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짠 빤냐와로 스님 법문교재/법문 교재(프린트물)

불멸을 목표로 한다면 불방일이야말로 불도의 실천입니다.(2024년 붓다의날)

담마마-마까 2024. 5. 19. 22:06

불멸을 목표로 한다면 불방일이야말로 불도의 실천입니다.(2024년 붓다의날)

 

Appamādavaggo 불방일

 

Appamādo amatapadaṁ

Pamādo maccuno padaṁ

Appamattā na mīyanti

Ye pamattā yathā matā

부지런히 노력하는 것(不放逸)은 불멸의 경지이다.

게으름을 피우는 것(放逸)은 죽음의 경지이다.

부지런히 노력하는(불방일하는) 사람은 죽지 않는다.

게으름 피우는(방일하는) 사람들은 죽은 자와 같다.

 

Etaṁ visesato ñatvā

Appamādamhi paṇḍitā

Appamāde pamodanti

Ariyānaṁ gocare ratā

이 사실을 분명히 알아서,

불방일(不放逸)을 능숙하게 아는 사람들은,

불방일(不放逸)을 기뻐하며,

성자들의 경지를 즐긴다.

 

Te jhāyino sātatikā, Te jhāyino sātatikā,

Niccaṁ daḷhaparakkamā; Niccaṁ daḷhaparakkamā; Phusanti dhīrā

Phusanti dhīrā nibbānaṁ

Yogakkhemaṁ anuttaraṁ.

길에 마음을 가다듬어라.

인내심이 강하고, 항상 건강하고 용기를 낸다.

사려 깊은 사람들은 안락에 도달한다.

이것은 무상의 행복이다.

 

◎ 취하지 말 것

 

사람은 술·마약만으로 취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가끔 일어나는 일이고, 술에서 깨어날 수도 있습니다. 그에 반해 무지와 감정에 취하는 것은 중증(重症)입니다. 인간은 모두 무지와 감정에 취해 깨어나는 방법도 모른 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취한 사람은 해야 할 일을 하지 않습니다. 하려고 해도 실패만이 계속됩니다. 차라리 안 하는 것이 나았을 텐데, 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입니다. 취함으로써 사람은 불행에 빠지게 됩니다. 깨어나는 방법조차 모르는 취기로 인해 얼마나 불행에 빠질지 상상할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은 이 세상에서도 저 세상에서도 불행에서 불행으로 타락해 가는 것입니다. 몸에 물질을 넣어 취하는 것은 쉽게 멈출 수 있으므로 불교는 술·마약 등을 사용하지 말 것을 권하고 있습니다. 남은 문제는 무지와 감정에 영구적으로 취해있는 것입니다. 이 취기에서 깨어나기 위해서는 지혜를 개발하는 프로그램을 실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 불방일(不放逸)

 

"불방일(Appamāda, 不放逸)"은 '뭔가에 중독되거나 도취되지 않음'을 뜻한다. 경전의 정의를 보면 "불방일"은 "누(漏)와 유루법(有漏法)에 대해서 마음[心]을 지키는 것"이다.

 

"Pamāda, 방일(방일)"은 '취하다'라는 뜻입니다. 어근은 '취하다'라는 뜻의 √mad가 됩니다. 그런 이유로 방일에 대한 해석은 뒤로 미루고, 취하는 것부터 이야기를 시작한 것입니다.

Appamāda, 불방일은 불교의 첫 번째 키워드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잊어먹고 다른 일로 시간을 보내는 것입니다. 방일과 불방일은 이런 의미로 쓰이고 있습니다. 세간적인 해석을 하자면 '지금 해야 할 일은 지금 하라. 미루어서는 안 된다'라는 의미로 해석하면 이해하기 쉬울 것입니다.

 

*유루법은 "살생, 도둑질, 삿된 음행, 거짓말, 비방, 거친 말, 잡담, 갈망, 원망, 사견 邪見" "(사견邪見에서 사념邪念까지의) 팔사도八邪道"를 뜻한다. 요컨대, "무루無漏"는 "탐·진·치의 멸진"인 바, "누漏"라 함은 '탐·진·치가 있음'을 뜻한다. 이와 같이 경으로써 경을 풀이하면, "불방일"은 '탐·진·치에 도취되지 않음', '탐·진·치의 멸진을 향해 나아감'이다.

