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삶은 불확실하고 죽음은 확실하다. (20160909)
이것은 불교에서 유명한 말입니다. 죽음은 모든 생명에게 반드시 다가오는 자연스러운 현상인 것으로 잘 이해해야 하는 것이지, 죽음을 무서워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도 본능적으로 죽음을 무서워합니다. 왜냐하면 「죽음은 피할 수 없다」라는 것을 애써 회피하거나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생명이나 몸에 매달려 많은 욕망과 집착을 안고 살아갑니다.
갓난아기가 태어났을 때 가족이나 친지 친척들은 환희하며 행복을 느낍니다. 격렬한 진통에 잘 참은 아이엄마도 기쁨으로 가득 찬 눈빛으로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갓난아기를 응시하며 출산 때에 맛본 고통이나 곤란함은 쓸데없지 않았다고 느낍니다. 그러나 갓난아기는 울면서 태어납니다. 그것을 보면 이 세상에 태어날 때 「괴로움」을 경험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갓난아기는 좋은 행위와 나쁜 행위를 거듭하면서 사춘기를 거쳐 어른이 되고, 이윽고 노인이 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가족이나 친지 친척들을 남긴 채로 이 세상에 이별을 고합니다. 이것이 인간의 본질입니다. 우리는 어떻게든 죽음으로부터 피하려 하지만, 죽음으로부터 피하는 것은 아무도 할 수 없습니다.
죽음이 가까워져 오면 우리는 자신의 재산이나 사랑하는 자식들이 걱정되어 몹시 번민하고 괴로워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신의 몸을 걱정합니다. 태어난 이래 계속하여 소중히 지키고 정성스럽게 보살펴 왔음에도 불구하고, 지금 그 몸은 여위어 쇠약해져서 소진되어가고 있습니다. 몸과 헤어지는 것은 너무도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피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신음소리 내거나 한탄하거나 소리 지르면서 죽음을 맞습니다.
◎ 죽음의 공포 ◎
우리가 불안하게 되는 것은 외부의 탓이 아니라, 장래에 대해 생각하는 자신의 망상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죽음 그 자체는 무서운 것이 아닙니다. 무섭다고 하는 것은 자신의 망상인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이 죽는다.」라는 현실에 직면할 수 있을 만큼 용기가 없습니다. 그래서 죽음이라고 하는 진리를 들이들이기 어렵고 무서운 것입니다. 그러나 죽음을 마주보는 것에 의해서 확실히 공포는 감소하고 제거되어 갑니다.
우리는 태어난 순간부터 탄환과 같이 죽음을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이 현실에 눈을 떠서 용기를 가지고 자연의 법칙인 죽음을 마주봐야 합니다. 삶에서 자유로움을 중요하게 생각한다면, 죽음을 대하는 공포로부터도 자유롭게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죽음의 공포는 자연의 법칙을 모르는 사람에게 일어납니다. 부처님은 증지부 경전(Aṅguttara Nikāya)에서 이와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공포는 어리석은 자에게 일어나는 것이지, 현자에게는 일어나지 않는다.」
공포란 머릿속의 망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과학에서는 죽음을 생리적으로 몸이 쇠약해져 가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아직 죽음을 경험했던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죽음은 무서운 것이라고 망상해서 무의미하게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유명한 의사인 윌리엄·오스라(Sir William Osler)는 이와 같이 말했습니다. 「나의 오랜 세월 임상 경험 속에서 고통이나 공포에 습격당해 죽어 간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라고.
또 어느 베테랑 간호사는 이와 같이 말합니다. 「많은 사람은 죽음을 무서워하면서 살아가지만, 이것은 너무나 슬픈 일이라고 나는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죽음이 왔을 때, 죽음은 생과 같이 자연의 현상이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으니까. 임종 때에 죽음을 무서워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지금까지의 나의 경험 속에서 공포를 안고 죽어 간 것은 단 한사람뿐입니다. 그 여성은 여동생에게 돌이킬 수 없는 잔혹한 일을 했다고 한탄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죽음을 맞이할 때 아름다운 일이 일어납니다. 우려도 두려움도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죽음은 현실이다」라는 것을 이해했을 때, 그들의 눈에는 놀라울 정도의 평온함이 깃들여 있는 것을 나는 자주 보았습니다. 이것이 현실을 아는 것의 덕은 아닐까요?」
생에 집착하면 죽는 것이 무서워집니다. 사는 것에 대해 강한 불안감을 느껴 비록 선한 것이라도 과감하게 행동하려고 하지 않게 됩니다. 자신의 소중한 생명이 병이나 뜻하지 않은 사고를 당해 사라져 버리는 것은 아닐까 걱정해서 두려워하면서 날들을 보내게 됩니다.
