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수행법문 녹취/네 부류의 성인들 : 담마스쿨

네 부류의 성인들 4. 불환과 (20061028)

담마마-마까 2020. 1. 29. 13:40

네 부류의 성인들 4. 불환과 (20061028)

https://youtu.be/jIWV3ZVfrr4

 

다음주부터는 스님이 커트라인을 좀 정하겠습니다. 여기에 수행하러 들어왔죠? 맞습니까? 그러면 수행 안 하는 사람은 법문을 들을 자격도 없이 만들어야 되겠습니다. 여섯시 반 되어서는 문을 닫으십시요.

불가피한 사정이 있는 사람들은 어쩔 수가 없습니다. 인터넷으로 듣도록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여섯시 반 전에는 일단 사람이 들고나는 것이 없도록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관광객들도 일체 들이지 마십시요. 오롯이 수행만 할 수 있도록 그렇게 하고, 여섯시부터 여섯시 반까지는 좌선을 하고, 여섯시 반부터 일곱시까지는 경행을 하고, 일곱시부터 일곱시 반까지는 좌선을 하기로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그러고나면 일곱시 반부터 법문이 들어가도록 그렇게 하겠습니다. 이의 있는 사람? 그래서 “스님 한번 봐주십시요” 이런 얘기들 하지 마십시요이. 시간은 여러분들이 정해놓은 부분들이고 여러분들이 동의를 한 부분이기 때문에 그렇게들 지켜나가주시기 바랍니다. 공부를 안 하면 강제로라도 시켜야지.

자! 오늘 나갈 부분을 보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스님이 불환과까지를 하겠다는 얘기를 했습니다.

설명이 아주 자세하게 잘 돼 있죠? 크게 어려운 부분은 없을 거라고 봅니다.

 

부처님이 누누이 강조한 게 무상․고․무아 부분입니다. 그래서 수다원에 이르렀다고 하더라도 삼법인에 대한 체험 없이는 다음 단계로 넘어가지 못한다 하는 얘기를 스님이 얘기했습니다. 과연 그게 무엇이기 때문에 그럴까 하는 거라.

 

무상과 고는 부처님 당시 때 다른 외도들도 일정 부분은 가르쳤던 부분들입니다. 그런데 무아 부분은 불교에서만의 독특한 가르침입니다. 그 누구도 가르치질 않았고.

무아를 설명하는 방법은 무상을 가지고 무아를 설명하는 방법이 있고, 고를 가지고 무아를 설명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무상, 고는 대충 알겠죠. 많이 하잖아. “아, 참 무상하다.” “아, 참 괴롭다.” 그거는 많이 합니다. 실제 내가 수행을 통해서 접하지 않더라도, 일상적으로 내가 접하는 대상들로 가지고 그렇게 얘기들을 합니다. 그런데 “아, 참 나라는 것이 없구나.” 하고 얘기하는 사람은 별로 없는 거 같애. 그렇죠?

 

무아를 알 수 있는 가장 알기 쉬운 방법은 어떤 것이 있겠습니까?

예를 한번 들어봅시다. 오늘 우리 총각이 안 나왔네? 누가 당장 내일 죽을 사람인 줄 알면서 오늘 결혼할려는 사람 있겠습니까? 또 비근한 예로 이게 지금 당장 한 시간 뒤에 무너진다고 하는데, 이 자리에 들어앉아가지고 한 시간 뒤에 무너질지 아니면 십분 뒤에 무너질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이 자리에 앉아서 법문을 듣고 앉아있을 사람이 있느냐는 거라. 거의 없죠?

또 내가 재산이 많이 있다고 할 거 같으면 남에게 나누고 싶고 좀 자랑도 하고 싶단 말입니다. 그런데 그놈의 재산을 도둑놈이 홀딱 가져가 버렸어. 그래서 지금 하나도 없단 말이라. 그런데 그런 상태에서도 내가 남에게 내 재산이 많다 하고 드러낼 수 있느냐는 거라. 없죠?

 

스님이 여러 가지 예시를 들어서 한 것을 보면 공통적인 것이 있습니다.

무아를 알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뭐냐 하면 '아만'입니다. '자만심'이라고 하는 것! 그것만 없으면 무아는 큰 걱정을 안 해도 됩니다. 굳이 수행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그런데 그 자만심을 없앤다는 게 과연 아무것도 없이 그냥 ‘참 무상하니까, 괴로우니까’ 하는 생각만으로 없앨 수가 있느냐는 거라.