 

◎ 자아(자아)의 사령탑

 

사람에게는 자아(나)라는 착각이 있습니다. 인식하는 과정에서 이 착각이 생겨버리는 것입니다. 안이비설신의로 색성향미촉법을 인식하더라도 탐진치, 분노, 질투, 미움 등의 감정을 만들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안이비설신의에 닿는 정보를 '좋다, 싫다'로 나눕니다. 그것에 따른 감정도 불러일으킵니다. 결과적으로 객관적인 데이터를 있는 그대로 인식하지 않고 자신의 감정을 휘젓는 것만으로 끝나는 것입니다.

 

이 상황을 문학에 빗대어 말하면 이해하기 쉬워집니다. "당신에게 눈이 있어도 아무것도 보고 있지 않는다. 귀가 있어도 아무것도 듣지 않는다. 코가 있어도 향기를 맡고 있지 않는다. 혀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것도 맛보고 있지 않는다. 몸에 물건이 닿아도 느끼고 있지 않는다. 사고(思考)하는 능력이 있어도 생각하고 있지 않는다. 요컨대 '살아 있다'고 우기고 있지만, 당신은 죽은 사람과 아무 차이가 없는 것이다." 이렇게 말하면 이의를 제기하고 싶을 것입니다. 그러나 부처님은 "방일하는 사람은 죽은 사람과 같다(pamattā yathā matā)"라고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자아의 착각은 개인의 주관입니다. "자아는 누구에게나 있기 때문에 평등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의 마음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내 마음을 이해시킬 수 없습니다. 모두 자아의 착각이라는 껍데기에 갇혀 외롭게 살고 있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과 사이좋게 살려고 해도 계속해서 문제가 생깁니다. 자아의 착각으로 고립되어 있는 우리는 자신의 감정을 휘젓고 다니기 위해서 "내가 보고 싶은 것만 본다, 듣고 싶은 것만 듣는다······"라는 생활방식을 하고 있습니다.

자신을 있는 그대로 알고, 세상을 있는 그대로 안다, 라는 마음 따위는 세상에 전혀 없습니다. 즉, 당신이 지금 하고 있는 것은 당신의 "자아의 착각"이 지시하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결코 객관적으로 행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 아닌 것입니다. 하고 싶은 대로 하고, 감정을 휘젓고, 자아의 착각에 취해, 깨어나는 방법도 모른 채로 살아가고 있는 상태. 이것을 방일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 죽음의 경지

 

"방일은 죽음의 경지이다." 이 강렬한 말로써 부처님께서는 인류의 삶을 정리해서 나타내어 보여준 것입니다. 이것은 '방일하면 죽는다'라는 뜻이 아닙니다. 해야 할 일을 하지 않고,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삶은 행복에 이르는 길이 아닌 것입니다. 감정을 휘젓고 다니는 것. 다른 사람과 다투는 것. 자아에 유혹되어 기대와 원망을 만들고 그 신기루를 좇는 것. 고민과 고통에 빠지는 것. 무엇을 목표로 하여 살아도 결국은 모두 헛수고가 되는 것. 감정은 강화될 뿐 줄어드는 일이 없으므로, 사후에도 새로운 생을 만들어 또다시 같은 프로그램으로 살아 버리는 것. 이 모든 것은 끝이 없는 악순환입니다. '죽음의 경지(maccuno padaṁ)'라는 것은 이러한 뜻입니다.

 

◎ 죽고 싶지 않다.

 

사람은 죽고 싶지 않습니다. '화상을 입기 싫다'라고 한다면 구체적이고 논리적인 말입니다. 경험도 있습니다. 자신이 화상을 입은 적이 없는 경우는 화상을 입은 사람에게 물어보면 됩니다. 그렇다면 '죽고 싶지 않다'라는 강렬한 감정은 무엇일까요? 자신이 죽어본 경험도 없고, 죽은 사람으로부터 그 에피소드를 듣는 일도 될 수 없습니다. '물고기는 먹을 수 있지만 물고기의 다리는 맹독이다'라는 식의 이상한 이야기입니다.

