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일상수행법문 녹취/2014~2015 일상수행법문

소리를 잘 듣는 방법 「담마경청」 (20140408)

담마마-마까 2020. 11. 4. 13:09

https://youtu.be/dNBdJ1woG4I

* 소리를 잘 듣는 방법 「담마경청」 (20140408)

 

저번 주부터 일요일하고 월요일하고 다른 곳에 법회가 생겨가지고, 우리 선원만 해도 벅차는데, 그래도 몸이 좀 나으니까 거절도 못하겠고 해서, (수행자 질문 : 시외로 나가십니까?) 예. 대구하고 양산인 것 같아요. 우짜겠어. 해달라는 걸 갖다가 안 해줄 수도 없고.

 

오늘은 -와까(sāvaka)라고 하는 단어에 대한 이야기를 좀 하겠습니다.

아까 경전 읽을 때 '아리야 사-와까(ariya sāvaka)'라고 하는 거 나왔죠? 무슨 뜻입니까? '성스러운 제자들', 아리야는 성스럽다는 거고, 사와까는 제자들이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원래 사와까의 의미는 제자들이라고 하는 의미보다는, 물론 연관성은 있는데, "법을 듣는 사람들"이라고 할 때 "-와까(sāvaka)" 라고 그럽니다.

 

남자들은 사와까(sāvaka)라고 그러고, 여자들은 사-위까(sāvikā)라고 그렇게 얘기하죠. 마찬가지로 우빠-사까라고 하는 거 있죠? 남자 재가신자들은 우빠-사까(upāsaka), 여자 재가신자는 우빠-시까-(upāsikā) 그렇게 얘기하죠.

원래 우빠사까는 청신남(淸信男) 이라는 그런 의미보다는 우빠(upa)-가까이에서 일을 거드는 사람, 가까이에서 스님들 곁에 있으면서 시중드는 사람이라는 그런 의미를 가지게 됩니다. 원래의 의미에서 많이들 변했죠? 사와까라는 의미도 그렇고, 우빠사까라는 의미도 그렇고.

 

물론 법을 잘 들을려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절에 자주 가서 법문 듣든지 그래야 법을 잘 듣는 사람이 됩니다. 사실은 법을 잘 듣는 사람은 포살일 하고 불재일을 잘 지키는 사람입니다. 일주일에 한번씩 꼭 절에 가서 불재일을 지킬려고 하고 이러는 사람들이 되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자들이다' 하고 얘기하고 '불제자들이다' 하고 얘기들을 하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연관성은 있기는 있습니다. 있기는 있어도 사와까의 의미는 잘 듣는 사람을 얘기합니다.

여러분들이 듣는 게 꼭 이 귀를 통해서 법만 듣는 것은 아니잖아. 여러 가지 소리들을 다 듣게 되죠? 또 주변에서 하는 얘기들이라든지 또는 자기가 하는 얘기라든지 이런 것들도 다 귀를 통해서 듣게끔 돼있습니다.

그래서 '귀를 통해서 잘 듣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사와까'라는 것이 있습니다.

 

어찌하면 잘 들을 수 있을까?

부처님 당시 때도 부처님이 법문하는 얘기를 듣고 그자리에서 수다원이 됐다, 또는 일래과가 됐다, 불환과가 됐다, 하는 얘기들이 경전 곳곳에 쓰여있습니다. 그 사람들은 어떻게 듣기에 그 듣는 것만으로도 그 경지에 이르르게 될까?

 

물론 기본적인 밑바탕들은 돼있었겠지. 그래서 바라밀들을 항상 쌓아오고, 여러분하고 차이가 그겁니다. 여러분들은 나쁜 짓들만 만날 쌓아가고, 그사람들은 그래도 바라밀들을 자꾸 쌓아오고 하는 거고. 그리고 기본적인 바탕들이 그 바라밀들이 성숙되어 있는 상태에서 시작들이 되기 때문에 우리들 하고는 조금 차이는 나긴 납니다.

그래도 어쨌든 법을 들으면서 환희심이 일어나서 그 법을 듣는 것들에 대해서 다시 자기가 자세하게 그걸 곱씹어보게 되고, 곱씹어보고 나서 그대로 다시 따라하게 되고, 이런 과정들은 환희심이 일어나고 나서의 과정들은 똑같습니다.

