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일상수행법문 녹취/2018~2022 일상수행법문

테라와다 신행생활 - 테라와다의 가르침 (20180331)

담마마-마까 2020. 6. 20. 19:30

https://youtu.be/1uf60jDeo5A

* 테라와다 신행생활 - 테라와다의 가르침 (20180331)

(2:30초 이후부터 녹취했습니다.)

 

프린트물 하나에 책 한 권입니다. 오전에 할 거는 그 책이고 오후에 할 거는 아직 책이 완성이 안 돼가지고 계속 프린트물로 나갈겁니다.

오전엔 「테라와다 신행생활」이고 오후에는 수행에 대한 것을 하겠습니다. 책 한번 펴보십시오. 9페이지입니다. 서언 부분은 넘어가겠습니다.

 

테라와다의 가르침 - 테라와다(Theravāda)에 대한 것입니다.

스님 이름 뒤에 뭐라고 붙여져 있어요? 빤냐-와로-(Paññāvaro), 인제는 마하-테-로-(Mahāthero) 그렇게 붙여져 있습니다. 빤냐와로(Paññāvaro)가 남성형으로 됐으니까 뒤에 테라(thera)도 남성형으로 테로(thero) 라고 돼있습니다. 빨리어 문법이 그렇습니다. 거기에도 테라(thera) 어원이 있습니다.

 

테라(Thera)는 장로(長老)라고 보통 얘기합니다. 그런데 왜 장로라고 했을까? 어떤 의미가 있기에 장로라고 했을까? 장로들은 나이가 많죠? 법납이 오래됐다는 의미죠.

보통 테라라고 명칭을 붙일 수 있는 경우는 보통 15년으로 잡습니다. 나라마다 조금씩 다르는데 출가한지 15년이 지나면 테라라는 명칭을 보통 붙입니다. 어떤 나라에서는 10년으로 잡기도 하고 그럽니다. 거기에다가 앞에 '마하(Mahā)'라는 '큰' 의미가 들어가는 '마하테라'라고 붙일 때는 통상적으로 30년, 그 두 배죠? 그래서 10년으로 잡았을 경우에는 20년이 될 거고, 보통 15년 30년 이 단위로 해서 테라라는 명칭을 붙입니다. 그래서 오래됐다는 뜻이 됩니다.

 

기본적으로 불교를 접하고 아니면 출가하고 나서 한 5년간은 기본적인 거 익히기 바쁩니다. 수행법이 어떤 건지, 테라와다 불교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되고 어떤 생활을 해야 되는지, 그래서 그 5년간 익힐 동안에는 출가한 사람들은 스승 밑을 떠나지 못하게끔 규정이 돼있고, 재가자들도 마찬가집니다. 재가자들도 이 선원 저 선원 옮겨다니는 걸 별로 안 좋아합니다. 5년간은 한 스승 밑에서 꾸준하게 그 부분을 어느 정도 익히도록 그렇게 하게 됩니다.

 

그러고 나서 5년 지나고 나서 10년까지는 통상적으로 수행법에 대한 걸 자기가 체험하게끔 합니다. 그래서 어느 정도 기본적인 것들을 5년간 익힌 것들을 실제 수행을 하면서, 아니면 재가자일 거 같으면 실제 내가 실천하면서 "바른말 하라" 했으면 바른말을 실천한다든지, "생명 죽이지 마라" 했으면 생명 죽이지 않는 것을 실천을 한다든지, 실천하면서 그것이 나에게 어떤 영향을 주는가 하는 것들로써 보통 기간을 정합니다.

 

그렇게 10년이 지나고 나면 그뒤부터 15년까지는 가르친 것들이 어떻게 밖으로 드러나지는가 하는 것, 그래서 보통 10년이 지나고 나면 법을 설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출 수 있게끔 15년까지는 그렇게 훈련을 합니다. 아무리 자기가 많이 알고 있고 또 그것을 체험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출가한 스님들이 가르치는 법을 모를 것 같으면 안 되기 때문에 5년간 그렇게 교습을 받습니다.

재가자들도 꼭 마찬가집니다. 10년차 이상 돼서 15년차까지는 대부분 보면 자기가 배운 것들이 드러났을 때 수행해서 어느 정도의 지혜를 얻었는지 아니면 수행해서 어느 정도의 과위에 도달했는지가 있어야 됩니다.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별 의미가 없어져버립니다.

 

그런 과정을 걷게 됐을 때, 그걸 끝마쳤을 때 테라(Thera)라는 명칭을 붙입니다.

 

어떻게 보면 테라라는 것이 그냥 장로를 뜻한다는 것보다는 '전통을 그대로 계승해서 이어간다'는 그런 뜻입니다. '그렇게 이어가는 것들이 굳건하다'는 의미가 됩니다.

그래서 테라의 어원을 빨리어 사전에서 쭉 살펴보면 어간만 따지고 보면 그 의미 자체가 '고정돼있다'는 그런 뜻입니다. 그리고 '확립돼 있다'는 뜻입니다. 어떻게 내가 살아가고 어떻게 수행해야 되고 어떻게 가르치고 하는 것들이 확립돼있다는 그런 뜻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확립돼있는 것이 흔들림이 없는 상태이기 때문에 강하다'는 그런 의미도 됩니다.

