요조차도 없는 거라. 그런 걸 선택한다는 것이 아니라, 선택할 필요성조차도 없는 상태가 될 거 같으면 항상 편히 자게 되고 편히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돼요? 오염될 것이 없어지는 거라. 갈애에 번뇌에 오염되지 않는 거라. 그러니까 항상 청정하게 살아가게 되기 때문에, 나를 얽매여두는 어떤 속박들은 이미 풀려나 버린 상태가 되는 거라. 그런 상태가 아라한의 상태라고 보시면 됩니다.

자! 그러한 상태가 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도 육체적인 고통만 없앨려고 하지 말고 정신적인 고통도 없애도록 하십시오. 없애가지고 마음의 평화를 가지고 오면 고요하고 즐겁게 살아가고 즐겁게 누리게 됩니다이.

곧 그 얘기는 뭐냐 하면 세상에는 번뇌가 참 많이 일어나집니다 일반적으로. 그런데 번뇌가 일어나더라도 현혹되지 않는다는 것은 다른 말로 할 거 같으면 번뇌를 이미 버려버린 자가 돼버린다는 얘깁니다. 현혹되니까 그것으로 인해서 다른 문제들이 발생하고 한다는 거라.

 

빠세나디 왕이 그런 얘기를 합니다.

“부처님, 저는 아라한들을 보면 지극하게 존경을 합니다.”

“왜 그렇게 존경을 합니까?”

“대중들의 이익과 복락을 원하고 그것을 위해서 살아가기 때문에, 나는 어떤 다른 것보다도 그분의 높은 수행의 경지나 그분의 행실이나 아니면 그분의 복덕이나 아니면 지혜나 이런 것보다도, 다른 사람의 행복과 이익을 위해서 살아가는 그 모습 때문에 나는 아라한들에게 존경을 표합니다.” 하고 얘기합니다.

 

아라한이 되고 나면 할 일이 뭐 있습니까?

이미 할 일을 다 마쳤습니다. 자기 스스로는! 그다음에 할 일이 뭐가 있겠습니까?

(수행자 대답)

그렇죠. 사무량심이라 표현을 하기도 하고 어쨌든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살아간다는 거라. 그분들이 바르게 법의 인도하에, 바르게 깨달음에 이르도록 이끌어 주는 일들을 해나가기 때문에 그분들에게 존경을 표한다 하고 얘기합니다.

 

왜 그러면 아라한이 죽고 나면 자취를 찾을 수 없다고 그렇게 얘기하죠? 흔적을 찾을 수 없이, 그러니까 윤회를 하지 않고 그렇게게 됩니다. 그걸 보통 불에 비유해가지고 얘기를 하는데, 불이 타는 여러 가지 요소들이 다하고 나면 꺼져버리는 것이 동서남북 어느 곳으로 가는 것이 아니고 그냥 자취를 감춰버리는 것과 마찬가지다 하고 얘기들을 합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수행자 대답)

왜 남은 찌꺼기가 없습니까? 일상생활을 하고 있는데. (수행자 대답)

그렇죠. 번뇌가 사라졌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왜 그럼 번뇌가 사라지는 거라? 한마디로 얘기를 해봐. (수행자 대답)

딱 한마디로 정리하라 그러면 라고 하는 관념이 없기 때문에!

그거 이상 이하도 없습니다. 그게 없는데 뭐가 지을 게 따로 있어?

 

쉽게 얘기하면 종려나무의 뿌리를 절단해버린 상태에서는 어떤 것도 다시 나지를 않는다는 거라. 어설프게 절단이 될 거 같으면 다시 뿌리가 나게되고, 잎이 나고 하겠지만 뿌리 자체를 절단해버리게 될 거 같으면 그 어떤 것도 없다는 거라.

뿌리라고 하는 게 뭐라? 다른 사람들은 '무명'이라고도 얘기하고 뭐라고도 얘기하지만 그 어떤 것보다도 '나'라고 하는 관념이라. 그것이 제거가 되고 나면 뭐 견해를 가질 이유도 없고 하기 때문에 남아있는 것이 없습니다. 그런 사람은 살아있는 것도 아무것도 없는데, 그거 죽고 나서 얘기할 필요성은 더더구나 없어진다는 거라.

