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돌아가신 분들을 위한 세 가지 의식 (20150828)
그 돌아가신 이들을 위해서 테라와다에서 하는 의식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눠집니다.
첫 번째가 돌아가신 이들을 위해서 법을 청해 듣는 것.
두 번째가 돌아가신 분들을 위해서 가사를 공양 올리는 것.
세 번째가 돌아가신 이를 위해서 공양을 올리는 것.
이렇게 세 가지로 나눠집니다.
그런데 법을 청해 듣는 사람은 누가 들어요? 돌아가신 분이 들어요? 살아있는 분이 듣지. 공양 올리는 분은 돌아가신 분이 올려요? 살아있는 분이 올리지. 가사 올리는 것도 살아있는 분들이 올리는 겁니다.
쉽게 말하면 살아있는 분들이 모두 다 공양도 올리고 가사도 올리고 또 법도 청해 듣고 이렇게 합니다. 단지 그게 그것으로 끝나버릴 것 같으면 그러한 것들은 선한 행위들이니까, 그 선한 행위들에 대한 공덕은 그 사람에게 돌아가지게 됩니다.
그게 테라와다의 돌아가신 이들을 위한 의식은 이 3가지이지만 "그 행한 행위들을 반드시 돌아가신 분께 회향하라"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걸 보통 '아누모다나(anumodanā)' 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내가 이마만큼 좋은 일 많이 했으니까 그렇게 좋은 일 한 것은 반드시 결과가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결과를 나만 가져갈 게 아니고 나와 인연 닿아있던 돌아가신 분께 똑같이 회향한다 그런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그게 보통 테라와다 불교의 의식입니다.
그러다 보니까 의식의 내용들이 전부 누굴 대상으로 하느냐면 살아있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합니다. 살아있는 사람들한테 법문을 하더라도 "나쁜 일 하지 말아라. 좋은 일 해라. 너도 죽게 돼있다." 하고 얘기하는 것이지 돌아가신 분을 위해서 법문하는 법이 없습니다.
돌아가신 분을 위해서 내가 법문한다 해가지고 그 돌아가신 분이 들을 수 있는 조건이 안됩니다. 그래서 영가야 니 여기 와서 밥 묵어라. 니 와서 목욕해라. 그리고 빨리 극락왕생하라. 이런 의식은 전혀 없다는 거라. 한국 불교하고는 완전히 의식 자체가 다릅니다.
한국불교는 돌아가신 분들을 위한 의식들은 전부 돌아가신 분께 행하는 것들인데, 테라와다 의식은 전부 살아있는 분들한테 하는 법문이라는 겁니다.
그리고 공양을 올리고 가사를 올리고 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살아있는 분들이 하기 때문에 그 살아있는 분들한테 공양받은 것에서 아, 그래 공양 잘했어. 이 공덕으로 인해서 많이 공덕이 생기기를 바랍니다. 하고 얘기를 하는 거고, 이 가사도 이 가사를 받은 것에 대해서 내가 잘 입고 잘 수행해서 법을 전하겠습니다. 하는 얘기를 하는 거고, 살아있는 사람한테. 그거는 스님이 그렇게 하면 스님 할 일은 다 하는 거라.
그런데 여러분들은 공양 올리고 가사 올리고 하는 것도 그냥 공덕회향을 돌아가신 분께 하지 않을 거 같으면 그거는 여러분들 몫이 돼버립니다. 여러분들 몫. 그래서 반드시 공양을 올리고 가사를 올리고 하더라도 '아, 이러한 공양 공덕 그리고 가사 올리는 공덕들이 돌아가신 분께 회향되기를' 하는 마음을 반드시 내야 됩니다.
어떤 경우든지 테라와다의 의식에는 스님이 그 돌아가신 분께 하는 의식이 있는 것이 아니고, 여러분이 마음을 내가지고 의식을 행해야 되는 거라.
왜 그래요? 공덕 지은 사람은 누굽니까? 여러분들이잖아. 그럼 공덕 지은 사람이 여러분이면 여러분들이 그걸 공덕을 회향해야 되는 것이지, 스님은 공덕을 받는, 공덕을 만들어주는 밭일 뿐입니다. 스님에게는 공덕이 생기는 게 아닙니다. 공덕이 생기는 게 아닌데 어떻게 돌아가신 분께 그걸 회향을 할 수가 있어요? 그건 있을 수가 없는 거라.
