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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라와다 신행생활 - 테라와다 불교의 진심 (20180407)

담마마-마까 2020. 7. 5. 19:46

https://youtu.be/_8VFdV7nYks

* 테라와다 신행생활 - 테라와다 불교의 진심 (20180407)

 

먼저 경전 부분에 대한 얘기를 하겠습니다. 테라와다 불교권에서는 경전이 빨리어로 되어있죠? 대승불교권에서는 한문이든 아함경이든 하는 것의 원류는 산스크리트어로 돼있습니다.

사실은 태국이나 버마, 스리랑카 이런 데서도 일반인들은 빨리어 잘 모릅니다. 빨리어 시험치는 사람들이나 아니면 빨리어를 전문적으로 공부하는 분들이나 알까, 일반인들은 사실은 여러분이나 진배없이 잘 모릅니다.

여러분도 꼭 빨리어를 배워야 되느냐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문제가 뭐냐면 지금 전 세계에 나와있는 부처님의 가르침 중에서 완전하게 남아있는 것이 빨리어로 된 것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산스크리트어도 완전하게 경·율·론 삼장이 남아있는 것이 없고, 티벳어도 마찬가지고, 중국어로 번역된 것도 마찬가지고, 완전하게 부처님 가르침 경·율·론 삼장으로 남아있는 것들이 없습니다.

지금 여러분들이 알고 있는 것들 대부분은 부파불교 시대의 단편적인 것, 어떤 것은 중부경전, 어떤 것은 장부경전, 어떤 것은 소부경전 중에 어떤 일부, 이런 식으로 되어 있는 걸 짜깁기 해가지고 알고 있는 정도밖에 되지 않습니다.

 

쉽게 말하면 부처님의 가르침이 뭔지를 알려고 할 것 같으면 빨리어로 된 것밖에는 지금 현재 남아있는 것이 없다는 겁니다. 그러면 빨리어를 해야 돼요? 그건 아니죠? 빨리어로 된 걸 번역한 것을 가지고 공부를 해도 충분하다는 그런 뜻입니다.

 

그런데 하나 명심해야 될 것은 빨리어 가지고 해탈에 이르는 것은 아니죠?

그건 절대 아닙니다! 산스크리트어도 마찬가지고. 경전은 단지 부처님 가르침을 완전하게 또 바르게 이해하기 위한 수단이지 그것으로 인해가지고 내가 마음이 청정해진다든지 아니면 해탈에 이른다든지 그런 것은 아니라는 거라.

그래서 명목적으로 빨리어를 하는 것도 사실은 맞지를 않습니다.

조금 전에 여러분들이 삼귀의 오계를 빨리어로 했습니다. 가장 기본적인 것이니까 그렇게 합니다. 적어도 그런 것 정도는 쉬운 것이니까 따라 할 수 있으니까 빨리어로 하는 것이지 만약에 따라하지 못한다면 한글로 해야 됩니다. 한글로 해야 의미가 와닿기도 쉽고.

그래서 테라와다 불교권에서도 통상적으로 빨리어를 일반인들이 쓰는 것이 몇 가지가 없습니다. 조금 전에 삼귀의 오계라든지 그다음에 기본적으로 경전 중에 한두 개 정도 그 정도로 빨리어로 독송하지 나머지는 전부 자기나라 말로 번역한 것들을 씁니다.

 

공양할 때 읊는 게송이 있습니다.

Paṭisaṅkhā yoniso piṇḍapātaṁ paṭisevāmi.

빠띠상카- 요-니소- 삔다빠-땅 빠띠세-와-미.

 

하면서 이렇게 읊는 게송들이 있는데 그게 빨리어 원음입니다. 스님들은 그걸 아니까 그걸 하고, 그게 끝나고 나면 일반 재가자들은 그 빨리어로 게송을 안 합니다.

자기 나라 말로써 "내가 받은 이 공양은 배부르게 먹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내가 수행해가지고 깨달음에 이르기 위해서 몸을 유지하기 위한 방편으로써 이 공양을 먹겠습니다." 하고 자기들 말로써 그렇게 합니다. 그게 바른 겁니다.

