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깨달음. 네 부류의 성인들 1. 예류과 (20060901)
(※ 위빳사나입문 수행교재에 「네 부류의 성인들」 프린트 법문 있습니다.)
프린트물 한번 보십시요.
지금 아비담마 부분을 쭉 하면서, 그리고 또 목요일 날은 탁발법회 하면서 가장 많이 듣는 단어가 아마 이 「깨달음」이라는 단어일 겁니다.
그런데 아직 정확하게 여러분들이 개념정립도 안된 것 같고, 또 깨달음에 이르신 분들을 우리는 '성인'이라고 그렇게 얘기하는데, '네 부류의 성인'들에 대한 것들도 아직 정확하게 개념정립이 안 되어있는 것 같고, 또 너무 멀리만 쳐다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스님이 간단하게 정리를 좀 해봤습니다. 지금 프린트물 나간 것에 대한 연결 부분입니다이. 저번 시간에도 오하분결 부분을 분명히 했습니다. 연결되는 부분이기 때문에 그렇게 낯선 것은 아닙니다.
되도록이면 쉽게 쓸려고 했고, 또 네 부류의 성인에 대한 것들을 한국에서는 아직 자세하게 나와 있는 부분이 잘 없습니다. 그래서 한번 나름대로 정리를 해봤으니까 부족하더라도 이것으로써 개념정립들을 해주시길 부탁을 드리겠습니다.
자, 봅시다. 깨달음이라는 단어 모르는 사람은 없죠?
뭘 깨닫는 겁니까? 뭘 깨달음이라 그럽니까? 그리고 그 깨달은 성인들은 어디 있습니까? (수행자 대답) 그럼 지금은 그런 깨달은 분들은 하나도 없습니까? 이렇게 다들 뜬구름을 잡고 있다니까.
부처님 당시 때는 이 깨달음이라는 단어 자체는 낯선 단어가 아니었습니다. 지금도 여러분들에게는 낯선 단어는 아닙니다. 누구든지 출가하려고 하는 사람은 십중팔구 왜 출가하려고 하느냐 할 거 같으면 깨달음을 이루기 위해서 출가한다고 다들 그럴 거고, 일반 재가인들도 특히나 수행한답시고 하는 사람들은 뭐 때문에 수행하려 그러느냐 그러면 다들 깨달음을 이룰려고 그런다고 그럴 겁니다.
그런데 실제적으로는 깨달음이 뭔지도 모르고 달려가는 형국들이 많습니다.
붓다(Buddha)라는 단어를 한번 봅시다.
이건 부처님 이전부터 쓰여져 왔던 그런 단어입니다. 인도에서는 붓다라는 단어만 들어도 사람들이 환희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왜? 다들 그걸 목표로 해서 달려가고 있었기 때문에! 붓다는 한국말로 부처님입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부처님이라는 단어를 들어가지고 환희심을 그렇게 내는 사람이 있습니까? 별로 없죠? 그거는 왜 그렇습니까? 그러면 부처님 당시 때나 인도에서는 깨달음을 목표로 해서 수행을 하는 사람들이 많았고, 지금 한국에서는 그런 깨달음을 목표로 수행하는 사람들이 없어서 그렇습니까? 그렇지는 않겠죠?
그런데 부처님 당시 때도 쉽게 "내가 깨달은 사람이다" 하고 얘기를 할 수가 없었다고 그럽니다. 누가 깨달았느냐고 물어보면 "나는 아직 깨닫지 않았다"고 얘기를 했지 깨달았다고 얘길 한 적은 없다고 그럽니다.
그러니까 빔비사라 왕이든 아니면 부처님을 의지해서 출가했던 사람들이든 "붓다에게 공양을 올린다. 깨달은 분에게 공양을 올린다. 아니면 부처님을 뵈러 간다." 이렇게 하는 소리만 들어도 환희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는 거라.
