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문과경2. 뽀야데이(poya day) 법문 (20080519)
저번 시간에는, 어떤 경우든지 보름은 지켜집니다. 각각의 나라에서는. 그 이유가 뭐냐 하면 토끼의 비유를 들어서 얘기를 해놨습니다. 보름날 가장 수행하기가 좋고 또 반대로 가장 놀기가 좋은 날입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수행하고 부처님 가르침을 공부할 수 있는 그런 날로 자꾸 잡아야 됩니다.
오늘 사문과경 두 번째를 하겠습니다.
사문과경은 구조가 어떻게 되느냐 하면 아자따삿뚜 왕이 보름날 누구에게 가서 가르침을 들었으면 좋겠나 하고 대신들에게 물어봅니다. 물어봤을 때 각각의 대신들이 누가 좋다 누가 좋다 하고 얘기들을 하는 것이 첫 번째 구절로써 되어있습니다.
부처님한테 가기까지의 과정이 이렇게 나와 있고, 그러고 나서 두 번째가 뭐냐 하면 부처님한테 찾아가서 여러 가지를 물어봅니다. 그때 인도 당시의 가장 유명한 사상가들 여섯 분을 얘기를 하면서 부처님이 거기에 대해서 자세하게 설명을 합니다. 일반적으로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는 사상들도 여기에 거의 다 포함이 됩니다.
그 부분이 두 번째 부분으로 들어가지고, 세 번째 부분은 뭐냐 하면 그렇게 부처님 가르침을 듣고, 아자따삿뚜 왕은 여러분들도 알다시피 자기 아버지를 죽인 사람입니다. 직접 죽인 것은 아니지마는 옥에 가둬가지고 굶겨가지고 그렇게 죽이죠? 빔비사라 왕을.
그랬는데 그전까지만 해도 불교하고는 관계없이 살았는데 인제 불교도가 돼가지고 부처님을 호위하는 그런 사람이 됩니다. 그런데 대부분 경전에 이렇게 자세하게 설명을 했으면 대부분 보면 수다원-예류과에 이릅니다. 법의 눈을 뜬다 해서 법안을 여는 경우가 되는데, 이 아자따삿뚜 왕은 결국 그걸 못합니다. 그 이유가 뭐냐 하면 지은 죄 때문에, 아버지를 죽인 죄 때문에. 불교에서는 큰 죄들이 몇 개가 되죠? 도저히 돌이킬 수 없는 죄들입니다. 어머니를 죽이고 아버지를 죽이고 또 상가를 파괴할려고 그러고, 그리고 부처님의 몸에 해코지를 할려고 그러고, 이런 것들은 돌이킬 수 없는 죄다 하고 얘기합니다.
(육중죄(六重罪) : 부친 살해, 모친 살해, 아라한 살해, 붓다의 신체에 상처를 내어서 피를 흘리게 하는 행위, 상가의 화합을 어지럽혀 분열시키는 행위, 그리고 불법(佛法)을 비방하는 행위.)
어쨌든 아자따삿뚜 왕이 대신들에게 물어봅니다. 오늘 보름인데 누구에게 가서 가르침을 들으면 좋겠나 하고 물어보니까 여러 선인들을 얘기합니다. 그때 얘기하던 여섯 명의 종교사상가들을 얘기합니다. (뿌라나 깟사빠), 막깔리 고살라를 비롯해가지고 아지따 선인, 그다음에 빠꾸다, 산자야, 니간타 이런 여섯 분을 얘기를 합니다.
