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일상수행법문 녹취/2014~2015 일상수행법문

내일은 너무 늦다 (sutamaya ñāṇa) (20150820) [수행에서 주의해야 되는 마음가짐 12가지]

담마마-마까 2021. 12. 21. 09:00

https://youtu.be/K8WCYaJP3Ls

* 내일은 너무 늦다 (sutamaya ñāṇa) (20150820)

[수행에서 주의해야 되는 마음가짐 12가지]

 

내어 준 프린트물은 지혜의 세 가지 종류 중에 첫 번째 수따마야(sutamaya, 聞所成) 부분입니다. 저번에 프린트물 중간 부분까지 아마 해주고 말았던 거 같은데, 겨우 완성이 다 되었습니다. 저번 주에 완성이 되어서 서울 법회 때 나눠주고 그렇게 했습니다.

 

수행에 대한 것들은 많이 있습니다. 바와나마야(bhāvanā, 修所成)는 잘 알고, 또 그 앞에 찐따마야(cintāmaya, 思所成) 같은 경우도 요즘은 완전하진 않아도 그래도 잘 압니다. 어떻게 사마디에 들 것인가? 사마디에 들기 위한 조건이 무엇인가? 그다음에 그것을 자유자재로 사마디에 들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되는가? 하는 그런 것들이 찐따마야에 대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수따마야(sutamaya, 聞所成) 부분, 법을 듣고 법을 이해하고 하는 그런 부분에 대한 거는 어떻게 하는 건지 잘 모르는 경우들이 많아서 한번 작정하고 써야 되겠다 싶어가지고 글을 쓴 거니까, 쭉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읽어보고 의문나는 거 있으면 질문하도록 하고.

 

법을 들을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야 되는 것은, 아무리 어려운 것이든 또는 아무리 쉬운 것이든 또 아무리 여러번 들은 것이든 항상 처음이라는 마음으로 법을 들어야 된다는 겁니다. 그걸 잊어버려서는 안됩니다.

 

어떤 것이든 처음일 때는 흥미를 가지고 그것을 알려고 하게 됩니다. 그 부분은 이 수따마야에서 굉장히 중요한 부분이니까 그걸 중심으로 쓰여졌고, 나머지 부분들도 어떻게 하면 법을 경시하지 않는 것인가? 하는 것들을 잘 읽고 그것들을 따라할 수 있도록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하면 적어도 지혜가 일어나는 토대가 되고, 또 지혜가 일어날 수 있다 하는 그런 내용입니다.

 

오늘 할 거는 「내일은 너무 늦다」 하는 제목으로 얘기를 하겠습니다.

 

오늘 아침에 누가 와서 질문을 한 것 중에 덧붙여가지고 조금 얘길 할게요.

수행의 마음가짐에서 중요한 부분, 옛날에 언젠가 12가지로 얘기한 것이 있습니다. 그거는 항상 잊어버려선 안됩니다. 그 12가지는.

수행 대상은 어떤 것이든 붙잡지도 말고 밀쳐내지도 말아야 되는 거고, 그 수행대상을 가지고 그걸 기대하는 것도 안 되는 거고, 이런 12가지를 쭉 적어가지고 프린트물로 내줬었나? 안 내줬으면 다음에 한번 다시 체크해서 내주도록 하겠습니다.

 

「수행에서 주의해야 되는 마음가짐 12가지」를 다시 한번 얘기할게요.

 

수행을 할 때 대상을 알아차릴 때는 그 대상에 대해서 기대하면 안됩니다.

아무것도 기대해선 안됩니다. 내가 이 호흡을 알아차림으로 인해가지고 무상한 성품을 볼 것이다, 아니면 그 대상을 알아차림으로 인해가지고 나에게 번뇌가 없어질 것이다, 대상이 뭘 여러분들한테 줄 거라고 그걸 기대하고 있어? 대상은 대상입니다.

대상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대상을 있는 그대로 기대하지 않고 그것들을 알아차림으로 인해가지고 여러분들에게 얻어지는 것이지, 그것을 기대한다고 될 것들을 아닙니다. 대상은 어떤 경우든지 대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릴 때는 기대하지 말아야 됩니다. 그 대상에 대해서.

 

두 번째 수행을 할 때 좌선을 하든 경행을 하든 무리를 하면 안됩니다.

