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일상수행법문 녹취/2014~2015 일상수행법문

꼬살라 (20150813)

담마마-마까 2021. 12. 20. 16:08

https://youtu.be/5JmELiawR_k

* 꼬살라 (20150813)

 

아까 탁발 가져오신 분 중에 한분 생쌀은 안 됩니다 이. 탁발 용품에는 조리하지 않은 음식은 탁발 받을 수가 없습니다.

처음 태국 갔을 때 놀란 것이 생채소 좀 먹었으면 좋겠는데 만날 채소를 기름에 볶아주니까 죽겠더라고. 생채소도 조리하지 않은 음식이잖아. 그냥 먹을 수 있는 음식인데도. 그런데도 스님한테 드릴 때는 반드시 볶아주는 거라. 조리를 해가지고. 먹는 사람 입장에서는 속이 니글거리고 힘들어도 그걸 먹을 수 밖에 없는 거라. 이거 쌀도 마찬가지라. 쌀도 어떠한 경우도 출가자에게는 조리하지 않은 음식, 조리하지 않은 음식, 쉽게 말하면 이것은 살아날 가능성이 있잖아. 그래서 그런 것들은 탁발 용품으로는 안 됩니다.

 

자! 오늘은 꼬살라에 대한 얘기를 하겠습니다.

꼬살라가 뭔 뜻이에요? 부처님이 지냈던 나라 중에도 꼬살라라는 나라가 있었죠? '능숙하다'는 그런 뜻입니다. 뭘 하더라도 '잘 능숙하게 잘한다'는 뜻입니다. 그대신에 그 능숙한 것이 선한 방향에 능숙한 것이지, 도둑질하는데 능숙한 것을 꼬살라라고 하지는 않는다는 거라. 그걸 우리 나라에서는 선교(善敎)라고 한자로 그렇게 씁니다. 선할 善자 가르칠 敎자 선하게 배운다 하는 뜻으로 그렇게 쓰여집니다.

 

그게 꼬살라라는 건데, 꼬살라에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프린트물을 볼 필요 없습니다. 프린트물에 안 나오는 겁니다.

그나저나 오늘 토요일날 오는 분들 오늘 온 사람들이 많은데, 스님 서울 가는 것 때문에 그러나? 생각없이 왔어? 그래요. 그런데 이번 주 토요일은 게송 하고 할 때 스님이 서울 갔다가 여섯 시에는 아마 기차를 타고 내려오는 시간이기 때문에 아마 기찻간에서 게송을 받아야 되니까, 시간을 딱 정해가지고 한 일곱시 정도 해서 전화를 해요. 전화를 해서 게송을 하도록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그래도 누구 아마 한사람은 참여를 해가지고 해야, 초보자들이라 잘 모르니까. 이번주 토요일은 스님법문 없습니다.

 

꼬살라 첫 번째 '우빠야 꼬살라' 라고 하는 것입니다.

"적절한 방법을 사용해서 문제를 해결한다."

예를 들어봅시다. 성이 팍 났다. 그럼 어떻게 하는 것이 적절한 방법으로 그 성냄을 해결하는 걸까? 일차적으로는 성냄의 대상이 되는 사람을 피해야 되겠죠. 안 보도록 돌아서가지고 있든지 아니면 저 사람하고 말을 안 하든지 무엇으로 하든지 내 자신이 화가 일어나는 방법을 최대한 없도록 만들어야 됩니다.

그것도 어떻게 보면 능숙한 방법으로, 적절한 방법으로 그 성냄을 피하는 것이 됩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면 그 성냄은 없어지는 것은 아니죠? 그 사람 보면 또 화가 나게 돼있습니다. 그래서 그런 것들을 보고는 적절한 방법은 아니다. 부차적으로 쓸 수 있는 방법이지만 적절한 방법은 아니다 하고 얘기합니다.