또, 비록 「죽음은 피할 수 없다」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고 해도, 사는 것에 강한 애착을 갖고 있는 사람은 「죽은 뒤 영혼이 천상에 가기를!」이라고 열심히 빕니다. 이와 같이 마음이 공포나 기대로 혼란해져 있어서는 행복하게 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자기를 지키려고 하는 이러한 본능을 무시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죽음의 공포를 넘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나」라는 개념을 버리는 것입니다. 즉, 안쪽으로 향하고 있는 애정을 바깥쪽으로 향하는 것, 즉, 다른 생명의 행복에 도움이 되는 것을 행하고, 자애를 실천하는 것입니다. 「자신은 언젠가 반드시 죽는다, 죽음을 피할 수는 없다」라는 사실을 항상 명심해 두는 사람은 죽기 전에 인류에 대한 자신의 책임을 완수하려고 힘껏 노력합니다. 이승이든 저 세상이든 게으름 피울 수가 없습니다.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것을 전심전력하면, 자기중심적인 집착이나 기대, 허영심, 오만, 독선 등의 무거운 짐으로부터 곧바로 해방됩니다.
◎ 병과 죽음 ◎
살아 있는 한, 병과 죽음은 반드시 방문합니다. 이것을 잘 이해해서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됩니다. 현대 심리학에 의하면 「과도한 정신적인 스트레스는 생의 현실로부터 도피하거나 거부하거나 하는 것으로부터 생긴다. 스트레스를 완화하든지, 혹은 극복하지 않으면 몸에 중대한 병을 일으킨다.」라고 말합니다. 과도하게 고민에 빠진 상태가 계속되면 병은 확실히 악화됩니다.
마음을 맑고 깨끗하게 해서 올바른 행동을 하는 사람은 죽음을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나」라고 하는 것은 마음과 물체가 결합해서 성립되어 있는 것에 지나지 않고, 「죽은 사람」이라고 하는 고정적인 실체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업의 결과, 즉 지금 행한 행위나 과거에 한 여러 가지 행위가 다음의 생을 만들어 내고, 그 생으로 또 업의 괴로움을 짊어집니다.
윤회의 괴로움을 끝낼 수도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 언제 어디서든 도덕을 지키고, 선행을 하고, 덕을 쌓도록 힘껏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또, 그처럼 노력하는 것에 의해서 두려움 없이 현실적으로 죽음을 마주볼 수가 있습니다.
불교에서는 자신 대신에 업의 무거운 짐을 짊어지는 구세주와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한 나쁜 행위의 결과는 자신이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자신을 의지처로 하고, 섬으로 하여, 힘쓰라」. 이 가르침을 항상 명심해 두도록 하십시오.
가족이나 친척 친구들이 죽어도, 한탄하고 슬퍼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한탄하고 슬퍼해도, 윤회를 멈출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죽으면 그 사람의 업에 따라 새로운 생으로 다시 태어납니다. 가족이나 친척 친구들은 시체가 무덤에 들어갈 때까지는 곁에서 시중들 수 있지만, 그 이상은 불가능합니다. 다음의 생에 함께 갈 수가 있는 것은 그 사람이 행한 선악의 행위뿐입니다. 그래서 남겨진 사람들은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침착하게 받아들여 이별을 견뎌야 합니다.
죽음을 피하는 것은 누구도 할 수 없습니다. 죽음만이 유일하게 확실한 것입니다. 숲은 도시로 바뀔 수도 있고, 도시가 사막으로 바뀔지도 모릅니다. 산이 호수가 될 수도 있습니다. 변함없는 것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러나 죽음만은 확실합니다. 그 이외의 것은 모두 일시적입니다. 우리에게는 많은 조상들이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모두 죽어 버렸습니다.
이런 말을 듣고, 불교는 생을 비관적으로 보고 있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죽음이 모든 현실 속에서 가장 현실적인 것입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현실을 보려고 하지 않고, 비현실적인 그대로 있기를 바랍니까? 죽음으로 모든 일을 끝내는 것이 아닙니까? 죽음은 모든 것을 끝냅니다. 이것을 잊지 마십시오. 죽음은 우리의 운명에 눈을 뜨게 해 줍니다. 아무리 지위가 높아도, 아무리 고도의 기술이나 의료 과학이 발달해도, 모든 사람은 모두 평등하게 죽습니다. 그리고 이런 생과 죽음의 연결은 우리가 완전한 깨달음을 이룰 때까지 계속되어 집니다.
◎ 영향력은 남는다. ◎
부처님께서는 이와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육체는 재가 되지만, 이름이나 남긴 영향력은 남는다.」라고. 영향력이라는 것은 사람이 육체를 가지고 생존하고 있을 때보다 죽은 뒤에, 보다 강하고 광범위하게 영향을 미치는 일이 있습니다. 우리는 과거에 산 인격자들의 사상에 강하게 영향을 받아 좋은 행위를 하는 일도 있습니다. 자신의 인격을 완성시키기 위해서 과거의 위인들의 생각도 중요합니다. 그리고 살아 있는 사람은 죽은 조상들의 합성이라고 간주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과거의 위대한 철학자나 현자, 영웅, 시인, 음악가는 인종에 관계없이 지금도 우리의 마음속에서 살아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과거의 위대한 인물과 자기 자신을 관련지을 때, 그들이 말한 뛰어난 사상이나 훌륭한 사고는 시대를 넘은 불후의 것으로 공유할 수가 있습니다. 그들의 육체는 멸했지만 남긴 영향은 살아 있습니다. 육체는 계속해서 항상 변화하는 화학 요소의 모임에 지나지 않습니다. 인생은 끊임없이 계속 흐르고 있는 큰 강의 한 방울(사람 물방울)이며, 우리는 이 「생」이라고 하는 거대한 흐름에 기쁨을 가지고 공헌해야 합니다.
