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수행법문 녹취/네 부류의 성인들 : 담마스쿨

깨달음 - 네 가지 성인 [법문교재]

담마마-마까 2023. 3. 20. 14:56

★ 깨달음 - 네 가지 성인

 

인도에서는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기 전부터, ‘깨달음’ 이라고 하는 말은 알려져 있었습니다. 「깨달음」 이란 어쨌든 쉽게 도달할 수가 없는 살아있는 존재의 최고 상태인 것 같다」라고 하는 말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인도의 성실한 수행자들은 모두 그것이 어떤 것인가 모르는 채 그「깨달음」을 목표로 수행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상황이었기 때문에, 「붓다가 세상에 나타났다」 「석가모니가 깨달음을 얻었다」라고 하는 이야기가 퍼졌을 때, 사람들은 「붓다 ? 깨달음? 그게 뭐야?」 라고 묻는 것이 아니라, 「붓다가 드디어 이 세상에 출현하셨구나!」라고 감탄했습니다.

 

그렇지만 아무도 깨닫지 않았다는 분명한 사실과 부처님만이 깨달음을 체험해서 알았다는 분명한 사실이 있습니다. 그 전까지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깨달음의 내용을, 석가모니가 처음으로 체험하고 알고 나서 곧바로 그 정밀한 체계를 자세하고 유창하게 설명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불교 안에서도 「깨달음」이 어떤 것인가를 잘 알고 있다고는 단언할 수 없는 것 같습니다. 중국이나 일본의 불교에서는「깨달음」에 대한 견해가 크게 2가지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단번에「깨닫는다」라고 주장하는 이른바 「돈오」설과 서서히 깨달음을 열어 마지막에 완전하게「깨닫는다」라고 하는 이른바 「점오」설입니다. 학계에서는「초기에는 대승과 같이「깨달음」을 한마디로 설명하고 있었지만, 후에 그「사상」을 「소승」이 4단계로 분류 발전시켰을 것이다」라고 설명합니다만, 초기경전이나 거기에 기초를 두는 상좌부, 설일체유부 등의 부파 불교가 기초되어 대승이 성립 발전했으니까, 빨리 경전이나 부파불교에 확실히 남아 있는 깨달음의 4단계가 대승경전을 제작할 때에 고의로 누락되었다라고 생각하는 것이 타당합니다.대승경전을 제작한 사람들이 깨달음의 구체적인 내용을 이해할 수 없었는지, 흥미가 솟아오르지 않았던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대승경전에도 깨달음의 4단계의 일면을 볼 수 있습니다. 언젠가는 완전한 깨달음을 여는 것이 결정된 「불퇴전(不退轉) ‧ 정정취(正定聚)」의 과위는 제 1단계 예류과에 해당되며, 죽음이후 다시 태어날 때는 그대로 깨닫는다고 하는 「일생보처(一生補處)」의 과위는 3단계 불환과의 영향을 받고 있겠지요. 그렇지만 모두 단편적이어서 완전하게 갖추어져 있지 않습니다.

무엇보다도 부처님 자신이 「깨달음은 차례차례 완성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에「돈오」와 「점오」의 문제는 처음부터 일어나지 않아야 할 것이었던 것입니다.

 

깨달음은 수행자가 얻는 4개의 결과라고 말해지듯이 4단계가 있습니다.

예류과, 일래과, 불환과의 순서에 한 단계씩 나아가 아라한과로 완성합니다.

「단계로 나아간다」란 번뇌가 순차적으로 사라지고 동시에, 그 만큼 지혜가 서서히 나타나는 것입니다.

크게 나누면 욕구와 분노와 무지의 3종류, 세세하게 나누면 1,500여 종류가 있다고 말해지는 번뇌의 하나하나가 사라질 때에 그 만큼 지혜가 나타납니다.

불완전해도 예류과도 이미 깨달음입니다. 초전법륜 후에 예류과에 든 꼰단냐를 안냐꼰단냐(깨달은 꼰단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류과 이전의 단계도 있습니다. 불법으로 향해 마음이 변함없이 향하고 있는 상태로, 아직 예류과는 되지 않지만 결코, 깨달음의 길로부터 멀어지지 않습니다.

