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법문교재/테라와다 불교의범과 신행생활

까티나 가사_빤냐와로 스님법문_담마스쿨_130719-1

담마마-마까 2024. 12. 26. 17:10

https://youtu.be/J7n2jZCQH5w?si=1Vph5kpu96xCHGd4

 

* 까티나 가사_빤냐와로 스님법문_담마스쿨_130719-1

 

저번 시간에 우기 안거에 대한 걸 공부를 했습니다.

이번에는 안거가 끝나고 나서 스님들이 이제 유행을 떠나기 전에 하는 까티나 가사에 대한 얘기를 좀 하겠습니다.

가사는 어떤 종류들이 있을까? 삼의(三衣)라고 하니까, 아랫가사 윗가사 그다음에 이 중복가사 해서 그게 삼의인데, 목적에 따라서 가사들이 다 틀립니다.

만약에 숲에서 거주하는 스님들에게 가사를 준다. 그럴 때는 보통 그 가사는 파빠(phapa)라고 이렇게 이름을 붙입니다. 아란냐 둣사라고 얘기하는데, 아란냐에 거주하는 스님 그러니까 홀로 고요한 곳에 가서 공부하는 스님들에게 필요한 가사들을 갖다 올리는 것을 파빠 가사(phapa cīvara)라고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또는 스님들에게 가사를, 돌아가신 분을 위해가지고 그 돌아가신 분이 입고 있던 옷이라든지 돌아가신 분을 위해서, 흔히 여러분들 돌아가신 분을 위해서 제사를 지낼 때의 방법이 세 가지 방법이 있다고 그랬죠. 스님 설법 듣는 방법, 또 하나는 스님에게 공양 올리는 방법, 하나는 스님에게 가사를 올리는 방법, 세 가지 방법이 있다고 저번에 제사 의식에 대해서 얘기를 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돌아가신 분을 위해서 올리는 가사, 이때는 이 가사를 갖다가 빵수꿀라 가사(paṁsukūla cīvara)라고 이렇게 얘기합니다. 분소의라는 그런 뜻이죠.

 

그래서 가사는 그 목적에 따라서 부르는 방법이 다 틀립니다.

 

여기서는 까티나 가사(kaṭhina cīvara)라고 그렇게 얘기했습니다. 그렇죠?

까티나라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

물론 여기 읽어보면 형용사로 써 있을 때는 뭐 이런 이런 이런 의미를 가진다, 견고하다는 의미, 그다음에 칭송받는다는 의미, 또는 옛날에 가사를 짓기 위해서 이런 틀을 만들어서 거기에 가사 염색을 하고 해야 되기 때문에 그 틀을 의미한다는 것, 또는 가사를 갖다 이게 조각으로 돼 있으니까 가사를 짜르기 위해서 넓게 펴놨던 판이라는 의미, 또는 그 가사를 짜르기 위해서 이렇게 똑바른 줄자를 댔으니까 그 줄자의 의미, 이런 여러 가지 뜻들이 있습니다.

근데 그거는 사전적인 의미인 거고, 여러분들이 알아야 되는 까티나라고 하면 탁 받아들여야 되는 의미는 다른 것이 아니라 특별하다는 의미를 받아들여야 됩니다.

 

왜 그럴까? 다른 가사들은 특별하다고는 얘기를 안 하는데, 왜 까티나 가사 이 행사 때만 특별하다는 명칭을 쓰게 될까?

선원에 가서 스님에게 가사를 준다, 아니면 저기 혼자서 떨어져서 수행하는 스님한테 가사를 준다, 돌아가신 분을 위해가지고 가사를 올린다, 또는 나를 위해서 가사를 올린다, 이리 하더라도 그 가사들은 상가의 의결을 거치는 법이 없습니다.

상가 스님들이 “음, 그래 이거는 니 가사 해라. 아니면 이거는 상가 가사다.” 하고 이렇게 의결을 거치는 법이 없습니다.

근데 딱 하나, 까티나 가사만은 상가 의결을 반드시 거쳐야 됩니다. 상가 의결을 거치지 않으면 일반 가사가 돼버리게 됩니다.

 

상가 의결을 거쳐야 되는 거는 상가 의결을 거칠 때 일반인이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아요? 예를 들어 봅시다. 상가의결을 거치는 것 중에 여러분들이 가장 많이 알고 있는 게 스님들 출가하는 비구계를 받을 때, 비구계를 받는 곳에 들어가서 이렇게 참석할 수 있을 것 같습니까? 못합니다. 사미계까지는 참석이 가능해요. 그런데 비구계를 줄 때는 참석을 못합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됩니다. 테라와다의 스님들 잘잘못에 대해서 얘기를 하고 있는 자리에 테라와다 스님이 아니고 다른 일반 스님이 온다, 아니면 여러분들이 참가를 한다, 그럴 것 같으면 그 말이 다른 데 새어 나갈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면 테라와다 스님들은 그런 잘잘못을 할 때는 다른 스님들이나 일반인들이 참여하지 못하게끔 합니다.

기업체에서 기업 간부 회의하는데 다른 기업체 간부가 참석하게끔 할 수 있겠어요? 못 하게 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테라와다 비구계를 받을 때는 테라와다 스님들만 참석이 가능한 것이지, 일반인이 참석을 못 하게끔 돼 있습니다.

 

물론 경전에는 1하타파사라 해가지고 이 손을 쫙 뻗었을 때, 여기 머리 중앙으로부터 요 손끝까지의 거리 이게 보통 부처님의 손을 가리킬 경우에는 1.2m 정도 된다고 합니다. 1.2m 이상 떨어지면 관계가 없다 해가지고, 버마 같은 경우에는 비구계 주는데 일반인이 참석을 하도록 해요. 그런데 나중에는 다시 또 나와야 돼. 비구계를 줄 동안에는 참석하는데, 마지막 상가 깜마라해서 이 스님은 인제 이름이 무엇이고 인제 비구계를 받았다. 하고 확인하는 도장을 스님들이 딱 합송하고 탁 할 때는 그때는 이 하타팟사 이상 떨어져 있었던 재가인이지만 나와야 되는 거라. 그 시마석 밖으로 나와야 되는 거라.

 

그러니까 상가 의결을 거치는 경우에는

그런 비구계를 주는 것도 있고, 또 여러분들이 알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 상가 의결을 거치는 것이. 만약에 여기를 결계당으로 하겠다고 더 할 것 같으면 시마석을 정하고 하는 것들도 스님들끼리만 합니다. 스님들이 중요한 직책을 정해주고 할 때도 스님들끼리 합니다. 또 스님들이 안거를 지내고 또 자자를 하고 참회를 하고 할 때도 스님들끼리만 합니다. 꼭 마찬가지로 까티나 가사를 정하는 것도 스님들끼리만 하게 되는 거라. 재가인이 참여를 못 하게끔 되는 거라.

 

그게 쉽게 말하면 상가 의결이라고 하는 상가 깜마(saṅgha-kamma)라고 하는 겁니다.

