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참고 : 아라한을 둘러싼 오해
② 아라한의 의미
㉠ ari, ara+ha=번뇌라는 적은 소멸되었다. 윤회의 바퀴를 부수었다.
㉡ a+raha=악행을 행하거나 악행을 감출 비밀스런 장소가 없다.
㉢ buddhānubuddha=부처님이 깨달으신 사성제를 그대로 깨달은 제자
‘테라와다 불교에서 석가모니는 현세에 있어서의 유일한 붓다입니다. 따라서 수행자가 도달할 수 있는 경지는 아라한의 경지로 붓다는 될 수 없습니다.’
이 구절은 대승 불교 사상의 연구자가 빠지기 쉬운 오해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테라와다의 전승에서 붓다의 명호 첫 번째가 「아라한」(여래10호 중의 하나)이므로, 수행자가 아라한이 되면 깨달음의 경지에서는 붓다와 동격으로 간주되어집니다. 그러나 가르침의 창시자에게 경의를 나타내기 위해 경전이 전승되는 동안 고따마 붓다만을 붓다라고 불러, 붓다의 교법에 따라 깨달은 성자를 아라한이라고 부르도록 용어가 정리되었습니다.
경전은 그 자체가 고따마 붓다라고 하는 탁월한 지도자의 말씀을 후대에게 전할 목적으로 편찬되었으니까, 이 말의 사용을 구분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럽고 합리적인 것입니다.
후대에 붓다에게 유일한 능력이라는 항목이 주석서 등으로 논해지지만, 그것은 붓다와 아라한의 보살로서의 기간과 공덕의 차이 등의 문제이며 깨달음의 경지의 높낮이에서는 차별이 있을 수 없습니다. 붓다의 가르침에 따라 깨달은 성자를 아라한이라고 하는 것에는 아무런 비하도 없습니다.
「부파의 수행을 아무리 실천해도 아라한의 경지로 붓다가 되는 것(성불)은 할 수 없다」라는 말은 대승 불교가 부파 시대의 불교를 비판한 말꼬리 잡기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여래의 교법에 따라 수행을 완성한 아라한을 비방하는 것은 붓다의 교법 그 자체를 비방하는 것이어서 그를 불교도라고 할 수 없습니다.
한국의 많은 불자들은 대승 불교적인 발상을 전제로 해서 사고하므로 단순한 용어의 정리에 지나지 않는 붓다와 아라한의 구분 사용에 지나친 의미를 부여해 버립니다. 한국의 대승불교도, 테라와다 불교도 서로 붓다의 제자라고 하는 신뢰 관계를 가지고 서로 경책하거나 장점을 살려나갈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법화경에 “성문(석가모니의 제자)인 아라한의 깨달음은 통과점이며 방편의 경지이다. 진정한 깨달음은 하나의 국토에 유일한 정각자가 되어 나타나 붓다의 32상을 갖추고 그 국토의 중생을 구제하는 큰 구제자가 되는 것이다”라고 합니다.
구제 능력의 차이를 부각하기 위한 것이면 문제될 것 같지 않지만, 깨달음의 경지의 높낮이에 차이가 있다고 한 것이라면···.
이 법화경 구절에서는 수행을 완성했음이 분명한 아라한의 성자가 한층 더 구제자를 목표로 해서 보살의 수행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또한 법화경에서는 “모든 중생을 구제하는 것이 붓다의 숙원이다···.
석가모니의 요청에 응해 허공(혹은 니르바나)에 거주하고 있던 무수한 성자들이 말법구제를 위해서 사바세계에 출현한다···”
대단히 이상적인 것을 말합니다. 만약 이것이 경전이 아니라 문학이라면 장대하고 아름답습니다. 그렇지만 비현실적입니다. 전통적인 테라와다 교단에 대해서 대승의 우월성을 드러내기 위한 것일 뿐입니다. 논리적으로 성립되지 않는 이야기입니다.
테라와다 불교에서 이러한 구제자를 목표로 하는 사상이 없는 것도 아닙니다.
보살로서의 수행을 하며 구제자를 목표로 하고 있는 스님도 있습니다. 다만 테라와다 불교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그 길을 걸어야 하는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고 선택사항으로서 보살의 청원을 일으키는 길도 있습니다.
12세기에 밀란다왕문경의 주석서를 쓰신 스리랑카 아누라다뿌라 마하위하라에 거주하던 Maha Tipitaka Culabhaya라는 스님은 책의 말미에 Buddho Bhaveyyaṁ(May I become a Buddha! 성불하기를!)이라는 글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현재 테라와다 불교국 중 버마의 파욱센타에서는 saṅkhārupekkhāñāṇa(行捨智)에 도달한 수행자들에게 보살행과 계속 정진할 것 중 택하게 합니다. 그래서 어떤 이는 보살행을, 어떤 이는 수행을 지속해 나갑니다.