"아, 드디어 이 세상에 깨달은 분이 출현을 하셨구나. 그분이 법을 전할려고 하는구나." 하는 걸 갖다가 그전부터 간절하게 원해왔기 때문에, 그래서 그런 소리만 들어도 환희심이 일어나서 몸에서 기쁨-삐띠가 일어났다는 걸 언젠가 내가 목요일 날 탁발법회 시간에 한 적이 있었을 겁니다. 그 정도로 일상화되어있는 용어입니다.
그렇지만 부처님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완전한 깨달음을 이루고 나서, 그런 깨달음을 체험한 것을 세상에 공표를 하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지금은 이 깨달음이란 내용도, 또 깨달음이란 용어도 생소한 단어는 아닙니다.
그런데 한국이나 중국 같은 경우에는 이런 깨달음이란 단어를 가지고 많은 분란을 가져왔습니다. 여러분들이 알고 있는 "돈오돈수냐 돈오점수냐" 하는 그런 문제, "돈오냐 점오냐" 하는 그런 문제들을 가지고 많이 충돌을 가져왔고 지금도 마찬가지 이런 실정입니다. 한번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부처님이 얘기한 깨달음의 부분은 돈오나 점수라고 하는 부분을 갖다가 초월한 그런 상태입니다. 일간에서는 대승불교에서 말하고 있는 설을 받아들여서 나중에 남방불교에서 그 부분을 변형했다 하는 그런 부분도 나옵니다. 그것은 그렇지는 않고, 스님이 이 부분에 대한 것들을 첫 장에다가 자세하게 적어놨습니다. 그래서 한번 프린트물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불교사에서 부파불교가 먼저였지 대승불교가 먼저였지는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깨달음의 단계도 대승불교에서 얘기하는 세 단계 아니면 그냥 하나의 단계가 먼저가 될 수가 없습니다.
부처님 당시 때부터 부처님이 이 네 단계로 깨달음을 이루신 성자들을 얘기를 해놨고, 또 그러한 것들이 이런 빨리어 경전이나 설일체유부에도 전해져오고 있기 때문에 그러한 것들이 근간이 되어야 됩니다.
마찬가지로 대승불교에서는 그런 맥락이 곳곳에서 보입니다. 불퇴전(不退轉)이나 정정취(正定聚)라고 하는 그런 부분들, 그다음에 일생보처(一生補處)라고 하는 그런 과위들, 이런 것들은 예류과나 불환과에 해당되는 그러한 상태를 얘기한다 하는 그런 것들도 적어놨으니까 한번 잘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크게 모르는 부분은 아마 없을 거라고 봅니다.
그래서 돈오돈수 돈오점수 부분, 돈오냐 점오냐 하는 부분들은 더 이상 여러분들이 비중을 가지고 다뤄야 할 그런 부분은 아니다 하는 것들을 알고 그러한 데에 시간을 허비하지 않도록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깨달음은 수행자가 얻는 결과물입니다.
어떻게 깨닫느냐를 가지고 어떤 과위에 도달했다, 아니면 바른 깨달음이었다, 아니면 그렇지 않은 깨달음이었다 하고 얘기를 하는 겁니다.
여러분들도 수행을 해서 얻어지는 깨달음이 있고, 수행을 하지 않아도 얻어지는 그런 깨달음이 있습니다. 그런 걸 잘 선택해서 바른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그렇게 해야 될 겁니다. 어쨌든 수행을 하지 않아도 얻어지는 부분이 있다고 하더라도, 결국에는 수행을 통해서 더 나은 결과물을 얻도록 해야 되고 또 그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
이 장에서는 사쌍팔배를 중심으로 해서 설명을 해드리도록 그렇게 하겠습니다.
깨달음은 책을 통해서 학습할 수는 없는 겁니까? (수행자 대답)
예, 없습니까? 경전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까? 단언을 합니까? (수행자 대답)
부처님이 분명히 두 개의 길이라고 그랬거든. 학습의 길하고 그다음에 실천의 길! (수행자 대답) 함께 가는데 그러면 실천 없이 수행 없이 학습만으로, 경전을 통하든 아니면 법문을 듣던지 이렇게 해가지고는 깨달음에 이를 수 없습니까?
