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일상수행법문 녹취/2014~2015 일상수행법문

남의 탓하는 감염증에 걸리지 않는 방법 (20140405. 토요청년법회)

담마마-마까 2019. 12. 29. 21:26

https://youtu.be/mbSPb4zNU-4

* 남의 탓하는 감염증에 걸리지 않는 방법 (20140405. 토요청년법회)

(삼귀의·오계독송 후 04:50초 부터 녹취)

 

편하게 앉으십시요.

선원에 있는 음료 말고 너희들이 사다 준 음료는 언제 한번 먹어 겠노? (수행자 대답 : 다음 법회 때) 그래. 기대하고 있자.

이걸 보니까 생각이 나는데 태국 스님들은 뭘 받아도 고맙다고 안 해. 태국 스님만이 아니라 테라와다 스님들은. 당연히 뭔가를 내가 받았으면 받은 사람이 고맙다고 해야 되는데 오히려 그걸 준 사람이 고맙다고 얘기합니다.

그 원리가 뭐냐면 선한 일을 하고 공덕을 쌓을 수 있는 일을 제공 해줬으니까, 공덕 쌓은 사람이 준 사람이라는 거라. 그러니 당연히 공덕 쌓은 사람이 고맙다고 해야 된다는 거라.

물론 스님들이 그걸 받고 고맙다고 안 하는 건 아니고, 그런데 일부 처음 출가하는 스님들이나 얼마 안 된 스님들은 오히려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거만하게 보일 때가 있어. 그런데 꼭 그렇지는 않고, 어느 정도 연륜이 되고 할 것 같으면 마음속으로 쌓아둔 공덕들은 그 사람 몫이지만 '그 사람이 진짜 행복하고 건강하기를 바란다' 하는 마음은 스님들도 가지고 있지.

마찬가지로 법회가 있으므로 인해서 스님이 마실 것이 필요하니까 너희가 공덕 쌓을 일들을 만들어 주잖아. 그러니까 '아, 내가 공덕 쌓을 수 있는 일이 생겨서 참 좋다' 하는 마음을 가지고 음료수를 사왔으니 따르면, 그 마음도 그냥 음료수를 드리는 것보다도 한결 더 많이 쌓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자! 오늘은 주제가 "남의 탓 감염증" 이란 주제로 얘기를 하겠습니다.

언젠가 어느 법회에선가 그런 얘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거기에 한 달에 한 번씩 가서 법회를 봐주는데 산골이라서 고양이 먹이가 변변한 게 없어. 그래서 항상 한 달에 한 번씩 갈 때 사람들한테 뭘 사다 주지는 않는데, 고양이한테는 내가 항상 먹을 걸 사고 갔었거든. 요즘 마트에 가보면 고양이들이 먹는 통조림 같은 것들이 있어요. 그거 가져가면 너무 좋아하는 거야. 그래서 매번 갈 때마다 그 통조림을 항상 사가지고 가니까 고양이가 나만 보면 이미 거기 들어갔다 하면 고양이가 난리가 나. 나와서 마중을 하고.

 

그러는데 한번은 법회 때 갔는데 고양이가 마중을 안 나와. 뭔 일인가 싶어서 고양이 집 있는 데를 가보니까, 고양이는 공포스러우면 고양이 소리를 안 냅니다. 그전에는 야옹야옹 하는데, 사람들 쫓아낼려고 한다든지 이럴 때는 야옹야옹 하는데, 공포스럽고 할 것 같으면 그 소리를 내는 게 아니고 똑 뱀이 쉬익쉬익 하는 것 같은 그런 소리를 냅니다. 이빨을 드러내면서. 나를 보고 그러고 있는 거야. 어, 요놈 보게, 이게 무슨 일이야 싶어가지고, 그렇게 할 때는 손을 뻗으면 안 돼. 해꼬지를 하니까.

그래서 무슨 일이야 하고 생각하고 있다가, 나중에 법회 마치고 나서 주지스님한테 그 얘기를 했더니, 그 절에 주지스님 얘기가 등산객들이 왔다갔다 하면서 그 고양이에게 해꼬지를 한 모양이라. 새끼도 몇마리 낳아놓은 게 있는데 등산객들은 새끼 예쁘다고 이렇게 하다가 아마 잘못해가지고 그 새끼가 땅에 떨어져가지고 한 마리가 죽었던 모양이라.