 

그런데 빨리어로 된 게 삼장이 완전한 것이, 경·율·론 삼장이 지금 완전하게 부처님 말씀으로써 그것이 진짜 부처님 말씀인지 아니면 뒤에 첨가된 건지 그건 차후의 문제입니다. 그건 나중에 가면서 불교사를 공부할 때 조금씩 해드리겠습니다.

그건 차후의 문제이고, 어쨌든 지금 현재 경·율·론 삼장이 남아있는 건 빨리어로 밖에 없기 때문에 반드시 불교를 공부하는 사람들은 빨리어로 된 것들, 번역된 것들을 가지고 공부를 해야 됩니다.

 

그런데 단지 일부에서 그러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거는 부처님 가르침의 원음이 아니다 해서 논장을 배제하고, 어떤 경우에는 경장 중에서 어떤 것을 배제하고 하는 그런 경우들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어찌 보면 참 위험한 발상입니다.

 

왜 그런가 하면 부처님 가르침을 보통 담마(dhamma)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담마의 의미가 뭐라? 진리! 또? 보통 세 가지로 얘기합니다.

'진리'라고 하는 의미. 보통 '일반적인 현상'이라는 뜻, 세상이 돌아가는 이치라는 그런 뜻입니다. 여러분들 태어나면 죽게 돼있죠? 그것도 담마에 속합니다.

나무는 자라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습니다. 그것도 현상들에 들어갑니다. 그런 현상이라는 뜻도 있고.

또 하나는 뭐가 있어요? '부처님 가르침'이라고 하는 그런 뜻으로 쓰여집니다.

 

보통 경·율·론 할 때 경은 이 세 가지가 다 포함이 돼있습니다.

그래서 경전에는 보면 아주 쉬운 것부터 해서 어려운 것까지 다양하게 다 섞여 있습니다. 그러니까 재가자들한테 일반적으로 설할 때는 "계율 잘 지켜라, 보시 열심히 하라" 이런 얘기들이 주가 됩니다. 그것 가지고는 완전하게 깨달음에 이르지를 못합니다.

 

그런데 아비담마에는 그런 부분이 전부 다 빠져있습니다.

전부 다 빠지고 아비담마에는 뭐만 들어가요? 해탈에 이르기 위한 것들만 딱 집어넣어가지고 요약을 해놓았습니다.

보통 여러분들이 경전을 읽을 때 장부 경전 중에 어떤 경전을 읽었다, 아니면 중부경전 어떤 경전을 읽었다, 단편적으로는 읽을 수가 있고 한데, 전체적으로 부처님의 가르침을 이해한다든지 아니면 전체적으로 깨달음에 이르기 위한 길이 뭔가 하는 것을 알기에는 사실은 부족합니다. 그 경장을 다 읽었다고 하더라도 자칫 잘못하면 자기 나름대로 해석할 수가 있고 또 그것들을 단편적으로 알게 되는 것이지 전체적인 모습을 알기에는 사실은 좀 힘이 든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중에서 일부들을 발췌해가지고 반드시 깨달음에 이르기 위한 것만 발췌해놓은 것이 아비담마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여기서 오해를 하는 것이 아비담마라고 하니까 경도 담마인데, 아비(abhi) 라고 하는 것은 '뛰어나다' 라는 그런 뜻입니다. 아비(abhi) 혹은 아디(adhi) 라고 하는 그런 것으로 쓰이는데, 그럼 담마보다도 부처님 가르침보다도 더 뛰어나다는 얘기가 돼버립니다. 그런데 이건 오해라는 거라.

여기서 아비담마에서 그 담마라고 하는 것은, 담마의 의미 3가지라고 얘기를 했는데 그 3가지 중에서 '진리에 이르는 길' 요거 하나만 가지고 말해놓은 겁니다.

 

그래서 경에서의 담마(dhamma)와 아비담마에서의 담마(dhamma)는 그 의미가 다릅니다.

진리에 이르기 위한 것들만 가지고 만들어 놓은 것이기 때문에 진리에 이르기 위한 것들은 어떠한 경우든지 가장 수승한 것들이 되게 됩니다.