불교에서는 그것을 육사외도(六師外道)라고 그렇게 얘기를 하죠! 그런데 불교에서 봤을 때는 외도(外道)인데 실제적으로 인도에서는 가장 큰 사상가들이었습니다. 인도 당시 때는 바라문교가 거의 쇠망하는 그런 때였습니다. 바라문교가 일신신앙이거든요. 브라흐마 라고 하는 신이 모든 세상을 창조하고 유지하고 파괴한다는 이런 사상입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까 그게 아니거든. 그래서 바뀌어진 게 뭐냐 하면 지금 인도에서 유행하고 있는 힌두교입니다. 삼신신앙이죠. 시바, 비쉬누, 브라흐마라 해가지고 삼신 사상으로 바뀌어 나갑니다. 그런데 그 결정적인 계기가 됐던 게 뭐냐 하면 이런 신흥종교 사상가들입니다. 그중에 인제 부처님도 포함이 돼있습니다.
그러니까 불교에서 말할 때 육사외도다 해서 외도다 하고 터부시하기에는 너무 큰 영향을 가져오셨던 분들이라는 겁니다. 실제적으로 보면 니간타 같은 경우에는 지금 인도의 자이나교의 교주입니다. 나머지 다섯 사상가들의 경우에는 지금 현재에는 종교도 없고 그런 사상들이 남아있지도 않는데 어쨌든 그때 당시에는 굉장하게 영향을 미쳤던 사상가들입니다.
그래서 그걸 빨리어에서는 뭐라고 얘기하느냐면 '사-두 삼마따(sādhu sammata)' 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보통 보면 성인으로서, 선인으로서 우러러볼 수 있는 사람들이다 하고 얘기를 합니다. 그런 거기 때문에 육사외도라고 별칭으로 간단하게 터부시해버릴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이 아자따삿뚜 왕이 부처님한테 갔을 때 처음 여러 사상들에 대한 얘기들을 부처님이 꺼냅니다. 이 여섯 사상들의 좋고 나쁜 것들을 알아야 내가 바르게 판단할 수 있다 하는 겁니다. 좋은 것은 받아들여야 되는 거고, 또 틀린 것들은 틀렸다고 얘기를 할 수 있어야 된다 하는 겁니다.
인도에도 마찬가지로 이런 바라문교가 새로운 사상들로 인해서 혁명을 일으켜서 새로운 종교가 또 튀어나오기도 하고, 기독교도 마찬가지죠? 유대교가 예수교로 인해가지고 사실은 또 탈바꿈이 됩니다. 지금도 예수교도 있고 유대교도 있지만, 그리고 마찬가지로 세계사상에도 여러 가지 마르크스나 이런 분들이 있으면서 새로운 사상들이 일어나서 세계의 양대 사상으로 또 나눠지고, 또 하나의 사상은 없어졌다고 하더라도 그 영향을 완전히 버릴 수는 없는 실정이라는 겁니다. 그 정도로 인도에서는 굉장히 영향을 미쳤던 그런 겁니다.
그래서 대신들에게 왕이 물어봅니다. 왕이 누굴 만나면 좋겠냐 하고 물어보니까 누구는 막깔리 꼬살라가 최고다 하고 얘기하고, 누구는 또 누가 최고다 하고 얘기를 합니다. 그런데 다들 최고다 하고 얘기를 하는데, 뭣 때문에 최고냐 하고 얘기를 하는 것이 뭐라고 하느냐면 가장 그래도 사람들의 존경을 받고 있고, 또 가장 사람들도 많이 모이고, 또 그 사상가가 덕망이 있고, 그래서 그분에게 가서 오늘 보름날에 설법을 듣도록 하자 하고 그렇게 얘기들을 합니다. 한결같이 그렇게 얘기들을 하는 거라.
그런데 아자따삿뚜 왕이 어릴 때부터 같이 지냈던 자기의 친구인 의사 지와까는 아무 얘기도 안 하고 있거든. 지와까한테 물어봅니다. 당신은 어떻게 누구에게 갔으면 좋겠느냐? 하고 얘기를 합니다. 그때 지와까가 그럽니다. "부처님한테 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고 얘기합니다. '부처님한테 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는 것이 아니고 여러분들이 알고 있는 열 가지 명호를 얘기합니다.
