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youtu.be/FUOx8JEaZ4M?si=G6Uyp900wfoSB8UL
* 수행의 진행 상황을 알고 싶어 하는 이유(20260516)
스승의 날이라고 이렇게 다 많이 모였나? 음. 어제 스님이 조금 생각을 해 봤어요. ‘나도 이제 나이를 많이 먹었구나’. 희옥이, 송천님은 희옥이 알죠? 송희옥이. 우리 그 광안리 붓다의길따라 할 때 현판하고 하는 디자인 해줬던 걔한테서 전화가 왔어. 광안리에서 보고 못 봤으니까 시간이 꽤 많이 흘렀지. (수행자 대답...) 왔었나? 그거 광안리 때 했던 건데, 뒤에 저거 저것도 마찬가지로 디자인 한 거. (수행자 대답...)
아, 왔다 갔어? 음. 걔한테서 전화가 왔기에, 그래서 걔 아들이 원행하는 얘가 있거든 아주 어릴 때 봤는데, 걔가 벌써 장가를 가 가지고 손주가 있다는 거라. 그래서 ‘시간이 많이 흘렀구나’, 근데 시간이 많이 흘렀으니까, 스님도 이제 나이를 많이 먹었다는 얘기거든.
과연 이제 여러분들한테 수행지도 하고, 법을 설할 수 있는 기간이 얼마나 남았을까 하는 그런 생각을 해봤어요. 스님이 없으면 어떻게 해요? 다른 스님들한테 해야지. 그 수밖에 없잖아. 스님도 언젠가는 생로병사를 겪을 수밖에 없어요. 그리고 여러분 곁을 언젠간 떠나야 되고. 그걸 보면서 ‘아, 좀 스스로 수행하고 스스로 문답할 수 있는 방법들을 이제는 좀 가르쳐야 되지 않나’하는 그런 생각을 해봤습니다.
스님들은 출가를 하면 공양할 때마다 빳짜웩카나(paccavekkhaṇa) 공양 게송 한 대목은 항상 욉습니다. "이 음식을 먹는 거는 이 몸은 더럽지만은 이 몸을 유지해서 수행하기 위한 것이지, 배부르게 먹고 몸을 살찌우기 위해서 먹는 게 아니다." 하는 게송을 항상 합니다.
그걸 이제 빳짜웩카나라고 그렇게 하는 건데, 그래서 이 몸의 두려움과 혐오를 불러 일으키라는 뜻은 아니지만은, 어쨌든 이 몸은 부정한 것이고, 이 몸은 언젠가는 늙고 병들고 죽음을 맞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아서 너무 집착하지 말아라는 거라. 이 몸에 대해서. 그냥 이 몸 좋게 만들고 남들한테 예쁘게 보이기 위해서 밥 먹는 거 아니니까, 수행할 도구로만 삼아라 하고 얘기합니다. 그래서 그걸 이제 얘기를 하는 건데,
빳짜웩카나에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그것뿐 아니라 또 하나가 다투 빳짜웩카나라고 하는 게 있는데,
여러분 몸은 뭐로 이루어졌죠? 사대요소로 이루어졌죠. 지·수·화·풍. 마음은 뭐로 이루어졌죠? 수·상·행·식 입니다. 그거 밖에 별 거 없습니다. 그래서 수행할 때 배가 불러오고 꺼지고 하면 ‘아, 이게 바람의 요소구나’ 또는 어떤 경우에는 ‘이것이 땅의 요소구나’ 하는 것들을 알게 됩니다. 그것을 알아차릴 때 의도가 먼저 알아차릴려는 마음이 먼저 일어나 가지고 그다음에 또 마음이 어떤 작용들이 일어나고 하는 것들을 알게 됩니다.
아까 빠띠꿀라(paṭikūla) 빳짜웩카나와 마찬가지로 몸은 수행하기 위한 도구라고 했죠.
