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일상수행법문 녹취/2018~2022 일상수행법문

생각이나 망상, 판단에 빠지지 말아라.-사띠의 기본2 (20190706)

담마마-마까 2022. 5. 15. 19:20

https://youtu.be/cRxqcfra5IE

* 생각이나 망상, 판단에 빠지지 말아라.-사띠의 기본2 (20190706)

 

저번 주에 [사띠의 기본]에 대한 얘기를 했습니다.

 

첫 번째가, 경험하는 순간과 사띠하는 순간을 분명히 구별하라. 하는 얘기를 했습니다.

그걸 구별할 줄 모르면 안됩니다. 경험하는 순간은 선심도 있고 악심도 있을 수가 있는데, 사띠하는 순간은 어떠한 경우든지 선심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이게 경험하는 순간이고 이게 사띠하는 순간이라는 것을 구분할 줄 모르면 그냥 수행이 오토매틱화되어버리든지 아니면 잘못된 방향으로 흐르는데도 사띠하고 있다고 착각을 할 수가 있습니다.

화가 일어나고 있는데도 “아, 나는 아직 계속 사띠하고 있습니다.” 합니다. 수행에서 무상한 성품, 변하는 성품이 보이지 않고 그냥 배가 불러오고 꺼지고 하는 것을 알아차리고 있는데도 “나는 지금 사띠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걸 분명하게 구분할 줄 알아야 됩니다.

 

경험하는 순간과 사띠하는 순간은 분명히 다릅니다. 연속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붙어서 보이기도 하고, 어떤 때는 그것이 의도가 먼저일 때는 앞뒤 뒤바뀌어 나오기도 하고, 그렇지만 어쨌든 분명히 다르다는 거라. 그걸 구별하는 것을 자꾸 하도록 하라는 얘기를 했습니다.

 

이번에는 사띠의 기본 두 번째 부분입니다.

 

두 번째, 생각이나 망상, 판단에 빠지지 말아라. 하는 것입니다.

사실 오늘 스님이 많이 피곤해요. 어제 저녁에 늦게 누가 찾아왔어요. 스님 저하고 영안실에 좀 가입시다. 해서 무슨 일인데요? 자기가 아는 사람의 아버님이 돌아가셨는데 가족이 아무도 안 왔대. 그 막내딸만 와서 그 영안실을 지키고 있더라고.

왜 그러냐 하고 물어보니까 아버님이 일찍 집을 떠난 모양이라. 떠나가지고 있다가 죽기 직전에, 요즘은 나라에서 그런 게 있는 모양이라. 그걸 보살펴준다고 그러나? 가족도 찾아주고 죽고 나서 장례도 국가에서 치뤄주는 게 있는 모양이라. 그렇게 해가지고 죽기 직전에 돌아왔으니까 자식들이 아버지를 안 볼라고 하는 거지.

그래서 그 돌아가신 분의 영안실에 아무도 안 가는데 막내딸이 혼자 지키고 있더라는 거라. 어째 오빠도 있고 누나도 있고 할 거 같으면 그분들은 아버지를 본 시간이 더 많을 건데, 막내딸은 그런 게 없어서 거기 지키고 있는가 하니까, 그건 자세한 건 모르겠대. 그래서 가보자 내가 뭐 할 게 있나, 죽은 사람한테 가서 뭘 해주겠노? 가서 살아있는 막내딸한테 그래도 위로라도 좀 해주는 것이 안 낫겠나 해서 갔습니다.

 

여러분도 아마 비슷한 판단들을 많이 하고 살겁니다.

저 사람은 내가 평생 안 봐. 저 사람은 나쁜 사람이야.

아마 그 아버지도 마찬가지겠지 자식한테는. 일찍 우리를 버려버리고 떠난 분이라는 판단을 하니까 죽고 나서도 내가 갈 이유가 없다는 거라. 특히 돈 문제가 걸려 있으니까 아버님이 아마 빚을 진 상태로서 그렇게 돌아가셨던 모양이라. 그러니까 더더욱 안 가는 거라. 그게 얼마가 있니 이런 거 생각 하지도 않고 그냥 “무조건 안가” 하는 상태가 돼있으니까. 참, 여러분은 그렇게 되지는 않아야 될 건데요. 자식도 마찬가지고 그 아버님 같은 경우도 마찬가지고.