그것들만 해가지고 이해를 할 것 같으면 진리에 이른다, 그것 따라 할 것 같으면 깨달음에 이른다 하는 그런 의미로써 '아비담마(abhidhamma)'라고 씁니다.

 

이걸 오해를 해버릴 것 같으면 부처님 가르침은 완전하고 그 이상 가는 것이 없다고 했는데 '아비(abhi)' 자를 왜 붙였을까? 해가지고 오해를 할 수가 있다는 거라. 그런 것들은 아니었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분명하게 이해를 할 필요가 있고,

"··론 삼장으로 이루어진 게 부처님의 가르침이다" 하고 생각을 하면 됩니다.

 

지금 완전하게 전해지고 있는 이것들은 누구든지 불교도일 거 같으면 반드시 알 필요성이 있다 하는 겁니다. 율장이라 해서 여러분들이 몰라야 된다는 것도 아니고, 아비담마라고 해서 그것이 후대에 쓰여졌든 아니면 부처님 당시 때 쓰여졌든 그것 가지고 시시비비를 가려가지고 이거는 배제를 한다든지 이래서는 안된다는 거라. 어떠한 경우든지 그 부분을 완전하게 전하는 것은 빨리어로 된 것밖에 없다는 거라.

 

완전하게 익히고 나서 그러고 나서 ", 이것은 내가 해야 될 것이고, 안 해야 될 것이구나" 하는 것을 분별해야 되는 것이지, 그러지 못하는 상태에서는 어떠한 경우든지 여러분들은 삼장을 그대로 받아들여야 됩니다.

 

특히 테라와다 불교도일 거 같으면 결집을 따라야 됩니다.

1차 결집부터 6차 결집까지 쭉 이어져 왔는데, 그 결집이라고 하는 것은 출가한 사람이든 재가인이든 누구든지 그 결집한 것들은 승인을 하고 그대로 따른다는 의미입니다.

1차 결집 때도 삼장이 결집했다고 분명히 전하고, 6차 결집 때도 삼장이 그대로 결집된 겁니다. 그럼 여러분들의 입장에서는 테라와다 불교도일 거 같으면 출·재가를 떠나가지고 어떠한 경우든지 삼장을 그대로 받아들여야 됩니다. 그게 기본적인 겁니다.

 

왜 빨리어를 꼭 고집하느냐 라고 하는 것은, 지금 현재까지 완전하게 경·율·론 삼장이 전해진 것은 빨리어로 된 것밖에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만약에 다르게 써진 것 산스크리트 본이 완전하게 전해지는 것이 있을 거 같으면 그것도 받아들여야 되는 거라. 그러고 나서 빨리어로 된 것과 비교를 해봐야 되는 거라. 그런데 그렇게 완전하게 전해지는 것은 다른 곳은 없다는 거라.

그런 것이지 테라와다 불교에서 일부러 다른 것들은 전부 다 배척하기 위해서 빨리어를 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그 빨리어는 반드시 여러분들이 이해가 되는 상태가 되어야 되는 것이지, 무조건 빨리어가 좋다고 해서 빨리어로만 독송할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라.

가장 기본적인 것은 독송을 하는 것들이 좋죠. 그렇지만 의미를 모르고 독송하는 것은 소용이 없다는 거라. 그래서 부처님도 분명하게 얘기를 하셨습니다.

 

독송하는 데는 기본적인 요소가 있습니다.

첫 번째가 마음에 자애를 지니고 독송하라.

마음에 선한 마음을 일으켜가지고 아, 이것으로 인해서 내가 행복해지고 이익이 있고 다른 사람들도 행복해지고 이익이 있다는 생각으로 독송을 해야 되는 것이지, 자애의 마음을 지니지 않고 독송하는 것은 그것은 악이 돼버립니다.

왜? 독송하는 것은 말로써 튀어나오는 겁니다. 말은 어떠한 경우든지 바른말이 되어야 되고, 선한 말이 되어야 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독송을 할 때나 아니면 스님을 따라서 제창을 하는 빨리어라고 하더라도 항상 마음에는 자애의 마음을 지니고 독송을 해야 된다는 겁니다. 그게 첫 번째 기본적인 요소입니다.