그러면 여러분들 몸과 마음은 다뚜(dhātu)로 봤을 때 뭐 하기 위한 도구라? 그것도 마찬가지로 수행하기 위한 도구에 해당됩니다. 그래서 몸을 볼 때는 사대요소로 자꾸 보려고 하고, 마음을 볼 때는 오온 중에 한 가지로 자꾸 보려고 해야만이 몸과 마음에 대해서 집착하는 것도 점점 없어지게 됩니다.
그걸 이제 두 가지로 나눈 빳짜웩카나다 하고 얘기들을 합니다.
그래서 스님들은 항상 이제 그걸 해. 그러다 보니까 수행할 때 뭔 현상들이 탁 일어난다면, 그냥 그 현상을 사띠하고 사라지면 사라지는 대로 그냥 놓아 버리고, 또 주대상으로 돌아오고 그렇게 하는 거라. 근데 재가자들은 그게 잘 안돼. 뭔가 새로운 현상들이 착 일어나면 궁금해 죽겠는 거야. 이게 뭔가 싶어가지고. 그러면 따르릉 전화가 옵니다.
근데 앞뒤 사정은 얘기 안 하고 딱 그것만 얘기합니다. 그러면 스님은 ‘이게 언제 일어난 상황인데 그럴까?’ 그러면서 자기가 본 현상이 맞는지 안 맞는지만 가르쳐주면 된다는 거라. 결론은 내가 어느 정도의 상태에 이르렀는지만 얘기해 달라는 거라. 그럼 내가 그걸 참고해서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가 있다고.
그냥 스님들 같이 현상이 일어났으면 일어나는 대로 그걸 대상으로 삼고, 그 대상이 사라지고 나면 또 다른 대상들이 일어났으면 다른 대상들을 갖다가 주대상으로 삼고, 그냥 지금 현재 일어나는 대상만 사띠하고, 나머지는 전부 다 놔아버리면 되는데 그게 잘 안되는 거 같애요.
음. 언제 가능해질까? 언제 가능해질 거 같애요? 응. 그렇지. 수다원에 이르고 나면 빳짜웩카나냐나(paccavekkhaṇañāṇa)라고 하는 게 생겨납니다. 그러면 자신을 돌아볼 수 있게 됩니다.
‘어, 내가 열반을 경험했나? 나에게서 안 일어나는 번뇌들이 뭐가 있지? 남아 있는 게 뭐가 있지? 또 이렇게 법문 들을 때 그 법문을 내 중심으로 듣는 게 아니고, 그냥 있는 그대로 잘 듣고 환희심이 일어날 수 있는가? 계율을 지키는 거는 자동적으로 잘 되고 있는가?’
이런 것들을 돌아볼 수 있게끔 됩니다.
그래서 수다원에 이르르고 나면은 별반 뭐 물어볼 것도 없습니다. 더 큰 게 있기는 하지만은. 근데 그러기 전에는 대부분 사람들은 자기 자신의 상태를 확인하고 싶어합니다.
확인해 주면 어떻게 돼요? 좋다는 거라 그냥. 그게 자신이 지금 현재 처해 있는 상황을 ‘아, 내가 이마만큼 했구나’ 하는 기쁨도 일어나기도 하고, ‘이런 걸 경험했구나’ 하는 것들로 인해서 일어나기도 하고 그럽니다.
근데 사실은 수행할 때 그건 굉장히 경계해야 됩니다. 자만이 일어나 버리게 되기 때문에, 자만은 내 수행을 딱 중단시켜 버립니다.
경전에도 그런 구절이 있습니다.