"아라항, 삼마삼붓도, 윗자 짜라나 삼빤노, 수가또, 로까위두,
아눗따로 뿌리사 담마사라티, 삿타 데와 마눗사낭, 붓도, 바가와."
arahaṁ, sammāsambuddho, vijjācaraṇasampanno, sugato, lokavidū,
anuttaro purisadammasārathi, satthā devamanussānaṁ, buddho, bhagavā.
이렇게 우리말로 할 거 같으면 "여래 응공 정변지 명행족 선서 세간해 무상사 조어장부 천인사 불세존" 이렇게 얘기합니다. "그런 덕을 갖춘 분이 있습니다." 그렇게 얘기하거든.
다른 사람들은 연세도 지긋하게 들고, 사람들도 많이 따르고, 명성이 있으니까 거기 가자 하고 얘기를 하는데, 의사 지와까는 뭐라고 하느냐면 요런요런 열 가지 덕을 갖춘 분이 있습니다. 이분에게 갑시다. 이분이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지 존경을 받는지 이런 얘기를 일체 안 합니다. "이런 열 가지 명호를 가진 분이 있으니까 가자" 그럽니다. 인도 당시에는 함부로 이 명호를 쓸 수가 없었습니다. 그마만큼 조심스러운 단어가 뭐냐 하면 여러분들이 알고 있는 여래십호(如來十號)라고 하는 것들이라는 거라.
그런데 참 부처님이라는 분은 어떻게 보면 여러분들이 생각하는 만큼 모든 사람들을 다 포용하고 있는 그런 분은 아닙니다. 다른 종교가들은 어떻게 하느냐면 와서 뭐라뭐라 해도 "그래 그것도 맞다" 또 요쪽에서 뭐라뭐라 해도 "그래 그것도 맞다" 다 이렇게 포용하는 입장입니다. 그런데 부처님 같은 경우에는 틀린 말 하면 "그건 틀렸다" 그러고, 맞는 얘기하면 "그건 맞다" 하고 얘기합니다. 그러니까 자기가 그게 맞다고 생각하고 그런 견해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부처님한테 물어봐가지고 자기 견해가 틀렸다고 할 것 같으면 어떻게 돼요? 대부분 사람들은 보면 '아, 내가 틀렸는갑다' 하고 고칠려고 안 하고, '지가 뭔데 내보고 틀렸다 하느냐'고 해버리는 거라. 그러니까 대부분 사람들은 그렇게 해서 와가지고는 실망해서 가버리는 사람들도 많이 생긴다는 거라.
일반인에게도 이러는데 출가한 스님들한테는 부처님은 더 엄격합니다. 더 엄격하게 하는 거라. 게으름 피우고 있으면 게으름피우고 있다고 더 노력하라고 그러고, 너 왜 이렇게 하느냐, 이럴려고 출가했느냐 하고 따끔하게 나무라거든. 그러면서 저녁마다 법문을 하고 수행을 어떻게 하느냐 하는 것을 문답을 하고 이런 식으로 합니다. 그러니까 공부 안 하면 쉽게 말하면 부처님 있는데 옆에 있을 수가 없는 거라.
그런데도 부처님은 1,250명이나 되는 많은 출가제자들이 부처님 옆에 있는 거라. 다른 종교사상가들, 육사외도라 하는 분들은 따르는 무리들은 많이 있을지 몰라도 그렇게 부처님하고 똑같이 출가해갖고 가는 사람은 거의 없다는 거라. 쉽게 말하면 오늘 여기서 법회 한다 그러면 사람들이 구름같이 모여든다는 거라. 몇천 명이 모인다는 거라. 끝나고 나면 호로로로 다 가버리는 거라.