 

그럼 성냄이 일어났을 때 적절한 방법은 어떤 걸까? 성냄을 그대로 알아차리는 겁니다. 성냄은 자기 자신이 성내는 것이지 다른 사람이 성내고 있는 것은 아니잖아. 자기 자신을 관찰해서 그 성냄을 관찰해보면 성냄이 변하고 있는 사실을 알 거 같으면 별거 아니다 하는 생각이 들어서 성냄은 가라앉게 되는 겁니다. 변하는 성품을 분명하게 보면은, 그 성냄은 자동적으로 싹 가라앉게 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적절한 대상에 맞는 방법들을 했습니다. 명칭을 갖다 붙이든지, 아니면 성내는 마음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느낌들을 관찰하든지, 아니면 성냄이라고 하는 현상을 관찰하든지, 각각의 스승은 거기에 맞게끔 그 방법들을 제시를 해주는 겁니다.

그런 것들은 그것이 가슴의 느낌을 관찰하는 것이든, 성냄이라고 하는 대상을 관찰하는 것이든, 그것은 직접적인 대상이기 때문에 그런 것들을 일러가지고 "적절한 방법으로 능숙하게 잘 해결한다" 하고 얘기합니다.

그게 첫 번째 꼬살라에 해당이 됩니다.

 

그런데 어쩔 수 없는 경우들도 있습니다.

예를 들면 부처님 당시 때 데와닷따가 저 위에 산속에서 바위를 탁 떨어뜨려가지고 부처님을 죽일려고 합니다. 부처님이 "이얍!" 해가지고 그 바위를 멈추게 했어요? 그런 건 없죠? 바위 떨어지는 건 어쩔 수가 없습니다. 단지 떨어지는 거 그대로 관찰을 할 수가 있습니다. 해가지고 만약에 피할 시간이 있으면 내가 피하는 것이 되어야 되겠지. 그 두려움이나 이런 것도 없이 그대로 피하면 됩니다. 그거 피할 시간이 없을 경우 어쩔 수 없이 그거 맞아야 됩니다. 맞아도 적절한 방법으로 알아차린다고 할 것 같으면 그 아픔을 통해가지고 마음까지 아프도록 하지 않고 아픔이라고 알아차리면서, 죽는다고 할 거 같으면 죽음을 관찰하면서 죽어야 되겠지. 그것이 사실은 적절한 방법이라는 거라.

 

그런데 어쨌든 그게 직접적으로 부처님한테 바위가 미치지 않고 바위조각이 깨지면서 와서 부처님 발등에 떨어지면서 피가 나게끔 됩니다. 그러니까 어떤 면에서는 부처님도 그럴 때는 그것을 그냥 있는 그대로 관찰을 할 수 있을지 몰라도, 지켜볼지는 몰라도 그걸 피할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그때 상황에 맞게끔 적절한 방법을 사용을 한 겁니다. 왜 그랬어요? 떨어뜨린 데와닷따에 대해서 원한심을 품지를 않았거든. 그리고 무슨 뭐 신통을 써가지고 바위를 멈추게 한다든지 이렇게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간혹 사람들이 그런 경우들이 있습니다. 수행을 어느 정도 하다가 보면은 사람들이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드러내고 싶어서 몸이 간질간질간질 할 때가 있습니다. 수행에 대한 것을 드러내는 것도 드러내는 것이 있고, 자신이 알고 있는 것들에 대해서 드러내는 것도 드러내게 되는 겁니다.

그런 경우도 자신이 알고 있는 것들을 드러내고자 하더라도 드러낼 시기에 드러낼 장소에서 그 듣는 사람한테 그걸 적절하게 드러내야 되는 것이지, 그렇지 않고 그냥 무작정 드러낼려고 했다가는 다른 사람들에게 아, 저 사람 조금 이상하다 하는 소리를 들을 수밖에 없다는 거라.