그래서 경전을 독송해도 여러분들이 해야 되는 거고, 그리고 짤막한 경구로 '아, 이러한 공덕으로 돌아가신 분들이 행복하기를' 하는 게송을 하고 발원을 하더라도 여러분들이 해야 되는 거라.
그런데 여러분들은 백중이다, 아니면 제사다 그럴 거 같으면 모든 걸 스님한테 다 맡겨둬버리는 거라. 스님이 다 할 수 있는 게 아닌데. 할 수 있는 방법이 전혀 없습니다. 스님이 할 수 있는 게 아닌데 여러분들은 그렇게 마음을 먹어버린다는 거라.
이런 것뿐 아니라 테라와다의 의식에는 돌아가신 분을 위해서 하는 의식뿐 아니라, 돌아가시기 전에 돌아가실 상황이 된 분들을 위해서 하는 의식들도 있고, 또 돌아가시고 나서 삼일간 하는 의식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것들의 기본은 어떠한 경우도 공덕은 공덕을 올리는 사람들이 쌓게 됩니다. 그래서 "그 공덕들을 반드시 아누모다나-돌아가신 분께 회향을 하도록 하라."
스님들이 법문을 하더라도 돌아가신 분을 대상으로 법문을 할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들을 대상으로 법문을 하라 할 것 같으면 뭘 법문을 해야 될까? 그래서 대부분 이런 제사의식에서 하는 법문이 "여러분들도 죽음을 맞을 수밖에 없다" 하는 얘기들을 하는 겁니다.
부처님 당시 때 제자들에게 부처님이 물었습니다. 열심히 지금 수행들을 하고 있는데 죽음이 언제 여러분들에게 닥쳐오느냐 하고 물어봅니다.
여러분들은 죽음이 언제 여러분들에게 닥쳐옵니까?
오늘 밥 먹을 때까지는 죽지 않고 살아있을 수 있어요? 확신할 수 있습니까? 아니면 내년까지 내가 살아있다고 확신할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무슨 상황이 일어날지 모릅니다. 확실한 것은 언젠가는 십년 후가 되든 백년 후가 되든 아니면 지금 바로 눈앞에 닥치든 죽음은 반드시 확실하게 나한테 닥쳐온다는 것이라.
죽음이 나한테 닥쳐오기 때문에 나는 어떻게 생각해야 되느냐면 숨을 들이쉬고 내쉬고 하고 나면 나는 죽는다 하고 생각을 해야 되는 거라. 한번 들이쉬고 내쉬고 하고 나서는 나는 반드시 죽는다고 생각할 거 같으면 지금 들이쉬고 내쉬고 함부로 할 수 있어요? 그게 마지막 내 호흡인데! 마지막 호흡, 마지막 의식이 다음생을 좌우하는데! 그런 경각심을 가지지 않으면 죽음에 대해서 항상 소홀히 하게 된다는 거라.
죽음은 그래서 여러분들에게 언제든지 다가올 수 있는 것들입니다.
대부분 사람들은 죽음에 대해서 기피를 할려고 그럽니다. 그런데 그 기피하는 것이 그러한 성질들을 분명히 알고 기피를 해야만이 다시는 그것이 나에게 해당이 안되는 것이 되는데, 그냥 맹목적으로 기피를 할려고 그럽니다.
수행에서 한번 예를 들어봅시다. 호흡을 관찰하고 있으면 들이쉬고 내쉬고 하는 것들을 분명하게 알아차립니다. 아주 빠르게 들이쉬고 내쉬고 하는 것이 진행됩니다. 그렇게 진행이 되다 보면 굉장히 괴롭습니다. 그럼 마음에서 어떤 생각이 일어나느냐 하면 '아, 이렇게 괴로운 거 빨리 벗어나고 싶다' 하는 마음이 듭니다.
내가 그것을 관찰 안 할려고 하더라도 자동적으로 그게 관찰이 되면서 괴로움으로 계속 다가와지는 거라. 대상들이 사라지는 것만 계속 보이게 되는 거라. 그것으로부터 벗어날려고 하는 마음들이 탁 생겨나는 거라. 그걸 '닙빈다띠(nibbindati)' 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게 일어나야만이 그다음에 내가 숨을 쉬고 들이쉬고 내쉬고 하는 것들은 내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고 포기를 해버립니다.
알아차림은 그대로 유지를 하면서 호흡에 대해서 내가 조작하고 뭘 할려고 하고 밀어낼려고 하는 것들을 탁 포기를 해버립니다.