 

그러고 나서 마지막에 드는 것이 '나이가 많은 스님들'을 얘기할 때 쓴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장로라는 의미의 테라의 의미보다는 앞에 의미들이 훨씬 더 크다는 것입니다. 스스로 그것을 배우고 익히고 또 닦아나가면서 체험하는 것들이 없으면 테라와다의 출가한 스님이나 테라와다의 불자가 된 의미들이 별로 없어진다는 그런 뜻이 됩니다.

 

그런데 경전에는 무조건 나이 많이 들었다고 테라라고 하지 않는다. 지금 현재 내가 사성제를 체험했다든지 도와 과에 이르렀다고 할 것 같으면 그사람을 테라라고 부른다 하고 분명히 규정을 해놨습니다. 꼭 15년이 안 된다고 하더라도 열심히 닦아가지고 그 경지에 도달하면 테라가 된다는 뜻입니다.

 

쉽게 말하면 테라(Thera)의 의미는 두 가지로 볼 수가 있습니다.

잘 확립돼가지고 변함이 없는 상태로써 오래도록 닦았다는 의미로써 테라라는 의미가 있고, 그것은 출가한 스님들을 의미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또 하나는 도와 과를 증득해가지고 그것들에 대해서 분명하게 확립됐다는 것으로서, 그것들이 바뀔 여지가 없어졌다는 의미가 됐을 때 테라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래서 테라담모 열 가지 라는 것이 있습니다. 테라가 되기 위해서 익혀야 되는 10가지가 있습니다. 뭐가 있을까?

 

'바훗수또(bahussuto)' 라고 해서 잘 배워라는 거라. 잘 배워가지고 자기 것이 되도록 하라는 거라. 테라와다 불교가 다른 불교하고 다른 특색이라 할 것 같으면 교리적인 것이나 아니면 수행적인 부분이나 배우는 것이 거의 완벽하게 출가한 스님과 똑같을 정도로 완벽하게 가르쳐줍니다. 그냥 얼렁뚱땅하게 무조건 믿어라 하는 법이 없습니다.

믿을 경우 어떻게 해서 믿음이 확립된다 하는 것을 분명하게 배워야 되는 거고, 수행한다면 어떤 과정을 통해가지고 수행의 과위에 이른다는 것들을 배워야 되는 것이고, 계를 지킨다고 할 것 같으면 어떻게 지켜나가 가지고 그것이 어떻게 마음이 청정하게 된다는 것, 그리고 그게 말과 행동으로 표출된다는 것도 분명하게 배워야 됩니다. 그걸 바훗수또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잘 배워가지고 그게 몸에 딱 익혀지는 상태가 되는 것, 그게 테라담모, 테라와다 불자 테라와다 스님이 되기 위한 첫 번째 덕목입니다.

 

여러분들은 어떠한 경우든지 그것이 교리적인 것이든 수행적인 것이든 아니면 일상 생활적인 것이든 어떠한 것이든 잘 배워야 됩니다.

왜 그럴까? 왜 배우는 걸 잘해야 될까? 어떤 사람들은 그럴 수가 있습니다. 그냥 수행만 하면 되지 그게 뭔 필요가 있느냐? 또 어떤 사람들은 내가 출가했으니까 내가 잘살기만 하면 되지 그 계율 조목이 뭔지 그거 일일이 따질 필요가 뭐 있느냐? 그렇게 얘기를 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스리랑카에서 그 부분가지고 논쟁이 붙은 적이 있습니다.

배우는 것이 먼저 돼야 될 것이냐? 아니면 그거 무시하고 무조건 수행하는 것이 먼저 되어야 될 것이냐? 거의 한 몇 년간을 테라와다 스님들뿐 아니라 재가자들이 그것에 대해서 논쟁이 붙었어요. 아주 먼 옛날에.

그런데 결론이 뭐냐면 배우는 것이 없으면 잘못된 방향으로 나갔을 때 그것을 교정해 줄 수 있는 방법이 없다는 거라.

 

수행의 과정을 모르면 스승이 항상 여러분들 곁에 있는 것도 아니고 어떻게 교정을 할 거라? ', 이거 내가 잘못하고 있구나. 이건 이게 아니구나' 하고 다시 돌아와야 되는데, 돌아올 수 있는 근거들이 안 된다는 거라.

 

교리적으로도 그냥 영혼이 있다고 어렴풋이 생각을 하고 있는데, 테라와다에서는 "영혼은 없다" 하고 얘기할 것 같으면, 그것을 분명하게 배우지 않으면 뭔가에 부딪쳤을 때 ', 있을 수도 있지' 하고 동조를 해버리게 된다는 거라.

거기서 파생되는 것들이 굉장히 많이 있습니다. 영혼을 극락왕생시켜주기 위한 여러 가지 제사라든지 아니면 개인적인 기도를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고, 어느 특정한 분들이나 특정한 단체에 위탁해가지고 할 것 같으면 기도가 이루어진다든지, 타력적인 것으로 자꾸 바뀌어나가 버리게 된다는 거라.

