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일상수행법문 녹취/2014~2015 일상수행법문

불교의 2가지 특색 (20140401)

담마마-마까 2019. 8. 22. 18:34

https://youtu.be/bycD6p1gZmI

* 불교의 2가지 특색 (20140401)

 

화요일 저녁에도 사람들이 모이면 법문은 간단하게라도 해주도록 그렇게 할게요. 그런데 문제가 뭐냐면 법문만 자꾸 들을려고 한다는 게 문제라. 법문은 수행하고 실천하기 위한 도구이지 그것이 목적이 되면 안 됩니다 이.

 

저번에도 스님이 그런 얘기를 했습니다.

불교에는 다른 종교나 다른 것과 다른 두 가지 특색이 있다 하는 얘기를 했습니다.

그 첫 번째가 '아리요(ariyo)'라는 얘기를 했습니다. 항상 성스럽고 진리를 따르는 것이 돼야 되는 것이고, 그래서 생활을 해도 항상 성자와 같은 생활, 올바른 생활들을 해야 되는 것이고,

그다음에 두 번째가 '앗타상히또(atthasaṁhito)'라고 그렇게 했습니다. 가치가 있는 삶, 가치가 있는 일들이 돼야 되는 거죠.

 

숨을 쉬더라도 숨을 쉬는 것을 분명하게 알고 있으면 그건 가치있는 일을 하고 있는 거라. 밥을 먹고 있어도 밥을 먹고 있는 것을 분명하게 알고 있으면 가치가 있는 일이지. 그런데 똑같은 일을 하더라도 가치가 없는 삶, 가치가 없는 일을 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그것은 부처님 가르침이 아니고, 그것은 우리가 따라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하고 얘기합니다.

 

불교의 두 가지 특색을 대라 할 거 같으면 이렇게 두 가지를 얘기합니다.

성스러운 일들이고 가치가 있는 일들이다.

여러분들은 그런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 살려고 노력들은 하겠지?

 

자신이 살아가는 데서 불교의 특색에 맞게끔 살고 있는지 아닌지를 반조해 볼 수 있는 방법들이 있습니다.

 

첫 번째가 뭐냐하면, 까라니 라고 하는 것은 행위를 얘기합니다.

'짝쿠 까라니-(cakkhu karaṇī)' 라고 그럽니다. 눈이 떠졌다는 얘깁니다.

아! 부처님 가르침을 듣고 법문을 접해보니까 내가 불교에 대해서 새로운 눈이 탁 떠졌다. 내가 이렇게 수행해 보고 실천해 보니까 아! 진짜 내가 이 방법으로 닙바나에 이를 수 있겠구나. 또는 살아가면서 행복하고 고요한 삶을 살겠구나 하는 확신이 탁 들도록 하는 그것을 짝쿠 까라니라고 그럽니다.

 

법문 듣고 나서 그런 눈이 떠지지 않으면 실천할 수가 없습니다.

또는 법을 알고 또 부처님 가르침대로 살아가면서 그렇게 눈이 떠지지 않으면 그냥 알기만 해가지고는 다시 일상생활로 다시 돌아가버립니다. 똑같이 다른 사람들 화낼 때 똑같이 화내게 되고, 욕심부릴 때 같이 욕심부리게 되고, 이렇게 돌아가버리게 됩니다. 그러니까 반드시 먼저 해야되는 것이 눈을 먼저 뜨라는 거라.

 

참, 눈 뜨는 게 쉬운 것은 아닙니다. 알고 있기는 한데 그렇게 눈을 뜰 수 있을려고 할 것 같으면 부단한 노력을 해야 됩니다. 그래서 확연하게 '아! 이게 바른길이다' 그리고 '이것이 진리다' 하는 확신이 탁 들어야만이 그때 인제 눈이 탁 떠집니다. 그렇게 안 됐다고 하더라도 지금 내가 접하고 있는 불교, 내가 또 실천하고 있는 수행법 또 공부하는 것들이 그 법의 눈을 뜨게끔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니면 그건 공염불이 돼버립니다. 아무리 미사여구를 많이 쓰고, 또 사람들을 많이 감동시키고 한다고 하더라도 털고 일어나버리면 흩어져버릴 것 같으면 그건 의미가 없어져버립니다.