그다음부턴 호흡이 아주 순일하게 돼나갑니다. 고요한 상태에서 호흡을 알아차리게 됩니다.
그와 마찬가집니다. 죽음의 성질에 대해서 분명하게 알아야만이 아, 나는 언제든지 죽는다는 사실이 딱 뇌리에 박혀있어야만이 그것으로부터 벗어날려고 합니다. 죽음으로부터 벗어날려고.
그래서 윤회로부터 뛰어넘기 위해서 노력을 하는 거고, 설혹 내가 윤회로부터 뛰어넘지 못하더라도 내가 다음생에는 좀 더 좋은 조건에 태어나기 위해서 선한 일들을 많이 할려고 하게 되는 거고.
경전에 그런 것이 있습니다.
악처- 지옥이나 아귀나 축생이나 아수라 이런데 태어나는 무리들은 그다음 생에서 인간으로 태어나기 위해서는, 눈 먼 거북이가 바다에서 밑에서 위로 올라와 가지고 구멍난 널판지에 머리가 쏙 박힐 수 있는 확률보다도 더 적다 하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런데 악한 행위를 할 것 같으면 반드시 악한 과보를 받기 때문에 악처에 태어나기가 쉽습니다. 그럼 그런 악처에 태어나면 언제 그럼 다시 여러분들이 깨달음에 이르기 위해서, 아니면 이 윤회를 벗어나기 위해서 노력하기 위해서 인간이 될 거라? 굉장히 힘들다는 거라.
그런데 만약에 돌아가신 분 중에서 그렇게 악처에 태어나신 분이 있다고 할 것 같으면 어떡할 건데? 그분들한테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이 뭐가 있어요, 여러분들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축생으로 태어났다? 그 축생으로 태어난 것에 내가 도움을 줄 수 있는 게 뭐가 있어요? 밥을 주는 거? 예뻐해 주는 거? 그거는 도움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탐욕과 괴로움을 더욱더 증장시켜 주는 것이지 도움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몸을 편안하게 해주는 것이 도움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윤회로부터 벗어나게끔 하고 그리고 나쁜 마음으로부터 벗어나서 선한 마음 일으키게 하는 것이 도움을 주는 것이지, 물질적인 것으로 인해서 도움을 줄 수 있는 방법이 아닙니다.
축생에게 윤회로부터 벗어나게 할 수 있고, 나쁜 마음 일으키지 않고 선한 마음 일으키게 할 수 있는 방법이 뭐가 있어요? 없다는 거라.
지옥은 더더구나 없습니다.
그런데 딱 하나 할 수 있는 게 아귀계!
아귀는 과거전생에 자신과 인연이 닿은 사람들이 일으키는 생각을 먹이로 살아가는 부류입니다. 그래서 쉽게 말하면 과거에 나의 부모님이 있다. 부모님을 떠올리면서 '아이고, 참 저 부모님이 나한테 참 뭘 잘못해줬지' 하고 일으키는 생각이 그 사람들 먹이가 되는 거라. 그럼 그 아귀계에 태어난 부모님은 어떤 생각을 가지겠어? '저게 왜 나한테 악한 감정을 가졌나' 하고 화를 일으키게 되는 거라. 그게 그 사람 그 아귀의 먹이가 되는 거라.
그럼 아귀계에 태어난 그 존재에게 여러분이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은 선한 마음을 일으켜주는 거라. '당신이 빨리 그 세계에서 벗어나 해탈하십시오. 그리고 하루빨리 행복하십시오. 내가 이런 공덕을 많이 쌓았으니까 이 공덕을 당신에게 회향하겠습니다.' 그러고 '아, 고맙다' 하고 마음을 먹고, 그리고 자기 자신의 존재에 대해서 깨닫고 '아, 내가 하루 빨리 이 몸에서 벗어나야지' 하는 마음을 일으켜야 되는 거라.
그러기 위해서 여러분들이 스님에게 공양 올리고 법문도 듣고, 가사도 올리고 하는 거라.
그래서 여러분들은 반드시 명심해야 되는 게 있습니다.
죽음에 대해서 항상 생각을 해야 됩니다.
'Jīvitaṁ aniyataṁ, maraṇaṁ niyataṁ'
'지위땅 아니야땅 마라낭 니야땅' 그럽니다.