그러면 경전에 보면 아무것도 불교에 대해서 모르는 사람들이 부처님 말씀을 듣다가 예류과에 이르렀다 하는 거는 또 무슨 얘깁니까?
분명히 경전에는 학습만으로써, 법문을 듣는 것도 책을 통해서 읽는 거하고 마찬가집니다. 그것만으로도 예류과에 이르렀단 말입니다. 그러면 수행을 통하지 않아도 적어도 예류과에는 이른다는 얘깁니다. 그렇죠?
그런데 법문을 듣다가 아라한에 이르렀다 하는 얘기는 경전에는 없습니다. 잘못 번역해가지고 아라한에 이르렀다 하는 경우는 있을 수가 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게 초전법륜 때 부처님 말씀을 듣고 깨달음을 이뤘다 하니까 그것을 아라한이 됐다 하고 표현하는 경우들이 있는데, 그건 그렇지는 않고 안냐꼰단냐라고 하는 그 '안냐'라고 하는 것은 '예류과에 이르렀다'하는 그런 뜻입니다. 그래서 꼰단냐가 먼저 되고 그다음에 쭉 순차적으로 다른 제자들이 깨달음에 이르게 해서, 그건 부처님 말씀만 듣고도 예류과에 이르렀다는 얘깁니다.
그러고 나서 삼개월 동안 꾸준히 부처님과 같이 수행하고 탁발하고 부처님 말씀을 듣고 하면서 자기 스스로 체험해서 무상·고·무아를 증득해서 결국에는 마지막에 부처님이 무아상응경을 설하고 나서 완전한 깨달음-아라한이 된 상태가 되죠?
일부 경전에서는 잘못 번역을 하는 경우는 있을 수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듣는 것만으로 그러니까 학습하는 것만으로써는 예류과 이상은 올라간 기록은 없습니다. 현대에도 마찬가지고. 부처님 당시는 더더구나 마찬가지고.
자, 그러면 학습만으로써도 이를 수 있는 게 예류과라고 할 거 같으면, 물론 수행을 통해서도 이를 수 있다는 얘깁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이 크게 높이 보고 또 멀리 있는 단계라고는 보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하는 얘깁니다. 그렇죠?
조금 전에 향선님한테 그런 성인이 있습니까 하고 얘기하니까 “없죠” 이렇게 얘기하는 건, 그 예류과에 든 분도 성인의 부류입니다. 너무 높게 봤기 때문에 없다고 판단을 하는 것뿐입니다. 물론 성인은 성인이 알아보는 것이지 범부중생이 성인을 알아보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는 그런 개념들이 너무나 빗나가있다는 그런 얘깁니다.
자! 예류과 부분을 한번 봅시다.
깨달음의 결과물인 단계는 예류과부터 일래과 불환과 아라한과 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 단계단계는 번뇌가 점진적으로 사라지는 단계라고 보시면 크게 틀리는 부분은 아닙니다. 번뇌가 순차적으로 사라지는 만큼 동시에 지혜는 또 서서히 나타나게 되겠죠.
갓난아기는 순진합니다. 아무것도 모릅니다. 더러움이 없다는 거죠.
번뇌는 뭡니까? 더러움이 묻어있는 상태입니다.
그러면 갓난아기는 이런 성인입니까? 번뇌가 안 묻어있으니까! 그렇게는 얘길 안 하죠? 그렇지만 성인의 상태 하고 갓난아기의 마음 상태 하고 그렇게 별반 차이 나는 것은 아닙니다. 번뇌가 점점 엷어진다고 하는 것은 갖고 싶은 것이 없다는 얘깁니다. 눈에 띄지도 않고 마음에 들어오지도 않기 때문에 그런 욕구가 일어나지 않는다 하는 얘깁니다. 그 갓난아기도 마찬가집니다. 아무리 먹을 걸 주고 또 돈을 한번 쥐어줘 보라고. 가리질 않는다는 거라. 갖고 싶은 욕구가 안 일어나기 때문에.