그래서 경행을 할 때도 자신에게 맞지 않게 너무 천천히 무리해서 그렇게 할 때도 있고, 또 좌선을 할 때도 두 시간 세 시간씩 줄기차게 앉아있는다 해서 그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어떠한 경우든지 몸과 마음의 발란스가 맞춰줄 수 있어야 됩니다. 그리고 수행은 평생 여러분들이 해야 되는 것들입니다. 그래도 무리해가지고는 조금 하다가 또 쉬어야 되는 거고, 그래서 어떠한 경우든지 몸에 무리를 주는 행위들은 하지않도록 해야 됩니다. (지나치게 긴장하지 않도록 해서)

 

그다음에 세 번째 수행을 할 때 서두르지 말아라.

서두르면 아무것도 못합니다. 대상은 서둘러서 알아차린다고 해서 그 대상을 빨리 알아차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느긋하게 대상을 보면 됩니다. 대상을 설혹 놓쳐버리고 몰랐으면 어떡할 거야? 그냥 '놓쳤네' 하고 알아차리고 다시 또 다른 대상이 일어난 것들을 그냥 알아차리면 됩니다.

 

네 번째가 집착하거나 밀쳐내려고 하지 않는 것.

서둘러서 할 생각하지 말고, 대상에 대해서 집착하거나 밀쳐내는 것 하지 말고!

어찌 보면 수행대상에 대해서 알아야 되는 것들 중에 가장 중요한 부분입니다. 집착하거나 밀쳐내는 것. 대상은 여러분들한테 집착하라든지 밀쳐내라고 하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이 그렇게 하는 것뿐입니다. 대상은 그렇게 해가지고는 그것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지 못한다는 얘깁니다.

 

그다음에 다섯 번째가 대상을 그대로 가만히 두는 것.

대상을 좌지우지 하려고 해선 안됩니다. 대상을 내가 또 만들어서도 안 되고, 대상을 그대로 그냥 가만히 두면 됩니다. 가만히 두면 그 대상은 자기 스스로 변해가고, 소멸하고, 생겨나게 되는 겁니다. 그걸 잊어버리면 안됩니다.

 

그다음에 여섯 번째 대상은 알았으면 안 그대로 그냥 그대로 받아들이면 됩니다.

움직임을 알았으면 움직임을 그냥 그대로 받아들이면 됩니다. 변하는 것으로 알았으면 변하는 것으로 받아들이면 되고, 괴로움으로 알았으면 괴로움으로 받아들이면 됩니다. 그냥 대상은 받아들이는 것이지, 그 대상을 받아들이는 것이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고 해서 밀쳐낼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다음에 대상을 알아차릴 때의 마음은 항상 평온해야 됩니다.

대상을 밀쳐내지도 말고, 붙잡지도 말아야 되는 것도 중요할 뿐 아니라, 그 대상을 알아차리는 마음이 평온하지 않을 거 같으면 아무것도 못합니다. 그래서 어떠한 경우든지 마음은 항상 스님이 얘기하듯이 "마음은 고요하고 맑고 깨끗하고 가벼워져 있어야" 됩니다. 그래야 그 평온한 마음이 대상을 즉시즉시 알아차리게 됩니다.

수행을 차라리 모르고 안 하고, 또 그 수행대상을 놓치는 한이 있더라도 마음은 그 평온한 데서 벗어나버리면 안됩니다. 평온해져 있어야만이 뭔가 단추를 끼울 수가 있다는 거라. 그거는 항상 잊어버려서는 안됩니다. (온화할 것)

 

그다음에 여덟 번째가 대상에 대해서는 항상 조사하고 확인해라.

조사하고 확인한다고 하면, 사람들이 잘못 알 거 같으면 그 대상을 자기가 생각해서 '아, 이것은 이럴 것이다' 하고 조사하는 것을 얘기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걸 얘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대상에 대해서 '아, 이게 어떤 것이다' 하고 분명하게 확인하면 자연스럽게 조사가 돼버립니다. 그래서 확인되지 않으면 그 대상에서 물러날 생각을 하면 안됩니다. 대상을 바라봤으면, 대상에 대해서 확인한다고 하는 것은 그 대상이 변해나가서 사라질 때까지 본다는 얘깁니다. 그렇지 않고 그 대상이 있는 상태인데도 적당하게 그냥 '대상이 일어났네' 하고 다른 데로 자꾸 마음을 돌려버리면, 그럼 확인하는 습관들이 안 붙어버립니다.

호흡을 알아차리더라도 호흡이 일어났으면 끝까지 일어나서 끝난데 까지를 그걸 확인을 하라는 거라. 그래야 다음에 사라지는 것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는 거라.