그런데 부처님 같은 경우에는 이미 1,250명이나 되는 스님들이 똑같이 부처님과 같이 생활하고 부처님과 같이 수행하고 있는 거라. 그러니까 재가신자들은 겨우 스님들 공양할 때나 와서 공양올리고 법문 듣고 가기도 하고 이러거든. 그러니까 실제적으로는 재가인들은 부처님한테 그렇게 많이 오지를 않는 거라.
그런데 또 이 열 가지 명호(如來十號)를 쓰게 되는 거라.
왜 그렇게 열 가지 명호를 쓰냐면 대부분 보면 아라항(arahaṁ)이라는 명호를 썼다 그러면 종교사상가들은 누구도 아라항이라는, "내가 아라한이다" 하고 얘기를 하는 사람이 없었거든. 그런데 부처님은 당당하게 "나는 아라한이다!" "나는 조어장부다!" "나는 천인사다!" "나는 깨달았다!" 하고 당당하게 얘기를 하시는 거라.
그러니까 아자따삿뚜 왕의 입장에서는 이 열 가지 명호를 탁 듣는 순간 그냥 섬찟한 거라. 이렇게 거창하게 열 가지를 나열해갖고 할 수 있는 분이 어디에 있느냐 하는 거라.
인도 같은 경우에는 사상가들은 굉장히 정직합니다. 지금 다른 나라에 있는 사상가들하고는 비교가 안 됩니다. 우리나라 같은 경우는 예를 들면 자기가 안 깨달아도 나 깨달았다 하고 얘기를 하는 사람들이 출가자도 있고 재가자도 있고 그렇습니다. 나중에 보면 순 가짜들이 거의 백프로 될 겁니다. 깨달은 사람은 깨달았다고 할 수가 없습니다. 수행 중인 사람들은.
수행을 완전하게 완성했을 경우에 당당하게 "나는 깨달았다" 하고 얘기를 하는 것이지 그렇지 않으면 그렇게 얘기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뿐 아니라 다른 나라도 마찬가집니다. 이렇게 거짓으로 하는 경우들이 많이 있는데, 인도 같은 경우에는 거의 그런 것이 없습니다. 자기가 있는 현실만큼만 얘기합니다. 그래서 누군가가 와서 당신은 아라한입니까 얘기하면 아라한이 아니다 라는 소리는 안 하더라도 침묵을 해버립니다. 그런데 부처님한테 누가 와서 "당신 아라한입니까?" 하면 "나는 아라한이다." 하고 얘기합니다.
이러는 거라. 그러니까 이 열 가지 명호를 쓰는 것들을 이 왕이 듣고 굉장히 놀래게 됩니다. 단순히 그냥 사람들이 많이 모이고 명성이 있고 이런 것들로 인해서 유명한 것들이 아니라 진짜 그러면 이분이 뭔가 하는 것들을 한번 가서 얘기를 들어보자 하는 마음을 일으키게 됩니다.
그때 이 지와까가 얘기한 게 뭐냐 하면 먼저 아라한, "아라한이 있습니다."하고 얘기합니다.
'아라한(arahaṁ)'은 뭡니까? 보통 우리 한글로는 '응공(應供)' 그렇게 얘기하죠. 이 아라한(arahaṁ)이라는 것은 뭐냐 하면 수행, 인도에서는 명상이라고 그렇게 하죠. 명상의 상태를 나타내는 그런 단어입니다. 이 사람이 명상 수행해서 얼마만큼 경지에 이르렀는가 하는 걸 나타내는 단어입니다.
그런 명상수행을 완성해버린 사람에 한해서 아라한이라고 칭하게 됩니다. 그 외에는 아라한이라고 칭할 수가 없는 거라. 그러니까 내가 만약에 완성을 못했다 할 거 같으면 아라한이라고 얘기를 못하는 거라. 다른 종교사상가들은 이 아라한이라고 얘길 못한다는 거라. 지금도 마찬가지로 인도에 여러 사상가들이 많이 있습니다. 라즈니쉬나 여러 사상가들 많이 있죠? 그런데 그분들한테 당신 아라한입니까? 하고 물어보면 아라한이라고 얘기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거라. 사실 그렇게 인도 사상가들은 정직하다는 겁니다.