"자신에게서 일어나는 자만은 자신의 눈을 멀게 한다." 하는 구절이 있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스스로를 자꾸 좀 돌아봐 보는 것도 하나의 방법입니다. ‘부족한 게 뭔지, 또 잘하고 있는 게 뭔지’ 하는 것을 관찰하는 건 좋은 일인데,
그것으로 인해서 ‘자신이 어느 정도의 상태에 이르렀다’ 하고 생각하고 확신을 가지게 되는 것은 수행에서는 방해요소가 된다는 뜻입니다. 아직 뭐 그래 봤자 도토리 키재기 식으로 수다원에도 이르지 못한 분들인데, 뭘 또 그렇게 ‘니 키가 크니, 내 키가 크니’ 해쌌느냐는 거라. 그럴 이유는 없다는 거라.
경전을 다 뒤져봐도 "수행에 도움이 되는 요소"들은 거의 정해져 있습니다.
첫 번째 보시.
그다음에 보시라고 하니까, 오늘 같은 날은 스승에 대해서 기억하고 하는 것도 보시의 항목에 들어갑니다. 부처님이 법을 설한 것도 보시의 항목에 들어갑니다. 물질적인 보시뿐 아니라 정신적인 것들도 보시 항목에 들어갑니다. 그래서 보시의 항목을 그것도 잘 갖추어서 하지 않으면은 다음 단계로 넘어가기가 힘들다 하고 얘기합니다.
여러분들이 생각하듯이 물질적인 것만 자꾸 보시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 같은 날 이렇게, 특히 그 부처님 상수 제자 중에 사리뿟따 존자 같은 경우에는 항상 저녁에 자기 전이나 아침에 일어났을 때는 가장 먼저 앗사지 존자가 있었던 곳을 향해서 삼배를 드리고 시작을 했다고 그럽니다. 그게 쉽게 말하면 그 스승에 대한 존경하는 것들 의무들을 항상 행해왔던 겁니다.
여러분들도 마찬가지로 오늘 같은 날은 스승에 대해서 공경하는 마음을 일으키는 것들도 물질적인 보시보다도 오히려 더 큰 보시들을 행하게 됩니다. 이 공덕을 낳아서 깨달음에 이르는 도구로 삼기 위한 보시는 그냥 물질적인 것만 턱 준다 해서 되는 것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물질적인 것을 주는 것들도 마음에서 집착함이 없이 흔쾌히 그것들을 줌으로 인해서 그것으로 인해서 받은 당사자들이 깨달음에 이르는 도구로 삼고, 내가 또 그러한 보시를 하므로 인해서 집착하는 것들로부터 조금씩 조금씩 엷어져 나가고 하는 것들이 돼야만이, 이게 보시의 카테고리에 들어가지게 됩니다. 그래서 그럴 경우에는 그것은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도와 과를 이루는데 밑바탕이 된다 하고 얘기합니다. 그래서 자꾸 "보시를 하라" 하고 얘기를 하는 것이지, 계산적으로 자꾸 하면 그거는 보시이기는 하지만은 도와 과를 이루는 데는 도움을 주지 못한다 하는 사실을 이해를 해야 됩니다.
그다음에 두 번째가 보통 얘기하는 계율 지키는 것.
계는 잘 지키고 있죠? 좀 늘려 볼 생각은 없어요? 8계나 10계나 아니면 출가자와 같은 몇 백개의 계를 받을 생각은 없어요? 오계가 자동으로 잘 지켜지면 계 항목이 늘어나는데 부담이 없습니다. 못 지키니깐 계 항목이 늘어나면 힘들어집니다.
어쨌든 계율 부분이 보통 그다음으로 들어갑니다. 왜 그러냐면 계가 지켜지지 않으면은 마음에 항상 찌끄래기가 남습니다. 그러면 그것은 마음의 청정을 유지하는 데는 장애요인이 됩니다. 안 넘어가져요.
그다음에 세 번째가 자비, 자애.
자애를 지니지 않고 뭔가 말하고 행동하고 하는 거를 하지 말아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보통 이 "세 개 항목은 공통적으로 그 깨달음으로 나아가기 위한 밑바탕이다" 하고 얘기합니다.
수행하기 위해서 이게 갖춰지지 않으면 수행하는 거는 힘들다는 얘깁니다.