 

그런데 일상생활에서 보면 우리가 잘못된 것들을 하는 경우들이 참 많이 있습니다. 판단 합니다. 그것을. 뭔가를 탁 판단하고 나면 참 안 바뀔라고 그럽니다.

자기가 알고 있는 견해라든지 뭐 여러 가지들 나는 이게 좋다 하고 판단내리면 그거 안 바꿀라고 그럽니다. 특히 여자들은 그런 게 심하다고 그러더라고. 옷도 어떤 메이커 하면 그거 입어야 되고, 화장품도 어떤 메이커 하면 그거 해야 되고, 물론 자기한테 맞고 하니까 그걸 쓰겠죠. 그런데 그건 자기한테 맞는걸 구분해가지고 판단내리는 것들이고, 그런데 어떤 경우들은 다른 사람들이 그걸 하기 때문에 자기는 구분하는 것 없이 바로 판단을 내려가지고 그것만 쓰는 경우들도 있고 그렇습니다.

 

이와 비슷한 예가 부처님 당시 때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오늘 사람들이 이렇게 모여 있습니다.

수준이 다들 조금씩 조금씩 다릅니다. 어디를 보고 설법을 해야 될까? 어디에 기준을 맞춰야 돼. 그건 스님이 설법을 할 때 분명히 구분을 해야 됩니다. 어느 정도 수준에서 하면 되겠다, 아니면 조금 더 강도가 세게 조금 더 심오하게 아니면 아주 평이하게 하는 것을 내가 구분할 줄 알아야만이 거기에 맞게끔 법을 설할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들 마음을 속속들이 알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눈빛이나 여러 가지들을 보고 그것들을 구분을 합니다. 구별을 하는 거지.

 

또 밥때가 되면 스님은 법문하다가 중단합니다. 실제 배가 고픈 건 아닙니다. 그런데 밥때에 밥을 먹어야 된다는 걸 분명히 내가 구별해 주는 거라. 그거는 하는데 밥때에 밥을 먹는다 해가지고 음식을 내가 취사 선택하지는 않습니다. 아, 요거는 나한테 좋은 음식, 이거는 나한테 나쁜 음식, 이건 딱딱한 음식, 그렇게 구별하지는 않습니다. 그냥 주는 대로 그냥 먹습니다. 그래서 어떨 때는 위장장애를 일으켜가지고 고생을 하는 경우도 있기도 합니다. 그래도 그런 구별은 나에게는 필요하지 않다고 여기기 때문에 안합니다.

 

만약에 예를 들어서 여러분들을 모르는 상태다. 그럼 나는 구별 안 하고 여러분의 수행상태나 여러 가지들을 구별하지 않고, 그냥 내가 알고 있는 법을 설해버립니다. 그 구별해야 될 게 있고 하지 말아야 될 게 있는데, 대부분 사람들은 이걸 기준을 잡지를 못합니다. 그냥 무조건 구별하고 판단하고 아니면 판단하고 또 구별하고 하는 것들을 합니다.

 

부처님 당시 때 그런 일화가 있다고 그랬죠.

어느 스님이 길을 가다가 길에 떨어진 옷을 하나 봅니다. 이게 왜 여기에 떨어져있지 하다가, 주변을 아무리 살펴봐도 사람이 없고 주인이 없어. 옷은 보니까 좀 많이 헤어져 있거든.

'음, 그래. 이건 주인이 아무도 없는 모양이다. 내가 이거 가져가서 가사 만드는데 써야 되겠다' 해가지고 가져갈려고 하는데, 때마침 주인이 그걸 보고 “아, 그것은 제 옷입니다.” 그러니까 그 스님이 “아, 그래요. 나는 주인이 없는 건 줄 알고 가져가서 가사 만들려고 그랬습니다. 그러면 돌려드리겠습니다.” 하고 탁 돌려줬어요.

 

흔히 있는 얘기입니다. 여러분 주위에서도 있는 일이고. 사실은 시시비비 거리가 되지 않는데, 사람들은 시비를 걸려고 하면 이거 가지고 얼마든지 시비를 겁니다. 왜 주인이 있는 걸 가져갈려고 했느냐? 하고.

사실은 그 스님이 본인이 여러 가지를 판단하고 구별을 해서 주인이 없다고 생각을 해서 가져갈려고 한 거고, 주인이 있기에 그냥 돌려준 것뿐입니다. 다른 아무것도 없는데, 그런데 일반 사람들은 “남의 것 왜 가져갈려고 하느냐?” 하는 거라. “그거 가져갈려고 하는 거 보니까 그게 좀 좋은 옷감이었던 모양이지?” 아니면 “그거 가져올려고 했던 게 가사색을 할 수 있는 옷감이었나?” 하는 의문도 들고, 여러 가지들을 시시비비를 겁니다. 일반 사람들은 그렇게 시비를 겁니다.

