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실패를 인정해야 성장한다. (20150924)
오늘은 간단하게 하겠습니다.
「실패를 인정해야 성장한다.」 하는 제목으로 얘기하겠습니다.
스님이 첫째 셋째 주에는 진주에 법문을 갑니다. 이번 주에 진주에는 좀 일찍 갔었어요. 일찍 갔는데, 요즘은 헌혈을 할려면 보건소나 헌혈하는 지정장소에 찾아가야 됩니다. 전에는 헌혈하는 차들이 곳곳에 있어가지고 부산역이나 이런데 가면 그냥 할 수 있었는데 요즘은 그게 잘 안 보여. 그래서 지정된 장소에 찾아가야 됩니다.
의령 쪽에 학교 동창생이 수간호사로 있는 보건소가 하나 있어요. 거기 가서 헌혈하러 간다고, 헌혈하고 진주로 간 적이 있는데, 거기서 그런 질문이 있었습니다.
아, 그리고 여러분들도 가끔씩은 헌혈들을 하십시오.
다나(dāna)의 세 종류가 있습니다. 바라밀들에는 그냥 일상적인 바라밀, 그다음에 조금 더 뛰어난 바라밀, 그다음에 최상의 바라밀 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일상적인 바라밀은 보시 같은 것을 할 때 자기 것을 다른 사람에게 주는 것들을 얘기합니다. 그리고 조금 더 뛰어난 바라밀을 말하는 것은 그걸 '누디라 다나'라고 그렇게 얘기하는데 피를 헌혈한다든지 자신의 몸의 일부를 다른 사람들에게 나눠주는 것들, 그리고 또 최상의 다나라고 하는 것은 자신의 생명까지도 다른 사람을 위해서 주는 것들을 얘기합니다.
생명을 줄 수 있는 그런 상황은 만들지는 말아야 되는데, 그거는 못하더라도 여러분들이 가장 쉽게 '누디라 다나'를 할 수 있는 게 피를 헌혈하는 것들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것들을 나누어서 새로운 생명을 살릴 수 있는 그런 것들이기 때문에 자주 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런데 그 보건소에서 뭐 하나 물어보는 게 있더라고.
자신의 남편이 만날 실수하고 실패를 해도 그걸 인정을 안 한다는 거라. 잘못한 게 있으면 "아, 내가 잘못했어" 하고 인정을 하고, 그러고 나서 '아, 다시는 잘못을 저지르지 않아야지' 하고 마음을 다지고, '아, 내가 잘못한 것들에 대해서 반성한다. 다음부터는 그런 잘못 안 저지를게' 이러면 간단한데 그걸 안 한다는 거라. 어떤 것을 잘못해도 자신도 잘못한 걸 알고 있고 다른 사람들은 더더구나 그게 잘못한 걸 알고 있는데 그걸 인정을 안 하는 거라.
여러분도 다들 그런가? 그런 경우들이 많죠! 예를 들어봅시다.
누구든지 죽는 줄을 아는데 죽는 것을 인정 안 할려고 하니까 서로 웁니다. 니는 왜 이리 일찍 죽었노? 어쩌고 저쩌고 하면서. 왜 이렇게 다른 사람은 병 없이 잘 살다가 가는데 왜 너는 이렇게 병에 걸려가 일찍 죽었나? 이렇게 하면서 웁니다.
왜 그럴까? 왜 죽는 것들에 대해서 그렇게 인정하고 싶어하지 않을까?
자신이 죽는 것이 두려웁기 때문에! 자신이 죽는 것들에 대해서 두려워하기 때문에! 그래서 자신에게 죽음이 닥쳐오면 어떻게 되는가 하는 생각들이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도 그런 것들이 있습니다.
잘못에 대해서 돌아올 과보가 두려운 거라. 도둑질 한 사람들은 끝끝내 도둑질했다고 얘기를 안 합니다. 도둑질했다고 할 것 같으면 도둑질에 해당하는 징역을 살아야되기 때문에, 그래서 도둑질했다고 안 합니다. 어쩔 수 없이 밝혀지면 그때사 인정을 하게 됩니다.