근데 오계 이거는 갖추려고 안 하고 자꾸 수행 부분만 행할려고 합니다.
왜 그러냐면 이 부분들은 전부 바라밀 부분에 해당이 되기 때문에, 바라밀이라고 하는 것은 어떠한 경우든지 그거 자체가 수행에서 도와 과에 이르기 위한 갖춰야 되는 공덕입니다. 그래서 그런 것들은 여러분들이 자꾸 갖출려고 자꾸 노력을 해야 됩니다. 그게 갖춰지고 나면은, 그다음에 수행에서 실제로 일어나는 현상들 그것들은 크게 문제가 안 됩니다.
그리고 또 수행에서 일어나는 현상들이 그렇게 집착할 만한 대상이 되지 못한다 하는 것들도 알게 됩니다. 그래서 밑바탕이 잘 갖춰졌을 때, 수행했을 때 수행의 속도도 빠를 뿐아니라 그리고 수행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현상들에 대해서도 그냥 지금 현재의 현상으로서 자꾸 알게끔 된다 하는 그런 뜻입니다.
수행에서 언제 확인받고 싶을 때가 있어요?
일어나고 사라지고 하는 것들을 잘 관찰하고 있는데, 일어나고 사라지고 하는 것이 물질적인 현상과 정신적인 현상으로 착 분리되고 나면은,
‘어, 내가 알아차리려고 하는 사띠하려는 마음이 일어나야만이 내가 사띠하게 되네’ 하는 것들을 알게 될 때, 맨 처음 그걸 확인하고 싶어합니다. 쉽게 말하면 원인·결과에 대해서 어느 정도 이해가 되고 나면은 ‘어, 이게 맞나?’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에 확인을 하고 싶어합니다. 그럴 때는 보면 의도가 먼저 보이고, 그리고 현상들이 보이고, 하면서 구분이 되어집니다. 그럼 수행하는 게 또 재미가 있습니다. 그럴 때는 오계를 어기려고 해도 어겨지지도 않아. 자동적으로 잘 지켜지게 됩니다.
그리고 그렇게 수행할 때는 그거 누가 나한테 뭐 심하게 말을 해도 대수롭지 않게 그냥 흘려 버리게 됩니다. 쉽게 말하면 나를 내세우려고 하는 것들도 줄어져 버립니다. 대부분 그때 이제 보통 자신감도 들뿐 아니라 착각을 탁 합니다. ‘내가 뭐 좀 마음도 많이 달라졌으니까, 뭐가 됐나’ 하고 얘기들을 하게 돼요.
그런 상태에 있는 분들은 항상 이 두 가지를 먼저 떠올려 보십시오.
내가 수행은 잘되고 있지만 다른 사람 수행하는 것들을 자꾸 비교하려고 한다든지, 그리고 수행 안 한 사람에 대해서 하찮게 생각한다든지, 이런 마음이 드는지 안 드는지, 그리고 수행해서 어느 정도 잘하고 있는 사람 보면 ‘아, 빨리 나도 저렇게 해야지’ 하는 마음이 있는지 없는지.
이 딱 두 가지입니다. "인색함과 질투하는 마음" .
지금은 수행이 잘되고 있지만은 이 두 가지가 탁 있으면은 그냥 지금 상태를 자신이 알려고도 하지 말고 그냥 대상으로서만 알아차리고, 사띠하려고 하는 마음들을 자꾸 가지면 됩니다.
보통 스님에게 질문하는 경우가 그때 일어납니다.
“어, 마음이 완전히 바뀐 거 같습니다.” 하면서 그런 질문들을 많이 합니다. 근데 그럴 때 조금 전에 얘기했지만 이 두 가지를 한번 탁 떠올려 보고, ‘아, 이제 내가 수행 그래도 제대로 하고 있긴 하는데, 아직은 초보 단계구나’하고 마음을 먹고 그냥 대상으로서만 받아들이면 됩니다.