이런 상황으로 인해서 점차적으로 번뇌가 사라져서 아라한과에서는 모든 번뇌가 사라져버리고 마음속에서는 지혜만이 나타난다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번뇌들은 종류가 굉장히 많다고 하지만 크게 나누어서 탐․진․치 그렇게 얘기합니다. 욕구·분노·어리석음 그 세 개의 종류를 세세하게 나누어서 천오백가지다, 백팔가지다, 뭐 몇 가지다 하고 얘기들을 하는 것뿐입니다. 크게 묶으면 그 세 가지뿐입니다. 그 세 가지가 거친 것이냐 아니면 거칠지 않은 것이냐 하는 것에 따라서 조금 차이가 나는 것뿐입니다.
예를 들어서 예류과에 도달할려고 할 거 같으면 예류과는 뭡니까? '도의 흐름에 든 자'라는 그런 뜻입니다. 그 흐름에 들었기 때문에 강물이 위에서 아래로 끊임없이 흘러가듯이 언젠가는 바닷속으로 물이 흘러들어 가듯이 도의 흐름에 들었기 때문에 이 자는 언젠가는 완전한 깨달음에 이르르게 된다 하는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인의 부류에 들어간다는 의미입니다. 도의 흐름에 들었다가 다시 범부중생의 흐름으로 돌아온다고 할 거 같으면 그것을 성인이라고 얘기 안 합니다.
왜 그러면 도의 흐름에 든 자를 예류과 라고 하는가?
가끔씩 그런 얘기를 합니다. “스님 법문을 쭉 듣고 있으면 다른 스님의 법문을 들으면 귀에 안 들어옵니다.” 다른 부류에 있는 스님들도 마찬가지겠죠.
그거는 어떻게 해서 생겨나는 겁니까? 아이고, 저 스님이 하는 얘기가 그래도 맞는 것 같다는 확신이 섰기 때문에, 다른 스님들이 얘기하는 걸 보면 사리분별에 안 맞고 그러니까 '아이고, 저건 아니다' 하고 쳐버리기 때문에 이 스님 말씀 외에 다른 스님 말씀이 귀에 안 들어온다 하는 얘기와 마찬가집니다.
내가 이 길로써 쭉 따라가면 우리 집에 간다는 확신이 있을 거 같으면 절대 다른 길로 벗어나질 않습니다. 가다가 멈추어 설 수는 있지만 그 길을 벗어나진 않는다는 애깁니다. 벗어나면 집하고 멀어진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또 내가 벗어나면 나쁜 길로 빠질 수가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벗어나질 않는다는 거라. 그러니까 그 길로 쭉 따라가게 된다는 거라.
적어도 그런 도의 흐름에 든 자가 될려고 할 거 같으면 먼저 뭐가 되어야 합니까? 스스로 '이 길만이 바른길이다' 하는 확신이 들어야 가능합니다. 그런 확신이 들지 않으면 그 길로 들어설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와 같이 그런 확신이 들어서 예류과로 향하는 단계에 드는 자들을 예류도, 예류향이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아직 예류과로는 되지 않았지만 그런 깨달음의 길로부터는 멀지는 않았다 하는 그런 뜻입니다. 그래서 '나아가는 자'라는 그런 뜻입니다.
네 부류의 성인이 있으니까 그렇게 향해나가는 부류가 있고, 그렇게 이르는 사람이 있고 하니까 여덟 부류가 됩니다. 그래서 그것을 두 부류를 한 쌍으로 하기 때문에 '네 쌍의 여덟 부류라 해서 사쌍팔배'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이렇게 사쌍팔배에 든 자들을 보통 우리는 성인이다 하고 얘기들을 하게 돼있습니다. 그 외에 사람들은 범부중생이다 하고 얘기를 합니다.