생의 본질을 모르면 무명의 수렁에 빠져 한탄하고 슬퍼합니다. 그러나 생의 본질을 알아차릴 수가 있다면 무상한 것을 모두 버리고 열반을 구하게 됩니다. 열반에 이르기 전에는 몇 번이고 죽음에 직면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죽음 그 자체에는 아무 의미도 없기 때문에 죽는 것에 괴로워해서는 안 됩니다.
불교는 「이승은 처음이자 마지막 생이 아니다」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만약 이승에 확신을 가지고 선행을 계속한다면, 미래의 생은 보다 행복하게 됩니다. 한편, 만약 몇 번이고 반복해서 다시 태어나는 것이 싫다고 생각한다면, 마음을 길러 갈애와 번뇌를 모두 없애기 위해서 해탈을 향해 모든 노력을 다해야 합니다.
◎ 불교의 가르침 ◎
최상의 깨달음인 아라한에 이른 성자는 번뇌를 완전하게 없애었기 때문에 친한 사람이 죽어도 한탄하고 슬퍼하는 일이 없습니다. 부처님이 입멸했을 때, 아라한인 아누룻다 존자(Anuruddha thero)는 한탄하고 슬퍼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당시 예류과까지 밖에 달하지 못했던 아난다 존자(Ānanda thero)는 눈물을 흘리고 깊게 슬퍼했습니다. 아누룻다 존자는 이와 같이 말했습니다.
「아난다여! 부처님께서는 일찍이 항상 말씀하시기를 모든 태어난 것, 존재하는 것, 조합된 것, 만들어진 것은 반드시 망가진다. 생겨서 멸한다! 이것이 여러 가지 조건에 의해 형성된 것의 본질이다. 태어난 것은 반드시 죽는다. 이 구조가 완전하게 그칠 때 궁극의 평안이 찾아온다.」
이것은 불교의 기반이 되는 가르침입니다.
◎ 슬픔의 원인 ◎
슬픔의 원인은 모든 형태의 「집착」입니다. 슬픔을 넘고 싶다면, 사람이나 재산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것이 궁극의 진리이며, 죽음이 가르쳐 주는 귀중한 지혜인 것입니다. 집착은 우리의 감정을 기쁘게 하고 세속의 생활을 계속하게 하기 위해서 다양한 것을 줍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모든 슬픔을 일으킵니다. 만약 이 가르침을 배우지 않으면 우리는 죽음으로 타격을 받고 공포에 눌러지게 됩니다. 이것을 부처님께서는 이와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아이나 재산에 집착해도, 죽음은 사람을 데리고 간다.
정확히 큰 홍수가 자고 있는 마을을 휩쓸고 가듯이.
이 가르침은 마을사람들이 깊이 잠들지 않고 잘 눈을 뜨고 있으면, 마을이 큰 홍수로 참사를 겪지는 않는다고 하는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 죽음은 모든 사람에게 찾아온다. ◎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기 때문에 깊은 슬픔에 가라앉고 있던 두 명의 여성이 있었습니다. 부처님은 어떻게 그녀들의 문제를 해결했을까요?
한 사람은 끼사-고-따미-(Kisāgotamī)입니다. 그녀의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갓난아기는 뱀에 물려 죽었습니다. 그 죽은 아이를 데리고 부처님 아래에 가서 「이 아이를 살려 주세요」라고 부탁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가서 겨자씨를 몇 개 받아 오십시오. 다만 지금까지 한 번도 죽은 사람이 없는 집으로부터 가져오세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끼사고따미는 한 번도 죽은 사람이 없는 집을 찾아낼 수가 없었습니다. 그녀가 방문한 어느 집도 상중이든지, 혹은 한 사람 이상의 죽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마침내 끼사고따미는 「죽음은 모든 사람에게 일어나는 것이다」라는 씁쓸한 현실에 눈을 떴습니다. 죽음은 모든 생명에 동일하게 적용되는 것이어서, 아무도 그것을 면할 수 없습니다.
또 한 사람은 빠따-짜-라-(Paṭācārā)입니다. 그녀의 경우는 끼사고따미보다 한층 더 비참했습니다. 짧은 기간에 두 명의 아이와 남편, 형제, 부모님, 그리고 재산을 모두 잃어버렸습니다. 제정신을 잃어 발광하며 벌거벗은 채로 거리를 방랑하고 있을 때 부처님을 만났습니다. 부처님은 빠따짜라를 제정신으로 되돌리고, 이와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죽음은 모든 생명에게 일어나는 자연의 법칙입니다. 빠따짜라여! 당신이 이러한 괴로움을 맛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무수한 생애동안 아버지나 어머니, 아이, 친척들이 죽을 때마다 괴로워했다. 윤회 속에서 당신이 흘린 눈물의 양은 바다의 물의 양보다 많다」
부처님의 이야기가 끝난 뒤 빠따짜라는 「생의 불확실성」에 눈을 떴습니다.
