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법문교재/테라와다 불교의범과 신행생활

테라와다 스님들에게 필요한 네 가지 물품-거주처, 의약품_빤냐와로 스님법문_담마스쿨_130705-1

담마마-마까 2024. 12. 24. 17:03

https://youtu.be/PlE_0yYzB0U

 

* 테라와다 스님들에게 필요한 네 가지 물품-거주처, 의약품_빤냐와로 스님법문_담마스쿨_130705-1

 

저번 시간에 네 가지 의지처 중에 여러분들 알아야 될 두 가지에 대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오늘은 나머지 두 개를 하겠습니다.

 

버마나 태국 스리랑카 같은 경우에는 스님들이 일정한 상태가 되고 나면 지원해주는 것이 있습니다.

첫 번째가 뭐냐면 깝삐야라고 해가지고 스님을 시봉할 사람 한 사람을 임명을 해줍니다. 그래서 그 사람이 스님이 불편하지 않게끔 시봉을 하게끔 합니다.

그다음에 두 번째 하는 것이 뭐냐면 네 가지 물품이 항상 떨어지지 않게끔 조달을 해줍니다. 그 스님이 원할 경우에는 절까지 지어주게 됩니다.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절이 필요 없을 경우에는 나머지 네 가지는 항상 구비를 해주게 됩니다. 그게 정부에서 하든, 아니면 교단에서 하든, 아니면 상가 회의에서 하든, 그렇지 않으면 재가자의 모임에서 하든. 그래서 4가지 물품들은 항상 하게끔 돼 있습니다. 그게 인제 기본적인 겁니다.

 

그러니까 어느 정도 법을 설할 위치에 도달을 하고 그에 맞는 칭호를 부여를 받게 되고, 특히 삼장법사 같은 명칭을 부여받게 되면 거기다 조금 더 나아가게 됩니다. 활동할 수 있는 근거지까지도 마련을 해줍니다. 차량 지원이라든지 그다음에 그 금전적인 것까지도 다 깝삐야를 통해서 이렇게 보전을 해주도록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그 얘기는 뭐냐면 스님들이 법납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할 일들이 더 많아진다는 겁니다. 솔직히 스님도 처음에 출가했을 때는 아무 할 일이 없었어요. 아침에 일찍 스님들 탁발 나간다 할 것 같으면 그 뒷꽁무니 따라가면 돼요 그냥. 그 뒷발꿈치만 보면서 따라가다가 서면 나도 탁 서고, 탁발 받으면 나도 탁발 받고, 그리고 돌아오면 돌아왔다가 밥 먹고, 그러고는 할 일이 아무것도 없었어요. 1년 동안은. 겨우 할 일이라는 게 스님들 큰 스님 시봉하는 것들 물 갖다 주라 할 것 같으면 물 갖다 주고, 잠자리 들 때 되면 세숫물 떠다 드리고 뭐 이런 것 정도밖에 였지 아무것도 할 일이 없었어요.

 

그런데 시간이 가면 갈수록 점점더 할 일이 많아지는 거라. 처음에는 절 안에서의 할 일이 생겨나더니, 쉽게 말하면 이번 결재 때 너는 소임이 자와구 분배하는 소임을 맡아라 할 것 같으면 그 자와구 분배하는 역할을 맡습니다. 어느 스님은 이번 결재 때 이곳으로 가서 머무시오. 그리고 어느 스님은 또 새로운 사람이 있으면 여기에 머무시오. 아니면 좌석 배치는 어떻게 어떻게 어떻게 하고 하는 것들을 갖다가 이제 맡아서 하게 되는 거라.

 

그것도 지나고 나니까 이제는 먹는 거 분배하는 것들, 탁발만 이루어지는 게 아니기 때문에 청식들이 많습니다.

“스님, 이번에 우리 스님 세 분 초청해서 공양 올리겠습니다.” 하면 세 사람 지정을 해줘야 될 거 아니라. 그다음 날 되면 또 누가 “우리는 이번에 다섯 스님 모시고 공양청 하겠습니다.” 그럴 것 같으면 다섯 사람 또 배분해 줘야 돼. 순서대로 이렇게 잘 해서 그 사이사이에 인제 법을 설할 수 있는 스님들을 끼워넣어주고 그런 역할들을 하다가.

 

이제 그러다가 5년이 지나고 나면 이제는 조금 더 소임이 많아집니다. 인제는 법을 설할 수 있는 시간들이 자꾸 생겨납니다. 5년 정도 지나고 나서 10년이 넘어가면 법을 설하는 자리가 이 선원에만 한정되는 게 아닙니다. 다른 데도 가서 해야 되기 때문에. 그래서 반드시 결재가 끝나고 나면 어느 지방에 가서 며칠간 가서 법문를 해야 되는 이 스케쥴을 딱 잡혀줘 놓거든. 그게 이제 지나고 나면 점점 더 많아지면 외국으로도 나가야 되고 또 국내에 여러 가지 일들을 담당해야 되는 게 점점 많아집니다.

그러니까 법납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스님들의 역할은 점점 더 많아지게 됩니다.

 

어떨 때는 좀 과부하가 걸릴 때가 있습니다. ‘아, 도망쳤으면 좋겠다’ 하는 그런 생각이 들 때도 있어요. 법을 설하는 것 딱 하나 가지고도 그렇는데, 아마 거기서 스님들이 더 다른 일들을 한다 할 것 같으면 아마 머리가 깨질 거라. 테라와다 스님들은.

근데 다행히 테라와다 스님들은 자기 수행하고 법을 설하는 거 외엔 다른 건 안 하기 때문에, 안 하는 게 아니고 못하기 때문에 그나마 머리가 안 깨지고 그래도 잘 사는 거라.

 

그런데 스님들이 그럴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주는 것들을 누가 만들어 주느냐 하면 재가자가 만들어줍니다. 오늘도 스님이 부산에서 여기 왔단 말입니다.

테라와다 방식으로 한번 얘기를 해 볼게요.

그러면은 서울역에 내가 몇 시에 도착한다 할 것 같으면 서울역으로 누가 깝삐야가 스님 모시러 옵니다. 차로 오든지 아니면 대중교통을 이용하든지 어쨌든 깝삐야가 스님을 모시고 여기에 이 대원정사에 딱 와요. 대원정사에 딱 들어오면 스님이 앉을 자리를 마련을 해줍니다.

물론 스님들이 이걸 가지고 다닙니다. 앉을 자리가 없을 경우에 대비해서 '니시다나'라 해서 좌와구를 가지고 다니는데, 어쨌든 앉을 자리를 마련해주고, 딱 앉고 나면 재가자들이 삼배를 드리고 스님께 마실 물을 떠와서 드립니다. 그러고 나서 법문이 되기 전까지는 쉴 공간에서 쉬시게끔 하고, 그러고 나서 법문 시간 되면 “스님, 법문 시간 됐습니다.” 하면서또 누가 청하러 오면 스님이 와서 법문을 합니다. 그런 패턴으로 이렇게 쭉 돌아가지게 됩니다.