절대 안 없어집니다. 왜? 그런 모든 생각들이나 모든 일어나는 현상들은 라고 하는 것이 있어야 만이 그런 전제조건하에서 생겨나는 것들입니다.

라고 하는 것은 뭐냐면 나를 남에게 드러내는 의식입니다. 그래서 내가 아무리 수행을 통해서 선정삼매를 체험하고 하더라도 일상생활로 돌아올 거 같으면 뿌리 깊은 무아는 없앨 수가 없는 거라. 어떤 방법으로도 없앨 수가 없다는 거라. 그래서 수다원에 이른 자는 반드시 무아를 체험해야 된다 하고 부처님이 얘기한 이유가 됩니다.

 

자, 그럼 이제부터는 여러분들이 그런 무아를 체험하는 것으로 한번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호흡을 한번 해보십시다.

'일어남' '사라짐' 하면서 관찰해보십시오.

 

'일어남' '사라짐'하는 것을 관찰할 때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아는 것은 무엇이 아는 겁니까? 마음이 아는 거죠!

그럼 일어나고 사라지는 대상은? 몸이라는 겁니다! 느낌이라는 겁니다! 마음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그 밖의 대상들이고! 어쨌든 이런 대상들입니다. 아는 대상입니다.

일어나고 사라지고 하는 것을 관찰하는 것은 다른 말로 줄이라면 '몸과 마음 두 가지뿐이다' 하는 건 여러분들이 더 잘 알겁니다.

'몸과 마음의 관계뿐이다' 하는 사실을 갖다가 명확하게 알기만 해도 여러분들은 어느 정도 도의 문턱에는 든 겁니다.

 

자! 배가 불러올 때 '일어남'하고 한번 관찰해보십시오.

배가 불러오는 시점부터 해서 마지막으로 쭉 불러지는 걸 알 겁니다. 그렇죠? '사라짐' 할 때 관찰을 하면 배가 들어가는 시점으로 해서 마지막 푹 꺼지는 시점까지를 알겁니다.

'일어남'하고 배가 불러오고 팽창되는 사실을 아는 것은 마음이 아는 것이고, 실제적으로 배가 쭉 팽창되어오는 것은 몸입니다. 이렇게 하나의 대상에 몸과 마음만 있다는 사실만 알아도 '냐나(Ñāṇa)' 하나는 체득한 겁니다. 몸과 마음으로만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가장 기초적인 게 그 부분부터 들어가집니다.

 

수행에서 앉아있을 때는 호흡을 '일어남' '사라짐'하고 관찰하라. 또 행선을 할 때는 '왼발' '오른발' 하고 관찰하라 하는 것도 바로 그런 이유입니다.

지금은 미세하게 '일어남'하는 상태에서 배가 불러오고 하는 '시작'부분과 '끝'부분만 알 거라. '중간' 부분은 전혀 잘 모릅니다. 그리하더라도 어쨌든 시작은 된 것부터 해서 끝나는 부분을 안단 말이라.

 

조금 더 깊이 한번 관찰해보도록 하십시오.

'일어남' '사라짐' 하면서, '일어남' '사라짐'하는 상태에서 일어나는 것이 순일하게 쭉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일어났다가 사라지고 일어났다가 사라지고 일어났다가 사라지고 하는 부분이 계속 연속적으로 이어진다 하는 사실만 알 수 있으면 조금 더 발전돼 나갑니다.

그마만큼 관찰하는 마음도 조금 더 세분화되고 조금 더 미세해지고, 관찰하는 대상도 조금 더 세분화되고 미세해집니다.

 

이렇게 수행은 조금씩 조금씩 진행 돼나갑니다.

그러다 보면 내가 일어나고 사라지고 하는 것을 관찰하는 것이 순일하게 잘된다 하는 생각이 들면 참 편안한 느낌이 듭니다.

이때 특별한 행복감을 쭉 느끼게 됩니다.

그러다 보면 아, 이게 부처님이 말한 것이구나. 부처님이 말한 진리구나. 참 부처님은 한 치도 틀림이 없으신 분이구나 하는 마음이 더욱더 일어나게 됩니다. 그러니까 마음이 맑아지고 조금 더 깨끗해지는 느낌들을 받습니다.

 

한번 해보십시오.