 

그러니까 이 어미 입장에서는 사람들을 그냥 적으로 다 돌려버린 거라. 무조건 사람들이 와서 만질려고 할 것 같으면 공격의 대상이 되는 것이지, 다른 대상으로 보지를 않는 거라. 거기 주지스님도 마찬가지고 매일 밥을 갖다 주는 공양주 보살도 마찬가지고, 모든 사람들을 동일하게 “나쁜 놈들” 하고 판단을 하고 있는 모양이라. 당연히 나도 이제는 나쁜 놈이 돼버리는 거라. 졸지에. 그전에는 좋아 죽을라고 했는데 인제는 나쁜 놈이 딱 돼가지고 있는 거라.

그걸 보고 드는 생각이, 생각을 물론 바꾼 거지만 바뀐 것이 참 어리석게 바꼈다 하는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 물론 그중에는 나쁜 짓을 한 사람들도 있겠지만은 자기에게 좋은 일을 한 사람도 또 있을 건데 그걸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을 아예 안 가져버리는 거라. 딱 차단을 해버리게 되는 거지. 그러니까 모든 사람들은 나쁜 놈이 되는 거라.

 

가끔씩 그런 일이 고양이에게만 그런 어리석은 일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고 인간세계에도 똑같이 일어납니다. 시누이가 미우면 그쪽 시댁 쪽 사람들이 다 밉고 미운 건 시누이뿐인데, 다른 사람은 자기하고 전혀 연관이 없는데도 다 밉게 보이는 거라, 일단은 그런 선입견을 딱 가지고 하게 되는 거라.

어떨 때는 그럴 때도 있어요. 선원에 오다가 안 오는 사람이 있어요. 그러면 왜 안 오는가 보면은 누구하고 싸웠대. 그래서 그 사람 보기 싫어서 안 간대. 거기다 대고 뭐라 할 거야? 그런 거 보면 그 사람만 미운 거지, 법이 미운 게 아니고 다른 사람이 미운 게 아닌데 싸잡아가지고 그냥 안 가는 거야. 그게 왜 생길 거 같노?

 

아까 주제가 뭐라고 그랬어요? (수행자 대답 : 남의 탓 감염증)

그렇지. 남의 탓하는데 바이러스 감염이 돼버리게 되는 거라. 그게 직접적인 관계 있는 사람에게만 남의 탓이 되는 게 아니고 관계없는 사람에게도 남의 탓이 돼버리는 실정인 거라. 감염이 돼버리면 그것은 다른 사람에게 전염시킬 수 있는 우려가 있고, 설혹 전염이 안 된다고 하더라도 그것으로 인해서 자기 몸의 다른 것들도 같이 손상될 가능성들이 있을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이게 참 무서운 것들이라는 거라.

남의 탓하는 게! "니탓이오" 하는 게 굉장히 무서운 병입니다.

 

그런데 이게 어떤 특정한 사람은 있고 특정한 사람은 없는 것은 아니죠? 모든 사람들에게 다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단지 그게 정도의 차이만 있다는 것뿐이지. 어쨌든 그게 있을 거 같으면 작게든 크게든 문제를 일으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라는 거라.

일단은 심각성을 알았으면 고쳐야 될 거 아니라? 어찌 고칠꼬? 우리 큰 스님이 될 마헤시님은 어떻게 고치면 좋을까?

남의 탓이라고 했을 때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지!

남의 탓이라고 했을 때는 이미 문제가 저질러지고 나서의 일이라. 그리고 그렇게 원하는 대로 안 됐을 때 또 남의 탓들을 하고 그러는 것이지. 그리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있는 것은 아니고 문제를 해결하는 것도 아닌데도, 어쨌든 남의 탓하는 것은 좋은 방향은 아니라는 거라.

 

경전에 보면 이런 것이 있습니다. [법구경 게송]

Na paresaṁ vilomāni,

나 빠레-상 윌로-마-니, 다른 사람들의 잘못을 보지 말아라.

na paresaṁ katākataṁ,

나 빠레-상 까따-까땅, 다른 이가 한 일과 하지 않은 일은 상관하지 말아라.

attano va avekkheyya,

앗따노- 와 아웨-케이야, 다만 자신의 할 일과

katāni akatāni ca.

까따-니 아까따-니 짜. 자신이 하지 않아야 되는 일들만을 살피도록 하라.