 

그런데 전에도 그런 얘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수행의 순서, 수행의 단계를 밟아가는 데는 첫 번째 단계가 마음이 고요하고 맑고 깨끗해지지 않으면 안 된다.

그게 안 될 거 같으면 법을 바로 들을 수가 없습니다. 법을 들어도 자기가 취사선택 하게 되고 또는 왜곡되게 하게 됩니다.

가끔씩 그런 거 많이 봅니다. 법문을 했는데 나는 이런 의도로 했는데 어떤 사람들은 그걸 또 다른 의도로 듣고 그걸 또 기록하고 하는 것들을 봐요. 그 사람이 한 거니까 일체 관여는 안 하기는 하는데, ‘아, 내가 저런 의도는 아니었는데’ 하는 그런 생각이 일어나기는 합니다.

그거는 뭐냐면 있는 그대로를 듣지 못해서 그러는 거라.

또는 이런 사람들은 자기가 필요한 것만 듣습니다. 나머지 거는 안 듣습니다.

그거는 왜 그렇게 되느냐 하면 마음이 우선 고요하게 가라앉지 못해서 그렇게 되게 됩니다. 법을 들을 때는 그렇게 돼야 됩니다. 우선 먼저 마음이 고요하고 맑고 깨끗하게 되도록 해서 그대로 그냥 들을 수 있도록 해야 됩니다.

 

만약에 그렇게 됐다 치자. 그거는 쉽습니다. 아주 쉬운 겁니다.

그러고 나면 듣는 걸 어떻게 들어야 될까? 꼭 법을 듣는 것만 얘기하는 것이 아니고, 소리 듣는 것도 마찬가집니다. 소리 들리는데 눈은 필요 없죠? 눈이 소리 듣는 것은 아니잖아? 그 눈에다가 마음을 두면 안 돼. 스님을 보고 있다고 하더라도 나를 보아서는 안 돼. 눈에다가 마음을 두니까 내가 보일 거 아니라? 그러니까 그걸 피할려고 할 거 같으면 대부분 사람들은 법문 들을 때 눈을 지긋이 감습니다. 아예 외부적인 것들로부터 마음을 뺏기지 않기 위해서 보이는 것들로부터 차단을 시킬려고 합니다.

 

꼭 그렇게 하지 않더라도 눈을 뜨고 있다고 하더라도 나를 볼려고 해서는 안되는 거라. 마음을 거기에 뺏기지 않도록 하고. 모든 마음은 어디다 두어야 되겠어요? 귀에 두어야 돼, 아니면 내가 말하는 이 소리에 두어야 돼? 귀에 두도록 해야 됩니다! 귀에 두어야 됩니다! 소리에 둘 거 같으면 마음이 그쪽으로 뺏기게 됩니다. 외부로 향하게 됩니다.

 

여기서 '툭딱' 했다. 그럼 어떻게 돼? 우리는 밖에 소리에다 마음을 두기 때문에 그게 뭔가 하고 그 소리나는 쪽으로 보게 되는 겁니다. 외부로 마음을 빼앗겨 버리게 된다는 거라. 그런데 귀에 둘 거 같으면 툭딱 하는 소리만 듣게 됩니다. 그게 나쁜 소리라든지 아니면 좋은 소리라든지 이런 거하고 관계없이 귀에다 먼저 마음을 두도록 해야 되는 거라니다. 밖의 소리에다가 마음을 둘려고 하지말고 나의 귀에다가 마음을 두도록 자꾸 해야 됩니다. 한번 해보십시오. 밖에 두는 거 하고 안에 이 귀에 두는 거 하고는 굉장히 차이가 납니다.

 

그런데 소리는 두 가지 방법으로 듣게 됩니다.

그 소리를 들을 때 그것의 의미나 뜻들을 듣는 경우가 있고,

또 하나는 그 소리에서 울리는 파동·진동을 듣는 경우가 있습니다.

 

처음에는 어떤 경우든지 그 소리 자체의 의미나 그 소리 자체의 뜻을 들을려고 자꾸 해야 됩니다.

그래야 만이 그 내용이 가슴에 남겨지게 됩니다. 귀를 통해서 들리는 소리들이 있는 그대로 그 의미들을 자꾸 알려고, 그 소리들을 쫓아가면 그 의미들은 알게 돼있습니다. 새로운 단어가 나왔으면 물론 ‘이게 뭐지’ 하고 생각이 일어나겠지만 생각이 일어나는 것을 나둬버리고 새로운 것이 나왔으면 그냥 새로운 것이라고 받아들이고 따라가다 보면 나중에 그거는 이해를 하게끔 됩니다.