 

수행을 시작할 때도 적절한 방법을 사용을 해야 될 뿐 아니라, 수행이 어느 정도 무르익고 나더라도 적절한 방법을 알지 못할 거 같으면 그것은 헛되이 시간을 보내게 돼버린다는 겁니다. 그래서 수행이 무르익고 나서도 적절한 방법을 하게 돼야 됩니다.

마찬가지로 부처님이 깨달음에 이르고나서 사람들을 봤을 때 아, 저사람은 이번에 깨달음에 이를 조건이 된다 하고 알 것 같으면 그분이 아무리 멀리 있다고 하더라도 가서 법을 설하게 됩니다. 수행이 완성되고 나더라도 적절한 방법은 항상 이용이 될 수가 있다는 겁니다.

 

적절한 대상들을 모를 경우에는 수행을 시작할 때도 어렵고, 수행이 무르익을 때도 어려워지고, 수행이 끝나고 나더라도 해야 할 일들을 못찾게 되는 경우들이 있다는 얘깁니다. 그래서 그마만큼 적절한 방법을 취한다고 하는 기능은 수행에서는 참 중요한 부분입니다.

 

여러분은 처음에 수행을 시작할 때 어떻게 적절한 방법을 사용하게 할까?

우선 처음에는 대상이 뭔지를 분명하게 알아야 됩니다. 내가 수행해야 될 대상들을 분명하게 알아서 그 대상을 가지고 수행해야 되는 것이지, 수행할 대상이 아닐 때는 그것은 관찰할 대상이 아닙니다.

 

가끔 수행할 때 그럽니다. 스님이 만날 현상이 변하는 것을 보라고 그랬는데, 나는 만날 앉아있어도 이놈의 배가 변하는 것은 한번도 보이질 않는다. 그냥 일어나고 사라지고 이것밖에 모른다는 거라. 그럼 앉아 갖고 내가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이 변하는 것을 봐야지 하고 용을 쓰다가 보면, 일어나고 사라지고 하는 것을 보는 것이 아니고 그냥 몸만 피곤해지고 그리고 수행을 망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그건 어째서 그렇게 되는 건가? 대상이 적절하지 못했다는 겁니다.

자신이 1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을 때는 1만 알면 됩니다. 2까지 알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2의 능력이 될 때는 2의 능력에 맞게끔 수행을 해야 되는 것이지 다시 1로 돌아가가지고 1을 알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수행을 하고 있을 때 배가 불러오고 꺼지고 하는 것들을 보면, 그것이 계속적으로 변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것 같으면 그거 그냥 관찰을 해나가야 됩니다.

 

그런데도 대상이 변하고 있는데도 자신은 대상이 변하고 있는 것을 관찰 안 하고, 그냥 들이쉬고 내쉬고 하는 거 그게 고요하고 편하고 쉽기 때문에 그걸 관찰하려고 합니다.

그럼 1시간 동안 수행 할 것 같으면, 이미 내 상태는 대상이 변하는 상태까지는 와있는데 그걸 아는 상태에까지는 와있는데, 그걸 내비둬가지고 다시 그냥 일어나고 사라지고 하는 그 대상에 마음을 붙이는 훈련들만 계속하고 있다는 겁니다.

 

물론 그렇게 하면 수행은 잘 한 느낌은 듭니다. 그런데 진척이 없어져버립니다.

그래서 처음에 수행을 시작할 때도 반드시 자신의 상태에 맞는 수행법들을 적절하게 이용을 해야 됩니다.

여러분들의 수행의 대상은 신·수·심법· 이것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여러분들 수행의 대상이고 그밖의 것은 수행의 대상이 아닙니다. 그걸 분명하게 여러분들이 알아야 됩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신·수·심·법에서 일어나는 현상 중에서 움직임만 알 수 있는 사람은 움직임만 그냥 그대로 따라가야 됩니다.

그런데 그 대상이 변하는 현상을 알 수 있는 사람은 변하는 현상들을 그대로 따라가야 됩니다.