 

그래서 테라담모의 첫 번째가 어떠한 경우든지 잘 배워나가야 됩니다.

그것이 확립되었을 때 아, 그 사람은 그래도 테라와다 불자로서 발을 들였었다 하고 얘기하게 됩니다.

 

그다음에 또 한 가지가 뭐가 있느냐면 출가한 스님들은 계율을 지키는 것이고, 여러분들 같은 경우에는 뭐가 있느냐면 계를 신도 오계나 특별한 불재일 날은 팔계를 지키는 것들입니다.

가볍게 여겼을 경우에는 특히 재가자들은 그것에 대한 처벌조항이 없기 때문에 잘못해도 벌받고 참회해야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냥 가볍게 넘겨버릴 수도 있습니다. 조금 전에 오계를 받았죠? "술 마시지 마라" 했는데 술 안 먹고 사는 사람 있어요? 가볍게 여긴다는 겁니다. 어떠한 경우도 술을 마셔서는 안 되는데, '취하지 않게끔 먹으면 괜찮지' 하고 생각을 하게 됩니다.

 

출가한 스님들도 출가자의 계율에 맞게끔 살아가야 되는데 그냥 한국적인 상황이니까 이럴 수도 있지 하고 용인을 해버리게 됩니다. 그것을 잘 받아들여서 자기 것이 됐을 때 그 계가 자기 자신을 지켜주는 방호하는 역할을 한다는 것을 생각을 안 합니다. 그것으로 인해서 마음이 청정해지고 살아가는데 불편함이 없이 아주 잘 살아가게 되고 남들에게 칭찬을 받는다는 생각을 못하고, 이거는 지금 안 맞다고 자꾸 배척을 하게 됩니다.

안 맞으면 현대사회에서 어떤 것이 안 맞다고 해서 그것들에 대해서 다른 방법으로 수용할 수 있는 조건들을 만들어야 되는데, 그것조차도 안 만들고 무조건 안 맞다고 배척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테라와다 불교권에서는 어떤 문제에 부딪치게 됐을 때 끊임없이 그것을 토론을 합니다. 그것들에 대해서.

대표적인 예를 한번 들어보면 한국에서는 탁발하기가 힘듭니다. 탁발할려고 무던히 노력해가지고 그래도 이렇게라도 탁발을 하고 있는데, 이렇게 탁발을 하는 날에는 문제가 없습니다. 탁발이 안 될 때는 어떻게 할 거라? 출가한 스님들의 규정은 탁발을 나가서 탁발이 안 됐을 때는 굶어야 됩니다. 절에 뭘 차려놓았다고 해서 그걸 먹을 수 있는 조건이 안 돼요. 이미 계율 위반이 돼버립니다. 그럼 굶어야 되는데 하루 이틀 그러는 것은 괜찮지만 계속 탁발이 안 될 것 같으면, 한국의 상황은 오전에 탁발하기가 참 힘이 듭니다. 그럼 매일 굶고 살 수는 없는 거라. 어떡할 거라?

 

그리고 탁발할 때의 조건이 쌀 같은 거는 받지도 못하게 돼있습니다. 쌀은 생명이 있다고. 요즘에는 거의 쌀눈이 없는 경우가 많지만 쌀눈이 있을 경우에는 그것은 벼가 될 수가 있기 때문에, 그래서 그것들을 직접 조리를 못해먹기 때문에, 쌀은 못 받게 돼있습니다.

 

그런데 어쨌든 안 될 때는 어떻게 할 거라? 불교가 불자들이 있는 곳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서양이나 유럽이나 다 퍼져가지고 있는데 거기서는 어떻게 적용을 할 거라?

그래서 계율조항에 어긋나지 않게끔 그것들을 변형을 합니다. 쉽게 얘기하면 햇반, 햇반은 이미 밥이 돼있는 거죠? 햇반을 데워먹는 거는 조리의 영역에는 속하지 않는다는 거라. 조리의 영역이라는 것은 자기가 직접 만들고 해가지고 끓여먹는다든지 이런 것들이 조리의 영역에 속하는데, 햇반을 그냥 데워먹는 것은 조리의 영역에 속하지 않기 때문에 햇반은 먹을 수가 있다. 왜 그러냐면 스님들이 직접 조리해서 먹지 못하게끔 돼있기 때문에. 그래서 그것은 조리의 영역에 속하지 않기 때문에 햇반은 먹을 수 있다 합니다. 그러면 탁발이 안 되는 날은 누군가가 햇반을 갖다준다든지 햇반을 냉장고에 넣어놨을 때 그것을 꺼내가지고 데워먹으면 되는 거라.

 

계율조항에도 어긋나지 않고 그러면서 먹는데 크게 부담을 가지지 않고 먹을 수 있는 조건들이 되는 거라. 테라와다 불교권에서는 끊임없이 그것을 현대사회에 맞게끔, 그렇다고 계율조항을 어긴다든지 변형한다든지 하는 것 없이 계속적으로 만들어나갑니다. 그런 것이 비일비재합니다.

