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정념(正念, sammā sati, 삼마- 사띠) (20081120)
정념 1)
시작을 해봅시다. '정념(正念), 삼마 사띠(sammā sati)' 부분입니다.
'위빳사나'를 다른 말로 표현을 한다면 뭐라고 그랬어요? '사띠 수행'이라 그러죠! '위빳사나가 곧 사띠'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삼마 사띠' 사띠 부분에 대한 것은 두 번에 나눠가지고 할거고, 그래서 여러분들에게 프린트물 나눠준 것은 전반기 것만 해당이 됩니다. 뒤에 프린트물 나갈 거는 조금 더 보충하고 복습하는 그런 것으로 교재가 형성이 돼있습니다.
부처님이 출가를 왜 하게 되었을까요? 그토록 풍족하게, 뭐 부러운 것 없이 잘 지내시던 분인데, 여러분 같으면 출가하겠습니까? 하고 싶은 거 다하고, 갖고 싶은 거 다 원하는 거 다 얻을 수 있고 한데.
살기가 힘든 사람들은 보통 보면 먹고 살기 위해서 아등바등 이렇게 하다 보면 출가라는 것들은 생각을 잘 못한다고 그럽니다. 물론 또 너무 힘들면 극단적으로 출가할 생각을 하겠죠. 그런데 굉장히 풍족한 사람들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할 경우에는 별로 근심 걱정할 것도 없으니까 왜 출가했을까? 하고 의문을 품을 수가 있는데 오히려 풍족해지면 그때 출가라고 하는 것들을 생각한다고 그럽니다.
부처님이 늙어가는 사람들, 노인들이죠. 노인들을 보고 싫은 마음이 일어났거든. 저렇게 늙어가는 것은 보기 싫다는 거라. 그런데 가만히 보니깐 나도 그렇게 늙어 가야 되거든. 아픈 환자들도 마찬가지라. 아픈 환자들을 보면 일부러 시선을 피하려고 그러고 건강하기를 바라지만 어차피 나도 그렇게 아플 수밖에 없는 상황이고, 안 아프고 한평생 살아간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니까.
육신의 병이 없으면 마음의 병이라도 있게 되어 있다는 거라.
항상 정신적으로든 육체적으로든 괴로움을 당하고, 아픔이 있게 되어 있는 건데 그거 없이 지낼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고, 또 죽은 사람들을 보니까 허망한 거라. 꼴랑 그거 하고 살려고 저렇게 아등바등거리나.
특히 나이 드신 분들은 나중에 그런 생각이 든다고 그럽니다. 뭐 하러 내가 그렇게 살았는지 모르겠다. 어차피 죽는 건데 살아있는 동안에 좀 편안하고 또 내가 하고 싶은 것들 하고 또 남들에게 베풀고 이렇게 살았으면 좋았을 건데 뭐 하러 그렇게 살았는지 모르겠다고 그럽니다.
부처님도 보니까 어차피 사람들이 그렇게 죽는 거라. 저렇게 죽을라고 살 때 저렇게 아등바등 거리느냐, 나도 어차피 그렇게 죽어야 되는데, 내가 지금 생을 누리고 아무리 풍요하게 산다고 하더라도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 어차피 그렇게 살든 아니면 지지리 가난하게 살든 어차피 죽을 때는 꼭 마찬가지인데! 누구든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인데 그것을 피할 수는 없는 것이 아니냐!
그때 그런 과정들을 겪어 오면서 출가를 하게 됩니다.
출가하고 나서 깨달음을 탁 이루었는데 그때 처음 하신 말씀이 뭐냐 하면
"나는 이제 모든 걸 알았다! 고민이나 괴로움이라고 하는 것들을 넘어서는 그런 진리를 찾아냈다!" 하고 선언을 하게 됩니다. 진리를 발견했다는 겁니다.
부처님이 발견한 진리, 부처님이 찾은 진리라고 하는 것들은 다른 말로 표현할 것 같으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똑같이 그렇게 진리를 찾을 수 있고 그렇게 찾아가는 방법을 가르쳐 준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것을 '위빳사나'이다 하고 얘기를 합니다. 그런 진리를 찾는 길을 가르쳐 준 것을 '위빳사나'다 라고 얘기를 하는 거죠.
그러니까 일상생활 중에서 일어나는 것들을 진리를 찾는 방편으로 이용을 할 수밖에 없었다 하는 것입니다.
'위빳사나 수행'은 결코 고행으로 되는 것은 아니고, 가장 중요한 것은 몸과 마음을 얼마만큼 릴렉스 하게 하느냐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부분입니다. 고요하고 편안하지 않으면 수행에 몰두할 수도 없고, 또 그 대상에 대해서 명확하게 알 수도 없습니다.