 

몸은 '죽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지 않습니다. 세포가 항상 대량으로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두려움은 느끼지 않습니다. 마음도 순간적으로 죽고 나타나는 과정입니다. 몸의 변화보다 더 빠른 속도로 사고(思考)가 변화하고 새로운 사고(思考)가 생깁니다. 그러나 마음의 죽음에 대해서조차 두렵다고 생각한 적은 없습니다. 항상 끊임없이 죽어가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죽는 것이 두렵다'는 것입니다. 이 비현실적인 희망은 자아의 착각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자아의 착각이 '죽고 싶지 않다. 영원히 계속 살고 싶다'라는 착각도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 환상을 추구합니다. 죽지 않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지만 지금까지 성공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습니다. 하지만 노력만은 포기하지 않습니다. 착각의 껍데기에 갇히면 이러한 결과가 나옵니다. 예를 들어서 설명을 합시다. '페가수스의 날개는 무슨 색일까요?' 논쟁할 필요도, 연구할 필요도 없는 이야기입니다. 페가수스는 인간이 만든 망상적 개념에 지나지 않는 것이니까요. 날개가 있는지 없는지를 고민할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자아는 착각이다'라는 사실을 깨달은 사람은 '죽는 것이 두렵다'라는 망상적 개념에서도 해방됩니다. 그 사람에게는 '살아야 한다'는 망상도 희망도 없고, '죽어야 한다'는 망상도 희망도 없는 것입니다. '불사(amattapadaṁ, 不死)의 경지'라는 것은 이 상태(자아의 착각이 사라진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 알아차리는 길

 

부처님은 우리가 착각에서 깨어나는 길(알아차리는 길)을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이 불도(佛道)입니다. 불도 수행의 실천에서는 지금 이 순간을 알아차리는(사띠하는) 것을 권하고 있습니다. 옳고 그름을 판단하지 않고, 주관적인 가치관을 넣지 않고, 지금 순간을 알아차리는 훈련을 계속하는 것입니다.

 

이 실천 방법을 알면 '너무나도 간단하다. 수행이라고 이름 붙일 가치조차 없다'라고 다들 생각합니다. 맞습니다. 하지만 실행해 보세요. '지금을 알아차리는 것만큼 어려운 것은 없다.'라고 발견할 것입니다. 실천해 봐도 실패하는 경험밖에 나오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자신의 객관적·구체적·합리적인 삶을 방해하는 무언가가 있다, 라고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나'입니다. 즉, 자아의 착각입니다. 그 시점에서 '왜 자아의 착각이 일어났는가'라고 구체적으로 발견하는 것입니다.

착각이 사라지면 이제 '불사의 경지(amatapadaṁ)'에 도달한 것입니다.

 

◎ 불방일(不放逸)이란 불도(佛道) 수행(修行) 그 자체

 

불교의 첫 번째 키워드는 불방일(appamāda, 不放逸)이라고 이미 말했습니다. 부처님의 최후의 말씀도 불방일(appamāda, 不放逸)이었습니다. 무지한 사람들은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불행에서 불행으로 빠져듭니다. 순간순간의 평온함도 느끼지 못한 채 불만과 두려움에 둘러싸여 살아가고 있습니다. 불방일(appamāda)을 실천하는 것이 궁극적인 평온에 이르는 길이며, 괴로움을 이겨내는 길입니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경전은 많이 있습니다. 수행 방법도 다양하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부처님이 가르치신 모든 것은 불방일(不放逸)이라는 한마디로 요약됩니다.

 

◎ 무엇을? 왜? 어떻게?

 

현대인의 지식과 기술의 발전은 '무엇을? 왜? 어떻게?'라는 세 가지 의문에 답을 찾으려는 노력의 결과입니다. 그래서 세상이 바뀐 것입니다. 그러나 모두가 잊어버린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나'입니다. 실험보다도 사고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나'라는 주제에 대해 이런저런 생각을 했지만, 결과적으로 '나란 이런 것이다'라는 서로 다른 무수한 개념이 나타났을 뿐입니다. 즉, 종교와 철학의 세계가 나타난 것입니다. 이런 종류의 이야기를 부처님은 '아론(我論-자아에 대한 집착)이라는 견해(見解=사견邪見)'라고 이름 붙였습니다. 사견은 사람이 안고 있는 문제를 확대할 뿐 조금도 해결하지 못합니다.