이런 도에 든 분들은 꼭 출가한 승려만 도에 든 것은 아닙니다. 그렇죠? 얼마든지 일반 세속인들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많고. 어쨌든 출가자와 재가자를 포함해서 이분들이 어떤 면에서는 가장 부처님께 다가가고 있고, 부처님과 가까운 혈족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런 분들을 부처님의 가족이다 하고 얘기를 합니다.
그런데 가족은 아무리 떼어놓으려고 해도 떼어놓을 수가 없습니다. 원수가 될 수 있을지는 몰라도 가족을 너는 내 가족이 아니다 하고 떼어버릴 수는 없습니다.
성인의 경지도 꼭 마찬가집니다. 이 경지에 갔으면 그다음 경지로 넘어가지고, 그다음 경지로 갔으면 또 다음 경지로 넘어가지고 이렇게 넘어가지게 돼있습니다.
그러니까 예류과에 들면 일곱 번을 넘기지 않고 깨달음을 이루게 되고, 일래과에 들면 한 번 더 이 세상에 와서 깨달음을 이루게 되고, 불환과에 들면 이 세상에는 오지 않고 범천계에서 선정에 들었다가 선정을 마침과 동시에 완전한 깨달음에 들고, 아라한은 아예 이 세상에서 깨달음에 이르게 되고, 이렇게 차이는 있을지 몰라도 언젠가는 다들 그렇게 깨달음에 이르게 돼있다 하는 겁니다. 가족은 뗄 수 없듯이 깨달음 하고는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습니다.
그런데 경전에는 보면 예류과에 도달했던 분들이나 아니면 일래과에 도달했던 분이나 불환과에 도달했던 분들도 고민도 남아있고 그런 괴로움도 있고 그렇게 합니다.
그런데 왜? 성인이면서 왜 그럴까? 하고 생각할 것 같으면 여러분들이 생각하는 성인은 밥도 안 먹고 똥도 안 싸는 사람을 성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렇다는 겁니다. 그것은 아니다 하는 거라.
단지, 이런 성인들은 언젠가는 깨달음에 이르기 때문에 서로서로 이끌어주고 도와준다는 거라. 그렇기 때문에 그것이 좋은 도반으로서 도를 나누는 그런 사람으로서 나아가게끔 되어있다 하는 그런 뜻입니다.
예류과 부분입니다.
"무상을 깨닫는 것, 또 무아를 깨닫는 것이 불교다" 하고 보통 얘기를 합니다.
그런 무상이나 무아를 단 일순간이라도 수행을 통해서 체험했다고 할 거 같으면 '내가 있다'하는 그런 견해가 생길까요? 그리고 그런 거친 번뇌들이 생겨날까요? 한순간 체험한 것을 가지고? 「나」가 있다는 견해가 생겨납니다. 체험했던 당시에는 그것이 없다는 사실을 알지만 체험을 안 해버리면 다시 또 돌아와 버린다는 거라.
그런데 문제는 뭐냐 하면 인제는 안다는 거라. 그걸 체험을 해봤기 때문에 "아, 정말로 나라고 하는 것이 부동하게 변하지 않는 나라고 하는 것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구나. 어떤 것이든 변하는 속성을 지니고 있지 변하지 않고 있는 것은 아니구나. 무상하구나" 하는 걸 알고 있다는 거라.
그걸 뭐라고 그럽니까? 일반적으로 우리는 「유신견」이다 그렇게 얘기합니다.
예류과에 이르게 나면 그런 유신견이 떨어져 나갑니다. 물론 유신견이 떨어져나갔다 해서 화를 안 내고 또 욕심을 안 부린다는 얘기는 아닙니다. 적어도 「나, 나의 것」이라는 개념에서는 조금 탈피한다는 얘깁니다.
유신견이 사라지고 나면 자연스럽게 사라지는 견해가 뭐냐면 「의심」 부분입니다. 이게 맞나 틀리나? 그래서 이리 갈까 저리 갈까 많이 방황하는 경우들을 얘기합니다.