이것은 예류과로 향할 단계이기 때문에 예류향이라든지 예류도라고 불립니다.

4개의 향(도)과 4개의 과, 전부 8 종류가 깨달은 사람과 깨달음으로부터 멀어지지 않는 사람 즉 성자의 그룹입니다. 그 이외의 사람은 범부중생입니다. 상가와 재가를 포함한 4쌍8배라 불리는 이 사람들이 넓은 의미의 부처님의 가족입니다.

부처님의 가족이 되면 아라한과에 이를 때까지는 괴로움도 고민도 아직 있지만 서로 서로 도울 수 있기 때문에 편안합니다.

이제 쌍으로 나누어 예류과 부터 아라한과 까지 살펴보겠습니다.

 

1. 예류과

 

예류과로 사라지는 번뇌는 무지에 기초를 둔 3가지 번뇌만이 사라집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깨달음을 결정짓는 3가지입니다.

 

첫 번째는 「유신견(有身見)」 이라고 불리는 번뇌입니다.

이것은 욕구도 분노도 아니고 무지로 분류되는 잘못된 견해, 사악한 견해입니다.

「나의 몸」, 「나 라고 하는 심신 집합체」등, 어쨌든 「나」라고 하는 것이 있다는 착각이 우선 사라집니다. 수행하거나 집중해서 부처님 가르침을 듣는 중에 일순간도「나」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는, 아무것도 없는 순간을 「경험」해서 「아! 「나」라는 것이 있는 것이 아니구나」라고 납득한 지혜가 생겨나서 유신견이 사라집니다.

「무상을 깨닫는, 무아를 깨닫는 것이 불교다」라고 말해지는 그 무상, 무아를 일순간만이라도 「체험」해서 「내가 있다」라고 하는 사악한 견해, 번뇌가 단순한 지식으로서 아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사라집니다.

 

두 번째와 세 번째는, 첫 번째의 유신견이 사라지면 자연스럽게 사라지는 번뇌입니다. 「의(疑)」와 「계금취(戒禁取)」입니다.

 

두 번째 「의(疑)」는 「무엇이 진실한가 모르는 채 우물쭈물 하고 있는 것」 입니다. 예류과를 깨달으면 이런 상태나 진위를 오인하는 것이 없어집니다.

진리를 눈앞에서 확인하여 아무런 의심도 없고 우물쭈물 헤매지 않기 때문에 결과도 곧바로 나옵니다.

우리도 무상, 무아를 실제로 「체험」해 예류과가 되면, 「아, 역시 이것이 진실이구나」라고 알아 이 길을 의심하지 않게 됩니다. 그 후는 이제 「저쪽의 종교도 좋을까, 여기의 명상법도 좋을까」등 우왕좌왕 하지 않습니다.

 

세 번째 사라지는 번뇌는 계금취(戒禁取)입니다.

이것은 관례나 고행 등에 구애되는 것입니다. 이 조건도 예류과를 깨달으면 사라집니다. 어떠한 관례도 약속한 일의 형태도 각각의 방법, 문화이기 때문에 어떻게 해도 자유롭지만 「내가 하고 있는 것만이 올바른 것이다, 이것이 아니면 안 된다」라고 구속되면 그것이 계금취입니다.

진리가 아니라 자신이 결정한 습관에 자신이 속박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 태도는 예류과의 사람에게는 사라지고 없습니다. 다만, 모든 것은 무상이라고 알고 있기 때문에 격렬한 집착은 줄어듭니다.

 

* 예류과의 특전

예류과에 이른 사람은 진리를 일순간만이라도 「체험」하고 있기 때문에, 그 정도만으로도 마음은 확 달라집니다. 마음이 바뀌어 버렸으므로 마음이 결정하는 그 후의 진리도 깨달음의 방향으로 크게 전환됩니다.

