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수행법문 녹취/네 부류의 성인들 : 담마스쿨

아라한을 둘러싼 오해

담마마-마까 2023. 3. 20. 14:58

* 아라한을 둘러싼 오해

 

‘테라와다 불교에서 석가모니는 현세에 있어서의 유일한 붓다로 간주되어지고 있다. 따라서 수행자가 도달할 수 있는 경지는 아라한의 경지로 여래(붓다)로는 될 수 없다.’

 

이것은 대승불교 사상의 연구자가 빠지기 쉬운 오해가 아닐까 생각한다.

테라와다의 전승에서 붓다의 명호 첫 번째가 「아라한」(여래10호 중의 하나)이므로, 수행자가 아라한이 되면 깨달음의 경지에서는 붓다와 동격으로 간주되어진다. 그러나 가르침의 창시자에게 경의를 나타내기 위해 경전이 전승되는 동안 고따마 붓다만을 붓다라고 불러, 붓다의 교법에 따라 깨달은 성자를 아라한이라고 부르도록 용어가 정리되었다.

 

경전은 그 자체가 고따마 붓다라고 하는 탁월한 지도자의 말씀을 후대에게 전할 목적으로 편찬되었으니까, 이 말의 사용을 구분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럽고 합리적인 것이다.

후대에 붓다에게 유일한 능력이라는 항목이 주석서 등으로 논해지지만, 그것은 붓다와 아라한의 보살로서의 기간과 공덕의 차이 등의 문제이며 깨달음의 경지의 높낮이에서는 차별이 있을 수 없다. 붓다의 가르침에 따라 깨달은 성자를 아라한이라고 하는 것에는 아무런 비하도 없다.

 

「부파의 수행을 아무리 실천해도 아라한의 경지로 붓다가 되는 것(성불)은 할 수 없다」라는 말은 대승불교가 부파 시대의 불교를 비판한 말꼬리 잡기에 지나지 않는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여래의 교법에 따라 수행을 완성한 아라한을 비방하는 것은 붓다의 교법 그 자체를 비방하는 것이어서 그를 불교도라고 할 수 없다.

 

한국의 많은 불자들은 대승 불교적인 발상을 전제로 해서 사고하므로 단순한 용어의 정리에 지나지 않는 붓다와 아라한의 구분 사용에 지나친 의미를 부여해 버린다. 한국의 대승불교도, 테라와다 불교도 서로 붓다의 제자라고 하는 신뢰 관계를 가지고 서로 경책하거나 장점을 살려나갈 수 있으면 좋겠다.

 

법화경에 성문(석가모니의 제자)인 아라한의 깨달음은 통과점이며 방편의 경지이다. 진정한 깨달음은 하나의 국토에 유일한 정각자가 되어 나타나 붓다의 32상을 갖추고 그 국토의 중생을 구제하는 큰 구제자가 되는 것이라고 한다.

구제 능력의 차이를 부각하기 위한 것이면 문제 될 것 같지 않지만, 깨달음의 경지의 높낮이에 차이가 있다고 한 것이라면···.

이 법화경 구절에서는 수행을 완성했음이 분명한 아라한의 성자가 한층 더 구제자를 목표로 해서 보살의 수행을 하게 되어 있다.

또한 법화경에서는 모든 중생을 구제하는 것이 붓다의 숙원이다···.

석가모니의 요청에 응해 허공(혹은 니르바나)에 거주하고 있던 무수한 성자들이 말법구제를 위해서 사바세계에 출현한다···.

대단히 이상적인 것을 말한다.

만약 이것이 경전이 아니라 문학이라면 장대하고 아름답다.

그렇지만 비현실적이다. 전통적인 테라와다 교단에 대해서 대승의 우월성을 드러내기 위한 것일 뿐이다. 논리적으로 성립되지 않는 이야기이다.

 

테라와다 불교에서 이러한 구제자를 목표로 하는 사상이 없는 것도 아니다.

보살로서의 수행을 하며 구제자를 목표로 하고 있는 스님도 있다. 다만 테라와다 불교에서는 모든 사람들이이 그 길을 걸어야 하는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고 선택사항으로서 보살의 청원을 일으키는 길도 있다.

12세기에 밀란다왕문경의 주석서를 쓰신 스리랑카 아누라다뿌라 마하위하라에 거주하던 Maha Tipitaka Culabhaya라는 스님은 책의 말미에 Buddho Bhaveyyaṁ(May I become a Buddha! 성불하기를!)이라는 글을 남기기도 했다.

