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수행법문 녹취/37조도품 법문

3. 정사유(正思惟, sammā saṅkappa 삼마- 상깝빠) (20080626)

담마마-마까 2019. 8. 18. 17:46

https://youtu.be/sEJRgnEhg3I

3. 정사유(正思惟, sammā saṅkappa, 삼마- 상깝빠) (20080626)

 

자! 시작합시다.

오늘은 정사유(正思惟) 부분이죠! '상깝빠(saṅkappa)'입니다.

조금 전에 오후 법회하려고 여기 왔는데 눈길이 저기 물고기한테 갔어요.

물고기가 산소가 부족하니까 위에 올라와서 뻐끔뻐끔하고 있어요. 3마리가 다 그래요. 산소가 부족한 거라. 물을 갈아줘야 될 때라는 거지.

그래서 물을 갈아줘야 되겠는데 지금은 내가 수행해야 될 시간이거든. 그러면 어떻게 해? 수행 끝나고 나서 갈아주면 되겠지? 당장 죽는 것이 아니니까. 그러면 보통 우리는 '수행 끝나고 나서 갈아줘야지'하고는 그 생각을 안 한다고.

 

그것이 일반적인 것인데, 또 어떤 사람들은 궁금한 거라.

'저것이 지금 살았나? 죽었나?' 그 생각에 매여있으니까! 또 수행하면서도 물고기를 계속 봐야 되는 거라. 경행을 할 때에도 왔다 갔다 하는데 눈을 뜨고 경행을 하니까, 저쪽에 멈춰 설 것 같으면 밖에 뭐가 보인단 말이라. 그러면 거기에 눈길을 안 줘야 되는데 어쨌든 눈길 한번 줘가지고 봤거든. 그러면 그날은 왔다 갔다 하면서 저기 가면 꼭 또 저것이 어찌 바뀌었나? 하고 봐야 되는 거라. 물고기도 마찬가지이고.

그리하다가 도저히 안 되겠다 할 거 같으면 어떻게 돼요? 수행 그만두고 물고기 물 갈아줘야 되는 거라. 생각에 끄달려들어가니까. 아까는 분명히 결론 내기는 수행 끝나고 나서 물고기 물 갈아줘도 전혀 문제가 없었는데, 생각에 이렇게 끄달려들어가다 보니까 지금 안 갈아주면 안 되게끔 되는 거라.

그것이 '생각'입니다. 상깝빠(saṅkappa).

 

지금 현재 나의 마음의 상태를 알 수 있는 것은 자극에 대한 반응으로 마음의 상태를 알 수가 있습니다. 물고기라는 밖의 자극, 눈을 통해서 마음으로 자극이 들어왔단 말이라. 그런데 그것에 대해서 집착하고 애착을 가지니까 그것을 떨쳐내 버리지 못하고, 지금 당장 물고기 물을 갈아줘야 하는 상태가 되어버리는 거라. 그런 사람의 지금 현재의 마음 상태는 어떤 겁니까? 무엇인가 강하게 집착하고 있는 거지? 무엇으로 인해가지고? 생각으로 인해서 그런 거죠? 그런 것들입니다.

 

사유, 생각이라는 '상깝빠'가 일상생활에서는 굉장히 중요하게 차지를 합니다.

오전에 법회를 하면서 스님이 출가한 스님들에 대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공동묘지에서 죽은 지 여러 날이 된 사람들을 보고는 혐오하는 마음을 일으켰는데, 바로 옆에 있는 방금 죽은 아리따운 여인에 대해서는 욕정을 일으켰다는 얘기를 했습니다.

마음이 그렇게 바뀐다는 겁니다. 그렇게 바뀌는 것이 세속적인 생각이고 세속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왜?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에 끄달려 들어가니까!