요즘은 한참 또 논쟁이 되고 있는 게 미국이나 이런 데들은 재가자들이 내내 스님 모시고 다니지도 못하는 거고 한국도 마찬가지고, 스님이 운전해도 되느냐, 안 되느냐? 아주 사소한 것 같지만 그게 무슨 문제가 되나 생각하겠지만 그래도 그걸 지킬려고 한다는 거라. 그 계율조항을.

 

재가자도 꼭 마찬가지라는 뜻이라. "어떠한 경우든지 거짓말은 하지 않겠다" 하고 계를 지켜야 된다고 할 것 같으면 어떠한 상태에서도 거짓말을 하지 않도록 만들어야 됩니다. 거짓말의 영역에 속하는 것은 어떤 것이고, 또 바른말의 영역에 속하는 것은 어떤 것이다 하는 것을 4가지, 4가지로써 구분을 쭉 해놓았습니다.

그럼 그걸 보고 적어도 이것 정도는 거짓말의 영역에 속하지 않는구나, 또는 이거는 내가 거짓말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남을 비방한다든지 하는 것도 거짓말의 영역에 속하는구나 하는 것도 분명하게 알게 될 것 같으면, 그다음부터는 그게 아무리 옳은 말이라고 하더라도 비방하고 하는 것들은 안 하게 되는 거고, 욕설 섞인 것들도 안 하게 되는 거고, 이런 것들을 분명하게 알게끔 된다는 거라.

그래서 여러분들이 갖추어야 되는 두 번째들이 뭐냐하면 계율 항목에 대해서 분명하게 그걸 인지해서 지켜나가야 된다 하는 겁니다.

테라와다 불자되기 어렵죠?

 

테라와다의 전통은 세 가지입니다. 빨리어로 그대로 읽어드릴게요.

 

1. Apaññattaṁ nappaññapeyya,

(아빤냣땅 납빤냐뻬-이야,)

부처님께서 정하지 않은 새로운 원칙을 만들지 않는다.

 

2. Paññattaṁ na samucchindeyya,

(빤냣땅 나 사무친데-이야,)

부처님께서 이미 정하신 원칙을 없애지 않는다.

 

3. Yathāpaññattesu sikkhāpadesu samadaya vatteyya.

(야타-빤냣떼-수 식카-빠데-수 사마다야 왓떼-이야.)

부처님께서 일찍이 설하신 계율에 따라 수행하라.

 

요 세 가지입니다, 쉽게 말하면 부처님이 정한 것은 없애지도 못하고 더하지도 못하고 빼지도 못하는 겁니다. 그게 법이든 율이든 간에. 더하고 빼고 하지도 못할 뿐 아니라 계를 지키고 법을 공부하고 하는 목적이 뭐라?

실천하기 위한 것들이라는 거라. 자기 것에 대해서 계와 율이 자기 스스로를 보호하고 자기 것이 되어서 그 속에서 머물 수 있게 되기 위해서 실천수행을 하는 겁니다. 계율을 지키고 법을 공부하고 수행하는 것들은 그러기 위한 것들입니다.

그렇게 해가지고 그것들이 결과물로써 나타나게 될 때, 도와 과를 얻었다든지 아니면 지혜를 증득했다든지 살아가는데 항상 마음이 깨끗하게 되어서 나쁜 마음을 먹지 않게 된다든지 이런 결과물로써 드러나지게 된다는 거라.

 

그게 테라와다의 원칙입니다.

그게 테라(Thera) 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테라라는 의미는 장로라는 의미도 있지만 부처님이 가르친 수승한 지혜를 증득하는 것, 이것도 테라의 의미에 속한다는 걸 분명하게 인식해야 됩니다.

 

와다(vāda)는 뭘까?

조금 전에 여러분들 계 받을 때 무사와다(musāvādā) 할 때 거기도 와다가 있죠? '거짓되게 말하는 것', 말하는 걸 의미합니다.

불교는 어떤 방식으로 지금 2600년간 전해져왔을까? 상기띠(saṅgīti)라고 해서 합송하는 방식으로 전해졌습니다.

자, 스님 한번 따라해보십시요. 나모땃사 (나모-땃사)

여러분들이 스님하고 같이 해봅니다이. 시작! (나모-땃사)

똑같이 됐죠? 여기에 만약에 누가 '나모-' 할 때 '모-'를 길게 해야 되는데, 길게 안 하고 '나모땃사' 이렇게 해버렸다, 그러면 당연히 장로스님이 지적을 합니다. " '모-'는 장음이다" 하고 얘기합니다. 그래서 '나모-땃사' 이렇게 하게 됩니다.

이게 와다(vāda)라는 뜻이라.

 

와다(vāda)라는 것은 말이라는 뜻인데, "합송해가지고 통일되고 확립돼있는 것들"을 얘기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이렇게 해가지고 "나모-땃사" 하는 걸 분명하게 익히고 알고 있단 말이라. 그럼 이게 다른 사람한테 전파될 수 있는 거라.

 

조금 전에 스님 같이 “자, 한번 따라해보세요. 나모-땃사” 그러고 나서 다 같이 하고, 한 말에서 한 말로, 한 그룹에서 한 그룹으로, 이 세대에서 저 세대로, 끊임없이 변형되지 않고 그대로 이어져나가는 것, 이건 어떠한 방식으로 이어져요?