부처님도 그런 진리를 찾아서 이곳에서 저곳으로 많이 방황을 하고 많이 찾으러 다녔습니다. 그때도 마찬가지고 지금도 마찬가집니다. 스승을 찾아서 이쪽에서 저쪽으로 많이들 다닙니다. 만약에 내가 의심을 하지 않는다고 할 거 같으면, 그 스승 밑에서 있으면 깨달음에 이르겠다는 확신만 들 거 같으면 가질 않게 돼있다는 거라. 그런데 그런 의심이 있기 때문에 이곳에서 저곳으로 이동을 할 수 밖에 없다 하는 거라.
그런데 그런 의심도 나라고 하는 개념이 없다고 할 거 같으면, 나의 것이라고 하는 개념이 없다고 할 거 같으면 의심은 생겨나지지를 않습니다.
유신견이 떨어져버리고 나면 그다음으로 떨어져버리는 것이 그런 의심하는 부분들입니다. 그래서 이 종교가 좋을까 아니면 이쪽 명상법이 좋을까 하는 우왕좌왕하는 것이 없어져버리게 된다 하는 거라.
그다음에 세 번째 사라지는 번뇌가 뭐냐 하면 「계금취」 부분입니다.
습관이나 문화적인 것에 대한 집착입니다. 남방불교를 하기 때문에 이러이러한 방식으로 예불을 해야 되고, 이러 이렇게 해야 되는 것이고, 그것이 맞는 것이고 저것은 틀린 것이다. 그거는 뭡니까? 욕구나 분노가 아닙니다. 그것은 계금취라고 하는 어리석은 견해로 인해서 일어나는 것들이라는 거라.
그걸 '사악한 견해'라고 그럽니다. 아니면 절에 들어오면 절에 들어오자마자 오른발로 디디고 합장을 하고, 나갈 때는 돌아서 이렇게 이렇게 나가야 된다. 아니면 집에 들어가면 맨 처음 물부터 마셔야 된다. 그렇게 안 하면 그게 틀린 것처럼 돼버리고. 어떤 면에서는 종교적인 의의나 관습들이 필요한 경우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거기에 매여버리면 다른 것들은 틀렸다고 할 수밖에 없다는 거라. 그걸 계금취라고 그럽니다.
그것도 마찬가지로 나라고 하는 관념, 나라고 하는 개념이 있어야 만이 내 것이 맞고 니 것이 틀렸다고 하게 됩니다. 유신견이 떨어져나가면 자연스럽게 이 계금취 부분이 떨어져나가버립니다. 그래서 그러한 것에 속박되지 않게 된다 하는 것입니다.
자! 이 세 가지를 보면 공통적인 게 탐·진·치 중에서 어느 부분에 다들 해당이 됩니까? 치(癡) 부분에 해당이 되죠!
어리석기 때문에 바른 견해를 가지지 않아서 나라고 하는 것이 있다고 판단을 하게 되고, 또 나라고 하는 것이 있기 때문에 의심을 하게 되고, 또 나라는 것이 있기 때문에 내 것이 맞고 니 것이 틀렸다 하는 계금취가 생겨나고 하는 겁니다. 감각적인 욕망이나 욕구를 내지 않고 또 화내거나 분노를 가지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이 세 개는 일어날 수 있는 부분입니다.
하나 더 예를 들면 계율이라고 하는 부분은 잣대로써 이것은 맞는 것이고, 이것은 하면 안 된다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럼 그것도 계금취에 속하는 겁니까? 그건 그렇지 않죠! 그것은 어떻게 해서든지 지키지 않으면 안 되는 것들이라는 거라. 왜? 스스로의 행복과 다른 이들의 행복을 위해서! 그것은 그러한 계금취와는 별도의 것들이라고 생각을 하시면 됩니다.
어쨌든 이 예류과에서 사라지는 것들은 딱 이 세 개의 번뇌뿐입니다.