까티나 가사는 반드시 이것을 거쳐야 되는 거라. 이것을 거치지 않으면 까티나 가사라고 하지 않게끔 돼 있거든. 이것만 봐도 이 가사는 다른 일반 가사하고는 틀리게 특별한 의미를 지닌 가사라는 그런 뜻이 됩니다.

 

또는 다른 가사들은 가사를 줄 때가 되면 언제든지 스님한테 드리면 됩니다. 또는 내가 해피 스님한테 주고 싶다 하면 해피 스님한테 가서 주면 됩니다. 그럼 해피 스님이 “고맙습니다.” 하고 받으면 돼요. 그러면 해피 스님이 받으면 어떻게 돼요? 해피 스님이 이 받은 것으로 인 해서 그 해피 스님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공덕만 내가 가져가게끔 됩니다. 그게 일반적인 가사라. 여기 있는 빤냐와로 스님한테 가사를 갖다가 공양을 올렸다, 그럴 것 같으면 빤냐와로 스님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공덕만 내가 가져가게끔 되는 거라.

 

근데 상가 의결을 거쳐서 놔놓으면 빤냐와로 스님한테 주든 해피 스님한테 주든 이 가사는 상가의 가사라. 상가 전체의 가사인 거라. 그러니까 어떻게 돼요? 모든 스님들의 공덕을 다 받게 되는 거라. 그 얼마나 크겠어? 가사 하나 올리는 건데도 똑같은 빤냐와로 스님한테 올리는 건데도 상가 의결 거친 거하고 거치지 않은 거는 이렇게 차이가 나버리는 거라.

상가 가사라는 것은 지금 현재 존재하는 스님만 해당이 되는 게 아니고 앞으로도 계속 출가할 스님, 또 여기 한국에만 존재하는 테라와다 스님뿐 아니라 버마 태국 온 데 존재하는 이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테라와다 스님들이 다 상가이기 때문에 다 그분들의 공덕들을 받는다는 거라. 그러니까 공덕의 양도 굉장히 무량해져 버리게 되는 거라. 공덕도 그런 의미들을 가지게 되는 거라.

 

그래서 상가 의결을 거친다는 것은 이렇게 특별한 의미들을 지닌다 하는 걸 여러분들이 먼저 알아야 됩니다. 그래서 까티나라고 하면 이거는 특별한 가사다 하고 분명히 알아야 됩니다.

이렇게 알 것 같으면 이 테라와다 불교권에서는 까티나 가사 할 때 얼마나 스님들한테 이 가사를 올리고 싶어 하겠어? 누구든지 그 공덕 무량한 공덕을 받으려고 가사를 올릴려고 할 거 아니라. 그런데 어떡하냐? 이 가사는 무한정으로 모든 스님에게 줄 수 있는 게 아니라.

 

오직 한 스님에게만! 여기 많은 스님이 있다. 올해는 우리 여기 사원에서 가사를 받을 수 있는 스님은 만약에 해피 스님으로 정해졌다. 상가에서 그렇게 의결했다.

그럼 해피 스님만 받을 수가 있는 거라. 다른 스님은 못 받아. 내가 아무리 여러 재가자들이 가사를 준비했지만, 그래서 다른 스님들한테 이렇게 다 가사를 하나씩 하나씩 나눠주지만, 까티나 가사를 받을 수 있는 스님은 그 특별한 가사를 받을 수 있는 스님은 상가에서 해피 스님으로 정해졌다고 하면 해피 스님밖에는 못 받는 거라. 딱 해피 스님만 세 벌 삼의를 갖춘 1벌만 딱 받을 수가 있게 되는 거라.

 

나머지 스님들은 그럼 받는 거는 뭐라? 까티나 가사는 아니죠? 그러면. 까티나 가사는 딱 한 스님에게만 받을 수 있으니까 그렇죠? 그러니까 나머지 스님들이 받는 거는 상가 의결을 거치지 않은 가사고, 똑같은 가사인데 해피 스님한테 준 거는 상가 의결을 거친 가사 그러니까 상가 가사인 거고, 이것은 다른 스님들에게는 개인 가사가 되는 거라. 조금 특별하죠. 똑같은 가사라고 하더라도. 그래서 오직 한 분의 스님에게만 올릴 수 있는 한정된 가사라는 그런 뜻입니다.

 

그런데 그러면 해피 스님한테 공양 올린 분은 무량한 공덕 받아가고, 뭐 빤냐와로 스님이나 다른 스님한테 똑같은 가사 올리는데 나는 뭐 그럼 요만큼밖에 공덕을 못 받아가면 그 불편해서 어떡하려고? 안 되겠죠 그러면.

그래서 스님들이 뭘 하냐면, 까티나 가사를 딱 받으면 뭘 해야 되느냐 하면, 해피 스님이 그렇게 얘기를 합니다. "스님들, 내가 받은 이 까티나 가사는, 내가 까티나 가사를 받았습니다. 그러니까 상가 스님들이 이것을 올바르게 받았다고 승인해 주십시오." 하고 해피 스님이 얘기를 해야 되는 거라. 그럼 다른 스님들은 "그래. 해피 스님 받은 가사는 까티나 가사 맞다. 그걸 우리가 승인합니다. 상가 가사로서 승인합니다." 하고 딱 얘기를 합니다. 그렇게 딱 되면 다른 스님들이 받은 것들도 전부 그 공덕을 같이 이루게끔 되는 거라.

그게 다른 가사하고의 차이점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을 것 같으면, 이걸 까티나 가사로서 승인을 해서 다른 스님들이 받은 가사들도 똑같은 그런 특별한 의미들을 가지지 않을 것 같으면, 그 스님에게 올린 분은 공덕을 요만큼밖에 못 받게 되는 거라. 다른 가사들을 받을 때는 스님들이 게송을 하는 법이 없습니다. 근데 까티나 가사를 할 때는 반드시 이 게송을 해야 되는 거라 스님들이.

앉아가지고 상가 스님들이 "까티나 가사를 펼친다"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펼친다는 거는 "까티나 가사로 승인해 주십시오. 상가 가사로서 승인해 주십시오" 하는 얘기라. "승인해 주십시오." 얘기를 하게끔 되는 거라. 그럼 다른 스님들도 "그거는 우리 승인합니다" 하면서 "싸두" 하고 세 번 하게 되는 거라. 그렇게 해가지고 그게 이제 공덕이 모든 것들이 무량하게 되는 거라.

 

그렇게 되는데, 그러면은 가사만 올릴 수 있느냐? 그렇지는 않다는 거라. 스님들에게 필요한 것들은 그 가사 외 여러 가지 물품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저번 시간에 그 물품들에 대한 얘기를 했죠. 그 물품 어떤 걸 올리더라도 그 까티나 가사를 올리는 공덕에 그것이 플러스가 돼버리게 되는 거라. 그러니까 무량한 공덕이 그대로 유지가 되게끔 되는 거라.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까티나 가사 때는 빠지지 않으려고 합니다.