우선, 예류과가 된 사람은 언젠가 반드시 완전한 깨달음을 얻어 최고의 아라한과에 이르게 됩니다. 이제 결코, 완전한 깨달음으로 향하는 길로부터 물러날 수 없습니다. 완전한 깨달음에의 성스러운 흐름에 들어갔으므로 예류과라 불립니다.

 

「예류과의 사람은 7번까지 윤회하여 천계나 인간 세상에 다시 태어날 수 있지만, 지옥, 축생, 아귀계에 태어나는 것은 결코 없다」라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윤회의 자체는 괴롭지만, 그 중에서도 선 정취에만 윤회하니까, 예류과의 사람은 당연히 지옥에 떨어지는 6가지 악업만은 할 수 없게 됩니다. 어머니를 죽임, 아버지를 죽임, 아라한을 죽임, 부처님의 신체를 손상시킴, 불교의 상가를 이간질시킴, 부처님의 가르침을 비방하거나 가짜를 유포시킴. 이 6개의 악업만은 예류자는 거부 반응을 일으켜 행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6개의 악업 외는 아직도 범할 수 있습니다. 그만큼 아직 인격은 불완전합니다.

 

다만 예류자는, 어떤 악업을 행할지라도 그것을 숨기거나 속이거나 할 수 없습니다. 자신의 악행을 정직하게 고백해 참회합니다. 자신이 범한 악을 계속 숨기거나 숨기기 위해서 속이거나 거짓말을 하거나 하는 그 마음을 견딜 수 없기 때문입니다.

 

2. 일래과

 

예류과에 이르고 나서는, 설법을 듣는 것만으로는 다음 단계로 진행되지 않습니다. 명상 수행을 하여, 이제 순간순간 「내가 없다, 아무것도 없다」란 사실을 「체험」하면서 제2단계인 일래과에 이릅니다.

일래과에서는 유신견, 의, 계금취의 3결은 당연히 사라지고 그 외에 욕구, 화냄, 무지의 3가지 번뇌가 모두 약해집니다. 그것뿐입니다.

그러나 「이전과 같이 격렬하고 끈질기게 갖고 싶어 하지 않게 되고, 격렬하고 끈질기게 화내지 않게 되고, 이전보다는 모든 것을 명석하게 처리할 수 있게 되었다」등, 마음의 레벨은 향상되고 있습니다.

 

* 일래과의 특전

일래과에 이르면 윤회가 단 1회만으로 끝나게 됩니다. 완전하게 깨달은 것도 아니고, 선정에 들어 범천계에 노니는 일도 아직 할 수 없습니다. 완전한 깨달음을 위해서 다시 한 번 더 재도전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다시 한 번 더 이 세계로 돌아오기 때문에 「일래과」라고 불립니다.

완전한 깨달음을 위해서 다시 태어나는 환경과 생애는 물론 지옥, 축생, 아귀의 세계로 윤회하지도 않고, 즐거움만 누리는 천계에서도 수행할 수 없으므로 수행해 깨달음을 완성시키기 위해서 인간 세상으로 다시 태어납니다.

또, 번뇌가 약해져, 그 만큼 지혜가 나타나기 때문에, 사람들로부터 더욱 더 신뢰됩니다.

 

3. 불환과

 

일래과를 넘어 불환과에 이르기 위해서는, 최소한 한 번 더 「무아」를 「체험」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렇지만 일래과에 이른 수행자가 다음에 불환과에 이를 때는 대부분의 경우 명상수행에 익숙해서 선정에 들어, 선정의 세계, 범천계를 체험하고 있습니다. 일순간의 「무아」뿐만이 아니라 압도적인 선정 체험이 불환과에 이르는 열쇠가 됩니다.

 

육도 윤회의 환경과 생애는 전부 욕계, 감각만으로 성립되고 있는 세계입니다. 축생의 일부는 눈이나 귀가 듣지 않는 생명도 있고, 반대로 천인에는 눈이나 귀의 감각만이 있어 혀나 신체에서는 감각을 받지 않는다고 합니다만, 그러한 생명을 전부 정리해도 결국은 오감의 어떤 것인가로 감각을 받아 6번째의 감각인 마음으로 맛보고 있는 생명의 세계입니다.