그렇기 때문에 아라한은 사후에 어떻게 되는가 하는 것은 말을 할 필요성 조차도 없는 부분이다 하는 그런 뜻입니다.

 

이런 깨달음을 이룬 아라한들에게는 두 가지 생각이 자주 일어난다고 그럽니다.

그 첫 번째가 뭐냐 하면, 나는 어떤 것, 어느 누구, 어떤 것에도 해를 끼치지 않는다 하는 생각! 그 어떤 대상이 약한 것이든 아니면 강한 것이든 아니면 단단한 것이든 그런 생각이 자주 일어난다고 그럽니다.

또 두 번째는 뭐냐면 불건전한 것들은 모두 나에게서 다 파괴되었다 하는 생각! 그런 것들이 일어난다고 그럽니다.

 

그렇지만 생각이 일어난다는 거하고 집착을 한다는 거하고는 다릅니다.

몸이 아픈 거하고 아픈 것을 아프다고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거하고는 또 다릅니다.

부처님도 아팠죠? 설사도 하기도 했습니다. 또 정신적인 부분들도 괴로움을 당한 부분들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정작 본인이 괴로움을 당한 것은 아니죠? 육체적인 문제로 인해서 마음의 괴로움을 당한 적이 없습니다. 외부적인 문제들 그런 잡다한 일들을 가지고도 마음에 괴로움을 당한 적이 없다 하는 겁니다.

 

(수행자 질문)

아라한이라는 것은 이렇게 「나」라는 관념들을 이미 제거했기 때문에, 그다음에 해야 될 일은 틀림없이 다른 사람들의 이익과 행복을 위해서 살아가게 된다 하는 그런 겁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아프다고 하면 누가 옆에서 병간호해줄 사람이 몇명 있습니까? 없습니까? 큰일 났네. 자식이 하든 안 그러면 부모가 하든지 누가 하든지 하죠? 친구가 해주기도 합니다. 진짜 뭐 병이 들어가지고 꼴락꼴락 해쌌는데 아무도 간호해 줄 사람이 없다 그러면 그건 슬픈 게 아니고 인생 헛산 거지. 그래도 대부분이 사람들은 아플 경우에 누가 돌봐주게 됩니다.

 

부처님이 보기에는 세상 사람들이 다 아픈 사람들이라. 그걸 안 돌봐주고 넘어갈 수 있겠습니까? 그럴 순 없겠죠? 평범하게 여러분들도 주위에 아픈 사람이 있으면 마음이라도 '아고, 저걸 어쩌나'하고 신경을 쓰는데 하물며 아라한들이야 더 말할 필요가 있겠느냐는 거라.

여러분들도 마찬가집니다. 비록 지금은 아라한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아라한이 될려고 노력하는 자들입니다. 지금 주변에 아픈 사람이 있으면 아픈 사람 돌봐 줘야 됩니다. 서로가 서로를 돌봐주지 않으면 누가 돌봐주느냐는 거라.

 

"법을 따르는 자는 반드시 서로가 서로를 돌봐줘라" 하고 부처님이 얘기합니다. 아픈 비구, 이질에 걸린 비구를 부처님이 직접 몸을 씻기고 아난다에게 발을 씻기게 하면서, 씻겨주고 나서 비구들에게 했던 얘기입니다.

“서로가 서로를 돌보지 않고 어떻게 너희들이 나의 제자라고 할 수 있느냐?” 합니다. 여러분들도 가끔씩 주변에 사람들을 돌아보십시요이.

 

(수행자 질문)

정신적으로 괴로워했다는 얘기가 아니고, 괴로움을 당했다는 얘깁니다.

쉽게 말하면 마지막 열반하기 전에도 독버섯을 먹고 설사가 바로 나고, 또 아니면 등이 아파가지고 쉬기도 했단 말입니다. 그거는 육체적으로 괴로움을 당했다는 얘깁니다. 정신적인 괴로움을 당했다는 얘기가 아니고.

(수행자 질문) 독버섯입니다.

 

아라한이 된 분들은 깨달음에 이루고 나서 공통적으로 하는 얘기들이 있습니다. “이제는 번뇌에서 벗어났다. 그리고 해야 할 일들을 다 해 마쳤다. 그래서 나는 다시는 태어남이 없다. 더 이상 해야 될 높은 수행을 다 마쳤다. 그런 얘기들을 합니다. 그러죠? 거 왜 그렇겠습니까? 스스로 알기 때문에 그렇죠!