 

근데 그게 안 될 경우에는 스님들이 굉장히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예를 들어서 스님이 서울역에 도착을 했는데 자율적으로 여기 왔단 말이라요. 그러면은 올 때 굉장히 위험 요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일반인들은 이 테라와다 스님들의 방식을 모르기 때문에 옆에 가까이 와서 접하려고 하고, 또 돈을 버스비를 지불해야 되는데 다행히 우리는 카드를 가지고 있으니까 금전을 만지지 않고 카드로 가지고 계산을 합니다. 근데 그게 없을 경우에는 금전을 만질 수 있는 위험도 있고, 여러 가지 위험들이 도사리고 있거든.

그러면은 처음부터 스님들이 계율에 대해서 두려워하는 마음들을 가지게끔 되게 됩니다.

 

법을 설하는 사람들은 다섯 가지가 없어야 된다 하고 얘기합니다.

자기 개인의 욕심을 가지고 법을 설하지 않는 것.

‘내가 여기서 법을 설하면 내 법문을 듣고 누군가가 우리 선원에 와서 수행을 하고 또 금전적으로 보시도 하겠지’ 쉽게 말하면 그런 것들, 욕망을 가지지 않아야 되는 것.

 

그다음에 두 번째가 성냄을 가지지 않아야 되는 것.

어떤 경우든 중간에 말을 끊는 사람들도 있을 거고, 또 중간에 법문을 듣지 않은 사람들도 있을 거고, 뭐 여러 가지 상황들이 발생하더라도 오로지 나는 내 할 일만 하도록 하는 것, 성냄이 없이 법을 듣는 사람들이 잘 듣든 못 듣는 그 사람들에게 자애로운 마음을 가지고 항상 법을 설하게끔 하는 것.

 

그다음에 세 번째가 지혜롭게 법을 설하는 것. 어리석지 않게끔 하는 것.

지혜롭게 법을 설하지 않으면, 불교는 어떤 경우든지 지혜가 우선입니다. 지혜롭게 되지 않을 것 같으면 그게 선정력이 아무리 깊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절름발이에 지나지 않게끔 됩니다. 그래서 이 법을 듣고 여러분들이 어떻게 사회생활에서 지혜롭게 대처해 나가는가 하는 걸 갖다가 알지 못하게끔 한다 할 것 같으면 그럼 그 법은 잘못되어 버리는 거라.

이 법을 듣고 ‘아, 내가 일상생활에서 이렇게 이렇게 행동할 것 같으면 아 그래도 다른 사람들이 칭찬을 하고, 아 내 생각에도 내가 참 잘 대처했다’ 하는 마음이 들도록 만들어줘야 되는 거라. 그렇게 법을 설하라는 거라. 그래서 지혜롭게 항상 법을 설하도록 그렇게 합니다.

 

그다음에 네 번째가 뭐냐면 두려움이 없어야 되는 것.

여러 가지 두려움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두려움을 가져야 되는 대상들이 한국에 너무나 많습니다. 알고 있는 태국 스님들이나 버마 스님들이 와서 조금 있다가 “도저히 나 여기서 못 살겠다” 하고 도망들 가버립니다. 왜 그럴까? 계를 어길 수 있는 조건들이 너무나 많다는 거라. 그게 두렵다는 거라.

출가한 스님들의 기본은 계가 먼저 굳건하게 유지가 되고 그것으로 인해서 보호막이 돼야만이 뭐 다른 걸 해나갈 수가 있는데, 애초부터 그게 안 되는 거라. 그러니까 한국에는 그 뒷바라지를 못 해주고 있다는 거라. 재가자들이.

 

그런 두려움이 탁 들어버리면 아무리 좋은 법을 설하러 가더라도 그게 이미 반 정도는 감쇠가 된 상태가 돼버리는 거라. 그래서 법을 설할 때는 그런 두려움이 없도록 하는 상태에서 법을 설하라는 거라. 그래서 내 법을 듣고 저 사람이 어떻게 이용을 하든 그건 그 사람의 몫이지 나는 내 몫만 하면 돼. 나는 올바르게 그 가르침을 변경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부처님의 말씀을 그냥 전해주기만 하면 되는 거라. 받아들이는 건 여러분들 몫이지 내 몫이 아니라.

듣는 사람이 1명이든 듣는 사람이 100명이든 그거는 여러분들의 몫인 거지 내 몫이 아니라. 나는 한 명이라도 똑같이 법을 설해야 되는 거고, 100명이라도 똑같이 법을 설해야 되는 거라. 출가한 스님들은 두려움이 없으면 그래서 자기 몫만 할려고 그럽니다. 내 할 일만 쭉 해버리면 됩니다.

그래서 그 두려움이 없어야 되는 게 법을 설하는 사람의 네 번째 조건이 됩니다.

 

그다음에 다섯 번째 조건이, 갑자기 얘기가 생각이 안 나는데, 하나 더 조건이 있습니다. 생각이 나면 얘기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래서 보면 여러분들이 지금 하고 있는 테라와다 스님들에게 필요한 물품이라고 하는 것들은 반드시 어떤 면에서는 반드시 여러분들이 익혀놔야 되는 부분입니다. 그래야만이 스님들이 그런 걱정을 안 하고 자기 할 일들을 할 수가 있게끔 됩니다.

 

그에 맞게끔 여러분들은 여러분들 몫을 하게끔 되는 겁니다.

그냥 돈 얼마 내는 데 가서 돈 내고 수행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닙니다.

테라와다의 근본적인 가치는 그게 아닙니다. 그거는 테라와다가 아니라도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어떤 종교를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아니면 종교를 가지고 있지 않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충분히 가능한 겁니다. 근데 테라와다 불자가 되려고 할 것 같으면 적어도 그 패턴은 아니라는 거라.

 

왜 자꾸 스님이 테라와다 불자가 되라고 얘기하느냐 하면,

그래도 그것이 여러분들이 바르게 나아가는 길이고, 또 그것이 정착이 돼야만이 그래도 이 땅에서 한국에서 불교라는 것이 바른 방향으로 나아갈 수가 있다는 거라. 그렇지 않으면 지금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는 거라. 각자 각자가 자기의 역할들을 하게 될 때 그것이 부처님 가르침과 한치의 어긋남이 없게 될 때 그때야만이 불교는 바로 자리를 잡게 됩니다.

 

세 번째, 거주처 부분에 대한 얘기를 해보겠습니다.

거주처가 만들어지는 것은 불교사에서 일찍부터 시작이 됩니다. 부처님은 45년간 유행하셨다고 그렇게 여러분들 알고 있죠. 그게 사실일까? 절대 그렇지를 않습니다.