합송하는 것! 같이 그것을 독송하는 것으로 인해서 전해져 오는 됩니다. 그게 와다(vāda)라고 하는 것입니다. 옛날에는 방식이 전부 그렇게 합송하는 방식으로써 전해져왔습니다. 불교뿐 아니라 다른 종교들도 꼭 마찬가집니다.

와다(vāda)라는 것은 그렇게 합송해서 전해진다는 그런 뜻입니다.

 

그렇게 합송해서 전해졌는데, 누가 합송해서 전해줬습니까? 누가 전해줬어요?

(수행자 대답 : 장로들이) 테라들이?

테라(thera)들이 부처님 말씀하고 틀리지 않게끔 부처님 말씀하고 그대로 합송해가지고 다 기억하고 나서, "그래. 장부경전은 너희 그룹이 여기서 세세손손 보존해가지고 전해라." "중부경전은 너희 그룹을 중심으로 해가지고 세세손손 전해라." 요렇게 딱 역할을 정해주거든. 다른 것도 마찬가지고. 그래가지고 그 그룹들을 싹 모아보니까 합송하는 것이 완벽해지는 거라. 세월이 몇백 년이 지나고 하더라도 이 그룹 부르고, 저 그룹 부르고 해가지고 맞춰보니까 똑같아요.

 

옛날에는 잘 교류가 안 되어 있는 상태입니다. 그럼 그분들은 만약에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상태에서 둘이서 만났다, 뭐로 가지고 얘기를 하게 될까?

경전이 틀린 것 맞는 것을 서로 확인을 해본다, 틀린 것이 있을 것 같으면 서로 전해진 것이 뭔가 문제가 있는 거라.

그런데 결집을 1차부터 해가지고 지금 6차까지 쭉 진행이 돼왔는데 결집하면서 쭉 해보니까 틀린 부분이 안 나오는 거라.

 

합송이라는 것은 그런 역할을 합니다. 개인적으로 누군가가 글을 썼다 그럴 것 같으면 자기의 견해를 넣어서 쓸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한번 그렇게 해가지고 만들어질 거 같으면 그것은 또 다른 것으로서 변형될 가능성이 큽니다. 여러분은 글로 탁 찍어놔놓으면 이것은 오히려 안 변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만들 때는 개인의 의견이 들어가는 것이 굉장히 많습니다. 그런데 합송은 바꿀래야 바꿀 방법이 없습니다.

만약에 뒤에 누군가가 첨가를 하겠다 할 거 같으면 그 합송하는 데서 반드시 "이 부분은 첨가됐습니다" 하고 분명하게 얘기를 할 수밖에 없습니다.

 

1차 결집 때 열반경을 합송을 했단 말입니다. 그런데 지금 6차 결집 때의 열반경 하고는 내용이 조금 다릅니다. 늘어난 부분이 있습니다.

뭔 부분이 들어갔는지 알아요? "부처님이 열반하고 나서 우리는 이렇게 결집해가지고 이렇게 부처님 말씀을 전합니다" 하면서 1차 결집 때의 내용을 거기다가 첨가시켜버립니다. 그런데 그 열반경 뒤에 부분은 "이 부분은 제1차 결집 때 첨가한 부분이다" 하면서 그 부분이 딱 나옵니다.

그런데 이걸 잘못 알고 있으면 1차 결집하고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6차 결집이 지나고 나서의 열반경은 다른 것 아니냐 하고 얘기합니다. 그런데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그게 합송의 장점일 뿐아니라 합송을 했을 때 변형되지 않고 전해지는 역할들을 한 겁니다. 그래서 와다라고 하는 것은 변형되지 않고 그대로 전해진 것들을 얘기할 때 그 가르침을 얘기할 때 '와다'라는 의미를 지닙니다.

만약에 거기게 자기의 견해가 들어가버린 것이다 할 것 같으면 와다라는 용어를 쓸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할 때 처음에 무사와다 할 때의 와다라고 했습니다. "거짓되게 말하지 마라" 한국에서의 무사와다의 의미나 태국에서의 무사와다의 의미나 미국에서의 무사와다의 의미는 동일합니다. 그것이 나라라고 해가지고 아니면 습관이나 여러 가지 환경조건이 다르다고 해가지고 그것이 바뀌어지는 법이 없다는 거라. 와다는 그런 역할들을 한다는 거라.

 

그게 붙어가지고 테라와다(Theravāda)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런데 그 가르침들은 그리고 변형되지 않은 것들은 누굴 기원으로 해요?

부처님을 기원으로 합니다.

어떠한 경우든지 조사(祖師)를 기원으로 하는 법은 없습니다. 그래서 테라와다의, 그걸 개조라고 해야 되나? 조계종 개조 스님이라고 하면 보조 지눌 스님인지 뭔지 이렇게 정할 수가 있습니다. 한국에는 각각의 종파가 있는데 그 종파의 개조(開祖)가 다 다릅니다. 그런데 한국에도 테라와다가 있고 미국에도 테라와다가 있고 영국에도 있고 버마에도 있고 하는데 거기에 개조들은 동일합니다. 부처님입니다.