아라한이 되고 나면 그다음에 반드시 생겨나는 것이 스스로 “아, 내가 이렇다”하는 것을 압니다.

예류과나 일래과나 불환과는 알까요? 모를까요? 명확하게 모릅니다. 어떨 때는 내가 불환과 같기도 하고 어떨 때는 내가 아, 불환과가 아직 안됐나? 예류과 인가?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스스로는 다 자기의 상태들을 압니다. 그런데 아라한 같이 명확하게 앎이 일어나는 것은 아니라는 겁니다. 그 차이가 납니다.

 

자! 그럼 열 가지 족쇄 한번 봅시다.

오상분결, 오하분결 프린트물에 보십시오.

(수행자 질문)

틀린 단어입니다. 저는 그건 모르겠습니다. 다른 스승들에게 물어보십시오.

(수행자 질문)

아닙니다. 처음에는 '보살'이라고 하는 개념이 '보디삿타'라고 해서 부처님의 과거전생을 얘기할 때를 보살이라는 용어로써 썼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깨달음을 이루신 분은 아니죠! 그런데 이제 후대에 와지면서 그 용어들이 자꾸 변해나갑니다. 각각의 보살들이 생겨나고, 그래서 후대의 일은 저한테 물어보지 마십시오.

 

거기 프린트물에 있습니다. 프린트물을 안 나눠줬습니까? 안 읽어왔구만.

 

오상분결, 오하분결 그렇게 돼있습니다. 맨 처음에 오하분결이 뭡니까?

 

유신견(sakkāyadiṭṭhi)이죠! '나'라는 것이 영원하게 존재한다는 그런 견해입니다. 그래서 내 이 몸이 죽더라도 영혼이 저쪽으로 옮겨가고 어쩌고 저쩌고 하는 여러분들이 잘 얘기하는 그런 영원하게 존재한다는 그런 견해를 얘기합니다.

 

두 번째 뭡니까? 의심(vicikicchā)은 뭡니까? 뭐에 대해서 의심하는 겁니까? 단적으로 얘기하면 부처님에 대해서 의심하는 거고, 부처님의 가르침인 담마에 대해서 의심하는 겁니다. 다른 의심들은 거기에 축에도 안낍니다.

 

그럼 세 번째는 뭡니까? 계금취견(sīlabbata-parāmāsa)은 뭡니까? 뭐 여러 가지 종교의식들을 통해가지고 기도나 아니면 뭐 정근을 통해가지고 죄가 소멸한다, 업장 소멸한다, 아니면 무슨 가피를 입는다, 그거 얘기하는 겁니다. 다른 거 없습니다.

간단하게 얘기들을 합시다이. 가장 주안점이 그것들입니다.

 

그다음에 네 번째가 뭡니까? 감각적 쾌락(욕망)에 대한 집착(kāma-rāga)이죠.

 

그다음에 다섯 번째가 증오, 악한 마음, 원한심(paṭigha) 이런 걸 얘기하는 겁니다. 다 없애야 될 부분들입니다이.

(수행자 질문)

그건 네 번째 얘기한 것이구요, 감각적인 욕망이라는 것은 쾌락을 쫓아가는 집착을 얘기하는 것이고, 다섯 번째 잘 알겠습니까? 마야님.

 

그다음에 오상분결

여섯 번째 뭡니까? 색계에 대한 욕망(rūpa-rāga). 색계가 뭡니까? 한마디로 얘기하면 물질적 존재에 대한 욕망입니다. 어떤 겁니까? '아, 내가 삼매에 들어야지' '삼매가 최고다' 이런 것들을 얘기하는 겁니다.

 

그다음 일곱 번째 무색계에 대한 욕망(arūpa-rāga). 비물질적 존재, 어떤 겁니까? 뭐 죽고 나서 저기 극락세계 간다는 생각 아니면 범천계에 태어나길 바라는 것, 이겁니다. 뭐 다른 게 아니고. 그거 버리라고 지금 얘기하는 겁니다.

 

그다음에 여덟 번째 교만·자만(māna) 하는 것. 특히 인제 법을 배우러 오는 사람들이 이런 부분이 좀 많습니다. 그런 것들은 없애야 됩니다.