그래서 아라한이라는 거라. 종교인들은 대부분 보면 먹기 위해서나 아니면 유명해지기 위해서 이런 용어들을 쓰기도 합니다. 그런데 아라한이라는 것은 그런 용어하고는 관계가 없는 거라. 수행의 진척상황에 따라서 붙여주는 용어다 하는 거라. 그러니까 부처님은 당연히 수행을 완성했으니까, 그러니까 아라한이라고 얘기한다는 거라. 부처님 자체가 스스로 아라한이라고 얘길 하는 거라. 완전하게 내가 깨달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도 부처님을 옆에서 쭉 모셔보니까 완전하게 아라한이 되셨으니까 아라한이다 하고 얘기하는 거라.
그다음에 있는 게 뭡니까? '삼마삼붓도(sammāsambuddho)'. 보통 우리말로는 '정변지(正徧知)'라고 그러죠. 그러니까 정각자라는 뜻입니다. '스스로 완전하게 깨달음을 이루신 분이다' 하는 뜻입니다. 누구의 도움 없이 스스로 노력해가지고 완전하게 깨달음에 이르렀다 하는 겁니다. 수행은 스스로의 노력으로 깨닫는 겁니다. 누가 물가 데려간다고 해가지고 물 먹여 줄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거라. 물 먹는 것은 자기가 먹는 거라. 그래서 그걸 처음에 최초로 스스로 노력해서 깨달았다 해서 우리나라에서는 그걸 독각이라 그러죠? 독각이 사실은 부처님을 얘기하는 겁니다.
그런데 우리는 독각이라 해가지고 저 아래에 있는 것처럼 얘기하는데 절대 그게 아닙니다이. 독각자라고 하는 것은 이 삼마삼붓다를 얘기하는 겁니다. 부처님을 비유했을 때 부처님은 누구의 도움도 없이 스스로의 노력으로 인해서 깨달음을 이루신 분입니다. 그 부처님을 칭할 때는 독각자가 되는 겁니다. 그런 의미이기 때문에 독각자가 그렇게 폄하할 수 있는 그런 단어는 아닙니다. 그래서 완전하게 스스로의 노력으로 깨달음을 이루신 분이라 해서 삼마삼붓다라 합니다. 정변지라고 합니다.
그다음에 뭡니까? '윗자짜라나삼빤노(vijjācaraṇasampanno)', '명행족(明行足)'이라고 그러죠? 명행은 뭘 얘기합니까? 지혜와 덕행이라고 그러죠! '지혜와 덕행을 구족하신 분이다' 그렇게 얘기합니다.
행(行)이라고 하는 것은 여기서는 덕행을 얘기하는 것보다는 보통 보면 '행위나 성격'을 얘기합니다. 여러분 주변에도 그런 분들 많습니다. 머리는 디게 좋은데 성격은 아주 괴팍한 사람들도 있고, 성격은 참 좋은데 이 머리가 안 돌아가가지고 고생하는 사람들도 있고, 두 가지를 다 갖춘다는 게 참 힘든 상황이라는 거라. 그런데 부처님은 명행족이라. 두 가지를 완전하게 갖췄다는 거라.
부처님은 몸에 익히고 있는 성격이라는 뜻의 행이라고 하는 일반적으로 붙이는 그런 것보다는, 여기서 윗자짜라나삼빤노 할 때의 행(行)이라고 하는 것은 '명상의 힘'을 얘기합니다. 수행의 힘. 수행의 힘으로써 이미 달인의 경지에 이른 정신적인 능력을 완전하게 가지고 있는 분이라는 겁니다. 수행을 완성했다는 뜻으로써 행입니다. 그래서 모든 행위가 완전하다. 말을 하는 것도 완전하고, 몸으로 행하는 것도 완전하고, 생각하는 것도 완전하고, 그렇게 완전하다는 거라. 그렇게 되니까 성격도 완전한 인간으로 되는 거라.