 

그래서 확대해서 얘기할 것 같으면 테라와다의 테라라고 하는 것은 부처님을 뜻한다 하는 것입니다. 부처님 말씀을 그대로 변형하지 않고 그대로 온전히 지켜져와가지고 전해져온 말씀이기 때문에 그래서 어찌 보면 이 세상에서 가장 보수적인 것이 테라와다 입니다. 바꾸질 않습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보면 아까도 예를 들었지만 그 안에서 끊임없이 시대에 맞게끔 변형되어 온 것입니다. 그 부처님 말씀을 어기지 않고 그것을 그대로 유지를 하면서, 세부종목에서는 끊임없이 새로운 것들이 만들어져 나가는 것입니다. 이걸 잘못 해석할 것 같으면 아예 바꿀 수 없다 하고 치부를 해버릴 수가 있습니다.

 

부처님 말씀은 바꿀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걸 어떻게 현대에서 적용하느냐 하는 것은 각자의 몫들입니다. 그것들은 전체 테라와다 불교권에서 통일되어서 적용을 하게끔 되는 겁니다. 한국이라 해서 따로 그걸 적용을 받는다든지 하는 법은 없다는 뜻입니다. 만약에 그렇게 된다고 할 것 같으면 그것은 이미 테라와다가 아니게 돼버립니다.

 

얼마 전에 여러분도 알고 있지만 해피스님이 한국 테라와다 불교에서부터 나갔습니다. 나간 이유가 뭐냐면 "논장을 인정하지 않는다" 하는 것입니다. 테라와다 전통에서는 쭉 연결되온 것이 경·율·론을 결집해가지고 1차 결집부터 해가지고 6차 결집까지 쭉 진행되어 왔습니다. 그러면 누구든지 테라와다의 불자일 것 같으면 삼장은 인정을 해야 됩니다.

그중에 자기가 잘하는 것이 율장이다 할 것 같으면 율장을 자기가 공부하고 가르치고 하는 것은 충분히 가능합니다. 또는 경장을 자기가 잘하고 그것을 공부하겠다고 할 것 같으면 그것은 충분히 가능한데, 전제조건이 삼장은 어떠한 경우든지 인정을 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때까지는 인정하는 형식을 취해오다가 아마 작년부터인가 조금 바뀐 것 같애요. 그래서 논장을 인정하지 않겠다 하고 선언을 하는 상태에 이르러서, 출가한 스님들이 전체 모여가지고, 너 그게 사실이냐? 그게 사실이다. 그러면 여기 한국 테라와다 불교에서는 소속될 수가 없다.

 

그게 뭐냐면 한국이라 해서 특별한 상황의 조건이라 해서 그 상황 조건 따라서 만들어주지는 않는다는 뜻입니다. 만약에 그렇게 될 것 같으면 한국에서 테라와다 계를 받았다, 그럼 태국이나 미얀마에 가서도 인정을 못받아야 됩니다. 미얀마에서 계를 받았다, 태국에 가서 공부한다고 하더라도 태국 스님들하고 같이 어울려가지고 포살도 같이 하고 여러 가지 행사도 같이 하고 수행도 같이 할 수 있는데, 그것이 안 되어야 됩니다. 그런데 동일하게 적용이 됩니다. 동일하게.

 

불교학자들은 테라와다의 기원을 2차 결집에서 보기도 하고, 3차 결집에서 보기도 합니다.

테라와다 전통에서는 어떻게 볼까? 언제부터라고 볼까? 2차 결집에서 봅니다.

문헌상으로 분명히 나타난 것은 2차 결집 때 분명히 '테라와다' 라는 용어가 등장을 합니다. 경전 곳곳에 테라와다라는 용어가 등장을 합니다.

"테라 짜 맛지마 짜 나와 짜"

"장로가 있고 중간층이 있고 그리고 인제 막 배우는 그룹이 있다." 할 때도 테라 라는 용어가 등장을 합니다.

또는 부처님이 알라라 깔라마(Aḷāra Kālāma)에게 여러 가지 수행법들에 대해서 배울 때 알라라 까라마가 한 얘기가 있습니다. "나는 전해온 것들을 변형하지 않고 그대로 익혀와가지고 그대로 닦아서 하나도 변형되지 않고 그대로 나는 지니고 있다."

그때 부처님은 수행자였죠. "그것을 수행자인 너도 똑같이 지니고 있다." 하고 얘기를 하는 부분이 나옵니다. 거기에도 테라와다라는 용어가 등장을 합니다. 경전 곳곳에 테라와다라는 용어는 많이 등장을 합니다.

 

그런데 자꾸 이걸 역사적인 관점에서 분열이 된 시점부터 해가지고 하나는 '테라와다가' 되고, 하나는 '마하상기까'가 되고 하고 하니까, 그때부터 테라와다의 기원을 잡을 거 같으면 2차 결집부터가 되는 게 맞습니다.