여러분들도 그런 경험들을 많이 할 겁니다. 화가 나 있을 때 사리분별 못하는 거고, 또 무엇에 씌여가지고 내 앞에 어떤 생각들이나 개념들이 꽉 끼어있을 것 같으면, 그게 맞다고 생각하지 다른 사람들의 얘기라든지 이런 것들이 바르게 들어오지 않는다는 겁니다.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있을 것 같으면 되는데, 그리할 것 같으면 우선 어떻게 해야 돼요? 몸과 마음이 편안하게 가라앉아야만이 가능하다 하는 그런 것입니다.
수행은 그리고 '위빳사나 수행'은 바로 그런 것들입니다.
우선 기본은 몸과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어라!
그렇게 해서 편안하게 만들어서 보니까 어떻게 돼요?
올바르게 볼 수가 있다는 거라. 내가 지금 뭐 하고 있는지, 아니면 뭐가 옳은지, 뭐가 그른지 하는 것을 올바르게 볼 수 있다는 거라.
그래서 올바르게 본다는 것들이 이 위빳사나 수행법이다 하는 것입니다.
눈으로 보는 것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고 마음으로 올바르게 인식하는 것.
그래서 그것을 내가 명확하게 아는 것.
그래서 '위빳사나(vipassanā)'의 뜻이 '위(vi)라고 하는 '명확하고 분명하고 확실하게', '빳사나(passanā) 본다 안다 관찰한다'하는 그런 뜻이 됩니다.
자! 그럼 그렇게 '명확하게 알아차리고 명확하게 본다는 것이 수행이다' 라고 그렇게 얘기를 했는데 그럼 뭘 보는 것입니까? (수행자 대답)
대상의 실재는 뭘 가지고 보는 건데요? 알아차림으로 보는데 무엇을 보느냐 하는 것은 밖의 대상을 보는 것이 아니고 자기 자신을, 자기 자신의 몸과 마음을 명확하게 본다 하는 거라. 자기 자신을 올바르게 인식한다 하는 거라.
그러니까 수행의 대상은 내 몸과 마음이라는 거라.
'사띠'의 대상도 '위빳사나'의 대상도 내 몸과 마음일 수밖에 없다는 거라.
마음이 평온하고 고요하고 릴렉스 되는 것은 내 몸과 마음이 릴렉스 되는 것이지 다른 사람이 릴렉스 되는 것은 나에게 큰 영향을 못 미친다는 거라. 그러니까 내가 릴렉스 된 상태에서 뭘 봐야 되느냐 하면 내 몸과 마음을 대상으로 해야 된다 하는 거라.
그것이 '위빳사나'의 기본입니다.
그러니까 자기 자신의 몸이 무엇인지, 마음이 무엇인지, 어떻게 작용하는지 하는 것을 분명하게 인식하는 것들입니다.
그러면 몸과 마음이라고 그렇게 얘기를 했는데, 오늘 날이 춥죠? '피부가 춥다'하고 느낍니다. 그런데 보통 어떻게 느낍니까? '나는 춥다'하고 느끼죠! 피부가 추운 것도 있고 또 춥다는 것을 인식하는 마음도 있다는 거라.
그래서 '위빳사나' 명상은 항상 이 두 가지를 기본적인 테마로 둬야 됩니다.
'나'라고 하는 것에는 두 가지가 있다.
물질적인 몸, 그다음에 정신적인 나-마음이라고 하는 '나' 이 두 가지가 있다.
어떤 것이든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느끼고, 감각기관으로써, 마음으로 기능하고 하는 생각하고 하는 이런 것들 이런 여섯 가지 대상이 감각기관을 통해서 우선 몸에서 먼저 부딪칩니다. 그것이 접촉이죠.
몸에서 부딪치고 나서는 그것을 마음으로 인식하지 않으면 나에게는 영향을 못 미치죠. 그래서 마음으로 인식하게 됩니다.
몸으로 느끼고 마음으로 인식하고 하는 두 가지 패턴을 가지게 됩니다.
그래서 무엇을 알아야 되느냐 하면 이 두 가지를 알아야 됩니다.
몸을 알아야 되는 것이고 마음을 알아야 된다는 그런 겁니다.