다른 때는 어떤 행사를 한다고 할 것 같으면 좀 안 가려고 하고 빠지기도 합니다. 근데 까티나 가사 행사가 있다 할 것 같으면 기를 쓰고 가려고 합니다. 복 많이 받을라고, 쉽게 말하면.

그래서 까티나라고 하는 것은 이런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분명하게 알아라.

 

그리고 상가의 의결을 거쳤지만은 재가자와 출가자가 불가분의 관계로서 서로 고리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이 이 까티나 가사밖에 없습니다.

어떤 것도 재가자와 출가자가 하는 일은 분명하게 구분을 해둡니다. 그래서 출가자는 출가자의 일이 있고, 재가자는 재가자의 일이 있는데, 이 까티나 가사만은 반드시 재가자가 가사를 줘야만이 그걸 까티나 가사로서 스님들이 인정할 수가 있고, 그리고 그걸 갖다가 여러분들의 공덕을 나눠주기 위해서 까티나 가사를 펼칠 수가 있게 되는 거라.

이 관계가 서로 불가분의 관계가 아닐 것 같으면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 이 까티나 가사라는 것들입니다.

 

부처님의 양모, 양모라 하면 말이 좀 이상하나? 요즘 말로 할 것 같으면 새엄마, 엄마가 돌아가셨으니까 엄마 역할을 한 새엄마가 누굽니까? (수행자: 마하빠자빠띠)

마하빠자빠띠 고따미. 잘 아네. 그래서 줄여서 고따미라고 하겠습니다. 그 고따미가 손수 가사를 만들어서 부처님한테 올렸어요. 출가하기 전입니다. 고따미가 나중에는 비구니가 됩니다. 그래서 최초의 비구니 상가를 만들기도 하는데, 출가하기 전에 이제 부처님한테 가사를 올렸어요. 얼마나 정성이 들어갔겠어. 아들같이 키운 분이 이렇게 부처님이 돼 있으니까 내 같아도 옷 한벌 만들어 갖고 탁 주겠다. 그래가지고 정성스럽게 해가 탁 올리는데 부처님이 안 받을라고 그러는 거라. 3번을 거절을 해요.

 

뭐라고 거절하느냐면 “고따미야, 나한테 줄라 하지 말아라. 상가에 줘라.” 이렇게 얘기합니다. 여러분들 이해가 갑니까? 여러분도 이해 안 가듯이 고따미도 이해를 못하고 옆에 있는 아난다도 이해를 못 합니다. 상가에게 어떻게 줘라는 거라. 쉽게 말하면 이걸 갖다 잘못 오해할 것 같으면 그 가사를 안 받겠다는 얘기와 마찬가지입니다.

왜 그랬을까? 부처님이. (수행자: ...) 그렇지. 부처님 개인의 공덕보다도 상가의 공덕이 크다는 얘기라. 부처님은 상가의 일원입니까? 상가의 일원입니까? 아닙니까? 상가의 일원이라.

 

그럼 상가의 일원일 것 같으면 왜 "붓당 사라낭 갓차미" 하고, 왜 "상강 사라낭 갓차미"라고 합니까? 왜 이건 또 분리돼 있어요? 왜 그런 거라요? 여러분들이 만일 상가의 일원일 것 같으면 "붓당 사라낭 갓차미" 하지 말고 "담망 사라낭 갓차미" "상강 사라낭 갓차미"만 하면 되지, 뭐하러 "붓당 사라낭 갓차미"를 해요?
(수행자: ...)

그리 하더라도 그 담마를 가르치고 또 상가를 확립시킨 분은 부처님이기 때문에 부처님에 대해서 귀의하는 것, 부처님을 의지하여 나아가겠다는 것이 하나 더 들어있는 겁니다.

 

그리하더라도 붓다의 공덕과 상가의 공덕은 비교할 수가 없습니다. 상가 안에 부처님이 또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당연히 부처님 개인한테 공양 올리는 공덕보다는 상가에게 공양 올리는 것이 훨씬 공덕이 크다는 거라. 부처님은 그런 뜻으로서 “나한테 올리려 하지 말고 상가에 올려라” 그러는데 이건 이해를 못하는 거라. 아난다도 이해를 못하고. 그때서야 인제 부처님이 얘기를 합니다.

상가의 공덕은 이렇게 크다. 가사를 올리더라도 상가에 올리는 가사가 훨씬 크다는 거라.

근데 여러분들이 만약에 가사를 올린다. 그럼 언제 올리는 게 좋겠어요?

까티나 때 올리라는 거라. 그러니까 다른 때 올릴라고 하지 말고.

 

까티나가 그러면 항상 있어요? (수행자: ...) (수행자: 안거 2번)

안거 두 번? 그건 어디서 나온 소리라? 내 그렇게 가르쳐 준 적이 없는데. 하안거 동안거 생각하는 모양이구나. 한국에서 하안거 동안거 있어도 안거로 치는 건 하안거뿐입니다. 그러니까 동안거는 동안거를 들어가더라도 동안거 방명부에 기록은 돼 있어도 그것이 안거로서 인정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럴 것 같으면 몇 안 거 지냈습니까? 할 것 같으면 하안거 동안거 다 지냈으면 2개가 올라가야 되지, 1년에 왜 2개가 올라가지고 어떡하려고? 그렇게 될 수는 없죠?

 

어쨌든 간에 하안거가 테라와다 원래의 원칙에서는 우안거의 기간하고 거의 비슷합니다. 저번 시간에 우안거 얘기할 때 했죠? 인도력의 네 번째 달에 시작해서 일곱 번째 달 보름에 끝나는 것을. 그걸 착각해가지고 지금 음력 4월에 들어가 가지고 7월 보름에 끝나는 것으로, 그게 지금 그게 지금 한국에서 하고 있는 하안거입니다.

근데 인도력 네 번째 달은 우리 음력으로 치면 6월입니다. 6월. 그러니까 역경가들은 그냥 그대로 번역을 해버려 놓으니까, 그걸 지금 현지 실정을 중국에서 잘 몰랐다는 거지.

그렇게 해가지고 만들어진 게 부처님 열반일도 마찬가지입니다. 두 번째 달 보름에 돌아가셨다 이래 놓으니까, 음력 2월 보름에 돌아가신 거로 생각해버리는 거라. 음력 2월이 아닙니다. 4월 보름입니다. 부처님 태어난 날하고 똑같은데, 그렇게 착각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가만있어. 뭐 얘기하다 이리 빠졌노?

 

어쨌든 까티나는 특별한 기간에만 하는 거라. 그러니까 스님들이 안거를 탁 끝나고 나서 끝나는 다음 날부터 한 달 이내에만 이 가사를 올릴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안거가 끝나기 전날에 스님들은 까티나에 대한 얘기를 합니다.