이 육도 윤회의 환경과 생애에는, 어떤 수행이 없어도 다시 태어날 수 있습니다. 지옥이나 축생이나 아귀로 다시 태어나는 것은 간단합니다. 눈이나 귀로부터 들어오는 정보에 근거해 화내거나 원망하거나 갖고 싶어 하거나 타인을 부러워하거나 하면 됩니다. 인간이나 천인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은 조금 큰일이지만, 그런데도 같은 눈이나 귀로부터 들어오는 정보에 근거해 자애의 마음을 가지거나 그 마음으로 타인을 위해서 무엇인가 실천해 주면 됩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수행이나 명상 등을 할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보통 생활을 하는 것만으로도 육도의 어떤 것인가로 다시 태어나 괴로워하거나 즐거워하거나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욕계입니다.

 

명상 수행에 익숙해져 눈이나 귀 등의 오감에 의지하지 않고 6번째의 감각, 마음으로 생각하는 망상도 전혀 없는, 마음이 순수한 상태에 이르면 그것이 선정입니다.

신체도 망상 개념도 전부 떼어내고 마음만이 온화하게 생멸을 계속합니다.

그러나 이 선정상태도 깨달음은 아니고 윤회의 세계입니다. 마음이 모든 감각으로부터 멀어져서 마음만이 생멸을 계속하지만 그 에너지가 다해 멸한 것은 아닙니다. 선정으로부터 떠나 육감의 세계로 돌아가면 그 전대로의 신체나 개념이 돌아옵니다. 선정상태는 번뇌를 멸해 지혜가 나타나는 깨달음 상태는 아니고, 번뇌가 단순한 휴지 상태인 것입니다.

 

선정에 이르러 마음만으로 그 선정 세계에 놀 수도 있습니다만, 선정에 이른 사람이 죽으면 선정 상태에의 집착이 강하고 반대로 이 보통 욕구의 세계에의 미련이 없기 때문에 선정의 세계로 다시 태어납니다. 이 선정의 세계를 범천계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거기에 사는 생명은 천인, 신들과는 비교가 안 되는 레벨의 범천으로 불리는 생명입니다. 수행하지 않으면 달성되지 않는 특수한 환경과 생애라고 할 것입니다.

불환과에 이른 대부분의 사람이 선정상태에서 범천계를 체험하고,「무아」를「체험」해서 신체로 감각을 맛보는 욕계에의 집착만은 완전하게 사라져 버립니다. 욕계에의 집착이 완전하게 사라지기 때문에 불환과에서는 마음을 욕계에 연결시키는 다섯 종류의 집착인 오하분결(五下分結)이 모두 사라집니다.

그 다섯은 유신견, 의, 계금취의 3결과 욕구, 화냄 이렇게 다섯입니다.

 

일래과와 차이점 없어 보이지만,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 있습니다. 일래과에서는 약해질 뿐이었던 하계, 욕계에의 집착 번뇌가, 불환과에서는 완전하게 사라져 버립니다. 불환자의 마음에는 이미 속세에 대한 욕구도, 분노도 없기 때문에 이 세계에 관한 모든 일로 마음은 이제 흔들리지 않습니다. 다만 담담하게 일상생활의 일을 해내며 보낼 뿐입니다. 배가 고픈들, 신체를 유지하기 위해서만 무엇인가를 거두어들입니다. 이 세상에의 집착이 완전히 사라진 만큼 지혜가 꽤 대담하게 나타나기 때문에 다른 생명에 대한 자비가 흘러넘치는 조용한 성자라고 하는 기분이 듭니다. 그 대신 불환과에서는 선정을 즐기므로 범천계의 집착만은 남습니다.