그래서 그렇게 하기 위해서 우리는 어떻게 합니까? 수행을 할 때, 보면 '본다'하고 명칭을 붙이죠. 들으면 '듣는다'하고 명칭을 붙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보는 것은 마음이 보고 있지만 보는 대상은 이 물질적인 눈이란 말이라. 눈이라고 하는 것과 마음이라고 하는 기능을 합치시켜주기 위해서 그렇게 명칭을 붙이는 거라.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본다고 인식한다! 이 두 가지를 명확하게 하기 위해서 명칭을 붙인다 하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수행은 그와 같은 것들이다 라고 생각을 하면 됩니다.
이 수행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 보통 부처님이 두 가지를 얘기합니다.
처음은 우선 마음을 고요하고 편안하게 만들어라! 그것이 첫 번째입니다.
어쨌든 마음을 가라앉혀라, 몸도 마찬가지로 가라앉혀라 하는 그것이 첫 번째이고. 그것이 안 되면 수행은 처음부터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거라.
두 번째가 뭐냐면 그다음에는 자신의 상태, 몸의 상태이든 마음의 상태이든 정직하게 있는 그대로 알도록 해라! 가식을 붙이지도 말고, 확대 하지도 말고, 그것을 배척하려고도 하지 말고, 싸우려고도 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의 상태를 정직하게 알도록 하라!
이 두 가지입니다. 수행의 기본 포인트, 가장 중요한 포인트가.
그런 의미에서 오늘은 '사띠'라고 하는 부분을 한번 보도록 하겠습니다.
예, 질문 해보십시오. (수행자 질문)
저번에도 누누이 얘기를 했거든요. 마음도 두 가지 기능이 있다고 그랬습니다. 아는 것하고 아는 것을 인식하는 것 두 가지의 기능이 있다고 얘기를 했고,
육체도 이 육체라는 것과 호흡하는 기능하고 육체도 두 가지 기능이 있다 하고 누누이 얘기했거든. 그러니까 그것은 스님이 지금 재차 설명할 수 있는 부분은 아닌 것 같으니까 법문했던 것들을 다시 또 들어보도록 하시기 바랍니다.
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생각을 하고 있다. 그러면 생각하고 있다는 기능이 하나 있단 말입니다.
'생각하고 있다' 생각하고 있는 것을 내가 인식하는 기능이 있다는 거라. 명확하게.
그러면 똑같이 마음이라는 것도 이렇게 두 가지 기능이 나타난다는 거라.
여러분들이 수행하고 있다고 할 것 같으면 그냥 수행을 하고 있다. 그렇다면 수행을 하고 있지마는 수행하고 있다는 것을 인식을 못 할 것 같으면 수행을 안 하고 있는 거라. 호흡이 있지만 내가 호흡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할 것 같으면 그것은 육체적으로 호흡을 안 하고 있는 것하고 꼭 마찬가지입니다. 실제적으로는 호흡을 하고 있지만.
마음이 방황을 하고 많은 생각을 하고 있지마는 그것을 내가 인식을 못 할 것 같으면 그것은 마음이 없는 것이나 아니면 마음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과 꼭 마찬가지라는 거라. 그런 의미로써 받아들이기를 바랍니다.
그마만큼 '사띠'라고 하는 것이 중요한 부분입니다. 그래서 '사띠가 없으면 죽은 자와 마찬가지이다'하고 얘기하는 것이 그런 이유들입니다.
자! '삼마-사띠' 부분을 한번 봅시다. '사띠라고 하는 것은 알아차리는 것이다' 하는 겁니다.
뭘 알아차린다고?
몸과 마음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마음에서 더러움이 일어나지 않고 객관적으로 알아차려 가는 것이 이 '삼마-사띠'이다 하는 거라.
왜 사띠를 해야 되느냐?
사띠를 하지 않으면 마음이 계속 번뇌에 오염되고, 모든 대상을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가 없고, 객관적으로 볼 수가 없기 때문에 그렇다는 거라.
수행에서 이 사띠라고 하는 것은 어느 때든지 있어야 되는 것이고 적어도 인간으로서 살아있다고 할 것 같으면 '사띠가 없으면 그것은 죽은 자와 마찬가지다' 하는 거라. 그래서 부처님도 '백 년을 사는 것보다 단 하루라도 알아차리면서 사는 것이 훨씬 이익이고 낫다' 하고 얘기를 하는 겁니다. 그래서 부처님도 '항상 어느 때든지 알아차리라!'하고 말씀을 해 놓았습니다.
이런 알아차림이 있는 상태, 그리고 알아차림에 대해서 누누하게 설명했던 경전인 이 『대념처경』이 기본적인 주류를 이루게 됩니다.