“올해는 까티나 누구 받아라이” 하고 까티나 받을 사람도 정해야 되는 거고, 그리고 그렇게 해가지고 그다음 날에 까티나 가사도 만들어야 되는 거고, 할 일들이 많습니다. 그렇게 딱 준비를 해놔 놓습니다. 요즘은 편해가지고 천을 주는 게 아니기 때문에 그냥 가사 이걸 만들어진 걸 이렇게 줍니다. 그래서 옛날같이 시끌벅적하게 하는 법은 없습니다.

 

옛날에는 직접 가사를 지어가지고 올렸습니다. 처음에 줄 때는 “스님, 이거 까티나 가사 천입니다. 이 공양을 상가에서 받아주십시오. 까티나 가사 만들어야 됩니다.” 하면서 가사천을 주는 거고, 그렇게 해가지고 가사천을 가지고 가사를 다 만들고 나면,

이걸 다시 또 스님들한테 주면서 “스님, 이거는 까티나 가사입니다. 상가에서 받아주십시오.” 하고 얘기를 하게끔 되는 거라. 근데 이제 요즘은 만들어져 나오기 때문에 앞에 부분은 없어져 버립니다. 까티나 가사 천을 주는 것은 거의 없으니까.

 

근데 아직도 까티나 가사 천을 준다는 의미를 되새기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게 뭐 어떤 겁니까? 대표적인 게 버마 같은 경우에는 까티나 기간이 되면 베짜기 경연 대회를 합니다, 하루 동안에. 혹시 그 버마가서 그거 본 사람 있어요? 하루 동안에 물레질을 해가지고 베를 이 지금 천을 짭니다. 천을 짜고 그걸 재단을 해가지고 기워가지고 그다음에 염색해가지고 가사를 만드는데, 그다음날 동이 트기 전까지 가사를 만들어야 됩니다.

그래서 누가 가장 빨리 가장 좋은 가사를 만드느냐를 가지고, 1등 2등 이렇게 순위를 정하고 해요. 그걸 지금도 하고 있어요. 그래서 까티나 가사를 만드는 것은 하루 동안 해야 되는 거라. 물레질부터 시작해가지고 쉽게 말하면. 지금도 그걸 하고 있어요.

버마만 그러는 게 아니고 태국이나 스리랑카 같은 경우에도 일부러 그걸 하고 있습니다. 하룻 동안에 이거 가사를 “니는 이번에는 천을 짜르는 역할을 해라. 너는 이번에는 이거 바느질하는 역할을 해라. 너는 이번에 그 천을 염색하는 역할을 해라. 그리고 너는 너는 역할을 해라.” 각각 소임을 이렇게 줍니다 상가에서. 그렇게 해가지고 만들어요. 그게 가장 재미있는 부분입니다 스님들은.

 

출가한 스님으로서 보람을 느끼는 게 바로 그런 시간들입니다.

왜 그럴까? 요즘 뭐 이렇게 다 염색해가지고 이렇게 나오는데 왜 그걸 그렇게까지 할려고 할까? 까티나 가사는 특별한 가사이기 때문에 그 특별한 의미들을 잃지 않으려고 하는 거라.

이렇게 그냥 스님한테 만들어가지고 “스님, 이거 상가에 올립니다. 까티나 가사 하십시오.” 의식은 맞기는 맞는데 이게 특별하다는 의미를 못 가져버립니다. 그럼 특별한 거는 특별하게 만들려고 자꾸 노력을 해야 되는 거라. 그걸 갖다 잊어버리지 않게끔 하는 거라.

그래서 마하빠자빠띠가 부처님한테 가사를 올릴 때, 부처님도 부처님 자신에게 올리지 말고 상가에 올려라. 상가 가사로써 만들어라. 하고 얘기를 하게끔 됩니다.

 

스님들은 가사를 세 벌 외에는 지닐 수가 없게끔 되어 있습니다. 원래 원칙이 있습니다. 아, 그거 하기 전에,

그러면 그렇게 가사를 만들 때 부처님도 가사를 만드는 데 동참을 했을까? 예외가 될 수가 없습니다.

부처님도 주석서에는 뭐라 하냐면, 바늘에다 실을 끼워주는 역할을 했다고 그럽니다. 옛날 연등불도 바늘에다 실을 끼워주고, 수자타 비구에게 까티나 가사를 받는 사람으로 지정했다고 그렇게 나옵니다. 지금의 석가모니 부처님도 바늘에다 실을 끼워주는 역할을 한 거라. 어느 누구도 여기에서는 열외가 될 수가 없는 거라. 모든 스님들이 다 동참해가지고 이걸 만들게 되는 거라.

 

그런데 스님들은 세 벌(삼의 한 벌) 외에는 못 지니게 돼 있습니다. 그런데 나는 지금 세 벌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렇죠? 세 벌을 지니고 있는데, 까티나 가사 때 가사를 탁 올립니다.

그럼 이 우째라는 얘기야? 세 벌 외에는 못 지니게 돼 있으니까, 어떻게 하면 될까? (수행자: ...) 계율 관계없이 그냥 옳지 좋다고 탁 받아버리면 돼요? (수행자: ...)

필요한 사람에게 주더라도 내가 일단 받아야 다른 사람에게 줄 거 아니라. 받는 즉시 나는 계를 파하게 되는데? 세 벌 외에 다른 걸 지녔으니까. 우째야 되는 거라?

그래서 이 까티나 가사를 탁 받으면 뭐부터 해야 되냐면, 위에 만약에 상가띠가 있다.

그럼 상가띠를 버리는 의식부터 먼저 해야 돼. “이거 인제 오래돼갖고 이걸 내가 내버립니다.” 하고 나서, 요 상가띠 새로 받은 상가띠를 받으면서 “이제 이건 내 거다” 하고 결정을 해줘야 되는 거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계를 파하게 되는 거니까.

다른 때는 전혀 그게 문제가 안 됩니다.

 

부처님 당시 때 이제 파바에 있던 비구들이 부처님 계신 곳에 가서 안거를 지내려고 이렇게 갔어요. 근데 가다가 안거 때가 돼가지고 부처님한테 가지도 못하고 사께따라고 하는 지방에 이렇게 머물러서 안거를 지냈어요. 그러고 나서 안거를 지내고 나면 반드시 부처님 당시 때 스님들이 했던 일이 뭐냐면, 안거가 끝나고 나면 반드시 최고 먼저 했던 게 부처님한테 가는 겁니다. 스승한테 가서 예의를 갖추어야 될 거 아니라.

스승한테 가서 “부처님, 우리 이번에 안거를 잘 지냈습니다.” 하고 인제 보고를 하는 게 일이라. 그래서 보고를 하러 이제 부처님한테 가거든.

가는데 안거가 끝나도 비가 아직은 오는 때입니다. 비가 많이 온단 말이라. 흙탕물에 옷이 다 젖어버렸어. 이 가사가 비하고 흙탕물을 먹어놔놓으면 되게 무겁습니다. 그걸 질질 끌면서 부처님한테 갔는데, 이놈의 세 벌 가사 외에는 내가 더 지니지를 못하니까 옷이 있어도 갈아입을 수가 없어. 세 벌 외에는 내 것이 없으니까. 그래서 그때 부처님이 얘기합니다.