또는 어떤 사람은 처음 일어나는 현상부터 해서 마지막 일어나는 현상 끝날 때까지 분명하게 아는 상태가 됐으면 그거 그냥 그대로 알고 있어야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의 현상이 끝나고 나면 멈추는 것이 있고, 그다음에는 의도가 있어가지고 다음 현상이 일어난다는 사실을 알 것 같으면, 그걸 수행의 대상으로 삼아야 되는 거라.

또는 대상들이 너무나 빨리 변하고 있는 것들을 알고 있을 거 같으면 그것이 수행대상이라는 거라.

그게 적절한 수행대상이라는 거라.

 

그런데 그러한 상태에 이르지 못했으면 그것을 바라고 그것을 수행한다고 하는 것은 적절한 대상을 이미 잘못 알고 있게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처음에 수행을 할 때는 대상을 분명하게 해야 됩니다.

 

남들이 어떻게 수행하는 것, 그것은 중요한 부분이 아닙니다. 나에게 맞는 것, 자기에게 맞는 적절한 것들을 분명하게 알도록 해야 됩니다.

그 프린트물 나간 것 중에서 보면 세 번째 「자기 자신을 경시하지 말아라.」 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자기 자신의 상태에 대해서 분명하게 알고 그 상태에 맞게끔 수행하는 것이 바른 방법입니다. 나는 '아, 이렇게 수행하니까 수행을 잘 못한다.' '나는 참 수행해도 안된다.' 하는 생각이라든지, 아니면 '나는 다른 사람들보다도 훨씬 수행 열심히 잘했다' 하는 마음을 일으킨다든지, 이것은 더이상 공부 안 하겠다는 얘기와 마찬가지입니다.

"어떠한 경우든지 자신에게 맞는 방법으로 적절하게 수행을 하라."

그게 첫 번째 꼬살라 부분에서 "적절한 방법으로 수행을 시작하는 방법"입니다.

 

마찬가지로 수행이 어느 정도 진행이 되고 나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현상들이 있습니다.

그럼 그 현상들에 대해서도 적절하게 대처들을 해야 됩니다. 여러분들이 가장 많이 알고 있는 다섯 가지 장애들, 졸음이 온다든지, 고요함에 빠진다든지, 아니면 망상이 일어난다든지 이런 여러 가지 현상들이 있습니다. 그런 현상도 그 현상을 알아차릴 수 있는 상태가 되는 상태로서 그것을 관찰해야 됩니다.

 

망상이 일어났다, '망상' '망상' '망상' 하고 관찰을 하는데 망상은 사라지지 않아. 그럼 어떻게 해야 돼? 망상이 없을 때까지 그거 그냥 관찰해야 돼? 나는 '망상' '망상' '망상' 해도 망상이 사라지지는 않는데, 망상이 더 번지지는 않는다, 그럼' 망상 이거 별거 아니네' 생각하고 망상을 놓아버리고 수행의 주대상으로 돌아와야 되는 게 기본적인 겁니다.

그런데 자기는 요만큼 밖에 못하면서 '망상'하면 스님이 분명히 그 망상이 싹 사라진다더라. 망상할 땐 '망'자 하나만 해도 싹 사라진다더라. 그거 볼라고 그냥 '망상' '망상' '망상' 하고 있으면 망상이 오히려 더 커져버리는 거라.

 

졸음이 올 때도 꼭 마찬가집니다. '졸음' '졸음' '졸음' 하고 알아차리니까 졸음에 더 떨어진다. 그러면 스님이 졸음이 올 때는 분명히 그 길이 있다고 하더라. 눈이 무거워온다고 할 것 같으면 무거워온다고 알아차리고, 따가우면 따갑다고 알아차리고, 누르는 느낌이 있으면 누른다고 알아차리고, 이렇게 지속적으로 알아차려 나가는 거고, 그게 바른 방법이라는 거라.