 

남이 한 일과 하지 않은 일들은 상관하지 말아라는 거라. 누가 다른 이가 잘못하고 하는 것들은 일절 그것을 관여할 부분은 아니라는 거라. 그 사람의 일이지 내 일이 아니라는 거라.

여기에서는 '윌로-마-니(vilomāni)'는 '잘못'을 얘기하는 의미가 아니고, 번역을 편리하게 하기 위해서 '잘못'이라고 했는데, '자기의 마음에 들지 않는 것들'입니다.

'위(vi)'라고 하는 것은 '떠나간다'고 하는 뜻입니다. 자신의 마음으로부터 떠나가버렸다는 거라.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거라. 마음에 들어가지고 착 달라붙어야 되는데, 마음에 안 드니까 마음으로부터 떠나가버렸다는 거라. 마음에 들지 않는 것들이라는 뜻입니다.

 

그게 그 사람의 잘못일 수도 있고, 그 사람의 행위일 수도 있고, 여러 가지가 있을 수가 있다는 거라. 그런데 그런 것들은 자신의 마음에 안 든다고 해가지고 그거 바로 잡으려고 할 필요도 없고, 또 자신의 마음에 안 든다고 해서 그 사람이 한 일에 대해서 잘잘못을 구분할려고 할 필요도 없다는 거라.

일단 그 사람이 한 행위들은 잘한 일이든 못한 일이든 그 사람이 받는 것이지 나까지 굳이 거기 얽혀가지고 받을 일을 만들지는 말아라는 거라.

거기서 내가 "니 왜 그런 잘못을 저질렀냐" 해가지고 성질을 냈다, 그럴 것 같으면 괜히 그 일 때문에 내가 또 결과를 받아야 되는 거라. 내가 일으키는 행위에 대해서. 왜 그 일을 하고 있느냐는 거라.

그 대신에 자신이 한 일, 자신이 하지 말아야 되는 일들은 분명하게 관찰하라.

 

아까 스님들 탁발할 때 탁발을 올려준 사람이 오히려 고마워하고 한다는 얘기를 했습니다. 그사람들은 그사람들 할 일을 하고 있는 거라.

저 스님 때문에 내가 공덕을 쌓을 일이 생겼으니까, 내가 공양물 올린 것에 대해서 저사람으로 인해서 나는 공덕을 쌓았으니까 고맙다는 거라. 그러니까 그 재가자는 자기 할 일들을 한 거라. 그리고 하지 말아야 될 일들은 안 하게 되고. 공양 올렸으니까 십원이 손해났으면 십원 손해났다는 생각은 아예 일으키지 않는다는 거라. 일으킬 거 같으면 아예 안 올려야 되는 거고, 올리면서 그 생각을 한다는 것은 그건 참 어리석은 것들이라는 거라.

오늘 형편이 못되가지고 이번에는 공양을 스님들한테 탁발을 못 올린다고 할 것 같으면 아예 그러면 하지 말아야 될 것들은 안 하면 그만인 거라. 단지 그대신에 다른 방법으로 공덕을 쌓을 일들을 하면 되는 것이고.

 

그와 마찬가지로 스님들도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될 일들을 분명하게 안다는 거라. 그사람에 대해서 관여할 것 같으면 “참 당신 잘했습니다.” 하고 남의 일에 관여해야 되는 거라. 그런데 무심하거든. 그일에 대해서는 관여 안 해. 어디 스님들이 탁발 받으면서 서가지고 "고맙습니다" 이런 경우 없다는 거라. 받고 나면 마음속에서 '이 공양 공덕으로 깨달음에 이르소서' 하는 마음을 가지면서 그냥 떠나버리는 거라.

그게 그 스님의 할 일이라는 거라. 그리고 하지 말아야 되는 거는 그것에 대해서 필요 없이 다른 행동들을 하는 것들을 안 하면 되는 거라. 이게 분명하게 할 일과 하지 말아야 될 일들을 스스로들 다 구분하고 있다는 거라.

 

그러니까 매번 저렇게 탁발이 이루어지고 아침마다 이루어져도 그것으로 인해서 곤란해하는 사람들은 없다는 거라. 그렇게 불편도 못느끼는 거고, 그렇다고 그사람들이 우리보다 잘살기를 하나, 다른 것들이 풍부하기를 해? 그렇지는 않거든. 그런데도 분명하게 해야 될 일과 하지 말아야 될 일들, 그리고 남의 일들에 대해서 관여해야 되고 관여하지 말아야 될 것들을 분명하게 하고 있다는 거라. 그거 얼마나 평화로울 거라. 아침에 탁발하는 모습만 봐도.