 

그래서 내가 매번 여기 와서 수행하고 법문 듣고 하는 것이 과연 내가 법의 눈을 뜨게끔 하는데 그 행위를 실천할 수 있게끔 하는데 얼마만큼 도움을 줄 수 있느냐 하는 것들을 판단들을 잘 해야됩니다. 여기 와서 그런 것들을 못 얻어간다면 그거는 올 필요가 없어.

다른 데 가서 그런 것들을 얻도록 하고, 또는 스스로 그것을 얻도록 노력을 해야 되는 것이지, 와서 단순히 그냥 좋으니까 법문만 듣고 간다? 물론 그것도 차곡차곡 쌓이다 보면 결국에는 내가 이 길을 가기 위해서 닦는구나 하고 판단할 수도 있지만, 그게 탁 가슴에 자꾸 박히도록 해야 합니다. 못이 박히도록.

 

그다음에 두 번째, '-나 까라니-(ñāṇa karaṇī)' 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냐나(ñāṇa)는 보통 지혜를 얘기합니다. 생활하면서 판단해야 될 것 또는 살아가면서 결정해야 될 것들이 굉장히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결정이나 판단하는 것들이 적어도 바를려고 할 것 같으면 지혜에 견주어보지 않으면 안된다 하는 거라. 그렇지 않고 여러 가지 이익들이나 아니면 배려하는 것들로 인해서 판단하게 되면 결국에는 손해를 보는 경우들이 많이 있습니다.

물질적인 손해를 얘기하는 것이 아니고 그런 것들로 인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를 입히기도 하고 본인 자신이 그것이 더욱 견고하게 될 수도 있게 됩니다.

 

특히 스님들은 그러한 것들을 많이 합니다. 판단해야 되는 상황이 되고, 결정해야 될 때 그것이 과연 무상·고·무아의 성품에 맞는 것인가 하고 비추어봅니다. 그리고 그렇게 결정한 것들이 화합을 깨지 않는 범위 내에 있는 것인가 하는 겁니다. 만약에 화합을 깨는 것이라고 할 것 같으면 아예 안 합니다. 결정할 필요도 없고, 그리고 그것을 행해서도 안 되는 것이고.

 

또 내가 결정한 것들이 무상한 성품에 비춰봐가지고 결정해야 되는 것이지 그것이 항상 존재할 것이라고 생각해서 결정해서는 안 된다는 거라. 그래서 결정한 것이 번복된다고 하더라도 무상한 성품에 비춰봤을 때는 그런 건 전혀 문제가 안됩니다. 그런데 결정한 것을 무상한 성품에 비춰보지 않을 경우에는 자기 결정이 번복된다든지 아니면 다른 방향으로 나아갈 것 같으면 당연히 마음을 상하게 되고 그것으로 인해서 다툼이 일어나기도 한다는 거라. 그래서 그 결정으로 인해서 내가 무상고무아의 성품에 맞을 것인가 하는 것들을 반드시 판단 기준으로 잡습니다.

 

그리고 많은 판단을 하고 많은 결정을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많이 뭘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돈을 아무리 많이 벌어놓고 또 아무리 좋은 일들을 많이 하고 아무리 명예가 높아졌다고 하더라도 다 무상한 것들입니다. 그렇게 함으로 인해서 그 단계를 밟아갈 동안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아프게 하고 내가 상처를 받느냐는 거라. 그래서 그것을 최소화시켜라는 거라. 내 가족의 화합 또는 내 직장동료 내가 근무하는 곳들의 평온한 화합을 깨면서까지 뭔가를 결정하고 일을 해야 된다고 할 것 같으면 그건 고려해봐야 되는 것들입니다.