 

「무아」를 「체험」해 불환과에 이른 사람도, 욕계에의 집착은 사라지지만, 욕계가 아닌 맑고 깨끗한 상태에의 집착이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불환자가 이 세계에서의 생이 끝나면 범천계로 다시 태어납니다. 범천계에는 부모의 신체로부터 태어나는 것이 아니므로 불환자를 화생자라고도 말합니다.

이 욕계에는 다시 태어나지 않기 때문에 그 점에서 최고의 아라한과와 닮아 있지만, 범천계로 다시 태어나므로 다시 한 번 더 윤회가 있습니다. 다만, 범천계에서 긴 선정 상태의 수명이 다하면 완전하게 멸해, 거기로부터 다른 환경과 생애로 다시 태어나는 것은 없어집니다.

 

여기서 하나, 깨달음의 단계에 이르지 않고, 즉 「나」가 있다고 하는 유신견이 사라지지 않고, 무상이나 무아가 일순간도 「체험」되지 않은 채, 다만 명상수행에 힘써 선정에 이른 사람은, 그 훌륭함에 붙잡힙니다. 또한, 이 욕계에 대한 집착도 사라지지 않습니다. 선정을 즐긴 후는 일상생활 중에서 욕구를 즐기거나 합니다.

이러한 범부 선정자는 사후에 범천계에 윤회하지만, 거기서의 수명이 다하고 선정 공덕이 끊어지면 또 욕계의 어디엔가 윤회해 버립니다. 욕계의 즐거움에 대한 집착이나, 이전에 행한 선업, 악업의 업이 욕계로 끌어 들입니다. 그렇게 해서 윤회의 괴로움이 계속됩니다.

그렇지만 「나」는 없다」라고 무아, 무상을「체험」해 깨달음의 단계에 들어간 사람이 선정에 이르러 범천계의 훌륭함을 체험하면 역시 그 훌륭함에 집착하지만, 이 훌륭함도 결국 무상이라고 하는 체념도 생겨납니다.

이러한 성자는, 범천계에는 다시 태어나지만, 거기서의 수명이 다하면 이미 만족하기 때문에 어떤 집착도 남김없이 어디에도 윤회하지 않고 다만 사라져버립니다.

 

참고하면 같은 욕계의 천인들에게는, 예류과에 이른 성자의 천인과 다만 선업의 결과로 태어난 범부의 천인들이 있습니다. 범부의 천인들의 일부에는 사람들이 깨달음을 이루거나 불환자로서 욕구의 세계로부터 완전하게 멀어져 가는 것이 싫어, 쾌락이나 공포를 동원해 방해를 하려고 하는 부류도 있습니다. 석가모니를 몇 번 이나 방해한 마라는 그러한 천인입니다.

우리들도 유혹이나 위협에는 충분히 조심해 자기를 경고하여야 할 것입니다.

 

4. 아라한과

 

아라한과는 모든 번뇌가 사라진다.

아라한이란 모든 번뇌가 완전하게 멸한 사람입니다.

번뇌가 전혀 없기 때문에 지혜가 아무 제한도 없이 일어나게 됩니다.

 

아라한에는 「공양받기에 적당한 분 ‧ 應供」이라고 하는 의미도 있지만, 번뇌라고 하는 「적을 죽였다」 즉 번뇌를 전멸시켰다고 하는 의미도 있습니다. 분노는 물론 무엇인가 하고 싶다고 하는 욕구마저 완전하게 사라졌기 때문에, 행위로부터는 결코 새로운 싹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처럼 어떤 업도 만들지 않는 아라한이 죽을 때는 등잔불이 사라지는 상태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아라한은 등잔의 기름과 같이 이 생명을 계속 하게 하는 에너지가 다하면, 거기서 다만 사라질 뿐입니다. 연료가 다하였기 때문에 다음에 어디에도 불이 옮기지 않듯이.

 

「재가 아라한」은 무리인가?

현대의 학계에는 「출가해 구족계를 받기 전에도 경전에는 아라한이 된 재가자가 된 경우가 많다. 그러므로 아라한도 재가인으로서 살 수 있다.」「아라한과는 출가하지 않으면 달성되지 않는다.」 이런 방향들이지만 아무래도 포인트가 어긋나 있습니다.