 

그거 구분만 해도 적어도 이렇게 평화롭고 행복한데, 일상생활에서 조금씩이라도 이걸 할 줄 알면 그래도 적어도 “니 때문에” 하는 소리는 안 한다는 거라. 너 때문에 그렇다는 거라. 너 때문에 법문 못들었다, 너 때문에 뭘 했다, 이런 얘기는 안 하게 되는 거라.

그게 어찌 그사람 때문인가? 자기 때문이지.

관계가 없는 사이일거 같으면 전혀 별개로서 그사람 때문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과연 그럴 수 있는 것이 몇 퍼센트나 될까? 서로의 관계가 얽히고 설키고 되지 않은 것들이 있나? 없다는 거라.

 

어쨌든 이것은 다른 사람 탓하고 다른 사람이 틀리고 나쁘다고 하는 것은 굉장한 위험성을 가지고 있다는 거라. 그것만 있으면 그래도 또 괜찮아. 그런데 그 이면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다른 사람은 틀렸고, 나는 옳다는 거라. 나는 맞다는 거라.

거기에 딱 도달해버렸어. 그래서 나는 항상 옳고 너는 틀렸다는 거라. 그러니까 내 관점에서 옳은 것들을 그 사람에게 강요하는 거라. 그리고 그렇게 바꿀려고 하는 거라.

 

그러다 보니까 딱 두 가지 패턴으로 성립됩니다.

선과 악! 바른 것과 틀린 것! 이렇게 딱 구분짓는 습관들이 있다는 거라.

좋은 부분도 있습니다. 사회의 동력이 되기도 하고, 또는 사회를 바꿀 수 있는 그런 계기들도 되고, 그 사람을 바꿀 수 있는 계기들도 되고 하는 그런 것들은 있을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거는 항상 한계성을 지니고 있다는 거라. 그리고 다 그런다고 해서 그렇게 바뀌어지는 것은 또 아니라는 거라. 안 바뀌어지는 것은 죽었다 깨어나도 안돼.

어머니 버릇 있다, 그러면 그 버릇 그것이 다른 사람들이 다 싫어하는 것이다, 바꿀려고 해도 평생을 해도 안 바뀌어져. 그러니까 아예 그런 것은 포기를 해버리는 것이 내 속은 편해진다는 거라. 오히려 가지고 있을 거 같으면 바꾸지도 못하고 나도 불편하고 한다는 거라.

 

불교에서는 "자신의 판단이 항상 바른 것은 아니다" 하고 얘기를 합니다.

내가 옳다고 하는 것들이 꼭 그게 옳은 것일 수가 있는가? 자신이 판단하는 것들이 그것이 정답이 될 수는 없다는 거라. 정답에 가까이 갈 수는 있을지 몰라도 그렇다고 해서 그게 정답이 될 수는 없다는 거라.

 

이렇게 생각을 해봅시다.

큰 바다에 물 한방울이 있으면 그게 얼마만한 가치를 지니고 있을까? 얼마만한 영향을 미치고 있을까?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물론 그게 좀 더 많은 독소를 지니고 있는 거라든지 아니면 좀 더 많은 향기를 지니고 있는 거라 할 것 같으면 그 부근에는 좀 영향을 미칠 수는 있겠지. 그렇지만 큰 바다로 봤을 때는 그것도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는 거라.

사실은 우리 인간이라는 것은 그와 마찬가지라는 거라.

더더구나 자신이 가지고 있는 가치관,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들이 설혹 그게 정답이고 그것이 올바르다고 하더라도 큰 대양이라는 물에 비할 거 같으면 그것은 큰 영향력을 가지는 것은 아니라는 거라. 그리고 자신이 옳다고 여기는 것은 항상 변할 수가 있는 것이고 불안정한 것이라는 생각을 가져야 된다는 거라.