 

적어도 부처님을 비롯한 지혜로운 사람들은 그렇게 한다는 거라. 자기가 지금 손해 보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 손해는 본인이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건 손해가 되지 않아. 아무리 나를 비방한다고 하더라도 내가 비방한다고 생각을 하지 않을 거 같으면 그거는 그 사람한테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닌 거라.

그래서 어떤 것이든 행위를 하고 결정을 하고 할 때는 지혜롭게 자꾸 할려고 해야 됩니다. 그래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접하면 접할수록 더욱더 지혜로운 사람이 되도록 되어야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또한 그것도 부처님의 가르침의 특색에 어긋나게 된다 하는 겁니다.

 

그다음에 세 번째, '우빠사마-(upasamāya)'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마음은 더욱더 고요해지고 평온해집니다. 그리고 별로 할 일들이 없어. 시간이 가면 갈수록. 당연히 살아있으면 숨을 쉬어야 되는 거고, 출가한 스님이 됐으니까 일정한 상태가 되고 나면 당연히 법을 설해야 되고 그것은 당연히 해야 되는 일인 것이고, 그 외에 것들은 하지를 않으니까 번잡스러운 것이 없어. 필요 없는 것들을 안 하니까 그렇게 되는 거라. 일을 만들질 않게 되고.

 

그런데 우리는 살아가면서 저녁에 좀 일찍 마치면 그 남는 시간에 뭐할까 하고 고민들을 합니다. 그 남는 시간은 고요하게 즐길 줄 알아야 되는데, 고요하고 평온한 상태들을 오히려 못 견뎌한다는 거라.

부처님의 가르침에 물들면 물들수록 점점 더 평온해지고 고요해져야 됩니다. 그래서 그 사람이 지금 해야 될 일과 하지 말아야 될 일들을 분명하게 구분을 하게끔 됩니다.

인제는 좀 많이 평온해졌죠? 그거 뭐 와서 수행들을 한다고 하고 또 여러 가지들을 배우고 했으니까 마음들도 많이 평온해졌을 거라고 봅니다. 똑같이 다른 사람들과 같은 패턴대로 살아가고 마음이 여유롭지 못한다고 하면 그건 조금 문제가 있는 겁니다. 안 그러면 어리석든지.

 

그다음에 네 번째가 '아빈냐야(abhiññāya)'라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아까 냐나(ñāṇa)가 나왔는데 아비(abhi)는 초월한 지혜라는 뜻입니다. 세속적인 것들이 아니고 도와 과에 이르기 위한 초월한 지혜를 이르는 겁니다. 삼매도 경험을 하게끔 되고, 또는 여러 가지 지혜의 단계들도 각각 밟아가게 되고 그래서 도와 과에 이르기 위해 준비들을 착실히 하게끔 되는 것들, 이것들을 얘기합니다.

간단합니다. 아빈냐나를 얻기 위해서는, 적어도 호흡을 관찰하면서 물질적인 작용과 그것을 알아차리는 정신적인 작용을 구분만 할 줄 알아도 그 사람은 초월한 지혜 첫 단계에는 이르게 됩니다.

 

내가 마음을 엉뚱한 데 딴데 두고 있을 때는 호흡을 안 하고 있는 게 아닙니다. 호흡은 하고 있습니다. 자동적으로 물질적인 호흡은. 마음은 딴데 가 있더라도. 마음과 몸의 현상은 동일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마음과 물질적인 몸의 현상들이 동일하게 될 때 나는 가장 고요함을 느끼고 또 실수를 안 하게끔 된다는 거라.

딴데 보면서 문고리를 잡을 거 같으면 문고리를 바로 잡을 수 없습니다. 문고리를 보면서 마음이 거기 가 있을 때 문고리를 잡을 때 문고리를 정확하게 잡을 수가 있습니다.

 

물질과 마음을 구분할 수도 있고, 물질과 마음이 한데 모였을 때 일어나는 큰 효과들도 알게 되고, 그럴 것 같으면 지금 내가 어떻게 행동하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는 드러나지게 됩니다. 그럼 그대로 따라가면 됩니다. 그러다 보면 좀 더 높은 지혜를 얻게 되는 거고. 그게 아빈냐야 입니다.