불교는 「출가하지 않으면 아라한이 될 수 없다」와 같이 깨달음을 목표로 하는 수행자의 형식이나 자격을 묻는 것은 아닙니다.

「아라한이 될 때는, 또는 아라한이 되어버리면, 재가자로는 있을 수 없어 출가하지 않을 수 없다」라고 알아야 합니다. 마음이 완전하게 집착으로부터 멀어져버리기 때문에 재가 생활을 영위할 수 없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형식에 집착하는 것은 아닙니다.

 

수행은 재가자든 출가가든 할 수 있습니다. 깨달음의 단계로 나아가는 것은 무슨 차별이 없습니다. 다만 아라한이 되면 재가에서는 있을 수 없습니다.

불환과까지는 어떻게든 담담하게 일상생활이나 경제활동을 할 수 있지만, 아라한이 되면 담담하게조차도 일상의 가정생활이나 경제활동 등의 생활을 영위할 수 없게 됩니다. 아라한은 출가자로서 어떤 속박으로부터도 자유로워 어떤 생명에도 평등한 입장이 아니면 생활할 수 없습니다. 불환과까지 재가자로 살아가고 있던 사람, 혹은 독자적으로 수행하고 있던 사람들이 아라한과에 이를 때에는 참을 수 없어서 집을 뛰쳐나와 부처님 계신 곳에 가서 출가를 허락받았습니다. 그런 이야기가 몇몇 경전에 남아 있습니다.

 

* 아라한과로 사라지는 번뇌는 오상분결(五上分結)

 

불환과로 욕계에 대한 것은 모두 사라졌기 때문에 아라한이 되기까지 남아있는 것은 범천계에 대한 것뿐입니다. 그것은 5개입니다. 즉, 삼계안의 상위 2계에 대한 5개의 번뇌이기 때문에 오상분결(五上分結)로 불리고 있습니다.

 

오상분결은 색탐(色貪), 무색탐(無色貪), 도거(掉擧), 만(慢), 무명(無明)입니다. 색탐과 무색탐은 각각 삼계의 하나와 무색계에 대한 집착입니다. 이것이 사라지기 때문에 범천계에 조차 다시 태어나는 일 없이 다만 멸할 뿐입니다.

도거, 만, 무명은 상위의 2계에 대해서 뿐만이 아니라 욕계에 대해서도 말해지는 번뇌이지만, 이 3개는 끝까지 남아있습니다. 불환과까지는 아무래도 완전하지는 않지만 이제 「이 단계까지 도달했다」라고 하는 달성감이 있습니다. 이것도 ‘도거’입니다. 아라한에는 그것이 없습니다. 불환과에서는 무아, 무상을 「체험」하고도, 《가짜의 「내가」 했다》라고 하는 감각인 ‘만(慢)’이 남습니다. 이것도 아라한에는 없습니다. 그것들을 포함해 불환과에 남아있던 무지의 뿌리인 ‘무명’이 아라한과로 완전하게 사라집니다.

 

이것으로 일은 끝나 해야 할 것을 끝내어서 이제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습니다. 아라한이 되면 수명의 나머지가 다해 완전하게 멸할 때까지는 자신을 위해서 할 일이 남아있지 않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깨달음을 위해서 활동합니다. 석가모니 부처님과 같이 「나를 위해서는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당신이 행복하게 되기를! 깨달음을 얻기를!」이라고 하는 마음으로 활동합니다.

 

* 법수행과 신수행

 

최고의 아라한과는 물론 예류과 조차도 갑자기 도달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부처님께서는「차례차례 배우고, 차례차례 실천하여, 차례차례 도의 길로 나아가는 것에 의해, 최고의 지혜가 완성되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깨달음으로 향하는 제 일보가 범부의 길과 성자의 길의 갈림길입니다.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면 자꾸자꾸 길이 열립니다.