일반적으로 한국에서 얘기하는 만행 또는 다른 종교에서 한 곳에 머물지 않고 계속적으로 다니면서 탁발을 하든지 아니면 여러 가지 일들을 하는 것들을 갖다가 빨리어에서는 와릿따라고 그럽니다. 걷는다, 유행한다 하는 그런 의미입니다. 두 사람이 가지 않고 혼자서 홀로 걸어가면서 어디에도 정주하지 않고 가는 것들을 얘기합니다.

그런데 불교에서 유행이라 할 때는 그걸 와릿따(vāritta)라고 안 하고 짜릿따(cāritta)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짜릿따(cāritta)라는 것은 어떤 의미냐면,

목적과 행선지가 분명한 상태, 그것이 결정되고 나서 떠납니다. 그리고 자기가 떠난 자리에는 다시 반드시 돌아와야 됩니다. 그리고 그 떠나는 목적이 부처님의 법을 설하기 위해서 떠나는 것이지 다른 목적으로 떠날 수가 없습니다.

또는 존경하는 스님들이나 존경하는 분이 있으면 그분에게 인사드리기 위해서 떠나는 경우, 또는 내가 결재를 위해서 세 달간 열심히 수행하겠다 싶으면 그 결재를 위해서 떠나는 경우, 또는 승단에 무슨 일이 있다. 그러면 재가자가 뭘 싸우는 일이 있다. 그럼 그걸 갖다 해결하기 위해서 떠나는 목적, 그래서 어떠한 경우든지 반드시 목적이 없어서는 떠날 수가 없습니다. 내가 뭔가 잘못한 것이 있으면 참회하기 위해서 --- 간다든지, 목적과 그리고 가야 될 곳을 분명하게 정하고 떠나게 됩니다. 정처 없이 떠나는 법이 없습니다.

 

부처님이 깨달음을 이루고 나서 범천이 부처님에게 법을 설해줄 것을 청합니다. 그때 범천이 뭐라고 했냐면 "빚이 없는 자여!" 이제 부처님을 청할 때 그렇게 이야기합니다. 부처님은 이미 완전하게 빚을 청산했습니다. 다시 윤회하지 않게 됐으니까. 그래서 "빚이 없는 자여, 다른 사람을 위해서 유행을 떠나시오. 그래서 사람들에게 법을 설해 주십시오. 그럼 그 법을 듣고 그 중에는 깨달음을 이루는 사람들이 있을 겁니다. 그러니 법을 설해 주십시오." 그렇게 얘기합니다. 유행을 떠나라 하는 거라.

 

출가한 스님들이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고 나면 반드시 해야 되는 것이 유행을 떠나는 겁니다. 그래서 불교의 세 개의 주기에는 안거를 지내는 때도 있고, 일상생활을 하는 때도 있지만, 반드시 필요한 것이 유행을 떠나야 됩니다. 법을 들을 수 있는 조건이 없는 곳에는 반드시 가서 법을 설해줘야 되는 것이 스님들의 의무라는 거라. 그래서 법을 설하게끔 하고.

 

그래서 부처님은 45년간 유행을 다닌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적으로는 그렇지가 않습니다.

일찍부터 정주생활을 했습니다. 처음에 동굴이나 아니면 나무 아래나 이런 곳에서 거주를 하다가, 거주하다가 10년이 되지 않아서 정주 생활로써 정착이 되게끔 됩니다. 빔비사라 왕이 죽림정사를 기증을 하고 뒤에 또 아나따삔디까가 기원정사를 기증하고, 이러면서 이미 10년차 이후에는, 부처님이 깨달음을 이루고 나서 10년차 이후에는 정주 생활로 들어갔다고 보는 것이 맞습니다. 정주 생활을 한다고 해가지고 유행을 떠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아까 같이 분명한 목적이 있을 때는 유행을 하게 됩니다.

 

단지 그 유행기간이 두 달을 넘기지 못하게끔 합니다.

그래서 보통 보면 자기의 목적에 맞게끔 보름이면 보름 아니면 한 달이면 한 달 아니면 일주일이면 일주일 동안 유행을 하고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는 역할들을 합니다.

그래서 부처님도 깨달음에 이르고 나서 처음 유행을 하고 떠난 곳이 다섯 수행자가 있는 곳에 가서 초전법륜을 설하게 됩니다. 초전 법률을 설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야사를 비롯한 55명이 또 출가를 하게 되고, 해서 전체 그분들이 깨달음을 이루고 나서는 "이 지구상에 오직 61명의 아라한이 존재한다." 하고 선언을 하게 됩니다. 그러고 나서 인제는 포교를 명합니다. "이 좋은 법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러 길을 떠나라." 법을 전하러 유행을 떠나라는 거라.

그런데 이 유행의 목적은 다른 종교하고는 틀리게 분명하게 정해져 있다는 거라.

 

그렇게 해서 나무 아래에 거주하던 생활들이 유행을 떠나는 사람들이 거기서 새로운 출가자들을 만들고 또 새로운 불교 집단이 형성됨으로 인해서 이미 1년이 지나지 않아서 많은 사람들이 부처님 아래에 모이게끔 됩니다.

그래서 부처님도 61명의 사람들에게 전도 선언을 하고 나서 부처님 자신도 우루벨라로 갑니다. 그래서 가섭 삼형제 1,250명이라는 가섭 삼형제들을 제도를 하게끔 됩니다.

 

생각을 해보세요. 한 지역에 1,250명의 사람들이 머물 공간이 얼마나 있겠어요? 우루웰라라고 하는 곳이 산이 있는 곳이 아닙니다. 강가에 모래가 있는 곳입니다. 동산이라고는 없습니다. 그 사람들이 머물 공간이 어디 있겠어요? 노지에서 만날 비 맞고 있을까? 그것도 하루 이틀입니다. 법을 계속적으로 설해서 그 사람들이 깨달음에 이르도록 할려고 할 것 같으면 지속적으로 모이는 곳이 있어야 됩니다. 그래야만이 사람들이 그 법을 듣고 깨달음을 이룰 수가 있습니다. 수행을 계속해 나갈 수가 있다는 거라.

그래서 부처님이 이곳에서 저곳으로 이동할 때는 부처님을 따라 1,250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계속 따라다닙니다.

 

재가자들이 봤을 때 그 모습을 보고 어떤 마음이 들까?

그 비 오면 노지에 그냥 비 맞고 있고, 바람 불면 바람 먼지 그냥 다 맞고 있고, 그리고 그 부처님 법을 재가자라 할 것 같으면 그 법의 소중함을 알기 때문에 아 저 출가한 스님들이 머물 공간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반드시 하게끔 되는 거라. 그래서 만들어지는 것이 정주 생활을 하게끔 됩니다.