행위에 대해서, 행위의 결과는 분명하게 나타나는 것들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저지른 선한 행위든 악한 행위든 그것은 반드시 그 과보로써 결과로써 나타나게 됩니다. 잘못을 저질렀으니까 나쁜 결과가 나타나겠지. 그런데 그걸 받을 생각을 안 하는 거라. 그것이 또 두렵고, 받는 것들이.
생존하고 싶어하는 욕구들이 강하게 일어나고, 또 내가 뭔가 집착하는 마음들이 있을 거 같으면 그것을 안 받을려고 그럽니다.
또 하나 예를 들어볼게요. 마하보디 명상대학원에 가서 강의를 하고 있는데, 거기서 한 분이 그런 얘기를 합니다.
"스님, 나는 깨달은 거 같습니다."
"어떻게 자기 자신이 깨달았다고 생각하십니까?"
모든 게 즐겁고 기쁘고 수행하다 보니까 뭔가 확 트이는 느낌이 있어가지고 즐겁고 기쁘고 모든 것이 그냥 좋다는 거라. 너무나 좋다는 거라. 그래서 자신이 생각하기에 자신이 깨달은 거 같다고 그럽니다.
"그래요? 그런데 깨달은 분들의 얘기는 들어봤는가요?" 하니까
그거는 잘 모르겠대.
"깨달은 분이 자신이 깨달았다고 얘기하는 법이 있던가요?" 하니까,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그거는 없거든. 깨달은 사람이 "나 깨달았소", "나 아라한에 도달했다" 이렇게 얘기하는 법은 없거든.
왜 그러냐 하면 인과법칙이 분명하기 때문에, 생겨난 것들은 반드시 사라진다는 것들을 알기 때문에, 원인·결과의 법칙을 알기 때문에, 나라고 하는 것들이 존재하지 않는 상태를 알기 때문에, 나라고 하는 것이 존재를 하지 않는데 어떻게 '내가 깨달았다' 하고 얘기를 할 수 있느냐는 거라. 그거는 있을 수가 없는 거라.
그러니까 '내가 깨달았다' 하는 것은 이미 무상의 법칙 자체를 바로 이해하지 못한 상태, 아니면 그 깨달았다고 하는 생각이나 아니면 그때의 느낌들에 딱 사로잡혀 있을 경우에 그렇게 되는 형태들을 띠는 것들이라는 거라.
그러고 보니 그런 것 같거든. 그래서 내가 그런 얘기를 했습니다.
"지금 그렇게 깨달음을 이루었다고 생각했을 때, 삼보에 대한 확신들은 흔들림이 없게 됐는가?" 부처님과 담마와 상가에 대한 것.
"부처님과 가르침에 대해서는 흔들림이 없게 됐는데, 스님들의 무리는 그렇게 신뢰가 안 갑니다."
"그러면 아직 깨달은 것 같지는 않다."
또 하나 물어봤습니다.
"자신이 제거된 번뇌가 뭔지 분명하게 아는가? 그리고 아직 내가 제거해야 될 번뇌가 뭔지 알고 있는가?"
깨달음에 이르렀는데 어떤 번뇌가 제거됐는지를 모르는 거라. 다시 일어나지 않게 되는 것을 확신할 수 있는 게 뭔지를 모르는 거라.
예류과에만 이르러도 '아, 이것은 내가 다시 일어나지 않을 번뇌다' 하는 것을 분명하게 압니다.
그다음에 세 번째 물어본 게 "다시는 악에 물들지 않을 자신이 있는가?"
어떠한 상황이든 누가 나를 해코지를 하든 아니면 나에게 유혹을 하든 뭘 하든 간에 거기에 넘어가지 않고 물들지 않을 자신이 있는가?
그런 것 같지는 않거든.