빠따짜라도 끼사고따미도 자신의 비참한 경험으로부터 「괴로움」이라고 하는 현실을 이해했습니다. 사성제의 첫 번째 진리인 「괴로움의 진리」를 깊게 이해하는 것에 의해 나머지 3가지의 진리도 이해했습니다. 부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비구들이여! 괴로움을 이해하여라. 그리고 괴로움의 원인과 괴로움을 소멸 하는 길을 이해하여라.」
◎ 오온 ◎
죽음이란 오온이 분해하는 것입니다. 오온이란 감각 작용(수), 지각 작용(상), 형성 작용(행), 인식 작용(식), 그리고 물체(색)의 5가지의 모임입니다. 앞의 수·상·행·식의 4가지는 마음의 모임(nāma)이며, 의식을 구성하는 요소입니다. 마지막 색은 물체, 바꾸어 말하면 몸의 모임(rūpa)입니다. 그리고 이 마음과 물체가 짜여 합쳐진 것을 우리는 편의상 「개」라든지 「사람」, 「나」라고 명명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존재는 실체가 아니라, 마음과 물체의 2가지 기본 요소로부터 구성되어 있는 집합체이며, 단순한 현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머리가 망상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에 5온이 현상이라고 알지 못하고, 실체로서 보고 있습니다. 또한, 선천적으로 갖춰져 있는 욕망 때문에 자신은 아름답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5온을 고정적인, 변화하지 않는 「나」라고 간주라고 있습니다.
모든 것의 진정한 본연의 자세를 알 수 있을 때는 마음이 평온하게 되어, 있는 그대로 보려고 하는 의지가 일하고 있을 때뿐입니다.
부처님은 대념처경(Mahāsatipaṭṭhāna Sutta)에서 이와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자신의 마음으로 의식을 향하여 사띠를 가지고 마음을 관찰하라. 나를 빼고, 객관적으로, 마음의 흐름을 확인하라. 그리고 이 실천을 충분한 기간 계속한다면, 5온은 실체가 아니고, 연속하는 마음과 몸의 흐름이라고 하는 것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이제 현상을 실체라고 오해하는 것은 없어진다. 그리고 5온이 빠르게 연속해서 일어나고 사라지고 하는 것이 보여진다. 그리고 한 번 일어난 현상과 같은 현상은 두 번 다시 일어나지 않는다는 사실도 알아챈다. 또 5온은 일순간도 멈추는 일 없이 항상 계속 흐르고 있는 것이며, 실체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계속 완성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윤회 ◎
사람은 죽을 때 마음을 형성하는 4가지 모임, 즉 수·상·행·식은 죽기 전과 같이 중단되는 일 없이 생멸을 계속합니다. 그러나 이것들 4가지의 모임은 이제 지금의 몸 안에서 기능할 수가 없습니다. 몸이 망가져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4가지의 요소가 잘 기능하는데 적합한 새로운 몸을 곧바로 찾아내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때 업(kamma)이 법칙에 따라 일해서, 5온이 재편성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윤회입니다.
◎ 에너지의 모임 ◎
간략하게 말하면, 5온이 결합하는 것을 「탄생」, 5온이 하나로 정리되어 구성되어 있는 상태를 「생」, 5온이 분해하는 것을 「죽음」, 그리고 5온이 다시 결합하는 것을 「재생」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 범부들에게 있어서는 어떻게 해서 5온이 다시 결합하는지를 이해하는 것은 용이한 일이 아닙니다. 거기에는 5온의 각 요소의 성질, 마음의 에너지, 업의 법칙, 우주 에너지의 작용을 올바르게 이해해야 합니다.
죽음에 대한 다양한 생각이 있습니다. 「죽음은 단순한 자연의 사건의 한가지이며, 5가지의 요소가 분리하는 것이다. 분리한 뒤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즉 죽음으로 모든 것은 끝난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고, 「영혼이 하나의 몸으로부터 다른 몸으로 이동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또 다른 사람은 「영혼은 정해지지 않은 상태, 바꾸어 말하면, 마지막 심판의 날이 오는 것을 기다리고 있는 상태」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불교는 「죽음은 일시적인 현상 세계에 있어서의 일시적인 마지막에 지나지 않고, 이른바 「존재」가 완전하게 소멸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간주라고 있습니다.
◎ 죽음의 원인 ◎
불교에서는 죽음을 다음의 4가지 가운데 어느 쪽이든 하나가 원인이 되어 일어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① 개개의 생명이 가지고 있는 수명이 다한다(Āyukkhaya)
② 탄생을 가져온 업의 에너지가 다한다(Kammakkhaya)
③ 수명과 업 양쪽 모두가 동시에 다한다(Ubhayakkaya)
④ 외부의 영향, 즉 사고나 예기치 못한 사건(자연의 작용이나, 2가지에 들어맞지 않는 과거세의 업)에 의해 일어난다(Upaccedake)
죽음의 원인에 대한 좋은 비유가 있습니다. 양초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양초의 불길은 다음의 4가지 가운데 어느 쪽이든 1가지가 원인이 되어 사라집니다.