그래서 경전에는 하룻밤 사이에 60개의 꾸띠, 60개의 정사를 완성했다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쉽게 말하면 좋게 지은 건 아니라는 거라. 나뭇가지 얽어가지고 비바람만 피할 수 있게끔 해서 60개를 갖다가 만들어서 머물도록 하고, 또 만들어서 머물도록 하고, 이런 식으로 계속적으로 할 수 있게끔 하는 거라.

 

그렇게 되니까 그전에 계속적으로 유행을 다닐 때는 일반 재가인들이 부처님 법을 듣기가 굉장히 힘이 들었습니다. 근데 이제 딱 정주하는 곳이 생기니까 일반인들은 굉장히 수월해집니다. 그곳만 가면 부처님 법을 들을 수가 있다는 거라. 또 거기만 가면 내가 스님들에게 공양을 올릴 수가 있다는 거라. 지금도 마찬가지고 동남아시아도 마찬가지인데, 출가한 사람들에 대해서 재가자들이 해야 되는 거는 4가지 물품들을 끊임없이 그 출가한 스님들에게 올리는 게 기본으로 돼 있습니다.

만약에 내가 절에 간다 할 것 같으면 오전이면 먹을 거 준비해 가지고 가는 것이 당연시 되게 돼있다는 거라. 오후에 가면 주스 가지고 가는 것이 당연시 돼 있다는 거라. 그 얘기는 뭐냐면 그러므로 인해서 출가자들이 그걸 먹고 생활을 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재가자들도 그 올리는 공덕들을 갖다가 받게끔 되기 때문에.

 

출가한 스님들도 정주하는 것들이 생김으로 인해가지고 여러 가지 일들을 해나갈 수가 있습니다. 그 속에서 법을 설하는 것이 좀 더 용이해지게 되고 또 거주를 하게 됨으로 인해가지고 그 안에서 스님들 간에 부처님 법을 듣고 그걸 이제 기억할 수 있는 시간이 생겨버립니다.

그전에는 부처님이 어디 있는지를 모르기 때문에 부처님이 뭔 법을 설하는지 조차도 잘 모릅니다. 그럼 일부러 부처님 법을 뭘 설했고 어떤 계율을 제정했는지 알기 위해서는 찾아다녀야 됩니다. 그리고 그걸 들은 사람을 갖다가 또 만나러 다녀야 되는 거고. 인제는 부처님이 어디 있고 어디서 법을 설하는지 사람들은 알기 때문에 꼭 오기만 하면 됩니다. 오고 나서 듣고 다시 또 자기 자리로 가면 되는 거라.

 

스님들도 이제는 부처님의 법과 부처님이 말한 율을 갖다가 확립할 수 있는 계기들이 많이 되는 거라. 그렇게 자꾸 스님들이 모이니까, 그 속에서 스님들은 스님들만의 할 일들을 갖다가 또 할 수 있게끔 됩니다. 스님들끼리 참회도 하고, 스님들끼리 또 법에 대해서 담론도 하고, 무슨 문제가 생겼을 때는 그것을 어떻게 어떻게 해결해 나가야 된다는 그런 것들도 해나가고, 각각의 일들이 이제 생겨나가게 됩니다. 출가한 스님들도 이로움이 생기고 재가자들도 이로움이 생기는 것이 거주처가 생김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것들입니다.

 

그런데 기본은 여기도 적어놨지만은 '룩카물라 세나사나(Rukkhamūla senāsana)'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룩카(Rukkha) 나무, 물라(mūla) 나무 아래 나무 뿌리 나무의 근본 나무 아래에서. 세나사나(senāsana) 세나(sena) 자고, 아사나(āsana) 좌선하고 하는 장소. 나무 아래에서 자고 좌선을 하고 하라는 거라. 그게 기본이라는 거라. 아무리 사원이 건립된다고 하더라도 출가한 스님들은 이 기본에서 벗어나지 마라라는 거라.

쉽게 말하면 자기 소유로 만들 수가 없다는 거라. 그 사원은 어떠한 경우든지 상가 소유인 것이지 개인 소유가 될 수가 없다는 거라. 그래서 재가자들이 부처님 당시 때부터 땅을 기증하고 아니면 사원을 기증하고 할 때는 개인에게 기증하는 법이 없습니다. 상가에게 기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상가에서는 누가 그런 일이 있다고 할 것 같으면 반드시 해야 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을 상가에서 승인이 되지 않을 것 같으면 할 수가 없습니다. 어느 스님이 머물도록 재가자들이 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상가 소유로 해놔 놓고 그 스님이 머무는 것이기 때문에, 상가에서 그 스님이 머물도록 허가를 해주지 않으면 그건 할 수가 없다는 거라.

그래서 그런 조건들을 다 구비할 수 있게끔 만든 것이 이 '세-나-사나의 규칙'입니다.

 

보통 좌와구(좌‧와구)라고 이렇게 얘기합니다. 거주하고 또 앉는 방석.

대부분의 스님들은 앉는 방석, 이게 앉는 방석입니다. 이것은 항상 가지고 다닙니다. 그렇죠. 이걸 항상 가지고 다닙니다.

근데 이걸 누가 만들어 줍니까? 재가자들이 만들어줘야 됩니다. 이걸 어떻게 만드느냐는 거라. 이 만드는 방식을 모르면. 또는 스님들이 머물 공간을 마련해주겠다. 거기에 합당한 조건이 있습니다. 그 조건을 모르면 어떻게 해주느냐는 거라.

 

가끔씩 한국에 들어와 있는 테라와다 스님들이 머무는 곳들을 보면서 재가자들은 신심내가지고 마련해 줬는데 저거는 저래서는 안 되는데 하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일반 재가인들이 머무는 공간에 방 한 칸을 이렇게 줍니다. 쉽게 말하면 아파트 같은 데를 갖다가 빌려가지고 거기에 재가인들도 머물게 하고 또 방 하나에는 스님도 머물게 하고 이렇게 합니다. 안 되는 거거든. 재가자들은 마음을 일으켜가지고 그렇게 해줬는데, 쉽게 말하면 계율에 어긋나는 일들을 하고 있는 거라.

또는 스님이 앉을 방석을 마련해 주기 위해서 방석을 만들어 왔는데, 만들어야 될 것으로 만들지 않고 엉뚱한 것으로 만들어 가지고 있는 거라. 예를 들어서 지금 저 스님이 앉아있는 두툼한 솜으로 들어간 거, 저거는 스님들이 가지고 다닐 수가 없습니다. 저걸 아사나(āsana)라고 그럽니다. 저거를 만드는 데는 조건이 없습니다.