분노를 일으키는 것, 싫어하는 것들, 욕구를 일으키는 것들, 좋아하는 것들, 이런 것들도 마음의 현상입니다. 마음으로 일으키는 현상들입니다. 세속적인 것은 그런 마음의 현상에 대해서 분명하게 알지를 못하니까 끄달려들어가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은 있는 그대로를 보는 훈련들을 하는 겁니다. 그래서 위빳사나 수행을 하는 것이고, 그것만이 깨달음의 길인 것이다 하는 겁니다.

출가한 스님들도 조금 전에 혐오스러운 것들을 일으켰다가 또 잠시 뒤에 욕망을 일으키는 그런 것들을 보고, 출가한 자가 세속적인 견해와 세속적인 마음을 가지고 있으니까 '돌아가서 다시 더 수행하라'하고 부처님이 따끔하게 일렀던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자극이 없으면 보통 보면 우리는 마음이 아주 고요하고 침착해 있는 것처럼 생각을 합니다. 착각을 합니다.

그런데 자극은 살아가는데 안 받을 수가 없습니다. 자극 없이 살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자극은 밖으로부터 들어오는 자극입니다. 이 여섯 가지, 마음이라는 것을 빼고 나면 다섯 가지 감각기관을 통해서 들어오는 자극입니다. 그런 자극에 따라서 마음은 여러 가지 상태로 바뀌어나가게 됩니다.

그렇게 바뀌지 않도록 어떤 자극이 오더라도 고요하게 평정된 상태를 가지도록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그럴려고 할 것 같으면 바른 생각들을 가지도록 해야 됩니다. 바른 생각을 가지는 것은, '그런 자극들에 대해서 항상 깨끗한, 평정한 마음을 가지라'하는 것은, 그래서 '어떠한 자극에도 동요하지 말아라'하는 얘기입니다.

 

'상깝빠'라고 하는 것은 '생각, 의지력'이라고 얘기를 하는데 여기에는 통상적으로 3가지를 포함합니다.

즐거움, 쾌락을 벗어나겠다 하는 의지력, 생각.

그다음에 원한이나 증오, 분노라고 하는 것을 반드시 다 없애버리겠다고 하는 의지력, 생각들.

그다음에 모든 살아있는 생명들을 해치지 않겠다는 의지력, 생각들.

이런 것들이 바른 생각들이고 그래서 삼마 상깝빠라고 얘기를 합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은 수행을 통해서 이것을 다스려야 되는 것이고, 또 이런 수행을 통해서 내가 반드시 이 몸 받아 태어났을 때 이생에서 깨달음을 성취하겠다는 생각을 일으키는 것! 그것도 바른 생각이죠!

그렇게 실천을 해나가면 그것은 출세간적인 것들을 해나가게 되는 것이고, 그리고 세간적인 생각들이 일어나는 것들을 갖다가 수행을 통해서 출세간적으로 바꿔야되는 것이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또 바른 생각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 무상·고·무아. 앞 시간에 배웠던 바른 견해, 바른 견해를 가지는 것. 그런 것들로 인해서 '영원한 것은 없다, 어떤 주체가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하는 그런 생각들을 가지는 것들을 바른 생각이라고 얘기합니다.

 

부처님은 진리를 가르치면서 진리를 배우라고 얘기한 적이 없습니다.

진리를 실천하라고 얘기를 합니다.

그래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런 스님의 법문이나 이런 교재들이나 여러 가지 책들을 통해서 이해하고 납득하는 것들이 실천해 나가는 첫걸음일 뿐이지 실천은 아니죠? 실천하고는 관계가 없습니다.

 

어쨌든 그런 바른 이해를 가지고 바른 생각을 자꾸 가지도록 하는 것. 바른 이해도 물론 실천에 포함돼 있지만은 이해만으로도 충분한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바른 생각 같은 경우에는 실천해야 되는 문제입니다.