'일어남' '사라짐' '일어남' '사라짐' 하면서 대상에 마음을 알아차릴려고 자꾸 한번 해보십시오.

어쨌든 그런 특별한 행복감이 일어나지고 느껴지면 그것도 오래가는 것이 아닙니다. 변해나갑니다. 그래서 이러한 특별한 행복감이나 기쁨들이 일어난다고 하더라도 그것 자체를 관찰하다 보면 그것조차도 놓아버리게 됩니다.

 

그렇게 놓아버리면서 관찰을 해나가면 대상 지체가 사라지는 사실을 압니다.

'일어남'하고 관찰을 해나가면 사라지는 것이 관찰이 안 되어나가고, 앉음이나 닿음을 하더라도 거기에 대한 관찰은 없습니다. 그렇다고 마음이 다른 곳으로 벗어난 것은 아닙니다.

또 호흡 대상 자체도 '일어남'하는 것을 알아차리는 마음이 있을 때, 호흡도 일어나는 것은 알지만 사라지는 사실을 갖다가 느끼지를 못합니다. 그마만큼 마음이 점점 더 순일하게 이어져나간다 하는 사실입니다.

 

가끔씩 수행을 하다가 대상이 잘 일치되는 상태에서 더 관찰을 계속해나가면 그런 상태들이 틀림없이 여러분들에게 부딪칠 겁니다. 또 여러분들이 일상적으로 경험해왔던 부분들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사라지는 것이 너무나 빨리 진행 된다는 사실을 또한 압니다.

내가 콘트롤을 하려고 해도 콘트롤이 안 돼나갈 만큼 빠르게 일어났다가 바로 사라져버린다 하는 사실을 알아간다 하는 겁니다.

 

이렇게 사라지는 것에 대해서 마음으로 두려움이 생깁니다.

아, 이러다가 내가 호흡이 정지돼버리면 어떻게 할까? 아니면 이 몸이 무너져버리면 어떻게 하는가? 아니면 관찰하는 마음 자체가 다시는 안 일어나버리면 어떻게 될까? 하는 그런 두려움이 강하게 생겨나갑니다.

그렇지만 보는 것, 듣는 것, 냄새 맡는 것, 이런 모든 생기고 사라지는 현상들에 대해서 몸의 현상이든 마음의 현상이든 그런 것들이 끊임없이 일어났다가 사라지지만 멈추지를 않는다는 거라. 잠시도 멈추지 않고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그런 성품이다 하는 그런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거기에서 이렇게 끊임없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에 대해서 두려움을 가지게 되고 혐오스럽게 생각을 하게 됩니다.

여기가 수행의 도와 과의 출발점입니다.

 

자! 여러분들 한번 보십시오.

여러분들 평상시 수행에서 많이 경험했던 것들이죠? 그런 부분들.

용환이 같은 경우는 그런 두려움에 빠져가지고 더 이상 나아가지를 못합니다. 관계하지 말고 나아가라 해도 두려움이 강하게 일어나기 때문에 멈칫해버리는 거라. 중지를 해버리는 거라.

왜 그렇겠습니까? 「나」라고 하는 관념이 들어있기 때문에! 내 것이라고 집착할 만한 것이 없다는 사실을 알 것 같으면 그것은 나아가져버립니다. 그것이 두려워할 게 뭐 있고, 또 혐오스럽게 생각할 게 뭐 있어?

고기를 잡는 사람이 물에다가 낚싯대를 던져가지고 고기를 낚았는데 고기인 줄 알고 탁 낚아진 게 손으로 탁 잡아보니까 물뱀이었다, 어떻게 하겠습니까? 어서 빨리 던질려고 합니다. 이걸 생선인 줄 알고 끈을 풀려고 하진 않습니다. 어서 빨리 던져 내버리려고 합니다. 혐오감이라는 건 바로 그런 것들입니다.

'나'라고 하는 집착으로 인해서 일어났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이걸 빨리 집어던져 버릴려고 그럽니다. 그래서 여기가 수행의 도와 과의 출발점이다 하고 얘기합니다.

 

자! 그럼 이렇게 하다가 보면 보통 사람들은 처음에 수행을 하기 전에는 행복하길 바랍니다. 이생에서도 행복하고 다음생에서도 행복하길 바랍니다. 내가 천인이 되면, 아니면 내가 사람 몸을 받더라도 불행을 당하지 말고 행복하기를 바라게 되고.

