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수행법문 녹취/예비수행. 사무량심

예비 수행(사마타 수행) 네 가지

담마마-마까 2021. 9. 14. 14:32

아래의 법문 내용은

[ 수행의 기본적인 이해- 수행하는 이유, 예비수행 네 가지 (20090609) ] 법문 내용중 일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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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blog.daum.net/alfl6843/1090

 

자, 그런 위빳사나 수행을 시작하려면 아직도 여러분들의 몸과 마음은 망아지 같이 날뜁니다.

그래서 ‘바로 수행을 시작하라’ 그러면 앉아가지고 마음이 헐떡거려집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우선 마음을 고요하게 가라앉혀야 됩니다.

안 그러면 헐떡거리는 마음으로 수행을 하다 보면 수행을 많이 해보지 않은 사람은 한 시간 내내 그냥 헐떡거리다가 끝나버립니다. 그러면 이익이 없겠죠?

 

그래서 예비적인 단계를 설정을 해둡니다.

그 예비적인 단계들은 사마타 수행들을 병행하도록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왜? 사마타 수행은 어떤 겁니까? 하나의 대상에 집중해서 다른 거 다 끊어버린다는 거라.

그러니까 헐떡거리는 마음이나 헐떡거리는 몸을 가장 빨리 잠재울 수 있는 방법은 위빳사나가 아니고, 물론 어느 정도 수행 열심히 해서 수행의 경지에 오른 사람은 바로 위빳사나로 들어가도 그것이 됩니다. 그런데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그것이 잘 안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사마타 수행 방법으로 헐떡거림을 가라앉혀야 됩니다.

 

- 예비 수행 (사마타 수행) -

 

그 첫 번째가 뭐냐하면 <부처님의 속성(특성)에 대한 숙고 : 붓다눗사띠>

 

부처님의 명호는 여래십호라 해서 열 가지가 있는데 여래십호 중에 하나를 먼저 선택을 합니다. 먼저 여래십호에 대한 것들은 토요일 날 계속 줄기차게 해줄 겁니다.

 

우선 대표적인 거 하나만 예를 들겠습니다.

아라한! 아라한이 뭡니까? 모든 번뇌를 여의신 분, 모든 번뇌를 떠나신 분이죠. 그게 아라한이라는 뜻입니다.

아라한이 되면 일체 번뇌가 일어나지 않고 그 번뇌로부터 완전히 떠나버립니다. 그것이 아라한입니다.

그것이 부처님이라는 겁니다.

 

여러분들은 망상을 많이 피우고 각각의 번뇌를 일으키는데 그거하고는 차별되는 거죠? 그 번뇌를 떠난 상태를 한번 상정을 해보십시오. 여러분들 중에 한참 고민을 하면서 번뇌에 휩싸여 있다가 문제가 해결되고 나면 어떻습니까? 시원하죠! 그게 아라한이라는 거라. 그 시원한 상태가 항상 유지되는 것.

 

저 부처님을 떠올리면서 그걸 염두에 두라는 거라. ‘아, 저렇게 완전하게 번뇌를 떠나신 분, 저 분이 바로 부처님이다’ 하는 생각을 일으켜야 되고, ‘아라한’ 하면서 그 생각을 일으켜야 됩니다.

 

‘아, 저렇게 청명하고 깨끗하고 고요하신 분이구나’하는 생각을 탁 일으키면서 마음에서는 환희심이 생겨납니다.

또 ‘그 부처님이 걸어가신 길이, 또 수행해서 깨달음에 이른 길이 이 위빳사나 수행이다. 내가 그 위빳사나 수행을 함으로 해서 나도 아라한이 된다’는 생각을 떠올려야 됩니다.

 

나도 저와 같이 확 트이고 깨끗해지고 문제가 해결되는 그런 느낌들을 항상 가지고 있다는 생각을 하면 또 얼마나 기쁩니까? 부처님의 속성에 대해서 숙고하라는 것은 그런 것들입니다.

 

부처님의 속성에 대해서 숙고하면 첫 번째, 마음이 점진적으로 대상에 대해서 집중할 수 있는 힘들을 가져옵니다. 그렇게 되니까 당연히 마음이 고요하고 평온하게 됩니다. 그래서 내가 그 대상에 대해서 집중하려고 하는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그다음 두 번째는 그런 기쁨을 가져옵니다.

‘아, 똑같은 수행을 해나가고 있다’는 그런 기쁨! 그리고 그런 수행으로 깨달음에 이르렀다는 부처님에 대해서 기쁨이 일어납니다.

어떤 경우든, 사마타 수행을 하든 위빳사나 수행을 하든 대상에 대해서 집중하는 것이 없고 그 대상에 대해서 기쁨이 일어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다음 세 번째가 그런 부처님을 의지처로 하고 내가 그 길을 따라가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 마음의 위안을 받게 됩니다.