 

그런데 수행을 하고 좀 오래된 스님들은 그런 걸 가지고 시시비비를 걸지를 않습니다. 주인이 없어서 가져가려고 했다가 주인이 있어서 돌려준 것뿐이라는 거라. 그냥 그것 뿐입니다. 거기서 딱 사고는 정지해버리고 끝나버립니다. 더 이상 발전하지를 않습니다. 그런데 이걸 시비하기를 좋아하면 이것으로 인해가지고 계속적으로 문제가 돼버립니다. 그것만 가지고 하는 게 아니고 과거에 문제 여러 가지들을 다 끄집어내가지고 서로 만신창이가 되듯이 그렇게들 합니다.

일반적인 게 그런 모습들인데 그거는 극히 피해야 될 부분입니다.

 

언젠가 아마 계 받을 때 '삿담마' 라는 계명을 주면서 「지혜의 조건 세 가지」에 대한 얘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중에 하나가 삿담마(saddhamma 정법)이고, 그다음에 하나가 빠사다(pasāda), 빠사다는 '확신·믿음' 같은 그런 뜻입니다. 그중에 또 하나가 아왓티따(avatthita)라는 얘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 세 가지가 지혜가 일어나게 하는 조건이다" 하는 얘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아왓티따라고 하는 것이 바로 그런 겁니다. 어떠한 경우든지 마음이 안정되어 있지 않으면 시시비비 하지마라. 그걸 구별하고 판단하고 하는 것은 여러분이 아라한이 되기 전에는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인데, 그런데 마음의 안정까지 해쳐가면서 구별하고 판단하고 할려고 하지는 말아라는 거라.

차라리 구별을 해나가는데 마음이 안정되지 않고 탐·진·치에 물든다 그러면 중단하라는 거라. '이게 좋을까, 요게 좋을까' 얼마든지 구별을 할 수는 있습니다. 물건을 사러 갔을 때든 뭘 했든. 그런데 마음이 동요하고 탐·진·치에 물든다 싶으면 구별하는 걸 일단 중단하라는 거라.

 

그리고 그거로부터 일단은 떠나야 돼. 떠나고 나서 다음에 다시 또 그걸 구별해가지고 할 때 마음이 안정되면, 아, 요게 조금 더 나에게는 맞다 싶으면 그거 선택하면 되는 거고, 그런데 일단 마음이 안정되어 있지 않으면 어떠한 상태이든지 구별하고 판단하는 것은 일단 전면적으로 보류를 하라는 거라.

 

지혜가 일어나기 위한 첫 번째 조건이 바로 그 마음의 안정입니다. 쉽게 말하면 어떠한 경우든지 탐·진·치가 없는 상태에서 그것들을 분명하게 인식하는 것들이 있어야 된다 하는 뜻입니다. 마음이 고요하게 안정돼있지 않으면 지혜가 일어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 얘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마찬가집니다. 사띠의 기본의 두 번째는 바로 여러분들이 생각하고 망상하고 판단하는 것에 거기에 빠지지 않아야 됩니다. 살아가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생각해야 됩니다. 어떨 때 가끔씩은 계획도 세워야 되는 거고, 또 과거에 대해서 회상도 해야 되는 거고, 구별하고 판단도 해야 됩니다.

그런데 그것은 아까 스님이 탁발을 예를 들듯이 최소한으로 하라는 거라. 최소한으로 하고 되도록이면 그것들에 빠져서 탐·진치·가 일어나도록은 하지 말아라는 거라.

그것이 사띠의 조건 중의 두 번째 부분입니다.

 

사띠는 어찌 보면 이 두 번째 조건이 선제조건으로 되어야만이 첫 번째 조건인 경험하는 순간과 사띠하는 순간을 분명하게 구별을 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수행하는 순서는 먼저 대상을 먼저 알아차리려고 하지 말고, 마음을 먼저 안정시키고 고요하게 먼저 만들어라는 거라.

그래야만이 마음을 금방금방 대상을 알아차릴 상태가 됩니다.