 

그다음에 아홉 번째가 들뜸(uddacca). 들뜸을 다른 말로 할 거 같으면 불안하고 초조하고 하는 것들 그런 것들을 얘기합니다. 그것은 전혀 삶을 살아가는데 아니면 깨달음을 이루는데 필요하지 않는 부분들입니다.

 

그다음 열 번째는 뭡니까? 무명(avijjā)은 뭘 무명이라 그럽니까? 뭐에 대해서 어리석음 입니까? 그렇죠. 사성제의 진리에 대한 무지입니다. 그리고 원인에 인해서 결과가 생겨난다는 원인·결과에 대한 무지! 사성제와 원인·결과입니다. 그런 것에 대한 무지를 얘길 합니다.

 

열 가지에 대해서 다시 한번 봅시다.

첫 번째, ''가 영원할 것이다, 영원하다는 생각, 영원하다는 집착 그걸 얘기하는 겁니다. 그게 가장 큰 문제입니다. 다음 언제 시간나거든 여러분들이 한참 헷갈리는 업과 윤회 이런 부분에 대한 것들을 한번 얘기하겠습니다. 바로 볼려고 해야 됩니다. 저번에 그런 얘기들을 사람들끼리 모여서 했다면서요? 어디서 했는지는 모르겠는데 하여튼 그런 얘기들을 했다고 말하던데. 그래서 그런 문제에 대한 것을 내가 한번 짚어 넘어가겠습니다.

그게 바로 영원하다는 생각 때문에 영원하다는 견해 때문에 일어나는 겁니다. 이것을 없애도록 노력을 하십시오.

그다음 두 번째, 법에 대한 의심을 하지 말아라. 부처님에 대한 것도 마찬가지고. 법에 대한 의심을 하지 않으면 당연히 부처님에 대한 의심을 하지 않습니다.

그다음 세 번째가 아, 내가 이걸 하면 구원을 받는다, 죄가 소멸된다, 그런 생각조차도 하지 마십시오. 자기가 지은 것은 자기가 받게 되어있는 겁니다. 안 짓도록 하면 됩니다.

 

그다음 네 번째가 감각적 쾌락, 쾌락은 '빠진다' 그럽니다. 빠지면 헤어나지 못하게 되는 겁니다. 늪과 마찬가지라는 그런 뜻입니다. 그래서 쾌락들이 일어날 때는 아, 이것은 감각적 쾌락에 대한 집착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알고 중단을 하도록 해야 됩니다. 꼭 사람들이 술한잔 먹으면 한잔 더 먹고 싶고 그래서 더 먹게 되는 것과 마찬가집니다. 감각적 쾌락은 늪과 마찬가지다 하는 생각을 해야 됩니다.

그다음에 다섯 번째 증오, 그거는 다른 말로 표현을 할 거 같으면 '악한 마음'입니다. 내가 가진 악한 마음! 화가 일어나든 아니면 남을 미워하는 마음이 일어나든 그것은 내가 악한 마음이구나 하는 생각을 가지고 버려야 됩니다.

 

그다음에 여섯 번째, 삼매를 성취하려는 생각조차도 버려버리십시오. 선정에 들겠다는 생각조차도 아예 버려버리라는 겁니다. 그거 나중에 다 지나가고 나면 별것도 아니고.

그다음에 일곱 번째, 저기 범천계에 태어날려고 하는 것, 내가 이생에서 잘 닦아가지고 다음생에는 더 좋은 몸 받기를 바란다든지 이런 것조차도 버려버리십시오. 이생에서 끝내버리라는 겁니다. 다음생까지 생각을 하지 말고.

그다음에 여덟 번째가 자만하지 말아라. 절대 내가 여기에서 자만하면 거기에서 머물러 버립니다. 더 올라가지 못한다는 거라.

그다음에 아홉 번째, 우리 도반님들이 많이 가지는 것. , 나는 빨리 해야 되는데 왜 안 되나 하는 것, 초조 불안. 그거 전혀 필요 없는 것들이라.

 

그다음에 열 번째는 반드시 노력해서 원인·결과를 확연하게 통찰하려고 하고 또 사성제에 대해서 아, 이것이 부처님이 말한 사성제구나 하는 것들을 갖다가 분명하게 알도록 노력을 해야 됩니다.

 

그런 것들인데 되도록 수행을 할려고 하는 마음들을 많이 가져야 됩니다.