멈추면 안 됩니다. 사띠는 멈추는 순간 퇴보돼 버립니다 이때는.
사띠를 멈추는 순간 나는 마음에서는 불선한 마음이 착 일어나 버립니다. 애써 선한 마음들을 지속적으로 일으켜 놔놓고 왜 거기서 그렇게 탁 꼬꾸라지느냐는 거라. 그럴 필요 없습니다. 잘하고 있으니까, 좀 더 자신을 ‘아, 내가 그래도 잘하고 있으니까, 근데 아직은 멀었으니까, 그냥 지금 일어나는 대상만 사띠해서 하자’ 하는 마음을 가질려고, 그렇게 할려고 해야 됩니다.
그다음에 두 번째, 쭉 하다 보면 수행이 자동적으로 잘 됩니다. 일부러 하려고 하는 게 아니고, 그냥 기계 같이 분명하게 일어나고 사라지는 게 탁 보입니다. 그래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이 또 점점점 빨라지는 게 보이고, 거기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현상들 뭐 빛이든지 뭐든지 그런 것도 보이고, 아니면 악의가 일어나면 악의가 탁 보여서 싹 금방 사라져 버리고, 그런 것들을 점점 겪어 나갑니다. 그런 것들을 겪어 나가면 그 어디에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고 사띠가 잘 되고 있거든.
그때 주의해야 될 것, 또 하나 있습니다.
수행은 잘되고 있는데 이때 보통 사람들이 그 상태를 확인하려고 합니다. 마음은 아직 수다원에 이르러서 빳짜웩카나를 할 지혜가 생기기 이전에는, 그것을 확인하는 순간 수행은 탁 깨져버립니다.
수행하다 보면 배가 불러오고 꺼지고 하는 것이 빠른 속도로 변하는 게 보입니다. 그런데 빠른 속도로 변하다가 이게 갑자기 희미해지기도 하고 또 선명해지기도 하고 이럴 때가 다가와집니다. 마음이 놀라지만 않으면 계속 그런 상태들이 중간중간에 보입니다. 아주 빠른 거는 빠른 대로 다 따라가서 사띠를 하고 있는데, 분명히 사띠를 하고 있는데 탁 희미해질 때가 있습니다. 근데 이때 놀라지만 않고 그냥 현상으로서만 그냥 ‘음, 희미한갑다’ 하고만 알아차리면 되는데, 거기서 탁 중지하는 순간에 마음은 열반으로 넘어가지 못하고 다시 상카라로 탁 떨어져버립니다.
그래서 뭐 의도가 보이든지, 아니면 다른 어떤 현상들이 보이든지, 아니면 호흡이 다시 보이든지 이렇게 돼 버립니다. 아니면 본인이 그것들을 확인하려고 하는 마음이 탁 일어난 순간에 열반으로 넘어가지 못하게 됩니다.
그래서 여기서 굉장히 조심을 해야 됩니다. 한 끝 차이인데, 마음이 열반으로 넘어가지는지 아니면은 다시 상카라로 넘어가지는지 하나, 한 끝 차이인데, 그 상태를 넘어서지 못하고 자꾸 질문합니다. 본인이 스스로 그 상태를 자꾸 끊는 거라.
수행할 때 힘이 있는 거 느낍니까? 대상을 알아차리는 힘이?
그전에 알아차려질 때의 힘과 지금의 알아차리는 힘은 분명하게 많이 차이가 납니다. 그래서 오력이 균형이 맞을뿐 아니라 굉장한 힘이 있다는 걸 느끼게 됩니다. 그것만 하면 됩니다. 그래서 대상을 지속적으로 계속적으로 그게 희미해지는 것이든, 아니면 살큼 사라지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든, 그거하고 관계없이 힘만 있으면 됩니다. 그 힘만 있는 것만 알고, 그냥 그 대상을 알아차리면은, 나는 열반을 경험할 때의 직전의 마음을 탁 알고 열반에 탁 들어가는데, 그걸 못 하는 거라.