두려움이 없어집니다. 내가 조그마한 고통이 일어난다고 하더라도 그 고통에 대해서 두려워하는 마음이 적어집니다. 나쁜 상황에 맞닥뜨리더라도 그 상황에 급격하게 반응하는 그런 것이 없어져 버립니다.

 

부처님의 특성에 대해서 숙고하면 이런 이익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만약에 ‘석가모니불’ ‘석가모니불’ 하면서 이런 이익들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그건 내가 지금 잘못하고 있다는 거라. 그냥 명칭을 가지고 하고 있다는 거라.

석가모니불에 대해서, 부처님에 대해서, 만약에 아라한이면 아라한에 대해서 그런 번뇌를 여읜 맑고 깨끗한 느낌이 확 다가와져서 그런 기쁨이 일어나지 않고, 그것에 대해서 집중하는 마음이 없어지고 두려워하는 마음도 일어나지 않는다고 할 거 같으면 내가 ‘석가모니불’이라는 명칭 자체에만 매달려 있다는 거라.

그러니까 ‘석가모니불’은 열심히 하고 있는데 특히 여러분들 정근할 때 오만 신경 다 쓰고 있고 뭐 거기에 대해서 별다른 감흥도 없고 하다 보면 부처님 속성에 숙고를 안 하고 있다는 거라.

반드시 부처님에 대해서 그 특성에 대해서 숙고를 할려고 할 거 같으면 그 명확한 특성들을 봐라는 거라. 그걸 이해를 해야 됩니다.

 

우리 지금 홈페이지에 부처님의 열 가지 특성에 대한 것들이 올려져 있는가요? 있죠! 그것을 참고를 하면 됩니다. 그래서 그것에 대해서 명확하게 이해를 해야 됩니다. 그냥 단순하게 ‘석가모니불’‘석가모니불’‘석가모니불’ 이렇게 하지 말고, 하나의 특성 아라한이면 아라한, 삼마삼붓다면 삼마삼붓다 거기에 대한 것들을 명확하게 하나씩 잡는 것이 오히려 훨씬 이익이 있습니다.

 

그 방법으로 인해서 마음을 집중하게끔 하고 마음을 고요하게 만들어서 바로 수행에 뛰어들도록 하는 그것이 첫 번째 예비적인 단계입니다.

 

이렇게 해도 안 될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됩니까?

 

두 번째는 <멧따 바와나 : 자애 수행> 자애를 수행하는 방법입니다.

 

자애는 어떻게 수행합니까? ‘내가 행복하기를... 내가 괴로움이 없기를... 모든 이들이 행복하기를... 모든 이들이 괴로움 없기를...’ 이런 것이 자애수행이죠? 자애수행은 ‘나’라고 하는 특정인, 아니면 나 말고 또 다른 특정인을 대상으로 하는 경우가 있고, 또 하나는 불특정 다수 ‘모든 이들’ ‘모든 살아있는 존재들에 대해서’ 하는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내가 행복하기를’ 하고 나서 그다음에는 ‘모든 이들이 행복하기를’ 합니다.

 

 

자애수행을 원칙적으로 하려면 그 단계 단계가 있습니다. 근데 지금은 그 모든 단계를 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닙니다. 수행하기 위한 예비단계라는 얘깁니다.

그럼 이때는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특정인을 대상으로 해야 되겠습니까? 그건 아니죠?

모든 존재! 모든 존재들에 대해서 대상으로 하는 것이 합당한 방법입니다.

그래서 내가 행복하기를, 당신이 행복하기를, 괴로움이 없기를 이렇게 하지 말고,

‘모든 이들이 행복하기를’ 합니다. 모든 것에는 나도 포함이 되어있으니까 ‘모든 이들이 행복하기를... 모든 이들이 괴로움이 없기를...’ 그것이 자애수행입니다.

 

자애수행을 함으로 인해서 한번 떠올려 보십시오. 괴로움이 없는 단계, 어떤 단계가 될까요? 여러분들도 그런 경험을 해봤을 겁니다. 다리를 구부리고 있다가 한참 괴로워서 죽을 지경에 이르러서 다리를 쫙 펴고 나면 시원한 느낌이 옵니다.

 

그런 마음으로 ‘괴로움이 없기를’ 해야 됩니다. ‘내가 행복하기를’ 하고 아니면 ‘모든 이들이 행복하기를’ 할 때도 꼭 마찬가집니다.

진짜 내가 행복에 넘쳤을 때, 법에 대해서 행복을 느끼는 걸 여러분들이 경험해야 되는데 지금 현재 여러분들은 법에 대해서 행복을 느끼는 것이 뭔지를 잘 모릅니다.