 

나는 항상 배워야 될 존재이고 나는 아직 미숙한 존재라는 생각을, 나의 생각이나 가치관이 미숙한 것이라고 생각을 해야 만이 다른 것들을 받아들일 수가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 자신이 완전하다고 생각할 거 같으면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항상 충돌하게끔 된다는 거라. 내가 아직 부족하고 내가 아직 미숙하기 때문에 말을 들을 수가 있다는 거라. 아무것도 모르는 지능의 주부가 부엌에 갈 것 같으면, 그집 시어머니하고 어떤 사람은 싸우고 어떤 사람은 안 싸우고 합니다. 싸우는 사람들은 우리 집에서는 요렇게 요렇게 했는데 하는 의견을 내세우게 되니까 충돌이 있게 됩니다. 그리고 그 생각을 가지고 있으니까 불쾌한 마음이 드는 거라.

그런데 그 생각을 안 하고 이 집에서 하는 방식에 대해서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 생각하고 그냥 그대로 받아들이기만 할 거 같으면 충돌은 안 일어납니다. 자신이 부족하고 미숙하다고 생각할 거 같으면 그냥 그거 받아들이면 됩니다. 그러고 나서 그것과 자신이 이때까지 익혀온 것들을 서로 혼합해가지고 더 좋은 방법들을 만들어 낼 수가 있다는 거라.

그런데 애초부터 나는 이렇게 배워왔다고 딱 고정화시킨 상태가 될 거 같으면, 그건 항상 충돌이 있을 수밖에 없다는 거라.

 

자신이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할 때는 이 세 가지를 항상 기준점으로 삼아라 하고 부처님이 말합니다. 생각이든 말이든 행동이든 똑같습니다.

첫 번째, 이것이 좋은 것인가? 이것이 맞는 것인가? 이것이 다른 사람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인가?

내가 하는 행동이 좋은 것일 것 같으면 좋은 말을 얘기할 것이고, 그럼 그 좋은 말은 다른 사람들에게도 좋은 말이 된다는 거라. 나는 좋은 말이고 한데 다른 사람은 그걸 좋은 말로 못 받아들인다고 할 것 같으면 그건 좋은 말이 될 수 없는 거라.

내가 아무리 올바른 말을 한다고 하더라도 다른 사람이 지금 그 올바른 말을 받아들일 상태가 안 돼가지고 그걸 올바른 말로써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할 것 같으면 그럼 올바른 말이 될 수가 없다는 거라.

"이 세상이 인정할 수 있는 것!" 이 세상이라는 것은 지금 만약에 상대방과 같이 얘기하고 있다면 '그 상대방이 이 세상'입니다. 그 사람이 "아! 그래" 하고 받아들이고 인정할 수 있는 것이 돼야 됩니다. 그렇지 않을 것 같으면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그것은 그때 상황에서는 좋은 것이 될 수가 없다는 거라.

 

이런 조건을 채우기 위해서 가장 먼저 해야 되는 것은,

'니가 나쁘다' '니가 틀렸다'가 아니고, 그럼 반대로 '내가 나쁘다' '내가 틀렸다'고 해야 되나? 그건 아니고,

첫 번째, '내가 아직 부족하다' '내가 아직 미숙하다'는 생각을 먼저 해야 됩니다.

그래야만이 적어도 지금 현재 남의 탓하는 의존증들, 그런 것들을 조금씩 잠재워 줄 수가 있다는 거라. 내가 부족한데 지금 어떡할 거라? 내가 부족하니까 자신이 잘하는 것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같이 나눠줄려고 하는 거고, 자신이 못하는 것들은 남의 도움을 받을려고 하는 거라. 그러면은 도움을 주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저 사람이 부족한 것들이 있기 때문에 자기가 도와줘야 된다는 생각이 일어난다 할 것 같으면 기쁘게 도와준다는 거라.

 

스님들은 일체 경제활동을 할 수 없기 때문에 그 부분이 부족한 거라. 경제활동을 할 수 없으니까 먹고 입고 하는 것들이 부족할 수밖에 없다는 거라. 그럼 그 생각을 해서 "나 부족하니까 도와주시오" 하고 얘길하니까 저사람들은 당연히 부족한 것이다 해서 기쁜 마음으로 도와주는 거라.

"스님! 법을 설해주십시오." 내가 잘하는 것이니까, 그러니까 나는 법을 설하면서도 바른 법을 설해서 기쁘고 또 이 법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서 기쁘고, 설하는 스님도 기쁘게 설할 수 있고, 듣는 사람도 자기가 그건 부족하기 때문에 기쁘게 받아들이게 된다는 거라.

그것이 첫 번째 의존하는 버릇, 그리고 다른 사람에 대해서 '니탓'이라고 하는 것들을 없앨 수 있는 첫 번째 방법입니다.