그래서 힘이 있는지만 알고 나면은 그냥 계속 밀어붙이면 됩니다.
스승에게 물을 필요도 없이 또는 자기 스스로 그것을 확인하려고 할 필요도 없이, 그냥 계속적으로 지금 현재 일어나는 것만 대상만 꼭 끊임없이 해나가면 됩니다.
왜 그러냐 하면 그때는 이미 일어나는 번뇌들이 없습니다. 그냥 그대로 오롯하게 자동적으로 그 대상을 알아차리는 데, 굉장한 힘을 가지고 하고 있다는 것들을 알게 됩니다. 그럼 그냥 넘어가 버리라는 거라.
이럴 때는 스승에게 문답할 필요도 없고, 자기 자신이 또 그것을 돌아볼 여유조차도 가지면 안 됩니다.
적어도 이럴 때가 그래도 수행을 잘하고 있을 때입니다.
그래서 그 두 가지 예로 스님이 "스스로 점검해 볼 수 있는 단계"들을 얘기했습니다.
근데 그것조차도 안 된 사람들은 어떻게 할까?
내내 물어봐야 될까, 스님한테? 필요한 것들은 물어봐야 돼요. 필요한 것들은 물 봐야 되는데, 여기도 한번 적어놓은 것이 있습니다.
"자기 평가를 하고 싶어 하는 마음" 내 상태가 지금 어디 있는지 평가하려고 하는 거, 그거 별 의미 없어. 그것 때문에 자꾸 물어보려고 하는 건 하지 마.
그거는 수행의 큰 장애입니다.
이미 그런 마음이 들었다는 거는 아직 수행 초기 단계이기 때문에 그런 마음이 드는 겁니다.
그래서 그럴 필요 없이 그냥 오롯이 지금 현재 일어나는 것들을 지속적으로 계속 사띠하려는 마음을 가지고 하는 것이 좋습니다.
그다음에 뒤에 쭉 적어 놓은 게, 그럴 때 어떤 것들이 있냐면 내가 이거 수행 안 하면 뭐가 잘못될 거 같거든. 자꾸 악한 마음을 품게 되고 부처님 가르침 대로 안 살게 되는 거 같고, 그래서 자꾸 확인하려고 하는 거라.
근데 정확하게 스님한테 수행 보고를 했으면 그걸 얘기를 해 줄 건데, 자기 나름대로 자기 것만 가지고 얘기를 하니까 ‘이게 지금 뭔 얘기를 하는 거지’ 하고 감을 못 잡을 때가 있습니다. 그럼 스님이 또 다른 얘기를 하면 ‘에이, 안 맞아.’
그게 "의심과 불안"입니다.
수행에서 의심과 불안을 가지는 거는 안 좋은 습관들입니다. 그래서 그런 것들 없이 자꾸 하려고 해야 됩니다. 불안할 게 뭐 있어? 수행 잘하고 있으면. 그리고 의심할 게 뭐 있어? 의심을 할 수 없는 거지. 부처님이 도와 과에 이르고 깨달음에 이르는 길은 딱 정해져 있습니다.
그 길을 어떻게 다르게 다른 방법으로 할 수도 없고, 다른 방법으로 도와 과에 이를 수 있는 것도 없고, 뭐 그냥 사띠 잘되고 있으면은 그냥 그대로 그냥 해나가면 됩니다. 현재 일어난 것들만.
그래서 그 뒤에도 스님이 그런 얘기를 했습니다.
3페이지에 보면은 "사띠가 명확하냐, 안 하냐" 마지막 부분에 있습니다. 사띠 잘하고 있다. 그러면은 전혀 불안해할 필요 없습니다. 근데 그 사띠를 잘하고 있는 데 사띠 할 대상인지 아닌지만 보면 됩니다. 자신이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이 대상이 돼야 되는데, 엉뚱한 걸 자꾸 대상으로 할려고 합니다. 누가 말을 한다. 마음이 그 말하는 사람한테 가 있으면 그건 대상이 되는 것이 아닌데, 거기에 가 있는 거라.