그래서 수행을 하다가 이 경지에 도달하면 그것이 싹 없어져 버립니다. 그것도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이다 하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집착하지 않게 돼버린다는 거라. 또한 고통스러운 것.

얼마 전에도 우리 개가 이렇게 보면, 사람들은 보통 낯선 사람들이 오고 그래도 저쪽 멀리서 올 때는 그렇게 두려움을 느끼지 않습니다. 그런데 개들을 저쪽 멀리서 올 거 같으면 가장 먼저 두려움을 느낀다고 합니다. 두려움을 느끼니까 짖어대는 거라. “까미야, 짖지마라 짖지마라” 해도 그 사람이 가까이 오기 전까지는 두려움을 느끼는 거라. 왜 그러면 개들이 인간보다도 그렇게 두려움을 많이 느끼느냐는 거라. 조금 더 고통스럽기 때문에! 삶 자체가 조금 더 인간보다는 고통스럽기 때문에 그런 두려움들이 더 많다!

'내 밥그릇 뺏길까 봐. 나를 죽일까 봐. 나에게 해꼬지를 할까 봐.'

보통 이런 비천한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공통적인 게 그 부분입니다. 일상적인 사람들보다도 더 많은 것이 그런 두려움들입니다.

 

그런데 이 상태에 도달하면 그런 고통을 멀리할려고 하는 생각조차도 일어나질 않는다는 거라. 행복을 바라지 않듯이 고통도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이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거기에 대해서 집착하지도 않게 된다 하는 겁니다.

 

이런 상태에 도달하면 마음으로 어떤 마음을 먹느냐 하면, 하루빨리 내가 깨달음에 이르러야 되겠다. 닙바나에 이르러야 되겠다. 해탈을 성취해야 되겠다 하는 생각이 자꾸 일어나집니다. 그것이 더 큰 행복이다 하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사리불 존자가 어느 날 앉아서 이런 얘기를 합니다.

“아, 참 닙바나는 행복하구나”하는 얘기를 합니다. 어떤 스님이 그 얘기를 듣고 사리불 존자에게 물어봅니다. “왜 닙바나가 행복이라고 그럽니까? 닙바나는 즐거운 것도 없고 괴로운 것도 없고 그런데 그게 뭔 행복입니까?”

사리불 존자가 뭐라고 하느냐면 “즐겁다 괴롭다 하는 것을 알지 않아도 되는 상태이기 때문에 그것이 더 큰 즐거움이다.” 하고 얘기합니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어떻게 합니까? 즐거우면 즐겁다고 그러고 그걸 '아, 이러면 안 되지' 하고 놓아버리고, 괴로우면 '아, 괴로운 거 이거 내가 괴롭다 생각하면 안 되지'하고 평등한 마음을 자꾸 가질려고 한단 말입니다. 그런 것들을 느끼면서 산다는 거라. 행복도 느끼고 괴로움도 느끼고.

 

그런데 닙바나 라고 하는 것은 그런 거 아무것도 느끼지 않는 거라. 취사 선택할 필요성이 없다는 거라. 혹시 그런 경험 해봤습니까? 그게 얼마나 큰 행복이라는 걸. 도솔님은 경험해봤나? 고개 끄덕끄덕 하고.

대충 어떤 건지는 이해는 가겠죠? 왜 그런 얘기를 하느냐면 예를 들어봅시다. 즐거운 느낌에는 어떤 것이 잠재돼있습니까? 욕망! 맞습니다. 욕망이 잠재돼있습니다. 욕망이라는 것이 잠재돼있지 않으면 즐거움이라는 걸 그대로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럼 괴로운 느낌은? 미워하는 거죠. 적의(敵意). 미워하고 적의의 감정이 잠재적인 성향으로 잠복해 있습니다.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은? 머물려고 하는 잠재성향이겠죠! 그것이 편안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게 무명(無明)입니다. 무지, 그런 것들이 잠재해 있습니다.

 

수행을 쭉 열심히 해나가다 보면 그런 혐오감을, 일어나고 사라지는 몸과 마음의 현상에 대해서 혐오감을 가지게 될 거 같으면 하루빨리 내가 깨달음에 이르러야 되겠다 하는 마음을 더욱더 먹게 됩니다. 그래서 감각적인 욕망을 갖다가 떨쳐내 버릴려고 합니다. 그리고 해로운 법들을 또한 떨쳐버릴려고 하고, 대상에 자꾸 마음을 기울입니다. 그래서 그 대상을 끊임없이 관찰할려고 그러고 그러다 보면 마음이 그 대상에 하나로써 오롯이 있게 돼서 그로 인해가지고 마음에서 기쁨들이나 행복들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게 뭡니까? 초선(初禪)입니다. 초선의 경지입니다!