그렇게 완전하기 때문에 따라오는 것이 뭐냐 하면 명(明), 지혜라는 거라. 왜 명하고 행하고를 붙여놨냐 하면 그런 의밉니다. 그래서 '윗자짜라나'하고 떼고 '삼빤노'하고 하는 게 아니라 '윗자짜라나삼빤노'를 붙여서 얘기하고, 명행족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래서 행위, 성격이 완전하게 갖춰지면 지혜는 따라오게끔 됩니다. 그러니까 두 가지 중에서 먼저 실천해야 되는 거는 뭐를 먼저 실천해야 돼요? 지혜롭길 바라서는 안 되는 거라. 지혜롭기를 바랄 거 같으면 성격은 지혜로운 것에 잘 따라와지지를 않습니다. 성격을 자꾸 바꾸고 몸과 마음을 자꾸 내가 좋은 일 할려고 그러고, 나쁜 일 안 할려고 자꾸 만들다 보면 지혜로운 건 저절로 따라와진다는 거라.
그다음에 있는 게 '수가또(sugato)' 라고 하는 것, 수가따 보통 한글로는 '선서(善逝)' 그렇게 얘기합니다. '올바르게 갔다' 하는 뜻입니다. '수가따' 할 때 '가따' 라고 하는 것이 '행하다' 하는 그런 뜻인데 보통 이걸 갖다가 한국에서는 뭐라고 그러냐면 잘 오셨다가 잘 가신 분 이렇게 풀이합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에 잘 오셨다가 잘 돌아가신 분' 이렇게 얘기하기도 합니다. 그것은 본뜻은 아닙니다.
수가따 할 때의 '가따'라고 하는 것은 '수행을 완전하게 졸업해버렸다. 졸업해서 그쪽으로 건너가버렸다' 하는 그런 뜻입니다. 죽음을 의미하는 게 아닙니다. 그런데 그걸 자꾸 한국 스님들이 잘못 오역을 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그렇지는 않고, 일반적으로 여러분들이 이해를 할 때는 '자신의 일을 완성해버렸다' 하는 그런 뜻으로, 그걸 한글로는 선서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다음에 '로까위두(lokavidū)' 그렇게 얘기합니다. 한글로는 '세간해(世間解)'라고 해서 '세상일을 완전하게 이해했다' 하는 그런 뜻입니다. 세상이라고 하는 것은 '살아있는 생명'입니다. 그러니까 생명을 가지고 있는 것들, '생명의 문제를 완전하게 풀어버렸다' 하는 그런 뜻입니다. 보통 여러분들은 나는 누군고? 나는 왜 사는가? 보통 생의 의문들을 많이 가지죠. 그걸 근본적인 의문이라 그럽니다. 안 그러면 생에 대해서 없을 거 같으면 내가 죽으면 어떻게 될까? 갖가지 이런 것들을 얘기합니다. 그런데 부처님은 그걸 풀어버렸다는 거라. 내가 누군가 하는 것도 알고, 내가 죽고 나면 어떻게 되는 것인가 하는 것도 알고, 내가 왜 태어났는가 이런 문제들을 완전하게 해결해버렸다 하는 거라. 그걸 완전하게 이해해버렸다 하는 그런 뜻입니다.
신이 이 세상을 창조했다고 하는 종교에서는 죽으면 뭐라 그럽니까? 천국에 간다고 그럽니다. 그래서 보통 생에 대해서 의문을 가지는 사람들은 죽으면 어떻게 될까 하는 걸 신이 분명하게 죽으면 천국에 간다, 지옥에 간다 하고 얘기했으니까 그걸 그냥 믿어버린다는 거라. 그런 사람들은 죽음 이후에 의문이 없죠!