 

그런데 스님들이 가지고 다니면서 앉을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은 반드시 그 조건을 따르게 됩니다. 이거는 니시다나(nisīdana)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안에 솜이 없습니다. 그리고 두 겹으로 돼 있습니다. 그런데 뒤에는 한 색깔인데 앞에는 두 색깔로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안에 하고 밖에 하고는 반드시 틀린 질감으로써 만들어지게 돼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규정을 율장에 분명하게 규정을 해놔 놨습니다. 그러니까 그 방식대로 만들어서 스님에게 올려줘야만이 스님도 허물이 안 되고 재가자들도 그것으로 인해서 공덕이 된다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새 좌·와구를 만들어서 스님들에게 올리는 공덕이 어느 재물보다도 공덕이 크다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음료수를 올리고 탁발해서 음식을 올리고 이런 것보다도 더 공덕이 큰 것이 쉽게 말하면 스님들이 머물 공간, 스님들이 앉을 방석, 이걸 만들어주는 것이라고 분명하게 기록이 되어 있거든.

다른 것은 보통 마음을 청정케 하고, 공덕을 많이 쌓게끔 하고, 이것 정도에서 그칩니다. 그리고 조금 더 나아가면 그것이 인연이 돼서 천상에 태어난다 하는 그 정도의 이익이 있는데,

이것은 어떤 이익이 있느냐면 열반에 이르는 원인이 된다. 번뇌를 완전하게 여의는, 언젠가는 번뇌를 완전하게 여의게 된다. 쉽게 말하면 완전한 깨달음을 이루는 조건이 된다는 거라. 그게 자와구라는 거라.

그럴 것 같으면 그에 맞게끔 해줘야만이 그 역할들을 해내는 것이지, 그렇지 않으면 못한다는 거라.

 

그래서 저번에 일반 재가인들한테 그런 얘기를 했습니다.

이번에 까티나 가사를 올해 할 때는 스님들에게 앉는 방석을 하나씩 한번 직접 만들어서 한번 해보는 것이 어떠냐? 하고 얘기했더니, 아무 반응이 없어요. 이게 얼마나 중요한지를 모르고, 실제로 스님들은 이거 없이는 못 삽니다. 어디를 가든지 이걸 소지를 하게끔 돼 있습니다. 그래서 경전에는 4개월 이상 이것과 떨어지지 말아라. 그리고 안거 3달 동안에는 반드시 지참을 해라.

지금은 안거 기간이 아니기 때문에 사실은 이걸 지참을 안 해도 되긴 됩니다. 그런데 지참을 안 하고 여기 왔는데, 앉을 방석이 없으면 어떻게 해요? 스님들은 앉지를 못하게 돼 있습니다. 그래서 이걸 가지고 다니는 겁니다. 그걸 깔고 앉는 거라.

 

이걸 깔므로 인해가지고 내 가사를 더럽히는 것을 방지를 해주고, 또 벌레나 이런 것으로부터 몸을 보호하게 되는 거고, 또 만약에 이런 게 좋은 것으로 만들어졌으면 이것이 기스 나고 하는 것들로부터 방지를 해주고, 이런 여러 가지 조건들을 하기 때문에 반드시 이걸 가지고 다녀라 하고 얘기합니다.

 

그런데 사실은 이게 없어도, 저런 방석이 깔려 있을 것 같으면 굳이 이걸 안 깔아도 됩니다. 그냥 그 위에 앉으면 됩니다. 근데 이제 이렇게 길이 들어놓으니까 저렇게 방석이 있어도 그 위에다 이걸 다시 또 폅니다. 사실은 안 펴도 되는데. 그 정도로 생각을 하고 있는 것들이라는 거라.

그래서 이거는 필요한 거기 때문에 재가자들이 만들어줄 필요성이 있거든.

그래서 이 규정을 잘 보고 만들 수 있도록 하라는 거라.

 

왜 두 가지로 되어 있느냐 하면, 안에 천은 옛날에 방석으로 썼던 천 중에서 그중에서 조금 괜찮은 걸 뺀 거고, 밖에 거는 새 천으로 한 겁니다. 이 밖에 있는 거하고 뒤에 있는 거하고 똑같습니다. 그래서 두 겹으로 돼 있습니다. 이거는 새 천이고 이거는 헌 천이라는 거라. 어떠한 경우도 스님들은 새 것만으로서는 못 만들게 돼 있습니다. 새 것만으로는.

누가 좋은 걸 줬다 그럴 것 같으면, 빔비사라왕이 그랬다고 그럽니다. 카펫 아주 으리으리하게 좋은 걸 갖다가 주니까 부처님이 그걸 뭐라고 했냐면 갈아라고 그랬습니다. 카펫 그 부드러운 것들을 갈아라는 거라. 딱딱하게 해가지고 그것으로 인해서 욕심이 생기지 않도록 하라는 거라. 그렇게 해가지고 쓰도록 한 것이기 때문에, 이 단순한 이것도 그와 같이 하라는 거라. 그 정신이 있기 때문에 반드시 색깔을 달리해야 된다는 거라.

지금은 사실은 안에 걸 쓰던 천으로는 하질 않습니다. 그래도 그 정신이 있기 때문에 색깔을 달리한다는 거라.

 

이거는 길이가 2불걸수, 이게 세로가 1.5불걸수, 안에는 1불걸수 규정을 딱 만들어 놨어요. 그 규정에 맞게끔 해야 된다는 거라. 불걸수라고 하는 것은 부처님의 뼘을 얘기합니다. 부처님 요 엄지부터 또 중지까지의 넓이, 그게 우리보다도 훨씬 크다고 그럽니다. 어떤 경우에는 1.3배, 어떤 경우에는 2배 이렇게 얘기합니다. 보통 우리의 길이에서 1.5배 정도 더 큰 것으로 보면 됩니다. 보통 이 길이는 우리 일반적으로 20cm에서 25cm 이렇게 됩니다.

부처님의 불걸수는 보통 40cm 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이게 2불걸수면 어떻게 돼요? 보통 80에서 90cm 그렇게 되는 겁니다.

1.5 불걸수 일 것 같으면 보통 65cm 정도, 65, 67, 정도.

1 불걸수 일 거 같으면 보통 45cm 이렇게 얘기합니다. 안에도 45센치 들어갑니다.

 

그렇게 만드는 게 니시다나(nisīdana)라고 하는 겁니다.

적어도 이거 하나만 만들 줄 알아도 여러분들에게는 큰 이익이 되고, 이걸 지닌 스님들도 큰 이익이 됩니다. 허물을 범할 수 있는 조건들을 안 만들기 때문에.

 

그래서 거주처라고 할 것 같으면 몸을 의지할 수 있는 장소만 나타내는 것이 아닙니다. 앉을 수 있는 방석도 거기에 포함이 되고, 또 앉고 눕고 하는 데 필요한 각각의 물품들이 다 포함이 됩니다.

 

하나 더 예를 들까요? 거주처에 대해서 여러분들이 안다고 할 것 같으면,

스님들은 위에 덮는 담요라고 그럽니까? 덮는 담요는 못 쓰게끔 되어 있습니다. 아무리 추워도 이 상가띠(겹가사)로써 쓰게끔 되어 있습니다.