'인간의 모든 슬픔과 괴로움, 고민을 없애기 위해서, 마음을 맑고 깨끗하게 만들기 위해서 그리고 해탈 열반에 이르기 위해서는 반드시 사띠하라! 그런 것을 만들기 위한 길은 사띠 밖에 없다. 이 길밖에는 없다!'하고 부처님이 단언을 해놓았습니다.
통상적으로 보면 '다른 것으로 인해서 해탈에 이를 수 있다'하고 많은 수행방법을 가르치는 사람들도 얘기를 합니다.
그런데 경전에는 분명하게 그렇게 적어놓았습니다.
'이 사띠의 실천만이, 이것에 의해서만이 해탈에 이를 수 있다!'
역사적으로 보더라도 전통적인 맥을 이어온 사람들은 이 방법으로 인해서 깨달음을 이뤘던 사람들입니다.
남방불교에서 대승불교의 역대 큰스님들이나 이런 부분에 대해서 강하게 비판하는 것 중에 하나가 뭐냐 하면 '부처님 수행법이 아니다!' 하고 배척을 하는 이유 중에 하나입니다. 여러 가지 대승불교에서 하는 수행법들, 왜 그러냐 하면 '사띠가 없었기 때문이다!' 하고 판단들을 합니다.
단편적인 예를 들면, '사띠'가 있는 사람들의 언행은 일치가 되고, '사띠'가 있는 사람들은 항상 몸과 마음이 고요하게 가라앉아 있다는 거라.
그런데 '깨달았다'는 사람들은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많거든. 그러니까 적어도 그런 말이나 행동들을 봐가지고 '사띠를 하지 않고 있다'고 판단들을 한다는 거라.
'사띠'를 하고 있을 것 같으면 적어도 그렇게 할 수가 없다는 거라.
법문할 때 어디서 큰소리를 지를 수가 있고, 또 여러 가지 행동들을 할 수 있느냐는 거라. 그래서 사띠가 없었다고 판단들을 하는 거라. 그러니까 '당연히 부처님 수행법이 아니다!' 하는 거라.
왜 그러냐 하면 부처님은 '반드시 이 사띠로 인해서만 해탈에 이를 수 있다'고 했는데 다른 수행법을 하더라도 사띠를 했으면 무리가 없겠지만, 안 했기 때문에 그런 것들이 일어난다는 거라. 그래서 배척을 하게 되는 결과들입니다.
역대 2500년간 쭉 내려오면서 깨달음에 이르렀던 사람들, 부처님 당시 때의 8만 명이 넘는 아라한들이든지 아니면 그 후대의 사람이든지 또 지금의 남방에서 선지식이라고 하시는 분들의 공통적인 것이 뭡니까?
항상 고요하게 가라앉아 있다는 거라.
어떤 경우에서든지! 그리고 어떤 경우든지 객관적으로 보고 판단한다는 거라.
마음속에서 번뇌라든지 괴로움이라든지 이런 것들을 찾아볼 수가 없다는 거라.
마음이 맑고 깨끗한 것은 그것은 틀림없는 사실이고.
이 사띠로 만이 이것이 가능하다는 거라.
일시적으로 다른 것들로 인해서 누를 수는 있습니다.
마음의 괴로움도 여러분들 잘하는 방법, 수다 떨어서 풀어버리고 술 한 잔 마시고 풀어버리고 그렇게 해서 일시적으로는 가능합니다. 그렇다고 해가지고 마음의 괴로움이 또 안 일어납니까? 또 일어난다는 거라. 항상 그것이 없을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은 '오로지 사띠만이 가능하다' 하는 얘깁니다.
그래서 부처님이 '사띠로만이 해탈에 이를 수 있다!'하고 얘기를 합니다.
자! 그러면 '어떻게 사띠하는 것인가?' 하는 부분입니다. '삼마-사띠'
밑에 보면 듣는 것을 예로 들어서 합니다. 음악의 예를 들어봅시다.
음악, 기분 좋은 소리, 클래식이나 이런 거 들으면 기분 좋죠! 그러다가 여기 있는 분은 나이가 들었으니까 나이에 맞지 않은 요즘 10대들이 하고 있는 랩을 할 것 같으면 귀에 거슬리거든. 똑같은 소리인데, 그렇다는 거라. 그게 일반적인 패턴이라는 거라.
그런데 그걸 만약에 사띠를 하고 들을 것 같으면 어떻게 되겠어요? 그냥 소리로만 들릴 뿐인거라. 랩이든 아니면 클래식이든. 보통 여러분들 취미생활들을 합니다. 조금 살만하면. 그래서 음악회도 가고 골프도 하고 여러 가지 취미생활들을 하게 되는데, 솔직히 얘기하면 사띠를 계속하다 보면 그런 것에 흥미를 가지지를 않게 됩니다.