그렇게 해도 도저히 졸음에 못 이기겠다, 그러면 그건 이미 틀린 거라. 그건 졸음하고 싸워가지고 될 일이 아니라. 그럼 벌떡 일어나가지고 경행을 하든지, 아니면 눈을 비벼가지고 잠을 깨든지 해야 되는 것이지, 그거하고 싸울 거라고 그냥 '졸음' '졸음' '졸음' 하고 있다고 할 거 같으면 그냥 졸음에 빠져버리는 거라.

 

수행을 시작하고 나서 일어나는 현상들, 갖가지 현상들이 있습니다.

그것과 대치해서 분명하게 알아차릴 수 있을 때는, 그것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맞습니다. 그런데 그것과 싸워서 이길 수 없는 내 상태일 거 같으면, 그것들이 수행 대상이 되질 못하는 거라.

수행을 시작하고 나서 일어나는 현상들에 대해서는 여러분들이 분명하게 그것이 수행의 대상이 되는 것인가, 아닌 것인가 하는 것을 분명하게 구분을 하라.

 

그렇지만 그것이 수행의 대상이 되든, 아니면 대상이 되지 못하는 것이든 공통적인 것은 있습니다. 일단 그 현상이 일어났으면 그 현상을 분명하게 알아차려라는 거라.

알아차려가지고 사라지고 또 그것에 대해서 집착하는 마음이 없어지고 하는 것은, 그 차후의 문제인 것이지 일어난 대상을 모른다고 할 것 같으면 그것은 수행에서 현재 지금의 상태에 놓여있지 못하게 되는 거라. 그래서 어떠한 경우든지 신·수·심·법에서 현재 일어난 것들은 반드시 그것은 알아차려야 된다는 거라.

졸음이 있으면 졸음이 현재 일어나는 거라. 그러면 졸음이 있다는 사실은 분명하게 알아야 되는 거라. 그런데 그걸 놔둬버리고 자꾸 호흡만 알아차리려 하고 있다는 거라. 현재를 자꾸 놓치고 있다면 수행은 끊어져버립니다. 현재의 상태를 끊임없이 그것을 알아차려나갈 때 수행의 힘들은 커져나가게 되는 거라.

 

그렇게 해서 수행이 어느 정도 진행이 되고 나면 조금 재미가 붙습니다.

그러면은 그 재미 속에서 자꾸 놀아날 수가 있습니다.

사마디 상태를 경험해봤으면 사마디에 계속 있게 됩니다. 그런데 분명히 해야 될 것은 그 사마디 상태에 있게 됐을 때 나에게 얻어지는 이익이, 위빳사나로 전환했을 때 얻어지는 이익보다 작다고 할 것 같으면 그 상태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되는 거라.

 

가끔 출가한 스님들도 몸이 많이 안 좋고 할 때는, 위빳사나로 전환하지 않고 사마타 수행을 해서 사마디 상태에서 머물러 있습니다. 그럼 몸이 좀 개운해집니다. 그러면은 그다음에 위빳사나로 전환을 하더라도 수행의 힘이 더 붙어나가게 되는데, 그것은 충분히 가능하다는 거라.

그런데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그냥 사마디의 좋은 면에 그대로 그냥 빠져버리게 되는 거라. 어떠한 경우도 그 상태에 빠져버려가지고는, 그 상태는 능숙하게 되지를 않습니다. 단지 그 상태를 즐기는 것만 계속될 뿐입니다. 자기 자신은 그걸 착각을 해버립니다. '아, 내가 삼매의 상태에 계속 있게 된다' 하고.

 

어떠한 경우든지 삼매의 상태에 계속 있게 되고, 알아차림이 유지가 돼있는 상태일 거 같으면 그 삼매에 대해서 능숙하게 됩니다. 자유롭게 위빳사나로 전환을 하고 자유롭게 사마디 상태로 전환을 하고, 그리고 사마디 상태에서 그것이 능숙해지면 당연히 그다음의 사마디 상태로 넘어가게끔 돼있는 겁니다.