 

두 번째는 의미를 이해하고 독송을 해야 됩니다.

만약에 예를 들어서 여러분들이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럼 그거는 빨리어로 독송해야 되는 것이 아니고, 다른 사람은 빨리어로 하더라도 나는 빨리어로 된 것을 해석된 것이 있으면 그 해석된 본을 봐야 됩니다. 독송하는 것이 아니고.

독송은 말로써만 꺼내는 것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고, 마음속에서 말하는 것들도 독송의 영역에 속합니다. 예를 들어서 "붓당 사라낭 갓차미" 하면 다른 사람들은 “붓당 사라낭 갓차미” 하는데 나는 그게 무슨 의미인지 모른다, 그럼 그 밑에 분명히 써놓았습니다. "부처님을 의지해서 나아가겠습니다." 그럼 자신은 그걸 해야 된다는 거라. 한글로.

그래서 의미를 분명하게 지니고 그것들을 독송을 해야 되는 것이지, 의미없이 다라니 주문하는 것도 아니고, 그건 아무리 해봐야 그것은 나에게 도움이 안 된다는 거라.

 

세 번째가 왜 여러분들은 이걸 따라 하고 독송하는 거라? 그대로 실천하기 위한 겁니다. 이것을 반드시 실천해서 한다는 것을 전제로 해서 경전들을 독송해야 됩니다.

부처님 가르침은 어떠한 경우든지 실천되지 않는 가르침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의미 없는 말이라든지 아니면 관념적인 말이라든지 이런 것들은 아예 경·율·론 삼장에 들어있지도 않고 부처님이 말씀하시지도 않았다는 거라.

어떠한 경전이든 어떠한 위나야(律)든 거기에는 그 뜻을 따라서 실천하기 위해서 만들어 놓아진 겁니다. 부처님이 그렇게 설하신 것입니다. 그럼 여러분들이 그걸 독송할 때는 나는 이것을 실천하기 위한 거라는 생각을 버려서는 안 된다는 거라.

 

이 3가지는 독송할 때 기본적인 요소입니다.

무조건 그냥 빨리어만 독송하면 되겠지 하고 생각하면 그것은 큰 오산이라는 거라.

 

그게 「테라와다불교의 진심」 부분에서 첫 번째 부분에 해당됩니다.

 

또 하나 「테라와다불교의 진심」은 뭐가 있느냐면 여러분들이 표준으로 삼아야 하는 것이 뭔가 하는 것입니다.

신적인 의미로써 부처님을 표준으로 삼아서 거기에 매달리고 그것에 기도하고 할 것인가? 또는 나를 가르치는 스님이 훌륭하고 뛰어나니까 스님을 본보기로 할 것인가? 또는 어느 조사스님이 아주 훌륭하고 뛰어난 분이기 때문에 나는 그 조사의 말씀이나 조사의 가르침을 따라 할 것이냐? 뭐로 기준점을 잡을 것이냐는 거라. 살아가면서 이것이 맞고 이것은 틀리다 하는 기준점으로 삼는 것은 뭐라고 하느냐는 거라.

 

그 기준점을 테라와다 불교에서는 분명하게 제시를 해놓았다는 거라 부처님이!

부처님의 가르침이 기준점이지 어떤 것도 다른 기준점이 될 수가 없다는 거라. 아무리 스님이 이렇게 얘기하더라도 그것이 부처님 가르침하고 맞을 거 같으면 받아들여야 되는 것이고, 어느 조사스님이 이렇게 얘기했다 하더라도 그것이 부처님 가르침하고 분명하게 동일하다 할 것 같으면 그것은 받아들이고 공부할 필요가 있는 것이지, 그렇지 않을 거 같으면 다른 것은 전부다 배척을 해도 무방하다는 거라.

 

기준점이 반드시 부처님의 가르침이라는 거라.

그래서 그 가르침에 따라서 이것은 내가 해야 되는 것이고, 이것은 하지 말아야 되는 것이고 하는 것들을 분명하게 잡을 수가 있다는 거라.