그래서 소리를 들을 때는 먼저 그 방법을 통해야 됩니다.

소리의 높고 낮음, 고요하고 또는 화가 나고, 의미가 어떤 의미인가 하는 것들을 그대로 그냥 들을려고 해야 됩니다.

 

그게 순순히 잘 따라가지게 되면, 적어도 한시간까지는 바로 잡는다고 치자.

삼십분까지는 큰 노력이 없어도 그게 따라가진다고 할 것 같으면,

그러면 그다음에는 진동을 알아차릴려고 해야 됩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지 않고 아는 상태에서 진동을 알려고 할 것 같으면 마음은 굉장히 혼란해집니다. 과연 여러분들의 마음이 다른 데 마음이 뺏기지 않고 눈을 보는 것이든, 아니면 소리가 들리는 밖에 두는 것이든, 이런 데다 뺏기지 않고 오롯이 이 소리만 그냥 들을 수 있을까? 아마 모르긴 해도 굉장히 힘들 겁니다. 그리해도 어떡할 거라?

 

부처님 당시 때 깨달음에 이른 사람들은 그 과정을 겪어서 깨달음에 이르렀다는 거라. 먼저 부처님이 그 사람이 배가 고프면 밥을 먹여서, 또는 그 사람의 마음이 다른데 헤매고 있고 고통스러워 할 거 같으면 그 고통을 잠재우고 나서 그래서 마음을 고요하고 맑게 하고 나서 그러고 나서 법을 설하게 됐다는 거라.

고요한 상태에서 법을 들을 때 그 사람들은 그냥 그 부처님의 소리만 쫓아갑니다.

소리만 쭉 쫓아가서 잘 되니까, 그다음에는 진동 그 소리가 귀에 들릴 때 일어나는 진동·파장을 가지고 알아차리게 됩니다.

그 파장을 알아차리는 것은 오래하면 안됩니다.

어느 정도 파장의 높낮이를 알고, 파장이 일어나는 현상들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사라지고 한다는 것만 알 것 같으면,

그다음에는 그 소리가 들릴 때 일어나는 마음의 느낌, 가슴에서 일어나는 느낌들을 쫓아가야 됩니다.

 

간단한 거 같은데 이게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굉장한 차이가 납니다.

소리에서 들리는 의미나 그 내용들이나 그리고 높낮이를 파악을 할 때는 집중하는 힘들을 키우게 됩니다. 거기에 집중하지 않으면 마음이 다른데 달아나버립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마음은 고요한 상태에서 집중이 돼있을 거 같으면 알아차림은 그대로 유지가 돼나갑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거기에서 무상··무아의 성품을 알 방법은 없습니다.

그럼 그걸 알 수 있는 방법들은 가슴에서 일어나는 느낌들입니다. 느낌들은 빠른 속도로 변하게 돼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내가 콘트롤 할 수 있는 것들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러니까 부처님의 법을 듣는 것으로만 해도 이미 무상·고·무아의 성품을 자기가 확 체험을 하게끔 되는 거라. 그러니 그자리에서 수다원이 되고 일래과가 되고 하게 되는 거라.

자! 그래서 법을 듣는다는 것은, 담마를 경청한다는 것은 그마만큼 중요한 부분입니다. 여기서 얘기하는 담마는 법만 얘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소리 듣는 것들을 다 얘기하는 겁니다.

 

여러분들이 만약에 소리 들리는 것들이 잘 되어나간다. 혹은 들리는 것을 잘 듣지 못한다. 이럴 것 같으면 어떤 차이들이 있을까?

 

아까도 얘기했지만 소리를 잘 듣고 자기가 체험을 하고 나면, '나'라고 하는 환상이 깨어져버립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생명체를 죽일려고 하질 않습니다.

그런데 소리 듣는 거를 잘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하잘 것 없는 것 아니면 나보다도 힘이 없는 것에 대해서는 억압할려고 하고 해꼬지를 할려고 합니다.