 

그런 경지에 도달을 하게 되면 욕망은 자연스럽게 제거되어나갑니다. 그렇다고 완전하게 탁 떨어져나가는 것은 아닙니다. 욕망의 잠재적인 성향까지도 서서히 제거되어 나갑니다.

또한 마음속으로 아, 참 부처님이 얻은 경지, 아야따나(āyatana, 處)라고 하는 그런 경지는 어떤 것일까? 내가 그런 것들을 얻을 수 있을까? 하는 거라.그래서 나도 그 위없는 해탈의 경지를 염원하게 되는 거라. 나도 그렇게 돼야지, 그 길을 따라가야지 하는 생각을 자꾸 일으키게 됩니다.

그래서 더욱더 닙바나를 체험하기를 염원하게 되면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에 대해서, 삼법인을 더욱더 세밀하게 볼 수 있게 됩니다. 물론 그것이 정신적인 고통으로써 일어나지게 됩니다.

그러면서 삼법인을 더욱더 세밀하게 관찰을 하면 할수록 좋고 싫은 것들, 그다음에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들에 대해서 평등하게 자꾸 대해나가게 됩니다.

 

그러다 보면 인제는 그때가 되면 수행이 조금 더 수월해집니다. 그전에는 대상을 끊임없이 관찰하고 끊임없이 머물러야 됩니다. 그런데 인제는 대상이 드러나게 되는 거라. 저절로! 수월하게 수행을 해나가는 상태가 돼버립니다.

그걸 인제 상카루뻭카냐나(saṅkhārupekkhāñāṇa) 라고 얘기합니다.

 

어떤 것이든 일어나면 사라진다는 사실을 알고 사라진 것은 다시 일어난다는 사실, 좋은 것이 있으면 싫은 것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그걸 몸소 체험함으로 인해서 평등하게 쭉 돼버립니다.

조금 전에는 위딱까(vitakka), 위짜라(vicāra) 라고 하는 것들, 그다음에 에깍가(ekaggatā) 라고 하는 것, 삐띠(pīti) 라고 하는 것, 수카(sukha) 라고 하는 것이 같이 다 이렇게 상카라(saṅkhāra) 해야 되는 거라. 대상이 돼야 되는 거라.

그런데 인제는 그렇게 하지 않더라도 대상이 저절로 드러나기 때문에 굳이 내가 그 대상을 붙잡고 있어야 될 이유가 없는 거라.

 

그래서 일선(初禪)이 넘어가면 위딱까 위짜라가 자연스럽게 떨어져 나가버린다는 거라. 왜? 내가 그 대상을 붙잡고 계속 나아가지 않더라도 이미 드러나져 버렸기 때문에 그대로 관찰돼 나가버립니다.

그래서 마음은 어떤 것이든 평등하게 대하는 마음이 되므로 인해서 적의(敵意)로부터 벗어나지게 되는 거라. 적의라고 하는 것은 나와 남이 있을 때 적의가 있는 겁니다. 화내고 미워하는 마음이 있는 것들은 대상이 있을 때 그러는 겁니다. 그런데 그런 것이 없이 그런 잠재적인 적의 성향들이 제거되어 나가버릴 경우에는 자연적으로 적의 부분도 떨어져나가 버립니다.

 

이렇게 감각적인 욕망도 버려져버리고, 적의·악의를 가지는 것들도 버려져버리고, 그리고 이 길로 계속해서 수행해 나가겠다는 마음이 강하기 때문에 해태혼침들도 사라져버리고, 그리고 마음이 평등하게 평온한 상태로써 머물러 있기 때문에 들뜸이나 후회 같은 것들도 버려져버리고, 또 내가 이 길을 가서 깨달음에 이를 수 있나 없나 하는 의심하는 것들도 자연스럽게 버려져버린다 하는 겁니다.

 

수행이 진척돼나가면 없어지는 것들이 바로 이런 것들이라는 겁니다.

이런 것들이 사라져버리는 상태가 되면 이미 내가 초선(初禪)의 상태를 넘어섰구나 하는 상태를 스스로 알게 됩니다.