① 양초의 심지가 모두 불탄다. 이것은 수명이 다해 죽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② 양초의 납이 없어진다. 이것은 업이 다해 죽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③ 심지와 납이 동시에 없어진다. 이것은 수명과 업의 양쪽 모두가 다해 죽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④ 바람이 부는 등 외부의 요인에 의해 불이 꺼진다. 이것은 외부의 영향이 원인으로 죽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 사실을 마주 본다 ◎
죽음을 마주보기 위한 최선의 방법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미리 주의해서 준비해 두는 것입니다. 즉 「나는 죽는다, 조만간 반드시 죽는다.」라고 생각하는 일입니다. 죽음을 생각한다고 해도, 인생을 비관적으로 보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죽음은 현실에서 일어나고, 반드시 직면해야 하는 것입니다. 불교는 지혜의 가르침이기 때문에 사람이 좋아하고 싫어하고 와 관계없이, 사실을 마주보는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성자들은 「세상 사람들은 죽음을 무서워하고 있다. 하지만 나에게 있어서 죽음은 지복이다」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위대한 지혜가 있는 사람은 죽음을 무서워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의 죽음을 자각해서, 다른 사람의 행복을 위해서 전력해 왔습니다. 그들의 이름은 후대의 사람들에 의해서 역사에 제대로 새겨져 왔습니다.
◎ 죽음은 피할 수 없다 ◎
우리는 평소 뉴스 등으로 다른 생명의 죽음을 자주 보고 있는 것에도 불구하고, 어찌된 영문인지 자신도 똑같이 언젠가 반드시 죽는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모순입니다. 죽음은 확실히 옵니다. 그러나 우리는 생에 찰싹 집착하고 있기 때문에 죽음을 생각하는 것을 싫어하고, 가능한 한 죽음을 멀리하고 있습니다. 죽음은 어딘가 먼 앞의 사건이며 괴로워해야 할 것은 아니라고 자신을 속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죽음을 마주보는 용기를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엄연한 죽음이 방문했을 때, 거기에 직면할 수 있도록 준비해 두지 않으면 안 됩니다. 자신은 반드시 죽는다는 사실을 이해해서 마음의 준비를 갖추어 둔다면, 더구나 죽음을 무서운 사건이 아니라 자연의 사건으로서 받아들일 수가 있다면, 죽음이 방문했을 때 침착성과 용기와 자신을 가지고 죽음에 직면할 수가 있습니다.
◎ 의무와 책임 ◎
죽음은 언제 방문할지 모릅니다. 그래서 가족에 대한 의무나 책임을 침착하게 적극적으로 자신을 가지고 완수해야 합니다. 오늘 할 것은 내일로 미루지 않고, 시간을 능숙하게 이용해서, 인생을 가치 있게 보내지 않으면 안 됩니다. 살아 있는 동안에 아내나 남편, 아이에 대한 의무를 이루어 두는 것이 중요합니다. 유언장은 잊지 않고 써 두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남겨진 가족이 싸우거나 고민하거나 여러 가지 문제를 일으키는 것이 해결되기 때문입니다.
죽음은 모든 사람에게 평등하게 옵니다. 지위나 빈부, 나이에 의해 사람을 차별대우하지 않습니다. 죽음에 직면할 준비가 되어 있다면 이승에서 최후의 날을 맞이할 때 희망과 자신을 가지고 두려움 없이 죽음을 맞을 수 있습니다.
◎ 갈애와 무명 ◎
죽음은 넘을 수 있는 것입니까? 있습니다! 우리가 죽는 것은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태어나서는 죽고, 또 태어나서 죽는, 이 한없는 반복을 「윤회」(saṅsāra)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이 윤회를 끝내기 위해서는 무명(avijjā)과 갈애(taṇhā)를 끊지 않으면 안 됩니다. 무명과 갈애가 윤회의 근원이며, 멸진해야할 것입니다. 따라서 무명과 갈애를 멸진하면, 생을 넘어 죽음을 초월하고, 윤회를 초월해서, 열반(nibbāna)에 도달할 수가 있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무상이다」라는 진리를 이해할 수 있도록 노력하십시오. 존재는 단순한 환영에 지나지 않습니다. 과학적 혹은 철학적인 방법으로 모든 일을 분석해 조사해 보면, 최종적으로 「실체는 없다」라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죽음을 무서워하는 것은 닳아 떨어진 헌 옷을 버리고 가는 것을 무서워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것은 참기 어렵고 괴로운 것입니다. 그 원인은 집착에 있습니다. 부처님 당시에 위사-카-(Visākhā)라는 유명한 여성 재가자가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손녀가 죽어 버려서, 그 슬픔을 부처님께 들려주려고 승원을 방문했습니다. 부처님은 위사카에게 이와 같이 물었습니다.