사띠의 기본 두 번째가 그래서 생각과 망상, 판단에 빠지지 말아라 하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여러분이 내가 지금 생각하고 있는지 아니면 뭔가를 판단하고 있는지 어떻게 구분해볼 수 있을까요?

예를 들어봅시다.

 

첫 번째, 뭔가를 판단하고 뭔가를 봤을 때 꼭 안 좋은 것만 먼저 보이는 사람이 있죠? 부정적인 것만 보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여기에 딱 빠져있는 상태입니다. 어떠한 경우든지 판단하는데에 빠져있지 않으면 부정적인 것은 일어날 수가 없습니다. 본인의 마음이 부정적으로 바뀌어져 있기 때문에 그것들이 부정적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그래가 좋을 것이 뭐 있어? 그 사람이 부정적으로 보인다고 해가지고 그 사람이 나에게 '난 너를 부정적으로 봤으니까 넌 나에게 뭔가를 줘라' 하고 말할 수 있을 거라? 오히려 본인이 마음도 안 좋아질 뿐아니라 그것들이 밖으로 퍼질 때는 더 안 좋은 결과가 돼버립니다. 부정적인 사고, 부정적인 것들 감정들이 먼저 일어난다고 하는 것은 본인 자신이 생각이나 망상이나 판단에 빠져있다고 반드시 생각들을 해야 됩니다. 그래서 되도록이면 뭔가를 대상을 대하더라도 부정적으로 자꾸 대하지 말아라는 거라.

 

수행을 잘한 분들이나 깨달음의 단계에 이른 사람들은 죽음이 오면 어떻게 될까? 죽음을 맞이합니다. 부정적인 생각이 아니라. 죽음이 오는 것은 당연한 것이니까, 나는언젠가는 죽어야 되는데 그게 인제 나에게 닥쳐온 거다 하고 생각을 하니까 그냥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죽을 준비를 합니다. 실제로.

아마 스님도 한국을 떠날 날짜가 되면 그걸 준비를 할 겁니다. 여러분들에게 조금 더 당부할 말이 많아지든지, 어떤 수단을 쓰든지 인제 여러분들과 이별할 시간이 다가왔다는 걸 그렇게 아마 표출이 될 겁니다. 그냥 받아들이는 거라.

 

'음, 내가 여기 떠날 때가 되었어' 그러면 준비를 하고 나서 그냥 훌쩍 떠나면 됩니다. 여행 준비를 잘 한 사람들은 여행 갈 때 기분 좋게 갑니다. 준비가 안 되면 가면서도 근심 걱정에 휩싸입니다. 갈 준비가 안 돼있는데 가라고 할 것 같으면 끌려가듯이 가고, 가기 싫어합니다. 죽음을 맞을 준비가 안 되어 있으면 죽기 싫어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안 죽는 건 아닙니다. 늙을 수밖에 없는데 늙기 싫어하면 반대로 갈려고 그럽니다.

전부 부정적인 사고 부정적인 생각들입니다. 그냥 받아들이도록 해야 됩니다.

 

그다음 두 번째, 여러분들의 흥미를 끄는 것을 뭘까? 과거에 대한 것? 옛날 일을 생각하면 '음, 옛날에는 내가 참 잘살았지, 옛날에는 이리 부자였지' 자기 위안을 삼는 거라! 그래서 장래를 보면 불안하니까 어떻게 바뀔지 모르니까 '내가 더욱더 열심히 살아야지' 하는 그런 마음을 가집니다. 그게 좋은 걸까? 과거 기억에 대해서 흥미를 가지고 미래에 대해서 불안감을 가지는 것, 결코 좋은 것은 아닙니다.

 

아마 경험들을 해봤을 겁니다. “엄마 아빠는 옛날에 이렇게 했어” 자식이 콧방귀낍니다. “앞으로 너희들 계속 공부시키고 잘 할려면 나는 더욱더 열심히 해야 돼” 불안하니까 그렇게 얘기합니다. 걔는 그런 불안감이 없거든. 그런 과거에 대한 흥미, 엄마 아빠의 과거에 대한 거, 그렇게 흥미 안 가집니다. 여러분이 자식이든 제3자의 입장일 거 같으면 그거 별로 의미가 없다는 걸 압니다. 그런데 왜 여러분들은 그걸 못할까? 거기에 붙잡혀있기 때문에!