'생명 그 삶은 불확실하고 죽음은 확실하다'
여러분들에게 프린트물 내준 16페이지짜리인가로 내준 게 이 프린트물 제목입니다. 이거 만든다고 어제 그제 밤새도록 해가지고 겨우 어젯밤에 끝난 겁니다.
여러분들의, 나의 생명은 불안정적이지만 나의, 여러분들의 죽음은 확정적이다
나에게 죽음은 필연적인 것이고 나의 삶은 죽음으로 끝난다.
참으로 생명은 불확실하지만, 죽음은 확실하다.
초대받지 않고 여기에 왔다가 허락받지 않고 여기를 떠난다.
이와 같이 왔다가 그와 같이 떠나는데, 거기에 무슨 슬픔이 있겠는가?
나는 자식이 있다. 나는 재산이 있다. 이렇게 어리석게 결박당한다.
실로 나 자신이 나의 것이 아닌데 아들이 어디 있고 재산이 어디 있는가?
이게 불교에서 가장 유명한 말입니다.
"삶은 불확실하고 죽음은 확실한 것이다."
항상 여러분들은 그 생각을 해야 된다는 거라. 그런데 그러기가 쉽지 않죠?
부처님 당시 때도 끼사고따미나 다른 여러 사람들이 부처님한테 가서 내 자식 살려내주라. 아니면 내가 이렇게 슬픈데 이 슬픔을 제거하기 위해서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 뭐라고 부처님이 그걸 답해줄 거라. 살려낼 방법이 없는데.
부처님이 봤을 때는 부처님한테 와서 하소연하고 땡깡부리는 것밖에 더 되겠어? 부처님이 그걸 해결해 줄 수 있는 방법이 없는데. 그럼 어떻게 해야 돼? 그런 마음을 지닌 사람의 마음을 빨리 돌리게끔 해야 됩니다.
아, 누구든지 그렇게 죽는 것이다. 내 자식만 이렇게 죽는 것이 아니구나. 한번 돌아보라고. 주위에는 전부 그런 사람들이라.
그리고 내가 이렇게 누군가가 나와 관계된 사람들이 죽었다 해서 눈물 흘리는 거 이게 얼마나 어리석은 일이냐는 거라. 지가 내가 오라 해서 온 것도 아니고 지가 가라해서 간 것도 아닌데, 지가 왔다가 지가 간 건데, 내가 거기에 눈물 흘릴 이유가 뭐 있느냐는 거라. 그리고 그렇게 과거부터 흘린 눈물들이 이게 얼마나 많겠느냐는 거라. 그렇게 흘렸으면서도 또 오늘 또 내가 눈물 흘립니다. 윤회가 계속되는 한은 그런 죽음을 보고 나는 또 눈물을 흘린다는 거라.
죽음은 바로 바라봐야 되는 것이지 그렇게 죽음을 돌릴려고 하고 또는 슬퍼한다고 해결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는 본인은 안 죽는가? 그렇게 눈물 흘리고 그렇게 슬퍼하고 나쁜 마음을 가지는 것보다도 지금 내가 해야 될 일들을 바르게 잘하고 또 선한 마음으로 선한 공덕들을 자꾸 쌓고 그럴 것 같으면 그 윤회하면서 흘린 눈물은 멈출 수가 있는 거고.
그래서 마음을 항상 죽음을 바라볼 때는 나는 '죽음이 항상 내 앞에 다가와 있다' 하는 생각을 가져야 됩니다.
아라한들은 죽음이 다가오면 참 좋아합니다. 얼마나 다행이냐는 거라.
아라한을 예로 들기 전에 일반인들도 그렇습니다. 평소에 자신이 잘 살아왔다고 하는 사람들은 죽음이 다가오면 '아, 인제 편히 내가 좀 쉴 수 있구나' 하고 마음 먹습니다. 그동안에 육체적으로도 아프고 어디도 괴로운 것들도 있고 얼마나 힘들었느냐는 거라. 몸과 마음이. 인제 내가 편히 쉴 수 있겠구나. 그런데 내 자신을 돌아보니까 나는 참 잘 살았다. 오계도 참 잘 지키고 선한 일들도 많이 했고, 적어도 천상에 태어나는 조건은 내가 갖추었기 때문에 저 나쁜 세계는 빠지지 않을 거니까 하고 인제는 편히 죽음을 받아들이는 거라.