 

맨 먼저 생각을 해야 되는 게 '적절한 장소'가 있는가 하는 것을 찾아야 됩니다. 적절한 장소라는 것은 다른 말로 할 거 같으면 내가 밥 먹고 있을 때 밥 먹을 수 있고, 또 잠자고 싶을 때 잠잘 수 있고 이런 걸 적절한 장소라고 그러는 겁니다. 그게 집이든 아니면 절이든 그거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다음에 '거주처'라고 하는 것은 뭐냐면 남의 방해를 받을 수 있는 곳인가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집이라도 남의 방해를 받을 수 있는 것이라 할 거 같으면 자기 방문 잠가놓고 해야 되는 거고, 그게 맞는 거주처 입니다. 그게 없으면 법당보다는 여기가 편하면 여기가 거주처가 되는 거고, 안 그러면 숲이 편한 거고.

그래서 장소와 거주처는 다른 겁니다. 장소는 수행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들을 적절하게 공급해주고 원활하게 할 수 있는 곳, 거주처는 그런 것들 말고 외부적인 것들로부터 방해를 받지 않는 곳들 이런 것들을 거주처라 합니다. 그래서 장소와 거주처가 분명하게 맞아떨어지는 곳들이 되어야 됩니다.

(수행자 질문) 없습니까? 만들면 됩니다.

 

그다음에 세 번째가 뭐냐 하면 그런 '말'들입니다. ! 최고 조심해야 되는 게 말입니다. 부처님은 선언을 해 놓기는 뭘 말이라고 했느냐면 '법을 듣는 것만 말'이라고 했습니다. 법을 듣는 것! 듣는 게 왜 말이냐고 하겠지만 그게 말입니다. 그리고 최소한 법을 듣고 그 법을 듣고 그 법에 대해서 사유하고 또 도반들끼리 필요 이상 하지 말고, 설혹 수행에 방해되지 않는 범위 내에서 하는 담론, 그 수순들만 말해야 됩니다. 그것도 이십 분 이렇게 넘어가버리면 그것은 잡담이 돼버립니다. 그렇죠.

 

그다음에 또 고려들을 해야 되는 게 뭐냐면 '적절한 사람들'. 쉽게 말하면 좋은 도반이란 얘기죠. 좋은 스승이란 얘깁니다. 아무리 조건들이 맞아도 혼자 하는 것보다 여러 사람들 하고 같이 하는 것이 좋고, 또 혼자 수행하는 것보다는 지도를 받아가면서 하는 것이 더 낫습니다. 그런 것들을 적절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다음에 주의를 해야 되는 것이 뭐냐면 여러분들이 말도 조심을 해야 되는 것이지만 또 주의해야 되는 것이 음식입니다. 음식!

장애가 되고 방해가 되는 것들은 피할려고 해야 됩니다. 고기를 먹지 말라는 얘기가 아니고, 부처님이 자기가 직접 죽이거나 아니면 (나에게 먹이기 위해서 죽인 것이라는) 의심이 들거나 보았거나 한 것들 이런 고기들은 먹지 말라고 한 게 뭐 때문에 그런지 아십니까? 마음에서 번뇌를 일으키기 때문에! 그리고 악한 마음을 일으키기 때문에! 수행에는 끊어야 될 부분들이라는 거라.

 

그게 아니라도 고기는 열 가지 고기를 금해놓은 게 있습니다. 그 나름대로의 이유들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일상적으로 먹는 소고기 돼지고기 먹지 마라 한 적이 없습니다. 영양분이 몸에 필요할 때는 먹어도 관계없습니다. 그런데 수행하는데 아, 이걸 먹으니까 장애를 가져온다 싶으면 그때는 끊어야 됩니다. 그렇다고 영원히 끊어라는 얘기는 아닙니다. 끊어야 될 시점들이 틀림없이 있습니다. 야채도 꼭 마찬가집니다. 음식이 짜고 맵고 하는 것들도 있고 여러 가지 자기가 좋아하는 기호들도 있습니다.

 

마띠까 부인도 스님들이 깨달음을 이루지 못하는 이유들을 가만히 분석해보니까 음식 때문에 그러거든. 사람의 기호에 맞게끔 이 사람은 단 거 좋아하니까 단 음식 만들어주고, 이 사람은 싱거운 거 좋아하니까 싱거운 거 만들어주고 하니까 그 음식을 먹고 그 사람들은 다 편안하기 때문에 몸이 편안하기 때문에 수행해서 다 아라한에 이르렀다 하고 그럽니다.