내가 그런 생각이 일어나면 이 생각이 무엇인지, 어떻게 일어났는지, 어떻게 사라지는지를 실천해서 알지 못할 거 같으면 똑같은 문제에 끄달려들어갈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병이 든 사람한테 특효약을 손에다 쥐어줍니다. 쥐어주더라도 복용 안 하면 그것은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하는 겁니다. 바른 이해를 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바른 생각을 가지고 실천을 하지 않으면 소용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하는 겁니다.

 

대부분 보면 이해를 하고 견해를 가진다는 것은, 바른 이해, 바른 견해를 가지기 전에는 대부분 집착하는 것들입니다. 그래서 어떤 견해를 가지든지 이런 견해든 저런 견해든 견해를 가진다는 것은 집착한다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세트를 이루게 됩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돼요? 내 견해와 맞지 않을 것 같으면 싸우고 저항하고 대립하게 되는 거라.

왜? 바른 견해는 수행으로 연관되는 것이지만 꼭 수행의 부분은 아니기 때문에!

 

바른 생각은 그렇지는 않습니다.

바른 생각을 가질 거 같으면 적어도 그 생각에 대해서 실체가 없는 것을 알기 때문에 대립하고 하는 것들이 줄어들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내가 마음의 상태에서 집착을 하고 있다 할 거 같으면 '아, 내가 지금 바른 생각을 못 일으키고 있구나!'하고 판단들을 해야 됩니다.

 

진리라고 하는 것은 실천하는 것이기 때문에 진리는 견해가 아닙니다.

아무리 삼법인, 사성제 뭐 어쩌구 하더라도 어떤 견해가 아닙니다. 진리는 사실일 뿐입니다.

진리는 실천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들이다 하는 생각을 반드시 가져야 됩니다.

 

살아가면서 육체의 병은 다스려나가기는 수월할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의학이 발달이 되고 하면서 많이들 바뀌어져 나갑니다. 그런데 마음의 병은, 마음의 문제죠? 마음의 문제는 참 다스리지를 못하는 병입니다. 괴로움이나 슬픔, 분노, 이런 감정적인 것뿐아니라 여러 가지 마음의 병은 가지고들 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이 뭐라고 했느냐 하면 "신체의 병을 앓지 않는 사람은 있을 수가 있다. 그런데 마음의 병이 하나라도 없는 사람은 보지를 못했다" 골치를 썩이지 않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는 거라. 누구든지 그런 것을 가지고 있다는 거라.

몸의 병은 발생하는 것이 안에서도 발생하고 밖에서도 발생하거든.

그런데 마음의 병은 어디서 발생합니까? 마음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죠! 이 몸이 있는 데에 있습니다. 그래서 항상 안에서 발생하게 되어있습니다. 그러니까 밖의 것하고 무관하게 되어있는 것들이라는 겁니다.

 

대부분 생각을 일으키는 것들은 스님이 저번에 뭐라고 그랬어요? '번뇌다'하고 얘기했습니다. 번뇌는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밖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죠! 안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생각을 잘 다스린다고 하는 것은 번뇌를 잘 다스린다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거라. 그래서 사람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생각들, 상념들 이런 것들을 '상깝빠'라고 얘기합니다. 밖에 존재하는 아름다운 것들이나 이런 것들은 욕구가 아닙니다. 그것을 보고 마음으로 일으키는 것이 욕구인 것입니다.

 

밖에 있는 것은 전혀 내가 마음으로 번뇌나 생각들이나 이런 것들이 이렇게 상깝빠를 일으키지 않으면 그것 자체는 선도 불선도 아니다 하는 겁니다.

내가 힘들고 기쁘고 좋다 하는 것들은 내 스스로 일으키는 것들입니다.

똑같은 것에 대해서 어떤 사람은 좋아하고 어떤 사람은 싫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는 거라. 그것은 마음의 문제이기 때문에.

 

그런 것들이기 때문에 생각도 꼭 마찬가지입니다. 내 마음에 대한 이해를 바르게 할 것 같으면 좋은 치료를 해나갈 수가 있습니다.

그럴러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일어난 생각을 알아차리는 수밖에 없습니다.