너무 무미건조할 것 같죠? (수행자 질문)
재미를 붙일 수 없다는 것이, 그런 것들이 떨어져 나가는 반작용으로써 반드시 일어나야 되는 것이 마음의 고요함이라든지 그리고 법에 대한 희열 같은 것들이 일어나야 되는데 그것이 안 일어나니까 사는 재미가 없어지는 거지.
예를 들면 찌들게 가난한 사람들은 아무것도 다른 거 하지 못한단 말이라. 하지 못하니까 사는 재미가 없어요. 다른 사람들은 상대적으로 보면 다 누리고 사는 것 같은데 나는 그것을 안 하고 있으니까, 못하니까 사는 재미가 없는 거라.
지금 그와 마찬가지라 거기 얘기는. 그런 것들은 지금 안 하는 것일 뿐인 것이지, 지금 흥미가 없다는 것일 뿐인 것이지, 동기 유발이 될 것 같으면 또 흥미가 일어난다는 거라. 그것은 사띠하고 있다는 것은 아니고 지금 현재 흥미가 없다는 것뿐인 거라. 없을 때 빨리 그러면 마음이 고요해지고 또 그런 번뇌에 물들지 않는 수행으로 인해서 그 희열들을 갖다가 맛을 봐야만 돼! 그런데 그것도 안 보고 하니까 점차 사는 재미가 없어지는 경우가 돼버리는 거라.
어쨌든 이런 소리 들리는 것들로 인해서 우리는 보통 욕구나 화냄이나 하는 것들이 일어나게끔 됩니다. 그래서 마음이 계속 번뇌에 오염되게끔 된다는 겁니다.
수행해 본 사람들도 알겠지만 그 소리 들리는 것을 가지고 금방 '소리들림, 소리들림' 한다 해가지고 그 소리가 객관화되지는 잘 않습니다. 대부분 보면 그것이 그냥 아름다운 소리이면 아름다운 소리! 아니면 거슬리는 소리이면 거슬리는 소리! 이렇게 들리게끔 됩니다.
그리하더라도 끊임없이 그것을 노력을 해야 되는 거라. 왜? 그 길 밖에는 부처님이 없다고 했으니까!
그렇게 알아차리는 길밖에는 없다고 그랬으니까 그 길밖에 없는 거라. 그러니까 실제적으로 사띠를 하려고 할 것 같으면 얼마만큼 무진장하게 노력을 해야 되겠어요! 엄청나게 노력을 하고 엄청난 시간이 지나야만이 진짜 사띠들을 하게 되는 거라. 그래서 지금 당장 수행한다고 사띠한다고 해 봐야 별 재미도 없고 그래서 그만둬 버릴 것 같으면 그냥 거기에서 끝나버린다는 거라.
수행은 그와 마찬가지입니다. 쉽게 이것을 다 이룬다고 생각할 것 같으면 절대 오산입니다. 적어도 '내가 죽을 때까지 이것을 해나가는 것이다'하고 생각을 하고 판단들을 해야 만이 느긋해집니다. 느긋해져야만이 그때부터 사실은 사띠가 이제 시작이 되려고 하는 단계라는 거라.
얼마 전에도 100일 수행들 했죠! 결제기간 동안. 하고 나도 별반 마음속에서 달라지는 것은 없을 거라. 꼴랑 그거 했다고 해서 될 것 같으면 얼마나 좋겠어.
물론 경전에는 열심히 노력하면 7일 만에도 해탈을 이룰 수 있다고 그렇게 얘기하지만, 실제적으로 현대사회에서는 그런 사람은 없습니다. 적어도 끊임없이 노력했을 때 자기에게 그런 '아, 이것이 사띠구나' 하는 것을 알고 그 길을 걸어가게 된다는 거라.
그리하더라도 여러분들은 어쨌든 끊임없이 해야 됩니다.
왜? 이 사띠에는 굉장히 좋은 기능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띠를 하면 할수록 따라오는 것들이 있습니다.
집중력도 커지게 되고, 또 노력하려는 것들도 커지게 되고 이런 것들이 따라온다는 거라. 지금 현재는 사띠가 다 안 된다고 하더라도 이런 것들이 따라온다는 거라. 그리고 조금 더 객관적으로 보게 되니까 다른 사람들에 비해 조금 더 지혜롭게 되고.
그래서 부처님은 '끊임없이 사띠하라!' 하고 얘기를 했지 '집중력을 키워라, 지혜를 길러라' 하고 얘기를 하지 않는다는 거라. 사띠만 할 것 같으면 자연적으로 그것은 따라와지는 거니까! 사띠의 이로운 점이 그런 것들이라는 거라.