그런데 이런 것들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고, 부처님은 그런 것들을 뛰어넘어버려서 그런 것들을 완전하게 해결했다는 거라. 누가 죽고 나서 신이라고 하는 것이 있는 종교에서 죽고 나면 천당에 간다 하더라도 내가 확인하기 전에는 천당에 간다고 얘길 안 하는 거라. 끊임없이 내가 의문을 가지고 내가 확인해보니까 아, 천당에 가는구나 알게 되는 거고, 지옥에 가는구나 알게 되는 거라. 이런 것들을 완전하게 해결해버렸다 하는 거라. 생에서 가져야 될 의문들, 문제들을 완전하게 풀어버렸다 하는 그런 의미입니다. 그걸 세간해, '세상의 모든 일을 안다. 살아있을 때의 모든 일들을 알고 있을 뿐 아니라 죽고 나서의 모든 일들도 알기 때문에 세간해'라고 얘기합니다.
그다음에 뭡니까? '아눗따로 뿌리사담마사라티(anuttaro purisadammasārathi)' 그럽니다. 보통 한글로는 '무상사조어장부(無上士調御丈夫)'라고 그럽니다. 보통 무상사 하면 '위없는 스승' 그렇게 하죠! 조어장부 할 거 같으면 '나를 훈련시키는데 뛰어난 조련사' 그렇게 한글로 얘기합니다. 그런데 이 두 개는 절대 분리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빨리어에서도 '아눗따로' 하고 나서 '뿌리사' 하고 떼지 않고 '뿌리사담마사라티' 하고 바로 붙여버립니다. 무상사와 조어장부는 하나입니다. 그래서 사실은 여래의 여래십호(如來十號)는 있을 수가 있는데, 여래의 덕이 열 가지다 하고 얘기를 안 합니다. 여래의 덕은 아홉가집니다. 그래서 '여래구덕(如來九德)'이라고 그럽니다.
담마는 몇 덕이라고 합니까? 상가는 몇 덕이라고 합니까? 거기에 나와 있죠! 그런데 여래는 구덕이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왜 구덕(九德)이라고 그러느냐, 이 무상사하고 조어장부가 하나로써 묶여져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어떤 의미냐 하면 우리가 잘하는 것도 있고 잘못하는 것도 있다는 거라. 그런데 '잘못하는 걸 잘하는 것으로 잘 단련시켜주는데 가장 으뜸가는 분이다' 하는 뜻입니다. 그게 무상사조어장부입니다. 그러니까 부처님 자신이 가장 으뜸가는 사람이다 하고 얘기를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훈련시키는데, 바르게 인도해주는데 부처님만큼 뛰어난 분이 없다' 하는 그런 뜻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아눗따로 뿌리사담마사라티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래서 보통 무상사 띄우고 조어장부 하는 게 아니고 '무상조어장부' 그렇게 얘기들을 합니다.
그다음에가 뭐냐 하면 '삿타 데와마눗사낭(satthā devamanussānaṁ)' 그렇게 얘기합니다. 보통 '천인사(天人師)' 그렇게 얘기하죠? 그러니까 이 세상에서 우리를 훈련시키고 조련시켜주는데, 바르게 인도해주는데 부처님만큼 뛰어난 분이 없다 할 것 같으면 대부분 사람들은 그렇게 얘기합니다.
인간에게는 그럴 수 있지만 천상에서는 그럴 수 있느냐 하고 얘기합니다. 안 그러면 나는 천상의 일도 안다. 부처님은 그걸 모를지 몰라도 나는 그걸 안다. 안 그러면 꼭 비방하기 위한 건 아닙니다. 부처님이 천상에 설해놨던 경전을 갖다가 다시 내가 인간인 내가 구술했다. 그건 뭔 얘깁니까? 내가 천상의 사람들하고 통해갖고 그 내용을 알아와가지고 내가 썼다는 거라. 그런 경전이 하나 있죠? 그런 경전이 대승경전에도 하나 있습니다. 하도 심오해가지고 부처님이 인간에게는 설할 수 없는 거기 때문에 천상세계에서 설했던 것이다 하면서 그 경을 기록을 해놓았습니다. 그러면 자기는 천상세계에 통했다는 소리라, 그걸 기록한 사람은. 그럼 그 사람은 뭐라? 부처님보다도 훨씬 뛰어났다는 얘기지.