가끔씩 추우니까 양모 그 양모라고 그러나? 양모가 들어간 이불을 스님들한테 선물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무용지물입니다. 못쓰게끔 돼 있습니다. 솜이나 양털 같은 거는 위에 덮는 용으로는 못쓰게끔 돼있습니다. 그러니까 줘봐야 스님들이 그걸 쓸 수가 없어. 쓰면 그 스님은 그것이 제 허물이 되기 때문에.

 

그 대신에 방바닥에 그냥 잘 수 없으니까 방바닥에 뭔가를 깔아야 됩니다. 깔개를 해야 됩니다.

깔개를 하는 데는 솜이 들어갈 수가 있습니다. 방바닥 깔개를 이 니시다나와 마찬가지로 이와 같은 형태로 하면서 안에 솜을 넣어가지고 하나 만들어준다. 할 것 같으면 스님들은 계율에 어긋나지도 않고 아주 유용하게 쓸 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어디 만행을 다닌다든지 유행을 다닌다든지 법을 설하러 다닌다든지 할 것 같으면 반드시 가지고 다니는 것 중에 하나입니다.

 

만행을 다니면서 꼭 가져가야 되는 것이 뭐냐면방석(nisīdana), 그다음에 밑에 깔개, 그다음에 또 하나가 뭐냐면 물거름망 입니다. 일반적으로 흐르는 물은 스님들이 그걸 직접 받아 먹을 수가 없습니다. 물거름망이 없을 때는 윗가사 끝부분을 대 가지고 끝부분을 통해서 흘러나오는 물만 먹을 수가 있게끔 돼 있습니다. 그럼 이 가사를 버리게 됩니다.

그래서 유행을 다닐 때는 반드시 물거름망을 가지고 다녀야 됩니다.

 

그래서 저번에 운영위원장한테 이번 카티나 행사할 때는 스님들에게 물거름망으로 쓸 수 있는 간이정수기 간이정수기라고 그러죠? 브리타 정수기, 전기 꼽아서 하는 게 아니고, 요만하죠. 요만한 게 물이 걸러져서 나올 수 있게끔 돼있는 거라. 그건 똑같은 물거름망 형태거든. 그것들을 스님들에게 하나씩 주면 어디 버마 수행 들어간다든지 아니면 다른 데 어디 가서 법을 설하러 가서 며칠 머물러야 될 때는 그걸 가지고 와서 물을 거기서 걸러서 먹게끔 됩니다.

 

그럴 것 같으면 여러분들은 그걸 준비해 주는 이익도 있고, 스님들은 그걸 받은 이익도 있고.

래서 반드시 이 3개는 기본적으로 가져가야 됩니다. 물론 가사바리때는 당연한 것이고.

그게 이제 거주처라고 하는 겁니다.

 

거주처는 쉽게 말하면 스님들과 재가자들의 필요에 인해서 생겨난 겁니다. 자연스럽게. 만약에 이 거주처가 생겨나지 않았다고 할 것 같으면 불교는 아마 지금과 같이 바뀌질 않았을 겁니다. 데와닷따가 나중에 부처님한테 정주 생활을 하는 것을 못하게끔 하자 하고 얘기를 했어요. 나무 아래에서만 지내자고. 만약에 그대로 됐을 것 같으면 아마 불교는 아마 존립 기반을 잃어버렸을 거라.

 

한번 쭉 보면 거주처에 필요한 물품들이 뭐가 있고, 그것들에 대한 얘기들을 쭉 적어놨습니다. 여기 있는 내용들이 여러분들에게는 좀 생소할지는 몰라도 또는 너무 어렵게 느껴지고 너무 또 자세하게 되어 있는 것처럼 되어 있을지 몰라도 반드시 필요한 것들이기 때문에 적어놓은 겁니다.

그래서 한번 자세히 음미를 하면서 그것들을 자꾸 숙지할 수 있도록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네 번째가 의약품 입니다.

의약품은 빔비사라왕이 삘린다 왓차라고 하는 장로 스님에게 이 다섯 가지 물품을 보시함으로 인해서 생겨나게 됩니다. 이 장로 스님이 어느 집에 공양청이 있어서 갔는데 그 공양청을 받으러 간 집에서 어린아이가 울고 있거든.

그래서 이 스님이 물어봅니다. 애가 왜 울고 있습니까? 하니까, 어린애이기 때문에 다른 애들이 쓰고 있던 화환이 갖고 싶은데 그게 없어 갖고 울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 장로스님이 풀로 가지고 애 머리에다가 화환을 만들어주십시요. 풀로 가지고 화환을 만들어가지고 올려주니까, 장로스님이 그걸 금으로써 신통력으로서 만들어줘 버리게 된 거라.

이게 이제 소문이 나니까 빔비사라 왕이 저 가난한 집에서 저 비싼 금이 어디서 났냐고 하면서 그 사람들을 잡아들입니다. 그래가지고 그 사람들을 갖다가 감옥에 가둬 놔놨거든.

 

빔비사라왕이 어느 날 이 스님을 초청을 했어요. 초청을 했는데 초청을 올리는 것마다 금으로 다 바뀌어 버리거든. 이 물컵을 갖다가 스님께 올리면 물컵이 황금으로 바뀌어 버리고, 바리때에 음식을 받아서 올리면 바리때가 황금으로 바뀌어 버리고, 전체가 다 그렇게 바뀌어 버리는 거라. 그래서 기이해서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 하고 그 장로 스님한테 물어봅니다. 그러면서 이 장로 스님이 이 빔비사라왕한테 물어봅니다.

이 황금 그릇이 당신 것입니까? 내 거 아닙니다. 그럼 이건 어디서 났습니까? 스님이 만들어준 거지요. 그러면 그 아이에게 내가 만들어준 황금 화환은 왜 그 사람들 것이 아니라고 해서 잡아가두느냐? 하고 얘기를 합니다. 그때서야 이제 빔비사라왕이 크게 뉘우치게 되는 거라. 아 이렇게 큰 스님이 계시는데 그걸 모르고 그 아이의 마음을 기쁘게 해주기 위해서 만든 일들을 내가 오해했구나 하고 생각하고, 크게 참회를 하게 됩니다.

 

그러고 나서 이 스님에게 항상 다섯 가지 음식을 만들어서 올려주게 됩니다.

그게 뭐냐면 스님들 아플 때 보통 뭐 먹어요? 꿀 먹습니다. , 그다음에 또 몸 건강해지라고 보약 같은 거, 쉽게 말하면 영양제를 항상 주거든. 그 스님은 자꾸 넘쳐나는 거라. 그래서 이걸 갖다가 다른 사람들에게도 주고 이러거든. 근데 그게 하도 많으니까 처치곤란하게 되게 됩니다. 그 모습을 보고 부처님이 "아무리 좋은 약이라 하더라도 일주일을 넘기지 말아라." 몸을 건강하게 유지하기 위해서 하는 거지만은 일주일을 넘기지 말아라는 거라.