아니면 자신에게 화가 일어나 있다 그러면, 화가 일어나 있으면 화가 일어났다고 알아차리는 것은 정확하게 대상이 되는데, 자신도 화를 일으키면서 그것들을 대상으로 할 것 같으면 그건 대상이 아닌 거라.
그래서 대상만 정확하다고 할 것 같으면, 그리고 그 대상을 분명하게 사띠하고 있으면은 되는 겁니다. 빨리 그게 사라지든지 천천히 사라지든지 그거 중요한 거 아닙니다. 대상만 정확하고 사띠만 정확하면은 됩니다. 그게 이제 첫 번째고.
그다음에 두 번째, "자극에 대한 반응"입니다. 일상 생활하면서나 아니면은 집중 수행을 하면서 자극이 없을 수는 없습니다. 거기에 대해서 내가 일으키는 반응들이 어떻느냐 하는 것들을 잘 봐야 됩니다. 반응을 했다 할 것 같으면 이미 사띠는 없어져요. 그래서 그것들이 두 번째고.
세 번째, "생활에서 계를 안정적으로 잘 지키고 있는가" 하는 겁니다. 계의 항목을 일부러 열거할 필요도 없이 자동적으로 잘 지킬 수 있는 거라.
그다음에 네 번째가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는가" 대상을 사띠를 하고 있는데 무상하지 않고 항상 오롯하게 뭔가 존재를 하고 있다? 그럼 붙잡고 있는 거라. 무상·고·무아로 보여지지 않으면은 그건 잘못하고 있는 거라. 열반에 이르렀을 때도 열반을 경험할 때도 무상·고·무아로서 보는 거라. 무상·고·무아가 그 성품으로서 드러나지는 거라.
근데 일반적인 대상을 보는데 그게 변하지 않는다? 그러면 그거는 잘못하고 있는 거라. 그래서 대상은 무상·고·무아로 볼려고 하는 훈련들을 자꾸 해야 됩니다.
그런 것들만 잘 스스로 체크를 해 나가면은 크게 문제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 뒤에 보면 사띠 부분을 얘기해 놨습니다.
첫 번째 들뜨지 않고, 그다음에 끊어지지 않고, 수행 대상을 잘 분간해서 그 대상을 잘 알아차리는 것,
그다음에 그 대상으로 인해서 내가 수행해서 조금 더 나은 단계로 나아가 지는지 아닌지, 그래서 그게 지속되는 것인지 아닌지, 그런 것들만 잘 구분하면은 사띠를 잘하고 있는 거니까,
사띠가 힘이 약하고 힘이 강하고 하는 것은 지금은 내 단계라고 생각을 하고, 그냥 그대로 해 나가면 크게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니까, 여기 적어 놨듯이
"대상인지 아닌지, 유익한지 도움이 되는지, 지금 일어나는 대상인지, 선한 마음을 일으키는지, 붙잡는 것이 아닌지, 밀어내는 것이 아닌지, 무상·고·무아의 성품이 드러나는 것이 아닌지"
그런 것만 잘 체크하면은 '지금 현재 일어나는 대상이 그게 무엇이든 그냥 사띠할 대상이다' 하고 마음을 먹고 지속적으로 해나가면 됩니다.
일부러 본인이 본인의 상태가 어느 정도인지 자꾸 체크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그거는 나중에 도와 과에 이르면 자동적으로 체크가 됩니다. 그때 해도 안 늦으니까, 본인이 자꾸 나를 내세우고 나를 확인하려고 하는 것들은, 내가 없는데 뭐 그렇게 확인할 것들이 있어?
의미 없는 거니까 그렇게 알고, 수행을 열심히 하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사두! 사두! 사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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