그런데 그렇지는 않죠! 부처님은 천인사입니다. 천상까지도, 천상에 있는 천인들까지도 부처님한테 법을 듣고 예를 표했던, 그리고 그 사람들에게도 가르침을 주었던 그런 스승이다 하는 그런 뜻입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보면 조금 전에 얘기했던 그거는 굉장히 건방진 생각들입니다. 그런 구절을 경전에 써서는 안 됩니다. 설혹 자기가 천상에 가서 그걸 받아썼더라도 부처님이 얘기한 것이지 자기가 부처님의 심오한 걸 인간에게 말하지 못하고 숨겨둔 것 아니면 저 용궁에 숨겨둔 걸, 아니면 천상에 숨겨둔 걸 이렇게 기록한 것처럼 얘기하면 그거는 아직도 아(我)라고 하는 것이 있는 상태가 됩니다.
어쨌든 간에 천인사라고 하는 것은 그런 것들입니다.
부처님은 신에게서는 어떤 존재냐 하는 거라. 신에게도 스승이라는 거라. 예수는 신의 뭡니까? 신의 아들입니다. 아니면 여러분들은 신의 머슴이라는 거라. 인간을 그렇게 규정하는 경우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부처님은 그런 신들조차도 스승으로서 받드는 분이라 하는 겁니다. 그래서 그런 뜻으로 천인사라고 그러는 겁니다.
그다음에 '붓도(buddho)' 붓도는 여러분들이 잘 알 겁니다. '지혜를 완성한 분이다.' 완전하게 깨달음을 이루신 분이다 하는 뜻입니다.
그다음에 '바가와(bhagavā)' '세존(世尊)'이라 그러죠! '덕 높은 사람', '존경할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을 바가와 라고 합니다. 지금도 사이 바바(Sai Baba) 라고 하는 인도 명상요가 스승은 바가와라는 명칭을 써줍니다. 그래서 간혹 이 명칭을 쓸 때가 있습니다. 다른 명칭들은 쓴 적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덕 높으고 존경할 만한 분은 바가와 하고 세존이다 하고 얘기를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어쨌든 이 열 가지 명호를 지와까가 얘기를 합니다. "이런 분이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만약에 이 얘기를 들었다. 그럴 것 같으면 사람들 많이 모이는데 갈려고 하겠어 아니면 이렇게 뛰어난 분이 있다는데 갈려고 하겠어? 당연히 왕의 입장에서는 그런 분한테 갈려고 그럽니다. 그래가지고 부처님한테 찾아가게 됩니다.
다음 시간에 부처님한테 가서 육사외도에 대한 얘기들을 하는 것들에 대한 얘기를 하도록 그렇게 하겠습니다.
'아짠 빤냐와로 스님 일상수행법문 녹취 > 2008~2010 일상수행법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웨사카뿌자(Vesākha-Pūjā) 특별법문 (20090502) (0) | 2021.02.23 |
---|---|
부처님 오신 날(Vesākha-Day) 봉축법회 (20090502) (0) | 2021.02.22 |
망갈라 숫따(길상경) (20080605) (0) | 2020.12.24 |
사문과경3. 뽀야데이(poya day, 보름날) 법문 (20080618) (0) | 2020.12.24 |
사문과경(Sāmāññaphala-sutta)1. 뽀야데이(poya day, 보름날) 법문 (20080322) (0) | 2020.12.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