그런데 그걸 사람들이 자꾸 잊어버린다는 거라. 문고리를 잡고 당겨야 된다는 것을 분명히 알면서도 습관적으로 딴데 보면서 문고리를 잡을려고 한다는 거라. 적어도 부처님의 가르침을 배우는 사람이라면 그렇게는 하지 않는다는 거라.

 

얼마 전에 어느 스님이 목을 좀 다쳤어. 그래서 고개를 이렇게 돌릴 수가 없어. 돌릴려면 몸을 이렇게 같이 돌려야 되는 거라. 그걸 보고 스님이 농담 삼아 그렇게 얘기했어. “부처님과 같은 행위를 하게 돼서 참 좋겠네” 하고 그랬거든.

부처님이 옆을 볼 때 몸을 그대로 두고 고개만 돌리지는 않거든. 몸을 같이 돌려요. 그 얼마나 좋은 일이라. 목이 좀 아픈 게 문제가 아니고 내가 부처님 같은 행위를 하고 있다고 생각할 거 같으면 그것은 내가 수행에 이롭게 해나갈 수가 있다는 거라. 마음 가는데 몸을 둘려고 해야 되고 몸에서 일어나는 현상들을 분명하게 알아차릴려고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그게 아빈냐야 라고 그러는 겁니다.

 

그다음에 '삼보다-(sambodhāya)'라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

불교를 배우고 있는 사람들한테 왜 불교를 배우느냐? 왜 수행하느냐? 하고 물어볼 거 같으면 대부분 다 깨달음에 이르기 위해서 그런다고 합니다. 대승불교에서는 성불하기 위해서 그런다고 합니다. 완전한 깨달음에 이르기 위한 것.

공덕을 쌓는 일도, 또는 선한 행위들을 즐겨 할려고 하는 것들도, 마음을 고요하고 맑게 할려고 하는 것들도, 악한 일들을 하지 않을려고 하는 것들도, 깨달음에 이르지 않는다고 할 것 같으면 똑 마찬가지로 유해의 카테고리에 들어가는 것밖에는 안 됩니다.

 

그것들은 좀 더 빨리 깨달음에 이르기 위해서 그리고 이생에서 깨달음에 이르기 위해서 필요한 것들이고 그것이 바른길이니까 그길을 따라가는 것들입니다.

법을 배우는 것도 수행 실천하는 것들도, 부처님의 가르침에 맞게끔 봉사활동 하는 것들도 꼭 마찬가집니다. 그것이 깨달음에 나아가는 길이 아닐 것 같으면 그건 큰 의미를 가질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들 목적은 거깁니다. 그걸 잊어버려서는 안됩니다.

 

그다음에 여섯 번째가 '--나야 상왓따띠(nibbānāya saṃvattati)' 그렇게 얘기합니다. 지금 이생에서 닙바나를 체험하라.

열반은 번뇌가 일어나지 않고 그 불이 꺼져버린 상태입니다. 열반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열반이라고 하는 것은 그 닙바나는. 지금의 상태에서 끊임없이 열반을 체험할 수 있어야 됩니다.

 

이런 것들이 적어도 그래도 부처님 가르침을 배우는 사람들 또는 부처님 가르침을 배우는데 이것이 내가 바르게 가고 있는가 하는 것들을 비춰볼 수 있는 방법들입니다.

 

이거는 경전에 나와 있는 것들이고,

스님이 얘기하고 싶은 것은 그것보다도 조금 더 현실적인 것입니다.

그렇게 여섯 가지를 비춰보고 바르게 가고 있는가 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고, 또 그것이 바른길인가 하는 것을 확신할 수 있기 위해서는 전제조건들을 가질 필요성이 있습니다.