그러다 보면 이제는 즐겁고 괴롭고 하는 것들도 버려버리게 되고, 기쁨이나 슬픔 이런 것들도 버려버리게 되는 상태, 그래서 마음챙김이라고 하는 것만 남아있는 청정한 상태에 머물게 된다 하는 겁니다.

지금 이선, 삼선, 사선으로 쭉 넘어가는 부분을 간략하게 지금 그냥 얘기를 합니다.

이선, 삼선 이런 것들은 사실은 그렇게 비중을 두고 얘기할 이유는 없습니다. 보통 보면 초선에서 거의 순차적으로 그냥 바로 그냥 쭉 넘어가집니다.

그래서 그런 사선에까지 이르르게 되면 어리석게 머물려하는 생각들은 없어져 버립니다. 그래서 잠재돼있는 어리석음, 무명이라 하는 것들도 존재하지 않게 된다 하는 겁니다.

이렇게 수행을 해나가다 보면 점점 더 도의 길에 다가가지게 됩니다.

 

아! 상수멸정(想受滅定)이란 걸 여러분들 들어봤을 겁니다. 상수멸정에서는 뭐 뭐가 없어집니까?

 

자! 죽은 사람과 상수멸정에 든 사람과의 차이점은 뭡니까?

호흡은 공통적으로 안 쉬죠? 일반적인 사람은 호흡을 안 쉬면 어떻게 됩니까? 죽은 상태가 되면 맨 먼저 나타나는 특성이 뭡니까? 그렇죠. 온기가 없어지게 되어버립니다. 그러면 상수멸정에 든 사람은 죽은 사람이 아니니까 온기를 가지고 있겠습니까? 안 가지고 있겠습니까? 호흡을 안 하는데? 그렇죠. 상수멸정에 든 사람은 온기가 유지가 돼나갑니다.

통상적으로 얘기하기를 일주일 동안 큰 외부적인 환경조건이 변하는 것이 아닐 것 같으면 몸의 온도가 2도 이상 차이가 나지 않습니다. 실제 체험을 해보는 상태에서 온도계를 가지고 상수멸정에 든 사람의 체온을 재봤을 때 2도 이상 차이가 나지 않더라 하고 나와 있습니다.

보통 우리는 탁 숨이 끊어지고 나면 거의 급격하게 체온이 뚝 떨어져버립니다. 그런데 상수멸정에 든 사람들은 온기가 그대로 남아있습니다. 일주일 동안 그대로 2도 정도의 차이면 거의 그대로 가지고 있다고 봐야 되는 거죠.

 

그다음 차이 나는 게 또 뭐 있겠습니까?

죽은 사람보고 아무리 깨어나라고 뺨을 때리고 이리해도 모르죠. 상수멸정에 든 사람 뺨을 때리고 해도 압니까? 다리를 부러뜨려도 압니까? 모르죠! 그럼 상수멸정에 든 사람들도 그런 감각기능들이 다 사라져버립니까?

(수행자 대답)

틀렸습니다. 감각기능들은 아주 분명해집니다. 상수멸정에 들면!

(수행자 질문)

그렇지는 않습니다. 감각기능이 분명해진다는 것은 감각기능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는 것이지 감각기능이 없어진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그리고 감각기능을 느낀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감각기능은 오히려 더 분명해집니다. 아주 분명하게 됩니다. 그런데 죽은 사람은 그거 자체가 사라져버린다는 겁니다.

당연히 열기가 사라지면서 그것도 사라져버리고, 또한 가장 중요한 거는 '죽었다가 살았다' 라고 표현하죠. 생명력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 죽은 사람은 생명력이 없습니다. 가장 큰 차이점입니다.

 

그거 보다 더 중요한 것이 뭐냐 하면 상카라(saṅkhāra) 부분입니다. 멸진정에 든 사람들은 상카라가 소멸돼나갑니다. 뭐부터 소멸돼 나가겠습니까? 이 신구의(身口意)로써 보통 얘기합니다.

상수멸정에 먼저 들면 뭐부터 없어지겠습니까?

(수행자 대답)

말의 상카라가 먼저 끊어집니다. 말의 상카라 라는 것은 뭐냐면 직접적인 말을 얘기하는 게 아니고 대상에 대해서 마음을 가져가고 대상에 머물고 하는 것, 위딱까 위짜라 라고 하는 부분들 이것이 먼저 떨어져 나가버립니다.