「위사카여! 당신은 이 사-왓티-(Sāvatthī)의 마을에 있는 아이의 숫자와 같이 많은 자신의 아이나 손자를 갖고 싶으냐?」
「네, 가지고 싶습니다. 그만큼 많은 아이가 있으면 즐거운 일이지요」
「그러면 그 아이들이 죽을 때마다 당신은 울면서 슬퍼할 것이냐? 위사카여! 사랑하는 사람이 백 명 있는 사람에게는 백의 슬픔이 있다.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는 사람에게는 슬픔이 없고 슬픔으로부터 해방되고 있다」
사람에게 애착하면 이별이라고 하는 슬픔의 대상을 지불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생명에 대한 애착이 죽음의 공포를 낳고 있습니다. 우리는 비록 선한 일이라고 알고 있어도 과감하게 행동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사고를 당하거나 병이 들거나 해서 자신의 고귀한 생명이 없어지는 것은 아닐까 무서워하면서 나날들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은 반드시 죽는다고 하는 것을 이해한 사람이라도 자아 본능이 일해서 영혼이 천상에서 살아가기를 바랍니다. 이것은 다음 세상에 대한 강렬한 갈애로부터 생기는 것입니다.
죽음이라고 하는 자신의 운명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대통령이든 일반인이든, 부자이든 가난하든, 강한 사람이든 약한 사람이든, 이 육체의 마지막 장소는 관에 들어가 지하에 매장되든가, 구워져 납골 단지에 들어가든가, 바다나 산야에 흩어질 운명인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누구든 죽음에 직면해서 같은 결말을 맞이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생의 본질을 모르기 때문에 죽음이 방문했을 때 한탄하고 슬퍼합니다. 그러나 일단 생의 본질에 눈을 뜰 수가 있으면, 조립되고 완성되어 서 있는 모든 현상의 무상성을 볼 수가 있어서 해탈을 구하게 됩니다. 여러 가지 세속적인 속박으로부터 해방될 때까지는 몇번이고 죽음과 직면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죽음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합니다. 죽음이 참기 어렵고 싫은 것이라고 알아차리는 것에 의해서, 생과 죽음의 순환, 즉 윤회를 넘으려고 열심히 노력하게 됩니다.
◎ 죽음의 관찰 ◎
왜 죽음을 관찰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까? 무엇을 위해서 관찰하는 것입니까?
부처님은 사람들에게 「항상 죽음을 사유하여 관찰하라」고 권유했습니다. 그 이유는 「태어난 것은 반드시 죽는다.」로부터입니다. 수정했을 때에 나타난 마음과 몸은 차츰 발육해서, 성장하고, 성숙합니다. 이것은 바꾸어 말하면, 서서히 노화하고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이 때는 「성장한다.」라고 말하지만, 그 후는 「노화한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어떻게 말하든지, 결국은 피할 수 없는 죽음을 향해 진행되고 있는 하나의 과정에 지나지 않습니다.
어느 조사에 의하면 매일 평균 20만 명의 사람이 사망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 말은 매년 대략 7천만 명의 사람이 죽고 있다고 하는 것이 됩니다. 이만큼 많은 사람이 죽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죽음을 관찰하는 것이나, 받아들이는 것에 전혀 익숙해져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평상시 하고 있는 것은 죽음을 피해서, 자신은 결코 죽지 않는 것처럼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죽음을 무서워하는 한, 가치가 있는 충실한 인생을 보낼 수 없습니다.
따라서 죽음을 관찰하는 첫 번째의 이유는 「공포를 넘는 것」입니다. 결코 마음을 우울하게 하고 절망시키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관찰하는 것에 의해 공포로부터 해방됩니다.
두 번째의 이유는 「인생에 대한 견해나 태도가 바뀐다.」라는 것입니다. 나는 절대로 죽지 않는다고 하는 믿음을 그만두면, 인생에 대한 가치관이 근본으로부터 전환되어, 지금까지와는 완전히 다른 인생을 살기 시작합니다.
세 번째의 이유는 「올바르고 온화한 방법으로 죽음에 접근하여, 그것과 마주보는 능력을 기르는 것」입니다.
죽음의 관찰에는 3가지의 가치가 있습니다.
◎ 공포가 제거된다.
◎ 인생에 새로운 가치관을 가져와, 올바른 가치관을 가지고 살 수가 있다.
◎ 존엄을 가지고 죽을 수가 있다.
죽음을 관찰하는 것에 의해, 가치가 있는 인생을 보내고, 평온한 죽음을 맞이할 수가 있습니다. 더 이상 그 밖에 필요한 일이 있을까요?
불교에서는 다음의 관찰을 권하고 있습니다.
◎ 나는 계속하여 늙음에 쫓기고 있다. 이 늙음을 피할 수는 없다.
◎ 나는 계속하여 병듦에 쫓기고 있다. 이 병듦을 피할 수는 없다.
◎ 나는 계속하여 죽음에 쫓기고 있다. 이 죽음을 피할 수는 없다.
◎ 나는 나의 소유물과 사랑하는 이들을 모두 남겨두고 떠나가야만 한다.
◎ 나는 업에 지배되고 있다. 업(행위)의 결과를 피할 수는 없다.
이상의 진실을 침착한 마음으로 관찰해서 의식한다면, 노·병·사, 이별에 대한 공포를 넘을 수가 있습니다. 관찰의 목적은 우리를 우울하게 시키기 위해서도, 죽고 싶다고 하는 허무적인 마음을 만들기 위해서도 아닙니다. 무서워하는 일 없이 인생을 살아가고, 무서워하는 일 없이 죽음을 맞이하기 위해서입니다.