 

“세 벌 가사 외에 까티나 가사를 지니는 것을 허락한다”라고 얘기합니다. 쉽게 말하면 여벌 옷으로써 가사를 받도록 하는 거를 부처님이 허락을 합니다. 이게 인제 부처님이 깨달음을 이루고 나서 37년째 때 이렇게 바뀐 겁니다.

그 이후부터는 지금까지 계속 해마다 까티나 가사를 받아야 되는 거라. 까티나 가사를 받지 않으면 오늘도 내가 옷을 갈아입어야 된다. 땀에 젖어 갖고, 갈아 입을 옷이 없게 되는 거라. 어느 스님들도 마찬가지라 그거는.

근데 지금 만약에 내가 안거를 지내지 않은 스님은 까티나 가사를 받을 자격이 없어. 그럼 안거를 안 지내면 까티나 가사를 받지를 못하니까 어떻게 돼요? 옷 세 벌밖에는 못 입는 거라. 못 가지게 돼 있는 거라. 내가 땀에 젖어도 이걸 갈아입을 방법이 없어.

 

그러니까 어떤 스님이든지 반드시 그래서 안거를 지내야 되는 거라.

일찍 못 지내면 뒤에라도 지내야 되는 것이지, 흐리멍텅하게 지 혼자 수행한다 해가지고 안거도 없이 지 혼자 수행한다? 이것은 있을 수가 없는 거라. 한국에 그런 경우들이 꽤 있습니다. 지 혼자서 공부한다고. 근데 그거는 해서도 안 될 일이고, 또는 자기 스스로도 “나는 스님이 아니다” 하는 얘기와 꼭 마찬가지가 되는 거라.

왜? 더 이상 받을 옷도 없고, 더 이상 내가 갈아입을 옷도 없게끔 되는 거라. 그래서 1년에 딱 한 차례만 부처님이 한 달간만 허용을 하게 됩니다. 누구든지 스님들이면 이때는 반드시 까티나 가사를 받도록 해야 되는 거라. 그리해야만이 이놈의 가사를 받아야만이 또 다른 가사를 받을 자격이 주어집니다.

 

가사를 받은 스님은 5개월간 그 특권이 연장이 되는 거라.

그러니까 안거가 끝나는 때로부터 5개월간 연장이 되니까, 안거가 끝나는 게 몇 월 달입니까? (수행자: 7월 보름) 7월은 무슨 7월? 음력 9월 보름이잖아.

9월 보름이니까, 9월 16일부터 5개월 간이니까 언제까지야? 10월 11월 12월 1월 2월 그렇죠. 음력 2월 보름까지는 언제든지 여분의 가사를 받을 자격이 됩니다.

“스님, 가사 올릴게요” 하면서 가사를 주더라도 이건 내가 받아서 내 것으로 할 수 있어. 근데 까티나를 안 받아 놓으면 그것조차도 받을 수 없는 거라.

 

그러니까 까티나를 안 받은 스님은, 쉽게 말하면 안거를 지내지 않는 스님은 가사를 받을 조건이 전혀 안 돼버립니다.

누가 돌아가셨다 해가지고 가사를 올려놔 놓고 “스님, 우리 돌아가신 분을 위해서 공덕회향 가사를 올립니다.” 이걸 받을 수가 없어. 또는 스님들이 목욕할 때 쓰는 안거 들어가기 전에 목욕할 때 쓰는 “목욕 가사 올립니다.” 목욕할라 해도 갈아입을 옷이 없어. 목욕 가사조차도 못 받는 거라. 그러니까 모든 스님으로서의 일들을 전부 다 올스톱 하게 돼버리는 형태가 돼버리는 거라.

 

, 1년에 한 번 하기 때문에 특별하다. 그렇죠?

가사를 올리면 공덕이 이마만큼 무량하다. 다른 거 하고 틀리게. 그래서 특별한 것이고.
이 가사를 올리는 것은 개인의 스님에게 올리는 게 아니고 상가에게 올려서 상가의 의결을 거치는 거기 때문에 그래서 특별하다.

또 정해진 기간, 1달이라는 정해진 기간에만 할 수 있는 거기 때문에 그 기간이 넘어 버리면 이것조차도 할 수 없어. 정해진 기간에 하기 때문에 특별하다.

또 이 가사를 올리니까 이익이 되게 많이 생긴다. 스님들도 5가지 이익이 생기고, 일반 재가인들도 5가지 이익이 생기는 거라. 그래서 특별하다.

그래서 여러분들은 "까티나"라고 들으면 , 이거는 특별한 일이다. 이거는 반드시 해야 되는 일이다.’ 하고 떠올릴 수 있도록 해야 됩니다. 알겠습니까? ()

 

그런데 예를 들어서 올해는 해피 스님이 까티나 가사를 받을 사람으로서 지목이 됐다. 그런데 지목을 할 수 없을 때가 있습니다. 언제 지목을 할 수 없을까?

안거 안 지냈으면 당연히 못 하는 거고, 안거를 안 지냈으면 까티나 받을 자격조차도 없어. 그러니까 전안거를, 그 전안거를 보통 대안거라고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때 지내기 때문에 특별한 사람만 후안거를 지내지 후안거를 지내질 않거든. 그래서 그걸 대안거라고도 하고 전안거라고도 합니다. 그래서 어쨌든 기본적으로 안거를 지내야만이 까티나 가사를 받을 수 있는 건 틀림없는 거고.

그런데 안거를 지낸 사람이 4명 이상이 되지 않으면 그 사원에서는 까티나를 할 수가 없다. 상가 구성이 안 되기 때문에. 4명이 안 되면 뭐 까티나 의결을 할 수 있어야 될 게 아니라? “올해는 니가 해라” 뭐 그렇게 돼야 되는데 그게 안 되는 거라.

 

그러면은 만약에 예를 들어서 나는 혼자서 우리 선원에는 뭐 사람도 없고 혼자서 안거를 지내야 된다. 그럼 어찌 해야 될까? 나는 까티나 가사는 받고 싶고, 우짜면 될까?

내가 다른 데 안거 지내는 데 가서 안거를 지내든지, 그렇지 않으면 다른 스님들을 여기 불러와 갖고 여기에서 안거를 지내든지, 둘 중에 하나는 해야 되는 거라. 그렇지 않고 지 혼자서 가만히 있으면서 난 안거를 안 지냈다고 그럽니다. 그건 있을 수가 없는 거라.

그러니까 안거를 안 지내면 까티나를 거기서도 할 수가 없어.

 

그러면은 까티나를 받고 싶으면 어떻게 해야 돼? 내가 안거를 지냈든 안 지냈든, 다른 데 가서 안거를 지낸 스님들이 있는 곳에 가서 까티나 가사를 받는 수밖에 없는 거라. 지는 안거를 지내지도 안 해놓고 다른 스님들을 초청해가지고 까티나를 연다? 이거는 있을 수가 없다는 거라. 그게 원칙이라.