 

우선 세속적으로라도 진짜 행복한 것들, 욕심으로 인해서 욕심이 해결됐을 때 행복한 것 말고, 모든 것들을 버려버림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행복들, 그러니까 뭘 취하려고 막 욕심부리고 하다가 ‘에고, 이게 다 쓸데없는 것이다’ 하고 탁 놓아버렸을 때 그 번뇌가 사라짐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행복 이걸 떠올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이들이 행복하기를’ 할 때 그런 마음으로 ‘행복하기를’ 해야 됩니다.

‘모든 이들이 괴로움이 없기를’ 할 때 그런 마음으로‘ 괴로움이 없기’를 해야 됩니다. 그리해야 만이 내가, 이 몸과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는다는 얘깁니다. 그것이 ‘멧따 수행’ 입니다.

 

그다음 세 번째는 <몸의 혐오성에 대한 숙고 : 아수바바와나>

 

‘이 몸은 부정하고 이 몸은 더럽다’ 하는 것! 좀 끔찍할 것 같죠?

이전까지는 부처님에 대한 숙고나 자애수행이나 좋은 방향으로 했는데 이것은 정반대 방향입니다.

‘더러운 것, 혐오스러운 것, 부정한 것이다.’ 창자, 고름, 피, 이런 부정한 것들을 떠올림으로 인해서 얼마나 더럽고 부정한 것인가, 그래서 그 더럽고 부정한 것에 집착하는 마음을 탁 떨쳐버려라는 거라.

그것으로 인해서 내가 이 몸에 대해서 집착하는 마음을 떨쳐버려라는 거라. 마음도 온갖 부정한 것들을 생각하고 이어나가는 것들을 떨쳐버려라는 거라.

 

살아있는 중생들의 가장 큰 짐이 뭐냐면 이 몸과 마음에 집착하는 것들입니다.

그 집착하는 것들을 끊기 쉬운 가장 좋은 방법이 ‘혐오성’입니다.

그것을 일으켜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몸의 혐오성에 대해서 숙고할 때는 ‘반드시 자기 자신, 자기 자신의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현상들에 대한, 그리고 그것들에 대한 특성들을 조사를 해서 그것에 대해서 혐오하는 마음을 일으켜서 그것에 대한 집착을 떨치도록 자꾸 노력을 하라. 그것이 세 번째입니다.

 

그다음 네 번째는 <죽음에 대한 숙고 : 마라나눗사띠>

 

지금 여러분들은 다 살아있습니다. 그렇지만 내가 언제 죽을지 누구도 모릅니다.

내일 죽을지 모레 죽을지 아니면 당장 죽을지 어느 누구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어느 순간이든지 나는 죽을 수가 있습니다. 죽음이라는 것은 확실한 것이지만 삶이란 것은 불확실한 것입니다.

살아간다는 것은 불확실한 것입니다. 언제 어떤 상황이 올지도 모르고 또 언제 어떤 일들이 벌어질지도 모르는 살아있는 것은 불안한 것입니다.

 

근데 죽음은 확실하다. 그 죽음에 대해서 숙고를 하라는 거라.

내가 언제 죽을지 모를 것 같으면 어떻게 해야 돼요? 내가 더욱더 노력해서 수행을 하는 수밖에 없는 거라.

 

얼마 전에 ooo 대통령이 돌아가셨어요. 그렇게 돌아가실 거라고 누가 생각을 했겠어요. 나는 그렇게 안 된다는 보장을 누가 하느냐는 거라.

죽고나선 뭐 할 건데. 내가 천국에 가면 무슨 소용이 있어?

내가 천국에 가는 게 아니고 다른 존재가 천국에 가는 것인데, 내하고는 관계가 없는 것인데, 지금 여러분들 몸과 마음이 그대로 천국에 가는 게 아닙니다.

그대로 천국에 간다고 할 거 같으면 죽고 나서 이 몸도 다 같이 없어져 버려야 돼. 들려서 올라가야 돼. 근데 몸은 그대로 있단 말이라.

다른 형체로, 뭐 다른 종교에서 얘기하듯이 영혼이 거기 간다고 하더라도 그 영혼은 다른 몸을 받게 되는 것이지 여러분들 지금 몸을 받아가지고 가는 것은 아니라는 거라. 그런 영혼조차도 없다고 할 거 같으면 천국이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거라. 내하고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건데.

 

그런 죽음에 대해서 자꾸 숙고를 하라. 그래서 하루빨리 수행해야 되겠다는 그런 마음을 자꾸 일으키도록 하라. 그것이 수행의 예비단계들입니다.

 

먼저 수행을 할 때 이런 것들을 자꾸 떠올리도록 해야 됩니다.

그것을 떠올려서 수행하려는 마음을 일으키고, 그리고 빨리 고요하게 가라앉히는 훈련들, 그것을 수행의 예비적인 단계라고 얘기합니다.

그래서 수행을 하려고 앉으면 약 5분 정도 예비수행을 하는 것이 좋습니다.

5분 정도 하고 나서 위빳사나 수행으로 전환하는 것이 일반적인 방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