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상을 아는 것이 인생을 아는 것이다. (20160826)
인간을 괴롭힐 수 있는 괴로움은 많이 있습니다.
인간은 괴로움을 당할 때 자아를 괴로움의 주재자로 여깁니다.
또는 자신을 자아로 간주함으로써 아예 괴로움을 겪지 않으리라고 믿습니다.
그러나 자아는 오온에 붙인 명칭에 불과합니다. 곧 괴로움을 다스릴 만한 권능이 없는 신기루가 자아라는 말입니다. 결국 자아에 대한 집착의 끝은 역시 괴로움일 수밖에 없습니다. 즉, 무상한 오온은 실로 무상하기에 괴로운 것입니다. 괴로운 것이라고 해서 아무리 오온을 자아라고 집착한다고 해도, 자아는 허구이기에 괴로운 오온은 무아일 수밖에 없습니다.
괴로움을 벗어나기 위해 의지해야 할 곳은 관념적인 자아가 아닙니다. 한낱 말에 불과한 자아는 결코 보호자나 피난처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오온이 「나」가 아님을 수행을 통해서 확인하여야 합니다. 닙바나(열반)야말로 괴로움이 일어나도록 조건 짓는 온갖 번뇌에서 우리를 안전하게 지켜주는 진정한 “피난처”와 “귀의처” 가 된다는 것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됩니다.
부처님 시대 인도에 빠따짜라(Patācārā)라고 하는 이름의 대부호의 딸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신분이 낮은 젊은 하인과 사랑에 빠져 사랑의 도피를 했습니다. 집에서 멀리 달아난 두 사람은 몹시 궁핍한 가정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그녀에게 있어서는 천국에서 지옥으로 떨어진 것 같은 궁핍한 생활이었지만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할 수 있었기에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이윽고 그녀는 임신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불안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부유하게 자란 그녀였기에 어떻게 하면 좋은지 몰라 다만 헤맬 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자식을 낳기 위해서 친정에 돌아오고 싶다고 생각해서 남편에게 부탁했지만, 남편은 자신이 그녀의 집으로 돌아가면 살해당할까 두려워 거절했습니다. 불안으로 가득한 그녀는 남편의 부재중에 혼자서 나가 버렸습니다. 그런데 숲의 한가운데에서 진통이 시작되어 그녀는 혼자서 자식을 낳게 되었던 것입니다. 마중 나온 남편은 분만을 했기에 집으로 데려갔습니다.
두 번째 아이를 임신했을 때도 전과 같이 혼자서 나갔습니다. 찾으러 돌아다닌 남편이 숲 속에서 진통으로 괴로워하고 있는 그녀를 발견했습니다. 그때는 우기로 많은 비가 내렸습니다. 당황한 남편은 나뭇잎으로 비를 막을 수 있는 덮개를 만들려고 나갔다가 뱀에 물려 죽어 버렸습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그녀는 만삭의 진통이 시작되어 머지않아 아기가 태어났습니다. 그래서 그 밤에 두 아이를 필사적으로 지키며 보내다가 아침에 남편의 시체를 발견하고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제 돌아갈 명분이 없어진 그녀는 친정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도중에 홍수에 불어난 강을 건너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힘들게 큰 아기를 기슭에 옮겨놓고, 어제 태어난 둘째 아이를 데리러 강에 들어가 중간 정도 갔을 때 독수리가 큰 아기를 노리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어느 쪽 기슭으로도 돌아가지 못하고 그녀는 큰 소리로 외치며 독수리를 쫓아버리려고 했습니다. 거칠어진 물소리에 섞여 모친의 소리를 들은 큰 아이는 자신을 부른다고 생각하여 어머니가 있는 강물로 들어갔습니다. 그러다 홍수에 떠내려가
버렸습니다.
그 광경을 보고 있는 동안 독수리는 갓 태어난 둘째 아기를 채어 갔습니다.
그녀는 견딜 수 없는 괴로움으로 미쳐 버릴 것 같았습니다.
더구나 친정으로 돌아가 보니 전날 내린 폭우로 번개를 맞아 집도 불타버리고 가족도 모두 죽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하룻밤 사이에 그녀의 모든 것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들 모두는 자신에게 있어서 매우 소중한 가족이었습니다. 인간에게는 이러한 극한의 괴로움을 참는 것은 힘들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완전하게 미쳐버린 그녀는 입고 있는 옷도 벗어 던지고 알몸으로 울면서 무작정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 어느 친절한 사람이 부처님이 계신 사원으로 그녀를 이끌었습니다. 그러나 사원에 들어가려고 하는 알몸의 그녀를 모두들 내쫓으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부처님이 그 광경을 보시고 큰 소리로 「딸아! 이쪽으로 오너라!」라고 불렀습니다. 아버지가 부르는 것과 같은 딸이란 말에 그녀의 마음은 순간적으로 침착해졌습니다. 그녀는 부친 앞에 웅크려 주저앉은 딸과 같이 부처님 앞에 편안히 주저앉았습니다. 살아갈 근거가 모두 사라진 그녀를 제정신으로 돌아오게 하기 위해서 필요했던 것은 무엇인가를 의지하는 것이었습니다. 사람의 마음을 다 알고 있는 부처님이 그녀를 진짜 딸처럼 취급하며 그 마음의 괴로움을 없애 주었습니다.