 

그러니까 까티나 가사를 받을 수 없는 조건은

안거를 지내지 않으면 받을 수가 없다. 그게 첫 번째,

그다음에 두 번째는 이 해피 스님이 계율에 대해서 아무것도 몰라. 그래갖고 이 까티나를 받으면 이거 까티나를 어떻게 펼치는지를 몰라. “상가 스님들, 이거는 재가자들이 상가에 까티나 가사로서 올렸습니다. 그래서 까티나 가사로서 인정해 주십시오.” 하는 걸 할 줄 알아야 되는데 그걸 못하는 거라. 그러면은 까티나를 받을 자격이 없어.

그뿐 아니라 까티나를 받고 나서 5개월 지나고 나서 까티나를 인제 버리고 새 가사를 입든지, 아니면 5개월 전에 새 가사를 받아가지고 까티나 가사를 버리든지, 안 그러면 까티나 가사를 가지고 계속 입고 싶으면 그걸 갖다 새 가사로 만드는 법을 알아야 되는데, 그것조차도 모른다. 그러면 안 되는 거라.

이걸 “내가 내 가사로 인정합니다.” 하는 의식조차도 할 줄 모르면 우찌 그 까티나 가사를 받을 자격이 된다고 할 거라? 까티나를 버릴 줄도 모르고, 까티나를 할 줄도 모른다고 할 거 같으면 안 되는 거라.

 

또는 만날 까티나 이 스님한테만 받도록 해 놓으니까 가사가 이마만큼 많아. 그럼 뭐하러 그 스님한테 또 까티나를 하라 할 거라? 되도록이면 옷이 해졌거나 옷이 부족한 스님에게 까티나를 할 수 있도록 해주라는 거라. 그리 해야만이 올해는 자기 혼자 까티나 가사 받아놔 놓고 그 의미를 분명하게 알고, 그 까티나의 특권들을 그대로 살려 나갈 거 아니라.

그 특권들이 살아야만이 까티나를 올린 여러분들도 그 공덕들을 그대로 받게 되는데, 이 스님이 받아 놔놓고 까티나 가사 빼버려 버렸다. 그러면 공덕조차도 사라져 버리는 거라. 또는 까티나를 받을 자격도 안 되는데 까티나를 했다. 그러면 그 공덕조차도 없어져 버리는 거라.

그래서 까티나를 받는 사람을 선정할 때는 반드시 상가의 의결을 거쳐야 되는 거라. 상가에서 계율에 대해서 잘 아는 스님이 “올해는 니가 해라. 니가 해라” 하면서 그 부분을 분명하게 알려줘야 된다는 거라.

 

(수행자 질문: 스님, 까티나 가사 3벌, 일반 가사 3벌, 그럼 6벌 되는 거 아닙니까? 쓸 수 있는 게?)

근데 실제로는 세 벌입니다. 왜 그러냐면 세 벌은 내가 가지고 있는 걸 여벌 가사로서 가지고 있는 건데, 하나는 “요 가사를 내가 버린다” 하고 해놔 놓고, 또 새로운 것은 “내가 새로 내 것으로 한다” 하고 결정한 거기 때문에, 결정된 것은 세 벌이 되는 거죠.

 

(수행자: 아니 내가 진흙 묻었을 때 그걸 벗어놓고 갈아입을)

근데 이 세 벌은, 쉽게 말하면 버린 세 벌은 상가 소유입니다. 버린 것은 상가에게 주게끔 돼 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상가에서 받아가지고, “이것을 보관하는 것은 니가 해라” 하면서 다시 그 스님에게 주기 때문에 실제적으로 그 사람은 3벌이 아니라 6벌이 되게 되는 거라. 그래서 이걸 갖다가 여벌 가사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수행자 질문: 그런데 3개는 한 세트를 1벌 그러는데, 이걸 3개를 3벌로 그냥)

하나 줘도 되고, 쉽게 말하면 가사 만들 천이 작든지 돈이 적으면 하나만 줄 수밖에 더 있어요? 그러니까 하나 주는 사람도 있고, 2개 주는 사람도 있고, 또 3벌을 갖다가 한 조의로 맞춰갖고 해주는 사람도 있고 그거는 각각 틀립니다.

 

(수행자 질문: 그리고 양말, 티 같은 거 신발 모자 같은 거는 그럼 어떻게 됩니까?)

모자는 안 되고, 계율에 머리 위에 그 햇볕을 가리기 위해서 이렇게 받쳐 쓰는 것은 안 된다고 됐기 때문에 모자는 안 됩니다. 그래서 양산조차도 안 됩니다. 티나 양말 그거는 가능합니다.

 

(수행자 질문: 부처님이 그런 말씀하신 거는)

그건 없습니다. 부처님 당시에는 티나 양말이 없었으니까. 예 당연히 없습니다. 근데 규정이 되지 않은 거기 때문에, 추운 지방에서는 그것을 겹쳐 입는 것을 허용한다고 되어 있기 때문에, 양말이라든지 티 같은 것들을 갖다가 입을 수는 있게 됩니다. 그래서 규정 위반은 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되도록이면 티나 양말을 할 때 규정 위반은 되지 않지만, 그렇다고 해가지고 그것이 여법한 것은 아닙니다.

 

쉽게 말하면 스님 지금 요거 입고 있죠. 요거는 규정 위반은 되지는 않습니다. 근데 여법한 것은 아니라는 거라. 그래서 되도록이면 이 티 색깔도 가사색에 맞는 것을 하라는 거라. 표 안 나게. 그래서 양말도 할 때도 가사색에 맞게끔 하라. 신발도 할 때 가사색에 맞게끔 하라. 그러는 거라. 법에 위반되지 않는다 해가지고 그것을 강제적으로, 아니면 뭐 그걸 입어도 무방하다는 것은 아닙니다. 단지 위반은 안 되는데 항상 조심하라는 거라. 그래서 신발 같은 것도 왜 테라와다 스님들이 여름에나 추울 때가 아니면 슬리퍼 신고 다니겠어요? 왜 구두나 운동화 안 신고 그거 신고 다니겠어요? 위법은 아니지만은 여법하지가 않다는 거라.

 

테라와다 스님들이 맨발로 다니고 슬리퍼 신고 다니는 게 원칙인데, 그 구두 신고 다니면 그거 누가 보기 좋아해요? 위법은 아니지만은. 그래서 안 하는 거라. 한겨울에 추울 때는 어쩔 수 없이 구두는 안 되고 그래서, 그러면 우리는 우리 사원이나 우리 경계 내에서는 운동화는 가사색에 맞는 거는 허용을 하자 해서 그렇게는 할 수가 있다는 거라. 그거는 위법 문제가 아니고 여법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다는 거라. 이해가 됩니까?

 

그래서 여러분들도 이 교재에 보면 까티나 가사에 대한 것들을 잘 적어놨습니다.

읽어보면 크게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은 아마 없을 거라고 봅니다.