 

성자의 길의 입구는 2가지가 있습니다. 가르침에 대한 이해인 법수행(法隨行)과 부처님에 대한 신앙심인 신수행(信隨行)입니다. 양쪽 모두 갖추지 않더라도 어느 쪽으로든 성자의 길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사람에 따라 가르침의 이해로부터 불도에 들어가는 경우와 신앙심으로부터 불도에 들어가는 경우가 있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들어 기쁨이 있고 또한 이해할 수 있다면 그것은 법에 따라가는 깨달음의 길이고, 부처님의 존재자체가 기쁨이고 또한 그로인해 마음이 안정된다면 그것은 믿음에 따라가는 깨달음의 길입니다. 이 어느 쪽이든 깨달음에의 길은 열립니다.

 

예를 들면 「모든 것은 무상하다」든지 「나라는 것은 없다 」등등 법을 들어, 「아 과연 그렇구나 그래서 마음이 편하다」라고 납득해서 기쁨이 있으면 법수행 타입이고, 「모처럼 내가 노력하고 있는데도 어쩜 그렇게 싫어하는 말만 할까」라고 생각이 들거나 듣고 싶지 않게 됐을 때도 불상이나 탱화 등을 보거나 혹은 절에 가면 왠지 모르게 기분이 좋아져 마음이 침착해진다면 신수행 타입이라고 합니다.

 

신앙심으로부터 들어가는 경우든, 가르침으로부터 들어가는 경우든, 모두 신심(信心) 정진(精進) 알아차림(念) 선정(禪定) 지혜(智慧)의 오근(五根)은 있습니다. 오근으로 노력하여 배움과 수행에 힘쓰면 도의 길이 자꾸자꾸 열려 이윽고 일순간에 「무아」를 「체험」해 예류과에 이릅니다. 그렇게 되면 이제 결코 깨달음의 길로부터 물러나지 않습니다. 이렇게 신수행과 법수행 자체가 이미 예류과로 향하는 도인 예류향이므로 깨달지는 않았어도 성자의 동료, 불타의 가족의 일원으로서 불법승 삼보에 귀의하여 수호자가 됩니다. 이만큼만 되더라도 안심자(安心者)라고 합니다.

 

예류향의 사람은 이와 같이 노력하여야 합니다. 「비록 뼈와 가죽과 힘줄만 남고 몸속의 혈육이 말라버려도, 인간의 힘, 인간의 정진, 인간의 노력에 의해 달성해야 할 것을 달성할 때까지는 이 노력을 결코 멈추지 않겠습니다.」 이러한 사람이 석가모니를 스승으로 받들고, 석가모니가 제자로 인정하는 붓다의 가족입니다.

 

* 더하여

 

단계별로 자세하게 깨달음의 단계를 설명했습니다. 그 단계 모두에 대해 깨달음의 내용이 엄밀하게 정의되고 있으므로, 「나는 이제 깨달았다」등으로 착각하거나 사람을 속이려고 퍼뜨리는 애매한 것은 전혀 없을 줄 압니다. 그 때문에 여러 가지 종교에서 「깨달음, 깨달음」 이라고 말로 말할 수는 있지만, 이 깨달음의 내용까지는 상세하게 설명할 수 없었던 것 같습니다. 지금도 부처님의 말씀을 그대로 전하는 근본불교 빨리어 경전에만 깨달음의 내용이 명확하게 남아 있습니다.

 

이러한 깨달음의 내용을 지식적으로 아는 것일지라도 깨달음은 불가능한 꿈같은 이야기가 아니라, 최초의 한 걸음으로부터 서서히 열어 갈 수 있는 길인 것을 압니다. 또, 단번에 정상까지 오르는 방법은 없고 우선 발밑으로부터 한 걸음씩 진행하면 진리가 드러나기 때문에 힘이 솟아올라옵니다.

 

이와 같이 불법을 지식으로부터 배우는 것 자체가 깨달음의 제 일보인 법수행의 일부라고 자신에게 타일러보시기 바랍니다. 내용에 조금의 잘못이 있어도 여러 수행도반들 모두 헤매지 않고 깨달음의 길을 걸어갈 수 있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