극단적인 이야기이지만 이것은 경전에 나오는 실화입니다. 그녀의 생애는 불행 이외에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비유해서 말하면 사막 한가운데에서 목이 말라 죽을 것 같이 되어 있는 사람이 한 방울의 아침 이슬을 맛있게 핥는 것과 같은 것으로 그녀에게는 남편의 사랑만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의지하던 남편과 아이, 친정식구들이 하룻밤 사이에 모두 죽어 버렸습니다. 사람이 재산, 친척, 아이, 또 다른 것에 의지하고 의존해서 느끼는 행복은 환상과 같은 것입니다. 그것이 사라지면 어떻게 됩니까? 결국 남는 것은 한없는 번민, 괴로움입니다.
물건, 사람 등에 의지해서 행복하다고 착각하며 인간은 필사적으로 살아갑니다.
경제활동과 가정을 돌보는 것, 자신의 몸의 건강을 챙기는 것이 인간의 삶의 방법의 전부입니다. 일반적으로 행복하다고 생각되는 것 모두는 쉽게 사라져 버리고 마는 무상한 것입니다. 사라졌을 때의 괴로움은 측정할 수 없는 것입니다. 마치 호랑이나 사자, 독사 등을 애완동물로 길러 놀고 있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한 번 실수하면 생명이 사라집니다. 무지한 사람은 죽을 때까지 이러한 것들로 인해 행복하다, 살아 있어서 좋다고 말하면서 불장난, 폭탄 놀이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삶의 방법을 지혜의 입장에서 보면 가치가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물건, 사람에게 의지하는 삶의 방법을 인생 일대의 목적으로 해야 하는 것입니까? 폭탄 놀이만으로 인생을 끝내는 것입니까?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행복이라고 생각하지만 무상합니다. 의지하는 것, 의존하는 것의 위험함을 부처님은 빠따짜라에게 친절하고 명확하게 가르치셨습니다.
죽음에 습격당하고 있을 때 부모님이나 친척, 아이나 재산도 무엇 하나 해줄 수 없습니다. 그러한 것이 아무리 있어도 사람은 병이 들고 늙고 허무하게 죽어버립니다. 불교의 입장에서 보면 일반 세속세계에서는 누구나가 몹시 귀하게 여기고 자랑으로 생각하는 삶의 방법, 즉 재산을 늘리고, 지식을 얻고, 결혼해 가족을 만들고, 권력을 획득하고, 유명하게 되고 하는 것과 같은 삶의 방법은 결국은 어떤 의미도 가지지 않습니다. 이러한 삶의 방법으로 100년을 살아도 특별할 것이 없습니다. 무지한 삶의 방법이라면 50세까지 살아 있던, 80세까지 살아 있던, 100세가 넘었다고 자랑해도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모든 것이 무상한 것으로 사라져 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몸도 무상으로 인해 사라져 가기에 자신의 신체마저도 자신의 것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을 이해해서 아무것에도 의지하지 않는 마음을 만드는 것이 인생의 성공인 것입니다. 생명은 비록 단 하루라도 생멸 변화를 이해해서 마음의 집착을 지워버린 사람이 인생의 성공자입니다.
부처님의 설법을 들은 빠따짜라는 출가해서 수행에 힘썼습니다. 인간에게 견딜 수 없을 만큼의 극심한 괴로움이 거품과 같이 사라져 갔습니다. 그녀는 최종적인 해탈을 체험해서 유명한 대아라한이 되었습니다.
불교는 괴로움을 없애는 방법과 행복하게 되는 방법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가르치는 방법에서 테라와다 불교는 붓다의 가르침만을 기준으로 하고 있습니다. 또한 가르쳐 주는 분이 아무리 뛰어나도 제자(조사들)의 것보다는 스승(붓다)의 가르침이 좋다고 테라와딘들은 잘 알고 있습니다. 마음의 문제를 해결하고 싶고, 진리를 알고 싶고, 고통을 없애고 싶고, 윤회를 끊고 싶고, 깨달음을 이루고 싶다면 붓다의 가르침을 조사 확인하여 신뢰하게 됨으로써 담마따라 힘써 실천해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붓다는 진리를 말하는 사람이 아니라, 진리를 실천하는 사람을 일러
Sammadakkhāto(삼마닥카-또-)라고 합니다.
●이번 포인트
• 물건이나 사람에게 의존하는 인생은 폭탄 놀이와 같은 것입니다.
• 세상 사람들이 희망하는 행복은 목마른 사람이 한 방울의 이슬을 핥고 기뻐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 무상을 이해해서 해탈하는 사람만이 인생의 성공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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