기둥을 세우는 데는 어떠한 경우든지 부처님 가르침이 여러분들의 기둥이 되어야 되는 것이지, 다른 스승이나 아니면 조사들이나 아니면 또 다른 것들 신들이 기준점이 될 수는 없다는 거라.

설혹 여러분들이 '부처님, 나 이러한 소원이 있는데 들어주십시요' 부처님이 안 들어주면 어떻게 할 건데? 부처님 배신할 거라? 기준점이 없으면 그렇게 돼버린다는 거라.

경전은 어떠한 경우든지 상치(相馳)되는 것이 없습니다. 이 말 했다 저 말 했다 하는 것이 전혀 없다는 거라. 그래서 그게 부처님의 가르침, 완전하게 가르친 것들입니다.

 

그 기준점을 분명하게 제시하는 것이 이 테라와다 불교에서 하는 일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출가자와 재가자를 하나로 묶어주는 거고, 또 스승과 제자를 하나로써 묶어주는 거고, 이 마을에서 저 마을로 하나로써 묶어주는 기준점이 된다는 얘기입니다.

그게 테라와다의 진심입니다.

 

그것이 테라와다 만이 뛰어나고 그것만을 따라라 하는 것이라든지, 아니면 이거 외에는 다른 것은 다 틀렸다 하기 위해서 부정하기 위해서, 테라와다에서 기준점을 세워주고 테라와다를 가르치는 것은 아니라는 것들을 여러분들이 분명하게 알아야 됩니다.

왜 부처님 가르침에 묶어둘려고 하느냐면 어떠한 경우든지 부처님 가르침은 해탈·열반에 이르게 하기 위한 겁니다. 여러분들 마음을 청정하게 하고 해탈·열반에 이르게끔 만들어주기 때문에 그걸 기준점으로 한다는 걸 분명하게 여러분들이 이해할 줄 알아야 됩니다.

 

그래서 이걸 배우면서 시시비비만 자꾸 가릴려고 한다든지 아니면 다른 사람과 자꾸 싸우기 위한 도구로써 공부를 한다든지 이래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어떠한 경우든지 자기 자신의 청정과 자기 자신의 해탈을 위해서 이것을 배운다는 생각을 가져야 됩니다. 그렇게 했을 때 다른 사람들이 나를 보고 따라하게끔 된다는 거라.

 

꼭 보면 설익은 사람들이 남을 비판합니다. 또 설익은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뭔가 봉사한다고 하면서 내세울려고 그럽니다.

잘 익은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봉사한다고 하더라도 자기를 내세우는 법이 없습니다. 잘 익은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하고 다툼을 일으키지 않습니다.

그게 '기준점이 서 있느냐, 서 있지 않느냐'의 차이라는 겁니다.

 

그다음에 뒤에 22페이지 보면 「테라와다 불교의 기준점」 입니다.

 

지금 내가 테라와다를 잘 배우고 있느냐, 안 배우고 있느냐 하는 것을 기준점으로 삼는 것들이 뭔가 하는 거라.

 

첫 번째가 모든 것은 스스로 확인하라.

확인되지 않는 것들은 여러분들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확인되지 않는 것들을 다른 사람들에게 얘기할 필요도 없고 그것이 맞다고 주장할 필요도 전혀 없다는 거라.

여러분들이 수행해가지고 그정도 과위에 이르지 않으면 그정도 과위에 이른 사람들을 알 수 있는 방법이 전혀 없습니다. 그래서 그냥 무조건 스승이 가르치는 것을 받아들인다든지, 아니면 관습적인 것들 이때까지 해온 것들을 그대로 하는 것들이 맞는다든지 이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거라. 여러분들이 확인된 것들만 자꾸 하도록 해야 여러분들 것이 되는 거고, 그것이 테라와다 불교의 기준점이다 하는 생각을 잊어버려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스스로 자꾸 확인을 해야 됩니다. “아, 이렇게 하니까 내가 좀 더 나아지는구나” 하고 확인이 됐으면 그걸 계속 따르게 된다는 거라.

 

그다음에 두 번째 기준점이 해탈에 이르는 길을 가라.