 

소리 들리는 것이 잘 훈련된 사람들은 들리는 것뿐 아니라 그것이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도 알기 때문에 내가 말을 할 때 평온하게 말을 합니다. 고요하게 말을 합니다. 절대 언성을 높인다든지 아니면 높낮이를 많이 해가지고 다른 사람들에게 감정을 일으키게 할려고 하질 않습니다.

그런데 소리를 잘 듣지 못하는 부류 사람들은 그 반대로 하게 됩니다.

그러면 재미 없어. 그리고 그렇게 해가지고는 다른 사람들이 통하지 않는다고 받아들이고.

남에게 싫은 말을 하고, 남에게 상처를 주는 말을 하고, 그렇지 않고 자애로운 말을 하고, 도움을 주는 말을 하고는 차이가 나게 됩니다.

 

또는 소리를 잘 듣는 사람들은 성냄이 없습니다.

소리 들리는 것으로 인해서 가슴에서 그것이 강한 자극이 왔을 때 일어나는 고통을 알기 때문에, 너무나 아프기 때문에 내가 그렇게 화를 냈을 때 나도 굉장히 아플 뿐 아니라 다른 사람도 굉장히 아프다는 사실을 압니다. 화를 안 냅니다.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어떤 대상을 만나든지 화가 항상 증폭되게 됩니다.

 

듣는 것을 잘하는 사람들은 거짓말을 하질 않고 남의 말에 대해서 그것을 자기 것으로 만들려고 하질 않습니다. 아무리 무슨 소문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냥 그걸 듣기만 할 뿐이지 그것을 남에게 전하지도, 그리고 그것을 가슴에 담아두지도 않을 뿐 아니라, 자기가 말을 할 때도 거짓되게 말을 하질 않는다는 거라.

도둑을 잡을 때 거짓말 탐지기를 할 것 같으면 거짓말을 하는지 안 하는지를 안다고 그럽니다. 그건 다르게 아는 것이 아니고 가슴에서 일어나는 파동 때문입니다. 거짓말할 것 같으면 마음은 긴장되게 돼 있고 항상 요동치게 돼 있다는 거라. 그게 얼마나 힘들다는 거를 알 것 같으면 요동 안 칠려고 합니다. 당연히 거짓말을 안 하고 진실된 말들을 하는 겁니다.

 

이게 인제 소리를 잘 듣는 사람과 듣지 못하는 사람의 차이입니다.

 

그러면 일반적인 소리가 아니고, 법을 듣는 사람들, 여러분들 같은 경우들입니다.

 

법을 들었는데 그것을 왜 그대로 듣지 못하고 자기화시켜서 듣는가?

자기가 취사선택을 해서 듣는가?

또는 자기가 그 법을 들었는데 듣고 나서 일어서고 나면 왜 하나도 기억을 못하는가?

 

여러분들 법문 녹음 안 한지가 거의 1년반 2년 넘어 거의 됐을 겁니다. 1년반 2년 전에 그것까지는 바라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6개월 전에 법문한 내용들을 기억할 수 있습니까? 기억 못하죠! 지금 자료로 남아있는 것도 아니고 녹음돼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다시 들을 수 있는 방법도 없습니다. 왜 그렇게 돼요?

우선 가장 대표적인 게 그것을 자기 것으로 만들지를 못했다는 거라. 그걸 듣고 내가 그것을 실천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런 것이고, 그것은 오히려 뒤에 일입니다.

 

법문을 들을 때의 자세가 문제가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일단 가장 먼저는 법을 들을려고 하질 안 해. 뭐 재미있는 미사여구를 쓰지도 않고, 목소리도 뭐 비슷비슷한 톤으로 얘기를 하고, 안 듣는 거라. 그것이 자기에게 이익된다는 생각을 일으키지를 못한다는 거라. 법을 듣지 않으면 당연히 그거는 기억을 못합니다. 쉽게 말하면 법에 대한 중요함을 모르기 때문에 그렇다는 겁니다.

 

그다음에 두 번째, 법을 전해주는 사람, 스승이든 스님이든 그것의 소중함을 중요함을 모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적어도 그거 하나만 알아도 그 법을 들을려고 그럽니다. 가끔 스님이 어떤 해에는 태국에 나갔다 오기도 합니다. 그럼 나갔다 오면 하는 얘기가 “아, 스님 없으니까 뭐 어떻다” 하는 얘기들을 합니다. 그거는 없을 때의 소중함을 알기 때문에 그렇다는 겁니다. 법을 들을 기회도 없고, 앉아서 수행을 하더라도 잘되지 않고.