관찰하는 수밖에. 마음의 수양을 한다든지 하는 이런 것들도 꼭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위빳사나 수행법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항상 일어나는 그대로를 관찰하는 습관들을 몸에서 자꾸 익혀줘야 됩니다.

그것이 이 '바른 생각 삼마 상깝빠'에 대한 얘기들입니다.

 

욕구, 분노, 해악에 대한 생각, 사유들 이런 것들은 망상입니다.

그런 것들을 버려버려야 됩니다.

대부분 욕구, 분노, 해악 할 거 같으면 무슨 말인지 잘 모릅니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쓰는 말들, 조금 전에 점심 먹고 나서 채 30~40분도 안 돼서 또 수행한다고 하니까 하기 싫거든. “아, 죽겠는데요, 스님!” 그것은 무슨 마음입니까? 게으른 마음이죠. 게으름. 이것은 쉽게 말하면 바른 생각이 아니죠!

 

그럼 바른 생각이 아닌 것은 게으름, 그다음에 그 게으른 것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것이 뭡니까? 싫증이죠! 싫증, 싫어하는 것들, 그다음에 남 질투하는 것들, 비교하는 것들, 그다음에 또 후회하는 것들, 그다음에 깍쟁이들을 인색하다 그러죠. 인색한 것들. 이런 것들이 욕구나 분노나 해악의 생각입니다.

그것은 번뇌이고 망상입니다.

그래서 크게 구분해가지고 이 세 가지만, 보통 일상적으로 우리가 접해서 알기 쉬운 것은 내가 게으름 피운다 '아, 이것은 바른 생각이 아니다'하고 빨리 알아차리라는 거라. 싫증을 일으킨다 '아, 이것도 아니다!' 또 남 질투하고, 내 자식하고 남의 자식하고 비교해보고, 또 그리하지 않아도 넉넉한 것을 가지고 아낀다고 핑계대고 인색하고 이런 것들, 이것은 바른 생각이 아니다 하고.

 

그리고 가장 조심해야 되는 것은 그것보다는 '후회'하는 것입니다.

후회하는 것은 화살을 네댓 번은 받는 겁니다. 지은 일은 거기에서 끝나버리면 될 것인데, 그것을 다시 떠올려서 후회하고 또 괴로움을 당하고, 가장 안 좋은 방법들입니다. 그것도 바른 생각으로 해서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것들은 자꾸 끊도록 해야 됩니다.

 

그래서 뭘 해야 됩니까?

욕구가 없는 사유(출리사유, 出離思惟, nekkhamma saṅkappa),

분노가 없는 사유(무에사유, 無恚思惟, avyāpāda saṅkappa),

해침이 없는 사유(무해사유, 無害思惟, avihiṁsā saṅkappa) 이런 것들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큰 주춧돌이 대부분 두 개라고 얘기합니다. 뭡니까?

자애(慈愛 mettā)와 지혜(智慧 paññā) 라고 하는 것이 두 개의 주춧돌입니다.

그 주춧돌 위에서 쌓아올려가서 열반이라고 하는 궁극적인 것에 도달하는 것입니다.

자애와 지혜 중에서 자애 부분은 어떤 겁니까? 분노를 다스리고 하는 것들, 그다음에 욕구를 없애는 것들, 자애로울 거 같으면 너그러워집니다. 너그러워지니까 욕구를 다스려나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남을 해치고자 하는 생각들이 없어져버린다는 겁니다. 그런 것들이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바른 생각을 하려고 할 것 같으면 자꾸 자애수행들을 해야 됩니다.

자애롭게 자꾸 스스로가 바뀌어져나가야 됩니다.

 

오늘 같은 경우는 그렇게 해서 마칩시다. 더 길게 해봐야 되도 안 할 것 같으니까, 다음 시간에는 좀 할 것이 많습니다. 바른말! 말은 굉장히 조심해야 될 부분들이기 때문에 말에 대한 것은 조금 길게 좀 해야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