그래서 사마디의 상태는 이번 달의 사마디의 상태와 다음 달의 사마디의 상태는 반드시 달라지게 됩니다. 경험하는 것들이. 그런데 동일하게 계속적으로 하고 있는 것은 그 상태에 머물러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대상에 딱 가라앉아 가지고 밀착해가지고 그 상태로부터 벗어나지 않을려는 마음들이 강해지기 때문에 그렇다는 겁니다.

 

그래서 수행을 어느 정도 진행하고 나면 그 대상을 가지고 내가 위빳사나 수행을 할 것인가? 사마타 수행을 할 것인가를 분명하게 알아야 됩니다.

그것도 수행에서 능숙하게 대상을 아는 기능에 속하게 됩니다.

그걸 하지 못하면 수행에서는 진척이 더딥니다. 그래서 수행이 어느 정도 진행이 되고 나면 그런 것들은 반드시 조심해야 됩니다.

어떤 대상을 취하든 그것이 설혹 개념이라고 하더라도, 사마타 수행으로 시작하더라도 위빳사나 수행으로 전환할 수가 있습니다. 또는 위빳사나 수행을 하더라도 사마타 수행쪽으로 전환을 할 수가 있게끔 능숙하게 진행이 되도록 자꾸 만들어야 됩니다.

 

그다음에 주의해야 되는 것, 어느 정도 수행이 진행되고 나면 자신이 할 일이 보입니다.

남들에게 자꾸 자신의 상태를 드러낼려고 합니다. 그때는 굉장히 조심해야 됩니다. 그거 드러낸다고 해가지고 자신의 수행이 발전이 있다고 할 거 같으면 드러내야 되겠지. 그런데 어떠한 경우든지 그것을 드러냈을 경우에는 자신의 수행은 진척을 하지 못하게 되는 거라. 자신의 수행은 그냥 거기서 정체를 해버리는 거라. 오히려 더 이상 퇴보하는 것은 잘 없을지는 몰라도 더 이상 나아가지를 못하게 되는 거라.

그래서 어느 정도 수행이 되고 나서 교학적인 것이나 수행적으로 자꾸 드러낼려고 하는 마음이 있을 때는 반드시 그것들을 알아차려라.

 

지금 여기서 수행을 끝낼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아야 됩니다.

내가 현재 지금 성인의 경지에 이르렀는가? 자신을 돌아보라는 거라.

 

열 가지 체크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내가 지금 자만하는 기능들이 일어났는가? 그러면 나는 아직 성인의 기능에 이르르지 못했다.

드러낼려고 하는 마음들이 있다? 그럼 성인의 경지에 이르르지 못했다고 자신을 질책해서 '아, 나는 아직 범부중생이다, 남들과 똑같은 범부중생이다' 하는 생각을 해가지고 더 공부를 해나가야 되는 것이지, 드러내가지고는 될 문제가 아니라는 거라.

 

특히 어느 정도 수행이 되고 난 사람들은 주의해야 될 것이 자신의 스승에 대해서 하찮게 여기는 마음들이 있다는 거라.

'아, 저 스승 별 거 없어' '내가 저 스승보다도 더 뛰어나' 하는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설혹 더 뛰어나고 또는 더 많이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 상태에서 자신의 마음을 분명하게 관찰하게 될 것 같으면 스승에 대해서, 이런 상태에 이르게 해준 스승에 대해서 고맙다, 존경한다는 마음이 일어나야 그게 정상적인 것이지, 거기서 다시 다른 스승을 찾아가버린다든지 아니면 그 스승에 대해서 비난한다든지 할 거 같으면, 자기 자신은 오히려 그 상태에서 머물러 있게 되고, 남들은 그런 사람들을 보고 아, 저사람은 바른 방법으로 가지 못한다고 알게 돼버리는 거라.