그런데 분열이 되기 전에는 그것이 다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하나로 다 통일이 돼있었다고 봅니다. 그럼 분열되기 전에는 나는 테라와다다 하고 얘기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밖에 없기 때문에. 그럴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그리고 그런 용어들이 이미 경전에서 존재를 하고 있기 때문에, 부처님 당시에도 썼고 그것이 확립된 것은 1차 결집 때부터라고 봐야 되는 것이지, 그것을 2차 결집이나 3차 결집으로 넘어갈 이유는 전혀 없다는 거라.

1차 결집 때 이미 경··론 삼장이 확립됐다 하고 분명하게 얘기를 했기 때문에, 그 전통은 그대로 존중을 해주는 것이 마땅한 방법이라는 뜻입니다.

 

나중에 이 부분이 신행생활이 끝나고 나면 테라와다 불교사를 쭉 공부를 해나갈 때 어떠한 방식으로 여러분들이 잘못 알고 있나 하는 것들을 나중에 지적을 좀 해드릴 겁니다.

여러분들이 지금 현재 알고 있는 불교사 방식은 전부 대승불교의 방식입니다.

어떠한 경우든지 테라와다의 방식은 아닙니다.

테라와다의 방식은 하나의 줄기가 부처님 당시 때부터 해가지고 지금까지 쭉 맥이 끊어짐 없이 이어져왔다는 것, 그리고 거기서 각각의 것들이 분리됐다고 보는 입장인 것이지, 이 분리된 것들은 어떠한 경우든지 부파불교 시대 때 다 소멸돼버립니다.

그런데 분리되지 않고 그걸 그대로 이어온 것들은 지금까지도 테라와다라는 이름으로 존재를 하고 있다는 거라.

 

그러면 그것들이 보는 방식이 맞는 것이지, 분열돼가지고 테라와다와 마하야나로 분리되고 다시 또 부파분열을 하고, 그러면 분열되고 나서 그 앞에 거는 없어져 버린 거라?

그러면 '마하상기까'가 대승불교의 시발점인데 거기서 분열됐다? 그러면 분열되고 나서 앞에 거는 없어졌다는 얘기가 돼버리는데, 그러면 대승불교도 없어져 버린 거라는 얘기와 꼭 마찬가집니다.

그 방식은, 여러분들이 배우는 방식은 실제적인 불교사의 방식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테라와다」라는 것은 그런 의미들을 지니고 있다는 걸 분명하게 알아야 됩니다.

스승이 제자에게 가르친 것이 합송의 방식으로 해서 이 세대에서 저 세대로 쭉 계속적으로 변형되지 않고 이어진 것이 테라와다라고 하는 의미다, 그런 뜻으로 아시면 됩니다.

 

그러면 뒤에 10페이지, 「테라와다 불교」라고 하는 것을 보십시요.

 

불교라는 이름이 더 붙여지면 어떻게 될까요?

불교라고 할 때는 「부처님의 가르침」이죠?

왜 그냥 '테라와다'라고 하지, '테라와다 불교'라고 할까? 아니면 '대승'이라고 하지 왜 '대승불교'라고 할까? 왜 그래요?

교리적인 것은 대승 경전들의 교리들을 똑같이 대승불교에서 하고 있습니다. 경전도 똑같고, 뭐가 갖추어져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까?

 

불교라고 할 경우에는 그 가르침이 분명하게 확립돼있고, 그것을 따르는 사람들이 있어서, 그것들에 대해서 똑같은 경지에 오른 사람이 있을 때 불교라는 카테고리를 씌울 수가 있습니다.

그럼 쉽게 말하면 부처님은 아라한이었습니다. 그러면 부처님 이후에 테라와다 불교권에서는 아라한들이 지속적으로 나와야 됩니다. 안 나오면 불교라는 이름을 붙일 수가 없습니다. 부처님이 깨달은 경지와 동일한 경지를 깨달은 사람들이 계속적으로 배출이 돼와야 된다는 거라.

 

그리고 여러분들도 꼭 마찬가집니다. 부처님이 가르친 것들을 따라서 부처님이 얻은 상태들을 여러분들도 얻을 수 있어야 만이 "나는 불교도다" 하고 얘기를 할 수 있는 거라. 얻을 수 있겠어요? 적어도 "그 방향을 알아서 그 방향을 따라서 걸어가는 사람이 될 경우"에는 불교도라고 얘기를 한다는 거라.

 

"테라와다 불교도"다 하고 얘기를 한다, 재가자일 경우에, 기본 조건이 딱 있습니다. ··승 삼보에 대한 믿음이 확립될 것. 이 세 가지는 기본적인 조건입니다.

 

그러니까 어떠한 경우든지 "나의 스승은 부처님 한 분이다" 하고 마음에서 확립돼서 흔들림이 없는 상태가 됐을 때. 죽기 전에 누가 목사님이 와서 기독교 믿으면 천국간다 하면 샥 예수님으로 전환이 됐다, 그러면 확립이 안 되어 있는 상태라는 거라.

그리고 부처님 가르침은 사성제와 팔정도와 삼법인이다. 그것이 확립되어 있을 거 같으면 누군가가 삼법인이 아니고 사법인이다 할 것 같으면 “어, 그것은 아니야!” 하고 분명하게 선언을 할 수 있는 상태가 되어야 됩니다. "오직 이것만이 바른 가르침이다" 하고 확립돼있는 상태라는 거라.