그래서 아직 깨달은 것 같지는 않으니까, 단지 깨달았다는 경험들을 한 것뿐이니까, '아, 내가 조금 더 공부를 열심히 해야 되겠다' 하는 마음을 먹고, 또 그런 경험들은 소중한 것이니까 그런 체험들을 한 것들에 대해서 소중하게 생각하고 더 열심히 하십시오. 그렇게 하니까
"아닙니다. 스님, 나는 깨달았습니다." 끝끝내 깨달았다고 그럽니다. 그러면서도 강의는 듣고 싶으니까, 강의는 아침 9시 돼가지고 저녁 5시까지 합니다. 길게 합니다. 그래서 목이 많이 쉬는데, 강의는 또 끝까지 다 들어.
잘못된 것들에 대해서도 잘못했다고 인정하지 않는 부류가 있는 반면에, 자신이 잘한 것들에 대해서도 잘했다고만 생각을 하고 그것들에 매여 있어 버릴 거 같으면, 내가 지금 그것을 지적을 해주더라도 그것들에 대해서 '아, 내가 잘못된 것이구나' 하고 인정을 하지 않게 된다는 거라.
여러분은 적어도 그렇게 해서는 안됩니다.
경전에 그런 게 있습니다.
어느 출가자들이 부처님한테 가서 "부처님! 우리가 참 잘못한 게 있습니다." 뭘 잘못했나 하고 물어보니까 "우리끼리 내기를 했습니다." 누가 가장 오래도록 법문을 할 수가 있는가? 또 누가 가장 정확하게 부처님의 가르침을 정확하게 전할 수 있는가? 그걸 가지고 내기를 했다는 거라.
일견 보면 그렇게 나쁜 부분은 아닙니다. 오래도록 법을 설할 수 있는 것들하고, 그리고 바르게 법을 말할 수 있는 것들에 대해서 내기 해가지고 한 거니까. 그런데 그 스님들은 "부처님 우리가 참 잘못했습니다" 합니다. 뭐가 잘못됐어요?
내기를 할려면 누군가 하나는 이기고, 누군가 하나는 져야 됩니다. 누군가 하나는 승리해야 되고 누군가 하나는 실패해야 됩니다. 뱀이 개구리를 잡아 먹었으면 뱀이 승리한 거라? 아니면 뱀이 개구리를 잡아먹지 못하면 뱀이 실패를 한 거라? 누군가는 하나 승리하면 누군가는 하나 실패를 한다는 거라. 잡아먹는 사람이 있으면 잡아먹히는 사람이 있다는 거라. 대학입시에도 누군가가 합격했으면 누군가는 하나 떨어지게 돼있다는 거라. 그럼 합격한 사람들은 합격했다고 기뻐하고 떨어진 사람은 실패했다고 우울해 해야 되느냐는 거라. 그건 아니라는 거라.
그걸 알기 때문에 우리가 누가 법을 오래도록 설할 수가 있는가? 바른 법을 잘 전할 수 있는가? 하는 그런 얘기하는 것 자체가 이미 잘못됐다는 거라. 경쟁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때 부처님이 그런 얘기를 합니다.
"실패, 실수했다고 아는 것, 인정하는 것, 그것으로부터 모든 것은 출발한다" 하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두 가지 부류가 있다.
잘못을 해도 잘못했다고 하지 않는 부류,
그다음에 잘못한 줄을 알면서도 잘못했다고 말하지 않는 부류.
그러한 부류들은 어떠한 경우든지 마음의 성장은 없다" 하고 얘기합니다.
사회에서 살아가든 아니면 출가해서 살아가든 실패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뭔가 경전을 하나 외우더라도 누군가는 외우게 되고, 누군가는 외우지 않게 되고 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거라. 그러면 외운 사람은 외웠다고 자만하지 말아야 되는 거고, 실패한 사람은 실패했다고 낙담하지 말아야 된다는 거라.