 

하나의 예를 들어봅시다. 마음이 앞서서 행동들이 일어나는 것이지 행동이 먼저 일어나지는 않죠. 당연히 내가 대상에 대해서 대상 자체가 없어져 버려야 됩니다. 관찰하는 대상 자체가. 그럴려면 대상으로 향하는 마음 자체가 끊어져버려야 숨이 그다음에 끊어질 수가 있다는 거라. 상수멸에 들려고 할 거 같으면 먼저 위딱까 위짜라라고 하는 것이 먼저 끊어져 버립니다.

위딱까 위짜라가 끊어지고 나면 그다음에 얘기하는 게 보통 여러분들이 얘기하는 숨이 툭 끊어져버립니다. 이걸 몸의 상카라 라고 그러죠.

 

그다음에 몸의 상카라가 탁 숨이 끊어지고 나면 어떻게 됩니까? 대상 자체가 인제 아예 없어져 버리죠. 그러면 () (), 마음으로써 일으키는 인식하고 하는 것, 느끼고 하는 것들 그런 것이 자동적으로 착착 끊어져버립니다.

그게 상수멸(想受滅)에 들어갈 때 순차입니다.

 

그러면 거꾸로 상수멸에 들었다가 깨어날 때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렇죠. 거꾸로의 상태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인식하고 느끼고 하는 것이 먼저 일어나지고 숨이 들이쉬고 내쉬고 하게 되고, 그리고 대상을 끊임없이 알아차리고 하는 위딱까 위짜라 부분이 생겨나지게 됩니다.

 

이런 과정을 겪는 사람이 있고, 겪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불환과에 이르렀다고 하더라도 이거 겪지 않는 사람 있습니다. 이 지금 상수멸의 과정을 안 겪고 불환과에 이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보통 통상적으로는 거의 99% 이상은 지금 스님이 얘기하는 이 과정들을 거의 공통적으로 겪어나갑니다. 그런데 간혹 그렇지 않은 경우들도 있습니다.

 

부처님 당시 때의 부처님 제자들은 이런 과정을 겪지 않은 분들이 상당히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사리불 존자 같은 경우는 부채질하다가 아라한이 됐거든요. 부처님 뒤에서 부채질하다가. 그런 경우는 이런 상수멸의 과정을 겪지 않고 바로 수다원에서 아나함-불환과를 바로 거쳐서 아라한이 됐던 그런 경우들입니다.

 

어쨌든 지금 스님이 중요하게 얘기한 부분은 뭐냐면,

불환과까지를 얘기하면서 키포인트가 뭡니까?

악의 부분이 떨어져 나가는 것들, 욕망이 떨어져 나가는 부분들이 돼야됩니다! 그것만 여러분들이 제거할 수 있다면 여러분들도 그런 불환과에 이르를 수가 있다는 얘깁니다.

조금만 엷어지더라도 일래과에는 이르를 수가 있다는 겁니다.

 

일래과, 불환과의 차이는 뭐냐면 잠재적인 성향까지 완전히 제거됐는가 아니면 잠재적인 성향이 남아있는가 그 차이입니다.

또한 수다원하고 아라한의 차이점은 뭐냐면 수다원에서도 이런 악의나 이런 것들이 평상시 때 안 일어나면 그 사람은 수다원이 아니라 수다원인 상태인데도 아라한과 같은 상태에 있다는 거라. 그런데 잠재돼있죠.

끊어내지 못했기 때문에 언제든지 일어나게 돼있습니다. 그런데 일어나지 않고 쭉 가는 분들도 많이 있습니다. 과거의 습성들이 그렇게 쌓여져 왔던 분들은 또 그렇게 돼 나가집니다.

 

어쨌든 여러분들도 이 책을 보면서 오하분결이 어떤 것이다 하는 것들은 여러분들이 한번 잘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유신견, 그다음에 의심, 계금취라 해서 의식과 의욕에 매여 있는 것들과, 욕구·욕망, 그리고 화냄이라고 하는 것 다섯 가집니다.

 

이왕 이런 길에 들어섰다고 할 거 같으면 여러분들도 똑같이 부처님이 가신 길을 걸어가야 됩니다. 그거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위빳사나를 통하지 않고는 이 길을 갈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공부들을 조금 더 열심히 하시기를 부탁을 드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