 

그래서 지금도 테라와다 스님들은 큰 스님들 방에는 냉장고가 이렇게 있습니다. 그 안에는 보면 꿀도 있고 치즈도 있고 이런 것들이 있어요. 쉽게 말하면 맛난 것들이 있어요.

그런데 일주일 넘기지 않고 반드시 재가자가 가서 그 냉장고를 스님에게 다시 공양을 올려줍니다. 이 계율을 어기지 않게 하기 위해서. 내 몸을 유지하기 위해서 반드시 먹어야 되는 거지만 일주일을 넘기지 않겠다는 거라. 일주일을 넘기면 어떤 면에서는 그것에 대한 소유하는 마음이 생겨버린다는 거라. 철저하죠? 스님들이.

 

그래서 재가자들이 반드시 알아야 되는 것은 어느 선원에 있다, 그러면 그 냉장고는 일주일을 넘기지 않고 다시 상가에게 공양올려야 됩니다. 그 안에 뭐가 들어있든지 간에. 특히나 그 안에 냉장고 안에 음식이 들어있다 할 거 같으면 그 스님은 그다음날 그걸 먹을 수가 없어요. 내가 조리를 해 먹지를 못하기 때문에. 그럼 일반 재가인이 가서 그걸 가지고 만들어 스님에게 공양 올려줘야 되는 거라.

그런 음식이 아닐 경우에는 그 안에 만약에 당밀, , 설탕 이런 것들이 있다 할 것 같으면 그거는 스님이 일주일간은 내가 몸이 아플 때는 먹을 수가 있습니다. 임의로 자기가, 오후가 되든 오전이 되든. 근데 일주일을 넘기면 안 되기 때문에 다시 또 그걸 올려줍니다.

 

의약품이라고 하는 것은 몸을 치료하기 위한 도구인 것이지 그 이상의 것은 아닙니다.

근데 가장 좋은 의약품은 뭐가 의약품이 되겠습니까? 자기 수행으로 그 병을 다스리는 것이 가장 큰 의약품입니다. 그래서 대부분 사람들이 중병에 걸려서 이제 죽을 날짜만 받아놓고 어떤 약을 써도 낫지 못한다 할 것 같으면 사원에 들어가서 수행하려고 합니다. 그때사.

그렇게 해가지고 병을 낫는 사람도 간혹 있습니다. 의약품보다도 수행을 통해서 그 병을 다스리고 낫는 것이 기본적인 원칙입니다. 그렇게 해도 안 될 때는 어쩔 수 없이 의약품을 스님들이 써야 된다는 거라.

 

근데 그 의약품은 의약품을 썼을 경우에는 반드시 그에 따른 대가가 있어야 됩니다. 이 나았다든지 아니면 몸이 쇠약해진 게 건강해졌다든지, 그렇지 않을 것 같으면 그걸 사용해서는 안 돼.

내가 지금 되게 건강한데 쉽게 말하면, 내가 지금 꿀을 먹는다. 왜 꿀을 먹는데? 꿀을 안 먹어도 건강한데? 그럼 그거는 이미 의약품의 한계를 벗어나 버리게 된다는 거라.

 

가끔씩 스님들에게 영양제를 사주는 경우가 있습니다. 또는 드링크류 비타500 이런 것들을 이렇게 사주는 경우, 비타500은 7일 약에 속하게 됩니다. 약에 속하게 됩니다. 쉽게 말하면 오후라고 하더라도 그거는 먹을 수가 있는 게 아니라. 먹을 수가 있는 게 아니라.

내가 피곤하다든지 내가 좀 체력이 딸린다든지 이럴 것 같으면 약으로써 먹어도 돼. 그거 먹고 나니까 힘이 불쑥불쑥 솟아야 된다는 거라. 그렇지 않고 나는 전혀 피곤한 거 하고는 관계없는데 비타500을 먹었다. 그러면 그거는 범계 행위가 돼버리는 거라.

또는 내가 건강한데 일부러 영양제를 챙겨 먹을 이유는 없다는 거라.

 

재가인들은 건강할 때 자기 몸을 갖다 지키기 위해서 아쿠아 뭐 어쩌고 하는 것도 먹고 무슨 영양제도 먹고 하겠지만, 스님들은 그거하고는 틀립니다. 스님들은 일절 그걸 할 수가 없습니다. 건강할 때는.

몸이 쇠약할 때 그거는 먹을 수가 있는 거라. 그것도 일주일 넘기지 않고. 일주일이 넘어도 건강한 게 회복이 안 되면 그걸 계속 또 먹어야 됩니다. 그리 하더라도 다시 또 그 일주일 지나기 전에 재가자 그걸 올려줘야만 그걸 먹을 수가 있게끔 됩니다. 약의 한계라는 걸 분명하게 알도록 한다는 거라.

그게 출가한 스님들이 의약품을 사용하는 방법입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이 출가한 스님들에게 의약품에 관계된 것들을 갖다가 공양을 올리려고 한다. 그 스님이 건강하면 영양제 드리면 안 되겠죠. 가끔씩 그럴 때가 있습니다. 오전 중에 식사하고 같이 다른 드링크류나 이런 것을 줬을 때는 문제가 안 됩니다.

근데 오후에 그걸 주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럼 못먹습니다. 마시는 것이라 해가지고 그것이 오후에 스님들이 마음껏 먹을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그게 약품의 성분이 될 경우에, 또는 그것으로 인해가지고 몸에 변화가 있게끔 될 경우에는 그것은 약품의 영역에 속하는 것이지, 오후에 먹을 수 있는 마실 수 있는 것들이 아니라는 얘기라.

 

또는 오후에 마셔가지고 그것이 공복을 해결해주는 역할을 한다 할 것 같으면 그것도 오후에 먹을 수 있는 것이 아니게 되는 겁니다. 과일 잔뜩 갈아가지고 먹었는데 한끼 식사와 마찬가지다, 그거는 안 된다는 거라.

이런 규정들을 알아야만이 오후에 스님들에게 마시는 걸 주더라도 그에 맞는 것들을 줄 수가 있게 된다는 거라. 그게 이제 약이라는 걸 분명하게 알고.

 

그 대신에 아픈 사람은 어떡할 것이냐?

스님들은 아플 경우에는 면제해줍니다. 어떠한 경우든 포살도 면제해주고 무슨 여러 가지 상가에서 해야 되는 의무들을 면제를 해줍니다.

재가자들이 아프다, 아니면 내가 모시고 있는 스님이 아프다, 여러분들 어떻게 할 거라? 여러분 집에 만약에 여러분 부모가 아프다, 어찌할 겁니까? 양로원에 보내버리면 돼요? 그게 아닙니다.