◎ 죽음은 생의 일부 ◎
죽음은 존재의 일부이며, 모든 생명에 방문하는 것입니다. 젊을 때에 죽는 사람도 있고, 연로해서 죽는 사람도 있습니다. 언제 올지는 모르지만, 모든 사람은 틀림없게 죽습니다. 초대되지 않았는데 이 세상으로 태어나고, 허락받지 않았는데 죽음으로 떠납니다. 자신도, 다른 사람도, 동물도, 식물도, 모든 형성된 것, 모든 생명은 반드시 죽습니다. 겨울이 가까워지면, 잎은 시들어 나무로부터 떨어집니다. 그러나 그것을 보고 한탄하며 슬퍼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자연의 법칙이라고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생명도 이렇게 저물어 가는 잎과 같은 것입니다.
종교적인 사람은 물질주의적인 사람보다 대체로 죽음을 대하는 공포가 적습니다. 왜냐하면 물질주의자는 이승에 있어서 오감을 즐겁게 하는 것밖에 관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불교의 관점으로부터 보면, 죽음은「이승의 마지막」이라고 하는 것만은 아닙니다. 「다음생의 시작」이라도 합니다. 한편 재생은 「다음생의 시작」이며, 또 「이승의 마지막」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승의 죽음」이라고 하는 것은 생·사·재생·죽음·재생·죽음……이 반복되어지는 전체의 과정 안의 아주 일부분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 멈춤 없는 과정을 이해할 수가 있으면, 죽음을 대하는 공포는 줄어들어 갑니다. 죽음은 존재의 마지막이 아니라, 하나의 사이클의 마지막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하나의 사이클이 끝난 순간, 다음의 사이클이 새롭게 회전하기 시작합니다. 잎은 나무로부터 떨어지지만, 마지막이 아닙니다. 잎은 흙이 되어, 영양분이 되고, 다음 해에는 그 나무로부터 새잎이 싹틉니다. 인생도 같습니다. 죽음의 순간이 재생인 것입니다. 이 기본적인 법칙을 이해할 수가 있으면, 죽음의 공포로부터 해방됩니다.
◎ 눈을 뜨고 산다. ◎
우리는 시간을 얼마나 낭비하고 있는가 하는 것을 아무도 생각하지 않고, 많은 일로 마음이 사로잡혀 나날들을 보내고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조차도 분명히 눈을 뜨고 살지 않는데, 내년의 일이나 20년 앞, 미래의 일을 고민해서, 오늘이라고 하는 하루를 얼마나 쓸데없게 보내고 있습니까?
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무엇을 위해서 살아 있는 것입니까? 무엇으로 인생을 만들고 있는 것입니까? 진지하게 죽음을 관찰하면, 인생에 대한 가치관을 다시 볼 수가 있습니다. 아무리 돈을 가지고 있어도 의미가 없습니다. 죽을 때는 모두 두고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귀여워해 온 우리 몸조차 두고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시체는 단순한 쓰레기가 되어, 유족이 어떠한 방법으로든 그것을 처분합니다.
그래서 중요한 일은 어떻게 사는가 하는 삶의 방법이며, 많은 재산을 얻는 것이 아닙니다. 삶의 방법이 좋은 것이 될지 나쁜 것이 될지는 마음의 질의 문제입니다. 오늘 하루를 보다 좋게 사는 것이 다른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생명은 모두 죽음과 마음의 질을 조건으로 다음의 생으로 재생합니다. 가지고 가는 것은 마음의 질 뿐입니다. 마음의 질만이 이 세상에 남기지 않고 다음의 생에 상속하는 유일한 것인 것입니다.
생명은 업을 소유하고,
업을 상속하고, 업으로부터 태어나고,
업의 굴레로부터 벗어날 수 없고, 업에 따라 살아간다.
내가 짓는 행위에 따라 선악의 업을 만들어, 그것을 상속한다.
다음의 생에 재생하는 것은 업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내면의 성질, 마음의 질, 정신의 질, 선악의 질뿐입니다. 상속하는 것은 이것만입니다. 이러한 것이 다음의 생의 행선지를 결정해서, 미래를 만드는 조건이 되고, 잇달아 일어나는 「생」에 새로운 가치를 가져옵니다. 우리는 돈을 벌어서 그 돈으로 다양한 일을 즐길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중요한 일은 보다 평온하게 살아 도덕성을 기르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신의 인생이나 가치관에 몹시 좋은 결과를 가져옵니다. 단지 사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사는지가 중요합니다.
◎ 평온한 죽음을 맞이한다. ◎
지금까지 이야기해 온 것을 잘 생각해서 죽음을 무서워할 것이 아니라, 현실에서 일어나는 사건으로 납득할 수가 있으면, 확신을 가지고 죽음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그만큼이라도 평온한 죽음을 맞이하기 위해서 준비해 둘 필요는 있습니다. 올바르게 살아 온 사람은 평온한 죽음을 맞이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올바르게 살아오지 않은 사람이라도 지금부터 힘껏 노력하면 좋습니다. 즉 죽음을 관찰해서, 「무서워하지 않는다.」라는 좋은 성질을 마음에 기릅니다.