현재 테라와다 불교국 중 버마의 파욱센타에서는 saṅkhārupekkhāñāṇa(行捨智)에 도달한 수행자들에게 보살행과 계속 정진할 것 중 택하게 한다. 그래서 어떤 이는 보살행을, 어떤 이는 수행을 지속해 나간다.

또한 테라와다 불교국 중 태국은 앙굿따라 니까야 5권 201p에 나오는 Theradhamma 10가지 조건을 충족했다고 장로들이 판단하면 보살행을 실천해도 좋다고 승낙한다.

이와 같이 테라와다 불교국에서도 기본적인 조건을 충족한 자가 원할 경우에 菩薩道를 걸어서 救濟者를 목표로 하는 것을 허락하고 있다.

그렇기에 모든 이들이 아라한을 목표로 하는 것은 아니다.

돌아가신 라훌라 스님도 이에 대해 이렇게 견해를 밝혔다.

 

Although the Theravada holds that anybody can be a Bodhisattva, it does not stipulate or insist that all must be Bodhisattva which is considered not practical. The decision is left to the individual whether to take the Path of the Sāvaka or of the Paccekabuddha or of the Sammāsambuddha. But it is always clearly explained that the state of a Sammāsambuddha is superior and that the other two are inferior. Yet they are not disregarded.

 

이제 불교에서 말하는 성문, 연각, 불에 대한 개념 정리를 해 보자.

 

① 성문 Sāvaka는 붓다의 제자로, 그 가르침에 근거해 수행하여 해탈, 열반을 실현하지만 그것을 밖에 전하는 능력(구제력)이 한정되어 있다. 제자가 보리를 실현하면 Sāvakabuddha로 불린다.

② 벽지불(연각·독각) Paccekabuddha는 붓다가 세계에 출현하지 않을 때에 스스로의 힘으로 해탈, 열반을 실현하지만 그것을 밖에 전하는 능력(구제력)이 한정되어 있다.

③ 보살은 Sāvaka로서 혹은 Paccekabuddha로서 열반에 도달할 수가 있는 입장에 있지만, 세계에 대한 대자비(maha karuna)로 열반을 포기하고 다른 중생들을 위해서 윤회에 머물며 6(or10)바라밀을 쌓고 완성하여 마지막에 해탈을 실현해서 붓다(Sammāsambuddha)가 된다. 해탈을 밖에 전하는 능력(구제력)은 무제한이다.

④ 상기의 삼자는 번뇌를 여의었다는 의미에서 동일한 열반을 실현하고 있다. 다른 경지의 열반이 있는 것은 아니다. 모두가 아라한이다.

⑤ 그러나 Sammāsambuddha만이 「모든 장애로부터 완전한 해방」(일체지)을 달성해서 구제 능력에 대해 성문, 벽지불을 훨씬 뛰어넘는 능력을 지닌다.

⑥ 상기의 정의는 대승불교도 테라와다 불교도 똑같이 수용하고 있다. 모두 菩薩이 가장 고귀하다고 한다.

⑦ 대승불교는 보살 수행에 전심전력하며 이러한 삼종의 도는 같은 길 위의 3가지 과위라고 평가한다. 이것에 대해서 테라와다 불교는 개인의 선택의 문제라고 한다.

⑧ 테라와다의 나라에서도 옛부터 보살의 청원을 한 사람이 있다.

 

대승불교는 이상론을 말하고 있지만, 지나쳐서 현실적인 테라와다 불교나 성자인 아라한을 비방하는 것은 붓다의 가르침에 대한 오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붓다의 가르침의 실천으로서 「보살」이라고 하는 말은 좋다. 그래서 「그 사람은 보살과 같다」든지, 「보살의 삶의 방법을 산다」라고 하는 것은 훌륭하고 칭찬받을 만하다. 그러나 아라한과 보살을 대비시키는 것 자체는 무리가 있다. 「완성자」와 「완성할지 어떨지도 모르는 수행자」를 비교하는 것은 성립되지 않기 때문이다. 수많은 생을 윤회하면서 보살행을 실천하여 설혹 미래에 붓다가 될지 모른다고 해도 현세에서의 보살은, 사문과를 얻은 성자 특히 아라한에 예를 하는 존재인 것이다. 진짜 보살이라면 아라한을 비판한다고 하는 발상조차 마음 내지 않는다.

 

~살아 있는 모든 중생들이 행복하기를!∼

 

 

※ 사)한국테라와다불교 홈페이지(http://www.theravada.kr/)에서 옮겨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