약에 대해서 분명히 아는 사람들은 이 규정을 분명히 알도록 하고, 그것을 철저하게 지켜줄려고 해야 됩니다.

가장 먼저는 본인 스스로 아픈 본인 스스로 수행을 통해서 그 병을 다스려서 나을 수 있도록 자꾸 옆에서 만들어줘야 되는 거라. 법문을 자꾸 듣도록 한다든지 수행을 갖다가 수행하는 법을 갖다가 자꾸 알게 해준다든지.

 

제 모친이 아팠을 때 그런 적이 있습니다. 태국에 있을 때 시시때때로 법문 내용을 갖다가 한 걸 갖다가 한국으로 보내주기도 하고 그래서 잘 자주 읽고 그렇게는 했지만, 실제 수행해보고 그러지는 않았거든. 한국에 왔을 때는 물론 조금씩 했지만, 본격적으로 수행을 한 거는 아플 때 수행을 해 본 거라. 되게 아프니까 고통스럽습니다.

스님이 다리를 다쳐가지고 44바늘을 기운 적이 있었는데, 그런데 그 통증에 대해서 관찰을 하니까 통증이 씻은 듯이 사라져 버립니다. 그래서 나는 밤에 수술을 안 하고 있은 상태인데도, 그리고 마취제를 안 놓고 있었는데도 편안하게 나는 잘 잤어. 다른 사람들은 피가 질질나고 있는 다리를 보고 지들은 지들이 아픈 것도 아닌데 잠을 못 자고 있는 거라.

 

모친도 똑같았거든. 그 암으로 인해서 얼마나 고통스러울 거라? 그런데도 숨을 들이쉬고 내쉬고 이렇게 하다 보면 어느 순간에 편안해집니다. 그 고통을 못 느끼는 거라. 가장 좋은 것은 아플 때는 수행을 통해서 그걸 다스려 나아갈 수 있도록 여러분들이 자꾸 독려해주고 그런 조건들을 만들어주는 게 가장 좋습니다.

 

그래서 141페이지에 보면

병이 들었을 때는 그리고 간호의 기본 원리는

수행으로 인해서 그것을 극복하는 것이 우선이다. 여러분들이 반드시 해줘야 되는 겁니다.

그다음에 두 번째는 그런 아픈 사람이 있을 때는 반드시 그분의 문병에서 그분이 살아갈 용기를 자꾸 가지도록 북돋워 줘야 됩니다. 같이 못 모시고 있다고 해가지고 모른 척 하지 말아라는 거라. 자주 전화하면서 나아질 거라는 희망, 그리고 자꾸 수행하라는 것, 그리고 그분이 자꾸 노력하려고 살려고 노력하는 마음들을 자꾸 일으키도록 해줘야 되는 것이지, 반대의 작용을 하도록 하면 안 된다는 거라. 그거는 여러분들에게 의무입니다.

살아갈 수 있는, 아무리 내일 죽는다 하더라도 오늘은 열심히 살 의무가 있는 겁니다. 그것을 해줄 수 있는 것들은 여러분들 몫이라는 거라.

 

그다음에 세 번째 간병하는 것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행위이고 의무인 것이지, 이것들을 방관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어떠한 경우든지 내 주위에 그리고 나의 스승님이 아프다 할 것 같으면 여러분들은 반드시 간병해야 되는 의무를 가지게 된다는 거라. 간병하지 않으면 출가한 스님들에게는 툴랏짜야에 해당이 됩니다. 툴랏짜야라는 것은 쉽게 말하면 뭐냐면 큰 잘못을 저지른 죄를 내가 미수에 그친 거라.

쉽게 말하면 내가 누굴 죽였는데 죽이는 것이 실수해가지고 미수에 그치는 거라. 살인미수죄에 해당이 되는 거라. 그게 이제 툴랏짜야라고 하는 겁니다. 그 사람을 죽이는 것과 틀린 것이 하나도 없게 된다는 거라.

 

그다음에 네 번째가 간병하지 않고 죽도록 내버려두는 것은 중죄라는 거라. 그 보답은 반드시 받는다는 거라. 가끔씩 그걸 뭐라고 그럽니까? 지금 의식이 있는데도 너무나 고통스럽기 때문에 빨리 죽고 싶다는 마음을 일으키는 사람이 있으면 모른 체 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아, 그래 저렇게 힘들고 어려울 것 같다면 차라리 죽는 게 낫다 하는 생각을 일으키는 거라. 굉장히 위험한 발상입니다.

생명은 어떠한 경우든지 그 목숨이 붙어 있는 한은, 그것을 살아갈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것이 여러분들의 몫입니다. 직접적인 고통을 내가 가져가지는 못하더라도 그분들이 살 수 있게끔 만들어주는 것은 여러분들의 의무라는 거라. 그 일을 하지 않을 것 같으면 그것은 중죄에 들어간다는 거라.

 

그래서 다섯 번째가 생명이 있는 한 간호를 해야 된다.

'와야지왕' 생명이 있는 한 간호해야 되고 나을 때까지 기다려야 된다.

'우파따따뽀' 지극정성으로 간호하고 나을 때까지 기다려야 된다.

그렇게 해가지고 설령 죽음에 이르게 된다 하더라도 내 할 일을 한다는 거라.

 

마지막에 보면 죽을 권리의 주장이나 자발적 안락사 또는 명예롭게 죽고 싶다는 그런 사회적인 움직임이 있지만 불교적인 사상하고는 틀립니다. 그러한 것들은 뭐냐면 생명을 가치로 따지는 겁니다.

지금 살아가지고, 얼마만의 가치가 있는데, 지금 들어가는 돈이 그보다 더 크다 할 것 같으면 죽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는 거하고 꼭 마찬가지라는 거라. 어떠한 경우든지 어떠한 생명이든 가치로 매길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거라.

 

그래서 불교에서는 죽을 때까지 돌보는 것이 원칙이고, 생명의 가치를 판단하고 평가하는 안락사는 권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하는 걸 분명하게 알아야 됩니다. 중병인 환자의 목숨이 붙어있는 한 지극정성으로 간호하고 나을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에 들어맞는 행위라는 것을 여러분들이 분명하게 알아야 됩니다.

출가한 스님들께도 이와 같이 해야 되는 것이고, 여러분들의 가족들에게도 이와 같이 해야 됩니다. 그것이 여러분들의 몫인 겁니다.

 

저번에 그 스님들에게 필요한 물품들이 뭐고 하는 것들을 대충적으로 얘기를 했습니다.

이게 이제 꼭 스님들에게 필요한 네 가지 물품들입니다.

그것도 물품들을 여러분들이 어떠한 방식으로 조달을 해주고 또 어떠한 방식으로 그에 맞게끔 합당하게 사용할 수 있게끔 만들어줘야 되느냐 하는 것들은 여러분들이 반드시 숙지를 해야 되는 일이라는 것을 명심을 하시기 바랍니다.

자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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