 

우리 선원에 들어올려면 열쇠가 있어야만이 선원에 들어옵니다. 여러분들은 그 열쇠가 어디 있는지를 다 알고 있습니다. 조그만한 요 통에 여러분들은 열쇠가 있다는 것을 다 알아. 문이 잠겨있어도 그 통 열어가지고 열쇠가지고 문을 열고 들어오는 거라. 여기 들어오는 열쇠를 여러분들은 가지고 있다는 거라.

지금 이생에서 살아가면서 행복하고 또는 기분 좋게 살아가기 위한 열쇠가 뭔지 아세요? 그 열쇠? 선원에 들어오는 열쇠를 가지고 있듯이 이생에서 행복하기 위한 열쇠는 다른 것이 아닙니다.

 

···! 항상 자애의 마음을 가지고, 연민심을 지니고 베풀려고 하고, 그리고 기뻐하고 환희심을 항상 가지고, 다른 사람들을 동등하게 자꾸 대할려고 하는 것, 어떠한 상태에 있더라도 고요하고 평온하고 평정한 마음의 상태를 가지는 것. 그것만 가지면 이생에서는 행복해. 그게 행복에 이르는 열쇠라. 그거 자꾸 갖출려고 해야 되는 거라. 내가 지금 부족한 것이 뭔가 하는 것을 알아서 그것을 자꾸 보충하라는 거라. 그것은 끊임없이 보충을 해야 되는 것이고 끊임없이 일어나야 되는 것들이라.

 

부처님 마음에 자애 없이 행하는 것이 있고, 까루나 없이 행하는 것이 있고, 무디따 없이, 우뻭카 없이 행하고 말하는 것들이 있든가? 아니면 부처님 제자들이 그런 적이 있든가? 없다는 거라.

여러분들도 꼭 마찬가지라. 부처님이 2600년 전에 열반에 들었지만은 적어도 부처님 살아있을 동안에는 부처님 자신은 행복했다는 거라. 자비희사의 마음을 항상 지니고 행하기 때문에! 행복에 이르는 열쇠는 다른 것이 아닙니다. 자·비·희·사의 마음을 지도록 하는 것.

 

그다음에 두 번째가, 오늘 하루를 쓸데없이 보내지 마라.

쓸데없이 뭔가를 할려고도 하지를 말고 쓸데없게 만들지도 말아라. 얼마나 중요한 날들인데 그걸 쓸데없이 보내느냐는 거라. 적어도 그 생각을 잊어버리지 말아라는 거라. 이 귀한 시간들을 내가 최대한 열심히 살려고 할 때, 최대한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하고 그리고 가치있는 일들을 하고, 쓸데없는 일들은 하지 않을려고 할 때 그때 오늘을 잘살게 되는 겁니다. 남한테 도움 주는 일들도 할 수 있고, 그리고 자기 스스로는 괴로움을 소멸하는 길들을 그런 수행을 할 수 있게끔 되는 거라.

적어도 오늘 하루는, 내일은 생각하지 말고 오늘 하루는 쓸데없는 일들은 하지 말아라는 거라. 그게 인제 두 번째입니다.

 

평생 동안은 자비희사의 마음을 가져야 되는 것이고, 오늘 하루는 가치있고 쓸모있는 일들을 해야 되는 것이지 쓸데없는 일들을 하지 않도록 자꾸 해야 됩니다.

지금 이 시간에는 일어난 대상들을 분명하게 알아차릴 것.

이 세 가지만 하면 됩니다.

적어도 이 세 가지만 할 것 같으면 그래도 여러분들은 부처님이 말한 가르침의 특색에 맞게끔 성스러운 일들을 하게 되고 가치있는 일들을 하게끔 됩니다.

 

경전 게송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계율을 지키면서 살지도 않고, 젊었을 때 해야 할 일들을 하지도 않고, 그렇게 산 사람들은 물고기가 없어진 웅덩이에서 괴로워하고 있는 늙은 백로와 같이 힘들다" 하는 게송이 있습니다.

지금 여러분들이 해야 하는 게 뭔가 하는 거라. 그걸 잘 알아서 부처님의 가르침의 특색에 맞게끔 그렇게 살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자!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