수행하는 것 또는 여러 가지 계를 지키고 보시를 하고 법을 듣고 하는 공덕을 쌓는 그런 것들 그 목적이 뭐라? 내가 왜 하고 있느냐는 거라.

그걸 함으로 인해서 여러분들한테 이익을 주기 위해서만 이걸 하고 있느냐는 거라. 수행을 해보면 마음이 청정해져서 깨끗해지고 화가 잘 안 일어나니까 나한테 이익은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으로 끝날 거라?

 

서양에서는 그렇게 하는 수가 있습니다. 수행하는 것도 만약에 병이 있다 아니면 우울증이 있다, 그걸 치료하기 위해서 수행하는 기법을 도입을 합니다. 그럼 그 우울증이나 그런 것을 치료하고 나면 거기서 끝나버립니다.

그런데 살아가면서 우울증만 여러분들한테 생깁니까? 다른 것들이 많이 생깁니다. 그럼 그것들이 생기면 그것들을 또 배워야 됩니다. 그것이 끝나고 나면 또 끝나고.

여러분도 꼭 마찬가집니다. 테라와다 불교를 배우면서 그것을 수행하고 또 실천하고 하는 것들이 무엇 때문에 하는가 하는 것을 자꾸 까먹어버리면 그거 하고 나면 끝나버린다는 거라.

 

그것의 목적은 딱 두 가지입니다.

지금 현재 내가 행하고 있는 것에서 좀 더 많은 선한 것들을 일으키기 위한 것.

예를 들어봅시다. 스님한테 공양을 올렸습니다. 스님한테 공양올리면 '나에게 복이 오겠지' 하는 마음으로 할 것 같으면 그것밖에는 자기한테 돌아갈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공양을 올릴 때, 올리기 전에 '나는 기쁜 마음으로 이것을 했다' 그러면 기쁨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리고 공양 올리면서 그것을 분명하게 손을 가지고 넣는다는 것을 분명히 알면서 알아차릴 것 같으면 마음이 청정한 상태를 유지하게 됩니다. 공양 올리고 나서 돌아오고 나서 자기 자신을 돌아보면 '아, 내가 참 잘했다' 하는 마음이 드니까 행복한 마음이 일어나게 됩니다. 기쁨과 청정한 마음과 행복한 마음이 탁발 전이나 하는 때나 하고 나서도 계속적으로 일어나게 된다는 거라.

 

해탈을 목적으로 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그렇게 알아차리게 된다는 거라.

또 그렇게 공양 하나 올리는데도 그냥 단순하게 '아, 나한테 복이 돌아오겠지' 하는 마음 한번 일으키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청정한 마음이, 선한 마음들이, 기쁨이나 행복이나 선한 마음들이 알아차리는 것들이 계속적으로 일정한 시간동안 계속적으로 일어나게끔 된다는 거라.

쉽게 말하면 무언가를 하나 했을 때 얼마만큼 선한 마음이 많이 일어나도록 하느냐?는 거라. 적어도 테라와다 불교를 배웠으면 그거는 할 줄 알아야 된다는 거라. 남들보다도 좀더 선한 마음이 많이 일어나게끔 하기 위한 겁니다. 그 방법들을 분명하게 알아야 됩니다.

 

그다음에 두 번째가 그것들은 해탈에 이르기 위한 것이라는 거라.

그 모든 것들은 내가 해탈에 이르러서 윤회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것이지, 천상세계에 태어난다든지 아니면 내가 지금 당장 좀 더 기쁨이 있고 행복해지기 위한다든지 이렇게만 해서 그쳐서는 안 된다 하는 거라.

테라와다 불교의 두 번째 기준점이 바로 이것들이라는 거라.

좀 더 많은 선한 것들이 지속적으로 일어나게 하기 위한 것, 그래서 테라와다 불교를배우면 배울수록 선한 것들이 선한 마음, 선한 말, 선한 행동들이 더 많아지게 되는 거라. 그리고 배우면 배울수록 나는 점점 더 깨달음을 향해서 나아가고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게 된다는 거라. 그게 테라와다 불교의 두 번째 기준점입니다.

 

그다음에 세 번째 기준점이 실천수행하라.