 

지금을 살지 못하면 과거에 대해서 흥미를 가지고 붙잡게 되고, 미래에 대해서 불안하게 됩니다. 살아가는 건 지금입니다. 내가 지금 해야 되는 것이 열심히 뭔가를 해야 될 것 같으면 그거 열심히 그냥 하면 되는데, 괜히 과거나 미래로 왔다갔다 왔다갔다 하면서 그냥 감정의 기복만 생겨나는 거고, 초조하고 불안한 것들만 자꾸 증폭시키고.

과거의 좋은 기억 끄집어내가지고 행복해진다? 그건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고 탐심이 일어나는 것뿐입니다.

미래에 대해서 불안해한다? 그거는 진심이 일어나는 것뿐입니다.

 

탐·진·치에 계속 빠져가지고 허덕인다는 생각을 안 하고, 나는 불안하니까 더욱 열심히 한다고 생각을 하게 되는 거라. 그래도 과거로 인해가지고 내가 위안을 받는다고 생각을 하는 거라. 그렇게 용인할 것 같으면 세상 모든 것을 잊기 위해서 술먹고 마약하는 것은 용인해줘야 되겠네? 그건 아니라는 거라.

과거 기억에 대해서 흥미를 가진다든지 미래에 대해서 불안감을 가질 때에는 '아, 내가 지금 현재 사띠를 하지 않고 있구나' 하고 자꾸 판단을 하라는 거라. 이것이 두 번째 부분입니다.

 

세 번째 부분, 자기 스스로는 잘합니다. 자기 스스로는 부정적인 것에 휩싸이지 않고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지금 현재를 잘 사띠하고 있다고 그렇게 얘기합니다. 그런데 외부적인 자극만 왔다고 그러면 팍 그냥 돌아버립니다.

안으로 잘 되고 있을 거 같으면 그렇게 외부적인 자극이 오더라도 그렇게 반응을 안 합니다. 자기의 몸과 마음을 잘 콘트롤 하고 있으면 외부적인 자극이 오더라도 그것에 대해서 반응하는 것은 자기의 몸과 마음입니다. 1차적으로. 콘트롤이 안 되니까 외부적인 자극에 대해서 반응을 팍 하게 되는 거라.

 

사마디에 들었는지, 아닌지를 측정할 수 있는 것들은 여러 가지 방법이 있는데 가장 단순한 것이 우리말로 하면 아지랑이 같은 거 간지럽히는 풀, 그걸 가지고 코 밑에서 요렇게 스승들이 합니다. 대부분은 보면 재채기를 합니다. 간지럽기 때문에 실룩실룩 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걸 반응 안 하고 그대로 그냥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외부적인 자극에 대해서 반응하는 것이 없다는 거라.

뭔가에 하나에 집중을 하고 있든지 할 거 같으면 외부적인 자극에 대해서 반응을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은 천둥소리가 나고 비바람이 불어도 그걸 모르고 삼매에 들어있기도 합니다.

 

본인이 뭔가에 대해서 집중하고 뭔가를 사띠를 하고 있지 못하면 외부적인 자극에 대해 반응하는 폭이 큽니다. 그리고 금방금방 반응을 하게 됩니다. 그것도 부정적인 것으로. 그런데 지나가놓고 나면 그거 별거 아닙니다. '옛날에는 왜 화를 냈지?' 뭐 때문에 화를 냈는지도 모르고, 누구한테 화를 냈는지도 모르고 세월이 지나면 서서히 잊어버리게 된다는 거라. 또 그걸 돌이켜보면 '참 별거 아닌데', 대부분은 보면 그때 당시에는 심각하게 그걸 받아들입니다. 자극에 대해서 반응을 하기 때문에 심각하게 되는 거라. 그런데 실제로는 사실은 다 별것들이 아닙니다.

 

수행을 할 때 대상에 대해서 끊임없이 알아차리고 있을 때, 뭔가 스멀스멀한 느낌이 든다든지 뭔가 소리가 들린다든지, 별 거 아닐 거 같으면 그냥 무시해버리라는 거라. 무시해버리고 대상을 알아차리면 됩니다. 무시해도 관계가 없기 때문에 그렇다는 거라. 그것들이 일어나는 것은 어쩔 수 없다는 거라. 지금 현재는 내가 대상에 대해서 완전하게 주대상에 대해서 사띠를 못하고 있기 때문에!

그럼 주대상에 대해서 조금 더 사띠를 강화시키면 그것들은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상태가 된다는 얘기라. 여러분이 잘살고 있는지 못살고 있는지는 외부에 드러나는 모습을 가지고 판단들을 하게 됩니다. 그 얘기는 외부적인 자극에 대한 여러분들의 반응이 보입니다.