 

그다음에 수행을 하다보면 많은 장애들이 일어납니다. 그 모든 문제들은 기회라고 생각해야 됩니다.

수행을 한 단계 업그레이드 시킬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을 해야 되는 것이지, 그 장애를 싫어하는 것들로써 아니면 좋아하는 것들로써 만들어버리면 안됩니다. 그것은 여러분들에게 그지없이 좋은 기회라는 거라. 일반적으로 호흡을 알아차리고 경행하고 해가지고 마음이 성숙되는 것보다는, 그런 기회가 왔을 때 그런 기회를 잘 활용해가지고 그것을 분명하게 넘었을 때 마음은 확 성장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 기회들을 놓치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그다음에 열 번째 생각하는 부분, 어떠한 경우든지 생각하는 것은 없어야 됩니다.

모든 생각은 전부 쓰레기라. 쓰레기통에 버려버려야 될 것이지, 그것을 골똘하게 생각한다든지 아니면 그 생각하는 것들을 쭉 따라간다든지 이런 식으로 해서는 안됩니다. 그래서 그 부분은 조심해야 되고.

 

그다음에 열한 번째가 비교하는 것, 비교하는 것을 하면 안됩니다.

여러분과 다른 사람을 비교한다든지 아니면 여러분들 수행에서 지금 시점하고 언제 시점하고 비교한다든지, 그건 참 의미없는 것들입니다. 수행만 잘 그냥 해왔으면 작년이나 올해나 똑같은 패턴이라고 하더라도 언제 그 기회는 무르익을지 모릅니다.

그래서 그 비교하고 앉아있는 것은 그다음에 수행이 무르익게 하는 기회를 박탈해버리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겁니다.

 

그다음에 열두 번째가 바라밀을 행하는 것, 어떠한 경우든지 선한 마음이 일어나도록 해야 되는 것이지, 악한 마음이 일어나도록 해서는 안 된다 하는 것입니다.

 

그 열 두가지에 대한 얘기를 쭉 한 적이 있습니다.

그 부분은 수행할 때 어느 것 하나라도 어긋나서는 안 됩니다. 빠져서도 안 되는 거고. 그래서 그 부분은 수행할 때 항상 염두에 뒀다가 부족한 부분은 아, 이것은 내가 뭔가를 붙잡고 있구나, 아니면 마음이 고요해지지 못해있구나 할 것 같으면 빨리 그것부터 먼저 만들고 시작할 수 있도록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내일은 너무 늦은 거 맞습니까?

 

내일도 살아있을 거잖아? 안 살아있어요?

그런데 대부분 사람들은 내일 살아있다고 생각을 하기 때문에 뭔가를 오늘 합니다. 저녁에 아이들이나 가족들이 올 것이라고 알기 때문에 저녁밥을 준비할 거 아니라? 올지 안 올지 모르는데 왜 저녁밥을 준비해? 그거 식어 빠지게. 안 그래요?

그런데 대비하는 것하고 그것을 믿어서 확신하는 것하고는 다른 겁니다.

 

부처님 당시 때 어떤 분이 그런 적이 있습니다. 배를 타고 가다가 배가 난파돼버렸어요. 그래서 옷이고 뭐고 다 벗겨져버리고 벌거숭이가 됐는데, 어느 곳에 도착을 해서 벌거숭이로서 나다닐 수 없으니까 나뭇잎을 떼가지고 중요 부위를 가립니다. 그렇게 해가지고 사람들에게 나타나니까 사람들은 그분을 보고 뭐라고 생각을 했겠어? 수행 잘한 어떤 성인이라고 생각을 하는 거라.

왜 그러냐면 대부분 사람들은 특이한 행동들을 하거나 특별한 말을 하거나 이런 것들을 할 것 같으면 그것들에 대한 잘잘못을 따지기 이전에 그냥 나하고 다른 부분이 있다고 해서 그냥 그분을 따르는 경우들이 많습니다. 그 유명한 스타 스님들도 마찬가지잖아. 그러면 거기에 따르게 되는 거라. 그랬다가 시들해지면 또 다른 부분으로 가게 되고.