 

이렇게 해가지고 스님들이 까티나 가사를 받고 나면 그때부터는 유행을 다녀도 무방합니다.

근데 까티나 가사를 받기 전에는 유행조차도 못 가게 돼 있습니다.

해제를 하고 나면 다 누구든지 해제 끝남과 동시에 유행이 허가되는 것이 아니고, 해제를 하더라도 한국에는 그러죠? 해제 날 걸망지고 막 나갑니다. 테라와다에서는 그런 법이 없습니다. 해제가 끝나더라도 까티나 가사를 받아야만이 산문 밖을 나올 수가 있어요.

 

만약에 우리 사원 우리 경계 내에서는 까티나 가사를 해제가 끝나고 나서 1달이 거의 끝날 때 끝나갈 때 돼서 한다 할 것 같으면 실제로는 나는 안거가 거의 4달간이 돼버리게 되는 겁니다. 어떤 경우에는 3달이 딱 끝나고 나서 한 며칠 안 돼서 까티나 가사를 한다 할 것 같으면 거의 3달이 되는 거고, 그렇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까티나 가사를 받고 나면 그때부터 유행 생활을 하게끔 됩니다.

쉽게 말하면 까티나 가사는 보너스라고 보면 됩니다. 출가한 스님들이 해제를 하면 한 살 나이가 많아집니다. 그날을 뭐라 부르냐면 스님들은 "생일날이다" 라고 얘기를 합니다. 해제하는 날은 생일날인데, 생일 밥을 먹는 건 언제냐면 까티나 가사 때 생일 밥을 먹는 거하고 꼭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현재는 스님들이 까티나 가사를 받고 나면 유행을 가는데 어디로들 갈까?

안거 끝나고 나서 스님들 대부분 어디 가요? (수행자: 성지) 그렇지.

요즘 가장 선호하는 게 부처님이 살아계실 때는 부처님 뵈러 갔는데, 부처님 지금 열반하고 없으니까 지금 현재 스님들은 가장 선호하는 게 성지순례 하는 거라. 그렇게라도 해가지고 가서 부처님 계신 곳에라도 조금이라도 자취를 냄새라도 맡고 싶어서, 그래서 성지순례하는 거라.

그다음에 또 뭐가 있을까? 해제하고 나면 유행을 가는 목적이?

대부분 테라와다 큰스님들은 그때 외국 초청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외국에 가서 뭐 합니까? 법을 설하는 겁니다. 그래서 유행의 시기에는 법을 설하는 게 하나의 또 목적입니다.

또 어떤 게 있을까? 유행을 다니는 것들이. 내가 아직 법을 설할 상태가 안 됐다, 배운 게 적어서. 그럼 어째야 돼? 나는 참회하러 다녀야 돼. 쉽게 말하면 해제했다 해가지고 마음껏 나와 가지고 술 먹고 막 깽판 치고 돌아다니는 게 아니고, 딱 참회하는 곳에 가서 참회하는 것들입니다. 나도 모르게 안거 때 잘못한 것들이 있습니다. 왜 없겠어? 자기가 무슨 아라한도 아닌데.

 

그러면 비구의 특성은 뭐냐 하면 계의 청정성을 유지해야만이 비구가 유지가 될 수 있습니다. 근데 자기가 청정한지 안 한지 모릅니다. 자기도 모르게 잘못하는 것들이 있을 수가 있기 때문에. 그래서 그 청정성을 유지하기 위해서 대부분 어린 스님들은 안거 끝나고 나서 까티나 가사를 받고 나면 그때서야 참회하러 갑니다. 나는 이번에 1달간 참회하는 기간을 가지겠다. 또는 보름간 참회하는 기간을 가지겠다. 그 참회하는 곳을 찾아서 다닙니다. 그게 일입니다. 마음껏 놀아라는 게 아니고.

 

안거 끝나고 나서 유행할 때 하는 특성들이 그러면 대부분 정해졌죠?

부처님 뵈러 가는 거, 그게 성지순례이든, 그다음에 법을 설하러 가는 거, 또 하나는 참회하러 가는 거, 이게 가장 큰 특징입니다.

그게 유행 생활에서 하는 스님들의 위의(威儀)입니다.

근데 이걸 떠나버린 상태에서는 유행 생활이라고 얘기를 안 합니다. 그래서 경전에서 유행하는 유행자들을 빱밧자(pabbajita)라고 얘기를 합니다.

이렇게 빱밧자가 갖추어야 되는 해야 되는 일은 딱 요렇게 정해져 있습니다.

 

그러지 못할 경우에, 그러지 못할 경우에는 유행을 가질 않고 그곳에 그대로 머물러 있으면서 더 공부를 해야 됩니다. 더 수행을 하든지 경전을 더 배우든지 그대로 하라는 겁니다. 그래서 지금은 아예 테라와다 불교 국가에서는 5년이 안 되면 해제가 끝나더라도 나가는 걸 허락하지 않습니다. 아직은 나가서 니가 뭐 참회를 하고 뭐 법을 설하고 아직은 안 된다는 거라. 덜 익었다는 거라. 참회해도 요 안에서 하라는 거라. 니 아직 법을 설할 자격도 안 갖췄으니까 법 설하지 말아라는 거라. 엉뚱하게 잘못 가르칠 수가 있으니까 여기서 그냥 배우라는 거라. 그래서 5년간은 이 경계 내를 벗어나 버릴 것 같으면 인정을 안 해줘 버립니다.

 

한국 스님들이 최고 문제가 뭐냐면, 버마 가서 태국 가서 계 받고 나서 5년도 안 돼서 다른 데로 옮겨버립니다. ‘에이, 여기서 이제 더 배울 거 없다.’ 쉐우민(Shewoomin) 갔다가, 마하시(Mahāsi) 갔다가 찬메(Chanmyay) 갔다가, 그러고 나서 다시 또 마하시 옵니다. 마하시에 있는 스님들이 똑바로 봐주질 않습니다. 상가 회의가 있어도 거기 참여를 안 시켜버립니다.

그러면 그냥 비구는 비구인데 외국인으로서 삽니다. 외국인으로. 스님들이 공양청이 있어가지고 다른 데 공양청 하러 나가는데 그 순번이 되어서 따라 나갈 수가 있나? 아니면 스님들 모여서 갈마를 하는데 거기 참여를 할 수가 있나? 그냥 외국인입니다. 일반 재가 수행자하고 차이나는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자기는 열심히 수행 잘하고 있다고 그러는 거라.

뭐 하러 옷 입고 있어? 이걸 갖다가. 그냥 재가인으로 그냥 있지 그러면.

5년간은 어디든지 가면 안 돼. 그래야만 인정을 받습니다. 그래야만이 무언가를 배울 거 아니라. 경을 배우든지 수행을 배우든지, 그거는 부처님 당시 때부터 불문율이라. 떠나면 안 돼.

 

여러분들도 꼭 마찬가지입니다. 지금도 가끔씩 일반 재가인들이 “외국에 나가서 수행하고 싶다”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얼마나 있을 건데?” “한 3개월 있다 올려고” 스님은 말립니다.