음식은 최소한의 영양공급을 내가 해가지고 그걸 가지고 내가 깨달음에 이르기 위해 수행을 하기 위한 도구로써 먹어야 된다 하는 겁니다. 그래서 많이 먹을려고 하지 말고 배고픈 느낌만 제거하도록 그렇게 해야 됩니다.

그런 작용들을 하기 위해서 몸이 필요로 할 때는 먹더라도 수행에 장애가 되는 부분들은 피할려고 해야 된다 하는 겁니다.

 

그래서 그 다섯 가지들을 보통 얘기들을 하는데 가장 주의를 해야 되는 것이 말하고 음식이다 하는 사실입니다.

 

아라한은 이 정도로 하고, 밑에 법수행(法修行)과 신수행(信修行) 부분에 대한 것들을 한번 봅시다.

한마디로 얘기해서 법수행은 뭘 법수행이라고 그럽니까? 가르침,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것들을 법을 들어가지고 '아, 이게 참 무상한 것이구나.' '아, 이게 나라고 하는 것이 없다'하는 사실을 아는 것들, 이런 것들을 법수행이라고 그럽니다.

 

신수행은 뭡니까? 예? 그게 몸 신(身)자입니까? 거기 신수행 한자로 적어줬잖아요. 믿을 신(信)자 잖아. '아, 부처님' 하면 부처님에 대해서 환희심이 일어나고, '스님' 하면 스님에 대해서 환희심이 일어나고, 그런 경우들을 얘기합니다. 그래서 그로 인해서 마음이 편안해지고 기분이 좋아지고 침착해지고 하는 그런 것들을 신수행이라고 그럽니다.

 

자기가 어떤 타입이라는 것은 스스로 판단들을 해야 됩니다.

단, 나는 이 방향이 맞다 해서 다른 방향을 내쳐서도 안됩니다. 그것은 깨달음에 이르기 위한 길들에 해당이 되는 겁니다. 그 사람에게는 이게 맞고, 저 사람에게는 저게 맞는 것뿐입니다. 무슨 얘긴지 알겠죠?

예. 그 대신에 이 수행자라 해서 저 수행을 하지 마라는 것도 아니고, 저 수행자라 해서 이 수행을 하지 마라는 것도 아닙니다. 서로 겸하도록 해야 됩니다. 보완적인 관계에 있다는 사실만 알고.

 

맨 밑에 보면 「비록 뼈와 가죽과 힘줄만 남고 몸속의 혈액이 말라버려도, 인간의 힘 인간의 정진 인간의 노력에 의해서 달성해야 할 것을 달성할 때까지는 이 노력을 결코 멈추지 않겠습니다.」 하는 마음을 가져야 된다 하는 겁니다.

 

여러분들이 부처님을 대신하는 스님의 법문을 듣고 환희심을 일으키든, 아니면 부처님이나 불상들을 보고 마음이 편안해지든, 누구든지 이런 노력을 결코 멈추지 않겠다는 마음을 가져야 만이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가 있습니다.

부처님의 제자가 되는 그런 길들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내가 이생에서 반드시 이것을 달성할 때까지 노력을 멈추지 않겠다 하는 마음들을 내고, 삿되고 어리석은 길 따르지 않겠다 하는 마음들을 내도록 해야 됩니다.

 

그다음 밑에 「더하여」 라는 부분들입니다.

쉬운 것 같으면서도 어려운 길이고, 또 어려울 것 같지만 누구든지 나아가야 될 길입니다. 부처님이 위대하고 성인들, 네 부류의 성인들이 위대하다는 것은 우리와 똑같은 조건에서 깨달음을 이루었기 때문에 그것이 더 위대한 겁니다.

우리가 오르지 못할 길이고, 오르지 못할 나무라고 할 것 같으면 그것을 위대하다고 하지 않습니다. 여러분들도 발밑으로부터 한 걸음씩 한 걸음씩 나아가면 진리가 드러나게 됩니다.

 

그 길을 헤매지 않고 깨달을 수 있도록 그렇게 하시길 바라겠습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 다음으로 넘어가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