'삿짱바네(saccaṃ bhane)'
그래도 나는 다른 사람을 속일려고 하지 않았다. 항상 선한 일들 선한 말들 하고 그렇게 살아왔다는 거라. 그리고 어느 누구도 미워하는 것 없이 화내는 거 없이 항상 자애의 마음을 지니고 살아왔다는 거라. 그리고 지나온 삶들이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도움이 되는 것을 했으면 했지 다른 사람들을 나쁜데로 몰고 가는 일들은 안 했다는 거라.
적어도 이 세 가지 조건이 천상에 태어나는 조건이거든.
나는 그래도 그중에 어느 것 한두 개는 해왔다는 거라. 육체적이나 정신적인 괴로움을 인제 쉴 수 있어서 좋고, 천상에 태어나는 조건들을 갖췄기 때문에 나는 나쁜 데로는 떨어지지 않는다는 확신을 할 수 있기 때문에 편안하게 잠들을 수가 있다는 거라.
일반인들도 그러는데 아라한들은 얼마나 좋을까? 딱 여기서 인제 마지막 생이 끝나버리고 나는 다시는 윤회하지 않는다는 거라. 얼마나 괴로웠느냐는 거라. 그 괴로움을 더 이상 받을 일이 없다는 거라. 죽음을 그냥 담담히 맞게 됩니다.
적어도 여러분들은 아라한들이 죽음을 맞아들이는 것 같이 되지는 못한다고 하더라도 현명하게 살아온 사람들이 죽음을 맞는 자세들은 가질 수가 있어야 됩니다.
그런데 과연 여러분들은 죽음을 환영할 만한 그런 준비들은 하고 있는가?
죽음은 코앞에 있는데, 마음을 계발하고 선한 일들을 하고 하는 행위들을 충분히 했느냐는 거라. 아니라는 거라. 난 아직도 부족하고 아직도 보면 나를 내세우고 나의 이익을 더 챙기고, 선한 일보다 악한 일들 더 많이 하고 있다는 거라.
설혹 그렇게 되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마지막 죽음의 순간에 의식이 끊어질 때 어떻게 의식이 끊어지는지는 알 수가 있어야 됩니다.
아무리 내가 못살았다고 하더라도 죽을 때라도 아, 내가 호흡을 하는 것은 분명하게 알아차리고는 죽어야 될 거 아니라. 그거조차도 못하면은 더 이상 업의 과보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 없는데.
평소에 숨쉬는 것들을 열심히 훈련해놔 놓으면 죽음이 다가와가지고 그래도 삶에 대한 애착을 버려버리고 나면 그냥 그 호흡하는 걸 알아차리게 됩니다. 그래서 편안하게 잠이 듭니다. 죽음을 맞이한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런 훈련을 안 해놓으면 삶에 대한 애착이 떨어지지도 않을 뿐아니라 설혹 애착이 떨어진다고 하더라도 죽는 줄조차도 모르고 죽어버리게 되는 거라.
죽음에 이르렀을 때 대부분 사람들은 마지막 순간은 평온하다고 그럽니다. 그런데 평온만 해가지고 되는 게 아니라는 거라. 평온하더라도 마지막 그 순간에 어떤 마음이 일어날지 어떻게 아느냐는 거라. 적어도 호흡을 알아차리고 있으면은 그렇게 해가지고 마지막 숨을 거둘 거 같으면은 적어도 나쁜 세계에는 떨어지지 않는다는 거라.
그마만큼 호흡을 알아차리는 것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자신이 행하고 있는 것들을 알아차리면서 선한 마음이 일어나게 하는 것들은 또한 중요합니다.
살아가면서 자신이 깨달음에 이르는 것은 더더욱 중요합니다.
어떤 것 하나라도 여러분들이 획득할 수 있도록 그렇게 해야 됩니다.
죽음에 이르게 될 때는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는 소유물이든 여러분들의 가족이든 또는 여러분들 자신조차도 여러분들에게 도움을 줄 수가 없습니다. 내 몸에 생긴 고통 하나도 어느 누구도 도움을 줄 수가 없는 겁니다.
오로지 내 스스로 해야 됩니다. 저렇게 여러분들은 죽음을 맞을 수밖에 없다는 거라. 항상 죽음은 여러분들 곁에 있다는 생각을 경각심을 잊지 말고 집착하는 것들로부터 벗어나서 해야 할 일들을 분명하게 할 수 있도록 해야 됩니다.
분량이 많은데 여러분들이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고 의식을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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