성공한 사람은 내가 이거 성공했다고 해가지고 기뻐하지 말고 오히려 더욱더 열심히 해서 계속적으로 내가 경전을 외워나가겠다 하는 다짐을 해야 되는 거고, 실패한 사람은 아, 내가 잘못했다. 실패했다. 내가 뭐가 모자라가지고 이렇게 외우지 못했다 하는 것을 반성하고 그래서 다시는 내가 못 외우는 일이 없도록 더욱더 열심히 하겠다 하고 다짐을 해야 되는 것들입니다.
그래야만이 성공한 자도 실패한 자도 동일하게 사물을 대할 수가 있게 됩니다.
그런데 "어리석은 사람은 그러한 실패나 실수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래서 부처님 제자들은 이러한 실수나 실패를 반드시 알아차려라 하는 겁니다.
여러분들이 오늘 팔계를 받았습니다. 팔계를 받았는데 어떨 경우에는 팔계를 지키지 못할 경우가 생길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아, 내가 팔계 중에 어떤 것들은 실패했다, 내가 어겼다' 하고 알아야 됩니다.
알지 않으면 그걸 바꿀 방법이 없습니다. 자신이 오늘 팔계를 받았는지 오계를 받았는지조차도 모를 것 같으면 의미가 없어져버립니다. 팔계를 받는 의미가.
아, 오늘은 오후불식하는 팔계를 받았다. 그러면 오후불식하려고 노력을 해야 되는 거라. 그런데 그런 생각 없이 그냥 오후에 막 먹어버리고 팔계 받은 생각도 없이 해버릴 것 같으면 계 받은 그 자체의 의미가 없어져버리게 되느 거라.
그래서 어떠한 경우든지 자기가 실패하고 실수했으면 그것들을 먼저 분명하게 알아차려야 됩니다. '아, 오후에 내가 먹지 말아야 되는데 뭔가를 먹었네' 하고 알아차리는 순간 더 이상 먹지를 않게 되는 거라. 그리고 '아, 내가 이거 잘못했다' 하고 받아들여야 됩니다.
받아들이고 그 어기고 잘못한 것들에 대해서는 내가 어떤 식으로든 결과가 나타나는 것은 달게 받겠다 하는 마음을 먹고.
업의 결과는 분명한 겁니다. 선한 행위든 악한 행위든 자신이 지은 것들에 대해서는 결과는 반드시 받게 돼있습니다. 그럼 자신이 지은 것은 자신이 그냥 받아야 되는 거라. 그런데 그걸 받지 않으려고 할 거 같으면 안 되는 거라. 그럴려면 자꾸 속이게 되는 거라. 내가 뭘 먹어도 안 먹었다고 하게 되는 거고, 그렇게 해가지고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거라.
그래서 그것들은 내가 달게 받겠다. 먹은 것들에 대해서 실수를 인정하고 '아, 그 결과는 반드시 나에게 돌아오는 것이다. 내가 달게 받겠다'하고 마음을 먹고, 내가 다시는 이런 실수를 저지르지 말아야 되겠다 하고 마음을 탁 먹어야 됩니다.
그게 "부처님 제자들이 실수하고 또는 실패하는 것들에 대해서 알아차리는 방법이다" 하고 얘기를 합니다.
누구든지 자신이 한 행위들에 대해서 알아차리지 않으면 그것들을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또는 그렇게 알아차리더라도 그것들을 남의 탓으로 해서는 안됩니다.
네가 나에게 자꾸 뭘 먹자 해가지고 먹은 거 아이가? 네가 잘못했다. 이래버릴 것 같으면 자신에게는 문제가 없는 것처럼 돼버립니다. 어떠한 경우든지 자신에게 돌리라는 거라. 수행의 대상도 자신의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들이고, 실수하고 실패하고 하는 것들을 찾는 것도 자신에게 돌려야 하는 것이지 외부에서 그 원인을 찾아서는 안됩니다.
살아가면서 실수하고 실패하지 않을려고 해서 노력할 것이 아니라, 그걸 했을 때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하는 것이 더 중요한 것들입니다.