또한 테라와다 불교국 중 태국은 앙굿따라 니까야 5권 201p에 나오는 Theradhamma 10가지 조건을 충족했다고 장로들이 판단하면 보살행을 실천해도 좋다고 승낙합니다.
이와 같이 테라와다 불교국에서도 기본적인 조건을 충족한 자가 원할 경우에 보살도를 걸어서 구제자를 목표로 하는 것을 허락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모든 이들이 아라한을 목표로 하는 것은 아닙니다.
돌아가신 라훌라 스님도 이에 대해 이렇게 견해를 밝혔습니다.
Although the Theravada holds that anybody can be a Bodhisattva, it does not stipulate or insist that all must be Bodhisattva which is considered not practical. The decision is left to the individual whether to take the Path of the Sāvaka or of the Paccekabuddha or of the Sammāsambuddha. But it is always clearly explained that the state of a Sammāsambuddha is superior and that the other two are inferior. Yet they are not disregarded.
이제 불교에서 말하는 성문, 연각, 부처에 대한 개념 정리를 해보겠습니다.
Ⓐ 성문 Sāvaka는 붓다의 제자(anubuddha 아누붓다 : 부처님의 가르침 따라 사성제를 깨달은 제자)로, 그 가르침에 근거해 수행하여 해탈, 열반을 실현하지만 그것을 밖에 전하는 능력(구제력)이 한정되어 있습니다.
제자가 보리를 실현하면 Sāvakabuddha로 불립니다.
Ⓑ 벽지불(연각·독각) Paccekabuddha는 붓다가 세계에 출현하지 않을 때에 스스로의 힘으로 해탈, 열반을 실현하지만, 그것을 밖에 전하는 능력(구제력)이 한정되어 있습니다.
Ⓒ 보살은 성문(Sāvaka)으로서 혹은 연각(Paccekabuddha)으로서 열반에 도달할 수가 있는 입장에 있지만, 세계에 대한 대자비(maha karuna)로 열반을 포기하고 다른 중생들을 위해서 윤회에 머물며 6(혹은 10)바라밀을 쌓고 완성하여 마지막에 해탈을 실현해서 붓다(Sammāsambuddha)가 됩니다. 해탈을 밖에 전하는 능력(구제력)은 무제한입니다.
Ⓓ 상기의 삼자는 번뇌를 여의었다는 의미에서 동일한 열반을 실현하고 있습니다. 다른 경지의 열반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모두가 아라한입니다.
Ⓔ 그러나 Sammāsambuddha만이 「모든 장애로부터 완전한 해방」(일체지)을 달성해서 구제 능력에 대해 성문, 벽지불(연각)을 훨씬 뛰어넘는 능력을 지닙니다.
Ⓕ 상기의 정의는 대승불교도 테라와다 불교도 똑같이 수용하고 있습니다. 모두 菩薩이 고귀하다고 말합니다.
Ⓖ 대승불교는 보살 수행에 전심전력하며 이러한 삼종의 도는 같은 길 위의 3가지 과위라고 평가합니다. 이것에 대해서 테라와다 불교는 개인의 선택의 문제에 의해 다른 길을 가는 것이라고 합니다.
Ⓗ 테라와다의 나라에서도 옛부터 보살의 청원을 한 사람이 있습니다.
대승불교는 이상론을 말하고 있지만, 지나칠 때는 현실적인 테라와다 불교나 성자인 아라한을 비방하는 것이 되기에, 이것은 붓다의 가르침에 대한 오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붓다의 가르침의 실천으로서 「보살」이라고 하는 말은 좋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은 보살과 같다」든지, 「보살의 삶의 방법을 산다」라고 하는 것은 훌륭하고 칭찬받을 만합니다. 그러나 아라한과 보살을 대비시키는 것 자체는 무리가 있습니다. 「완성자」와「완성할지 어떨지도 모르는 수행자」를 비교하는 것은 성립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수많은 생을 윤회하면서 보살행을 실천하여 설혹 미래에 붓다가 될지 모른다고 해도 현세에서의 보살은, 사문과를 얻은 성자 특히 아라한에 예를 하는 존재인 것입니다. 진짜 보살이라면 아라한을 비판한다고 하는 발상조차 마음 내지 않습니다.
* [테라와다 신행생활] 교재 내용 중 일부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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