 

사고하는 사람들의 문제는 그 출발점에 있습니다. 전체적으로 '내가 있다'고 인정하고 나서 생각한 것입니다. 있는 것이 틀림없는 나에 대해서 '무엇을? 왜? 어떻게?'를 적용시켜도 결론에 이르지 못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끝없이 의견과 견해가 나올 뿐입니다. 사람은 강렬하게 '나'라는 착각에 집착하는 것입니다. 집착이 있는 사람은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이지, 객관적이고 구체적으로 '해야 할 일'을 하고 있지 않은 것입니다.

 

이성적인 사람이라면 '나'를 연구하기 이전에 '나'라는 착각이 어떻게 일어나는지 먼저 살펴봅니다. 그 자각이 자신에게 있기 때문에 스스로 조사하고 결론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말을 빌릴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부처님도 과학자도 '무엇을? 왜? 어떻게?'를 사용했습니다. 그러나 과학자와 속세의 지식인들에게는 '나'가 있는 것이 당연하고, 알아볼 필요가 없었던 것입니다. 부처님만이 '나'라는 개념에 '무엇을? 왜? 어떻게?'를 넣어 살펴본 것입니다.

도달한 결론은 '나'란 여러 가지 원인으로 일어난 착각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궁극적인 평온에 도달한 것입니다. '열반'이라고 불리는 이 경지에 대해서는 말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개념, 모든 말은 '내가 있다'라는 전제하에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모든 말과 개념에서 '나'라는 주어를 빼면 의미도 사라져버립니다.

 

예를 들어 '비가 온다'라는 객관적인 사실처럼 보이는 문구를 생각해 봅시다. '비가 온다'라고 내가 말하는 것입니다. 내가 없다면 '비가 온다'는 문구는 나타나지 않습니다. '열반을 설명하는 말과 개념이 없다'라는 것은 모든 말과 개념은 '나'라는 착각이 있어야 성립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수행을 실천하지 않는 사람이 '나는 실재하지 않다'라고 말해도, 그 의미는 <'나는 실재하지 않는다'라고 내가 말한다>라고 하는 것이 됩니다. '나는 실재하지 않는다'라고 발견한 사람이라면 그것을 어떻게 말할까요?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가 답입니다. 부처님도 "도(道)"를 가르쳤던 것이지, "열반"에 대해서는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 현자의 길

 

현명한 사람은 불방일을 실천합니다. '내가 있다'라는 착각이 어떻게 일어난 것인지를 발견합니다. 인연에 의해 일시적인 현상이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과정이 있을 뿐, <실체로서 '나'도 '타인'도 성립하지 않는다>라는 것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절로 나타나는 것은 궁극적인 평온함입니다. 이치로 말하자면, '원인이 없기 때문에 나타난 경지를 없애는 일도, 흔드는 일도 불가능하다.'라는 것이 됩니다. 그 경지에 속세간의 단어를 사용해서 "열반"이라는 라벨을 붙이고 있을 뿐입니다.

 

모든 존재는 '자아의 착각'을 기초로 이루어집니다. 부처님이 말씀하신 불방일을 실천하려고 해도, 그 실천자도 역시 '자아의 착각'을 기초로 하여 성립되어 있는 현상입니다. 그래서 불방일의 실천은 쉬운 것이 아닙니다. 끝없이 실패를 경험하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한 정신력을 가지고 포기하지 않고 정진하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무서울 정도로 정진하라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실천 수행자는 이성(理性)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생각을 멈추어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진리가 드러납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부동(不動)의 평온에 이르렀다'라고 경험하게 됩니다.

 

◎ 이번 포인트

- 생명은 항상 무명과 감정에 취해있다.

- 취한 사람의 행위는 옳지 않다.

- 취해 살아가기 때문에 괴로움은 끊이지 않는다.

- 사띠하는 길(알아차리는 길)은 불방일이라고 말합니다.

- 불방일한 사람은 괴로움을 이겨내고 평온함에 도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