그런 사띠는 반드시 지금 현재, 있는 그대로를 알도록 하는 것이다.
아주 간단한 겁니다. 스님 소리를 듣고 있으면 소리 듣는 것에 지금 현재 그것을 알도록 자꾸 노력하라는 거라. 지금 현재는 소리가 좋게 들리기도 하고 아니면 쓸데없는 소리같이 들린다고 하더라도, 그래도 소리 들리는 것에만 집중을 하고, 그것을 자꾸 사띠하려고 하라는 거라. 계속 노력을 하라는 거라.
노력하다 보면 어떻게 돼요? 그것만 자꾸 들으려고 노력을 하면 노력의 힘도 커지는 것이고, 집중력도 더 커지는 것이고, 그리고 그렇게 하다 보면 마음도 평온해지고 고요해지니까 조금 더 편안하게 되는 것이고, 그런 이익들이 자꾸 따른다는 거라.
이익이 따르는 줄 알 것 같으면, 그리할 것 같으면 끊임없이 그렇게 '사띠하라'는 거라. 알아차리라는 거라.
뭘? 지금 스님 얘기를 듣고 있으면 듣는데 계속 사띠 하라는 거라. 안 들을 때에는 어떻게 해야 돼요? 지금 내가 하고 있는 것, 밥 먹으면 밥 먹는데 끊임없이 사띠하고, 움직이면 움직이는데 끊임없이 사띠하는 거고, 누워있을 것 같으면 누워있는 거 그대로 끊임없이 사띠하는 거고, 모든 것을 지금 현재 하고 있는 것! 마음속에서 하는 것이든 몸이 하는 것이든 지금 하고 있는 것을 끊임없이 그렇게 자꾸 알아차리라는 거라. 그 길밖에는 없다는 거라.
통상적으로 보면 수행한다고 해가지고 이 자리에 와서는 합니다.
여러분들도 마찬가집니다. 수행 다 끝나고 나서 밥 먹는데 가만히 방안에서 보면, 다 잊어먹었어 벌써! 그렇게 하지 말고 지금 현재 하는 것! 그렇다고 해서 억지로 천천히 하면서 하라는 얘기는 아닙니다. 그래도 밥을 평상시 같이 먹는다고 하더라도 그속에서도 계속 사띠하려고 노력을 하라는 거라. 현재 하고 있는 것들을 갖다가! 하다 보면 조금 더 천천히 되어지기도 하고 또 빨리 하더라도 알아차려 나가진다는 거라.
하면서 그냥 맛난 것 아니면 맛없다는 생각을 일으킬 것 같으면 그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어진다는 거라. 왜? 그거 하지 않기 위해서 사띠하는 거거든. 그러기 위해서 조금 전에 몇 시간씩 수행을 했단 말이라. 그런데 탁 돌아서고 나면 그걸 안 할 거 같으면 그건 아무런 의미가 없어져버리는 거라.
어떤 경우든지 몸과 마음에서 행하고 있는 것은 사띠하라는 거라. 그 속에서 내가 특별한 것들을 체험을 하든 안 하든 그게 중요한 부분은 아니라는 거라.
“스님은 천이통이 열렸는데 나는 와 열심히 했는데 안 됩니까?”
내가 여러분들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내가 아니고. 여러분들과 나는 분명하게 다릅니다. 내가 살아온 과정도 다르고 여러분들 살아온 과정도 다릅니다. 다른 사람인데 왜 똑같이 될 거라는 생각을 하느냐는 거라. 그거는 그렇게 될 수가 없습니다. 자기 자신도 조금 전에 체험했던 거, 조금 지나서 체험했던 거 분명히 다릅니다. 또 자기 자신도 그렇게 다르는데, 어떻게 남하고 똑같이 될 거라는 생각을 하느냐는 거라. 그건 그렇게 될 수가 없다는 거라.
체험을 하든 안 하든 그것은 중요한 부분이 아니라는 거라. 그리하더라도 어쨌든 끊임없이 사띠를 하라는 거라.
그래서 사띠를 하려면, 경전에는 '사띠를 확립하라!' 하고 얘기를 하게 됩니다. 수행해나가는 것뿐 아니라 일상생활 모든 것에서 사띠하라고 하기 때문에 사띠를 확립하라고 그럽니다. 특별한 시간에만 해나가는 것이 아니다 하는 거라.
자!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사띠의 의미가 뭐라고 그랬습니까?