그리고 부처님을 비롯해서 여러 제자들이 부처님과 똑같은 아라한이 되고 깨달음에 이르렀다는 사실을 알고 "아, 그분들도 내가 따라가야 될 스승으로서 존경해야 된다" 하는 사실을 분명하게 받아들이게 됩니다.

 

이것을 "··승에 대해서 확립이 돼있다"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게 돼있지 않을 것 같으면, 테라와다의 불교도, '불교도'를 줄여가지고 '불자'라고 합니다, "불자의 자격이 없다" 하고 얘기를 하게 됩니다. 그것은 경전 곳곳에서 나옵니다.

 

어느 스님 두 분이 다툼을 합니다. 테라와다 불자의 기본적인 조건이 뭡니까?

누구는 불·법·승에 대한 확립이 돼있어야 된다, 누구는 불·법·승뿐 아니라 계율을 완전하게 지킬줄 알아야 된다, 그렇게 얘기합니다. 어떤 게 맞을까?

··승에 대해서 확립이 돼있는 사람은 자동적으로 계율은 지키게 됩니다. 그러면 불·법·승에 대한 확립이 돼있다는 세 가지만 얘기하는 경우에는 당연히 계율은 지키는 것이 기본적인 조건으로 돼있기 때문에 그건 얘기를 안 하는 것뿐이라.

그런데 이걸 굳이 나누니까 불·법·승 삼보에 대한 확립과 계율에 대한 것들이 확립돼 있어야 된다 하고 4가지로 얘기하는 거라.

그래서 기본적으로는 여러분들은 4가지가 되는 형태입니다.

계는 반드시 지킬 것, 그리고 불··승 삼보에 대한 것들을 분명하게 확립해 나갈 것!

처음에는 확립해나가는 것이 힘들어도 그 길을 계속 따라나가다 보면 어느 순간에 딱 확립이 됩니다.

 

어떻게 해서 확립이 될까?

자기 스스로 그것들에 대해서 체험을 하면 확립이 딱 됩니다.

법도 체험을 하게 되면 부처님에 대해서 확립이 되는 거고, 상가에 대해서도 확립이 되는 거고, 계율에 대해서도 확립이 되게끔 됩니다.

자기 스스로 실천해 나가면서 확립해나가도록 하는 것, 그래서 완전하게 될 때 "아, 나는 인제는 누가 뭐래도 이생에서는 테라와다 불자로서 살아갈 수 있다" 하고 선언을 할 수가 있게 됩니다. 그럴려면 끊임없이 노력들을 해야 됩니다.

 

그게 테라와다 불교라는 뜻입니다.

그냥 명목적으로 테라와다가 아니라 테라와다 불자가 되도록 자꾸 노력을 하게 될 때 여러분들은 많은 삶이 바뀌어져 있게끔 됩니다.

 

15페이지에 테라와다 불교를 소승불교라고 부르지 말자 하는 부분은 읽어보십시요.

소승불교라고 할 경우에는 대승불교가 존재했을 때 대승불교에서 폄하하기 위해서 소승불교라고 불렀는데, 이미 역사적으로도 1956년도에 전체 세계불교도들이 다 모였을 때 "이 용어를 쓰지 말아라" 하고 이미 규정을 해놓았습니다.

다른 나라에서는 안 쓰는데 유독 우리나라에서만 소승불교라는 용어들을 씁니다. 그런데 그것은 그 용어를 쓸 경우에 자기 자신의 마음을 한번 잘 들여다보십시요. 어떠한 경우든지 남을 폄하할려고 한다든지 내리깔려고 하는 마음들이 항상 존재를 하게 됩니다. 그것은 불자의 기본적인 마음가짐이 아닙니다.

 

이 용어는 쓸 수가 없을 뿐 아니라, 왜 이 용어를 쓸 수가 없느냐 하는 것은, 이 용어를 쓰게 됐을 때는 부파불교 시대 때 일어난 것이기 때문에, 테라와다 불교는 어떠한 경우든지 부파불교가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용어는 실제적으로도 논리적으로도 맞지 않는다는 사실을 여러분들이 쭉 읽어보면서 하시기 바랍니다.

 

다음 시간부터는 「테라와다 불교의 진심」에 대한 부분부터 진행해 나가도록 하겠습니다. 쉽게 말하면 왜 테라와다 불교를 공부를 해야 되느냐, 테라와다는 그 뛰어난 것을 내세우기 위해서 그러는 건지 아니면 뭐 때문에 뭐 무슨 마음으로 그렇게 하는 건지 하는 것을, 그리고 「테라와다 불교의 기준점」들이 뭔가 하는 것들에 대한 것들을 계속적으로 공부를 해나가도록 그렇게 하겠습니다.

교재가 있기 때문에 앞으로는 여러분들이 받은 책은 여러분들의 책입니다. 여러분들의 소유이기 때문에 거기다 자기 자신의 이름을 쓰고 매주 올 때 가지고 오도록 하십시요. 거기다가 기록할 사람들은 기록하고 그렇게 해주면 됩니다.

오전은 여기서 마치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