죽음이 가까워져 오면 많은 사람은 육체의 고통이나 친한 사람들과의 이별에 공포를 느낍니다. 이러할 때는 주위 사람들이 죽어가는 사람의 공포를 부드럽게 하고, 안심시켜 주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시중들고 있는 당신 자신이 침착하고 있을 필요가 있습니다. 육체의 아픔은 격렬하고 참기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 현대 의학의 진보에 의해 육체의 고통을 진정시키는 것이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아픔은 압도적인 공포의 대상은 아니게 되었습니다.
죽음과 직면하고 있는 사람, 예를 들어 암 등의 말기 상태에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우선 안도감을 주도록 하여야 합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육체 이외의 정신적인 고통을 맛보지 않고 끝나고, 또는 적절한 치료를 받아 육체의 고통을 부드럽게 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안도감을 주는 것은 환자가 편안하게 하여 온화한 죽음을 맞이하기 위해서 중요한 일입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이라고 하는 공포도 있습니다. 건강한 때에 「만나는 것은 헤어지는 것」이라고 하는 관찰을 하고 있으면, 그만큼 공포를 느낄 것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관찰을 하지 않은 사람에 대해서는 주위 사람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아이나 가족의 일은 걱정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친척이나 친구가 잘 보살펴 주기 때문이라고 죽어가는 사람을 안심시켜, 편안하고 온화한 마음을 만들어 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중요한 것은 죽어가는 사람이 보다 온화한 마음이 되도록 격려해 주는 것입니다. 불교에서는 죽어가는 사람의 방을 온화한 분위기로 유지하는 것을 권하고 있습니다. 머리맡에서 외치거나 울며 아우성치거나 한탄하고 슬퍼해도 전혀 의미가 없습니다. 이러한 것은 죽음이라고 하는 중대사를 맞이하려 하고 있는 사람에 대해서 온화하게 죽는 것을 방해하고 있을 뿐입니다. 수명이 다하려 하고 있는 이 소중한 시기에는 친척이나 친구들이 곁에 모여, 배려와 자애를 가지고, 무엇인가 도움이 되는 것을 해 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죽음에 직면하고 있을 때 종교적인 상징은 매우 도움이 됩니다. 죽어가는 사람이 불교도라면 작은 불상을 보여 주거나, 할 수 있다면 승려를 집에 불러 마음의 동요를 달래는 법문이나 경을 독송해 주는 것이 몹시 유효합니다. 그러면 큰 평온함과 존엄을 가지고 죽을 수가 있습니다. 이와 같이 가능한 한 최선의 상황 속에서 새로운 생으로 재생할 수 있는 것은 훌륭한 일입니다.
◎ 인생을 쓸데없게 하지 말자 ◎
누구나 모두 자신의 인생의 의무와 책임을 내려놓은 뒤에 온화한 죽음을 맞이하는 것을 바라고 있습니다. 그러나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음을 갖추고 있을까요? 얼마의 사람이 가족이나 친구, 종교, 자신의 인생에 대한 책임을 이루고 있을까요? 이러한 책임을 이루지 못하면 온화하게 죽음을 맞이하는 것은 어려울 것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죽음의 공포를 넘는 것을 배우지 않으면 안 됩니다. 신들도 죽음에 지배당하고 있기에 신들을 의지할 수는 없습니다. 쓸데없는 일로 마음이 사로잡혀 시간을 무의미하게 보내고 있으면, 임종이 가까워졌을 때 후회의 생각에 습격당하게 됩니다.
인생은 멈춤 없이 계속 흐르고 있는 강물의 한 방울(사람 물방울)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것을 이해하는 사람은 윤회라는 큰 강의 아주 일부분이라도 공헌하려고 마음을 움직입니다. 현자는 알고 있습니다. 산다고 하는 것은 악을 피해 선을 행하고, 마음을 맑고 깨끗하게 하여, 해탈하기 위해서 노력해야 한다고 하는 것을.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산다고 하는 것을 이해한 사람은 죽음을 고민하는 일이 없습니다. 죽음이 괴로움을 가져오는 것은 아닙니다. 살아 있는 동안에 자신을 위해서나 세상을 위해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괴로움을 가져옵니다.
◎ 오늘 나는 죽는다. ◎
유명한 서양의 불교 학자 데이비드 모리스(David Morris)는 85세에 돌아가셨습니다. 그가 죽은 직후에 남긴 글에 이러한 것이 써져 있었습니다.
「오늘 내가 죽는다고 하는 것을 알고 안심이 됩니다. 이것에는 2가지의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는 내가 간신히 병의 괴로움으로부터 해방되었다고 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나는 불교도가 되어 5가지 계율을 철저하게 지켰기 때문에 다음 세상은 괴로움의 차원에 떨어지는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삶은 꿈과 같이 덧없고, 죽음은 실재 방문하며, 재생은 자연스럽게 일어납니다.
죽음을 관찰해서, 죽음을 준비해 두면, 윤회를 건널 수 있습니다.
괴로움을 없애고, 윤회를 넘는 것, 이것이 인간의 지혜인 것입니다.
사-두(Sādhu)! 사-두(Sādhu)! 사-두(Sādh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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