 

이 분도 꼭 마찬가지로 그렇게 됐는데, 문제가 뭐냐면 자신이 잘못됐다고 아는 시점부터 거기서부터 그 자신은 이미 악의 구렁텅이에 빠져버리게 되는 거라. 대부분 사람들은 자신이 잘못했다고 알 것 같으면 "아, 나 잘못했다. 나는 성인이 아니다." 하고 얘기를 해야 되는데 그렇게 안 한다는 거라. 다른 사람들이 "성인이다!" 하니까 나는 성인이 아니다닌 것을 알지만 자신은 성인인 체를 해야 되는 거라. 성인이 아니기 때문에 성인인 체를 해야 되는 거라. 그래서 자신이 그 잘못을 아는 시점부터 잘못 빠져들어버린다는 거라. 자신을 속여버리기 때문에.

 

그런데 그 모습을 보고 평소에 친하게 지냈던 사람이 그 바히야를 알아봅니다.

"너 그래선 안 된다. 성인은 그런 것들이 아니다. 성인이 어떤 건지 분명하게 알고 너가 성인이 되어야 되는 것이지, 성인인 체 해가지고 되는 것은 아니다" 하면서 부처님의 얘기를 합니다. 그래서 자신이 성인이 되고 싶어서, 왜? 존경받고 싶은 걸 계속 하고 싶기 때문에. 자신이 성인이 아니다 할 거 같으면 그 존경하는 것들은 전부 사라져버린다는 거라. 그러면 처음부터 시작하는 것보다는 계속 그걸 유지하기 위해서는 지금 빨리 자기 자신이 성인이 되어야 되기 때문에 자신은 급한 거라. 부처님한테 가보니까 부처님은 탁발중입니다.

"부처님! 법을 가르쳐주십시오." 그렇게 얘기합니다.

 

출가한 스님들이 주의해야 되는 계율 중에 하나가 뭐냐면 「탁발을 하고 있는 중에 법을 설하지 말아라.」 하는 것이 있습니다. 탁발할 때 법을 설할 거 같으면 뭐 안 될 것도 없지만 대부분은 보면 탁발할 때 법문 설하면 그것을 건성으로 듣습니다. 지금은 내가 탁발 올리기도 바쁘고 아니면 내가 다른 일들을 하기도 바쁘기 때문에 그걸 건성으로 듣는다는 거라.

꼭 음식물 막 장만하고 상에다가 음식을 막 놓고 하는데 누군가가 뭐라고 얘기할 것 같으면 듣긴 듣는데 금방 까먹어버리는 거와 마찬가집니다. 귀담아듣지를 못하는 거라. 그래서 그럴 때는 법을 설하지 않습니다.

 

부처님이 지금은 때가 아니다. 좀 있다가 얘기해줄게. 급한 사람의 입장에서는 그걸 못 기다리는 거라. 결국 졸라가지고 부처님이 법을 설하게끔 합니다. 그때 부처님이 탁발하던 걸 멈추고 그럼 자리에 잠깐 앉아라. 내가 간단하게 얘기해줄게 하면서 자리에 앉히고 나서 부처님이 법을 설합니다. 그 내용이 뭐냐면

 

볼 때는 보기만 하라. 들을 때는 듣기만 하라, 냄새 맡을 때는 냄새 맡기만 하라. 느낄 때는 느끼는 것만 하라. 거기에 머물러라는 거라. 봤으면 본 것에 머물러라는 거라. 느꼈으면 느끼는데 머물러라는 거라. 그렇게 하고 밖에 있는 대상에 붙잡히지 말아라. 그리고 안에 있는 대상에 붙잡히지 말아라. 안팎에 붙잡히지 말아라. 그러면 깨달은 성자가 된다.

 

보이면 보인다고 분명하게 알아차리고 거기에 머물러야 되는 것이지, 보이는 대상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되는 거고, 대상에 대해서 집착하는 마음도 일어나지 말아야 되는 거고, 그리고 그것으로 인해서 마음에서 일어나는 번뇌도 일으키지 말아야 된다는거라. 모든 여섯 가지 감각기관에서 일어나는 것들은 일어나는 즉시 거기에 머물러라. 그것을 분명하게 알아차리고 머물러라는 거라.

아주 쉬운 겁니다. 보이면 보인다고 알아차리고, 들리면 들린다고 알아차려라는 거라. 뭔가 만졌으면 만졌다고 분명하게 알아차리라는 거라. 거기에 머물러라는 거라.

 

그런데 마음은 거기에 머무른다고 하더라도 그 대상에 머물러 있지도 말고, 그리고 대상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각각의 번뇌들이나 생각들이나 여기에도 머물러 있지 말아라는 거라.

