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동 분명히 알아차리며 앎을 실천하라”
유익한 마음보다 해로운 마음에 의해
더 많은 몸짓이 조건 지어짐을 알아야
의도를 제스처로 표현하는 동안에
드러나지 않는 미묘한 집착 있어
꼭두각시가 영혼 없이 움직여지듯
정신·물질도 공허하고 영혼 없음 알아야
마음은 물질을 만드는 네 가지 요인들 중의 하나다.
우리가 웃거나, 울거나, 화를 내거나 너그러울 때마다 우리의 모습이 다르게 보인다. 이것으로 우리는 마음이 물질을 만든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몸짓(까야윈냐띠)과 말의 암시(와찌윈냐띠)는 마음에 의해 생기는 두 가지 종류의 물질이다. 이것들은 물질을 만드는 다른 세 요인인 업, 온도, 영양에 의해 생성되지 않는다.
몸짓은 몸의 물질들에 의해 표현되는 어떤 특정한 방식으로, 우리의 유익하거나 해로운 의도들을 드러내는 것이다. 우리의 의도는 몸이나 팔다리 또는 얼굴의 움직임, 즉 제스처로써 표현될 수 있다. 몸짓으로 표현된 의도는 다른 사람들이나 심지어 동물들도 이해할 수가 있다. 몸짓 그 자체는 물질로 아무 것도 알지를 못한다. <담마상가니> (636)에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몸짓이라는 물질은 무엇입니까? 사람이 앞으로 나가거나 뒤로 물러나거나, 응시하거나 얼핏 보거나, 팔을 움츠리거나 뻗거나 할 때 일어나는 유익한 과보를 낳는 마음이거나 해로운 과보를 낳는 마음이거나 또는 과보를 낳지 않는 단지 작용만 하는 마음(끼리야찟따) 이거나간에 한 생각에 의해 생기는 긴장, 의향, 몸의 긴장한 상태·암시, 알게 함, 알게 되는 상태-는 몸짓을 구성하는 물질들입니다.”
마음은 몸의 ‘나누어 얻을 수 없는 8원소 기본물질’ 그룹들을 생성하는 요인들 중에 하나이며 그 중의 하나인 바람의 성품인 움직임이 의도가 전달될 수 있도록 하는 몸의 동작을 일으키게 하는 특정한 역할을 한다. <앗타살리니> (1, 1권, 3부, 82, 83)에 몸짓에 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의사전달하는 능력이 있기 때문에 암시라고 불린다. 무엇을 전달하는가? 몸의 행위로 어떤 특정한 원함을 전달할 수 있다. 누군가가 잘 보이는 곳에 서서 손과 발을 들고, 머리나 눈썹을 흔들거나 찡끗거리면 그의 손 등의 동작들은 볼 수가 있다. 하지만 암시는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마음으로만이 알 수가 있다. 손 등의 위치의 변화에 의해 일어나는 색상의 움직임을 눈으로 봄으로써 알 수가 있다. 그러나 그것을 암시로써 마음에 반영시켜 마음의 문의 인식작용에 의해 ‘이 사람이 나에게 이렇게 저렇게 하기를 원하는구나…’하고 상상하게 된다.”
몸짓으로 표현된 의도가 눈의 문이 아닌 마음의 문을 통해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진다. 예를 들면, 누군가가 손을 흔드는 것은 마음의 문을 통해 지각되며 이 지각은 색깔을 지각하는 안식에 의해 조건 지어져 있다. 몸짓으로 암시되어진 것의 의미는 그것이 마음에 반영됨으로써 알게 된다. 이와 같이 그것은 마음의 문을 통해서만 인식되어질 수 있다.
<청정도론>(14, 61)에 유사한 방법으로 암시가 정의되어 있고 그 작용, 드러남, 그리고 가까운 원인에 대해 기술되어 있다.
“…이것의 작용은 의도를 넌지시 알리는 것이다. 몸 움직임의 원인으로 (수행자의 지혜에) 드러난다. 그것의 가까운 원인은 마음으로부터 생긴 바람의 성품이다.”
가까운 원인에 관해서 보았듯이 바람의 성품 즉, 움직임은 몸짓 즉 제스처에 의해 의도를 암시하는 특정한 역할을 한다.