 

그다음에 세 번째, 첫 번째도 안되고 두 번째도 안 되도 괜찮아. 그래도 적어도 이 세 번째가 될 것 같으면 그래도 법은 오래도록 기억을 하게끔 됩니다. 가장 중요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자기 자신을 등한시한다는 겁니다.

자기 자신이 가장 사랑스럽고 가장 소중한데도, 자기 자신에 대해서 중요하게 여기질 안 해요. 지금 자기 자신이 할 것이 뭔지를 모르기 때문에 그렇다는 거라. 자기 자신이 중요하고 소중할 것 같으면 열심히 지금 해야 될 것들을 해야 되는데 그걸 못 하는 거라.

 

차라리 법문 안 들을 것 같으면 다른 좋은 일을 하라는 거라.

가끔씩 부엌에 가서 열심히 음식 만드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법문할 때. 법문의 소중함을 몰라서도 아니고, 또는 스승의 소중함을 몰라서도 아닙니다. 그런데 지금 누군가가 부엌에서 음식을 만들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에 자기가 해야 될 일들을 지금 하고 있는 겁니다.

적어도 그분은 자기 자신을 소중하게 여기고 중요하게 여기고 있다는 겁니다.

차라리 그렇게 하라는 거라. 가만히 앉아서 법문도 듣지 않고 자기 자신을 소중하게 여기지도 않을 거 같으면 왜 앉아있느냐는 거라. 다른 일을 하라는 거라. 자기 자신이 지금 해야 될 일들을 분명하게 알아서 그것을 해나갈 수 있도록 해야 됩니다.

 

그다음에 네 번째, 어떠한 경우도 마음이 맑고 깨끗해져 있다고 하더라도 망상은 항상 들어오게 돼있습니다.

혼란스러운 마음들은 항상 일어나게끔 돼있습니다. 그래서 마음이 망상에 휩싸여있다든지 혼란한 마음이 될 것 같으면 법문을 들을 수가 없습니다. 들어도 간헐적으로 들릴 수밖에 없습니다.

마음이 맑고 고요하고 깨끗하게 되고 나면은, 그다음에 두 번째로 해야 되는 것이 망상하는 것, 생각하는 것, 혼란한 마음을 가지는 것들을 없애야 됩니다. 그것이 되야만이 소리를 있는 그대로 듣게 됩니다. 진리를 있는 그대로 체험하게 된다는 겁니다.

 

이게 대부분 오래도록 법을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이 가지는 공통적인 겁니다.

 

물론 내가 모르는 단어들을 얘기했다, 빨리어로 얘기했다, 그거 모르는 단어니까 당연히 모르게 돼있습니다. 그거는 어쩔 수 없는 겁니다. 그리고 선천적으로 내가 무슨 장애를 가지고 있다, 쉽게 말하면 이명증이 있든 아니면 정신적인 장애가 있든, 귀가 잘 안들리는 사람이 있든 이런 장애가 있다고 할 것 같으면 그거는 어쩔 수가 없는 겁니다. 그런 것들도 물론 하나의 요인 중에 하나겠지만 그것은 특수한 부류만 그런 것이고, 나머지 분들은 대부분 이 네 개에 들어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 네 개를 잘 자기가 알아차려서 그것들을 없애고 바꾸어나가면 들은 법들을 오래도록 기억이 납니다. 그러면 그중에서 자기가 선택하고 자기가 실천해야 될 것들은 실천해나가게 돼있다는 거라.

 

자! 이렇게 법을 듣는 것이 소중한데, 왜 이렇게 잘 듣는 법을 가르치려고 할까?

어떤 이익들이 있기 때문에?

우선 듣기만 잘할 것 같으면 법뿐 아니라 다른 일반적인 소리도,

듣기만 잘해도 적어도 그 듣는 것으로 인해서 마음이 고요하게 만들 수가 있습니다.

또는 듣기만 하는 것으로 인해서도 기쁨을 일으킬 수가 있습니다.

또는 듣기만 하는 것으로 인해서도 행복하게 만들 수가 있습니다.