마음도 끊임없이 변해가는 것이고 그 대상도 항상 그 상태로 있지 않다는 거라. 변해가는 거기에 머물러 있어가지고는 안 된다는 거라. 그 대상은 대상일 뿐인 것이고, 그것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마음도 일어나는 그때의 마음일 뿐이라는 거라.

어디에도 거기에는 머물러 있지 말고 거기에 집착하지도 말아라는 거라. 그렇지만 일어나는 것들은 분명하게 알아라는 거라. 보는 게 일어났으면 보았다고 알아차려야 되는 거고, 생각이 일어났으면 생각이 일어났다고 알아차리고, 맛봤으면 맛봤다고 분명하게 알아차리라는 거라.

 

바히야는 그로 인해서 깨달음에 이르르게 됩니다.

 

부처님의 위대함이 바로 그런 것들입니다. 길게 설명해야 될 때와 짧게 설명해야 될 때를 분명하게 아시는 분입니다. 길게 설명할 필요가 없는 거라. 지금 급한 사람인데 언제 구구절절이 얘기할 수 있느냐는 거라. 딱 포인트만 찍어서 얘기합니다.

 

사실은 수행의 중요한 부분은 여기에 다 있습니다.

대상을 대상으로써만 알아차릴 수 있다는 것,

그리고 대상이 일어났으면 일어난 즉시 그것을 아는 것,

그래서 그 대상에 마음이 머물러 있어서 그 대상이 변하면 변하는 것으로 알아차리는 거고, 변하지 않고 가만히 있으면 가만히 있다고 분명하게 알아차리는 거고, 또 그게 사라지면 사라졌다고 분명하게 알아차리는 것!

그것뿐입니다.

그 대신에 두 개 할 수가 없다는 거라. 보면 보는데 머물러 있어야 되는 것이지, 보면서 듣고 할 수는 없다는 거라.

 

부처님이 그 법을 설하고 나서 바히야는 죽음에 이르게 됩니다. 부처님이 그 사실을 다른 대중들에게 알리고 나서, "나의 80명의 수승한 제자들 중에 하나가 바히야다." 하고 얘기합니다. 그러면서 그 얘기를 합니다.

 

세 가지는 뭔가를 행할 때 항상 조심해야 된다.

스님이 누누히 그 부분은 얘기를 합니다.

 

지금 내가 하고 있는 행위들이 말이든 생각이든 아니면 행위든 그 행들이 도움이 되는 것인가? 자기 자신에게도 다른 사람에게도 도움이 되는 것인가?

그런데 가끔은 본인이 본인을 해치는 짓을 하고도 본인이 잘했다고 생각을 하게 됩니다. 남이 잘못한 것들에 대해서 막 잘못을 지적하고 화를 내고 나서도 본인은 잘했다고 생각을 하는 겁니다. 화를 낸 게 본인한테 무슨 도움이 된다고 그 일을 하느냐는 거라. 전혀 본인에게는 도움이 안 됩니다. 그런 일을 만나면 또 다른 경우에 또 똑같이 그런 것들을 보면 자기는 불의는 못 본다고 생각을 하겠지만 화를 내고 있는 거라. 그 사람에게 화를 내고 있지만 실제로는 자기 자신이 화가 계속적으로 일어나는 거라. 그런 것들을 보면 볼수록.

 

그러면서도 자기 자신을 합리화시켜버리는 거라. 자신에게 도움이 됐다고.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안 좋은 습관들을 계속적으로 만들게 되는 것이지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설혹 그렇게 말해가지고 그 사람에게는 도움이 되어서 그 사람이 그런 일을 안 하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자신에게는 도움이 안 된다는 거라.

아이를 훈련할 때 야단치고 매를 들어가지고 그 아이는 습관을 고칠 수 있을지는 모릅니다. 그 아이에게는 도움이 되었지만 내 자신에게는 도움이 안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육하는 분들은 어떠한 경우든지 아이들에게 화를 내지 말고 아이에게는 매를 들지 말아라는 거라.

 

그다음에 두 번째가 그것이 필요한 일인가?

해야 할 일들은 필요로 할 때 해야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일부러 일을 만들어나갑니다. 끊임없이 뭔가 일을 찾아가지고 일을 만들든지, 아니면 그런 만드는 일들이 자꾸 나한테 생겨납니다. 언제 수행할 거라? 만날 겉만 도는 거라. 필요할 때 하십시오. 미리 그것을 대비할려고도 하지 말고.