그 비행기 값하고 그 경비가 적어도 한 150만 원 200만 원 들 건데, 물론 가서 뭐 스님들한테 공양 한번 다나 한번 올리고 좋은 일은 하고는 오겠지. 3개월 해갖고 아무것도 없어요. 실제로. 거기서는 잘하고 열심히 한 것 같지만 한국에 딱 돌아오면 그 힘이 1달이 안 돼서 다 떨어져 버리고 없어. 왜 왜 그런 어리석은 짓을 하느냐는 거라.

그건 병이 걸린 거라 그거는. 그거 하지 마라는 거라. 차라리 그렇게 쓸 돈이면 한국에서 테라와다 불교 살아나기 위해서 하는 일에 쓰라는 거라. 그리고 자기는 그 돈 가지고 얼마든지 더 나은 공덕들을 쌓을 수가 있다는 거라. 그럴 바에야 차라리 가서 몇 년간이라도 그 생활을 재가자면 재가자로서 그 생활을 거기서 하라는 거라.

 

그래서 재가자가 하는 일들을 그대로 따라하고, 그 재가자가 하는 수행 그대로 따라하고, 한 곳에 있으면서 그것을 수행이 되든 안 되든 간에. 그래야만이 뭔가를 배워와서 그게 힘이 된다는 거라. 그런 힘이 없으면 수다원으로 올라갈 여력들이 비축이 안 돼. 맨날 그러면 롤러코스터만 탈 순 없잖아. 무언가를 했을 것 같으면 거기에 맞게끔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가 있어야 될 거 아니라.

 

그래서 깨달음에 이르고자 한다, 아니면 다음 수행 단계에서 뭔가를 넘어가야 된다, 이럴 때 갖춰야 되는 것들이 있습니다.

부처님의 예를 들어 볼게요. 부처님은 아라한이죠. 완전하게 깨달음을 이루신 분입니다.

부처님에게 가장 큰 특징을 하나 잡아라, 뭐일까? 물론 지혜 자비, 그거는 틀림없는 사실이고. 그보다도 큰 특징이 뭐가 있을까? 결정심! 저 분이 깨달음에 이를 조건이 된다. 그러면은 저 분을 깨달음에 이르게 하기 위해서는 내가 가야 되는 거라. 어떤 위험이 닥치고 설혹 내가 밥을 굶는 한이 있어도 가야 되는 거라.

 

여러분 그런 결정심이 있습니까? 이건 내가 반드시 해야 된다. 하늘이 두 쪽 나고 내가 죽는 한이 있어도 해야 되는 거. 결정심을 길러라. 선한 공덕을 쌓고 또 수행을 다음 단계로 진척시키기 위해서는 깨달은 사람의 고유한 특성인 결정심을 여러분들은 반드시 키워야 됩니다.

 

그다음에 포기할 줄 알아야 됩니다. 포기.

아까 법회를 하기 전에 누군가가 자애경 필수독송 자애경을 대만 사람이 하는데 듣기도 아주 편안하고 좋다. 근데 만약에 그게 감각적인 욕망 감각적인 쾌락을 일으키는 것이라고 할 것 같으면 아무리 듣기 좋은 거라도 내가 포기할 줄 알아야 되는 거라.

그거보다도 더 큰 삼매에서 오는 행복감하고는 비교가 안 되기 때문에. 그럼 그거 포기할 줄 알아야 되는 거라. 그런데 삼매에서 오는 행복감이나 기쁨보다도 지혜가 열렸을 때 일어나는 그 행복감이 더 크다 할 것 같으면 삼매에서 오는 행복감도 포기할 줄 알아야 되는 거라. 아무리 지혜가 있다고 하더라도 내가 도와 과에 이르렀을 때 일어나는 그것보다도 작다 할 것 같으면 그것도 포기할 줄 알아야 된다는 거라.

 

여러분들은 얼마만큼 포기할 줄 압니까? 아마 모르긴 해도 지 옷 하나 포기할 줄도 모를 거라. 그렇지? (예) 포기할 줄 알아야 됩니다. 포기를 할 줄 알아야만이 그다음 단계, 저보다 더 큰 행복감들을 누릴 수가 있습니다. 포기하는 습관들을 자꾸 들여라.

 

그다음에 여러분들 가장 안 되는 것. 다른 사람들을 이해하고 용서할 줄 아는 것, 관대해지는 것. 여름에 더워 놓으면 옆에 와서 집적거려 싸면 성질 바락바락 냅니다.

이해할 줄 모르는 거라. ‘저 사람 왜 저럴까’ 하는 생각들을 안 하고, 내가 지금 현재 싫은 느낌들만 가지고 있으니까 성질이 나는 거라. 이해하고 용서할 줄 모르면 그 사람은 계속 자기의 상태에 머물 수밖에 없습니다.

 

부처님 당시에도 마찬가지고 지금도 마찬가지고, 혼자 토굴에 들어앉아 가지고 깨달음에 이르렀다는 사람은 없습니다. 왜 그럴까? 왜 그럴 것 같아요?

이해와 배려심들, 관대해지고 넓어지는 마음들을 기를 수가 없는 거라. 그렇게 해가지고 설혹 깨달음을 이룬 사람이 있다고 치더라도, 나와 가지고 어떻게 할 거라? 어떻게 법을 설할 건데? 못해. 자기 이야기만 할 수밖에 없는 거라. 자기수행만 수행법만, 자기가 알고 있는 것 외에는 뭐 할 수가 없는 거라. 거 어디다 쓸 거라? 그걸.

래서 여러분들은 반드시 이해하고 용서하고 하는 배려심들, 관대해지는 것들을 자꾸 기르도록 해야 됩니다. 쉽게 얘기하면 자기 자신을 자꾸 죽여라. 나라고 하는 것 나의 것이라고 하는 것들을 자꾸 죽이는 훈련들, 그리고 더불어 뭔가를 할려고 하고.

 

그리고 또 하나 갖춰야 되는 것이, 어떠한 상대에도 평정심을 잃지 않으려고 해야 됩니다.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어떠한 경우든지 그 평정심들을 잃지 않으려고 해야 됩니다.

대충 이런 것들이 보면, 지혜 자비 이런 것들도 두루 갖춰야 될 뿐 아니라, 이런 것들도 갖춰야만이 다음 단계로 넘어가기 쉽고, 그리고 여러분들이 점점 부처님을 닮아가는 사람들이 됩니다.

또 하나 더, 공덕 쌓는 일을 등한시하지 말아라.

이걸 갖추지 않으면 안 된다 하는 사실을 분명하게 인식하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시간이 다 됐습니다.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까티나 가사까지는 다 됐습니다. 다음 시간에 이제 1학기 마지막이죠? 원래는 마지막 시험 치려다가 시험 쳐봐야 또 뭐 얼마나 맞겠노 싶어가지고, 그냥 진도 나가기로 했어요.

자,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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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라와다 이야기 17- 까티나 가사 법요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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