우리는 몸짓 등의 암시가 자신에 속하는 것으로 여기지만, 몸짓은 단지 마음에 의해 생겨난 물질의 한 종류일 뿐이다. 거기에는 제스처로 의사전달을 하는 사람은 없다. 우리가 제스처를 취할 때 마음과 물질을 인식하고 있나? 그 순간에 유익한 마음(꾸살라찟따)이나 해로운 마음(아꾸살라찟따)이 있나? 대부분의 시간에 해로운 마음이 일어나지만 우리는 그것을 알아채지 못한다.
인사를 하기 위해 손을 흔들 때, 가까이 오라고 말하기 위해 제스처를 쓸 때, 어떤 것을 긍정할 때 머리를 끄덕이거나 부정할 때 머리를 좌우로 흔들 때 어떤 마음의 유형이 그 몸의 암시를 조건 지우는지 우리는 알아차리는가? 그러한 제스처들은 우리의 일상생활에 한 부분이고 우리는 자동적으로 그것들을 행하는 것으로 여긴다.
아마 우리는 어떤 유형의 마음들이 그들을 조건 지우는지 결코 생각하지 못할 것이다. 예를 들면, 우리가 흉내 내어 남을 조롱하거나 그에 대한 경멸을 표할 때, 해로운 마음이 몸짓을 조건 짓게 된다. 그런 경우에 해로운 마음이 있다는 것이 분명하다.
우리는 몸짓이 유익한 마음 보다 해로운 마음에 의해 더 많이 조건 지어진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가 의도를 제스처로 표현하는 동안에 분명히 드러나지 않는 미묘한 집착이 있을 수 있다. 알아차림이 있으면 우리는 유익한 마음이나 해로운 마음이 제스처를 유발시킨다는 것을 알아차리게 된다.
사람들은 몸짓을 통해 불선업도 지을 수 있다. 예를 들면, 제스처로 사람을 죽이라는 명령을 할 때다. 유익한 마음은 다음과 같은 때 몸짓을 조건으로 일어난다. 예를 들면, 사람들이 자기 집에 오는 것을 환대하면서 팔을 뻗을 때, 누군가에게 무엇을 주려고 손을 내밀 때, 길 모르는 이들에게 길을 가리켜 줄 때, 제스처로 예를 표시할 때 즉, 존경받을만한 사람에게 경의를 표할 때 등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런 행동들을 이기적인 동기 또는 진지하지 못하게 할 수도 있다. 그러면 불선한마음이 몸짓을 조건으로 일어난다. 마음과 마음을 조건으로 일어나는 물질에 대해 더 많이 알게 될수록 제스처로 이야기할 때도 일어나는 어떠한 실재도 알아차릴 수 있게 된다. 그러면 불선한 마음은 그 순간 일어나지 못한다.
우리는 몸짓 뿐 아니라 말로도 의사전달을 한다. 말의 암시(와찌윈냐띠)는 마음에 의해 일어나는 물질의 한 종류다. <담마상가니>(2장 637)에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언어에 의한 암시는 어떤 물질인가? 선하거나 악하거나 또는 중립적이거나 간에 생각을 표현하는 분명히 발음된 연설, 소리, 발표, 지껄임, 소음, 잡음내기, 언어-이것들이 소위 언어이다. 그것의 암시, 알게 함, 언어에 의해서 알게 하는 상태는 언어에 의한 암시를 구성하는 물질이다.”
어떤 사람의 의도가 말에 의해 암시되어졌을 때 그것이 다른 사람이 알 수 있게 된다. 암시되어진 것의 의미는 그것이 반영되었을 때 알려지게 된다. 그래서 그것은 마음의 문을 통해서 인식되어진다. 말의 암시 그 자체는 아무 것도 알 수가 없다. 그것은 물질이다. 마음은 ‘8원소 기본물질’을 생성하는 요인 중 하나이며, 그들 중 하나인 땅의 성품, 즉 단단함은 말의 암시의 조건을 만드는 하나의 특정한 역할을 한다.