객관적으로 본다는 것! 명확하게 본다는 것! 있는 그대로 본다는 것! 지금 현재 것을 알아차린다는 것! 이거거든요.
그것에서 가장 걸림돌이 무엇일 것 같아요?
왜 객관적으로 안 되고 왜 있는 그대로 안 보게 되겠어요?
물이 투명하면 있는 그대로 보입니다. 물이 오염되어 있다든지 아니면 물이 더러울 것 같으면 있는 그대로 안 보이는 거라. 사띠는 있는 그대로 보는 거라.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 돼요? 투명하게 만들어야 되는 거라. 있는 그대로 봐야 되는 거라. 내가 가지고 있는 막들을 제거해야 된다는 거라.
그래서 사띠의 기본이 뭐냐 하면,
바로 밑에 적어놓은 '받아들인다!' '수용한다!' 하는 거라.
밑에 그런 얘기를 적어놓았습니다.
물론 테라와다 불교권에 가서 수행하는 데에는 그마만한 이익들이 있습니다.
틀림없이 많은 이익들을 얻어옵니다. 스님도 처음 가서 경험한 건데 아무런 걱정이 없어요. 가서 수행하는데. 출가자일 것 같으면 아침에 가서 탁발 갔다 오고 나서 하루 종일 하는 게 그냥 수행이라. 누가 이것을 해라 하는 것도 없고 또 달리 할 것도 없어. 얼마나 좋은 조건이라! 재가인들도 마찬가지라. 때 되면 가서 그냥 밥 먹으면 돼. 내가 밥을 차릴 이유도 없고 그것 때문에 고생할 이유도 없고 그거 신경 쓸 이유도 없고, 그냥 갔다 와서 밥 먹고 와서 또 수행하고 내내 그거 하는 거라.
그런데도 수행이 안 돼! 왜 안 되는지 알아요?
처음엔 그랬거든. 더운 나라니까 모기들이 많아. 앉아있는데, 수행하는데 모기가 와서 물어. 그래서 생각에 '아이고, 이놈의 모기만 없으면 내가 해탈을 하겠는데' 이놈 모기 때문에 못 하겠는 거야.
그래서 그다음에 생각한 게 같이 수행하는 사람들끼리 '야, 우리 돈 얼마씩 내자, 모기장 치자.' 그래가지고 모기장을 쳤거든. 그럼 틀림없이 해탈을 해야 된단 말이라. 모기장까지 쳤는데! 못하는 거라!
그전에도 모기장 없을 때도, 다른 스님들은 앉아서 모기가 있든 없든 그냥 수행 열심히 해. 또 모기장을 쳐놔도 모기장을 쳐놨든 안쳐놨든 관계하지 않고 그냥 수행 열심히 해. 편하고 좋은 조건이라고 해서 해탈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대로를 받아들이지 못했기 때문에 못하는 거라.
지금 조건이 나쁘다. 조건이 나쁘면 그냥 그대로 받아들이라는 거라. 받아들이면 아주 편안해지고 좋은 조건이 돼버리는 거라. 그런데 대부분 사띠를 하면서 못하는 게 뭐냐면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거라.
아까 간택이 뭐라 그랬죠? (수행자 대답)
마음을 어떻게 한다고요? (수행자 대답)
분별하는 마음을 내려놓는 걸 간택이라 그러죠.
마찬가집니다. 받아들이라 하는 것은 지금의 조건 지금의 상황들을 있는 그대로 그냥 받아들이라 하는 거라. 대상 자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되는 것이지 대상을 멀리 할려고 한다든지 싸울려고 할 것 같으면 절대 안 됩니다. '요시! 내가 한번 해보자.' 할 것 같으면 어떻게 돼요? 일단 내 마음속에서 분노가 일어나게끔 되는 거라.
그러니까 분노하고 자기가 싸우는 것이지 대상하고 내가 사띠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니게 돼버리는 거라. 처음부터 스스로 그렇게 막을 씌워버리는 거와 마찬가지라는 거라. 물은 그냥 있는 그대로 봐야 되는데 그걸 막을 씌워놓고 보게 된다는 거라. 그럼 그게 깨끗하고 투명하게 보이겠어요? 안 보인다는 거라.
사띠의 기본은 바로 그겁니다.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라는 거라.
그 밑에 예를 들어놨습니다.
불결하다는 생각을 끊임없이 하는 사람은 몸을 씻지 않으면 안 됩니다.
몸이 더럽다고 생각을 하기 때문에. 실제로 더럽겠지. 우리 이 몸에 얼마나 바이러스가 많아? 손을 비누 가지고 깨끗이 씻는다 해가지고 이게 다 없어지겠어요? 현미경으로 찾아보면 틀림없이 바이러스 있을 거라. 그런데 그게 불결하다는 거는 맞아.