 

그래서 수행을 어느 정도 하고 나서는 어떠한 경우든지, 설혹 그것이 스승의 경지보다도 뛰어나고 아니면 이 세상에 자신이 최고다 하는 마음이 든다고 하더라도 자기 자신이 성인의 경지에 이르지 못했다고 할 거 같으면 '아, 나는 똑같은 아직 범부중생이다' 하는 생각을 일으키라는 거라.

또는 설혹 성인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하더라도 아직 내가 끝내야 할 것들을 끝내지 못했다. 끝내야 할 것들을 끝냈을 경우에는 분명하게 그런 마음들이 일어납니다. "더 이상 해야 할 일이 없다"는 사실을, "더 이상 나는 윤회하지 않는다"는 것이 탁 서게 됩니다. 그런 것이 서지 않을 때는 아직 자신은 해야 할 일이 남아 있습니다. 그럼 수행을 해나가야 되는 것이지 드러내야 될 일들은 아니라는 겁니다.

 

아무리 우둔한 스승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그대로 전하는 것이라고 할 것 같으면 그냥 그대로 붙어 있으라는 겁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최종적으로는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르게 된다 하는 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지 못하고 이 스승 저 스승 찾아가면서 하면 조금 조금씩 알음알이는 늘어날지는 몰라도, 그런 사람들은 계속적으로 쳇바퀴를 돌게 됩니다. 그 상태에 머무를 수가 있다는 거라.

그래서 적절한 기능을 하는 것들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해야 됩니다. 수행이 무르익었을 때도.

 

그다음에 수행이 어느 정도 완성이 되고 나서는 자신이 해야 할 일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그러면 그것들을 방치해서도 안됩니다.

여러분들은 여기 안거 몇번 지내본 분들도 있습니다. 그런 분들은 반드시 해야 될 것들이 생겨납니다. 누군가가 기초적인 수행법을 물어본다. 어떨 때는 귀찮을 경우도 있을 거라. 그런데도 만약에 바르게 수행을 해나와서 수행이 무르익었다 할 것 같으면 그 수행법을 가르칠 때도 아주 기분 좋게 가르치게 됩니다. 매번 가르친 것이지만 난 너에게 처음 가르친다는 마음으로 가르친다는 거라. 처음 아닌 것이 어디 있어요? 마음은 시시때때로 변하고 있는데. 똑같은 마음이 어디 있어요? 다 처음의 마음인데.

'나'라는 생각을 떨쳐버리고 나면 지금 가르치는 것이 매번 똑같은 거지만 항상 나는 처음 가르치게 되는 거라. 그래서 성심성의껏 가르칠려고 하게 됩니다.

 

혹시 고참들 중에서 그런 마음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할 것 같으면 빨리 자신을 돌아봐야 됩니다. 매번 새로운 현상이라는 거라. 그런 현상에 맞게끔 내가 역할이 생겼을 때는 나는 매번 새로운 것들을 접한다는 걸 알아야 됩니다. 어린 아이들은 매번 새로운 걸 접할 때마다 귀를 쫑긋해서 그것들을 듣고 그것들을 하게 됩니다. 여러분들이 하는 일은 그와 같아야 됩니다.

 

그게 첫 번째 '우빠야 꼬살라(upayakosalla)'라고 하는 방법입니다.

적절한 방법을 취해서 능숙하게 하는 기능들입니다.

수행을 할 때 이러한 기능들을 잘 활용을 해서 수행을 해나가도록 해야 됩니다.

 

그다음에 두 번째가 '아야 꼬살라'라고 하는 획득하는 기능, 어느 정도 수행이 되고 나서 그 대상을 바르게 잡는 기능들입니다.

 

그다음에 세 번째가 '아빠야 꼬살라' 라고 하는 겁니다. 그 대상조차도 버려버렸을 때의 기능들, 이런 것들이 있습니다.

두 번째, 세 번째는 다음 시간에 좀 더 자세하게 설명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자!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