<청정도론>(14장, 62)에 의하면, 말의 암시의 작용은 의도를 알리는 것이며, 그것은 말하는 소리를 내는 원인으로 드러나며, 그것의 가까운 원인은 마음에 의해 일어난 땅의 성품이다.몸짓은 마음에 의해 생성된 바람의 성품 즉, 움직임이 가까운 원인인 반면 말의 암시는 마음에 의해 생성된 땅의 성품 즉, 단단함이 가까운 원인이다. 말의 암시가 일어날 때 발음하는 수단들이 되는 말소리를 내기 위한 입술 같은 물질들을 조건으로 해서 발생된다. 물질들은 그들의 고유한 본성을 가지고 있는 물질(사바와루빠, ‘사’는 ‘가진with’을 의미하고 ‘바와’는 ‘본성nature’를 의미함)과 그들 자신의 고유한 본성을 가지지 못한 물질(아사바와루빠)로 나누어진다. ‘8원소 기본물질들’은 각각 자신의 고유한 본성과 특징을 가진 사바와루빠들이다.
몸짓과 말의 암시는 마음에 의해 조건 지어지는 물질들이나 이 둘은 그들 자신의 고유한 본성과 특징을 가지지 못한 물질들이다. <앗타살리니>에 표현되었듯이, 그들은 마음에 의해 생성되는 두 가지 종류의 암시의 조건이 되는 사대의 ‘어떤 독특한 변화’다. 그들은 물질들의 성질들이 있으므로 고유한 본성이 없는 물질(아사바와루빠)다.
<앗타살리니>(2, 2권, 1부, 3장, 337)에 의하면 그 두 가지 암시가 의존하는 ‘8원소 기본물질들’은 마음에 의해 생성된다.
말의 암시가 유익한 마음이나 해로운 마음에 의해 조건 지어진다는 것을 우리가 알아차리고 있는가? 우리가 관대함, 친절함 또는 붓다의 가르침에 대한 이해를 계발시키는 것과 같은 건전하지 못한 목적을 가졌을 때 우리는 해로운 마음으로 말하고 있다는 것을 이론상으로는 알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말을 하는 그 순간에 우리는 알아차리고 있는가? 거짓말이나 중상모략 같은 말을 통한 불선업을 짓고 있지 않더라도 우리는 여전히 해로운 마음으로 말하고 있을 수 있다. 우리는 자주 우리의 대화들이 해로운 마음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어떤 것을 얻기를 원하거나 남들에게 사랑 받거나 존경받기를 원할 때 집착에 뿌리박은 마음으로 말한다. 이런 목적에서 우리는 타인에 관해서 거짓말을 만들거나 조롱하거나 헐뜯거나 할 수도 있다. 우리는 종종 말하기에 집착하여 단지 대화가 계속 유지되게 하기 위해 수다를 떨곤 한다. 사람들은 침묵이 있으면 외로움을 느끼는 경향이 있다. 보통 우리들은 우리가 말하고 있는 것이 유익한지 아닌지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가 사무실이 집에서 우리의 직장을 조직할 때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를 해야만 한다. 그런 순간들에도 유익한 마음나 해로운 마음아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는가? 우리가 거짓말을 할 때 말로 통한 불선업을 짓게 된다.
예를 들면, 우리가 관대하고 친절하게 그들을 도우려고 대화하면서 격려할 때 말의 암시가 선한 마음에 의해 생성될 수도 있다. 우리가 붓다의 가르침에 관해서 말할 때 유익한 마음이 있을 수도 있지만 동시에 거기에 해로운 마음도 있을 수 있다. 예를 들면, 우리가 우리의 지식을 자랑하거나 또는 우리와 대화하는 사람들에게 집착을 가질 때이다. 많은 다른 마음들이 매우 빨리 일어나고 사라져서 우리는 마음이 언제 유익한 마음인지 언제 해로운 마음인지 알지 못할 수가 있다. 말을 하는 동안에 마음과 물질에 대한 알아차림을 둘 수 있다. 사람들은 말하기를 원할 때 단어들을 생각하여야 하기 때문에 이것이 불가능하다고 믿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생각은 실재의 하나이며 이 또한 알아차림의 대상이다. 거기에는 소리와 들음이 있고 그들은 나타날 때 알아차림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우리는 보통 우리가 말하려는 주제에 너무 빠져 우리의 말을 아주 중요한 것으로 집착해 버린다. 우리는 대부분의 시간들을 ‘관습적 진리’의 세계에 살고, 궁극적 실재(빠라마타) 담마를 잊어버린다. 궁극적 관점에서 보면 말하는 자는 없고 단지 현상, 무아, 조건 지어진 마음들과 물질들만 있다.