테라와다는 어떠한 경우든지 실천수행하지 않으면 반쪽짜리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빠리얏띠(pariyatti, 이해), 부처님의 가르침을 정확하고 바르게 왜곡됨이 없이 있는 그대로 배우는 것. 배우는 것들을 잘 배워야 됩니다. 쓸데없는 것 자꾸 배울려고 하지 말고.

 

그리고 빠띠빳띠(paṭipatti, 실천) 배운 것들은 반드시 실천해야 됩니다. 수행으로 실천하든 일상생활에서 실천되든 실천이 돼야 됩니다. "만족할 줄 알아라" 하고 배웠다. 그러면 내가 만족하는 것들을 실천할 줄 알아야 됩니다. 그래서 나에게 진짜 만족감이 일어나야 되는 겁니다. 실천하는 것들이 겸해져야만이 그 배움은 완전하게 됩니다. 그렇게 실천 됐을 때 자기 자신은 경험되는 것들이 쌓이게 됩니다. 완전하게 자기 것이 됩니다.

 

빠띠웨다(paṭivedha, 체험), 자기 것들이 경험된 것들이 있어서 '아, 나는 어느 정도의 위치에 올랐다'는 것을 스스로 알게 되낟는 거라. '난 더 이상 욕심부리는 것은 안 일어난다', '나는 인제 성인의 경지에 도달했다', 누가 그 사람 보고 “너 잘산다”고 봐주는 걸 원하지 않고 “너는 수행에서 이 정도의 경지에 이르렀구나” 하고 인정해주는 것을 바라지 않고, 그것은 스스로가 알게끔 된다는 거라.

다른 사람들이 그것을 인정해주든 안 해주든 그것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자기 스스로 그것들을 분명하게 알게끔 됩니다. 실천하지 않을 거 같으면 그러한 결과물들을 얻었다는 것을 본인이 분명하게 인식하고 알지를 못하게 됩니다.

 

그다음에 네 번째 기준점은 출가자나 수행자처럼 살아라.

여기에 그렇게 돼있습니다.

 

출가자나 수행자는 결코 다른 생명을 죽일 수 없다.

남에게 폐를 끼치는 사람은 출가자나, 수행자가 아니다.

비난하지 않고 피해주지 않으며,

출가자 수행자의 계율을 지키고,

음식을 절제하고, 고요한 곳에 머문다.

초월한 마음을 목표로 하여 노력한다.

 

여러분들 살아가는 것들이 출가자나 수행자답게 살아가라는 거라. 그걸 '브라흐마짜리니', '브라흐마짜라' 범행수행자처럼 살아가라는 거라. 천상세계에 범천과 같은 삶을 살아가야 된다는 거라. 여러분들의 마음속에 자비희사의 마음을 지니고 있으면 범천과 같습니다. 범천의 삶과 같습니다. 수행자답게 살아가게 됩니다. 출가자와 다름이 없게끔 됩니다.

 

기준점은 이렇게 됩니다.

그렇게 됐을 때 여러분들은 법의 보호를 받고 법의 소중함을 알기 때문에, 내가 법을 따라갈려고 하기 때문에, 법으로부터 벗어나지 않기 때문에, 내가 또 스스로 법을 보호하는 상태가 됩니다. 완전하게 깨달음에 이르기 전까지는 어떠한 경우든지 그 법을 따라서 법을 의지해서 나아갈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이 4가지가 테라와다 불교의 기준점입니다.

여러분들은 이 4가지를 반드시 기준점으로 삼아서 그것을 따라갈 수 있도록 그렇게 해야 됩니다.

 

간단하게 오늘은 34페이지까지 했습니다. 다음 시간에 35페이지부터 하도록 하겠습니다. 오전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오후는 프린트물 나간 거 있죠? 그걸 가지고 하겠습니다. 귀찮더라도 이것들을 집에 가서 읽어보십시요. 그리고 올 때는 반드시 가지고 오십시요. 보니까 어떤 사람은 그냥 아예 놔둬버리고 가고, 어떤 사람은 안 가져오고 하는데 그리하지 말고 자꾸 여러번 읽어야 자기 것이 될 수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