 

얼마나 좋은 소리라? 어린애가 똥을 쌌다. 자기 엄마 같으면 누군가가 “애 똥쌌다” 할 것 같으면 그 똥쌌다는 소리를 굉장히 기쁘게 듣습니다. 애가 귀엽기 때문에. 그런데 관계없는 사람이 애 똥쌌다 할 것 같으면 싫어하는 마음이 들게 됩니다. 똑같은 소리를 듣는데도.

똑같은 소리인데도 기쁨이 일어나고 어떤 사람은 싫어하는 마음이 일어난다는 거라. 그거는 마음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서 그 소리가 달리 들리게 된다는 거라. 듣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고요해지기도 하고 기쁨이 일어나기도 하고 행복이 일어나기도 한다는 거라. 그거는 자기 자신이 하는 것들이라는 거라.

 

또는 듣는 것만 잘해도 강하게 애착을 가지는 것은 끊어버릴 수가 있습니다.

들음으로 인해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을 압니다. 내가 애착을 가지고 붙잡고 할 이유가 없다는 사실을 아는 거라. 흘러가는 물을 멈추게 할 수가 있는가? 스님이 말하는 얘기들을 그게 소중하다고 해서 그걸 멈추어놔 둘 수가 있느냐는 거라. 스님은 끊임없이 말을 하게끔 되고, 물은 끊임없이 흘러가게 돼있다는 거라. 붙잡고 애착한다고 해서 될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는 거라. 그러니 내가 강하게 애착을 가지는 것들 그것들이 엷어질 수밖에 없다는 거라.

 

또한 소리를 잘 들으면은 ''라고 하는 것들에 대한 것, '자아'라고 하는 것들에 대한 것이 엷어져버립니다. 그거 내세워가지고 좋을 것은 하나도 없기 때문에.

듣기만 하더라도 이런 여러 가지 이익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듣는 훈련들을 평소에 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겁니다. 듣는 훈련들을 자꾸 평소에 해야 만이 부처님이 말하는 진리를 있는 그대로 알아차릴 수가 있습니다.

있는 그대로 내가 체험해서 알 수가 있습니다.

 

법을 들을 때 그리고 소리를 들을 때는 어떠한 경우든지 마음을 기울여서 정중하게 듣도록 하십시오.

아무런 이익이 없고 설혹 다른 사람들이 화내는 소리라고 하더라도 그것을 정중하게 한번 듣도록 해보십시오. 자기에게는 전혀 화내는 소리로 들리질 않고, 자기에게는 아주 이익된 소리로 들립니다.

그렇게 정중하게 들을려고 해야 될 뿐 아니라,

그 의미들을 분명하게 알려고 해보십시오, 그러면은 말하는 그 사람의 숨은 의도까지도 알아낼 수가 있습니다. 분명하게 의미와 의의와 뜻들을 알려고 해보십시오.

그리고 그 소리들을 있는 그대로 들어서 실천한다는 마음을 가져보십시오.

또한 그 소리들리는 대상, 대상에 대해서 자애의 마음을 한번 가져보십시오.

그 사람에 대해서 불쌍한 마음 까루나, 어떻게 내가 도와주면 될까 하는 그런 마음들을 한 번 가져보십시오. 그게 멧따(mettā)와 까루나(karuṇā) 자(慈)·비(悲)입니다.

자·비의 마음을 가지고 들어볼려고 하십시오.

 

그다음에 들을 때 가장 중요한 것, 뭔가를 바라고 듣지 말아라는 거라.

이걸 내가 기억해서 써먹어야지, 또는 이 소리를 들음으로 인해서 내가 어떤 반응을 해야 된다거나, 그것을 바라고 듣지를 말아라는 거라. 보수를 바라고 댓가를 바라고 들어서는 안됩니다. 그리고 그것을 남에게 자랑하기 위해서 들어서도 안됩니다.

그것 없이 그냥 듣도록 해보라는 거라.

적어도 그리할 것 같으면 들리는 소리에 인해서 내 마음은 어지러워지지는 않습니다. 그렇게 훈련되면 내가 말할 때도 항상 조심스럽게 말을 하게끔 되고, 말하는 소리들이 남에게 좋은 영향을 미치게끔 됩니다.

 

그게 지금 여기에 나와 있는 「담마경청」 이라는 내용들에 첨가돼서 할 것들입니다. 한번 잘 읽어보고 담마를 바르게 듣도록 하시기 바라겠습니다.

자! 오늘은 여기서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