 

두 번째, 좀 더 행복해지고 싶다. 뭔가 지금 하고 있는 일들을 좀 더 잘하고 싶다. 그럴 것 같으면 존경하는 마음과 동경하는 마음들을 같이 가지도록 하라.

학교 다닐 때 그런 경험들을 해봤을 거라. 어느 선생님이 좋아 죽겠다 그럴 것 같으면 그 공부 잘합니다. 왜 그래? 왜 공부 잘했어요? 똑같은 수학인데도 그 선생님을 존경하고 동경하기 때문입니다. ‘아! 나도 저렇게 예쁜 선생님과 얘기하고 싶다’ 아니면 ‘나도 저렇게 잘하고 싶다’ 하는 동경하는 마음이 생겨난다는 거라. 그리고 그렇게 존경하는 마음들이 생겨나기 때문에 그 분야를 잘하게 된다는 거라.

그거는 자신이 그 선생님보다도 못하다고 판단을 하고 그걸 따라가기 위해서 존경하고 동경하는 마음을 가지기 때문에 가능해진다는 거라. 아무리 자신이 부족하다는 생각을 가진다고 하더라도 존경하고 동경하는 마음이 없을 거 같으면 그 부분은 채울 수가 없어.

 

자신이 아직 완전하지 않고 부족하다는 생각이 첫 번째로 일어났으면 두 번째로 해야 되는 것은 존경하고 동경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입니다.

그래야만이 그 목표가 설혹 달성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나는 그때그때 그 길을 밟아갈 때는 나는 행복해. 그리고 나는 세월이 지나서든 아니면 지금 현재 돌아보더라도 나는 참 잘하고 있는 거라. 잘살고 있다는 거라.

 

그다음에 세 번째, 주객이 전도되지 않도록 자꾸 해야 됩니다.

뭔가를 썰기 위해서 칼을 들 것 같으면 적어도 칼의 속성을 아는 사람은 칼의 손잡이를 잡고 이렇게 썬다는 거라. 그런데 이 속성을 모르는 사람들은 아무데나 잡습니다. 그럼 칼날을 잡고 하기도 한다는 거라. 썰어지지도 않을 뿐 아니라 자기 손에 피가 나게 되는 거라. 그래서 주객이 전도되면 안 됩니다. 칼은 반드시 칼 손잡이를 잡아야 되는 것이지, 칼날을 잡아서는 안 된다는 거라.

내가 만약에 행복하기를 바란다고 할 것 같으면 행복할 조건들을 만들어야 되는 것이지 행복하지 않을 조건들을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거라. '니탓'이라고 안 할려고 할 것 같으면, 적어도 그 사람이 한 일에 대해서 '니탓'이라고 할 만한 상황을 내가 만들지 말아야 된다는 거라.

 

이미 그 사람이 한 일들을 보고 그리고 마음에서 아니면 자기가 뭔가를 잘못하고 아니면 뭔가 한 일에 대해서 그 결과가 일어나고 나서 "아! 니 때문에 이랬다" 할 거 같으면 그건 이미 주객이 전도되어 버렸다는 거라.

지금 내가 해야 될 일들을 분명하게 하고 있을 거 같으면 적어도 그것이 목표가 성취가 안 됐다고 하더라도 나는 지금 적어도 “이것 때문에 그렇다” “니 때문에 그렇다” 하고 그 탓을 하지 않는다는 거라. 열심히 노력하지 않을 때 항상 변명거리를 찾게 됩니다.

 

그래서 지금 내가 할 일을 분명하게 인식하도록 해야 됩니다. 무를 썰 때는 칼손잡이를 잡고 썰어야 되는 것은 분명하다는 거라. 그런데 칼손잡이를 잡지도 않고 무를 썰지도 않는다고 할 것 같으면 그게 안 썰린 무 탓인가? 자기 탓이라. 자기가 바르게 잡지를 않았고, 그리고 그 노력을 안 한 것일 뿐이라.

이렇게 주객이 전도돼버리면 안 된다는 거라. 해야 할 일들을 하지 않고 이렇게 다른 핑계거리를 만들지 말아라는 거라.

 

그다음에 네 번째, 서로 도운다는 생각을 가져야 됩니다.