어떤 면에서는 바른 견해를 가지지 않아서 그래서 무지해서 생기는 것들이라. 그래서 예류과에 이르렀다고 하더라도 신경질은 신경질대로 부리기도 하고, 욕심은 욕심대로 부리기도 하고, 그렇게 합니다.
그런데 그런 분들을 어떻게 성인이라 할 수 있느냐 하는 거라. 뭔가 범부들 하고 다르기 때문에 뭐 그렇게 신경질 부리고 그리해도 '아, 그래도 저 사람은 성인이다' 하고 얘기를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범부중생들하고 똑같다고 할 거 같으면 그것은 성인이라고 볼 수 없겠죠.
그런데 내가 일순간만이라도 무상·고·무아를 체험했기 때문에 마음은 백팔십도로 달라져 있습니다. 어디로 향합니까? 세속적인 탐·진·치로 향하는 게 아니라 깨달음으로 향해있습니다. 이미 마음은! 잘못을 저질렀다고 하더라도 반드시 다시 돌아오게끔 돼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 흐름에 들었기 때문에 언젠가는 깨달음에 이른다 해서 예류과라고 얘기를 합니다. 다시는 그 깨달음을 향하는 길로부터 물러나지 않는다는 그런 뜻입니다. 그렇지만 여기에 적혀 있는 대로 그 사람은 세 가지 번뇌는 사라졌지만 잘못된 견해, 무지들로 인해서 분노나 욕구들을 가지고 있는 상태입니다. 그래서 경전에는 열심히 노력하면 일곱 번을 태어나고나서 여덟 번째까지는 태어나지지를 않게 된다 하고 얘기를 하는 겁니다.
왜 부처님이 그런 얘기를 했을까?
부처님은 중생들이 윤회하는 모습들을 쭉 관찰로써 알고 있는 분입니다. 이 분이 과거에는 어떤 모습이었고, 그 과거에는 어떤 모습이었고 하는 걸 알기 때문에 예류과에 든 사람들을 쭉 살펴보니까 적어도 일곱 번 이상 태어나질 않고 깨달음에 이르렀다는 사실을 신통력으로써 꿰뚫어 봤던 겁니다. 사람들이 환생하는 모습들을. 그런 사실들을 확인했기 때문에 일곱 번 태어날 때까지 반드시 아라한과에 이르렀다 하고 얘기를 하는 겁니다.
***
삼보에 의지하여 나아갑니다.
이 법문 글은 아짠 빤냐와로 마하테로 스님께서 설하신 법문들에서 녹음된 것을 토대로 필사한 내용입니다.
개인적인 공부로써 삼장법사 스님의 법문을 듣고 옮겨 적으며 되도록이면 최대한 선원장 스님의 육성을 그대로 담고자 노력했습니다.
옮긴이의 앎과 노력이 부족하여 법문 본래의 뜻과 요지를 오롯하게 담아내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부디 법문내용의 속뜻을 헤아려 주시길 바랍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가감 없이 변형 없이 오롯이 전해주시는 붓다의 길따라 선원장 스님께 지극한 마음으로 감사드립니다.
올바르고 귀중한 법문들이 설해질 수 있는 장소와 조건을 유지해주시고, 설해진 법문들을 잘 보존해오신 선배도반님들께 지극한 마음으로 감사드립니다.
서로서로 힘이 되어주시는 모든 테라와다 도반님들에게 지극한 마음으로 감사드립니다.
모든 존재들에게 공덕이 골고루 나누어지길 바랍니다.
모든 이들이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이 가르침으로 인해 법의 눈이 열리고 지혜가 증장되어지기를
이 가르침이 실천수행으로 이어져 닙바나의 토대가 굳건해지기를
2022년 12월 다시 필사하며 담마마-마까 올립니다. _()()()_
'아짠 빤냐와로 스님 수행법문 녹취 > 네 부류의 성인들 : 담마스쿨'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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