그런데 우린 어떻게 돼요? 정도껏 하거든.
화장실 갔다 와서 비누로 손 한번 씻고 나면 대부분 깨끗하다고 생각해버리는데, 그런 편집증 환자들은 그걸 못 견디는 거라. 더럽다고 생각하니까 끊임없이 씻는 거라. 씻으니까 어떻게 돼요? 살갗이 문드러지고, 문드러지더라도 깨끗하지 않다고 생각하니까 계속 씻는 거라. 자기 자신을 고통스럽게 더 만드는 결과를 낳게 되는 거라.
그거는 왜 그래요? 그냥 그거를 받아들이지 못해서 그러는 거라. 내 지금 상황이 이렇다 할 것 같으면 그 상황을 그냥 받아들이면 되는데, 그걸 받아들이지 못하니까 불결하다는 생각이 일어나니까 끊임없이 씻게끔 되는 거라. 그런다고 해가지고 완전하게 깨끗하게 되는 것은 아닌데.
그래서 대상하고 절대 싸우지 마라. 대상하고 싸우고 배척하려고 할 것 같으면 이미 수행은 못하게 된다는 거라. 왜 그러냐면 그렇게 하면 할수록 그것은 내가 탐·진·치를 일으키는 결과를 낳을 수밖에 없다는 거라.
그래서 그런 것들에 저항하려고도 하지 말고 또 투쟁하려고도 하지 마라!
수행에서 대부분 실패하는 것이 그런 것들입니다.
특히 고요할 때는 좀 괜찮은데 이것이 조금 괴롭다고 할 것 같으면, 만약에 수행을 해나가는데 다리가 굉장히 고통스럽다 그럴 것 같으면 요걸 싸울 듯이 관찰합니다. '아픔, 아픔, 아픔'
몸에서는 이미 뭐가 일어나고 있어요? 화가 일어나고 있는 거라. 배척하려고 하니까! 배척하려고 하면서도 이걸 관찰해라 하니까 그걸 '꽈악' 하고 있는 거라. 그냥 그걸 탁 놓아 버릴 것 같으면 전혀 그런 현상이 안 일어나거든. 탁 놔 버릴 것 같으면 어떻게 돼요? 그냥 있는 그대로 보여 버리는데, 그걸 못 놓는 거라.
자식은 내가 아니다. 자식에 대해서 놔버리라고 해도 그걸 못 놓는 것과 꼭 마찬가지라. 놓는다고 해가지고 자식이 도망가는 건 아니라. 어차피 내 자식이라. 그런데도 놓아버리라는 것은 그 집착을 놓아버리라는 것인데, 자식을 놓아버리는 것으로 생각해버리는 거라.
대상에 대해서 투쟁하고 배척하려는 마음을 놓아버리라는 것이지, 대상을 놓아라는 것은 아니거든. 대상은 놓아질 수도 없는 거고.
항상 어떤 경우든지 편한 상태로써 해야 됩니다. '사띠'라고 하는 것은!
그래서 자연스럽게 그렇게 해야 되는 거라. 그래서 호흡도 자연스럽게 해야 되는 거고, 대상을 알아차리는 것도 자연스럽게 해야 되는 거고, 모르고 지나갔으면 아, 하고 후회하고 돌아서려고도 하지 마라. 그것도 탐진치를 일으키는 거라. 내버려 두라는 거라. 놓아버리고, 받아들이고 나서 또 다른 거 하면 돼!
이게 관찰 안 되면 뭐 어때? 그럼 그냥 놔버리고, 만약에 명칭을 붙여서 안 될 거 같으면 명칭을 놔버리라는 거라. 놔버리고 그냥 있는 그대로 보라는 거라. 그런 훈련들을 자꾸 하라는 거라.
그게 사띠들를 훈련하고 사띠로 인해서 번뇌를 제거하고 마음을 깨끗하게 하고 해탈에 이르는 첫 번째 길입니다.
반드시 사띠는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여야 됩니다.
그리고 항상 편안하고 고요한 상태에서 하는 습관들을 들여야 되고,
편안하고 고요하려고 할 것 같으면 대상 자체를 있는 그대로 관찰하는 습관들을 자꾸 들여야 됩니다.
이게 첫 번째 여러분들이 사띠에 대해서 이해해야 하는 부분들입니다.
다음 시간에는 조금 더 나아가서 사띠에 대해서 설명하도록 그렇게 하겠습니다. 질문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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