스님도 가끔씩 그런 부분이 부족할 때가 있습니다. 남한테 폐를 안 끼칠려고 합니다. 얼마 전에 아플 때도 누군가가 “스님, 우리 병원에 오십시오. 제가 치료해 드릴게요.” 그래도 안가. 왜 안 가는지 알아요? 거기 가면 아는 사람이니까 당연히 스님이니까 공짜로 해주는 거라. 그런데 나는 그게 싫은 거라. 그러니까 안 가는 거라.

물론 안 갈만하니까 안 가겠지. 내가 스스로 수행으로써 다스려 나가고, 다른 운동이나 또 다른 것으로서 충분히 내가 잡아나갈 수 있다 하고 생각하기 때문에 늦더라도 그 방법을 택하는 거지. 그런데 의사 입장에서는 오면 간단할 건데, 몇번 이렇게 하고 약 먹고 하면 빨리 나을 수 있는데, 의사 입장에서는 이해가 안 되는 거라. 내 입장에서는 폐 끼치기 싫었으니까.

 

그런데 이거는 잘못 생각하는 것들이라. 내가 부족한 것들은 당연히 다른 사람들한테 도움을 받아야되는 거라. 그리고 내가 다른 사람들보다 잘하는 것들은 당연히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을 줘야 되는 것이고. 그게 맞는 방법인 거라.

그런데도 스님은 얼마 전에 또 어리석게 남한테 폐 안 끼치려고, 어쨌든 나았으니까 다행이긴 한데 자칫 잘못되면 더 큰 문제가 발생할 수도 있다는 거라. 남에게 공덕 쌓을 일을 내가 만들어 주지도 못했을 뿐 아니라, 나는 내 스스로 내가 부족한 부분을 다른 사람으로부터 다른 것으로부터 보충 받을려고 생각을 안 했다는 거라. 잘못된 생각으로.

서로 돕는다는 생각을 잊어버려서는 안됩니다. 자신이 잘하고 못하고 하는 것들은 부족한 것들은 보충을 받고 잘하는 것들은 나누어줄 수 있도록 자꾸 해야 됩니다. 그래야만이 남 탓하는 버릇들이 없어집니다.

 

이것이 보통 얘기하는 남의 탓하는 감염증에 걸리지 않는 방법입니다.

 

그런데 항상 인식해야 됩니다.

뭔가 일이 생기면 이걸 지금 자꾸 다른 원인으로 찾을려고 하는 버릇들, 그건 굉장히 안 좋다는 거라. 이것을 나는 가지고 있다는 생각을 항상 가지고 있어야 됩니다. 아라한이 되기 전까지는. 이것은 고쳐야 된다는 생각을 가져야 되는 거고, 그리고 남 탓할려고 하고 남에 대해서 나쁘다는 싫은 마음들을 일으킨다고 할 것 같으면 분명히 그걸 먼저 치료하라는 거라.

 

그러고 나서 그것들을 바꾸기 위해서 조금 전에 얘기한 네 가지 방법들을 차차 동원을 해가지고 적어도 거기에 감염되지 않도록 하라는 거라.

그럴 것 같으면 적어도 다른 장기로 퍼져나가는 위험은 덜 수 있다는 거라. 감기가 들어오면 초기에 여기 코끝에서 일어나는 바이러스를 인식해서 그 바이러스만 몰아내버리면 문제는 간단해집니다. 그런데 만날 그게 들어오는 줄 모르니까 들어가가지고 폐에 손상을 입히고 여러 가지 장기들에 이상을 일으키는 거라.

 

남의 탓하는 것은 거기에서 끝나는 법이 없습니다.

항상 다른 부작용들을 일으킨다는 생각을 가지고, 그걸 위험하게 자꾸 생각을 해야 됩니다. 그래서 나는 이 세계의 중심이 아니다. 아주 보잘 것없고, 아직 부족하고 보충받아야 될 존재다 하는 생각을 항상 가지라는 거라.

그중에 내가 잘하는 것이 있으면 나눠줄 줄 알고 또 부족한 것들은 얻어쓸 줄 알고, 이런 마음들을 자꾸 가질 수 있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그 고양이 같은 형태는 안 취하게 됩니다. 모든 이들이 다 나쁘다고 할 것 같으면 그거 어떡할려고 그래? 그거 바꿀려면 굉장히 시간이 오래 걸립니다. 오히려 자칫 잘못하면 그 사람이 사는 데서 살지 못하고 들고양이가 되는 수밖에 없다는 거라. 위험을 자초하는 일이 된다는 거라.

자! 여기까지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