 

스님이 법을 설할 때 다섯 가지 조건 중에, 세 번째, 네 번째, 다섯 번째가 뭐냐면 자애를 지니고 하고 있는지, 그거는 다른 말로 할 것 같으면 여러분들도 다른 사람에 대해서 말을 할 때 자애를 지니고 말을 하고 있는지, 그리고 말을 할 때 논리적으로 하고 있는 건지, 그러니까 서론 본론 결론 맞춰가지고 잘 얘기를 하고 있는 건지, 이해하기 쉽게끔 하고 있는 건지. 반응하는 것이 급격한 것이 아닐 것 같으면 분명하게 얘기합니다. 자기의 생각을 잘 간추려가지고 분명하게 얘기를 합니다.

 

꼭 설법할 때만 필요한 것이 아니고, 여러분들이 일상적으로 자극에 대해서 반응을 할 때도 꼭 필요한 것들입니다. 어떠한 경우든지 반응을 해야 된다고 할 것 같으면 자애를 지닌 채 반응을 하라는 거라. 그리고 그 반응하는 것들은 분명히 탐·진·치가 없는 상태에서 논리 정연하게 설득하고 쉽게 이해될 수 있게끔 하라는 거라. 뭔가를 내가 반응했을 때 저 사람이 그걸 받아들일 수 있게끔은 해야 될 거 아니라? 긍정할 수 있게끔.

 

그다음에 네 번째, 집착하고 있는 것들이 얼마만큼 많은가? 하는 부분입니다.

대부분 이해하기 쉬운 것은 물건이라든지, 가족이라든지, 자신이 가지고 있는 능력이라든지, 이런 것들에 대해서 '내가 아직 집착하고 있구나, 아니구나' 하는 것들을 대부분은 알고는 있습니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것은 존재의 욕구입니다.

존재욕구에 대해서 내가 붙잡고 있는지, 아닌지? 성자의 기준의 판단의 주안점은 존재욕구가 얼마만큼 있느냐? 아니면 아예 없느냐? 그것으로서 판단들을 합니다. 집착하고 있는 것들은 없으면 없을수록 좋습니다. 그래서 욕구는 아예 없는 것이 좋지만 최소한으로 하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그다음으로 좋습니다. 무엇에 대해서도 만족할 줄 아는 것들을 자꾸 만들어나가야 됩니다.

 

여러분들이 집착하고 있는 대상들이 얼마나 많으냐 손으로 한번 꼽아보십시요. 없도록 만들어 보라는 거라. 어쩔 수 없이 나하고 인연이 됐으면 나하고 가까운 사람 내 가족 그다음에 내가 쓰고 있는 물건 그거는 어쩔 수 없이 필요한 부분들입니다. 그런데 그것들에 대해서 집착하고 있느냐, 아니냐? 주라면 줄 수 있어? 그게 부서져도 아깝지 않아? 그것들을 여러분들이 판단 기준으로 잡아야 됩니다.

 

그다음 다섯 번째, 사고하는 것. 되도록이면 머릿속으로만 굴리려고 하는 것은 안 하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경에도 그렇게 분명하게 그것들을 알았으면 그것을 실천해야 되는 거라. 실천하는 것들은 분명히 인식하고 알아야 되는 거라. 머릿속으로만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는 거라. 사고하는 부분들은 되도록이면 줄여나가려고 자꾸 노력들을 해야 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라고 하는 것. 무상·고·무아에 대한 성품들을 분명하게 보면 '자아'라는 것들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압니다. 자아에 대한 것들을 자꾸 떨쳐내버릴 수 있도록 만들어나가야 됩니다.

이러한 것들이 사띠의 기본인 두 번째 조건 생각이나 망상 판단에 빠지지 않는 길입니다.

 

사띠의 기본인 이 2가지는 분명하게 여러분들이 기억을 해야 됩니다. 내가 지금 사띠를 잘하고 있는지, 아닌지를 분명하게 알아서 잘못돼있으면 다시 조정을 해야 됩니다.

첫 번째가 경험하고 있는 순간과 사띠하고 있는 순간을 분명히 구별할 수 있도록 하라.

두 번째가 생각이나 망상 판단에 빠지지 않도록 하라.

지금 일어난 건 즉시 그냥 알아차릴려고 자꾸 노력들을 하라는 거라.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