그것들에 대해서 자신이 받아들이게 되고, 또 그 결과들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고 분명하게 알고, 그리고 다시는 그러한 잘못들을 저지르지 않겠다 하고 다짐할 수 있는 것들이 오히려 훨씬 좋습니다.
왜? 누구든지 조심해도 실수하고 실패하게 됩니다.
누구 하나는 성공하고 누구 하나는 실패하게 돼있게 됐다는 거라. 사회구조가 그렇게 돼있습니다. 아무리 열심히 하고 또 아무리 조심하더라도 실수하고 실패하게 돼있는 게 사회적인 현상이라는 거라. 그걸 받아들이지 않게 된다고 할 거 같으면 자신은 성장할 수가 없게끔 된다는 거라.
그리고 그것을 고치는 것도, 실수하고 실패하지 않는 것들을 고치는 것도 자신의 책임으로 해야만이 그러한 실수나 실패들이 자신의 것으로 다시 다가와지는 것들을 막을 수가 있는 겁니다.
그래서 실수하고 실패했을 때 그것들에서 배울려고 해야 됩니다.
그것을 피하고 또는 그것을 덮어둘려고 해가지고는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가 없고 배울 수가 없습니다.
단지 자신이 행한 것들에 대해서 시행착오하는 것들은 '어쩔 수 없다' 하고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한번 착오를 일으키고 또 두번 착오를 일으키면, 나중에는 그 착오가 착오가 아닌 것처럼 착각을 해버리게 됩니다.
그런 착오들이 있을 때 '자신의 마음에 자애가 있는가' 하는 것들을 바라보십시오.
반드시 거기에는 자애의 마음이 없습니다.
자애의 마음을 지니게 될 때 실수하고 실패하는 것들을 교훈 삼아서 그것들을 넘어갈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자신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똑같이 그와 같이 실수하고 실패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래서 누군가가 대학에 들어가고 누군가가 대학에 못들어갔다고 하더라도 거기 들어간 것에 대해서 너무 그렇게 기뻐할 것도 아니고, 또 들어가지 못한 사람에 대해서 위로할 줄을 알게 됩니다.
나도 똑같이 저렇게 실수하고 실패한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그래서 마음은 더욱더 그런 것들에 구애받지 않고, 그것들을 교훈삼아서 마음은 더욱더 고요해지고 평화로워지는 방향으로 나아가게끔 됩니다.
그러면서 나와 남에 대해서 분간하는 마음들을 점점 줄여나갈 수가 있습니다.
실수하고 실패하지 않고 살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그것들을 우리가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서 자신의 마음은 성장을 하기도 하고, 그렇지 않고 성장하지 않고 자기 기만에 빠지기도 합니다. 그러한 부분을 잘 알고 여러분들은 실수하고 실패하는 데서 배울 수 있는 인간들이 되도록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자기 자신이 그러한 것들을 완전히 넘어버리면은 어떠한 경우에도 실수와 실패는 거듭할지는 몰라도 그것으로 인해서 악에 물들지는 않습니다.
자기 자신이 우월한 기쁨들이 일어난다든지, 아니면 자기 자신이 못났다고 하는 마음이 일어난다든지, 그러한 마음들이 일어나지 않게끔 됩니다. 밖에 대상들에서도 그럴 뿐 아니라 자신의 마음에서도 악에 물들지를 않게 됩니다. 항상 선한 마음들이 일어나도록 자꾸 되어나갑니다. 마음에서는 자애의 마음이 항상 일어나고 대상을 끊임없이 알아차릴려고 하는 마음들이 일어나게끔 됩니다.
그런 마음들이 일어나지 않으면 마음은 언제든지 악한 쪽으로 기울어지게 돼있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밖에 외부적인 대상에 인해서도 악에 물들지 않을려고 하게 되고 안에서도 악에 물들지 않게끔 자꾸 노력을 하게 되는 것들입니다.
그게 실수와 실패로부터 여러분들의 마음이 성장하는 길입니다. 반드시 그렇게 될 수 있도록 노력하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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