어찌 보면 비가 새면 지붕을 고치는 일이 어리석을지도 모릅니다. 대부분 사람은 그렇게 안 합니다. 비가 오기 전에 지붕을 고칩니다.

그런데 수행하는 사람은 그러한 마음을 가져야 됩니다. '비 새면 고치지' 비 한번 그냥 맞는 게 그게 뭐라고 한번 맞고, 그다음에 '날이 맑아지면 고치자' 하는 마음을 가져야 되는 것이지, 지금 필요하지도 않은데 만날 그거 하려다 보면 다른 일들을 못하게 된다는 거라.

시간은 딱 한정돼 있는 겁니다. 여러분들에게 주어진 시간이나 아니면 스님에게 주어진 시간이나 누구에게나 다 한정된 시간 똑같은 시간이 흘러가는 겁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수행하는 시간이 많고 어떤 사람은 없느냐는 거라. 미리 염려하지 말고, 필요하지 않은데 자꾸 뭔가를 하기 때문에 그렇다는 거라. 필요한 일을 자꾸 할려고 해야 됩니다. 필요할 때 하라는 거라.

 

그다음에 세 번째 마음이 맑고 고요해지는가?

이것을 함으로 인해서 마음이 맑고 고요해지고 가벼워지는가? 그렇지 않으면 하지 말아라는 거라. 찜찜한 것들을 왜 할려고 그러느냐는 거라. 마음이 악하게 되는 것들 왜 할려고 하느냐는 거라. 내가 그 일을 함으로 인해가지고 마음이 맑고 깨끗하고 고요해져가지고, 그 마음으로 인해서 수행을 하고 대상을 알아차려도 금방금방 알아차릴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하는 것인데, 그거 하고 나서 괜히 마음이 거기에 딱 집착해져있을 거 같으면 하지 말아라는 거라.

 

여러분들이 선한 일을 하더라도 꼭 마찬가집니다. 그것이 탁발을 하든 아니면 내가 계를 지키든 아니면 수행을 하든 그것에 대해서 딱 붙잡혀있을 거 같으면 마음은 거기서 딱 정지를 해버립니다. 수행을 해도 수행을 잘할 수도 없고 어떤 일을 하더라도 선한 마음들을 일으키기가 힘들어져 버린다는 거라.

 

항상 자신은 아, 지금 내가 하고 있는 것들 모든 것들이 마음이 고요하고 맑고 깨끗하게 되는 것들인가? 그렇게 해야 됩니다.

그 세 가지를 잘 판단을 했을 때 우리들은 괜한 시간은 허비하지 않습니다.

 

내일이라고 하는 것은 너무 늦은 시간입니다. 지금 현재 살아있을 동안에는 언제든지 이러한 것들은 일어납니다. 그러면 지금 현재 도움이 되고 또 지금 현재 마음이 맑고 깨끗하게 되는 것들을 해야 되는 것이지, 그것을 다음에 할 수는 없다는 거라.

바히야가 그랬다는 거라. 지금 현재 내가 깨달음을 이루기 위해서 필요한 것들을 그대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깨달음에 이를 수가 있는 것이지, 그것을 '아, 지금 부처님한테 들었어. 그럼 나는 저쪽에 가가지고 수행해야 되겠다.' 자기가 언제 죽을지 알아서? 들을 때 그냥 그대로 하면 되는 거라.

 

아까 프린트물 나갔지만 '수따마야 빤냐'라는 거라. 듣는 것으로 인해서 지혜가 일어나서 깨달음에 이르게 된다는 거라.

그런데 왜 이거는 자꾸 내쳐버리고 '바와나마야'만 할려고 그러느냐는 거라. 물론 바와나마야도 빤냐가 일어나는 것이 있고 하지만, '수따마야'라고 해서 지혜가 안 일어나는 것이 아닌데, 듣는 걸 자꾸 듣는 것으로만 만족해버린다는 거라.

그렇게 하면 늦어져버립니다.

 

지금 법을 들었을 때 그것이 수행이 되어야 되는 것이고, 지금 내가 하고 있는 것들이 바로 깨달음에 이르는 길로 가는 길이 되어야 되는 것이지, 그것을 다른 시간에 잡아놓고 하면 안 됩니다. 저녁에 한 시간 수행타임을 잡았다, 그럼 그때까지는 알아차림이 없이 살 것인가? 그렇지는 않다는 거라. 그때까지 살아있다는 보장은 못한다는 거라.

 

내일이 정말 늦은 시간이 되기 전에 지금 현재 분명하게 알아차릴 수 있도록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