우리가 몸짓이나 말할 때, 단단함, 누름, 소리 또는 들음이 나타날 것이다. 그들은 나타남과 동시에 지각될 수가 있다. 그런 순간에 알아차림이 있다면, 나타나는 실재에 대한 깨달음이 계발될 수 있을 것이다.
<청정도론>(18장, 31)에 궁극적 관점에서 사람은 없고 단지 조건 지어진 현상들만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꼭두각시 비유를 하고 있다.
“그러므로, 꼭두각시가 영혼없이 공허하고, 생기가 없으며, 단지 줄과 나무의 조합을 통해 걷고 서고하는 동안 그것이 생기있고 재미있는 것 같이 보이는 것처럼 이 정신-물질도 공허하고 영혼이 없으며, 생기도 없다. 단지 두 다리의 조합을 통해 걷고 서고하는 동안 생기있고 재미있는 것 같이 보이는 것처럼 여겨진다. 이것이 그것이 보이는 방식이다. 그래서 옛사람들이 말하기를, ‘마음과 물질은 실제로 있지만, 보이는 중생과 인간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네, 그것은 인형처럼 실체없이 공허하고 꾸며진 것이기 때문에 단지 목초나 나무 같이 쌓여진 고통무더기에 불과하다네.’ ”
사람들이 꼭두각시 공연을 볼 때 그것은 마치 그 자신이 생명을 가진 것처럼 행동하고, 열중하고, 집착되어 버리거나 미움과 슬픔이 가득하게 되는 것으로 여겨져, 사람들은 그 스토리에 사로잡혀 울고 웃고 하게 된다. 그러나 꼭두각시는 단지 그들을 움직이는 사람들이 갖고 있는 나무와 줄일 뿐이다. 연극이 끝난 뒤 꼭두각시가 어떻게 보관되어 있는가를 보게 되면 하나도 감동적이지 않고 단지 나무와 줄의 모임일 뿐이다.
우리가 논장을 공부하게 되면 ‘자아’라고 부르는 이 꼭두각시가 적당한 조건들 때문에 움직이고, 행동하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을 더 잘 이해하게 된다.
<담마상가니>(636, 637)에서 두 종류의 암시의 정의를 이미 보았듯이, 이 두 종류의 물질은 유익한 과보를 낳는 마음이거나 해로운 과보를 낳는 마음이거나 또는 과보를 낳지 않는 단지 작용만 하는 마음에 의해 조건 지어진다. 몸짓과 말의 암시가 아주 종종 해로운 과보를 낳는 마음에 의해 조건 지어진다는 것을 깨닫는다면 우리가 제스처를 취하거나 말을 할 때 마음과 물질을 알아차림하지 않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가를 알게 된다. 그래서 <사띠빠타나 숫타> (맛지마 10, 마음챙김의 확립 경, 네 가지 종류의 분명한 앎)에 나오는 ‘분명한 앎’ 삼빠잔냐의 실천에 관한 붓다의 말씀을 기억할 것을 강조한다.
“그리고 나아가 비구들이여, 비구는 나아갈 때도 돌아올 때도 자신의 거동을 분명히 알아차리면서 행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앞을 볼 때도 돌아 볼 때도 분명히 알아차리면서 행한다; 팔을 펴거나 구부릴 때도 분명한 앎을 실천해야 한다; 가사를 입고 탁발그릇을 들 때도 분명한 앎을 실천해야 한다; 먹고, 마시고, 씹고, 맛볼 때도 분명히 알아차리면서 행해야 한다; 대소변을 볼 때, 분명한 앎을 실천해야 한다; 걷고, (어떤 장소에) 서고, (어떤 자세로) 앉고, 자고, 깨고, 말하고, 침묵하고 할 때도 분명히 알아차리면서 행해야 한다.”
위오기 교수(공주대) webmaster@hyunbu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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